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기자회견서 이명박 비리 검증할 내용 공개
이명박은 북한 간첩이 만든 통혁당이 배후 조종한 6.3 사태의 주역
1. 이명박의 출생 및 병역에 관한 고소-맞고소 내용
1) 문제의 글이 과연 고소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2007.3.7. 서울중앙지검 박용규 검사실로부터 이명박의 출생 및 병역에 대한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이명박 소송 대리인인 조봉규 변호사, 서정규 변호사로부터 고소장이 제출됐으니 조사를 받으러 나오라는 요지의 전화를 받고, 3.14일에 나가보니 검사는 이수권 검사로 바뀌어 있었고, 6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습니다.
▲ '명예훼손'으로 지만원 박사를 고소한 이명박 전 시장과 맞고소한 지만원 시스템미래당 창당준비위원장 ⓒ 뉴스타운 |
한 출생과 병역에 대한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여 이명박의 명예를 훼손하였다.
뉴스타운 기사내용: “인터넷에는 이명박에 대한 의혹들이 몇 개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대략 이렇다는 말로 시작하여 인터넷에 뜬 자료들의 주요부분들을 요약했고, 자서전에 있는 자료를 요약한 후 “공인의 행적과 공인의 과대포장은 공론의 장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가 오사카에서 태어났든, 포항 근교에서 태어났던 그건 문제가 아니다. 단지 이명박씨가 속였느냐, 아니냐가 문제인 것이다. 인터넷에 뜬 자료와
그의 자서전과는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정치인들에 늘 속아온 우리로서는 이명박의 자서전을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터넷 자료를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명박 측이 해명해야 할 사상들을 간단히 요약했습니다. 이런 글이 고소대상이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이명박의 주장: 인터넷에 수많은 자료가 떠있다 해도 이를 다시 한 번 더 소개하는 것도 명예훼손이다.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지만원의 반론: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이명박을 치면 이명박의 출생 및 병역에 대한 의혹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이명박은 의혹에 대해 해명을
하지 않는 반면 네티즌들을 상대로 고소하여 처벌을 받게 한 사실이 있다.
지만원은 국민의함성이라는 애국단체를 운영해오고, 회원들로부터 회비를 받는다. 회원들은 물론 모든 국민은 훌륭한 대통령을 갖기를 원한다. 이명박의 의혹이 항간의 화제인 만큼 이를 외면하는 것은 회원들에 대한 직무유기다.
더구나 지만원은 뉴스타운 게시물에서 출생 및 병역 부분에 대한 의혹을 분석하기 위해 ‘인터넷에 뜬 자료’와 그의 자서전 내용을 대비해 놓고, 이 두 가지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 후, 결론적으로 “정치인들에 늘 속아온 우리로서는 이명박의 자서전을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터넷 자료를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다.”고 결론을 냈다.
이명박에 대한 의혹을 분석하려면 분석의 근거를 대야 한다. 분석의 주제가 이명박에 대한 의혹이기 때문에 일단은 인터넷 자료와 이명박의 자서전을
비교검토하는 것은 필수과정이다. 더구나 지만원은 문제의 게시물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단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게 어떻게 해서 명예훼손 행위라 할 수 있는가? 더구나 이명박에 대한 의혹들이 이미 인터넷에 범람해 있는 데 그 내용들을 분석 목적상 한 번 더 소개한 것이 범죄행위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제의 게시물에서 지만원은 새로운 의혹을 생산한 적이 없다. 이명박의 출생 및 병역에 관한 의혹은 이미 인터넷 바다에 떠 있는 수많은 글들에 나타나 있고, 주간지 및 월간지들에 수도 없이 제기돼 있는 것들로서 이미 상식화돼 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널려 있는 글들에 나타나 있는 공통적인 요지, 상식화된 의혹의 요지를 분석 목적상 요약한 것이 죄라면 이명박에 대한 분석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참으로 해괴한 주장이다.
2) 출생 의혹의 근거
의혹의 근거#1.
자서전 내용과 객관적 자료를 대조해보면 황당합니다. 이충우씨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바로 그 해인 1935년에 이미 이상득을 포함해 3자녀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1) 이명박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첨부2, 38쪽):
“우리 아버지 이충우는 1935년(29세 때)에 총각으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목축일을 했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리를 잡고 돈을 저축하여 그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나와 반야월 채씨와 결혼을 했고, 결혼 후 곧장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6남매를 일본에서 낳았고, 해방 후인 1945년 11월에 돌아와 막내를 한국에서 낳았다”
(2) 오마이뉴스 기사(첨부2) 4쪽 기사:
1) 장녀 귀선
2) 장남 상은
3) 차남 상득(1935.11.29일생: 첨부3)
4) 차녀 귀애
5) 3남 명박(1941.12.19일생)
6) 3녀 귀분
7) 4남 상필
이상득은 1935년생, 이명박은 1941년생, 그리고 그들의 부친인 이충우씨가 반야월 채씨와 결혼한 시기는 1936년에서 1940년 사이입니다. 총각으로 낯선 일본 땅에 가서 자리를 잡고, 저축을 하고, 고국에 돌아와 장가를 갈 정도의 돈을 벌려면 줄잡아 5년은 걸릴 것이라는 것이 당시를 살았던 어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충우씨가 반야월 채씨와 결혼한 시기는 대략 1936년 쪽 보다는 1940년 쪽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3) 신동아 2007. 2월호(첨부4, 129쪽):
이충우씨는 창씨개명을 했다. 이명박의 이름은 쓰끼야마(月山) 아키히로였다.
의혹의 근거#2.
이명박은 그의 출생지를 수건돌리기 하듯 이리저리 감추었습니다. 이명박의 공식 홈페이지에 출생지난이 빠져 있습니다. 포털 사이트마다 이명박의 출생지에 대한 기록이 들쭉날쭉 합니다.
(1) 인터넷 신문 ‘뉴스타운’(첨부3)에는 이명박이 출생지를 포항에서 일본으로 고쳤다가 지금은 아예 대부분의 포털사이트의 인물정보난에서 출생지난을 아예 빼버렸습니다.
이명박의 출생지 기록에 대한 숨바꼭질은 일지는 아래와 같습니다(첨부3).
*2006년 12월, 이명박 출생지 의혹 확산
*2007년 1월1일 네이버, 출생지를 경북 포항에서 일본으로 변경
*1월 3일 오후 5시부터 네이버, 출생지 난 자체를 삭제
*1월 3~8일 야후·엠파스·파란 등도, 출생지 난 삭제
*1월9일 포털에 인물 DB를 제공하던 조인스닷컴에서도 출생지 삭제
*1월9일 오후 네이버, 다시 출생지를 ‘일본’으로 복구했으나, 출생지난은 없고, 생년원일 옆에 괄호로 처리.
*다른 사이트들에는 1.15일 현재까지 출생지 난이 지워지고 없음
그리고 2007년 1월8일 오마이뉴스 기자가 출생지를 묻자, 엉뚱하게도 “우리 어머니를 모독하지 말라, 우리 어머니가 일본 여자라고. . ”(첨부2, 5쪽) 하며 동문서답으로 화를 내고 차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이는 출생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심을 갖게 하는 것들입니다. 스스로 의혹을 증폭시키면서 의혹을 제기하는 국민을 무차별 고발하는 행위는 대통령감이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파렴치한 행동인 것입니다.
(2) 선거법 제250조 정신 위배행위:
이명박은 지난 모든 선거에서 출생지를 포항으로 하거나 생략하는 방법으로 당선됐다고 합니다, 출생지를 허위로 기재하는 것은 선거법 250조 위반이며, 실제로 모 성남시장은 출생지가 일본 나고야인데도 마산으로 표기하여 실형은 받은 사실이 있습니니다(첨부6). 그런데도 이명박에 대해 이제까지 이를 문제 삼은 사람이 없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3) 병역의혹의 근거
(1) 이명박 자서전(첨부2, 64쪽): 2학년1학기를 마치고 자원입대했다(1963년도 이야기). 기관지가 형편없이 늘어졌다는 판정을 받았다. 병명이 기관지 확장증이었다. 군의관이 “기관지 확장증은 근본치유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축농증도 악성이다. 그 몸을 끌고 지원하다니 군을 무슨 요양소로 알고 왔다”고 말했다. 남들은 있는 줄 없는 줄 다 동원해 군에 안 가려고 하는 마당에 나는 군에 가고 싶어도 병들어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2) 이명박 측의 해명(신동아 2월호, 첨부5, 131쪽):
* 1963년 8.15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했으니 다음 날 신체검사에서 고도의 기관지 확장증과 축농증이 발견돼 귀가조치 됐다.
*1964년 다시 질병이 발견돼 다음 해 다시 재검을 받으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1965년 3.29-30일 흥해국민학교에서 실시된 재검 때 보건소에서 촬영한 X-레이에서 이상이 발견돼 지정병원인 포항 영남병원에서 정밀촬영한 결과 ‘기관지 확장증 고도, 폐활동 결핵 경도’가 나타나 군의관이 병종 판정을 했다.
* 1964년 상반기 지정기일에 재신체검사를 받지 않았지만 같은 해 하반기 재검에 응했다. 상반기 재검에 응하지 않은 것은 1963년 말 고려대 학생회장에 당선되면서 1964년부터 학생회를 주도했고, 당시 최대 이슈였던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운동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1964년 6월 구속됐다 10월 집행유예 선고로 석방된 뒤 같은 해 하반기 재검에 응했다. 병역기피 의도는 없었다.(자서전 79쪽에는 감옥살이 기간이 6월말-10월말로 표시돼 있음)
(3) 병무청 기록:(신동아 첨부5, 131쪽):
*1961년 갑종판정(현역 입영 대상)
* 63년 입영 후 귀가(질병)
* 64년 징병처분미필(無故)
* 65년 병종, 제2국민역(활동성 폐결핵, 기관지 확장증)
(4) 객관적 건강 상태:
* 1961년 갑종판정
* 1963년 2학기에 학생회장
* 1964년 6.3사태 주도 후 내란선동죄 혐의로 도피생활 후 6월말-10월말 감옥 생활
*1965년 3월말 병역면제 직후인 4월, 대구소재 모 섬유업체 취직(김규 저 고건 vs 이명박)
* 1965년 5월, 현대건설에 입사원서 제출
* 1965.7.1, 현대 입사
* 1965년 여름, 강릉 경포대에서 정주영 회장과 28명의 신입사원들이 밤을 새워 술을 마셨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고, 이명박만 마지막으로 남아 술의 장사가 됐다(첨부2, 95쪽). 그 후 이명박은 보통의 사람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만큼 세계 곳곳을 뛰어다니면서 신화적 능력을 발휘하여 입사한지 만 10년 만인 1975년 나이 35세에 현대건설 사장이 됐다(첨부2, 자서전 139쪽).
(5) 병역의혹의 본질:
자서전 병역부분은 무협지보다도 더 허황되게 기술돼 있다. 1961년에 갑종판정을 받았고, 1963년 왕성한 선거운동을 통해 학생회장이 되었고, 1964년에는 박정희 정권을 뒤엎기 위한 학생운동을 하다가 건강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도피생활을 했고,‘내란선동죄’로 3년 선고를 받아 감옥살이를 4개월간이나 했고, 1965년 여름에 현대에 들어가 술의 천하장사가 됐고, 국제무대를 돌아다니면서 왕성한 활동을 함으로써 현대에서 승승장구의 신화를 이룩했던 그 ‘건강한 몸’이 어째서 유독 1963년과 1965년 봄에 있었던 병역관계 신체검사에서만 당시에는‘죽는 병’으로 알려진 기관지 확장증의 최고 위험수위라는 판정을 받았고,‘악성 충농증’ 판정을 받고 ‘폐결핵’ 판정을 받을 수 있었는가?
1961년에 갑종합격을 받은 건강한 사람이 1963년에 ‘자진해서 입소’를 했다면 그는 자신을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 건강이라면 군대생활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입소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관지 확장증도 경도나 중도가 아니라 고도(최악)로 판정 났고, 축농증도 매우 심하다는‘악성’으로 판정이 났다고 한다, 죽을병으로 알려진 '고도의 기관지확장증과 공포의 대상인 '악성축농증'을 동시에 앓고 있던 사람이 ‘자각증세’를 느끼지 못한 채 군대생활을 하겠다고 자원입대 했다는 것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것과 같은 허황된 거짓말로 들린다.
여러 의사들에게 일일이 물어보니 당시 ‘기관지 확장증 고도’라면 지금까지 살아있을 확률이 매우 낮다고 말한다. 숨이 가쁘고,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기침을 심하게 하고, 가래를 뱉어내기에 여념이 없는 병이 바로 ‘기관지확장증 고도’라는 것이다. 자각증상이 있어야만 했을 뿐만 아니라 병에 대한 공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축농증 고도도 마찬가지다. 심한 ‘악성축농증’을 앓는 사람역시 나오는 누런 코를 주체할 수 없어 하고, 골이 쪼개질듯 아픈 등 고통에 시달린다 한다. 이 두 가지 병을 동시에 심하게 앓고 있는 사람이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남들은 모든 줄을 끌어 내 병역을 기피하는 시대에 나만은 군대를 그렇게 가고 싶었어도 군의관이 받아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비상식의 극치다.
이는 병역 브로커들이 판을 치던 시대에 군의관과 짜고 친 게임이 아니냐 하는 의심마저 갖게 하는 대목이다. 더구나 과거에나 지금이나 운동권 학생들은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병역을 면제 받으려고 무단히 애를 썼다. 386주사파의 전형인 이광재는 손가락까지 잘라 병역을 면제 받았다는 기사가 여럿 있었다.
2. 이명박의 사상적 정체성
이명박의 사상적 정체성은 6곳에 드러나 있습니다.
1) 이명박은 북한 간첩들이 만든 통혁당이 배후 조종한 6.3 사태의 주역
2) 김정일 만나기 위해 서울시 조례 제정하여 대북지원비 200억 마련한 후 김정일측과 협상
3) 청계천을 '박정희에 항거한 좌익-노동세력의 로고'인 전태일에 바친 사실
4) 좌익들의 이념침략을 비호하는 발언들
5) 좌익 친구들
6) 좌익 운동권 출신 정태근을 핵심 동반자로 데리고 다닌 사실 들이다.
(1) 이명박은 북한 간첩들이 만든 통혁당이 배후 조종한 6.3 사태의 주역
6.3사태는 북한에서 5.18(광주 인민봉기 기념일)과 함께 "남조선 청년학생봉기 기념일" 이라 불리는 기념일이다. 이명박과 그의 최측근 이재오가 주도했던 6.3사태는, 4.19를 적화통일로 연결시키지 못한 것에 통탄하던 김일성이 간첩 김영춘을 보내어 국내 인사들을 포섭하고, 지하당을 만들어, 배후조종한 사건이다. 1962년 1월, 간첩 김영춘이 국내인사들을 포섭하여 지하당 인혁당(인민혁명당)을 창당했고, 1964년에
발생한 소위 6.3사태는 인혁당이 한일회담 반대 이슈를 선동하여 배후조종함으로써 제2의 4.19를 재현하여 무정부 상태를 조성하고 남침의 기회로 활용하여 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한 사건이었다.
사회 불만의 이슈를 크게 증폭시키고, 순진한 군중들의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폭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공산폭동의 기본 전략이며, 6.3사태는 김일성이 간첩을 보내어 박정희를 증오하는 세력들을 포섭하여 조종한 사건이었다. 또한 탈북 북한군 등의 증언 등에 의하면, 5.18도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하여, 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무법천지를 만든 좌익들의 장난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 김정일 만나기 위해 서울시 조례를 제정하여 대북지원비 200억 마련한 후 김정일측과 협상했다.
2005년 5~6월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려고 엄청난 군사력을 한반도에 배치했던 시기였다. 우리 국민의 함성에서는 방독면을 사고, 제독약품을
준비하고 있었던 긴장의 계절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때 이명박은 8~9월에 평양에 가서 ‘낡은 평양시내 건물들을 리모델링’해 주는 대가로, 김정일을 만나게 해 달라고 뜻을 전달했다. 평양에 선물을 주기 위해 벌써 200억원도 만들었다고 했다. 다음은 이에 대한 기사다.
“서울시 고위관계자는 27일 ‘시청 실무팀이 평양 시내 리모델링과 경평축구대회 부활 등에 대한 협정을 맺기 위해 금강산과 평양을 2차례 방문해 협상을 벌였다’면서 ‘북한 측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고 밝혔다. 북한측은 서울시가 낡은 평양시내 건물들을 리모델링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서울시는 이시장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들어갈 것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 보장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는 이미 경평축구대회 부활과 관련해 2004년 5월 서울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조례안을 제정했으며 200억원의 기금을 조성했다.”(노컷뉴스, 2005.5.27)
(3) 청계천을 박정희에 항거한 좌익-노동세력의 로고인 전태일에 바친 사실
언론들이 청계천을 과대 포장하여 이명박의 경영능력을 띄워 올렸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5.8㎞ 청계천의 하이라이트는 ‘전태일 거리’다. 알맹이에 해당하는 평화시장 요부에 전태일 동상이 서고, ‘전태일 브리지’도 조형돼 있다.
동판으로 만든 불럭이 깔린다는 700m의 거리가 바로 ‘전태일 거리’인 것이다.
또한 이명박은 하고 많은 날들 중에서 하필 10월1일 국군의 날에 오픈 하여 국군의 날 행사가 묻혀 버렸다.
(4) 좌익세력의 국가전복 행위 가려주는 이명박의 발언들
2005년 12월 20일 오전, 이명박은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새정치수요모임이 청년층과의 교류 확대를 위해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마련한
‘대학생아카데미’ 행사에 첫 번째 강연자로 초청됐다. 사립학교법과 관련하여 박근혜가 주도하는 이념 논란 즉 “우리 아이들을 전교조에 맡길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이렇게 비판했다.
“정치권에서 국가정체성이 어떻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정체성 논란을 이해할 수 없다.”
“21세기에 누가 국가정체성을 가지고 그러느냐.”
“국가정체성에 대한 승부는 이미 갈렸다. 그 승부가 끝났는데도 대한민국은 그 문제를 가지고 지금도 왈가왈부한다.”
국보법 폐지 등 4대 악법과 관련하여 그는 “되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국민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 조선ᐨ동아를
포함한 애국자들은 4대법안을 4대악법이라 불렀지만, 이명박은 열우당 편에 서서 가결되면 기분이 좋다고 한 것이다.
“가지고 있는 많은 재산을 사회에 헌납할 생각은 없느냐”는 한 대학생의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20년간 CEO를 하며 재산을 모았지만 현재 대기업 CEO의 1년치 연봉보다 적다. 내가 일궈낸 재산에 대해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거짓말일 것이다.
2006년 7월 5일, 당대표 경선 때, 이규택 후보는 이재오 후보에 대한 사상검증 주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전 시장이 골수보수로
가자는 것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명박이 사상검증을 꼴보수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방해한 것이다.
2006년 6월 30일, 이명박은 또 “한나라당이 골수보수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개혁이 되지 않아 골수보수가 아닌 개혁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했다. 김진홍의 말과 일치하는 것이다.
(5) 이명박의 절친한 친구들이 좌익
이명박과 절친 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 김진홍, 이재오, 인명진, 손학규 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좌익전력으로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이다. 지금도 친북-반미 발언들을 하고 있으며 좌익세력의 폭력시위, 국가파괴, 전교조의 이념전파 행위를 감싸주는 발언들을 해온 사람들이다. 특히 김진홍은 북한에 충성하여 북한 거류민증 1호를 받은 사람이다. “동무는 남조선 자본주의 속에 사는 공산주의자임을 인정합니다.”
이재오, 김진홍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소위 킹메이커들이다.
(6) 좌익 운동권 출신 정태근을 핵심 동반자로 데리고 다닌 사실
정태근은 이명박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왔을 때, 이명박 캠프에서 그를 도왔고, 시장일 때에는 부시장이었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서서 이명박을
보호하는 핵심측근이었으며, 지금은 공개적으로 이명박 캠프에서 핵심 참모로 일하고 있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 이명박의 색깔을 알 수 있다.
이명박의 1급 참모인 정태근은 386간첩들(일심회, 장민호, 손정목)과 친구이고, 반미 친북 운동으로 감옥에 갔고, 친구들이 좌익 운동권이고, 지금도 반미-친북 단체들에서 맹렬히 활동하고 있는 전형적인 골수 좌익이다. 이명박은 김진홍-인명진-손학규-이재오-정태근과 시스템적으로 연계된 골수 좌익이다.
1. 정태근은 고진화, 김민석, 허인회(부여간첩접선)와 함께 삼민투 운동전개
2. 미문화원 점거(3년징역)
3. 박종철 고문사건과 연루, 수사대상에 올라
4. 이번 일심회 간첩 손정목과 함께 운동했고,
5. 친북단체인 민가협의 간사
6. 그 외 수개의 친북 단체에 관여
2007.3.20 시스템미래당 창당준비위원장 지만원
첫댓글 저는 지만원이라는 인간이 주장하는 내용 전체에 동의하지 않고요... 이런 글이 울카페에 꼭 필요할까요?
지만원도 거의 정신병자 수준입니다.. 이메가와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메가와 지만원 둘다 또라이지만, 이메가에 비할바는 못되겠지요...
지가 반대자들은 다 좌파로 만들고...대체뭐지...?
필요하다기 보다는 자료 수집입니다. 자료 공유해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것도 좋은 것 아닙니까? 까칠하시네요
지만원이 폭로해봐야 누가 믿어줄까요? 도구도 중요합니다. 지만원은 신용을 잃었습니다.
우리 만원이 똘끼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놈인데...뭔소린지 원.....
이거 이런식으로 매도하면, 결국 우파하고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좌파든 우파든, 배울 건 있고, 얻을 것은 있고, 그들이 내뱉는 이야기에도 일정의 사실 여부는 존재합니다. 저는 그걸 보자는 겁니다. 지만원이 이상하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뭐 태클 거는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