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배(빌 길버트/류광현 옮김) -04-
남한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미명에 남북경계선 일대에는 가랑비에서 폭우까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5월달에는 잠잠하더니 북한군이 갑자기 예고도 없이 38선에서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남한을 기습 공격했다. 북의 인민군이 옹진반도로 남한 영토를 침공한 시각은 그날 새벽 4시였다.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평양에 수도를 잡은 북한 정부가 남한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가슴 섬뜩하게 역사는 반복되었다. 남한 군대의 장교나 사병들이 공격을 당했을 당시에는 주말이 되어 대부분 영 밖으로 외출한 상태였고, 마치 9년 전에 미국 육·해군 병사들이 주말을 즐기다가 일본의 기습공격의 희생자가 된 사실과 너무나 같았다.
서울 날씨는 날이 새면서 구름이 끼고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점점 심하게 오리라는 일기예보도 있었다. 막 날이 새기 전 동경 시내의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국 총사령부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지휘본부의 당직사관실의 전화 벨이 울렸다. 헤이그 중위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존 무초 (John J. Muccio) 주한 미국대사였다. 전화 연결이 잘 안 되어 직직 소리가 났지만, 무초 대사는 분
명한 어조로 대규모의 북한 인민군이 4시 미명에 38선을 넘어 남한 군대와 군사시설에 대해 일제히 공격을 해왔다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동트기 전의 고요한 잠을 흔들어 깨운 것이다.
그리하여 헤이그 중위는 동경의 맥아더 극동사령부에서 한국에서 전쟁이 터진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최초의 장교가 되었다. 1992년에 발간한 그의 자서전 <대통령의 측근(Inner Circles)>에서, 1949년 6월부터 여러 계통의 미국 정보기관들이 북한 공산군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최소한 1,500번 이상 했다고 썼다.
이것이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진짜 침공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무초 대사는 "중위. 이건 진짜로 멕코이(McCoy)야! (real McCoy'는 "정말로 진짜"라는 미국 속어이다. 역자). 이번엔 가짜 정보가 아닐세!"라고 말했다.
헤이그가 "예. 대사님. 잘 알겠습니다. 즉시 대사님의 메시지를 최고사령부에 통보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즉시 맥아더 장군의 참모장인 아몬드 중장에게 그 중대하고 놀라운 뉴스를 전했다. 그때 헤이그는 아몬드 중장의 부관이었다. 지금까지 그와 비슷한 가짜경보가 수도 없이 있어 왔기에 이번에도 아몬드 장군이 미심쩍어 하는 것을 눈치채고 "아닙니다. 장군님, 무초 대사님 말씀이 '리얼 멕코이 (real McCoy)' 랍니다. 가짜 경보가 절대 아니랍니다."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아몬드가 맥아더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맥아더는 "알겠네, 네드, 즉시 참모회의를 소집하고 작전계획에 돌입하게. 내가 7시까지 본부로 가겠네."라고 대답했다. 미국 본국에서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의 역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 소식은 즉각적이고 큰 충격이었다. 일반 대중은 한국에 대해 별로 아는게 없었다.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왜 한국이 미국에 중요한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전국의 언론들은 달랐다. <워싱턴 스타(Washingtom Star)>지의 반응이 그 한 예이다.
"빨갱이들 전면전으로 남한 침략!"
이런 큼지막한 표제 밑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6월 25일(일요일) 자 서울발 AP 통신- 북한의 인민군이 오늘 새벽을 기해 전면전 침략을 감행했지만, 미군 고문단 발표에 의하면, 오후에 침략행위는 사실상 멈추었다."
수도의 조간신문 중의 하나인 <워싱턴 포스트>지는 "북한은 모스크바에 의해 태어난 괴물 같은 정권이므로 크렘린 지령 없이는 작전을 못한다."는 말로 긴 사설을 써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포스트> 지는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이 폭발적인 사태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불길한 경고를 하고, "신속한 군사원조"를 촉구했다.
사실 한국전쟁의 발발은 그날 아침 <워싱턴 포스트>지나 <뉴욕타임즈>지에는 톱기사로 다루어지지도 않았다. 그 대신 두 신문이 톱기사로 다루었던 사건은 밀워키 (Milwaukee)발 기사로, "58명을 태운 노스웨스트 항공기가 미시간 호 상공에서 추락하여 전원 사망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톱기사는 불란서 국민의회가 조르즈 비도 (Georges Bidaut) 수상을 불신임 투표하여 사임케 했다는 것이었다.
<뉴욕타임즈>지는 신문 상단에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전쟁을 보도했다:
"북한이 남한에 선전포고, 현재 교전 중"
신문은 두 통신사의 보도를 인용하였는데, 그것은 침공 명령은 크렘린이 한 것이지 북한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워싱턴 포스트>지의 주장을 확인해 주었다. "워싱턴 국무성이 한국전쟁 보고를 접하고 전쟁도발 책임이 소련에 있다는 성명서를 준비 중에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AP통신은 "소련 지령 없이 북한의 남한 침략이 수행될 수 없다"는 남한의 주미대사 장면(張勉)의 말을 인용했다. 다음날 <워싱턴 스타>지는 전날처럼 큼지막한 머리기사 표제 밑에다
"빨갱이들, 서울 진입 남한 항복 요구"
라고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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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칼 박(Karl Park)은 평양에서 32킬로 떨어진 고등학교의 상급생이었다.
50년이 지난 후 그는 메릴랜드(Maryland)의 꽃가게에서 이렇게 회고했는데, 그 가게는 피난올 때 배에서 자기 오빠의 기타와 아코디온을 바다에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자기 부인 박정과 같이 경영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질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전쟁 소식에 놀라지는 않았어요.1945년부터 남조선이 미국의 괴뢰정권이므로 북남 통일을 해야 된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 왔거든요. 공산당은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초기의 징후로는 1949년까지 전국의 고등학생 들이 '공산당청년연맹'에 가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군사훈련을 강행하고 밤낮없이 공산주의를 떠들며 세뇌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17살에서 19살 사이의 학생들의 정신무장은 너무나 잘 되어 있었지요. 여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군사훈련으로 육체를 단련, 선전 세뇌교육으로 정신을 단련시켜 청년들을 모두 충실한 공산주의자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1950년에 우리는 모두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칼 박은 그해 초기부터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2 월 초부터 군 장비와 보급품을 남쪽으로 수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탱크와 기름 드럼통을 38선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칼 박에 의하면, 당시 공산정권 하에서 고등학생들에게는 오직 군복무, 교사직 아니면 흑연이나 마그네시움 또는 텅스텐 광산에서의 노동 이 세 가지 길만 열려 있었다. 인민군이 남조선을 완전 장악한 후에는 자기에게 닥칠 압력을 예상하면서도 "그런 사태가 생기면 남조선에서 공산당 세포조직 건설에 투신할 공산당 요원이 될 것으로 내다봤지요."
당시 그는 이미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남조선에서 암약할 공산당 조직책의 일원으로 결정된 사실을 2년 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북한에서 칼 박이 들은 전쟁 발발의 보도는 진실과는 정 반대, 즉 남조선이 북조선을 침범했다는 보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