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 2년 실거주 백지화 1주일
정부와 여당이 지난 12일 재건축 아파트 2년 실거주 규제를 전면 백지화하자 서울 일부 재건축 단지에서 일주일 만에 전세 매물이 배(倍)로 늘고, 전셋집 호가(呼價)도 수천만~1억원씩 내리고 있다. 작년 6월 정부의 규제 발표 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낡은 재건축 아파트에 들어와 살려고 미리 세입자를 내보낸 집주인들이 규제 철회 소식에 전셋집을 다시 매물로 내놓으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촌. / 뉴시스
아직은 서울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이번 정부가 강행한 불합리한 부동산 규제만 없어져도 주택 시장 안정에 속도가 붙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작년 7월 개정한 주택임대차법 등 전·월세 시장을 왜곡하는 규제를 이제라도 없애야 서민 주거 안정을 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20일 부동산 빅데이터 업체 ‘아실’에 따르면, 이날 기준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전세 매물은 163건으로 1주일 전(72건)보다 126% 늘었다. 단지 내 A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새로 나온 전셋집은 대부분 집주인이 실거주 규제를 피하기 위해 최근 1년 사이 입주했거나 전입신고만 하고 비워둔 집”이라며 “비어 있던 집 소유자는 주로 지방 거주자”라고 말했다. 같은 이유로 마포구 성산동 ‘성산시영’은 전세 매물이 1주일 전 22건에서 40건으로 늘었고,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6단지’도 20% 정도 증가했다.
매물이 늘면서 무섭게 치솟던 전셋값도 내리는 분위기다. 은마아파트 전용면적 76㎡ 전세 호가는 이달 초 8억원대 후반~9억원 정도였지만, 실거주 규제가 없어진 13일 이후엔 7억원짜리 급매물이 여럿 등장했다. 6월 전세 실거래가 중 최저 금액(7억5000만원)보다도 5000만원이나 낮다. 성산시영 역시 전용 50㎡가 이달 17일 3억3000만원에 거래됐는데, 최근 2억6250만원짜리 전세 매물이 나왔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일부 재건축 단지의 전셋값 하락은 매물이 늘면 가격은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수요·공급 법칙’을 재확인한 것”이라며 “1주택자 실거주 요건 강화나 주택임대차법을 이전처럼 되돌린다면 전·월세 시장 안정에 크게 도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산시영 전세 매물, 1주일새 22건→40건
서울 종로구로 출퇴근하는 김모(47)씨는 8년 전 분양받은 경기도 화성의 아파트로 이사해야 하는지 고민 중이다. 양도세 장기보유 특별공제 혜택(최대 80%)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이 ’10년 거주'로 바뀌어 올해부터 시행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1주택자로 투기를 한 것도 아닌데, 직장 때문에 서울 전셋집에 산다고 벌금 같은 세금을 내야 하는 건 억울하다”고 말했다.
전세 매물 속속 나와 - 20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에 매물 시세를 알리는 광고가 붙어 있다. 지난 13일 정부와 여당이 재건축 조합원 2년 실거주 규제를 전면 백지화하자 호가를 수천만 원 이상 내린 전세 급매물이 속속 나오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울산 지사로 발령받은 이모(40)씨 역시 1주택자 실거주 요건 때문에 ‘주말 부부’가 됐다. 그는 “온 가족이 이사할까도 생각했지만, 서울 아파트 실거주 기간을 채우기 위해 가족은 서울에 남았고, 울산에 얻은 오피스텔 월세를 내느라 살림살이가 더 팍팍해졌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이 “전세난만 부추긴다”는 여론에 밀려 재건축 2년 실거주 규제를 없앴지만, 전문가들은 “부동산 시장을 왜곡하고, 집값·전셋값 상승을 부추기는 규제가 아직 넘쳐난다”고 지적한다. 1주택자도 실거주 의무를 강화해 거액의 양도세를 물리고, 보유 자산 규모에 상관없이 다(多)주택자에게 징벌적인 세금을 매긴 탓에 전셋집 공급 부족이 장기화하고 있다. 작년 임대차법 개정으로 기존 세입자들은 전셋집에 2년간 더 살 수 있게 됐지만,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전셋값이 2배 차이가 나는 ‘이중 가격’ 현상이 보편화했다. 기존 세입자도 ‘2+2년’ 계약이 끝나면 수억원 오른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쫓겨날 판이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입주 가능한 새 아파트를 단기간에 대량으로 늘릴 수 없다면 불필요한 규제를 하루빨리 풀어야 전세난을 완화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