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다가 깨져서_김종상
바다가 깨어져서
어물 시장의 그릇에 담겼다
물이 담긴 그릇들은
깨어진 바다의 조각들이라
바다에 살던 식구들도
깨진 바다 조각에 와 있다
커다란 수조 조각에는
문어들이 따라와 누웠고
조그만 바닷물 함지에는
밤게가 술래잡기한다
아담한 바닷물 동이에는
조개가 뽈그락대는데
조그만 바닷물 양재기엔
새우들이 뜀박질을 한다
그릇의 크기에 맞춰
바다의 깨진 조각이 담기고
깨진 조각 크기에 맞게
바다 식구들이 함께 와 있다.
동시집『세상 알아 가기』가꿈(2025,10,30)
2.
백열등_박해경
집을 나간 삼촌이 돌아왔다.
할머니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고모는 보고 싶었다면서
밥상을 차려주고
할아버지는
돌아앉아 TV만 보고 있다.
엄마는
벗어 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놓으며
대문밖에 켜놓은 불을 껐다.
해가 지면 매일 켜지던
백열등 하나가
오늘 밤 깊은 잠을 잘 수 있겠다.
동시집 『내 이름은 기다려』 초록달팽이(2025,10.27)
3.
먹는 게 아니라_성정현
요리조리 나뭇잎을 살피는
애벌레
입 크게 벌리고
잎을 먹다가
고개를
가우퐁가우퐁
그러고는 다시
잎을 갉아먹는 중
나뭇잎은 뚝딱!
자전거가 되고
물고기가 되고
애벌레는 지금
조각 작품 만드는 중.
동시집『까부는 바람』 고래책방 /2025,7,31
4.
포개포갬_양인숙
책상에 책들이
포갬포갬
옛 이야기 들려주고
이불장에 이불들이
우리들의 사랑을 감싸 주고
돌탑에 돌들이
역사가 되어주고
따로따로 있으면이리저리 나뒹굴겠지만
서로 기대면
천 년도 버틸 수 있다.
《열린아동문학》 2025. 가을
5.
젖니_이순임
침샘에서 흘러넘친
생수
간질간질한
잇몸에 뿌려
키워낸
떡잎!
_동시집『꽃잎 주머니』, 청색종이, 2025.
6.
초록 블랙홀_연지민
매미도
쓰르라미도
영역 싸움하던 참새와 멧새도
나무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햇빛도 바람도 다 먹고
몸집을 크게 부풀리더니
엄마를 쏙쏙 빨아들이고
나를 쏙 빨아들인다
느티나무로 변장한
저, 초록 블랙홀!
동시집『숫자 3은 깨지기 쉬워요』 놀북(2025,9,90)
7.
어떤 연필_유미희
난
한 시인 옆에서만 살았어.
밤늦도록
또각또각 일을 했지.
원고지 빈 밭에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동시나무들
꾹꾹 눌러 심었어.
지금 네가 만난 동시나무가
그 중
한 그루일 수도 있지.
충남아동문학회 연간집(48집) 『할아버지 장난감』 2025.
8.
저수지는 이미 봄_ 이정석
꽃샘추위에
아무리 찬바람이 불어댄다고 해도
낚시꾼들이 미끼를 던지기 시작하면
저수지는 이미 봄
물총새 날아오지 않더라도
수면 위로 햇살이 부서지기 시작하면
물가 버들개지에
촉촉한 물기가 올라오지 않더라도
저수지 물속에 은빛 붕어 비늘이 반짝이면
《크레파스교실 (2025 별밭 동인시)》 2025
9.
옷_최영재
스카우트 복장을 하면
나도 모르게
엄마, 아빠에게 존댓말을 하지.
새로 산 옷을 입으면
손과 말이 공손해지지.
학교에서 돌아와 집 옷으로 갈아입으면
나도 모르게 우당탕!
이 방 저 방 뛰어다니지.
동시집 『바람의 입술』아침 마중(2025,10,20)
10.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기_하청호
어머니는 말했지요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맛있는 군것질로부터 도망치기
재미있는 놀이로부터 도망치기
컴퓨터게임으로부터 도망치기
그보다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가장 어렵다고 했지요
내가 도망치는 힘이, 좋아서 끌리는 힘보다
턱도 없이 약하니까요
어머니가 말했지요
그때는 그 사람
마음속으로 도망치면 된다고 했어요
동시집 『내 입속에는 휘파람새가 산다』 브로콜리숲(2025,10.23)
출처: 한국동시문학회공식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시향
첫댓글 한국동시문학회에서 선정된 동시 작품을 쉽게 만날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속으로 도망친다는 표현을 보면서 한참 생각하게 되네요. 늘 좋은 자료 공유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첫댓글 한국동시문학회에서 선정된 동시 작품을 쉽게 만날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속으로 도망친다는 표현을 보면서 한참 생각하게 되네요. 늘 좋은 자료 공유해 주셔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