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입대하여 종교활동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개신교 경우 웬만한 부대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어 사병들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 경우 주로 사단중심 지역 성당이 있어 다른 외곽 지역 사병들이 성당에 나간다는 것은 어렵다. 설령 있다고 해도 각 부대 지휘관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1982년 12월 논산 육군 훈련소로 입대하였고 훈련소 내 군종 성당에 처음 가본 곳은 몇 주 지나서 가보았다. 많은 군인들이 미사 드리러 왔다. 그날 눈물 펑펑 흘러내렸다. 훈련소서 나와 강원도 인제 현리부근 내린천이 흐르는 용포교 다리 옆 대대급 통신부대로 배치받아 본격적인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그만 더 올라가면 군단 본부가 있다. 그런데 내부대는 군단 소속 부대가 아니고 1군 사령부 직할 부대였다. 군복에 부착하는 마크가 다르며 밖에 나가면 누구나 어느 부대 군인임을 금방 알게 된다. 부대장은 사병들의 면회 이외 외출 외박 허락 해주질 안 했다 사병들이 일탈 행위 시 부대 이미지를 실추 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개신교 종교활동은 예외였다. 개신교신자 사병들은 진중버스타고 인근 다른 군부대서 예배를 보았다. 부러움을 느꼈고 냉담 아닌 냉담자가 되었다. 상병땐 일부로 2번 정도 거기서 예배를 보았다.
상병시절 부대장이 바뀌었다. 부대장은 개신교 신자였고 형평성을 고려하여 불교 천주교 신자 사병들도 종교활동을 허락해 주었다. 활동이라는 것은 부대 내에서 신자들끼리 부대 같이 모여 기도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단 2명만 모여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나가서 미사에 나가게 되었다. 물론 불교신자 사병들도 마찬가지였다. 현리에 성당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 외출하여 나간 날 성당을 못 찾아 법당으로 가는 일도 있었지만 다음엔 성당을 찾았고 계속 일요일마다 나가서 미사를 드렸다. 당시 신부님은 군종신부님이셨고 사병 학사님 1분이 계셨다. 미사시작 전 사병 군인이 신자들에게 성가연습 지도를 하였다.
성당 가기 전 시간이 있어 사병들은 다방 가서 차 먹었고 그때 마침 DDD시외전화가 개통 되어 사병들은 비싼 통화료 내고 집에 전화했다. 난 공중전화로 전화 걸어 어머니 목소리를 들었다. 다방에만 있을 수 없어 명찰 제작가계에 가서 양해 구해 신문 보았고 성당에 갔다. 꿀맛 같은 시간 마치 날개옷 입고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대 특성상 종교활동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첫 번째 농촌이라 교통 수단이 열약했다 버스가 있다고 하나 드문 드문 있었다. 부대서 성당과 절까지 거리가 장장 6KM였다. 걸어 다니던 버스를 터던 눈치껏 해야 했고 부대에서 교통수단을 지원해 주지도 않는다. 갈 때 올 때 대대원들이 함께 움직였으며 올 때 방태산이라는 산길을 통해 걸어와야 했기에 정해진 시간 부대에 복귀를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군단 지역 내에서 사병들의 행동이었다. 모처럼 밖에 나오면 긴장감이 풀어진다. 일요일 아침 어느 날 당직사관이 종교 활동 가기 위해 나온 병사들에게 한소리를 하였다. 종교핑계로 나가서 다방 또는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신자가 아닌데 신자인척 가는 게 아니냐고 니들 행동이 부대로 다 들려온다고, 다방레지들이 누군지 아느냐고 보안대랑 연결된어 누가 다녀갔으며 대화 내용까지 보안대에게 말한다고. 그 소리에 나도 깜짝 놀랐다 전역직전 마지막 일요일 성당 갈려고 우선 중대 당직사관에게 보고 하였더니 가지 말라고 하였고 무시하고 당직사령관에게 신고하러 갔더니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보내주질 안 했다. 아마 이런 사유가 아닌가 짐작해 보며 다음 일요일에 사병 신자들이 종교 활동 하였는지 모른다. 군인으로서의 마지막 미사인데 아쉬움이 컸다.
세 번째 워낙 추운 지역인지라 눈이 잘 오는 지역이다. 겨울이 길다. 눈이 평일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 꼭 토요일 저녁에 잘 온다. 일요일 아침 부대원들은 제설작업을 하지만 성당 때문에 제설작업을 하질 안 했다. 부대 도착하면 어느 정도 끝난다. 주번하사가 내동기고 제대 얼마 남지 않기 때문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등병 일등병 신자들이선임 눈치에 어려움이 있다. 모두가 제설작업에 고생하는데 후임병이 열외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열외시 선임병한테 얻어맞을 수 있다. 그때 갓 전입한 이등병 신자 있었지만 데려가질 안 했다.
네 번째 불교 믿는 사병들과 같이 행동에 어려웠다. 어느 날 불교 측에서 사병들을 위해 점심식사를 제공한다고 부대로 연락이 왔었고 부대에선 특별히 점심 먹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천주교 사병들이 법당 가서 먹는다는 것 껄끄럽다 주님의 섭리인가. 공교롭게도 성당서도 사병들에게 점심 제공을 해주었다. 사제관서 신부님 학사님 모두 함께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사제관 거실을 쭉 구경하였으며, 군종신부 환영패를 보았고 이것저것 신기하게 보았다. 끝나고 불교 신자사병들과 함께 나와 부대에 잘 복귀를 하였다. (부대에서는 모두 법당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었음) 그리고 군종신부님의 성함을 알게 되었다. 조환길 타대오 신부님 (현 대구대교구 대주교) 이셨고 계급은 대위였다.
제대한 지 40년 지났지만 생생한 그 시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는다. 오래전부터 현리를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가보질 못했다. 다른 부대에서 근무했던 누구에게 들었는데 근무했던 부대가 이전하였다고 한다. 다음에서 지도를 검색하니 완전히 변했다. 4차선 도로확장과 많은 건물들이 생겨났고 주변 소로도 변했다 현리성당을 검색해 보니 옛날 모습이 아니었다. 휴가 나와 서울까지 가는 길은 살벌한 철정 검문소를 통과 홍천 팔당댐 주변 양수리 양평 구리 거쳐 서울 상봉동 터미널까지 갔다. 몇 년 전 직장시절 양구를 갈 기회가 있었는데 상봉동서 안 타고 양평까지 경의중앙선 전철 타고 홍천 가는 버스를 탔으며 홍천서 양구행 버스를 탔다. 올 때는 서울 양양 고속도로로 해서 왔으며 모든 교통망이 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옛 추억을 살리면서 기존도로로 현리까지 가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현리성당서 미시를 드리고 싶다. 인터넷서 길을 검색도 해보고 대중교통망을 찾아 보있지만 열약함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간디고 다짐해 본다. 또 다른 바램이 있다. 대구서 대주교님이 집전하는 미사참례를 통해 음성을 들으며 먼말치에 서서 뵙고 싶다.
첫댓글 나는 4세 때에 해병대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군 성당에 갔는데 그때 개신교 군목실에서는 천막을 쳐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보고
성당 에서는당시 외국신부님이라 그런지 서양 건물로 멋있게 지어있었고 라틴어로 미사를 했다
그래서 미사를 본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