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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토론 스크랩 <슬픈 조국의 노래>조문기 선생을 살아생전 찾아뵈어야 하는 이유
하늘과 구름 추천 0 조회 39 07.12.29 18:5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슬픈 조국의 노래>조문기 선생을 살아생전 찾아뵈어야 하는 이유

[│공지│] [장소변경][정기모임]2007/12/30 (일) 오후3시 "생존하고 계신 독립투사 방문 "
글쓴이: ★혁명가☆ 조회수 : 22907.12.19 21:05 http://cafe.daum.net/kokoin/C5FA/14878주소 복사
 

날짜: 12월 30일 (일요일)  오후 3시.

장소: 해바라기요양병원 앞(수원)

(각 지역 개별적으로  오시는것이며 지역이 가까운 집행위원님께 전화하셔서 같이 오셔도 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8·15는 민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친일파가 해방된 날이다.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 주구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날이다.”(<슬픈조국의 노래> 중)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부일민족반역자인 친일행위매국노에 대한 강력저항하는 조문기 선생 

어차피 될 대로 다된 나라에서 민족이니 역사니 지껄여서 뭘 하랴 싶으면서도 친일파 문제 하면 입 다물고는 못 배기는 것은 아마도 조문기 선생(애국지사)을 빼놓아선 안 될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새싹을 냄과 같이, 내가 암살되어 나와 같은 애국자들을 많이 낼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겠다." (30여 년간의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여정을 끝내고 환국한 백범이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제보 받을 때마다 남겼던 유언이다.)

'20세기 가장 존경할 만한 민족지도자'를 선정함은 물론, 분단시대 북한의 주민들마저도 백범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백범정신 실천'을 위해 투신해 온 분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선생이 유언한 대로 선생을 닮은 애국자들이 사시사철 우리 조국 강산에서 꽃처럼 피어난 가운데 우뚝선 조문기 선생.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자리인 '부민관'에서 광복을 3주일 앞둔 1945년 7월 24일, 일제는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패망 뒤 예기되는 후환을 미리 싹쓸이하기 위해 이 땅의 독립운동자와 민족지식인 2, 30만 명의 명단을 만들었는데 그 살인 하수인으로 뽑힌 자가 바로 박춘금이다. 친일 매국노 박춘금 주도로 부민관에서 일제 패망 직전의 마지막 발악으로 "아시아민족분격대회" 집회를 열고 있었다.


조문기 선생은 강윤국, 유만수 동지와 함께 식장에 잠입해서 사제 시한폭탄 두 발을 설치, 폭발시켰다. 이 의거로 19세인 청년 조문기를 김구선생을 위시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총애 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야인시대 방송 드라마에는 김두환의 승인과 협조로 한 것으로 묘사 됐는데 이것은 거짓임이 밝혔다.)


그러나 청년 조문기는 광복 직후 산속 깊은 곳(설악산 등)으로 은거하였고, 친일정권이 들어서자 ‘제2의 부민관 폭파 사건(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항의)’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격은 뒤 다시 경기도 화성의 고향으로 돌아가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초근목피의 세월을 살았다고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 2003년 12월 29일 국회 예결위에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자료 조사에 책정된 예산 5억원 전부를 폐기한 상태에서, 지난 2004년 1월 <친일인명사전> 편찬 성금 5억달성 기념 행사에서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사회를 대변하는 책 <슬픈 조국의 노래>


<슬픈 조국의 노래> 책에 나와 있는 내용 요점을 좀 더 열거하겠다. 남한만의 ‘단정(단독정부)’을 반대한 인민청년군 사건, 이승만 암살 정부전복 음모 조작사건, 성시백 사건을 비롯한 각종 사건에서 1948년 청년 조문기는 미군정과 이승만이 친일경찰을 내세워 남북협상파에 대해 체포·고문을 자행하며 단정 수립을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경고’하려 했다.


옛 독립운동 동지들을 모아 북한산 6개소에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키로 했다. 동시에 봉화를 올리고 서울 시내 고층빌딩 수십 곳에 “통일정부 이룩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 같은 글이 적힌 펼침막 내건 뒤, 공중에 총 몇 발을 쏘는 평화(?)적 무력시위를 계획한 사건이었다.


단정수립 반대 무장세력이 있는 것처럼 시위를 벌여 이승만과 미군정의 노골적인 남북협상 방해를 견제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조직에 숨어든 ‘프락치’ 때문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체포된 청년 조문기는 경찰서 취조실에서 악명 높았던 친일경찰 김종원에게 고문당했다고 한다. ‘해방’이 됐다는 조국 땅에서 또다시 악랄한 친일 경찰한테 대못 박힌 각목으로 맞았다. 못이 몸속으로 쑥쑥 들어오는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하며 청년 조문기는 피눈물을 삼켰다. “분통 터지고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슬픈 조국의 노래 중에서)


8.15 광복절에는 행사장에 가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독립투사


우리나라에는 많은 독립운동가가 계시지만 평생을 독립운동하는 올곧은 마음으로 사신 분은 정말 흔치 않다. <슬픈 조국의 노래>를 출간해 뜻있는 후손들과 애국동지들의 심금을 울렸던 책.


"우리가 목숨을 걸고 찾으려했던 것은 분단된 조국이나 친일파 천국이 아니라고요. 친일파가 청산된 조국을 찾으려 한 건데, 이건 독립운동해서 나라 찾아 친일파한테 진상한 꼴이 된 거예요. 거기다가 나라도 분단되고···, 그러기에 남북통일과 친일파 청산이 이뤄져야 진정한 해방이고 독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나는 올해도 광복절날 기념식장에 가지 않을 겁니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기념식장에 초대돼 참석하고 청와대로도 초청돼 만찬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초라하지만 올곧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은 언제나 그런 자리를 피하셨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간다.”(슬픈 조국의 노래 중에서)


우리 '민족반역자처단협회' 동지들이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을 살아생전 병문안과 안부를 묻고 독립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니 민족의 정기를 조금이라도 바로잡고자 한다면 이대로 조문기 선생을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독립투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조문기 선생을 살아생전 병문안과 안부를 묻고 독립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 선생님께서 유언을 하시는구나’/ 애국지사 조문기 선생님 병문안 후기, 사진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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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민처협 깃발과 동지>
  


일요일 단풍구경 등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5005번 버스에 몸을 맡기고 1시간 남짓 걸려 오후 4시 3분 경 용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두리 번, 약속 장소인 롯데리아에 가니 객만 있어서 ‘워라! 아직 한 X도 안 온 것이여? 뭐여...’ 속으로 지껄이며 대벙개 주인 청정 동지께 전화하니 그곳에 없고 터미널 입구에 천인유의자 횃불 동지가 있다고 전언...


횃불님은 저를 보고는 놀라운 제스츄어를 하며 옆에 다소곳이(아마 횃불님에게 은밀히 데이트하자고 꼬심...) 귀엣말을 하고 있는 유의자님께 보고햇습니다. ‘소산이가 한복입고 왔당께요...’ 하자 유의자 동지는 자신을 따라 한복을 입는 제 모습을 비꼬기라도 하듯이 ‘옷이 좀 적은디 왜 입고 왔어...’ 이렇게 말하지 뭡니까.


할 수 없이 ‘아 글쎄 가을철에 겨울 옷 세탁하라고 했더니 이것까지 세탁해버려 줄어 들었다’라고 말하니 횃불님‘ 그럼 세탁하면 안돼요?’하고 묻길래 ‘드라이 해야지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쭈글쭈글 줄어든다’고 답했습니다.


‘죽장님은?’ 하고 묻자 ‘PC방에 있다’고 하길래 ‘영감탱이 그새를 못 참고 아이들마냥 무슨 게임을 한다냐?’하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반가운 강호동 동지가 오셨고 병원으로 이동하기 전 의논 결과, 빨리 쾌차하시라는 뜻에서 겨울 내의를 준비하기로 결정, 누님과 동생 사이인 횃불, 유의자 동지가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다정스럽게 시장통으로 빨려 들어가셨습니다. 죽장님은 자신이 횃불님과 가야 되는데 유의자님이 가시자. 연신 ‘에세1’ 담배를 쭉쭉 빨다가 성에 안 차셨는지 한 개피 더 뽀끔뽀끔 피우셨습니다.


택시를 탈까하다가 가난한 사람들이 무슨 ?시? 하며, 청정님은 6000번 버스를 타자고 하셧습니다. 근데 버스 값이 1700원이라서 6을 곱하면 1만원이 넘었습니다. 3 엔드 3으로 ?시 2대를 나눠 타고 간다 해도 남을 돈이었습니다. 요즘 택시업계가 불황이라고 하니 다음엔 색시 대하듯 ?시 좀 타줍시다!


용인정신병원 옆에 있는 ‘효자병원’. 그 입구에서 조선의용군 동지가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는데 아름다우신 횃불님이 애국지사 조문기 선생님께 드리는 글을 쓰라고 억압적으로 그것도 안 쓰면 동지에서 제명시켜 버린다는 눈빛을 보내셔서, 할 수 없이 제 특유의 달필을 선 보였는데, 다들 ‘그럼 그렇지. 니가 글 재주는 쪼까 있을지 모르지만 완전 졸필이구만 누가 알아나 먹겠냐고...’하는 눈치들이셨습니다.  하지만 막상 조문기 선생님은 10여분 동안 그 글을 읽으시고 또 읽으셨습니다. 손도 놓지 않고 소중히 ‘가보’로 보관하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안 그래요? 놀고 있다구...허허 큰일이네 글 솜씨 뽀록나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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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조문기 선생님!


소원하나 있습니다.

부디 건강을 되찾으셔서

우리 민족을 바르게 인도하여 

민족정기를 세워 주십시오.


                                2007년 11월 4일

                              단기 4340년

민족반역자처단협회 동지 일동


조선의용군 동지가 오신다고 하셔서 병원 입구에서 기다렷습니다. 그 사이 사진을 박으니 지나가는 여성 분이 ‘왜 찍죠?’하고 물어서 ‘하이고 얼굴도 예쁘시고, 병문안 왔는데 병원이 아름다워서요. 의사신가요?’ 물으니 간호사 랍니다. 유의자 동지가 오셔서 ‘뭔 농담을 하냐?’고 하시기에 ‘함부로 사진 박지 못하게 한다. 카메라 빼앗길지 모르니 예쁘다고 능청을 떨었던 거요’하고 말하니 ‘그래요?’하며 고개를 갸우뚱 합디다.


반가운 조선의용군 동지와 비공개하기로  한 분이 오셔서 인사한 다음 사진을 박자고 하니 죽장님 ‘ 함부로 사진 박지 못하게 돼 있는거 몰라...’ 하고 방해를 하시려고 하길래 ‘아니 그럼 쪼르르 몰려다녀야 하냐고?’라고 항의하자 ‘그럼 찍어’ 하고 말씀하셔서 민처협 로고를 들고 촬영(횃불님은 볼일보러 가셔서 함께하지 못함)하고 6층 병실로 가는데,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한 사람만 타게 되었더군요. 서로 ‘뭐야’ 하시며 의아스럽게 생각했는데 주인이신 청정님은 우릴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찾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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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민족반역자가 친일매국짓에 참회하고 사죄하기 전까지는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투쟁만 하다 사라집니다.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가 몸이 약해져 동지는 되지 못하겠지만 협력자가 되겠습니다“


615호실은 1인실이 아닌 8인실 이었습니다. 아마 다들 ‘친일매국노놈들은 돈이 많아 특실을 쓰겠지만, 애국지사들은 노년도 돈이 없어 이렇듯 여러 환자들과 함께 병마와 싸워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제일 안쪽에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님이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병간호하시던 사모님은 집에 가신 상태라서 도우미 2분이 저희 동지 10분을 맞으며 선생님을 깨우셨습니다. 선생의 눈망울이 어쩌면 그렇게 청정할까요? 처음 치매기가 있으시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우리가 간 날은 너무나 총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친일매국노를 처단하는 민족반역자처단협회 동지들입니다’하고 보고하자 선생은 ‘그래! 내가 일어나지 못하니 어쩌나 손님을 이렇게 맞이하는 게 아닌데...’ 연신 ‘미안하다 죄송하다’를 말씀하셔서 ‘괜찮습니다’하고 말씀 드렸지만 ‘식사라도 같이 해야할텐데...’하시며,


선생은 우리를 가리키며 “이쁜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 민처협? 처음 들어 봤습니다. 왜 이리 낯설지.이런 단체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하고 말씀하시기에 그동안 우리와 같이하는 단체,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선생은 2대 이사장을 지냈음)에서 알리지 않았거나 숨겼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엇습니다.


“선생님 빨리 쾌차하십시오“하고 말씀 드리자 ”민족 앞에 부끄럽습니다. 100세가 다 되어 힘이 없습니다. 살날도 머지 않았습니다“하고 말씀하시기에 감정이 복받쳐 오더라구요. ”아닙니다. 선생님은 오래 사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뻐만 해주시지 말고 질타해 주십시요“라고 말씀 드리자 선생은 ”투쟁만 하다 사라집니다.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가 몸이 약해져 동지는 되지 못하겠지만 협력자가 되겠습니다“


죽장님이 동지를 대표해서 “빨리 쾌차하셔야 됩니다”하고 인사를 드렸고, “저희들은 한달에 한 번 친일매국노규탄 집회를 가지고 있고, 살아있는 민족반역자들을 찾아내어 사죄를 받으려고 하고 잇습니다...”등등 민처협 활동을 보고 드리자, 이에 선생은 “내게 생명력이 남아 있다면 힘을 가지고 노력(친일매국노처단)할텐데...이런 단체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와 활동면에서 보니 내게는 큰 힘이 됩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침대에서 이렇게 귀한 손님을 맞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며 연신 미안하고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되뇌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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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국민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리자, 선생은 “우리나라가 엉터리입니다. 들썩들썩 살맛나게, 죽어 썩어 있는 나라 말고 살아 용솟음치는 나라를 만들어 주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이 나서 주시어 엉터리인 나라를 . 열심히 할 일, 또 내가 할 일이 남아 있다면 여러분이 해달라. 싸우다가 내 인생이 끝나고 있습니다. 내가 100세가 가까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만, 여러분과 내가 손잡고 내가 힘이 없으니 동지는 못되더라도 협력자가 되겠습니다.”하고 또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선생님께서 유언을 하시는구나’하고 생각이 들자 감정이 복받쳐 오더군요.


이어 선생은 우리 동지들을 한 사람씩 불러 손을 꼬옥 잡아 주시며 ‘여러분들이 자랑스럽다’는 눈망울을 보내셨습니다. 조선의용군 동지는 선생께 큰 절을 올렸고 “살아 계실 때는 민족의 지도자이셨고 나중에 민족의 신이 되어 주십시오”하고 인사도 드렸습니다.


결국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청정님은 대성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유의자님도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애국지사를 저렇게 쓸쓸하게 보내야만 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올해가 가기 전 병문안을 다시 오자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이 하셨던 말씀을 옮깁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찾으려했던 것은 분단된 조국이나 친일파 천국이 아니라고요. 친일파가 청산된 조국을 찾으려 한 건데, 이건 독립운동해서 나라 찾아 친일파한테 진상한 꼴이 된 거예요. 거기다가 나라도 분단되고···, 그러기에 남북통일과 친일파 청산이 이뤄져야 진정한 해방이고 독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나는 올해도 광복절날 기념식장에 가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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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2.29 19:11

    첫댓글 이땅에 아직도 저런 분이 생존해 계시는데, 정작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투쟁하시 독립투사분들이나 그 후손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친일민족반역자들이나 그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사는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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