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 순례길 3코스 일치의 길
탐방코스 :[중림동 약현성당~(도보 50분)~당고개 순교성지~(도보 30분)~새남터 순교성지~(도보 1시간30분)~절두산 순교성지~(도보 50분)~노고산 성지~(도보 50분)~용산예수성심신학교~(도보 30분)~왜고개성지~(도보 3시간, 차량 이동 30분)~삼성산 성지]
거리 : 29.5km
소요시간 : 7시간20분
서울의 대표적인 순교성지들을 잇는 이 길은, 순례자들 모두가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실천하자는 취지로 ‘일치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당고개 순교성지, 첫 외국인 선교 사제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첫 한국인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 순교성지를 지나 한강을 마주합니다. 한강 변을 따라 많은 순교자의 목이 잘려나간 절두산 순교성지를 지나면, 이 길은 순교자들이 매장되었던 노고산, 왜고개, 삼성산 성지로 이어집니다.
순교자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지들을 순례하는 여정을 통해 진정으로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실천하는 모습은 무엇일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중림동 약현성당
서울시 중구 청파로 447-1
중림동 약현성당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 100년의 역사를 대변하는 성당이며, 한국천주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 온 순교 성인들 가운데 44명의 성인이 탄생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주변에 세워진 성지 순례 기념 성당이다. 성당 근처에 이승훈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 신유·기해·병인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과 가까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므로 이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1991년 김수환 추기경이 주례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복식에서 약현성당이 서소문 성지 순례 기념 성당임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를 통해 무관심에 방치되어 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새로운 관심과 기대 속에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중림동 약현성당은 순교자들을 더욱 현양할 수 있는 성지 순례 기념 성당으로서 면모를 갖출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본당 안에 서소문 성지 순례자들을 위한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 마련된 기념 성당과 전시실에는 성인들의 유해와 함께 선조들이 사용하던 유품, 교리서와 성서를 비롯한 다양한 교회 출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 당고개 순교성지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139-26(신계동 56)
용산 당고개(堂峴)는 1839년(헌종5년, 기해박해) 12월 27-28일(음) 이틀간 10명의 교우들이 순교했던 곳이다. 당시 설을 앞두고 대목장에 방해받지 않으려는 상인들의 요청으로, 서소문 밖에서 한강 가로 나아간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27일에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 권진이 아가타, 이경이 아가타, 손소벽 막달레나, 이인덕 마리아,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 7명이, 다음날에는 홍영주 바오로, 최영이 바르바라, 이문우 요한 3명이 순교하였다.
한편, 증언에 따르면 1846년 9월 16일(헌종 12년, 병오박해) 최초의 조선인 사제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로 향한 참수 길에 잠시 쉬어 갔던 곳이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0명의 순교자 중 9명을 1984년 5월 6일에 시성 하였다. 어린 자식들 때문에 한때 마음이 약해져 배교했던 이성례는, 뒤늦게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다. 1986년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성지로 조성되었으나, 2008년 아파트 건립 공사로 기념비는 철거되었고, 주변이 정리된 2011년, 신계 역사공원 내에 ‘찔레꽃 아픔과 매화꽃 향기 가득 찬 어머니 성지’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3. 새남터 순교성지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8
새남터 순교성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열네 명 가운데 열한 명이 순교한 곳으로 이 가운데 여덟 명과 교회 지도자급 평신도 세 명이 성인 반열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이곳에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부터이다. 주 신부가 입국한 지 6년만인 1801년(신유박해), 자신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생기자 주 신부는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가, 7년 뒤인 1846년 병오박해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기해일기’를 작성한 현석문 가롤로가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사제가 순교하였다.
새남터가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은 사제들의 순교지라는 것이며,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에서 한국천주교회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4. 절두산 순교성지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6
절두산(切頭山)은 예로부터 가을두(加乙頭), 잠두봉(蠶頭峯), 용두봉(龍頭峰) 등으로 불리어 왔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을 통과해 서울 근교까지 침범해 오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로 더럽혀진 한강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겠다며 이곳에서 수많은 교인들의 목을 잘라 죽이는데(병인박해) 그때부터 이곳의 지명을 절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1966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절두산에 기념관을 건축했는데, 기념관에는 성당을 비롯하여 27위 순교 성인과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성인 유해실,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특히 박물관에는 교회의 귀중한 사료들과 순교자들의 유품, 형구(刑具) 등 3,500여 점 이상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그 수나 규모 면에서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야외에 조성된 조형물과 기념비들은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어울려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풍요롭게 하며, 성지를 찾는 신자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까지 순교 신앙·선교·문화 체험 등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 한국 천주교 순교자 박물관
운영시간 : 화요일~일요일 9:30~17:00
위치 :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6 절두산 순교성지 내
홈페이지 : http://www.jeoldusan.or.kr
5. 노고산 성지
서울시 마포구 백범로 35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 앞
노고산 성지는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이후, 사형을 당하고 그대로 형장에 내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관가의 눈을 피해 모셨던 곳 가운데 하나로, 여러 처형장과 가까워 많은 순교자들이 임시로 매장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 곧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6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혔다. 그 뒤 이십 일가량 지나서 7-8명의 신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시신을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신자들은 시신을 큰 궤에 넣어 현재 서강대학교가 자리한 노고산에 매장하였다. 4년 뒤, 시신을 훔쳐낸 신자 가운데 한 명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하였다. 그 뒤 유해는 다시 이장하여, 1901년부터 현재까지 명동 대성당 지하 묘소에 모셔져 있다. 서강대학교는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자 2009년 6월 15일 가브리엘관 앞에 순교 현양비를 봉헌하였다.
6. 용산예수성심신학교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9길 49 옛 용산 신학교 성당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인 성심 성당은 조적조 양식으로 명동 주교좌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였다. 일반 교구 성당과는 달리 평면 형식을 가진 이 성당은 지형의 특성을 잘 이용하여 지은 아담한 성당으로 현재 성심 기념관(옛 용산 신학교 생활관)과 더불어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902~1958년까지 이 성당에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셨다가 가톨릭 신학 대학 이전과 함께 혜화동 신학 대학으로 모셔 갔으며 또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소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의 유해를 모시기도 했었다.
– 옛 용산 신학교 생활관(성심 기념관)
현재 성심 수녀회 한국 관구 사무실과 성심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옛 용산 신학교 건물은 1892년 배론 예수 성심 신학교가 용산구 원효로로 이전되면서 코스트 신부에 의해 학교 건물로 지어졌다. 6·25 전란 때 일부 파괴된 건물을 보수하여 사용하다 2007년 완전하게 복원하였고 옛 용산 신학교 성당과 더불어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7. 왜고개 성지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40길 46
왜고개는 기나긴 조선의 천주교 박해 시기 동안 여러 순교자들의 시신이 옮겨져 매장되었던 곳이며, 병인박해 순교성인 중 새남터 순교자 일곱 분이 33년 동안,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자 두 분이 43년간 묻혔던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남종삼, 최형 등이 박순집 베드로와 몇몇 신자들에 의해 안장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이다. 또한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도 새남터에서 교우들이 찾아내어 잠시 이곳 근처에 가매장했다가 미리내로 모셔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후에 이들의 유해는 명동성당과 절두산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어 있다. 기해박해 순교자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인 등 9명이 앵베르 주교의 지시에 따라 왜고개에 묻혔으나, 그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도 한다.
현재 국군 중앙 성당이 위치하는 이곳은 기와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중림동 약현성당, 명동성당 건물에 쓰인 붉은 벽돌도 여기에서 구운 것이라 전해진다.
8. 삼성산 성지
서울시 관악구 호암로 545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한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鄭)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이들은 1836년부터 차례로 조선에 입국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복음 전파에 힘썼으며, 아울러 모방 신부는 당시 소년이었던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등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최초의 조선인 신부를 양성하였다. 한 배교자의 책략 때문에 앵베르 주교의 거처가 알려지자 주교는 여러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었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치명(自獻致明),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으며,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인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諡聖)되자 이를 기념하여 1989년 명동성당에서 세 성인의 유해를 일부 옮겨 와 안치하고 봉헌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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