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발표한 공천심사위원명단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작가 이문열씨다. 그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보수’를 수호하겠다는 일성으로 공천 심사 작업에 참가했다. ‘총선연대는 홍위병’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 등의 정치 칼럼으로 진보진영을 거침없이 비판해온 이씨가 한나라당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자 그의 정치행보를 두고 무성한 추측이 오갔다. 일각에서는 최대표와의 친분 때문이라거나 본격적인 진보 때리기의 신호탄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 설들을 단호하게 일축하면서 “이미지가 깎이더라도 하고싶은 일이 있었다”고 밝혔다.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침몰 직전에 놓인 보수 구하기’에 나선 그를 제5차 한나라당 공천심사 위원회 회의가 끝난 뒤 만났다. |
보수는 시대를 위해 고생한 사람들을 인정한다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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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작가적 이미지가 깎이는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공천심사위원회 참가 발표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게 놀랐다. 특히 작가 이문열을 아끼는 사람들은 최근의 정치적인 행보로 공연히 작가로서의 이미지를 깎아 먹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최병렬 대표와의 인연으로 수락했다고 하는데 그런가?
사실 최병렬 대표와는 95년에 영국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다. 사람들이 자꾸 물으니까 최병렬 대표 핑계를 댔는데, 알기는 했지만 그리 깊은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작가적 이미지가 깎이는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허무주의로 대변되는 작품 성향이나 개혁이나 이념에 극도의 불신을 보여온 작가의 성향을 감안하면 의외의 행보다. 한나라당에도 개혁을 부르짖는 세력들이 많지 않나? 민중 운동 출신들도 많고, 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한나라당의 개혁세력과 관련한 부분에서 그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나는 한나라당이라는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보수’는 내용이 아니라 사회를 보는 ‘태도’다. 이 사회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모자란 부분, 잘못된 부분은 보완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보수다. 반면 그저 현 상태에서 기득권만 유지하면서 살겠다는 것은 수구 반동이다. 그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 뭉뚱그려서 한 묶음으로 보는 것이 문제다. 보수란 이 사회를 이끌기 위해서 고생한 사람들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한나라당을 한국 사회의 짐을 지어온 낡은 배에 비유했는데 이 상황에서 내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죄와 상처를 치유하고, 한국의 보수를 위기 상황에서 구해야 겠다는 소명에서 한 것이다. 낡은 배의 짐이란 우리 현대사의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부조리와 모순’이다. 그 짐을 털고 건전한 보수 합리적 보수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의 보수는 압살당할 거 같은 느낌이다. 현대사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원죄, 인권 탄압과 폭력성의 책임까지 보수 진영이 다 떠안고 말았다. 이번에 한나라당이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하면 보수세력의 실패인데, 최소한 그런 사태는 막아야 한다고 본거다. 말로만 개혁을 떠드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겠다. 한나라당이 쇄신하고 개혁하는 모습을 보여서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보완해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속칭 386세대, 80년대 운동권 세대가 대거 정치권에 흡수됐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각기 흡수가 됐는데, 그들 사이의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민주당은 내내 민중의 대표 아니었나? 그런데 그들이야 말로 수구 기득권으로 변질됐다. 한때는 자민련과도 손을 잡고 좌충우돌했다. 말로는 민중을 팔면서 자신들의 기득권만 챙기지 않았나? 모든 것이 ‘정치쇼’라는 생각이다. 민주당은 결국 정치 추구 집단에 지나지 않고 열린우리당도 차별점이 없다. 차라리 현실을 인정하고 정치적인 일관성을 추구하는 한나라당이 정직성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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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현실을 인정하고 정치적인 일관성을 추구하는 한나라당이 정직성이 있다고 본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일그러진 영웅에 대한 관대함인가? 아니면 반대로 이제는 반듯한 영웅을 찾겠다는 것인가? 본인 또한 냉전 시대 수구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이기도 한데 5,6공 시대 인물들에 대한 당내외 퇴출론이 거세다.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저 수 많은 내 중단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도식적으로 인용하지 말라. 5,6공 세력, 인권 탄압 전력이 있는 인사들은 ‘엄석대’가 아니다. 그 소설로 치면 분당장, 미화부장하던 사람들과 같다. 시대의 ‘악역’으로서 그 당시의 역할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개인적으로 악역의 역할이 필요없어졌기 때문에 퇴장해야 한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소설 속에서처럼 새로운 부임한 담임 선생의 행동 방식 같은 처벌적 성격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내가 개혁세력에 의심을 보내는 부분은 그 과정의 진정성과 민주성이다. 소설 속 새로운 담임 선생의 방식처럼 민중으로부터 태동한 상향의 민주적 방식으로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영웅이나 지도자들이 선동과 폭압적 방식으로 개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역사상 많은 위정자들이 같은 수순을 밟았다. 카스트로, 페론 모두 민중의 대변자인양 기득권에 저항하고 노동자와 연대한다는 둥 소란을 떨었지만 결국 자신의 정략적 도구로서 민중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열린 우리당이 내건 정치 개혁과 지역 주의 타파도 결국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다. 정치적 전략이나 명분으로 본다. 정치인들 말을 어떻게 다 믿나? 지역주의는 정치가의 전략적 선동에 지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야 말로 지역성에 기댄 DJ의 양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지역주의를 타파한답시고 새 당을 만드는 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보수가 위기다, 요즘은 오히려 보수가 마녀사냥 격으로 난도질 당한다는 논리를 펴는데, 지식인들 사이에 상황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약자들의 권위, 가진 자들의 기득권의 남용은 여전한 사회구조 아닌가? 왜 보수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보나? 스스로는 '균형'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의심을 좌파, 개혁 진영쪽에만 보내니까 균형이 없고 오른쪽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는 것 아닌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이미 개혁을 부르짖던 정파들이 정권을 5년 이상 잡지 않았나? 그 과정에서 언론과 모든 정부 기관이 그들에게 넘어갔다. 조선일보와 노무현 대통령의 싸움에서 조선일보가 강자, 노무현이 약자라고 하는데 그런 웃기는 소리가 어디 있나? 김대중 정권의 구호에 대한 의구심도 사실로 드러났다. 또 의심스럽다. 대북정책도 정치적 프로퍼간다의 측면이 있었다. 다만 김대중이라는 인물로 인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이 구심점을 찾고 발전해나간 공로는 분명히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모든 이데올로기나 이념이 도구일 뿐인가? 전략이나 전술에 대한 의심 때문에 더 큰 실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이념가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세상에 순수한 실체나 진정성이나, 세부적인 실체도 있을 것이라는 점은 생각하고 있다.
막말의 시대, 안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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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형성은 이미 80년대 중반에 끝났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선택 이후의 작품 세계가 퇴행적이라는 집중적 비판을 받고 있는데…
나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형성은 이미 80년대 중반에 끝났다. 요즘 퇴행적이라고 하는데 아주 고약한 네거티브다. 요즘은 논리가 없다. 막말의 시대일 뿐이다.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했는데, 그래 침 뱉어줄게 하는 것은 막말이지 논리가 아닌 것이다. 권위에 대한 해체를 부르짖으면서 몰아 부치면 모든 권위가 다 ‘퇴행’으로 매도된다. ‘선택’을 썼을 때 나는 ‘숙종시대’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지 않았다. 그냥 한가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 뿐이다.
우리 시대의 능란한 이야기꾼’ ‘대중적 소설가’라는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불만이 많은 듯 하다. 셰익스피어도 결국 뛰어난 이야기 솜씨로 거장이 된 것 아닌가?
(그는 자신의 성공을 대중적 ‘상업주의’와 현학적 ‘교양주의’를 결합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한 일부의 저작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듯 했다) 대중적이라는 말이 사실은 칭찬인데 반대파에서 욕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대중적인 것을 상업적인 것, 통속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내 작품 세계를 폄하하려는 ‘이미지 메이킹’이 있다. 내 책이 그렇게 대중적인 것 만은 아니라고 보고 그 이상이 있다고 본다. 내 책이 14개국에 40종이 번역돼 팔렸는데, 나는 외국에서 대중적인 작가는 아니다. ‘대중적인 인기도 얻었다’라고 덧붙여서 평가해 줬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면서 나를 향한 세상의 비판에 대해서 초기에는 방어적이었는데 점점 공격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작품 주인공들은 뚜렷한 지향점이 없는 허무주의자이거나 정파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인간 군상들이었는데 '선택' 이후에는 달라졌다는 말이 많다.
그래서 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지로 나를 판단한다고 하는 거다. 선택 이후 나온 책은 ‘아가’에 불과하다. '아가'에 어디 뚜렷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나오나?
대신 삼국지나 초한지 등 민중보다는 영웅의 삶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나?
나이가 들면서 취향이나 성향, 관심사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는 84년도부터 썼던 것이다. 도식적인 이미지로 나를 비판하기 위한 말들이다.
요즘 젊은 지식인들이 비판하는 글을 읽어보았나? 그들에게 ‘지적 파파라치’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발가 벗겨져 노출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당황했다는 뜻인가?
잘 보지는 않는데, 몇몇 글들은 코웃음이 나더라. 이문열과 김용옥을 타이틀로 한 책은 보았다. 사람에게는 다면적인 면이 있고 여러 가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인데 한 부분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나쁘게 몰아가는 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 아내가 손님들한테 지극 정성으로 잘 해준다는 내용까지 나쁘게 보더라.(웃음) 손님들한테 잘 해주는 착한 여성이라고 좋게 평가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시대와의 불화, 아직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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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했던 작가, 열심히 살았던 작가로 평가 받고 싶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스스로 밝혔던 ‘시대와의 불화’는 종언 되었나? 오히려 시대와 '간통'을 했다는 패러디성 비판도 있었다. 결국 하나의 지식 기득권으로서 시대정신을 발현하지 못하고 폭압의 시대에 나름대로 꿀맛을 봤다는 지적인데…
시대와의 불화를 극복했다고 한 적 없다. 냉전 수구 세력과의 불화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좌파 진영과의 불화도 새롭게 생겨났다. 그들의 정치적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욕을 먹고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냉전 시대의 폭력성이나 개인에 대한 억압, 신군부의 등장에 대해서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다. 작가의 양심을 걸고 하나의 정파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글을 쓴 적이 없다. 정말 (정권에 영합하고) 그렇게 글을 썼다면 꿀맛이라도 봤을 텐데, 특정 체제 하에서 작가하면서 책 좀 팔았다고 그게 그리 큰 기득권이고 영합이란 말인가? 너무 억지스럽다.
앞으로 작품 계획을 말해달라.
내 책을 사준 독자가 2,500만인데, 공리적인 일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한 10년간 10권 정도는 책을 쓸 생각이다. 80년대를 정리하고 자연주의적인 것, 20대에 느낄 수 있는 관점들, 예술적 감수성들을 담은 책을 구상중이다.
후세에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나?
나는 이미지 생산과 이미지 싸움에 관심이 없다. 본질과 실체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작가, 진지했던 작가, 열심히 살았던 작가로 평가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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