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티벳 수행을 좋아하고, 존경하는데요.
그리고 그곳의 수 많은 수승하신 분들께서 얼마나 어마무시하게 수행하시는지 추정도 하기 어렵기 때문에요.
감히 뭐 이렇다 저렇다 어떻게 언급하기도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무 과도하게 맹신하는 건 뭐가 됐든 좋지 않으니까요. (그 분들도 원치 않으실테니..)
공부하는 측면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좀 언급 해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방문객님이 말씀하셨듯 불교는 메타 스쿨이라는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일상의 평면에서의 수행이든, 샤먼의 수행에서 파생되었든, 선정이든,
어떤 수행법들이든 불법 아래에서 재구성될 수 있으니까요.
세계 어디의 불교도 마찬가지일텐데요.
제가 아는 한해서는 티벳 밀교 또한 인도, 중국으로부터의 수행법과 현지 뵌교의 수행법이 혼합 계승되어서 성립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수행법이 어떤 스쿨로부터 기원했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체험을 바라보냐, 즉 통찰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분들도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아무튼..
티벳 밀교는 구번역 학파인 닝마종과 신번역 학파의 까규, 사카종, 겔룩종 등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각 학파들은 독자적인 수행 차제와 해석,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우연히 수행하게 된 법맥은 닝마종의 방계쯤 되는데요. 그나마 외지인에게 수행법을 전승하는 법맥입니다.
(물론 지금은 발품을 좀 팔면 열려있는 곳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닝마종은 구승차제를 이야기하고 그 외의 종들은 사부가행을 이야기합니다.
사부 가행은 외밀 삼승과 함께 무상요가 일밀을 이야기하여 사(4)부가행입니다.
까규파의 대표 수행은 나로빠 육성취법과 그 유명한 마하무드라 수행이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님의 법맥인 겔룩종은 비밀집회 탄트라와 칼라 차크라 탄트라가 있습니다.
각 수행체계 중에서 마지막 단계의 최종 수행을 배우고 닦아나간다면, 예전에 카페에서도 한번 언급된 칠채화신이 가능하다는 전썰(?)이 있습니다.
특히 성적인 에너지를 활용하는 부계 탄트라는 심상으로 그린 이성을 활용하면 지혜의 봉인, 실제 이성과 교합하면 쌍수법으로 실체의 봉인을 연다고 합니다.
각각의 수행은 각 학파에서 교차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실제로 저 또한 교차적으로 배웠습니다.
말씀드린대로 고파인 닝마종의 구분은 구승차제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문(사성제), 연각(인연연기), 보살(중관, 공성)의 현교 삼승
2. 행밀(지혜), 유가밀(가피), 작밀(공양)의 외밀 삼승
3. 대유가(신번역 학파의 생기차제), 무비유가(신번역학파의 완성차제), 무상유가(대원만법)의 내밀 삼승
(예전에 국내에 대원만법을 최초(?)로 배워오신 분이 계셨는데요.
이분께서 책도 많이 쓰시고 아무튼 뵙지는 못했지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원만법을 초고가?로 교육 하시더니 요새는 안보이시네요. 제가 요새 관심이 없는 건지..아무튼 그 분께 배우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길을 헤메지 않았습니다.)
굳이 티벳 밀교라함은 내밀 삼승 또는 사부가행을 말합니다.
닝마종의 구승차제 중 마지막 내밀삼승의 무비유가가 신번역학파에서는 완성차제인데요.
즉 신번역학파는 닝마종의 대원만법을 완성차제로서 배우지 않습니다.
(그 외 여러 학파도요.)
왜 그런지 한번 추측성으로 살펴보면요.
대원만법은 여러 특이한 구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원만법의 구조는 심부와 계부, 비결부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심부는 마음에 대한 것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계부는 세계에 대한 것을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끝나면 비결부에 들어서는데요. 비결부는 입단과 돈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입단은 대수인 수행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리고 북종선의 영향을 받은 듯 합니다.
돈초 수행은 특정 기맥을 사용하는 수행법입니다.
그런데 이 수행법이 뵌교의 태양 에너지를 사용하는 수행법에서 유래한 것 같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저는 신번역학파의 졸화 및 전식 수행을 배우려고 했으나 닝마종의 법맥을 배우게 되어 무비유가행의 졸화 및 전식 이후 기연(?)으로 대원만 돈초 수행까지 대략적인 구조를 알게 되었습니다.
돈초 수행은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기맥과 태양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상당히 리스키한 수행법이라 생각됩니다.
흑교의 흑관 수행 등 잘못하면 정신병 유발과 시력 손상이 될 수 있으니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대원만법의 통찰은 선종의 것이 녹아있고 수행은 뵌교의 태양 수행이 녹아있는 구조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 구조로 인해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기에 일부 다른 법맥에서는 돈초 수행 없이 대수인[입단]에서 그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추정입니다.]
돈초 수행을 빼고 보더라도, 티벳 내 많은 종파에 북종선 수행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수행법이 최고승차제의 일부로 녹아들어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북종선 수행이란 신수대사의 손제자인 마하연선사의 마하연선법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지점인데요.
일전에 넷상에서 어떤 분께서 지적하셨던 걸 보고 공감한 적도 있습니다.
티벳에는 그 유명한 삼예의논쟁이 있었습니다.
파드마삼바바께서는 신통력 싸움으로 샤머니즘을 누르고, 산타락시타스님과 카말라쉴라 스님이 논쟁에서 선종 불교의 마하연선사를 이겨서 지금의 티벳 불교의 방향성이 결정됐다는 것인데요.
수행법과 신통은 파드마삼바바, 교학은 카말라쉴라, 산타락시타 스님으로 정리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파들의 최고 수행 차제를 살펴보면, 비결 수행법인 돈초는 뵌교의 태양수행과 닮아있고 그 근본 통찰이 포함된 수행법인 입단은 마하연선사 수행과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닝마종의 비판적 계승이라는 까규파의 최상승법인 마하무드라(대수인)는 거의 마하연선사의 북종선과 같습니다.
마하무드라 수행 [전일(全一), 리희(離戱), 일미(一味), 무수(無修)]은 마하연 선사의 [간심(看心), 불사(不思), 불관(不觀), 불행(不行)] 수행과 매치됩니다.
진실은 모르지만 인도 요가 탄트라와 북종선의 교학이 합쳐진 형태로도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더 모계 수행이 있고 그것이 서로 다른 방계로 퍼져나갔다가 합쳐진 형태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삼예의논쟁과 관련해서,
기존에는 유식행중관학파인 까밀라쉴라 스님의 수습차제요략에 따라 티벳 내에서 연구된 자료만 있어서 마하연 선사가 단순히 패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재 돈황에서 출토되는 자료(특히 돈오대승정리결)를 보면 전혀 다른 시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삼예의 논쟁 텍스트를 보면,
중관학파의 질문들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들도 많았습니다.
마하연선사는 본인이 불법에 비추어 답변을 하나라도 하지 못한다면 비불설인 것을 인정하겠다고 하셨는데요.
1차에서 마하연선사의 법이 불법이 맞다고 인정이 되었고,
2차에서는 선사의 돈법이 부처님의 뜻이 분명하나 그것이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하니 금지한다고 하고 쫓겨난 것으로 압니다.
뭐..수행이라는 게 단계적으로 밟고 나가는 것이 좋기에,
시작부터 번뇌즉보리 이러기 보다는.. 사부가행, 구승차제 등 차제에 맞게 따라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좋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티벳 수행을 좋아하지만요.
방문객님 말씀대로, 기법과 스쿨은 그 유래가 불교가 아닌 곳에서 온 것들도 많고, 전승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이야기가 덧씌워 진 것들도 많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진실을 알 수가 없죠..
이렇다, 저렇다 한들
어차피 불교는 메타 스쿨이니까요..
그것의 원류가 의도하는 바가 샤머니즘이었든, 쿤달리니의 각성이든 뭐든..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식의 대상으로 드러났다가 스러지는 것을 알고,
어떤 것에 인연하여 그러한 수행의 결과가 나왔고, 그것이 또 인연이 다해서 스러지는 인과를 살피는 방향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첫댓글 여기저기서 들은 내용들을 잘 정리해주셨네요.
차제를 잘 밟아서 기본부터 닦은 행자..
어떤 종파든지 앞선 고승들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는 게 최고인 것 같습니다 ㅎ
우리 화엄 식구들 한분 한분이 모두 존경스럽습니다.
삼매수행하신 분들은 뭐랄까... 상식이 좀 다르다고 할까요. 그분들에게 자명한게 일반인에게 전혀 그렇지 않은? 그래서 툭 떨어져 제시되면, 이게 저거 같고 저게 이거 같고... 그게 그게 아닌 거 같고...
종파가 워낙 많고, 이론도 워낙 많고, 기법도 워낙 많고... 복잡해서 혼미해지고... 다 알 수도 없는 거고, 능력상 기억할 수도 없고...
저는 뭐... 그래서 '사실'을 중심에 두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어차피 '사실'을 아는 거니까요.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안식의 대상인 형상인지 아니면 꿈의 질료인지 구분하고... 일상에서 꿈의 질료로 나타난 거는, 응 너는 여기에서 뭐하는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 하고...
일상, 욕계 선정 (욕계 선정의 특수형태인 색계 선정) , 무색계 선정 ... 이렇게 세 범주로 나누고...
그러한 사실들에서 어떻게 그와 같은 꿈이 펼쳐지는가... 알려지는 재료들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기에 그렇게 바라보는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까닭은 뭔가... 그 정도를 대충 생각해 본다고 할까요?
그리고는 다시 선택한 방식으로 돌아와 살아갑니다. 꿈들을 알아가는 일은 나름 재밌지만, 그 꿈이 저의 꿈은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