•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더공연~[연극/뮤지컬/오페라/발레/콘서트/전시회]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공연후기 스크랩 ***** 명품 뮤지컬 에비타
백서연 쌍둥맘 추천 0 조회 384 11.12.17 19:0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뮤지컬 에비타

Musical EVITA

 

사생아로 태어나 삼류배우를 거쳐 한 나라의 퍼스트레이디까지

 올랐던 에바 페론의 일생을 담은 <에비타>는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를 필두로

재즈, 미사곡, 합창곡 등 26곡의 뮤지컬 넘버와

탱고, 왈츠, 폴카 등 화려한 춤으로 무장한

화려한 볼거리와 탄탄한 스토리로

토니상 7개 부문 수상, 비평가협회상, 그래미상 등을 수상한 작품이다.

 

 


 

요새 영상매체에서도 홍보물이 엄청난 에비타

어떤 내용일지 너무도 궁금했답니다~

드뎌 오늘 에비타를 보러

LG아트센타로 바람을 가르고 달려왔습니다

 

발레 오네긴너무나 감동적으로 보았던

LG아트센타였는데

오늘 에비타를 보기위해서 두번째 방문합니다^^

아트 센타를 알리는 친절한 표시들을 곳곳에서 발견할수 있답니다

 

전용 엘리베이터도 있고요^^

이걸 타고 3층으로 쓩~

 

티켓팅하고 주차 정산을 미리해두는 센스

4시간에 3천원이랍니다

오늘 출연진을 볼까요??

정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분들이 주역으로 출연해 주시니

보는 사람 설레임 가득해 지는군요  

 이분들이 있어서 주인공들이 더욱 빛을 발하겠지요

센스가 돋보이는 작업을 해주셨네요

보는 관객들도 흐믓해 집니다

우리는 알권리가 있는 관객이니까요 ~ 두근

 

이런 계단까지 아비타를 얘기하고 있군요

 성녀인가? 악녀인가??

아비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1 막
1952년 7월 26일, 아르헨티나. 체 게바라가 영화관의 관람석에 앉아 있다.

영화가 멈추고 `아르헨티나의 정신적 지도자,

에바 페론이 세상을 떠났다`는 속보가 극장 안에 울려 퍼진다.

에바의 장례식은 장엄하게 치러지고 엄청난 조문 인파들은 구슬피 통곡한다.

체 게바라만이 장례식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시간은 1934년으로 돌아가, 배경도 에바의 고향인 주닌의 나이트클럽이다.

에바 두아르테는 이제 막 15세에 불과하다.

그녀는 출세를 위해 클럽에서 노래하는 탱고가수

 오거스틴 마갈디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한다.

 

에바는 곧바로 마갈디를 버리고

 명성과 부의 사다리가 되어 줄 만한 남자들을 찾아 전전한다.

 

그녀는 모델, 방송인, 영화배우로 성장해 나간다.

1943년, 군부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후안 페론 대령이 권력의 중심에 다가서게 된다.

 

 아르헨티나 지진 희생자를 위한 자선 공연에서

 에바와 페론은 처음으로 만나고 그들은 곧바로 서로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어떤 부분을 발견한다.

 

그때부터 정치적 스타를 꿈꾸는 에바의 야망은

 보다 뚜렷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페론의 아파트에서 그의 여자친구를 내쫓아버리고

 페론의 삶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한다.

특히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적대시했던 군부와 귀족에 대한 분노를

 페론에게 투영할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정치적 상황이 불확실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향한 집념은 페론보다

오히려 에바 쪽이 훨씬 더 강했다.



제 2 막
페론의 대통령 취임식 날(1946년 6월 4일),

카사 로사다의 발코니에 선 에바는 그녀의 야망이

드디어 성취된 사실을 깨닫는다.

 

군중들은 이제 페론의 아내가 된 에비타의 감성적이고 뛰어난 연설,

그리고 그녀의 매혹적인 외모에 열정적인 갈채를 보낸다.

체 게바라는 페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멀리 떨여져 있지 않은 일련의

폭력 사태를 경험하고, 그 사실을 설명한다.

 

체 게바라는 에비타에게

그녀 자신과 성공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만,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한다.

 

한편, 에바는 유럽 시장을 새롭게 열기 위해 유럽 방문을 계획한다.

유럽순방에서 귀국길에 오른 에바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회의

 계속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국내 업무에 전념하리라 마음 먹는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환영을 받지만,

프랑스, 스위스, 영국에서는 푸대접을 받는 수모를 겪게 된다.

 

 체 게바라는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겠다던 에바의 약속이

아무런 결실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에바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지만,

 졸속적인 회계가 문제가 되고 국가 경제에는

하등의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을 비롯해 재단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에게 있어

에바는 신적인 위치로까지 격상된다.

 

이제 에바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체 게바라의 비판적 시선이 무대를 지배한다.

그는 에바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조소를 보내고,

 다시 한번 에바의 솔직한 동기와

 페론 정부의 어두운 일면에 대해 질문한다.

 한편, 그녀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군부가 에바에 느끼고 있던 반감이 고조되고,

체 게바라는 페론 정부의 중요한 실책과 부패 사안들을 거론한다.

 페론과 에바는 악화되는 시국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사실 페론의 정부 장악력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과

마찬가지로 에바 역시 세력을 잃어가고 있다.

 

에바는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부통령이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군부의 반발이 워낙 거센데다, 병마마저 그녀를 쓰러뜨린다.

에바는 마지막 대국민방송을 통해 모든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발표한다.

 임종의 순간, 이미 그녀를 성인으로

 받아들이던 사람들은 엄청난 비탄에 빠져든다.

에바는 만약 자신이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를 자문하여 본다.

체 게바라는 그녀의 짧은 인생을 바라보며 또다른 결론을 내비친다.


(그녀가 죽는 숙간, 그녀의 병약한 육체를

미이라로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들어선다.

그러나…그녀를 위한 무덤과 묘비를 세우기 위해 돈이 모아졌지만,

단지 받침대만이 완성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17년 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생아로 태어나 삼류배우를 거쳐 

역사상 가장 어린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녀의 생애 정말 파란 만장합니다 

 

성공을 위해 몸을 팔아 남자를 이용한 창녀라고

손가락질 받고 무식하고 오만하다며

집권층으로부터 멸시를 받지만 뛰어난 미모와 화술로

유럽 사교계를 휘어잡고

노동자와 빈민의  벗으로 성녀로 추악받았던 에바 페론

 

끝없는 고음으로

천박한 욕망과 성스러움,순수함과 요염함을 오가며

팔색조의 매력을 한껏 뽑내었던 정선아님

폭발적인 가창력과 카리스마로

진정 국모의 위엄을 보여주셨습니다

강렬한 빽라이트로 희디흰 의상을 입고 고고하게 걸어나오는

아비타는 정말 완벽한 국모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당당한 걸음걸이 관중을 향한 거침없고 힘있는 연설

'돈트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 를 부를땐 정말 숨도 못쉬고

지켜보았답니다

그 관중속에 제가 있었다면 나 또한 열광하는 시민이중에 하나가 아니었을지~

 

아비타의 일생을 짧은시간에 표현하기에 빠른 스토리 전개로 지루할틈 없이

화려한 춤과 음악으로 귀와 눈이 호강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박상원님 연기력은 좋았지만

노래가 좀 딸리셔서 진정 후안페론의 존재감이

좀 떨어졌다는게 아쉽더군요

 

 나레이터역도 충실히 해내면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 혁명 지도자로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적 인물을 연기했던 이지훈님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넘치는 에너지로 무대를 가득 채워주셨네요

역시나 부라보~ 이지훈님

 

오늘 무대를 빛내주신 여러 배우님들

 

 

 

 

 

 

 

 

 

 

 정말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해주신 오케스트라 단원들

정말 부라보입니다 

 

 

퇴장하신줄 알았는데

공연내내 강렬한 빛을 쏘아주었던 팩라이트 속에서 그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에비타 역 정선아 리사
체 게바라 역 이지훈 임병근
후안 페론 역 박상진 박상원
마갈디 역 박선우


출처 : http://janus.netian.com/person/evaperon.htm

 

에바 페론(Eva Peron, 1919-1952)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 에비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퍼스트레이디 - 에바 페론

공화정 체제 아래에서 퍼스트 레이디(영부인)의

 역할은 때로 애매한 것이다.

과거 왕정 시대라면 사회적으로 낮은 여성의 지위에 비해

 왕후로서 직·간접적으로 정치 개입하는 등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겠으나

공화정 체제 아래에서 퍼스트 레이디라는 것은

다만 대통령 혹은 총리의 부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자국 국민에게 가장 많은

 사랑과 추앙을 받은 퍼스트 레이디는 누구일까?

육영수, 재클린 케네디, 엘리노어 루즈벨트!

나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에비타,

에바 페론이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그녀의 무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꽃다발을 헌화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녀는 그런 추앙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을까?
아르헨티나 로스 톨도스의 어린 소녀 에바 두아르테
에바 두아르테 - 사생아로 태어나 대통령궁에 입성하다

에바 페론(Eva Peron)은 1919년 아르헨티나의 대초원(팜파스)의

시골 마을 로스 톨도스(Los Toldos)에서

농장 주인과 농장의 요리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에바의 어머니는 자신이 일하던 농장주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다섯을 낳았는데 에바는 그 중 네번째 아이였다.

굳이 홍길동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설움이 많았을

에바 두아르테는 15세 때 옷 가방 하나만을 달랑 들고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무작정 상경한다.

그러나 서울역에 갓 내렸을 1960년대의 영자가 그러했듯이

 이 시골 처녀 에바에게도 낯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생활은 그녀의 고향집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지닌 강점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아야했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가 가장 강한 무기임을 알았다.

그녀는 삼류 배우나마 배역을 따기 위해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대초원에서 방목되는

육류와 곡물 수출에 힘입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1869년 이후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6.9%의 높은 수준이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전체 도시들 가운데 뉴욕 다음의 대도시를 자랑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만 하더라도 아르헨티나의

국민 1인당 GNP는 스페인·이탈리아·스웨덴·스위스보다 높았고,

 독일이나 베네룩스 3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엄마찾아 삼만리>에서 볼 수 있듯이 유럽 대륙 그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에서 많은 이민이 유입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유럽에서 온 이민 노동자들은 그냥 가족만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문화와 사상까지도 함께

신대륙 아르헨티나에 가지고 들어왔는데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등이 그것이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노동운동과

그동안 대지주들에 의해 억눌려 있던 민중들의

 요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페론주의의 등장과 아르헨티나

1916년 집권한 급진 시민당의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은

 최저 임금제 실시·최대 노동시간 제한 등 소외 계층을

위한 복지제도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고,

이런 정부의 대책이 미흡하다고 느낀

노동자들은 좀 더 많은 조건을 들이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대륙의 전쟁과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는 친독(親獨)적 중립을 지켰다.

 

후안 페론은 1930년대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유럽에서 발흥하고 있던 파시즘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1943년 6월4일 「통일장교단」이라고 자칭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군부내 소장파 장교들과

 함께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후안 페론은 군사 정권 아래에서 대통령이 수 차례 교체되는

가운데 국방부 장관·노동부 장관·부통령 겸 노동복지 장관 등을 거치면서

대통령을 능가하는 실권자로 성장했다.

정부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면서 그는 국가사회주의(Staatssozialismus)의

한 갈래(독일의 나치당도 같은 맥락이다)라고

할 수 있는 페론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에바가 후안 페론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의 나이 25세 때 그녀보다 나이가 2배 가량 많았던

육군 대령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밀히를 즐기다가

 곧 두 사람만의 은밀한 방을 구해 장기적인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에바는 힐러리가 빌 클린턴에게서 미래의 대통령 싹수를 발견한 것처럼

후안 페론에게서 미래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보았다.

그리고 힐러리가 그랬듯이 자신의 연인이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친독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미국은 전쟁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의 반정부 진영을

 고무하면서 민정 이양을 요구하도록 했다.

그 결과 파렐 발카르세 정권은 민정 이양을 약속하고,

강경파였던 후안 페론을 구금한다.

 후안 페론이 연금당하자 타고난 미모와

달변을 가진 에바 페론을 비롯한 페론의 추종 세력들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페론 석방운동을 벌였고,

밤낮없이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사주하여 마침내

 노조 총파업을 유도해내면서 후안 페론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해준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준 정부(情婦) 에바에게

새삼 사랑과 신뢰를 느낀 후안 페론은

죽는 날까지 함께 하기를 맹세하고 결혼한다.

페론은 1946년 2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54%의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은 기존의 지지 세력이던 군부·교회는

물론 노동조합의 지지까지 확보하고,

노조 지도자 등 각 부문별 이익 집단의 대표들을 각료로

기용하는 등 집권 초기 강력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페론은 집권 후 페론주의를 내세우며 외국자본의 추방,

기간 산업의 국유화 등을 추진하며 자립노선을 추구했다.

또한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동 입법 추진,

노동자 생활 수준 향상,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

시민적 지위 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이었다.

그는 취임 후 5개년 계획을 수립, 공공사업·

교육 개혁·사회 개혁 등을 추진했다.

에바 페론·페론주의의 영광과 실패

페론의 정책은 대외 자립·공업 발전·

사회 정의 추구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독립 이후 아르헨티나의 주요 산업이었던

농·축산업에 의존하던 아르헨티나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고,

공업화를 추진하여 진정한 경제 자립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페론은 외국인 소유의 철도·전화 회사들을 국유화하고,

1947년 7월에는「경제독립」을 선언하면서 모든 외채를 청산했다.

 페론이 노동자들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노동입법을 추진한 것도

그 이면에는 노동자 계급의 소득 향상을 통해 내수를 진작시켜

아직 미약한 수준의 국내 공업 발전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페론이 집권 초기에 이렇듯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식량 수요 증가로

농축산물의 수출이 늘어나면서 벌어들인 외화 덕분이었다.

 이런 호황 속에서 추진된 개혁 입법들은 퍼스트 레이디였던

 에바의 입김 속에서 추진된 일들이었고,

노동자와 여성, 빈민들은 그녀를 성녀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이 아름답고 총명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우호적인 그녀에게 열광했고

적극적인 지지와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페론의 공업화 정책은 레닌이 러시아에서

추진했던 중공업 정책과 달리 수입 대체 전략에

기초한 경공업·소비재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본재 수입의 증가로 외환 사정을 다시 악화시키고 말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 페론주의와 아르헨티나는

점차 독재의 얼굴을 드러내게 된다.

1948년에 이르자 페론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정의주의(Justicialismo)」라고 포장하면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반대 세력에게는 유·무형의 압력을 가했다.

1951년에는 「정의주의 학회」라는 것을 만들어

정권 홍보에 나서도록 하기도 했다.

에바 역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사랑을

이용하여 남편과 자신을 포장해나갔고,

대중이 원하는 것들을 즉흥적으로 선사하기도 했다.

에비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서

학교, 병원, 고아원을 단기간에 전국에 건립했고,

 그녀의 이름을 딴 병원 기차가 의료장비를

 싣고 전국을 누비면서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또한 에비타 재단은 지진 등 재해를

당한 나라에 거금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콜롬비아,

 에콰도르 같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도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적 정책 덕분에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런 위세를 등에 엎고,

 심지어는 초등학교에서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는 글짓기 숙제를 하도록 했으며,

스페인어 수업 시간에는 에바의 자서전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하기도 했다.

퍼스트레이디에서 퍼스트 퍼슨을 꿈꾼 에바 페론
에바 페론은 단순히 퍼스트레이디로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데 상징적 존재에 그치지 않고,

정계의 핵심 요직에 올라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에 오르고자 애썼다.

1951년 대선에서 유권자의 67%의 지지를 얻어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재선되자 노동자총연맹 등의 단체가

에바 페론을 부통령 후보로 옹립하려다 군부와 마찰을 빚었다.

부통령 지위에 오르고자 했으나

군부의 반대로 실패하자 대신에 정부의 주요 요직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며 자신의 정적이 되었거나

 그럴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비밀리에 체포·고문하여

심지어는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독재의 칼날을 휘두를수록 이들

부부는 점점 더 자신들을 조여오는 반항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군부를 강화함으로써 권좌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군부도 이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 징후는 1951년 9월 군부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면서 드러났다.

전후 호조를 보이던 농축산물 수출도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자국의 농축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미·영 등이 아르헨티나산 농축산물의 수입을 제한하고,

아직 선진국들과 경쟁할 만한 단계에 오르지 못한

아르헨티나의 공업 수준과 경공업 중심의 경제 개발 정책에서

중공업 중심 전환 과정의 혼선 등이 가중돠면서

 자본재 수입이 증가되면서 외환 사정은 더욱더 나빠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르헨티나를 어렵게 만든 것은

과거 식민지 시절부터 뿌리깊었던

 지배 계급의 유럽 문화 선호 경향

 

(라틴 아메리카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도

이들의 유럽 문화 선호 경향은 두드러진 특징이다.

 심지어 아르헨티나의 뒷골목에서 건달들이 추던 탱고는

 오히려 본고장이랄 수 있는  아르헨티나에서는 오랫동안 상류층에

 의해 배척되던 음악(춤)이었으나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키자

 역수입되어 지금은 아르헨티나 상류층이 즐기는 음악이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탱고 음악이 원래 태동 당시부터 지니고 있던

상류 계급에 대한 풍자와 조롱 등의 반문화적인

 요소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거세되었다.)

 

과 함께 골수까지 배인 사치와 무책임,

정치인들의 무능과 부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아르헨티나 국민과 함께

고통을 나누려 하지 않았고,

페론 정권의 시혜적인 사회복지 정책은 개혁적이어야 할

 노동자들을 당장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마비되도록 했고, 그들을 중독시켰다.

혹자는 에바 페론의 진보적 여성 정책들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 시민적 지위 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 -

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여성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그녀가 일조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에바 페론이 반드시 그런 의식을 가지고

여성의 권리를 향상시켰다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여성 운동 확장과 여권 신장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면서도, 결국 그렇게 해서 달성된 결과물들을

자신의 남편인 후안 페론에의 충성으로 귀결시켰다.

그녀는 틈만 나면 여성 당원들에게 이렇게 강론했다.

"여러분, 남자는 지성을,

우리 여성은 감성을 투쟁에 바쳐야 합니다.

지성과 감성을 모두 합하여 보다 정의롭고 보다

행복한 최상의 조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페론 장군을 우리는 적극 지지해야 합니다.

우리 여성은 남녀 모두 뭉쳐야 하기 때문에

남자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의 이런 여성운동은 결국 가부장적 권위에

복종하는 여성상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었고,

자기 자신이 그런 전형적인 모델이고자 했다.

 국가사회주의 하에서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한 운동은

 종종 이런 모순을 빚어내곤 한다.

(나치 정권 하의 독일에서 벌어진 일들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저물어가는 에비타의 영광, 꺼지지 않는 신화
일명,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을 표현하는 말 중에서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라는 말보다

그녀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녀를 아르헨티나의 독재에 봉사하였고,

노동자·빈민계급을 마취시킨 악녀라고 비난하기에는 실제로

그녀가 행한 수없이 많은 초인적인 봉사와

헌신들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녀는 가진 자에게는 더할 수 없이 표독한 영부인이었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자상한 나라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그녀의 이런 모순된 삶의 동력을

그녀의 출생과 살아온 경로가 순탄치 않았고

그 와중에서 그녀 역시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가슴에 아로새긴 탓이라고 보고 있다.

 

그녀는 다른 대통령의 영부인들이 그러했듯이

단순히 의전행사의 들러리 역할에 멈추지 않았고,

후안 페론을 대통령의 직위에 오르게 했으며

그를 여러 차례의 정치적 위기에서 구해냈고,

그의 정치 철학의 상당수를 입안해낸 장본인이었다.

에바 페론은 국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수많은 일들을 초인적으로 처리해갔다.

수없이 많은 모동자, 빈민, 여성들을 만났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었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그들을 조직화하여 남편의 정치적 동지가 되도록 했다.

그러나 하늘은 에바 페론의 영광을 시기했을까,

계속되는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의 악화는 더이상 소외계층의

 근본 모순은 방치한 채 임시방편의 사회복지정책으로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그리고 이런 악조건 하에서 고군분투하던 에바 페론은

 1952년 척수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쓰러지고 만다.

이때 그녀의 나이 34세였고,

후안 페론을 만난지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큰 국장으로 한달 간 성대히 치러졌다.

「페론주의」의 「상징」이었던 에바가 사망하자

후안 페론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후안 페로은 어려워진 국내 정세를

외교의 강화 및 외자 유치를 통해 풀려고 했다.

 그는 1952년 5월 「라틴아메리카 노조기구(ATLAS)」를 결성하며

페론주의를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수출하고자 했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가톨릭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에 해방신학만 존재한다고 믿으면 큰 착각이기는 하다.

라틴 아메리카는 또한 보수신학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페론은 가톨릭교단이 노동문제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이던 성직자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에비타마저 사라진 와중에 후안 페론의

이런 조치들은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정권 장악 이후 줄곧 추진하던 경제 자립 노선을 포기하고,

1955년 광공업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외자 유치 전략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런 급작스러운 외자 유치 전략은

외자가 도입되면 자신들의 입지가 불리해질 것을

염려한 노동자들의 불안을 자극해 폭동이 벌어진다.

해군 항공기가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등

믿었던 군부마저 페론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리고 1955년 9월 로나르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하여

 스페인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에도 사그라들 줄 모르는

에비타의 신화를 두려워 한 군부는

그녀의 시신을 훔쳐 멀리 이탈리아로 옮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론주의자,

노동자들과 여성들이 군부에 압력을 넣어

그녀의 시신을 당시 마드리드에 망명 중이던

후안 페론에게 넘기도록 했다.

후안 페론은 비록 실각했지만,

그것으로 아르헨티나 정치 상황이 안정을 되찾게 된 것은 아니었다.

 페론주의의 실체는 결국 "실질적으로 지배 계급이 지속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채 국부를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듯한 정책"이었다.

 본질적으로는 점차 고조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잠시 동안의 사탕발림으로 피해보자는 것이었다.

페론이 실각한 뒤로도 아르헨티나의 정치인들은

페론 시대의 손쉬운 인기영합정책을 버리지 못했고,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페론과

에비타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했다.

아르헨티나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기는 했으나

그들 자신도 앞으로의 아르헨티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야 할 지에 대한 비전은 갖지 못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노동자와 빈민 등 소외 계층은

'성녀 에비타'에 대한 신화를 덧칠해갔고,

아르헨티나의 정치인들은 에비타를 끊임없이 이용하려

들면서도 동시에 그녀를 부담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들어 잇따라 들어선 군부 정권들은

이웃한 경쟁국인 브라질의 군사정권이 개발 독재를 통한 경제적 성공을

 이룩하자 자신들도 그러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브라질의 성공이 잠시였듯이 아르헨티나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비전도, 산업기반도,

노동자들을 흡입할 수 있는  매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남미에도 혁명의 기운이 북돋아지기 시작하며

 쿠바 혁명에 고무된 많은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좌우익간의 격렬한 소요가 거듭된다.

베트남전의 깊은 수렁에 빠진 미국 역시

이런 남미의 분위기에 위기 의식을 느꼈고,

 결국 1972년 11월 78세의 페론이 50여만 명의 지지자들에게

열렬한 환호 속에서 귀국하게 된다.

이듬해 9월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62%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고,

에비타 사후에 재혼한 그의 부인 이사벨 페론은 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페론의 복귀는 일시적인 평온은 가져왔으나

그 역시 아르헨티나의 오랜 부패와 왜곡된

경제 구조를 개혁할 수 있는 역량은 가지지 못했다.

그의 집권기간 중에도 소요와 폭동은 계속되었고,

결국 1974년 7월1일 페론은 사망하고 만다.

부통령이었던 그의 아내 이사벨 페론은 결국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얻기는 했으나

애초에 그녀에게 어떤 정지적 식견이 있으리 만무했다.

이사벨 페론은 후안 페론의 전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의 시신을

대통령궁에 옮겨 놓으며 자신이 에바 페론의 계승자임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했으나 그녀는 에바가 아니었다.

결국 1976년 라파엘 비델라 장군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이사벨 페론 정권은 21개월 만에 붕괴하고 만다.

다시 한 번 페론 정권을 붕괴시킨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당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불어닥친

 레드 헌트(Red Hunt)에 앞장서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투옥하고 학살하여 아르헨티나 민중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군사정권 기간 중 살해되었거나

실종된 사람의 수는 최소 1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민을 침묵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군사 정권이 사회 체제를 개혁하거나 경제 성장에 이바지하지는 못했고,

이런 내치에서의 어려움을 외부의 성공으로 돌리고자 했던

 아르헨티나 군부는 경제적 위기에 빠진 영국 정부와 대처 수상이

 포클랜드를 수비할 능력이 없다고 오판한 나머지 1982년 포클랜드를 침공한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의 암묵적 지원을 등에 엎고

 전쟁에 나서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다.

패전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민정 이양에 나선다.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개혁파 페론주의자를 자처하고 나서

 당선된 사울 메넴 대통령은 신자유주의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양 내세우며

 외채 탕감을 위해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국영 기업들을 해외 자본에 팔아치운다.

 

그러나 메넴이 팔아치운 아르헨티나 국영기업들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는

아르헨티나의 국고를 채우지 못했고, 정치인들의 개인금고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르헨티나 대다수 국민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헤매고 있는 동안 아르헨티나의 특권 계층은

해외 금고로 빼돌린 자금을 이용하여 별장을 치장하고  

해외여행을 통해 사치품을 사들였다.

 

이 모든 원인이 에바 페론과 페론주의에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에비타 에바 페론의

아름다운 환상에 젖어 있는 동안

아르헨티나는 새로운 개혁에 나설 수 있는 시간을 잃어 버렸고,

뒤이어 들어선 군사 정권들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엄청난 유혈을 강요하여 개혁의 동력이  될 비판적 세력들을 궤멸시켜 버렸다.

이사벨 페론 정권이 붕괴한 뒤 
새로 들어선 정부는

 에바 페론의 시신을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 묘역으로 옮겼다.

에바 페론이 죽은 뒤 24년만에 찾은 평온이었다. ㅁ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