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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주신 아버지
엡 3:14-21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 3:14-21 / [바울의 기도] 이미 하늘에 있거나 아직도 땅 위에 있는 당신의 가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지혜롭고 엄청난 것인가를 생각할 때,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 아버지 하나님께서 넘쳐 흐르는 영광으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을 굳세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7)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더욱더 친밀한 분으로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토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8-19)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하듯이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얼마나 한없고 넓으며, 얼마나 깊고 높은가를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도 커서 여러분은 그 끝을 볼 수도 없고 또 그 사랑을 다 헤아릴 수도 없음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여러분도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20) 우리가 기도나 소원이나 생각과 희망으로도 감히 꿈꿀 수 없는 것을 위대한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21)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 영원 무궁한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바울은 에베소의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의 속사람이 튼튼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 되어야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자답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주신 아버지(14-15) ‘이러므로’는 ‘이런 이유로’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된 바울은 기도합니다. 에베소 교인들도 그 비밀을 알고, 그 비밀의 풍성함을 함께 누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피조물을 창조한 다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름을 부르고, 그 부름에 응답한다는 것은 부르는 자와 부름을 받는 자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구하노라(16-19) 겉사람의 삶은 육적인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겉사람의 삶을 확대시키는 일, 즉 세상에서의 성공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 결과 성공하면 나름대로 만족하고,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거나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런 겉사람의 외면적인 삶만이 아니라 훨씬 실재적인 속사람의 내면적인 삶이 있습니다. 바울은 속사람의 내면적인 삶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스스로는 밝히지 못하던 마음이 저절로 밝아집니다. 애써도 깨끗해지지 않던 마음이 저절로 맑아집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살기를 원합니다. 미움은 밀어내고 거리를 만듭니다. 하지만 사랑은 잡아당기고 거리를 좁혀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비이기적인 사랑이 우리 삶의 기초가 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진보합니다. 자기 초월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섭니다.
더 넘치도록(20-21) 참으로 놀라운 기도의 마무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위임합니다.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은 궁극적인 미래의 일일뿐만 아니라 현재의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것을 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적용: 당신은 ‘속사람’의 삶과 ‘겉사람’의 삶에서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까? 당신은 당신의 삶을 당신 생각보다 더 넘치도록 하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습니까?
위대한 사람 옆에 서 있다고 내가 저절로 위대해지지 않습니다. 배부른 사람 옆에 있다고 내가 배부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을 따라다니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교회나 목사를 쫓아다니지 마십시오. 사람을 쫓아다니면 꼭 얻는 것이 있습니다. 실망과 상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십시오./ 하용조 목사
< 설 교 >
겉보다 속사람에 집중하라
에베소서 3:14-19 / 이규현 목사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걸작입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와를 바라보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범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죄를 범한 이후,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그들의 외적 모습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내면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려고 했습니다.
사람의 행동은 내면에서 비롯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은 것 역시 그들의 내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발생한 사건이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인지, 외면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발생하면, 내면에서 비롯된 문제인가, 외면에서 비롯된 문제인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날 발생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사람의 외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외모로 인해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외모를 고쳐도 여전히 열등감을 느낍니다. 외모를 고쳐도 자신보다 나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 보입니다.
외모를 고쳐서 열등감을 덜 느낄 수는 있겠지만, 열등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외모로 인해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면의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낍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은 채 외모를 고친들 내면에는 열등감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근원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수치심을 느낍니다. 이것은 죄와 연관 있습니다.
사람이 경험하는 문제는 대부분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수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인해 수치심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수치심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수치심을 해결하려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삶이 매우 풍성해졌습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외면에 초점을 맞추고 살기 때문에 혼란과 고통을 겪습니다.
삶이 풍성해질수록 사람들은 내적으로 더욱 결핍을 느낍니다. 사람의 내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면을 생각하기보다 외면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외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외면에 집중합니다.
창세기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에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장자 엘리압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삼상 16:6)’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지만, 사무엘은 이새에게 “하나님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삼상 16:10)”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외면을 봅니다. 외면을 집중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속사람을 보십니다. 사람의 내면을 보십니다.
사무엘은 당시 걸출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영적 거장이었습니다. 영적 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역시 사람의 외모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셨으면, 사무엘은 크게 실수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왔을 때, 다윗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불러오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사무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다윗은 주목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시고 만족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나 외적 조건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문화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겉모습만 보면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3장 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있는 위치를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범죄한 이후, 아담은 자신의 내면을 숨겼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피하고 싶은 내면을 숨겼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임재가 불편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내면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를 물으셨습니다.
창세기 3장 8절에 보면,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이후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숨으려고 합니다. 죄를 가리려고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숨으려고 합니다. 숨을 곳을 찾아다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기 위해 종교를 가집니다.
사람들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기 위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숨기기 위해 사역에 깊이 빠지기도 합니다. 도피하기 위해 열심히 사역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 않고, 활동, 결과, 공로, 업적 등으로 자신을 숨기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해 보입니다. 성공한 사람 역시 성취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울 왕이 그러했습니다. 사울 왕은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가리켜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삼상 16:1)”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형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습이 훌륭하고 멋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속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서 사역할 때, 사역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역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역하다 보면, 자신이 드러납니다. 사역하는 동안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사역하다 보면, 사람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충돌합니까? 더 잘하려는 열심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내면에 다른 것이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려 하거나 인정받으려 하는 욕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역을 통해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내면을 그대로 두면, 사역하는 것이 자신과 공동체에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지속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여 성공했다 할지라도 자신을 지속적으로 살피지 않았다면, 자신이 망가질 수 있습니다. 성공한 것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살피지 않은 채 사역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역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내면에는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내면에 있는 어린 아이가 불쑥불쑥 드러납니다. 연약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충돌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내면을 보십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을 들여다보십니다. 속사람을 보십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가, 직분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속사람, 내면이 변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속사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대면(對面)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내면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대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자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 자신을 거부하면,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없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풍성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때, 하나님과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경험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복입니다. 복음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복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수치, 죄책감을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수치심이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담대해졌습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업적이나 공로를 내세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 우리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된 것으로 우리를 포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정직하게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즐거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십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 안에 거짓된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계속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워졌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에 거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바르게 반응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반응할 때,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됩니다.
본문 에베소서 3장 14~16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속사람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기도제목입니다.
당시 에베소교회는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기도제목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외적 환경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속사람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외모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겉은 멀쩡한데, 속은 곪았고 썩었고 망가졌다면, 멀쩡한 속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의 속사람, 심령, 내면세계가 강건해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보면,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겉사람과 속사람을 구분했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을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속사람에게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은 동일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겉사람과 속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속사람, 내면,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겉사람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낡아집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사람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속사람이 날마다 자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계속 강해져야 합니다. 날마다 자라가야 합니다.
속사람이 어떻게 자랍니까?
첫째, 성령께서 속사람을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무엇인가 집어넣어서 속사람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지식을 많이 입력해서 속사람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자랍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오묘하게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과 자신이 지식적으로 노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지식을 동원하여 성령을 이해하는 것과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아는 것은 다릅니다.
본문 에베소서 3장 16절에 보면,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때,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을 다스리실 때,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분명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영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면, 영혼이 힘을 얻습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기쁨이 넘칩니다.
소망이 넘칩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인내심이 생깁니다. 어두운 생각이 떠납니다. 활력이 생깁니다. 우리의 내면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의지로 맺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맺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품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냥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셔서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고, 환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성령의 사역은 인격적인 사역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십니다. 사람의 내면이 중요합니다. 속사람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합니다.
매우 약해보이지만 내면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외모는 유약해 보이는데, 내면은 견고한 반석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어려움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령에 의해 속사람이 강건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힘은 우리가 가진 힘보다 강력합니다.
인내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인내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에게는 인내심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에 의해 강건해질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인내력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인내력은 본래 우리에게 있는 인내력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힘이 극대화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강력해집니다.
우리에게 담대함이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담대함이 더욱 강해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했습니다. 성령께서 사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면, 어떠한 공격에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은 평안은 다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면, 우리의 속사람을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던 것을 성령께서 극대화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하거나 무기력하거나 힘들 때, 우리는 성령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보다 탁월하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ruwach)’라고 합니다. 호흡, 바람을 의미합니다. 호흡은 생명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사람이 살아납니다. 성령은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사람을 일으키십니다.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주도하셔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자신을 내어맡기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자리를 내어드리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자라게 하십니다.
본문 에베소서 3장 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거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집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속사람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우리가 믿고 인정할 때,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본문 에베소서 3장 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6~7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린 만큼 크게 자랍니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뿌리는 땅 속에 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뿌리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의해 결정됩니다. 영적 성장은 내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자랍니다.
에베소서 3장 19절에 보면,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찬송가 304장의 가사에 보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때, 우리의 속사람이 자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할 때, 우리의 속사람이 자랍니다. 우리가 변화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충만함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ἀγάπη)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만큼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신앙이 빨리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식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만큼 변화됩니다.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생을 바꾸어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만큼 신앙이 성장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속사람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최대치로 경험한 사람은 삶이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내면이 변화됩니다. 마음이 점점 넓어집니다. 원수까지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강건하지 않으면,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상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합니다. 날마다 넘어지고 깨어집니다.
인격의 변화는 속사람의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용서하려고 애쓴다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할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셔서 모든 환경을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만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속사람을 바꾸어놓으십니다.
물이 얕으면, 쉽게 오염됩니다. 주변의 상황에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물이 깊으면, 쉽게 오염되지 않습니다.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은 매우 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 알 때,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질 때,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할 때,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일이 날마다 일어납니다. 우리를 위축시키고 절망하게 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삶을 흔드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그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해답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속사람에 있습니다.
속사람에 집중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에 투자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때,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새로워집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새로워질 때,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날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앞에 비노니
엡 3:14-19 / 김광일 목사
헨리 포드(Henry Ford)는 미국 미시간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포드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잘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마차를 보고 “말이 끌지 않고 갈 수 있는 차를 만들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자동차를 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포드는 27세때 에디슨 전등회사에 입사하여 성실성이 인정되어 기계 주임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포드는 가솔린 엔진 실험에 정열을 쏟기 시작하였습니다. 1896년 6월, 1호차를 가동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6년 후에는 시속 72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로 개량하였습니다. 투자자들이 몰려들었고 자동차 생산을 시작하였지만 일 년도 되지 못하여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해 1903년 디트로이트에 포드의 이름을 딴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연구를 계속한 끝에 드디어 1908년 한 해에 자동차 6,850대를 만들어 내는 데까지 성공하였습니다. 다음 해는 일만 대를 돌파하였습니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포드사의 자동차 생산량은 미국 전체의 60%를 차지하게 되었고 세계 자동차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였습니다.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 기념박물관에 가면 포드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꾸던 사람이요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강철왕 데일 카네기가 헨리 포드를 방문하였는데 78세인데도 젊음과 활력이 왕성하였습니다. 데일 카네기가 물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고민은 없었습니까?” 그러자 포드는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내 의견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시며 가장 좋은 결과를 맺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안 되는 일은 될 때까지 다시 하면 됩니다. 나는 고민과 염려를 항상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합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의 영적 강건을 위한 바울의 중보기도입니다.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기도의 효용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도는 사단이 결단코 막을 수 없는 성도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비록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몸이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갇힌 몸이 된 자신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확신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진지한 자세로 기도 드렸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부복하는 자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입니까? 모든 것이 막힌 상황입니까? 그렇다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라고 합니까?
첫째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시각장애자 양정신(楊貞信)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일곱 살 때 고열을 앓고 후유증으로 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 후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수없이 원망하고 좌절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모두 다 저를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딸아, 네가 눈은 보이지 않으나 입으로 말은 할 수 있지 않느냐? 머리로 생각하고 귀로 듣고 손을 쓸 수 있지 않느냐?” 그녀는 믿음으로 대답했습니다. “오, 하나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나이다.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나이다. 머리로 하나님을 생각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맹아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시각장애인 최초로 의사가 되었습니다. 한국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시각장애인 최초로 여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을 바치리이다”라는 책을 출간하여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사형수가 두 눈을 그녀에게 기증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사양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은 두 눈을 잃고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만나 감사할 것밖에 없기에 굳이 눈을 뜨는데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후 양정신 목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인도하는 빛이었습니다.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환하게 보았던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여기의 ‘강건하게 하시오며’는 원어로 ‘크라티이오데나이’인데 ‘힘을 얻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근육의 힘을 배양하는 육체적인 강건이 아니라 속사람인 영적 강건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속사람은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이며 인격의 변화를 주도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겉사람인 육신에 관심이 많습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사회적 문제는 너무 건강해서 발생합니다. 성적 타락과 방종은 지나치게 건강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범죄입니다. 강건하기를 힘써야 할 것은 바로 속사람입니다. 속에 있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났다해도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약합니다. 속사람이 강건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드는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강건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이 더욱 강건해지도록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견고하게 하시오며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Ralph W. Emerson)이 휴가를 얻어 시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집주인을 도와 암소를 외양간에 집어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암소는 뒷발에 힘을 모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에머슨이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농부의 딸이 다가왔습니다. 소녀는 암소의 콧잔등을 한참 쓰다듬더니 그곳에 얼굴을 비볐습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암소를 끌고 외양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에머슨은 그때 사람이나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불안이나 두려움을 만나면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괴로울 때 어떻게 벗어나십니까? 다투고 상한 감정을 어떻게 치유 받습니까? 이런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면 잠도 안 옵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대화하여야 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고백하고 힘든 문제를 아뢰고 도움을 요청하는 대화인 기도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들려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면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기쁨이 솟아납니다. 새 힘을 얻고 견고하게 됩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 기도로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여기의 ‘굳어져서’는 원어로 ‘테데멜리오메노이’인데 ‘확고하게 기초를 놓다’라는 의미입니다. 식물의 뿌리와 건물의 기초를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는 정도가 아니라 터가 굳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 열심과 기도와 봉사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누가 봉사를 많이 합니까? 누가 열심을 냅니까? 누가 희생합니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현재 받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사랑을 잊어버리면 형식적인 신앙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터가 굳어지고 견고해지기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충만하게 하시오며
20세기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손자가 말을 배우는 모습을 보고 성령 충만이 어떤 것인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며느리가 손자에게 말을 가르치는데 ‘예’부터 가르쳤습니다. 아이는 싫어서 고개를 흔들면서도 입으로는 ‘예’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번 되풀이한 말이라 싫어도 ‘예’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때 칼 바르트 교수의 머리 속에 성령 충만한 자의 대답이 연상되었습니다. 생각이 성령으로 차 있는 사람이면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싫어도 ‘예’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순종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일어나는 예수의 모습에서 성령 충만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겉사람은 ‘아니요’라고 말해도 속사람이 ‘예’라고 말하는 하나님 사랑이 충만한 모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의 ‘충만하게 하다’는 원어로 ‘플레로데테’인데 ‘채우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재해 있는 충만에 이르기까지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이 충만은 성도들이 이르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화를 기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충만하심이요, 완전하심입니다. 당신이 충만하신 것처럼 당신의 자녀 역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도달해야 할 목표는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인간의 자력으로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길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충만을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일본 최대의 고아원을 세운 사회사업가 이시이 쥬지(石井十次)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 “어떻게 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렸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시이는 그를 고아원 본관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구멍을 통해서 하나님이 고아들을 먹일 돈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바닥에 깔아 놓은 돗자리가 무릎 모양만큼 깊이 파져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은 흔적입니다. 이시이 쥬지의 제자에 의하면 이시이는 곧잘 옛날 기도한 일을 읽어 주면서 몇 년 몇 월 며칠에 기도한 것이 응답되었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 응답받은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시간이 남아서, 할 일이 없어서 드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야말로 기장 절실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고 성도들의 사정을 통달하여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시간이 짧아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겉만 맴돌다 나오는 기도가 아닙니까? 기도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겉 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의 강건을 위하여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지경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박히고 터가 견고해지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기 위하여 예수를 바라보며 아버지 앞에 간절히 비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
엡 3:14-19 / 송기정 목사
웨슬리회심기념주일
‟아 하나님의 은혜로”
팀 켈러 목사님은 “기도는 고단한 씨름이지만, 본질에 맞닿은 경이로운 길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결코 쉽고 편한 것이 아닙니다.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씨름했던 야곱의 기도처럼 간절한 기도일수록 고단한 씨름입니다. 그런데 그 고단한 씨름과 같은 기도는 기도의 본질에 맞닿은 경이로운 길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친근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서서 기도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마6:5;눅18:11)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간절한 마음과 복종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도, 그것은 곧 성도의 바람직한 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은 이제 우리들의 기도와 삶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람직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기 위하여 드려야할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은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3:16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은 먼저 그들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기를 간구하는’ (요삼1:2) 기도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곧 우리도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영광이 풍성하신’ (the wealth of his glory)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공동번역은 ‘넘쳐 흐르는 영광의 아버지’시라고 했습니다. 영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곧 영광이 넘쳐 흐르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며 바람직하게 살아야 할 생활은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미국 프로 야구 선수 커비 퍼켙(Kirby Puckett)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0년 연속 올 스타 멤버로 선발되었으며, 6번이나 골든 글러브 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속팀인 미네소타 트윈스가 월드 시리즈를 두 번씩이나 제패하는데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96년 클리브랜드 팀과의 경기 중 상대 팀 투수의 공에 맞아 오른쪽 눈을 잃고 은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그 투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몸을 빨리 피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오히려 그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은퇴 경기를 마친 후 그는 팬들의 성원에 감사한 뒤 자신의 야구 선수 생활은 끝났지만 인생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매우 감동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제가 오른쪽 눈 때문에 빠른 공을 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눈이 하나 안 보여도 기도 응답을 받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아멘!
고린도후서4:16에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진 사람은 겉사람이 낡아져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며 기도 응답의 은혜를 더욱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더욱 강건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낡아질지라도 속사람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롬14:17) 날로 새로워지는 천국 생활을 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17 전반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에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곧 우리도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마음 속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의 마음에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며, 그리스도와 동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의 마음을 그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Christ will make his home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8:20)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며 바람직하게 살아야 할 생활은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오늘은 존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 280주년 기념주일입니다. 그는 22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32세에 미국 조지아에 선교사로 가서 2년 4개월 동안 (1735.10.14-1738.2.1) 사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738년 1월 24일 일기에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아메리카로 인디언들을 회개 시키러 갔다. 오! 그런데 나를 회개시킬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누가 무엇으로 이 불신앙적인 악한 마음에서부터 나를 구해낼 것이란 말인가?”
그 후 4개월이 지난 1738년 5월 24일, 그는 마침내 그가 그토록 갖기를 원했던 믿음을 갖고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일기에 그는 다음과 같이 그때의 체험을 적어 놓았습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구원을 위해, 다만 그리스도만 믿고 있음과 주께서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도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주셨음을 믿는 확신을 얻었다.” 아멘!
고린도후서13:5에 사도 바울은 “너희는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자기 마음 속에 계신 사람은 불신앙적인 악한 마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주셨음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갖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요일5: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으시기를 (히11:6)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3:17 후반절에서 19절까지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박고 굳게 세워져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펼쳐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곧 우리도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유한한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 곧 그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뿌리를 박고 굳게 세워져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비록 우리의 지식으로는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해주셔서 사랑의 실천과 더불어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아 가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1945년 뉴욕에서 크리스천 교양지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를 창간한 노먼 빈센트 필 (Norman Vincent Peale) 목사님이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백화점에서 성탄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사 가지고 나오는 길에 자기에게 적선을 구하며 손을 내미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린 노먼은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그 손을 피하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돼. 그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야!” 라고 말하면서 10달러를 드리라고 시켰습니다. 당시 10달러는 큰 돈이었습니다. 노먼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거지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라며 기뻐하더랍니다. 그의 환한 미소를 보며 어린 노먼은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요한1서4:16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한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요일4:12) 것을 볼 수 있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헨리 워드 비처 목사님은 “인생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 한 번 사는 유일회적인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 속에 바람직한 성도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옵소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성령의 기도
엡 3:14-21 / 이윤재 목사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기도하기 딱 좋은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꿈에 죽어 천국에 갔답니다. 그런데 보니까 집이 아주 작고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왜 내 집이 이렇게 낡았지?” 하고 생각하는 데 옆 집은 아주 크고 화려합니다. 그래서 “누가 이 집에 사나” 하고 보니까 웬일입니까? 택시 운전수의 집입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왜 내 집은 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데 저 집은 크고 좋지?” 했는 데 마치 천사가 오더랍니다. 그래서 물었답니다. “천사님, 아무려면 제가 목사였는 데 택시운전수 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이 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제 집이 작죠?” 그랬더니 천사가 말했답니다. “그것은 기도 때문이란다. 네가 교회에서 설교할 때 교인들 대부분이 졸았잖니? 그런데 저 택시 운전수는 하도 빨리 달려 손님들이 타기만 하면 하나님, 살려달라고 기도했단다. 교인들을 졸게 한 목사가 좋은 집이 살아야겠니? 사람들을 간절히 기도시킨 택시 운전수가 좋은 집에 살아야 겠니?”.
문제는 기도입니다. 땅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상관없습니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기도 적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이 기도하라고 부흥회로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가을, 금주 금요일부터 4주간 계속되는 가을 부흥회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것입니다.
“부흥”이라는 말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에 의해서 였습니다. 1662년 헨리 베인(1613-1662)이라는 청교도 목사님이 처음 “부흥”이라는 말을 썻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8세기, 미국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부흥, 부흥회”란 말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나옵니다. “부흥”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하야”입니다. 이 말은 “살린다. “소성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시138:7, “나를 소성케 하시고”. 호6:2, “그 앞에서 살리라”. 하3:2,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여기 나오는 “소생케 하소서. 살리라. 부흥케 하소서“가 ”하야“, ”부흥“입니다. 신약에서는 ”아나스타시스“입니다. 이 말은 “일으키다, 잠에서 일어나다”의 뜻입니다. 잠자는 자가 죽은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엡2:5,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다같이 “살리셨고”, 이 말이 “아나스타시스”입니다. 한마디로 “부흥”은 살리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소생하는 것입니다. 잠자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에배소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14-15절입니다. 엡3:14-15,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이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당시 바울은 감옥에서 부자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만날 수 없었고, 교인의 집을 방문할 수도, 설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입니다. 비록 바울이 매어 있었지만 기도를 방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마지막까지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만이 끝까지 가고 기도만이 홀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15절, “무릎을 꿇고 비노니”.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항상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말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에는 다양한 자세가 있고 자세가 기도의 능력을 결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무릎을 꿇었다”는 말을 기도의 태도로는 볼 수 있습니다. 그 앞에 “아버지앞에” 했습니다. “아버지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앞에”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앞에”는 위치를 나타낼 뿐 아니라 기도의 본질을 말해줍니다. 가도는 하나님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주보고, 하나님 면전에서, 하나님을 맞상대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기 독백이 아닙니다. 기도는 자기를 향하여 던지는 주문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냐도 중요합니다. 14절, “하늘과 땅에 이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보통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자,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통치자, 그런데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땅에 오셔서 우리의 문제와 아픔을 들어주시는 자상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 하나님앞에 우리가 서는 것입니다. 그 위대하신 아버지 하나님앞에 기도하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세 가지가 일어납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16절입니다. 엡4: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첫 번째로 환경이 변화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가 망하고 나라가 뒤집힌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속사람이 강건케 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감옥에 있는 사람이 석방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거나 가난한 사람이 물질달라고 기도하지 말라거나 공부하는 학생이 합격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 보다 더 중요한 기도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건케 하시오며”, 왜 이것이 기도의 첫 번째 목적일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존재를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 있습니다.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영은 집으로 말하면 안방입니다. 성전으로 말하면 지성소입니다. 모든 것이 거기서 결정됩니다. 집안일은 안방에서 결정되고 성전일은 지성소에서 결정됩니다. 안방은 주인이 거하는 곳이고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영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 깊은 곳에 있는 영이 혼을 통하여 우리의 육을 다스립니다. 그래서 영이 건강하며 혼과 육이 건강하고 영이 건강하지 않으면 혼도 육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이영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를 성경은 “영의 침륜”이라 부릅니다. 영이 아프고 낙심하여주저앉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또 “상한 영”이라고 말합니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상한 영은 깨어진 영입니다. 건강해서 우리의 혼과 육을 다스려야 할 영이 깨어져 부서져 있으면 혼과 육은 자동적으로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이 영이 치료됩니다. 그래서 다시 회복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롬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도다”. 하나님을 즐거워 하게 됩니다. 고후4:16,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날로 새로워집니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시 16절입니다. 엡4: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만능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맞습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기도 자체가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때 성령님이 이루십니다. 기도만능이 아니라 성령만능입니다. 우리는 다만 성령의 도움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는 수단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님이 역사합니다. 다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국의 유명한 마틴 로이드 존스목사님이 쓴 <부흥>이란 책이 있습니다(사진1), 이 책에서 그는 1735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샘프턴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썻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노샘프턴 온 마을을 영광스럽게 바꿔 놓았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을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했다. 그때처럼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한 적이 없었다. 모든 집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표가 나타났다. 가정마다 자신들에게 주신 구원으로 인해 기뻐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새로 태어난 것을 기뻐했고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새로 태어난 것을 기뻐했다. 교회마다 예배의 활기가 넘쳐났다. 모든 청중은 목회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열심히 받아들였다.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듣고 자기 죄로 인해 슬퍼하며 울부짖었고, 어떤 이들은 기쁨과 사랑으로 인해 울었으며, 어떤 이들은 이웃에 대한 염려와 연민으로 눈물 흘렸다. 부흥은 결국 하나님이 그 백성을 찾아오시는 것이다. 천국의 영광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백성에게 넘쳐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면 언제나 누구나 이렇게 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
그렇습니다. 부흥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부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내 속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속에 있는 영,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웨슬리 듀엘이 쓴 “주여, 홀연히 임하소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오, 주여, 홀연히 임하소서
주의 성전이 오늘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임하소서
우리가 기도 드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 속히 임하시옵소서.
오, 축복의 성령이시여,
우리가 그처럼 필요한 부흥을 주시옵소서
오 성령이시여, 우리 마음에 주의 빛을 비추시고
주님의 거룩하신 불길로 우리에게 임하소서
주여, 간구 하옵나니 속히 임하시어
우리를 정결케 하옵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오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우리가 심히 곤고하여 주님 앞에 이렇게 엎드렸사오니
지금 홀연히 임하시옵소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에 임하소서!
기도 하옵나니 홀연히 우리에게 임하시옵소서!
우리가 구원받으면 하나님께 죄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용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고 지옥형벌 면하는 것이 예수믿는 유일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16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우리 속사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간신히 예수믿지 말고 강건해 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으로 우리 속사람이 강건해진다고 말한 다음 17-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엡3:17-18,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다같이 “그리스도께서 너의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왜 사도 바울은 우리 속사람이 강건하게 된 이후에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거한다고 말합니까? 강해지는 것과 거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이 임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임재에는 성령의 인치심과 성령의 내주가 있습니다. 인치심을 도장찍는 것입니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인치심은 도장찍는 것입니다. 대개 도장은 언제 찍습니까? 소유권을 확정할 때 찍습니다. 부동산을 사고 명의이전하고 도장찍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받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장을 찍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이것은 일생 한번 일어납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고 호적에 이름 올릴 때 한번만 올리지 매년 올리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치심도 한번입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때 한번 인칩니다. 그런데 집을 사고 도장찍었지만 꼭 그 집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집에 살아야 진짜 내 집입니다. 아들 낳고 호적에 도장은 찍었지만 그 자녀와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호적에만 올리고 버리는 부모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세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 나오는 신자, 종교생활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신자, 신앙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같이 사는 신자, 영적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믿고 영접한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우리안에 머물게 하는 영적 방편입니다. 다시 17절입니다. 엡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여기서 “계신다”(dwell)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의 헬라어는 “카토이케사이”입니다. 이 말은 두 말이 합쳐진 것인데 먼저 “카타”, “밑에”라는 말입니다. “오이케이”, “산다”. 직역하면 “밑에 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살기는 사는 데 아무데나 사는 것이 아니라 지붕이 있는 집에 산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사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다리밑에 살고, 캠핑하는 사람은 텐트안에 살고,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은 거리에 삽니다. 이 경우는 모두 지붕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사는 방식이 아닙니다. 다리는 지붕이 없고 텐트는 바람불면 날라가고 노숙은 아예 집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우리가 기도하면 예수님이 우리안에 사는 데 지붕이 있는 집에 삽니다. 이 말은 조금 살다가 주님이 떠나는 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데 바람불면 날아가고 비가 오면 새는 그런 불안정하고 임시적인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예 짐싸고 이사와서 마음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영구적인 집입니다.
그나마 “거한다”말의 시제는 ‘부정과거형’ 입니다. 이것을 일반적 문법체계로 말하면 “현재완료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일어났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동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우리가 예수님믿을 때 예수님이 우리집에 들어오셨습니다. 조금 있다가 떠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예 영원히 함께 살려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때 우리가 성령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8절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믿을 때 은혜로 우리안에 오신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안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사랑을 아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믿음 예수님이 우리안에 거하심
지속적 기도 교회성장
구원 말씀, 회개, 성령충만 사회적 변화
(성령의 인치심) (성령의 내주)
부흥
우리가 예수님믿으면 구원받고 그때 성령님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우리가 성령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우리안에 거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안에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 데 첫째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다음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셋째 성령충만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먼저 교회가 성장하고 사회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나라라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합쳐서 성경은 “부흥”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1907년, 놀라운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의사였던 선교사 하디가 회개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월른, 죤스톤, 블레어 목사등 미국 선교사 20명이 4개월동안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열었습니다. 그때 전국에서 모인 1500명여명이 기도하다가 둘째날 하늘로부터 강한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단단히 얼어붙었던 교회, 마치 놋으로 덮어놓은 것같은 무거운 천정을 뚫고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대현 교회 길선주장로는 자기가 선교사의 돈을 감춘 아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집에 요리사로 일하고 있던 사람은 자기가 주인의 돈을 훔쳐 땅을 샀다면서 땅문서를 주인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어떤 선생은 선교회를 위해서 땅을 80불을 주고 샀는데 선교사로부터 500불을 받았다면서 420불을 선교부에 돌려 주었습니다. 종군기자 맥켄지씨에게 고용인 한 소년은 주인을 속여 4불의 금전을 취한 것을 회개하며 80리를 걸어 주인에게 4불을 돌려 주었습니다. 평북 의주에 사는 한 남자는 다른 도시에 장사하러 갔다 우연히 만난 여자와 두 딸을 낳고 살림을 차렸는 데 성령이 임하자 회개하며 둘째 부인과 딸에게 부양비를 주고 본부인과 합쳤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지금 예배가 한참 진행되는 데 한 부인이 나오더니 자기가 어떤 남자와 음행 죄를 범했다고 자백했는 데 마침 그 시간에 남편이 나왔다 듣고 아내가 그렇게 된 것은 자기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며 오히려 자기 죄를 용서해달라며 부부가 서로 끌어안고 울어 온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부흥회에 강도단 두목 하다가 호기심갖고 교회나왔다가 말씀듣고 꼬꾸라져 회개하고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가 "나는 강도입니다. 내가 도적입니다." 하고 자백했는 데 경찰이 깜짝 놀라 너를 고발하는 자가 없으니 처리할 수 없다며 돌려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약 5-6개월 계속되는 가운데 1907년 중엽까지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 평안도에서만 3만명, 그 해 전국적으로 20만의 한국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비결은 엡3: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그 앞에 엎드려 회개하게 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전도하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흥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으로 기도할 때 일어나는 세 번째 일에 대해 바울은 마지막으로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엡3: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자,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첫째 속사람이 강건해서 우리 영혼이 회복되고,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심으로 우리가 성령안에서 변화된다. 마자막이 무엇이냐? 이 뿐아니라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충만이란 어떤 것것입니까? 바울은 건물의 비유하고 설명합니다. 건물에는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습니다. 소위 4차원입니다. 하나님의 충만을 큰 건물로 표현한 것입니다. 먼저 너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의 넓이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의 제한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역피부,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바리새인, 세리, 창기, 강도, 배신자 다 사랑하셨습니다. 계5:9,11절입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리고 또 다시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어린양이 피흘려 죽은 대상은 유대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길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세상끝날까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렘31:3,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 분의 사랑은 항상 동일합니다.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길이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계속됩니다.
깊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수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오셔서 노예가 되고 죽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빌2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 땅에 오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음부까지 내려가신 사랑입니다. 높이는 사랑의 질량입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사하는 사랑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얻도록 사랑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죽어 천국가게 한 사랑뿐이 아니라 우리를 이 땅에서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도록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살아나고 그와 함께 부활하였으며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이 사랑의 네 차원을 합쳐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충만”이라고 불렀습니다. 엡3:20-21,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기도는 첫째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케 한다. 기도는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계시게 함으로 우리는 거룩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더 나아가 기도는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충만”은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가득차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충만하다”는 말을 마틴 로아드 존스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 여기 공기 주머니나 고무풍선 있습니다. 거기에 일정한 공기의 양을 불어 넣으면 빵빵하게 찹니다. 그 작은 고무풍선에 세상의 모든 공기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든 공기는 밖에 있는 공기와 같습니다. 양은 다르지만 질은 같습니다. 19절, 엡3:19,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충만은 하나님의 것을 다 가져온다는 것은 아닙니다. 양은 인간의 크기만큼입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가질 것을 다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살고 우리는 80년을 삽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80년이 영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80년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지신 것은 다 갖고 삽니다. 은혜, 영원, 사랑, 선하고 인자함, 하나님이 가진 것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자, 여기 태평양 한복판에 병 하나가 떠 있습니다. 그 병에 물론 태평양 물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병에 태평양 물을 담으면 그 물과 태평양 바다 물은 같습니다. 물론 물은 병만큼만 담습니다. 그러나 그 병속에 담긴 물은 태평양 바닷물과 같습니다. 크기는 다릅니다. 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 용량은 다릅니다. 그러나 질량은 같습니다. 우리는 80년-90년을 삽니다. 그러나 그 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담았습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이 가지신 본래적 생명과 같습니다. 그 생명이 우리의 그릇에 채워졌고 그것은 하나님과 같은 생명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충만”, “하나님의 충만으우리도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충만을 우리는 기도를 통해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도가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도가 없는 부흥은 역사 속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 부흥, 초대교회부터 현대교회에 이르는 모든 부흥은 모두 기도를 통하여, 기도와 함깨 우리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성장과 부흥은 다릅니다. 성장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고 부흥은 하나님이 주셔야 됩니다. 우리는 이 부흥을 꿈꿉니다. 우리는 이 부흥을 꿈꾸고 이번 부흥회를 맞이합니다. 빌리 그래함의 말을 다시 기억합시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손을 내게서 거두시는 것이다”(빌리 그래함). 그렇습니다. 이번 부흥회는 나에게, 내 가정에게,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 민족에 주실 은혜와 부흥과 축복을 절실히 기대하며 맞이합시다. 40일 매일 기도에 참여합시다. 하루에 적어도 한번 기도합시다.
어떻게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는가?
에베소서 3장 14-19절 / 조영식 목사
들어가는 글
오늘은 8월 첫째 주일입니다. 연일 기록적인 폭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폭염이 재앙 수준이 되었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폭염의 재앙을 보면서 불 심판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여하튼 아직도 남은 여름을 강건하게 잘 견딜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도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속사람의 강건함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라고 기도합니다(16절). 여기서 속사람은 우리의 육과 대조되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속사람의 강건함이 없이는 세상에서 믿음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지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라고 기도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굻고 비노니”라고 합니다(15절). 유대인들이나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보통 서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라고 나옵니다(눅18:11).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은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라고 나옵니다(눅22:41).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눅22:42).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내 뜻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원하는 것은 무릎을 꿇어 항복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했습니다(16절). 바울은 왜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세웠고,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말씀을 가르침으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행19:9). 그 결과로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마술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행19:19). 그러나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성도들을 대적했습니다(행19:28). 그들의 명분은 “큰 여신 아데미 신전이 무시당하는” 것이지만(행19:27), 실제로는 우상을 만드는 직공들과 영업하는 자들의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위기 때문입니다(행19:25). 현실에서 자신들의 생업을 지키는 것이 구원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진리를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누구에게 무릎을 꿇어서 기도해야 하는가를 교훈했습니다(15절). 우리들은 세상의 이득에 무릎 꿇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무릎을 꿇어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어떻게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는가?
바울은 폭동의 소요가 끝날 때 쯤 에베소 교회에서 급하게 도망치듯이 빠져 나와서 마게도냐로 갔습니다(행20:1). 바울이 떠난 후에 에베소 교회는 이득을 지키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 사이에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라고 기도했습니다(16절). 그러므로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은 자신의 이득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습니까?
첫째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16절). 우리의 겉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강건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겉 사람을 강건하게 만들기 위하여 각자의 몸에 맞는 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이 되는 영혼은 자신의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가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졌다고 하는 사람은 그의 이득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진 속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자신의 이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게 되어서 주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17절). 에베소 교회는 자신의 이득과 구원을 받는 것 사이에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구원을 받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지는 것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믿으면 자신의 이득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락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득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득을 따르는 순간에는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모시고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세상의 어떤 이득에도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사랑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에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 위해서는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17절). 여기서 “사랑 가운데서”는 누구의 사랑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18절). 교회는 두 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기대하는 영혼은 섬기며 나누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랑을 기대하는 영혼은 인정받고 대접받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기대하는 영혼은 믿음의 뿌리가 깊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랑을 기대하는 영혼은 항상 믿음이 흔들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나눔으로 믿음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고 더 깊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속사람이 강건해진 것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진 영혼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합니다(19절). 여기서 하나님의 충만을 담는 속사람의 그릇이 클수록 많이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의 그릇이 너무 작으면 하나님의 충만을 많이 담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는 충만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의 그릇이 너무 작아서 그런지 쉽게 사라지기도 잘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속사람의 그릇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크게 하라고 합니다(19절). 우리의 속사람이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전체적으로 커질 때 하나님의 충만도 크게 채울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너비와 길이’가 평면적으로 한 짝을 이루고, ‘높이와 깊이’가 입체적으로 한 짝을 이룹니다. 또한 두 짝을 서로 연결하면 너비는 깊이와 유사하고, 길이는 높이와 유사합니다. 세상은 ‘너비와 깊이’의 인격보다는 ‘길이와 높이’의 실력을 우선시합니다. 예를 들면 가방 끈이 길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출세를 원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너비와 깊이’의 인간 됨됨이를 소홀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가방 끈이 길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람이 부족하여 힘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좌우를 살피는 너비가 없고, 깊이 배려하는 마음들이 없기 때문에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합니까? 자녀들의 가방 끈이 길어져서 높이 올라가기만을 바라고 있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좌우를 돌아보는 너비가 있고, 깊이 생각하며 배려하는 충만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등산을 좋아할 때는 높은 정상을 정복한다는 기쁨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산은 높이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리산의 깊이를 느끼면서 저절로 겸손한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산의 높은 정상은 오르면 되지만, 산의 깊이는 오를 수 없는 신비 자체였습니다. 지리산 종주를 다녀온 후로 신앙생활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높이 있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깊이 있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때부터 주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높이 올라가는 기도가 아니라 깊이 들어가는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길이와 높이의 실력도 충만히 채워야 하지만, 동시에 너비와 깊이의 인격도 충만히 채워가는 속사람 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엡 3:14-21 / 문기태 목사
예수를 갓 믿은 자매가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수술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게 되어 마음에 불평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배웠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하게 대하시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들었지만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응답은커녕 오히려 상반된 결과만 주어졌습니다. 고통이 오래 지속되자 하나님의 존재 여부까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약 두 달 간 더 병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자매를 담당하는 간호사는 온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해주었습니다. 이 간호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매의 병든 몸을 간호할 뿐 아니라 이 자매의 아픈 마음까지 섬세하게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자매의 어머니는 그때까지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었고, 자기의 딸이 기독교 신앙 갖는 것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병원에 머문 2개월 동안 이 간호사의 사랑을 통해 점점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드디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회심은 퇴원 이후 온 집안에 복음이 전파되는 강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퇴원하고 나서 그 자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이 뜻대로 되지 않아 더 긴 시간 병상에 있어야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났고 가족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자매는 교리가 아닌 체험으로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의 기도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8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기독교 신앙에 관하여 아는 것이 많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에 관한 많은 지식이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분명히 알면 충분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 기쁨이 없습니다. 오래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여 흔들리고 있습니다. 직분을 맡은 이들 중에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잊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애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부어주시는 은혜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품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날마다 더 깨달아 은혜가 충만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17)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저 하늘, 천국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 계심을 강조합니다. 17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영접할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그리고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 안에 오셔서 머물러 계실까요? 우리의 모든 일에 함께 하시려고 머물러 계십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은 저 멀리에 계시며 나와 상관없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세계 역사에나 관여하시지, 나같이 연약하고 시시한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내 일에는 관여하지도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크고 어머 어마한 일, 대단한 일을 계획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동시에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에 관여하시고 도와 주십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과 기후와 세계 정세에 관여하시는 것보다도 더 많이, 더 자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고 감동하시고 깨우치시며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믿음을 품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잘 자라도록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사랑을 행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미움을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속 사람이 강건하도록 능력을 덧입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진리를 깨닫도록 깨우쳐 주십니다. 하늘에 속한 거룩한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도록 감동을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사단과 죄의 공격을 이기고 시험을 극복하며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참 많은 활동을 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치유하십니다. 우리로 죄 용서함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크게 도우십니다. 우리로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은사와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의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도록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이 휴가를 얻어 어느 시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집 주인을 도와주려고 암소를 외양간에 집어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암소는 뒷발에 힘을 모은 채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에머슨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농부의 딸이 다가왔습니다. 소녀는 암소의 콧잔등을 한참 쓰다듬더니 그곳에 얼굴을 비볐습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암소를 끌고 외양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에머슨은 그때 사람이나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을 통해서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아십니다. 우리의 밖에서 활동하시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더 풍성하게 해 주실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더 선호하십니다.
여러분, 불안함이나 두려움을 만나면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시기나 미움의 감정을 주체 못해서 괴로울 때 어떻게 벗어납니까? 누군가와 다투고 상한 감정을 어떻게 치유 받습니까? 그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면 밥도 잘 안 넘어갑니다. 잠도 안 옵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도도 안 나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나지지 않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이런 때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용한 골방으로 들어가십시오. 고요히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대화를 시도 하십시오. 그분께 불편한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하세요. 힘든 문제를 낱낱이 아뢰고 도움을 요청하세요. '주님! 억울합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그리고 두렵습니다. 미움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내 맘이 편치 않습니다. 밥도 못 먹겠습니다. 잠도 안 옵니다.' 그렇게 하고 기다리면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밖에서가 아니고 안에서 들려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예수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마음에 평화가 밀려옵니다. 마음에 가득한 미움이 녹아 버립니다. 불안과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대신 기쁨이 솟아납니다. 그러면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오신 그리스도를 소외시키지 말고 날마다 찾아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더 많이 활동하시도록 큰 능력으로 역사하시도록 예수님과 수시로 소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더 풍성한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큰 사랑으로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날마다 자신을 내어 드리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와 기대에 넘치도록 주십니다.(20)
그리스도는 인색한 분이 아닙니다. 후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마음만 후한 분이 아니라 능력도 충만하신 분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좋아 주고 싶어도 능력이 없으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음이 후하여 아낌없이 주려고 하실 뿐 아니라 능력도 강력하여 원하는 것은 넘치도록 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20절에 보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들은 모두 원하는 것 이상을 얻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 나아 와 간구한 맹인은 눈을 뜨고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 온 중풍병자는 고침을 받고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메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 귀신 들린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는 예수님께 아들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고 낫게 해 주셔서 정상으로 회복된 아들과 함께 돌아갔습니다. 그 외에 나병환자들도, 열 두 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도, 딸의 죽음으로 절망했던 야이로도 구한 것에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어떤 이는 육체의 병을 고침 받으려고 나아와 간구했다가 영혼의 구원까지 받는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들에게 소외된 외로움을 위로 받으려고 나아왔다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단순히 호기심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 받아 고귀하게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고자 더욱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아주 후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가운데서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우리가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이루어 주십니다. 온갖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주시는 분임을 믿고 부지런히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이루어 주시는 분임을 믿고 큰 기대를 품고 나아가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실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게 주십니다. 기도하는 것 못지 않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기도를 많이 할지라도 생각하는 것이 늘 부정적인 사람은 풍성한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기도해 놓고 돌아서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돌아서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같은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고 나서 돌아서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 잡히기 쉽습니다. 기껏 기도해 놓고 돌아서서는 '안 되겠지!' '불가능해 보이는데' '큰 일 났네, 어쩌면 좋아' 하고 생각을 합니다. 사단은 기도하는 이에게 다가와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심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부정적인 생각을 심을 때에 곧바로 물리쳐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계속 사로잡혀 있으면 될 일도 안됩니다. 기도 응답이 오다가도 다시 달아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이까짓 어려움 정도야..' '이런 위기는 주님이 일하시는 위대한 기회야!' '오늘은 어떤 축복을 경험하려나?' 이런 생각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가득 찬 생각, 기도한 것 이상으로 반드시 좋아진다. 기대하는 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여러분 안에 차고 넘치게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에 더 넘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도 넘치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생각을 복되게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믿음으로 기도해도 생각을 믿음으로 바꾸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고 하늘의 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사람들은 아무 생각이나 하지 않고 생각을 믿음으로 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늘 실패하고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응답의 체험도, 감격도 없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단에게 생각을 점령 당해 사단이 주는 염려와 근심, 불신과 의심, 불평과 불만으로 생각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며 우리의 구하는 것과 함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욱 넘치게 이루어 주십니다.
여러분, 기도를 통해 믿음으로 하늘의 복을 많이 구하고 생각을 믿음으로 충만하게 바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밝고 아름답게 바뀌어져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 되는 축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고 믿는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러나 모든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심을 알고 믿는 사람은 큰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자신의 삶을 통해 큰 사랑을 날마다 체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구원하심을 아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순간 그리스도께서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생각을 눈 여겨 살펴 보심을 알고 믿는 사람은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여러분의 삶을 얼마나 바꾸고 있습니까?
무릎을 꿇고 비는 기도
엡 3:14-21 / 지성래 목사
여러분은 언제 무릎을 꿇고 기도해 보았는가. 아니면 요즘도 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태도는 간절한 기도의 모습을 말한다.
사도 바울을 기도의 사람이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기도 생활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에베소서 3장 15절에 보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무릎 꿇는 기도 생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도행전 20장 36절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사역을 마무리하며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 인사를 하던 중에 무릎을 꿇고 그 모든사람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사도행전 7장 60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도 순교 직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다니엘 6장에 보면, 다리오 왕이 어명을 내려서 자기 외에는 그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못하도록 기도 금지령을 내렸다. 그런데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명령을 어겼다. 다니엘 6장 10절에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하였다.
열왕기상 8장 54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 앞에 봉헌 기도드리는 솔로몬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밤을 새워가며 마지막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이 나온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되”라고 하였다. 그 앞 절에 보면,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절대 절명의 기도의 심정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이처럼 죽음의 잔이 그에게서 옮겨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무릎을 꿇는 기도란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기도 자세가 아니다.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무릎을 꿇는 것은 간절함과 진실함을 표현하는 최고의 태도가 아니겠는가.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무슨 기도를 드렸는가.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기를.
사도 바울은 사람을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하였다. 16절의 ‘속 사람’이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려는 믿음의 사람을 말한다. 로마서 7장 22절에 보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겉 사람’이란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아담의 형상을 닮은 모습을 일컫는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는 말씀으로 주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변화의 모습을 자세하게 교훈하였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어떻게 하면 겉 사람을 헌 옷을 벗어 버리듯이 벗어 버리고 새 옷을 갈아 입듯이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 질 수 있을까”라는 기도 제목을 가지고 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하였다.
16절의,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라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여기서 언급하는 ‘영광의 풍성함’이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충만하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지혜, 은혜, 그리고 진리의 충만함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능력과 지혜와 은혜와 진리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으신 완전하신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서 성도들 구원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영과 혼과 육을 강건하게 하신다.
요한 계시록 5장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네 생물들가 장로들 사이에서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주님을 경배하는 찬송이 나온다. 그 찬송이 가사가 12절이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그렇다. 사도 바울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은 분명하다. 바울은
“하나님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는 성도의 속 사람을 강간하게 하시기를”기도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겉 사람의 강건을 위하여 시간과 돈과 재물과 온갖 관심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속사람의 강건함을 통해서 겉사람도 더불어 다스려지는 경건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늘 새롭게 추구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시기를.
바울 사도의 또 하나의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각 성도들의 마음에 계시기를 간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게 한다는 말은 성령의 임재, 성령의 충만, 성령의 동행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계시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이 에베소서 3장 17절 앞 부분에 나온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 말이다. 그렇지 않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하였다.
그렇다. 신앙 생활이란 예수께서 내 마음에 계신 상태를 말한다. 예수께서 어쩌다가 잠시 잠깐 내 마음에 계신 것이 아니라 늘 내 마음에 상주하시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을 ‘예수의 내주(內住)하심’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상태, 즉 내주(內住)의 상태에 대하여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계시다”. 혹은 “성령께서 내 마음에 계시다”는 상태를 예수께서는 장차 임할 성령의 임재 시대에 대하여 예언하시듯이 설명해 주셨다.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이와 같은 성령을 예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라는 약속으로 교훈해 주셨다. 그렇다. 요즘과 같은 비대면의 예배 생활 중에 각 성도가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이것이다.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예수께서 계시고,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계시는 임재의 상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소중함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 각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따라 연합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예수의 임재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하였다. 1장 18절에서는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에베소서 1장 18절 말씀의 내용은 사도 바울의 각 성도들을 향한 기도인데
누가 내 마음의 눈을 밝히셨는가.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찾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영광이 풍성하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17-23절이 성도 각 사람의 영적 성숙을 위한 바울의 기도라면 오늘 본문은 성도들의 연합인 교회를 위한 기도 내용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라는 용어를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1장 22절과 23절 그리고 3장 10절에서도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라고 말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셔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영혼 구원의 역사를 성취해 가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에베소서 3장 마지막 절인 21절에서도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동격화하는 내용을 접하게 된다.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과 교회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는”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야만 한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 성령을 훼방하면 성령이 각 사람의 마음에서 떠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고, 성령이 내 마음에 계시게 하려면 주님을 환영하고, 성령님을 환영할 뿐만 아니라 동행하는 일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주를 믿는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포하였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고린도 전서 6장 19절에서는 주를 믿는 각 사람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였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요즘 어느 TV 프로그램 중에 보면 동남아 며느리나 러시아 며느리 등 이웃 나라의 며느리들이 한국에 시집와서 한국 시어머니와 다른 문화 충격으로 마음고생하고 겨우 배워 조금씩 의사소통하며 서로 답답하게 대하며 살아가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을 다루는 내용을 접해 보게 된다. 산 넘어 산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셔 들이고, 성령을 내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은 대하기 불편하고 어려운 시어머니 대하듯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잘 통하는 친정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나와 함께 계신 것과 같은 상태여야 한다.
요즘처럼 답답하고 힘 겨운 때에 각 사람의 마음 속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반드시 계시기를” 서로 축복하고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마음에 계신 상태를 식물과 건물에 비유해서 교훈해 주었다. 17절의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는 용어의 바탕은 사랑이다. 사랑이 뿌리가 깊고 깊게 박히고 사랑의 터가 견고해져서 굳어지는 상태를 말씀한다. 18절에서 교훈하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는 말씀은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사랑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지식이란 것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 사랑이 아닌가. 그렇지 않나. 십자가의 사랑이란 것이 벽에 걸고 목에 거는 십자가 장식의 사랑이 아니쟎나. 그 사랑은 예루살렘 영문 밖으로 끌려 나가신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 나무 십자가 꼭대기에 어린양처럼 붙잡혀 매다려 죽임 당하시며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도 모두 다 내어 주신 완전한 희생의 사랑이 아닌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그 사랑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알아야 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거룩한 연합을 이룬 공동체인 교회가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멀리하거나 교회를 거부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신 적이 있다. 거기서 예수는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에 예수께서는“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는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들으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를 멀리하면 안된다. 사도 바울이 끊임 없이 강조하는 바가 이것이다.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수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 안에는 별의 별 문제와 말거리가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 예수는 좋은데 성도의 교제는 싫다. 예수는 좋은데 뭐는 싫다.”이런 수렁에 빠져 들면 않된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성도와의 거룩한 연합을 통해서 주님이 오늘 날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는 시대적인 선교의 사명을 다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걸 강조하는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이 오늘 본문의 17절 하반부에서부터 이어진다. 이 땅의 온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사도 바울은“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9) 라는 입체적인 설명으로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해 보려고 씨름하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는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이라는 이 충만(充滿)이란 온전하고 완전한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상태를“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말씀으로 교훈해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란 하나님이 내 마음에 찾아 오셔서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말한다. 즉 하나님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죄 사함 즉 대속(代贖)의 목적, 구원(救援)의 완성(完成)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 보면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서 8장 30절에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또 미리 정(定)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義)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榮華)롭게 하셨느니라.”
예정(豫定, predestination)
소명(召命, calling)
칭의(稱義, justification)
영화(榮華, glorification)
이러한 은혜는 20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충만한 능력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무궁한 영광의 충만을 서로 축복하고 간구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릎을 꿇고 빌던 사도 바울의 기도의 심정을 본 받아 성도 다운 성도, 교회다운 교회의 지체를 이루어 가는 복된 믿음 생활의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4-19 / 김광일 목사
신일덕 장로의 저서 ‘할렐루야 캡틴’ 의 내용입니다. 신장로는 대한항공 수석 기장으로 30년 동안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승객을 태우고 출발할 때마다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할렐루야 신일덕 기장입니다. 이 비행기에는 하나님이 동승하고 계십니다. 편안한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장로이니까 당연히 그런 줄 알았습니다. 어느 날 신혼부부 31쌍 60여명과 일반승객까지 150명을 태우고 사이판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공항 도착 15분전 유압장치를 점검했더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이드로릭(hydraulics)이라는 유압장치 고장으로 바퀴를 내릴 수 없습니다. 관제소에 연락했더니 동체 착륙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바퀴 없이 동체로 착륙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비행기에 화재가 나고 많은 승객들이 죽을 수 있습니다. 동체가 두 동강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신장로의 마음속에 ‘장로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사고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죽으면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순 없지.’ 조종관을 부기장에게 맡기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장로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고장이 나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순간 자신의 몸이 뜨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마음에 응답이 왔습니다. 부기장에게 “수동으로 유압장치를 조작하라” 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압장치를 움직였더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퀴 한 쪽이 빠졌습니다. 다른 한 쪽마저 빠졌습니다. 관제소에 연락했더니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느냐?” 며 동체착륙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바퀴를 내리고 공항에 안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기내방송을 통해 그 사실을 알렸더니모든 승객들이 환성을 지르며 서로 감격의 포옹을 하였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오면서 부기장이 신장로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 기장님! 정말 기도해서 바퀴가 빠진 것입니까?” “아니! 여보게! 자네 아까 옆에서 보고도 못 믿나? 하나님이 하신거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역사가 놀라웁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였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하는 자세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서서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보통 유대 사람들이 기도드리는 자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리와 같이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로서 자복하는 자세입니다. 또 하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이는 아주 겸손한 기도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여기의 ‘무릎을 꿇고’는 간절하게 기도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 서신 곳곳에 기도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표현은 여기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프로야구 선수 커비 퍼켓(Kirby Puckett)은 10년 연속 올스타 멤버로 선발되었으며, 6번이나 골든 글러브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966년 클리브랜드 팀과 경기 도중 상대 투수의 공에 맞아 오른 쪽 눈을 잃고 은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투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몸을 빨리 피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면 오히려 상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은퇴 경기를 마친 후 팬들의 성원에 감사한 뒤 자신의 야구생활은 끝났지만 인생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매우 감동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이제 오른 쪽 눈 때문에 빠른 공을 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눈이 하나 안 보여도 기도응답을 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오는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해 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부어 주시는 강력한 힘으로 강건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이 당하는 환난을 보며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속사람이 강건해 지면 낙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겉 사람과 함께 부패하게 만듭니다. 고집과 아집으로 교만하게 만듭니다. 습관의 노예, 욕심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양심의 감각을 상실하여 화인 맞은 사람처럼 만듭니다. 조그마한 상실에도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속사람이 강건하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자라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역도 선수 장미란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5년 연속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은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금번 런던 올림픽에서도 강력한 금메달 후보입니다. 그녀는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한결같이 무거운 역기를 들어 올렸던 장미란 선수는 모든 공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010년 1월 그녀는 교통사고로 허리와 어깨 부상을 당했습니다. 역도선수에게 치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장미란 선수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재충전의 시간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고난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비로소 평안을 찾았습니다. 그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장미란 선수의 고백입니다. “왜 하필 그 때였나고 탓을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더니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깃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의 신앙은 어머니의 영향이 커요. 어머니가 전도사이신데 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어머니가 항상 ‘이미 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해요. 하나님은 기도하면 항상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에요. 제가 기도하면 잊지 않고 들어주셔요. 항상”
본문 17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여기서 ‘계신다’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정도의 표현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예배드리며,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마음에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계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마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거처 곧 성전이 되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예수께서 내주 하시고 믿음으로 행할 때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 고난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주하여 마음을 지배하게 하려면 어떤 경우든지 믿음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신 사람이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모든 영역, 생각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시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로 사랑으로 말미암아
거제도에 가면 ‘빛과 사랑이 넘치는 동산’ 이라는 이름의 장애인 복지시설 애광원이 있습니다. 원장은 이화여대 가정대학 1회 졸업생 김임순 장로입니다. 그녀는 1950년 4월 25일, 25세 때 결혼, 불과 몇 달 만에 터진 전쟁으로 시아버지 송창근 박사는 납북 순교 당하셨으며 남편과도 생이별을 하였습니다. 1952년 유복자로 태어난 딸과 거제도 장승포로 피난을 갔다가 풀 한 포기 없는 산비탈 움막에 버려진 고아 일곱을 맡게 되었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제게 이런 일을 주십니까?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제발 이 일만은 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는 페스탈로치가 못됩니다. 대학까지 공부했으니 저를 다른 일에 더 좋은 도구로 써주십시오.” 얼마나 울며 기도했는지 지쳐 잠들었는데 새벽 종소리에 놀라 깨어났습니다. 그때 “왜 그 아이들 수준으로 떨어지려 하느냐 그 아이들의 생활을 네 수준으로 끌어올리라” 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의 꾸짖음에 놀란 그녀는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하늘을 우러러 서원했습니다. “주님, 이 아이들과 함께 일생을 살겠습니다.” 1989년 막사이상을 받기도 한 그녀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59년째 한결같이 지켜왔습니다. 정신 지체장애인 240여명을 따뜻한 사랑으로 품고 살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사랑에 뿌리를 박고 그 사랑위에 굳게 세워진 그녀의 사역에 하나님께서 언제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해주셨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랑의 너비는 모든 족속에게 미칩니다. 사랑의 제한이 없습니다. 사랑의 길이는 끝이 없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릅니다. 사랑의 깊이는 가장 낮고 낮은 자에게까지 미칩니다. 심오합니다. 사랑의 높이는 우리를 들어 올리는 사랑입니다. 그와 함께 살아나고 하늘나라에 앉히는 사랑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물질이나 권력과 명예에 뿌리를 박으면 안 됩니다. 사랑이 삶의 뿌리를 내리는 터가 되어야 합니다. 삶을 세우는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힘은 사랑에 있습니다. 교회의 참된 힘은 바로 이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 뿌리를 박을 때 참된 힘이 나옵니다.
포드 자동차 선전에 멋있는 카피가 있습니다. ‘최근에 포드 자동차를 몰아보셨나요?- Have you driven a Ford, lately?’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최근에 기도해 보셨습니까?’ 대답하지 못한다면 무능한 영적 생활을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 상태가 과연 어떠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빌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기도제목으로 동일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성령의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해지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마음을 주장하시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삶의 터가 충만해지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구해야 할 것
엡 3:14-21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한 편의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편지를 받아볼 이방인교회의 신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그 기도를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본문 14-15절) 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나 고대 기독교인들은 기도할 때 보통 서서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큰 존경과 순복을 의미하며 하나님께 구하는 이의 보다 겸손하고 간절한 자세를 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빈다고 한 것은 그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기도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단지 친밀성만 아니라 위엄과 권위를 또한 강조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을 태어나게 하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이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유를 창조하시고 또 다스리시는 하나님에게 사도 바울이 간절히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16절을 보면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합니다. 신자들의 속사람이 강건하여지도록 성령을 통하여 능력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아래 있으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속사람이 강건하여집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갈5:22-23)를 맺는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여건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이겨낼 수 있게 강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렇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즉 그가 그런 간구를 드리며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선하심과 그의 권능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선하시며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당신의 한 없이 선하신 뜻을 이루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풍성하게 드러난 것이 당신의 죄 없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이 세상의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게 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 삼으시며 당신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일입니다. 그보다 더 풍성한 하나님의 영광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은혜와 영광의 풍성함을 의지하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도에서 사도 바울이 또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7절 상반절에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서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인하여 속사람이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는 것보다 사람을 더 강건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사람보다 더 강건한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하실 때 일어나는 가장 큰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이가 함께하시니 우리에게 무서운 권력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남들을 우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 하반절에서 쓰기를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빌며 구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그 무엇보다 사랑이며 그들에게서 그 무엇보다 나타나야 하는 증거도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개인적이고 세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뿌리 내리고 자라나야 하는 토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세워져야 하는 토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집이 서 있어야 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위에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랑을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도 아닌 것을 사랑인 줄 착각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거짓되거나 이기적이며 일시적인 사랑을 버리고 참되고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가르치시고 친히 실천해 보이신 사랑은 우리의 지식과 이해를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8절에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랑을 훨씬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신자가 알게 해주시기를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18절과 19절 상반절에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우리에게 가장 잘 보여준 것은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의 아들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일입니까? 그 무한히 높으신 이가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존귀하기 이를 데 없으신 이가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것도 죄가 전혀 없으신 이가 모든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그렇게 하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그 마음을 이해하고 또 품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 마음을 품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아는 길입니다. 그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의 마음을 품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하며 이어서 본문 19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기도하면서 실제로 구한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떠하기를 원하시는 대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간구는 우리 자신을 진솔하게 돌아보며 우리의 신앙을 냉철히 성찰하게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생각하지도 못하고 행동하지도 못하며 살지도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바와 우리의 실제 삶의 모습 사이에 너무나 큰 괴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지만 우리는 원수는커녕 형제자매끼리도 미워하며 싸울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지만 우리는 단 한 차례의 잘못을 용서하기를 일생 거부하며 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셨지만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남을 온통 다 부인하고, 모든 십자가는 다 남에게 씌우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에게 영원히 영광이 돌려지기를 기원하는 말로 그의 기도를 마칩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20절의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는 말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그가 앞에서 하나님께 구한 모든 것을 자기의 생각보다 더 넘치도록 허락하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1절의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한 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간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이 돌려지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앞서는 엡3:10에서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의 믿음과 같은 믿음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기도이기도 하고,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들이 되게 해달라는 간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은혜로 인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옛 이방인교회의 신자들을 위한 기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를 위한 기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오늘 우리가 기도하며 간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또한 가르쳐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우리의 믿음과 삶이 깊이 뿌리 내리고 튼튼한 터 위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날마다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바울의 애절한 기도
엡 3:14-21 / 피종진 목사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감람산에서 무릎을 꿇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눅 22:39~44).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애절하게 기도하는 내용은
첫째,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엡 3:16a)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스가랴 4장 6절에 보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부족해도 낙심하지 말고, 능력이 있어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모든 일에 아름답게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의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 2:4). 전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이요, 우리의 가장 큰 힘입니다.
둘째,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b) 사람에게는 속사람과 겉사람이 있습니다. 겉사람이란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아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의 육신적인 몸을 말합니다. 속사람은 속에 있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일에 힘쓰는 자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할 때 신앙적으로 어떤 어려운 요구를 받더라도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면 겉사람인 육체도 자동으로 강건해지고, 담대해집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고백했습니다.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면 더러운 귀신도 쫓아낼 수 있습니다(눅 4:35,36).
셋째,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채워지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성도가 도달해야 할 최고 목표점은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충만하시고 완벽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완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99세 때 그에게 나타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말씀하셨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뿌리가 사랑에 박히고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예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을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채움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엡 3:14-21 / 피종진 목사
성경에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등등 ‘성령’에 관한 말씀이 구약에 94회, 신약에 230회, 총 324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 모든 일이 잘되고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고전 12:3).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역사는
첫째, 속사람이 강건하게 합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성령님은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보면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겉사람은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아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의 육신적인 몸을 말합니다. 속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 영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사 11:2)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는데, 여기서 ‘강건’이란 ‘힘 있게 함, 견고하게 함’이라는 뜻으로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세움을 받게 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도록 힘을 주십니다(딤후 4:17).
둘째, 믿음이 견고해지게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엡 3:17a) 믿음은 성도에게 있어서 큰 보화입니다. 괴테는 ‘사랑은 꿈을 심어주고, 신앙은 확신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대로 이루어지게 하시고, 고백한대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믿음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겉모습이 있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의 형식에 불과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랑할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셋째, 사랑의 뿌리가 박히게 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b) 여기서 ‘터가 굳어진다’는 표현은 건물을 튼튼히 짓기 위해 기초를 깊이 파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뿌리가 깊이 박히게 됩니다. 성도들이 사랑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굳게 서 갈 때 인간의 지식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신앙이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랑 가운데 그 뿌리가 박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믿음이 견고해지며, 사랑의 뿌리가 깊이 내려져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릎을 꿇고 간구하노니
엡 3:14-19 / 김광일 목사
허드슨 테일러 (James Hudson Taylor) 선교사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중국 대륙에 들어가 역사에 전무후무한 선교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오직 기도하는 일에 전력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해가 떠오를 때면 언제든지 테일러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테일러 선교사를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교사님이 선교사역에 성공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자 테일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오직 기도로 사람들을 움직였을 따름입니다.”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움직이시도록 하였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힘으로 자녀를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면서 허드슨 테일러는 이런 말로 우리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어떤 반대를 만나더라도 그때마다 무릎의 힘으로 이기십시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혔습니다. 고문과 박해로 인해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가누기도 어려웠지만 차가운 감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기의 ‘앞에’ 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는 친근한 사람과 마주보고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시 유대인의 전통은 서서 기도하는 것이었으나 바울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는 간절한 마음과 복종을 나타내는 태도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보는 심정으로 바울은 에베소의 교우들을 위하여 중보하며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서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 당당했고 자신만만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제나 이제나 무릎을 꿇고 간구할 때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여 주십니다.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이 무릎을 꿇고 드린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릎 꿇고 드릴 간구는 어떠한 기도여야 합니까?
첫째로 속사람이 강건하도록
존 낙스(John Knox)가 스코틀랜드에서 복음을 전할 당시 통치자였던 메리 여왕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존 낙스는 서재에 들어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애끓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저에게 주십시오. 아니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 그가 기도하던 방의 창문으로 메리 여왕이 있는 궁전이 보였는데 그곳을 바라보며 같은 기도를 몇 시간씩 되풀이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 여왕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여왕은 죽기 전에 “존 낙스 한사람의 기도가 백만 대군보다 무섭다” 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존 낙스의 무릎 꿇는 기도를 통해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마귀가 치를 떨고 두려워하는 기도입니다. 한번은 메리 여왕이 존 낙스가 설교하던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중풍에 걸린 낙스는 겨우 부축을 받고 강단에 서서 어눌한 말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설교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을 하였습니다. 낙스가 죄를 지적하면 공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도 하지 않느냐며 매달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을 보였습니다. 비록 중풍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였지만 존 낙스는 세상을 호령하던 메리 여왕을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능력과 권위가 속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도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야 합니다. 속 사람의 강건이 없으면 어떤 영향력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은 인간의 영, 마음, 인격을 가리키킵니다. 겉 사람과 대조를 이룹니다. 겉 사람은 육체에 속하여 세상적인 것을 즐거워하는 육적인 자아를 가리키는 반면에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영적 자아로 거듭난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속 사람은 성령을 통한 능력으로 강건해집니다. 여기의 성령은 오순절에 임한 은사적 성령이 아니라 내주하시어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나의 속 사람은 강건합니까? 아니면 약해져 있습니까? 겉 사람에 끌려 나약한 모습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 속 사람이 더욱 강건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허락하시사 속 사람이 날마다 강건하게 되도록 오로지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마음에 계시도록
브라이언 카바노프 (Brian Cavanaugh)는 ‘꿈꾸는 씨앗’이라는 저서에서 마음은 마치 정원과 같다고 말합니다. 정원에는 잡초가 나기도 하고 좋은 꽃이 자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잡초는 심지 아니하여도 잘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지만 좋은 씨는 심어도 꽃이 잘 피지 않고 자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잡초와 함께 있으면 무성해는 잡초의 기운으로 꽃은 시들시들 죽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잡초를 제거하고 김을 매주어야만 양분을 흡수하여 꽃이 잘 자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정원 역시 못된 생각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무성하게 잘 자랍니다. 그러나 좋은 생각이나 착한 마음은 아무리 보전하려고 애를 써도 어느 사이에 시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화를 내며 불평하고 시기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그리스도가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다스리지 못한다면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 붙들리는 마음이 되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예수가 계시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낭패와 실패를 당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리스도가 없는 신앙의 무의미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며 그리스도의 내주를 경험해야 합니다. 여기의 ‘내주’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곳이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거처가 되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이 좋아 보이는 교인들에게 교훈합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예수께서 너희 안에 계신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라.”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까?” 마음은 인격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는 곳이기에 그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도록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로 사랑을 깨닫도록
프레드릭 레만(Frederick M. Lehman) 목사는 1948년 ‘하나님의 사랑의 뒷이야기(History of the Song, The Love of God)’라는 책에서 304장 찬송시를 만든 배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1917년,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시골교회에서 어렵게 목회를 하였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치즈 공장에서 일하였는데 어느 날 부인이 도시락에 시를 적어 넣어주었다. 그 시는 11세기 랍비가 쓴 하다무트(Hadamut)라는 히브리시였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말로 다 할 수 없도다. 하늘 전체를 양피지로 삼고, 땅위의 모든 초목을 꺽어 펜을 삼아, 온 세상의 물을 다 잉크로 하여, 온 인류가 필기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쓸 수 없도다” 나는 이 시를 읽는 순간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다. 레몬상자에 걸터앉은 나는 벽에 기대어 몽당연필로 첫째 연과 둘째 연과 후렴을 작사하였고, 셋째 연은 히브리시를 운율에 맞추어 고쳤다. 그것이 바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이 되었다.” 레만 목사는 이 시를 통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만큼 채워져 있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메마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메말라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더 풍성하신 사랑 안에 거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우리 지식의 한계로는 광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한 지식적인 이해가 아니라 인격적인 지식을 통해 깨달아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풍요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근거라고 말합니다. 무릎 꿇고 드리는 기도의 절정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충만함으로 성장하여, 그 사랑 가운데 뿌리를 박고 그 사랑 위에 터가 굳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깨닫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욱 충만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 그리고 그 사랑을 깨닫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그 사랑 위에 세워졌습니까?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충만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오로지 무릎을 꿇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가 건축을 하는 동안 극심한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 때 친구 목사가 이런 말을 적어 보냈습니다. “그저 무릎만 꿇으소서!” 이 말에 감동한 목사는 눈물과 무릎으로 교회 건축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저 무릎만 꿇으소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무릎 꿇음을 보시고 항상 기도를 들어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모비딕(Moby Dick)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원들이 포경선을 타고 고래를 좇고 있습니다. 세찬 바다를 이기려고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젓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갑판에 앉아 조금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는 작살 잡이입니다. 그는 고래가 나타나면 결정적인 순간에 작살을 내려 꽂습니다. 작살 잡이는 비생산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때가 왔을 때 꼭 필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기도꾼은 누구입니까? 시간을 허비하는 비생산적인 사람이 아니라 결정적인 때에 가장 필요한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야기꾼이나 말쟁이가 아니라, 오로지 무릎을 꿇는 기도꾼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행복해 집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세이레 새벽 기도회를 통하여 강력한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변화된 사람만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빌어야 합니다. 부디 속 사람의 강건을 위하여 무릎 꿇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깨달아지도록 무릎을 꿇고 간구하여 넘치도록 채우시는 복을 얻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경건한 속사람
엡 3:14-19 / 이동휘 목사
1. 현대인들의 가장 큰 관심 중 하나는 건강에 대한 것입니다. 흔히 한국 사람은 건강에 좋다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다 먹어 치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렁이나 굼뱅이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이름없는 들풀도 몸에 좋다면 다 뜯어 먹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너무 건강을 염려한 나머지 최근에는 건강 염려증 환자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몸의 건강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속사람의 건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에 약간의 이상이 있어도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하고 약을 처방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모든 치료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의 건강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한 것이 사실입니다. “속사람”은 인간의 ‘영’, ‘마음’, ‘이성과 의지가 활동하는 인격’을 말합니다. 영혼과 마음, 그리고 인격이 강건해야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이러한 속사람이 강건해야 마음과 정신, 그리고 인격이 무너지지 아니하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그 사람의 인격 전체가 추락하게 되고, 영이 더럽혀지게 되면 인생 전체가 붕괴됩니다. 그래서 지혜서인 잠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은 성도 여러분의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위한 기도입니다. 교역자의 마음은 마치 주부들이 가족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음식을 만들듯이, 성도들의 영적 양식을 준비할 때 성도들의 속사람의 강건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하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구와 소원은 바로 성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여러분의 속사람이 강건하여 범사에 승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또 속사람이 강건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2. 첫째로, 속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inner being)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라고 기도했습니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은 능력이 있어야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진리를 아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마치 기차가 가려면 레일도 필요하지만 동력, 에너지가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성령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성도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할 때 무슨 이상한 행동이나 방언, 환상을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어떤 독특한 체험이나 현상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의 능력을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받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번은 빌립이 사마리아의 한 도시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자, 더러운 귀신들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가고 정신이 온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전부터 마술을 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양 떠들어댔습니다. 그래서 모든 계층 사람들이 마술을 행하는 시몬을 두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큰 능력을 받은 사람이다.’ 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귀신들린 사람, 중풍병자, 앉은뱅이 등이 고침을 받고 온전해지는 것을 보고 시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보내 새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믿고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자 그들 모두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때 시몬은 그 광경을 보고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나에게도 이런 능력을 주어 내가 손을 얹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을 받게 해 주십시오.’ 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못하므로 이 일에는 아무 상관도 없고 얻을 것도 없소. 그러므로 당신은 마음에 품은 악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시오. 혹시 주님께서 당신의 악한 생각을 용서해 주실지도 모릅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고 죄에 사로잡혀 있소.” 시몬은 성령의 능력을 돈을 주고 사들여, 자신이 과거 마술을 행한 것처럼 행하려는 바르지 못한 마음에, 그 돈과 함께 망하리라는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화들짝 놀란 시몬이 곧 바로 두 사도에게 간청합니다. “이제 말씀하신 것들이 하나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행8:4-24) 성령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 일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달라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성령께서 거할 전으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8에는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성령을 노력하고 힘써서 얻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예수 믿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거저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회개하는 자에게, 속죄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역사할 때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하기 때문에 성령충만 받는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지만 사실은 기도도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말문이 열리고 기도가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사랑이 생깁니다. 성령이 내 심령 속에 역사할 때 말씀의 맛을 알고, 성령이 내 심령 속에 역사할 때 겸손해지고, 성령이 움직일 때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구체적 삶 가운데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성령으로 살며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영적으로 기진맥진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때문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그에게 자신을 비워서 회개하면서 우리의 심령이 거룩한 성령의 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안되면 하나님께 간곡하게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고, 성령께서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시며 또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면 더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성령의 충만이 영적 건강과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비결이며 그것은 우리의 영적 삶의 동력이 됩니다. 기원전 1030년경,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가축들까지 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상15:3)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이렇게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로부터 500년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아말렉이 행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아말렉은 비겁하게도 광야 길을 가느라 피곤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는가 하면, 더욱 더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은 피곤한 가운데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신25:17-19)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출17:14-16)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여 안식하게 되었을 때,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을 공격했지만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고 좋은 가축들은 살려두고 하찮은 것들만 진멸했습니다.
(삼상15:7-9) (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 왕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 그 책임을 추궁하자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그렇게 했다며 궁색한 변명을 합니다.
(삼상15:20-21)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15:22-23)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에게서 성령을 거두셨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악령이 들어가 그를 번뇌하게 만들었습니다.
(삼상16:14-15) (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15)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
이렇게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들어가자, 사울 왕은 인격과 정신이 무너져 충신 다윗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박수무당을 찾아가 귀신에 이끌려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이처럼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고 더러운 악령이 들어가게 되면, 그의 인격과 속사람이 무너져 그의 삶이 비참하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회개하는 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을 깨끗하게 하고, 말씀에 순종하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둘째로, 속사람이 강건하려면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의 보좌에 모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참된 양식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6:53-58)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건강을 잃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을 받게 됩니다.(계1:3)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시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항상 계시는 생활로 속사람이 강건하여, 하는 일마다 형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기 위하여 전심전력 투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며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신앙을 가질 때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며, 마음에 기쁨을 안겨주고, 그 말씀은 순수하여 사람의 눈을 밝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티없이 맑아서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시19:7-10)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되 도의 초보자처럼 언제나 우유나 먹지 말고 단단한 음식도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라고 했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을 줄 알아야 장성한 자라고 했습니다.
(히5:12-14)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을 줄 아는 성도들이란 자신에 대한 어떠한 책망의 말씀도 겸손히 들을 줄도 아는 성도를 말합니다. 책망의 말씀을 들을 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줄 아는 자가 장성한 어른의 신앙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믿음이 장성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강단에서 말씀이 선포될 때, 아멘으로 순종하고 믿으면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에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로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속사람이 강건한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뿌리를 깊이 박고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엡3;17-19)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속사람이 강건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 고난은 이렇습니다.
(마27:27-31)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27:39-44)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참으로 견뎌내기 힘드신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 그리고 혹독한 육체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사53:7) 오히려 예수께서는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눅23:34)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참으로 원수같은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기 때문에 원수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스데반도 동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행7:59-60)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스데반의 마음 속에 충만했기 때문에 그러한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속사람이 강건해야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뿌리를 깊이 박고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뿌리를 깊이 박고 그 사랑 가운데 살아갈 때 속사람이 건강할 뿐만 아니라, 속사람이 윤택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건강상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는 말씀과 믿음, 그리고 성령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영적 건강 상태가 나약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강건한 삶의 축복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항상 계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성도 여러분의 속사람이 강건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범사에 여유있고 윤택하며, 범사에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친 구
엡 3:14-21 / 조용기 목사
할렐루야~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자리에 계십니다.
주의 천사들도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도 이 자리에 임하여 있습니다.
오늘 옆에 계신 분을 향해서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한번만 더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한번 기도드리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주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러 모아 주셨아오니 감사합니다.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고 영안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 알아 주님과 함께 어둠의 세상을 비추는 등대가 되게 도와주시옵기 간절히 기도하옵고 원합니다. 거룩하신 보혜사 성령님이여, 바람같이 불같이 생수같이 임하여 역사하여 주시옵시고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게 도와주시옵소서. 훼방하는 모든 원수 마귀는 각자의 몸에서 떠나갈지어다. 이 교회에서 물러갈지어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라. 성령의 불로 불로 나타나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친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부모, 이웃, 동역자, 경쟁자, 원수, 무관심한 자 등과 어깨를 부딪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다 친구는 되지 않습니다. 친구는 이해와 동정과 사랑의 관계가 깊으며 시련과 환난과 고통 때 큰 위로와 도움이 되는 이웃을 친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UC 버클리대학의 교수인 레너드 사임(Leonard Syme) 박사는 사회적 유대감과 사회적 지지 시스템이 인간의 생명과 질병에 큰 영향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즉, 사회적으로 유대 관계가 많을수록 그 사회 구성원들은 더욱 건강하고 사망률이 낮은 반면, 구성원들이 각각 고립되어 있을수록 건강은 더욱 나빠지고 사망률도 높다는 것입니다.
사임 교수는 일본이 건강 세계 제1위라고 말하면서 그 원인에 대해, 일본은 사회적, 문화적, 전통적으로 유대관계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하도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사니까 유대가 강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친밀하고 밀접한 인간관계는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예방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친구는 이해와 동정과 사랑의 관계가 깊으며 어려움을 당할 때 큰 위로와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좋은 친구를 많이 가진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좋은 친구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꾸만 신세만 지고 부담스러워지면 친구의 관계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많이 가져야 되고 또 좋은 친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에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많은 친구가 있어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살아가면 굉장히 힘이 솟아오르고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좋은 친구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에 보면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친구가 되신다. 그것 어만 소리 아니냐! 그런 질문을 할것입니다만 성경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된다고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로 15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라”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또한 우리 친구가 되십니다. 주님과 우리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 관계뿐 아니라 친구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19절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2장 4절에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뿐 아니라 친구이기 때문에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라는 복을 예수 믿을 때 알든지 모르든지 우리에게 덮어준 것입니다. 여러분 굉장한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았느냐.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제일 먼저 중생의 복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죄가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공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둘째로, 성령충만의 복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성결과 성령충만의 은총을 십자가에서 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내가 다 이루었다 할 때 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과 병을 짊어지고 치료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넷째,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저주를 제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섯째의 축복은 재림의 축복으로 부활, 영생, 천국이 종국적으로 우리가 갈 운명의 처소인 것입니다. 삼중축복이란 그러므로 우리가 이 주님을 모시고 살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주님 앞에 잘되면 주님께서 영혼이 잘됨과 동시에 우리 기도를 통해서 들으시고 범사에 잘되게 하시고 건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면 영혼이 잘못되면 범사에도 잘못되고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자마자 십자가의 공로를 통하여 누구나 예외 없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이미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중생의 축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의 축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유의 축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복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재림의 축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이 약속을 알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해주시는 주님, 나에게 지금 이 삼중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면 이미 약속된 축복이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축복이 약속되지 않았으면 몰라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친구에게 준 축복을 우리 마음 속으로 알아야 됩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로 19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뭐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품에 안고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모든 좋은 것은 다 주기를 원하고 모든 도움은 다 베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지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볼 때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언제든지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여러분 생활 속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 다음으로 오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보혜사 성령인 것입니다. 구약 4천년 동안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신약 33년 동안에는 아들 예수님이 역사하셨고 이제 예수님이 부활승천하고 난 다음 우리에게 내려와서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께서 와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같이 있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친구되신 보혜사 성령님 성령은 우리에게 와서 신령한 세계를 깨닫게 하고 체험하게 하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친구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우리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영안을 열어서 천국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알게 해주시고 또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고 방언을 말하게 하고 예언을 말하게 하고 감사 드리게 하고 우리의 심신에 연약함을 성령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허약한 마음과 육체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여러분은 오늘 앉아 있는 것 두 분이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 속사람이 겉사람 속에 앉아서 이 교회 와서 앉아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육체의 사람만 여러분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속사람이 여러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속사람 속에 계셔서 여러분 육체 속에 성전삼고 와서 거하시는 특이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기도하는 것조차도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될 것은 방법을 모릅니다. 기도해야 될 일을 모릅니다. 또 어떻게 기도할지 길을 모릅니다. 성령이여 저를 도와주셔서 기도하게 해주시옵소서. 성령이여 나는 못합니다. 성령께서 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 마음 속에 희안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고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친구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 건방진 일 같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될 뿐 아니라 우리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만드셨지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생명의 친구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육체의 구원의 친구가 되시고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는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로 25절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여러분 지금 살아있고 숨쉬고 여러분이 천지를 이해하고 지금 사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친구가 되셔서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 생명과 호흡과 만물인 것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하신다. 모자라게 주는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넘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우리 하나님은 내게 언제나 넘치게 응답하시지 모자라게 응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성격이 모자라게 역사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손이 크셔서 넘치게 해주시지.
우리 사람들도 손이 큰 사람하고 적은 사람이 있습니다. 적은 사람에게 뭘 좀 달라고 하면 아주 눈꼽만큼 주면서 그것도 수없이 곧 죽는 소리를 합니다. 달라고 뭐 빌리면 저보고 빌려야 해요. 저는 손이 커서 덥썩 줍니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집어줘 버려요. 나중에는 나중에는 백수강산에 청수강산에 갈지라도..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손이 굉장히 크셔요.
요즘은 예쁘고 다양한 필기구가 많이 나와 있지만, 예전에 볼펜하면 뭡니까? ‘모나미’입니다. 모나미 볼펜.. 보세요. 지금도 사용해요. 우리 중고등학교 다닐 때 쓰던 저 모나미 볼펜이 오늘도 대인기로 팔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나미 하면 볼펜, 볼펜하면 모나미 할 정도로 모나미 볼펜은 모든 사람들이 즐겨 쓰던 필기구였습니다. 모나미 볼펜은 1963년에 5월 1일에 만들어진 것인데 볼펜에 새겨진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15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려서 물고기를 잡으니 물고기가 몇 마리였습니까? 153마리였습니다. 그래서 물고기의 숫자와 153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그와 똑같이 153을 볼펜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 이 볼펜은 기적같이 많이 판매가 되어 회사 이름도 아예 ‘모나미’로 바꾸었습니다.
모나미라는 말은 따라 말씀하세요. “나의 친구” 볼펜 모나미 나의 친구. 하나님도 나의 친구, 예수님도 나의 친구, 성령님도 나의 친구, 모나미도 나의 친구.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구주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친구 삼아 인생을 살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차고 넘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흘려서 이루어 놓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은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보고 모나미, 모나미, 가져라. 다 이루었다. 이루신 은총을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하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기억안 할 수 없습니다. 피로써 사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를 우리에게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을 알고 우리는 담대하게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친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모나미 하나님인 것입니다.
2. 우리는 친구 되신 하나님을 닮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시면 어떤일이 생깁니까? 사람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도 참 귀중한데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시면 삶의 믿음과 자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능력이 있고 모든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친구가 되면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하물며 이러한 분이 남편이 내 친구가 되든지 아내가 내 친구가 되면 그 집안은 왓따입니다. 아주 축복받은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삶속에 눈에 안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친구가 된다면 얼마나 마음에 강하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까? 어떤 일이든지 기도하고 의지할 수 있고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3장 5절로 8절에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이 과장된 것입니까? 아니지요.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일생을 살면서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편안할 때나 고난스러울 때나 결코 주님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같이 계신 것입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같이 계십니다. 주님이 같이 계시면 어느 곳에 가도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어디가나 우리는 그곳을 개척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새로운 사람 살만한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친구로서 같이 계시면 희망 즉 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꿈을 주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사람을 그대로 주님께서 만나주지 않습니다. 만났으면 그 사람 마음속에 크고 적은 꿈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 속에 꿈을 가지면 그 꿈을 바라보면 그 꿈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원을 여러분 마음 속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원을 받았지만 실상은 그것이 여러분 소원이 되어서 여러분 가슴속 에 임합니다. 소원이 뭐냐. 즉, 여러분의 꿈인 것입니다. 크고 적은 소원을 언제나 하나님이 주셔요. 소원이 없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소원이 없는 사람 아무 소원 없는 사람. 공동묘지로 보내려고 했지만 한사람도 없네. 다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꿈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친구가 되셔서 오시면 구원받아 천국만 가는 것이 아니라 희망 즉, 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의 하나님이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주시고 난 다음에 소망이 넘치게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생활이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시며 소망의 아버지, 소망의 아들, 소망의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소망이 충만해야 될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소망이 충만해야 돼요.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을 바라보고도 하나님이 계시면 그 공간에 소망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친구로 삼으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끼리는 닮아요. 그런 것 굉장히 조심해야 돼요.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을 자기 친구들하고 자기가 노는데 내버려 두고 무관심하면 나쁜 친구는 좋은 행실을 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쁜 친구들 닮아서 나쁜 여러 가지 일을 해요. 좋은 친구를 사귀면 좋은 친구를 닮아서 좋은 일을 하게 돼요. 우리도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데 좋은 친구를 사귀면 우리가 어찌하든지 하나라도 좋은 것 배우고 나쁜 친구를 사귀면 나쁜 친구를 따라서 한발자국이라도 나쁜 데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친구로 사귀면 기가 막히지요. 하나님같이 좋은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5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하나님이 우리 친구가 되시고 하나님을 본받는 우리가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 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면 어찌할 도리없이 우리의 삶이 점점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빛 가운데 있으므로 빛의 열매를 맺습니다. 빛의 열매는 따라 말씀하세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다 빛의 자녀로서 이렇게 변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3. 좋은 이웃은 좋은 친구가 되는 것
셋째로, 좋은 이웃은 좋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은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친구는 좋은 이웃이 되고
누가복음 10장 30절로 34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그날 예루살렘에서 장사한 것 다 뺏기고 늘씬 얻어맞아 죽게 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왜 예루살렘에 올라 옵니까? 장사하러 여리고에서 물산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많은 물산을 거기에서 구해가지고서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하루종일 시장에서 팔아서 돈을 넣어가지고서 시골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가지고서 다 뺏기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실컷 얻어맞고 돈 다 뺏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의 길거리에 던져 놓았는데 거기에 교회의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쯧쯧쯧 조심하고 다니지 어떻게 해서 얻어맞아 저모양이 되었나? 얻어맞아도 싸다.” 안도와 주려면 욕을 하지 말지. 욕을 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레위인이 따라옵니다. “너 맞았구나. 피투성이가 됐네. 내가 알턱이 뭐가 있냐.” 그냥 가버립니다. 종교인들이 위선적이 되고 친구가 안됩니다. 누구보다도 친구가 되어야 될 종교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굉장히 위선자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그 옆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짐승에서 내려서 “이럴 수가 있나. 사람이 이렇게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 이를 돌봐줘야 되지.” 당장 그는 그의 상처를 자기의 포도주로 씻었습니다. 포도주와 기름은 꼭 가지고 다니는데 뜨거우니까 기름칠하고 목마르니까 목마르니깐 포도주를 마신다. 포도주로써 그 상처를 씻고 그 다음에는 기름으로써 그를 유하게 하고 난 다음에 자기 옷을 찢어가지고서 붕대로 감아주고 그를 짐승에 태워가지고서 이웃 주막에 갖다 맡겨서 돌봐 주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누가 이 사람의 친구냐?” 사마리아인이 친구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와같은 좋은 친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제사장 같은 사람 아닙니다. 레위인 같은 사람 아닙니다. 사마리아와 같은 좋은 친구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욕을 해도 주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분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일을 하면은 정말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8절로 19절에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선을 행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 하늘에 다 쌓여있는 것입니다. 다 여러분, 하늘에 가면 여러분에게 돌아와요. 내버리고 쓸데없이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로 18절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인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실제로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하자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잠 19:6)
너그러운 사람에게 은혜 구하는 사람 많고 선물주기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 친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더 친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친구같은 남편과 친구같은 아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2,25)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
이런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친구가 된 효과와 가치인 것입니다. 교회 그냥 왔다갔다 의식과 형식만 취하고 행위는 안믿는 사람보다 나은 것이 조금도 없고 비난하고 서로 공격하고 손가락질하고 분열하면 그것이 무슨 성도요, 무슨 친구인 것입니까? 우리가 교회 왔다갔다 하면 누구보다 무엇이 달라도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친구로 사귀고 있는 우리가 아버지가 나의 친구, 예수님이 나의 친구요, 성령이 나의 친구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세상에 주셨고 아들은 몸을 찢어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굉장한 재산을 주셨고 성령 보혜사는 이 땅에 내려와서 지금 우리를 성전삼고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이래뵈도 굉장한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 눈에 안보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눈에는 보입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이것 알고 보고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모두 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는 주님이 우리 친구가 되기 때문에 이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한국기독교 저널”지에 지난 2007년 11월 9일자로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미국 화폐와 동전에 새겨진 문구인 “In God We Trust”,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 말은 청교도들에 의해 건립된 미국의 종교적 유산이 반영된 문구입니다. 이 말은 1864년 워킨슨(M. R Watkinson) 목사의 제안으로 2센트 짜리 동전에 새겨졌다가 그 다음해에 은화와 금화에도 새겨 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56년 미국이 소련과 냉전을 벌이던 시절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서 국가적인 모토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7년 10월 1일부터 1달러 지폐 뒷면에도 새겨 넣었습니다. 그러나 5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 문구에 대하여 사회 곳곳에서 비판이 일어났습니다. 반대자들은 이것은 국교를 제정하는 행위로,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불화를 조성한다고 없앨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재판이 있었지만, 미국 국민의 대부분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에 찬성했습니다.
2006년 플로리다 주에서는 이 말을 주의 공식 모토로 지정하고, 2007년 인디아나 주에서는 자동차 번호판에 이 문구를 새겨넣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시면 우리는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삶 가운데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어난 그날부터 이날까지 우리가 친구가 되어 주었어요. 아버지는 우리 친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나님이 독생자를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독생자를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친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목숨을 십자가에서 못박았습니다. 몸찢고 피흘려서 우리의 영원히 불탈 죄악을 청산해 주셨습니다. 거기에서 용서의 복음, 성결의 복음, 치료의 복음, 축복의 복음, 부활 영생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삼중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 친구입니다.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 없습니다. 지금 성령 보혜사는 여러분 마음 속에 와서 성전삼고 계시는데 여러분에게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을 주시고 영감을 주시고 신령한 세계를 깨닫게 해주시는 친구인 것입니다. 와~ 참 친구 많네. 진짜로 멋진 친구 모시고 있네. 부자 부자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큰 부자가 없습니다. 절대로 열등의식이나 좌절감을 가지지 마시고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뒤로 물러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결론>
주일 교회에 나가는 것은 우주에서 제일 좋은 친구 되신 하나님을 만나러 나가는 것입니다. 우주에서 제일 좋은 친구를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나 같은 못난 인간도 어떤 누구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 나가면 자동적으로 성도들 서로 만나고 낯이 익게 되고 친구가 되거든요. 그러니 나 같은 사람도 어떤 사람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교회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은 모두다 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친구가 득실거립니다. 교회만큼 수많은 친구들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다 친구가 되는 것을 배우고 친구가 되고 가정에 들어가서 가정에 친구들이 모이게 되고 사회 친구들이 모이게 되면 세계는 평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모두다 하나님의 친구가 된 것을 아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쁘게 생각하고 흡족하게 생각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무릎 기도
엡 3:14-19 / 이규왕 목사
갓난아이가 집안에 태어나게 되면 부모는 물론 온 가족이 어린아기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장차 출세하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아니라 아기가 기어야 할 때면 엉금엉금 기고, 걸음마 해야 할 때면 비틀비틀하며 발을 내딛고, 말을 해야 할 때면 어눌한 소리로 엄마라는 말만 하면 온 식구가 다 기뻐하고 좋아하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서 그 아이가 자라면 또한 그 나름대로 기대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신이 아니라 육신의 부모와 같이 인격적이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대한 기대가 있으실 것입니다. 과연 그 기대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들이 겨우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 것만으로 만족하실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마치 육신의 부모처럼 당신의 자녀된 우리에게 과분한 것이 아니라 각자에 걸 맞는 기대가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선지자가 되고 사도가 되고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순교자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영적으로 무지하고 무능력한 우리들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때가 되면 기고, 때가 되면 걸음마를 하고, 때가 되면 말을 할 줄 알고, 때가 되면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된 우리에게 향하신 기대와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속사람의 건강
오늘 성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죄로 차디 찬 옥중에서 고통 받는 죄수의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집에 아이들만 두고 떠나 온 엄마처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보낸 사랑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과 마지막 작별할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행 20:36-38)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여기서 더욱 근심하고 라는 말은 ‘고통하다, 괴로워하다, 슬퍼하다’ 라는 뜻으로 사도 바울과 에베소 교회와 어느 정도로 사랑하는 사이였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모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그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다면 이제 로마 옥중에 수감되어 고난 받고 있으면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 마치 사랑한는 자식을 멀리 두고 온 엄마가 자식을 그리워하는 심정과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럴 때면 그 그리움이 기도가 되는 것처럼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옥중에서 기도하였을 것이며 그 기도가 바로 오늘 성경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차디 찬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마지막 작별하던 모습을 기억하면서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는 기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엡 3:14-15)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기도하는 자세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앉은 자리에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두 손을 들고 서서 기도하기를 즐겼습니다. 넓죽이 엎드려 기도하기도 합니다. 갖가지 기도 자세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자세로 기도하는가 하는 외형적인 것보다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는가 하는 것이 더 경건한 모습이고 하나님이 더 잘 응답해주시는 기도의 자세라고 꼭 지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외형적인 형식보다 내적인 자세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기도 자세는 내적인 마음의 자세를 표현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도 자세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왕 앞에서 신하처럼, 부모 앞에서 자식처럼 그 힘과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하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시기 직전 마지막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눅 22:41-42)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의 그 같은 기도에 대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의 기도를 돕도록 하셨습니다.
(눅 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오늘 성경 본문은 바울 사도가 옥중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고백을 통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가를 깨달아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엡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겉 사람은 땅의 티끌로 만드신 반면 속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와 같은 인간은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마심으로 겉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속사람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자라고 건강해 질 수 있기 때문에 겉 사람과 속사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겉 사람인 육신은 아무리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고 마셔도 자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늙고 병들어 죽고야 마는 것이 육신의 한계입니다.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겉사람과 속사람의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우리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것이 더 편하고, 주일을 성수하는 것보다 내 마음대로 자유하게 보내는 것이 더 편하고, 겉 사람의 일회 양식인 식사는 한 끼니도 거르지 않으면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는 성경은 큰마음을 먹어야만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육신의 건강을 위해 하기 싫은 운동을 억지로 라도 하는 것처럼 속 사람의 건강을 위해 억지로 라도 영적으로 건강해지는 삶을 억지로 라도 배우고 훈련해 야 할 필요가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고 또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삶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지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했다는 것에 대해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주 결심하지만 잘 안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왜 우리가 마땅히 우리의 의지로 해야 할 것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바울의 무릎 기도에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말할 수 있는 입과 먹을 수 있는 입과 들을 수 있는 귀와 일할 수 있는 손과 걸을 수 있는 다리를 주셨지만 우리가 때로 병원에 가보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력이 있어야 하고, 손발만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체력이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비결도 성령의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속 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무릎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도 절실한 것입니다.
2. 주님의 내주(內住)
사도 바울이 차디찬 감방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두 번 째 제목은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가슴 가슴에 거주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여기서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라는 말은 나그네처럼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인처럼 한 장소에 정착하여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을 비롯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러한 사람의 마음속에 기쁨과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가장 확실하게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겉 사람이 얼마든지 자유 할 수 있는 신분과 학벌과 지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사명을 위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겉 사람이 부자유와 주림과 목마름과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그러나 그의 속사람은 정반대로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유 함과 기쁨과 감사가 항상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물론 그것은 겉 사람과 속사람의 갈등이기 때문에 겉 사람에만 치우쳐 살아온 사람은 그 같은 갈등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똑같은 배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할 때 때로는 거센 풍랑이나 급격한 기류의 변화로 말미암아 기체가 크게 요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의 반응은 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담담한 자세로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혹시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공포감에 질려 있는 모습을 하기도 합니다.
왜 똑같은 기체 안에서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각기 마음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현실이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의 자세로 그 현실에 임하는가에 따라 겉사람이 반응하는 것이 정반대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처한 현실은 그렇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지를 너무나 모르시고 하신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세히 보게 되면 무엇 무엇을 하라고만 말씀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를 테면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호와 께 맡기라’ 등등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그 성경구절을 읽고 그것을 암송한다고 해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는 내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겉 사람이 고난을 받고 있지만 비록 감옥에 있을지라도 속사람은 평화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것은 사도 바울의 속사람인 그의 마음속에 주님이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며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임을 에베소를 시작하는 서두에서부터 가르치고 있습니다.
(엡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함께 하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음을 우리는 믿고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이 주는 평화를 누려야만 합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언제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나요? 세상 끝 날까지 만도 감사한데 역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잊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까지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온갖 박해를 받으며 마치 목자 잃은 양과 같고 엄마 잃은 미아처럼 고난을 받고 있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지만 옥중에서도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주님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마음 마음 속에 임재하시기만 하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마치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그들의 마음속에 메마르지 않는 기쁨과 평화의 축복이 임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무릎 꿇고 예수 그리스도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심령에 내주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와 같은 주님의 내주하심의 축복을 구하기 위해 사도 바울과 같은 무릎기도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가 아닙니까?
3. 주님의 사랑 충만
사도 바울이 차디찬 감방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세 번째 기도제목은 몇몇 사람이 아닌 에베소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엡 3: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깨달아’ 라는 말은 객관적인 이해의 정도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지각과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부모 부부 형제 이웃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지만 그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유한하며 사랑만이 아니라 상처도 따르며, 기쁘고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픔도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사랑,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사랑, 시절을 좇아 갖가지 열매를 맺는 것 같은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은 그와 같은 인간의 사랑을 뛰어 넘는 초월적인 사랑이며, 입체적인 사랑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이 혈기가 등등했던 미움의 사람이 사랑을 설교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인간의 사랑에 뿌리를 박은 돌짝 밭 같은 사랑이 아니라 좋은 땅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사랑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지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이해의 차원을 뛰어 넘어 깊이 젖어들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으로 마치 점이나, 선이나, 면이 아니라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무한한 입체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우리가 나누는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과의 사랑 정도가 아니라 가고 온 세상 만민에게까지 골고루 미치는 한 없이 드넓은 사랑입니다.
(골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2)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도 어제 오늘만이 아니라 태초부터 세상 종말 아니 영원토록 변함이 없이 계속되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렘 31: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3)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는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저 높은 하늘 보조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임하신 정도가 아니라 인간들처럼 죽기까지 하시고 무덤에 장사되기 까지 깊고도 깊은 사랑입니다.
(눅 23: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고전 15: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4)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는 당신의 백성들이 비록 땅위에서 고난을 받으나 장차 높은 하늘나라에 기업을 얻어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골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과연 우리가 인간 세계에서 그와 같이 무한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경험한 적이 없으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경험도 못했고 이해도 되지 않는 사랑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그와 같이 입체적인 사랑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사랑이 그와 같이 전인적인 사랑이라면 우리가 도저히 실천하기는 어려운 사랑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기독교안에 그와 같은 사랑의 요소가 제거되고 사랑의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다면 기독교는 무능력한 존재가 되고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는 종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입체적인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뿌리 내리며 점점 자라 사랑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위해 기도한 것은 교회의 생명력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에는 그와 같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었을 때는 건강한 교회요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였으나 시간이 흘러 가면서 그 사랑을 상실하였을 때 교회는 약화되고 결국 무너지고 말았음을 지금도 에베소를 방문하는 성지 순례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계 2:4-5]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너나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이 무한한 사랑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인간관계 속에서 경험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깨닫고 맛보아야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 사랑을 간절히 구하는 무릎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같은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시기 위해 금번에 심령 부흥회를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동안 이론적으로는 말이 들어 온 말씀이지만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고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못한 은혜들이 아닙니까?
금번 부흥회에 하나님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아니라, 있으면 좋고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은혜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사모하며 사도 바울과 같은 무릎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엡 3:14-19]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통치하시고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은혜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특별 새벽기도회 시간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왕이신 나의 하나님 앞에 무릎 기도를 드리며 부흥회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한 계단 더 업그레이드 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 같은 우리의 신앙이 기지 못하던 사람이 기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고 뛰지 못하던 사람이 뛰고 신앙이 성숙해지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만일 금번 부흥회에 말씀과 성령을 통해 그와 같은 은혜와 복을 받아
1) 육신의 건강만이 아니라 속사람의 건강과
2) 주님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모시며
3)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감동과
4) 온 성도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랑의 공동체로 거듭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그 변화된 모습을 보고 천국에 앞서간 성도들과 더불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축복이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기도(1)
엡 3:14-19 / 박덕기 목사
신약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의 기도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기도에 대하여 로이드 죤스 목사는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리 오래 살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웅변가가 나타날지라도, 이 말씀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참으로 이 기도는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의 계시의 영역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에베소서를 쓰고 있었을 때, 그는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었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비록 죄수의 신분으로 갇혀 있어서, 에베소 교인들을 방문하거나,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을지라도, 사탄은 단 한 가지, 즉 그가 기도하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바울을 감옥에 가둬 놓을 수 있으며, 병사들을 시켜 쇠사슬로 묶어놓게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탄은 아무리 미약한 신자일지라도,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이나 악한 사람들이 우리를 에워싸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언제든지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위대한 도고 사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매우 활동적이고 바빴습니다. 여러 교회를 위해 편지를 쓰기도 하고, 또한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옥중 서신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적 여유도 있으며,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합니까? 쓸데없는 일들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기 위해, 그리고 서로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전혀 만나본 일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기도를 통하여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점은, 사도 바울의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렇게나 기도하지 않았고 매우 긴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때로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빌거나, 또 어떤 경우에는 서서 기도하는 경우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형식주의적이거나 경솔하고 준비 없는 태도는 똑같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영적인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마치 전보의 문안과 같은 간결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 그리스도인 청년들 중에 그러한 경우가 많이 있는 듯 합니다. 자세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는 길을 바로 알고 있었던 사람을 든다면, 그는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릎을 꿇고 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기도드리는 그 분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는 구절에서 ‘앞에’라는 말은 ‘마주 대함’ 또는 ‘정면으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마주 대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과 마주 대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란, 곧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땅에 있는 모든 부족이나 민족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곧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설교하면서 ‘우리가 다 그의 소생’이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서에서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권속’이란 다른 말로 ‘하나님의 가족이란 뜻입니다. 곧 구속함을 받은 가족을 말합니다. 그 누가 되었든지 간에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래서 비록 여러분이 세상에서 잘 알려지지 않고, 혹 무시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족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항상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시며,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는 관심으로 돌보아주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과 행위에서도 이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책임 지워진 그 이름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가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호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들의 무슨 어려운 환경을 변화시켜 달라는 식의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자신을 속히 감옥에서 나오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의 무슨 소원성취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기도에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들과 그 차원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특징으로는 사도 바울의 기도가 오로지 영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물질적인 것에 대하여서가 아니라, 영적인 것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그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가르치심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 대하여 항상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곤경에 처하게 된 원인은 잘못된 방법, 즉 물질적인 것과,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 즉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영적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척도로서, 그의 기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여러분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예화-뉴욕의 목회자 요엘 파커 목사의 간증입니다. 파커 목사의 교인 중 아픈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의 청탁으로, 아이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파커 목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아이의 병을 낫게 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 어머니는 파커 목사의 기도 중,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묻지 말고, 그냥 낫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여 주기를 강권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 아이는 병에서 나았으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묻지 않는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마침내 그는 불량아로 자라서 살인죄를 범하고, 결국 교수형을 받아, 불행하게도 어머니의 생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우둔한 인간의 최고로 지혜로운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주된 관심이 하나님의 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고, 여러분의 영혼에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주된 관심이 물질입니까? 사업입니까? 건강입니까? 자녀입니까? 아파트입니까? 자동차입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영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육체적인 소욕에 관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고 기도하였습니다. ‘속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후 4:16에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했고, 롬 7:22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했습니다. 속사람은 겉 사람과는 상반된 부분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은 대부분 겉 사람과 속사람과의 차이점을 알지 못합니다. 속사람은 육체의 모든 재능과 기능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 곧 영적인 부분 영혼을 말합니다.
불신자들은 속사람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속사람을 믿지도 않고, 오직 겉 사람으로만 살아갑니다. 단지 육체로만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비극입니다. 불신자들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불신자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의 이성을 가진 동물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두뇌는 동물의 두뇌보다 꾀가 많습니다. 불신자에 의하면, 인간은 짐승보다 좀더 꾀가 많은 동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동물적 본성 외에 있는 다른 부분, 즉 바울이 속사람이라고 말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몸의 건강에 있습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값비싼 음식이라도 달려가서 사먹는 것을 봅니다. 흔히 말하는 보신 관광이니 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지금도 건강 강좌에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이 사회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의 몸이 약해서라기보다는 너무 건강해서 문제가 됩니다. 이 사회의 모든 성적 타락과 방종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건강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넘쳐나는 건강을 좋은 일에 쓰면 다행이겠는데, 건강을 가지고 성적인 방종과 쾌락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진정 강건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속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전도 여행과, 박해와 곤경 때문에 그의 몸은 점점 더 쇠약해져 가고, 침침한 눈은 그를 괴롭혔으며, 그의 몸은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겉 사람은 후패해 갔지만, 그러나 그의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여러분은 ‘속사람’에 대하여 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겉 사람은 점점 후패하고 언젠가는 무너질 날이 오고야 말겠지만,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지며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 속사람이 성령에 의하여 강건하여지게 될 때에, 우리들의 겉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처음에는 어린 아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충분히 자라지 않았기에 강건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약하고 무지하며 세상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릅니다.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합니다. 그러기에 그것들의 추함과, 그 안에 있는 더러운 일을 모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일 수가 있습니다. 회심하는 바로 그 순간에는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었다 해도,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어린 아이로서 그는 처음에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고, 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은 복음전도자들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진한 어린 아이와 같은 초신자는 이제부터 그의 생애에 절대로 어두운 구름이 덮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게 어두운 구름이 덮이고, 어려움이 발생하고, 그 앞길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럴 때 당황하게 되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심지어는 배교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 그가 아직 어려서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와 같은 신자는 속사람이 강건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할 필요는 또한 원수 마귀, 곧 우리를 참소하는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탄의 힘은 강력할 뿐만 아니라,음흉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 또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위대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속사람이 강하여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지성이 강건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이 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난 교리나 신학엔 관심이 없어, 난 그저 믿기만 하면 되니까”라고 말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태도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에베소서에서나 혹은 신약 성경 안에 있는 다른 심오한 가르침을 정말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 에베소서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여 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성이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엄습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망하거나 자칫하면 불길한 예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지도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타락의 결과로서 우리의 의지는 연약하고 우유부단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하늘의 신령한 지혜로 충만케 하여 주셔서,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뜻을 깨닫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가 깨달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강한 믿음과 의지와 결단력을 허락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간절히 도고하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형편이 아무리 어렵고, 사방이 다 둘러싸여 막힌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가는 길은 항상 열려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사도 바울이 본을 보여 준대로 영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구하십시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또한 우리에게 ‘속사람’이 있음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속사람에 비하면 겉 사람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겉 사람만을 위해서, 육신의 몸뚱이만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결코 만물의 영장이라 할 수 없고,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맨 먼저 그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육신의 건강을 잃으면 우리의 대부분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은 건강관리에 얼마나 힘쓰는지 모릅니다. 병원에를 가고, 보약을 먹고, 건강식품 장수 식품이 불티나게 팔립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렇듯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속사람의 건강, 영혼의 건강에 대해서는 관심 없이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중에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육신은 후패해지도록 되어 있고, 결국에는 무너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강한 신자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속사람이 약하고 병들면,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것처럼 신앙이 무너지고 되고, 그리고 갑작스런 참사로 목숨을 잃은 사람처럼, 갑자기 닥쳐오는 영원한 파멸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할 필요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의 기도(2)
엡 3:14-19 / 박덕기 목사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맨 먼저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한 사도 바울의 주된 관심은 속사람, 곧 영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참된 신앙을 갖기 전에는, 사람은 누구나 겉 사람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겉 사람이란 육신을 포함해서 용모, 인기, 명예, 부와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겉 사람만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 사람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어떤 집에 사는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 가 등, 그가 가진 그 무엇에 의해서 그를 평가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겉 사람이 아닌,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처럼, 육신의 건강보다 속사람에게 더욱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속사람의 강건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살았던 사도 바울은 어느 날 인생의 석양을 앞에 두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사도 바울은 겉 사람에게 인생의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겉 사람에게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살면, 그 겉 사람이 사라질 때, 그의 모든 희망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불멸의 속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살면, 겉 사람은 늙고 시들어도, 언젠가 죽음이 닥쳐와도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평가할 때, 이 속사람에 의해서 평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 관해서도 겉 사람의 얼마나 갖고 있는가 보다는, 내가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 이것은 속사람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은 얼마나 성결해져 가는가?’ ‘나는 얼마나 더 주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가?’ 이 같은 속사람에 대한 관심과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이 건장하고 건강한 사람은 무슨 활동이든지 힘껏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인식, 진실의 추구, 정의의 실현, 신앙의 실천 등에 있어서 이를 활발하게 해 가는 일에는, 속사람이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한 두 번째 내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는 것이었습니다. 클레멘트스톤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질병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우리의 근본적 문제는 인종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적 문제가 전쟁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적 문제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변화되고, 마음이 바뀌어 질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에게 있어서 마음의 혁명이야말로 모든 문제에 앞서서 중요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는 이 말은, 그리스도를 새롭게 영접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후 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했고, 롬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계신다’는 말은 ‘정착하여 집에 산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단지 우리를 방문하거나, 일시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를 온전히 지배하고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를 깨닫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계 3:20에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역시 불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닫힌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는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온전치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부요하여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영적으로 몹시 가난하며 벌거벗은 자들이요, 눈멀고 속이 빈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자들에게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영적 생명을 소유했지만, 매우 가난하여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나, 더욱 깊이 알지는 못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긴 하지만, 주님께 온전히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고, 주님이 삶의 중심에 계시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은 갈 2:20에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의심도 주저함도 없이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 교인들도 그와 같은 고백이 가능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인격의 가장 중심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감정의 좌소일 뿐 아니라, 지성과 이해력과 의지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영혼의 거처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지성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의 가장 중심에 거하시기를 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하시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라,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의 열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의지 속에 거하시고, 우리의 전체 생활을 지배하시는 요인이 되시며, 우리의 생활을 통제하시고 지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계시고, 우리의 삶의 중심에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에 계시고, 생활에 중심에 계십니까? 우리가 정직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성도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내 맘이 좋거든/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우리는 이와 같은 고백을 정직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넓은 사랑을/어찌 다 말하랴/그 사랑 받은 사람만/그 사랑 알도다. 만민의 구주 예수여/귀하신 이름은/천지의 온갖 이름 중/비할 데 없도다. ♫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찬송가들을 공식석상에서 불러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진실치 못하고 부정직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구주를 생각만 해도 좋습니까? 이 찬송이 여러분에게 해당이 되십니까?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떻합니까?/예수님이 좋은 걸 어떻합니까?/세상에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네/예수님이 좋은 걸 어떻합니까?♫ 이 복음성가도 여러분에게 해당이 되십니까?
예수님이 그 마음에 계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위, 육과 영을 다 깨끗케 해야만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집에 귀한 손님을 초청할 때, 여러분은 집안의 모든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손님을 홀대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집에 대통령이 찾아온다면, 그 노력을 배나 경주할 것입니다. 다음은 한 경건한 여성도의 고백입니다. <나는 매일 밤 잠 자리에 들기 전에 집안을 정돈하는 한 여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만약 주님께서 아침이 되기 전에 오신다면, 자기가 정돈을 하지 않는 주부라는 것을 하나님께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나도 가끔 그 여인처럼 언제나 잘 정돈하며 살고 싶었지만 젊은 주부로서, 아내로서, 또 엄마로서 대체로 나의 집은 합격점을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 하루를 보내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집안을 깨끗이 하는 것은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는 그 동네의 내 집이 주님에게 첫 번째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가 사시는 곳, 즉 내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집이 얼마나 청소가 잘 되었고 깨끗 하느냐보다, 주님이 거하시는 우리 마음의 상태가 얼마나 청결한가에 훨씬 더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내 집을 청소하듯 나의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 내 마음의 집을 주님을 위해 깨끗이 치우고 싶습니다."
다음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신다면, 어떤 다른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후 6:14-16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조화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계신다면, 우리의 마음에서 없어져야 할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그것들과 함께 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거룩하고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기를 갈망하고 환영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알맞은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 일서 2:15-17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와 동시에 세상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기 계시기를 원한다면, 이 세상과 세속적인 마음, 그리고 세속적인 사고방식과 세속적인 행동과 세속적인 태도를 버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궁극적인 싸움은, 결국 자아와 자기애를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기를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음은 프랑스의 신교도인 데오도르 모노의 고백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부끄러움과 슬픔의 시간이 있었다네./내가 구주의 연민을 무시하고서/거만하게 대답하였네/내 마음 속엔 오직 나 자신 뿐/당신은 조금도 없네.
그 분께서 나를 발견하셨고/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를 보았네/그의 기도 소리를 들어보니/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욕심이 가득한 나의 마음은 힘없이 고백하네/내 마음의 일부는 나의 것이고/나머지 일부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내 마음 속엔 오직 나 자신 뿐, 당신은 조금도 없네!’라고 말했고, 그 다음에 ‘내 마음의 일부는 나의 것이고, 나머지 일부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단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고백하기를, 매일 매일, 그의 다정한 자비와/치료하심과, 도와주심과, 채워주심과, 자유롭게 하심과/사랑하심과, 강건하게 하심과, 아! 인내하심이/나를 겸손하게 만들어, 이렇게 고백하게 하시네/자아는 점점 사라져가고, 주님이 더욱 지배하시네. 그 다음에 그는 절정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하늘보다 더 높으시고/가장 깊은 바다보다 더 깊으신/주님, 당신의 사랑이 드디어 승리하셨네/지금 나의 기도 소리를 들어주소서/이제 나는 없어지고 주님이 완전히 나를 지배하시네. 우리는 이 여러 가지 단계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까?
데이빗 리빙스톤의 몸은 그가 태어난 영국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그가 목숨을 다 바쳐 사랑했던 아프리카에 묻혔습니다. 원주민들은 아주 조그마한 아프리카 부락의 키 큰 나무의 아래쪽에 구멍을 뚫고 그들이 사랑하였고 존경했던 사람의 심장을 안치시켰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심장이 일생동안 여러분이 가장 사랑했던 곳에 장사된다면, 거기는 어디라고 생각됩니까? 혹시 여러분의 자식이 아닐까요? 아니면 여러분의 지갑 속은 아닐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의 왕좌에 그리스도나 자신 중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께서 결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하기를 ‘회개는 정권 교체다’라고 했습니다. 곧 전날에는 내 마음의 왕좌를 내가 차지하고 왕 노릇 하였으나,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제 그 마음의 왕좌에서 자신은 내려오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의 왕좌에 계시도록 정권 교체를 단행한 사람이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마음의 왕좌에는 누가 왕으로 앉아 있습니까? 아직도 우리 자신이 왕 노릇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마음의 가장 소중한 자리를 아내가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남편이 차지하고 있지는 사람은 없습니까? 자식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사랑하는 연인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혹은 사업이나, 돈이나, 명예나, 탐심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두의 마음의 왕좌에 오직 주님께서 좌정해 계셔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주장하시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시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전적으로 그 분의 복된 통치를 받고, 그 분께 쓰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