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청함의 날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마태 7,7-8
측은지심 ( 惻隱之心) 은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이들을 애처로운 마음으로 위로하려는 마음입니다. 누구나 측은지심 을 가지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에서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들에게, 특히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당신 측은지심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으로 간난의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무엇에서 측은지심이 드러나는지요? 어느 누구에게 그 측은지심이 발하는지요? 측은지심이 생길 때, 나는 그 대상을 어떻게 맞아들이고 또 대처하는지요? 나의 뜻에 반하는 이게도, 설사 내게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누구나 상대의 어려움과 고통과 간난에서 측은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고 해서, 상대의 곤궁을 덜어주려는 것을 못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측은지심을 주었지만, 측은지심을 아예 지나치고 살아올 수 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애시당초 측은지심을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 모두에게 그 당신의 자비의 마음, 측은지심을 주셨지만, 그 측은지심을 잃은 사람들은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측은지심이 전혀 없는, 무지의 사람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 입니다.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나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합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종기 투성이 라자로가 몸져 누워있었습니다. 개들까지 와서 종기를 핥았습니다. 그는 부자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롤 배를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부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자기 대문을 오고가면서 아픈 거지 라자로를 보았을 것이고, 자식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와 자식들은 그를 바라보지 못한 채 지나갔습니다. 그들의 눈이 닫혔던 것입니다. 곧 가족 모두가 측은지심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루카 16,19-21 참조).
하느님께서 주신, 그 측은지심, 그 측은한 마음을 마음에서 그립니다. 그 측은지심으로 살도록 기도합니다. 허물이 많고 부끄러운 우리에게도 그 측은지심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도 그 측은지심이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습니다. 사제나 레위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다른 길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이 살아난 것은 측은지심을 지닌, 사마리아인 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모세 전통은 지켰으나, 측은지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측은지심으로 말씀을 전하시고 치유하시고 고쳐주었습니다. 마귀들을 쫓아내고 거룩한 성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오늘 월요일 청함의 날입니다. 측은지심은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입니다. 그 측은지심으로, 그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드님을 죄로 죽을 인간들을 위해서 파견하시고 멸망할 인간을 위해서 당신 아드님 마저도 죽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측은지심의 사랑으로, 모든 세대 인간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잊혀지는 측은지심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그 측은지심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 측은지심이 단지 마음의 위로의 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만남과 배려로 이어지도록 노력합니다. 그래서 그를 일어서게 하고 살립니다. 그런 구체적인 측은지심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람을 살리는, 측은지심의 실천을 봉헌합니다.
주님, 오늘도 측은지심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그 기도가 측은지심의 삶으로 실천으로 살게 하소서.
이재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