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을 주신 아버지(2)
엡 3:14-21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 설 교 >
충만한 삶의 비밀
엡 3:14-19 / 민경설 목사
최근에 복권에 당첨되어 부자가 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서 연구한 것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대부분이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를 연구한 연구소에서는 인간의 만족이나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는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형제가 부모의 재산을 가지고 싸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4-15)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생명에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은 충만해지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그러나 충만한 사람은 말씀이 은혜가 되며 자신도 잘되고 남도 잘되게 합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4-15)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 모든 사람이 충만해야 합니다. 충만한 삶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속사람이 강건해야 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3:16) 영광이라는 것은 외적인 충만을 말합니다. 풍성이라는 것은 내적인 충만을 말합니다. 즉 외적인 충만과 내적인 충만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세상의 영광은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광, 하나님의 영광은 내적으로부터 와서 외적인 영광까지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두 번째, 믿음으로 예수님이 마음속에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3:17)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을 때에만 주님이 마음속에 계십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해야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능력은 주님이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께 뿌리가 굳게 박혀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터가 굳어지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인정하고 이제는 주님이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부모의 사랑은 그 자녀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면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지식에 넘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충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자신을 구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십시오. 날마다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 깊이 뿌리를 박으십시오. 아버지의 충만이 당신의 충만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승리의 비결
엡 3:14-19 / 김 조 목사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을 위한 기도문을 통해 로마의 감옥에서 자신이 달려왔던 것처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달려가는 자들에게 사역의 승리자로서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비결은 바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으로,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비결들을 붙잡고 이번 한 주간 세상에 나아가 승리하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1. 내면을 강하게 하라.
바울의 기도내용을 보면,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합니다. 이는 내면이 다른 것에 의해 침범을 받아 무질서하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면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흔히들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들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잠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품느냐에 따라 그 삶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서 긍정적인 삶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내면에 부정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먼저 우리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삶의 변화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됩니다. 내면에 긍정적인 것들을 채워보십시오. 내면의 방향을 긍정에 맞추어 놓으면 부정적인 것들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에 맞추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온갖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점령하게 됩니다.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라고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믿음과 승리에 관한 생각으로 마음을 채워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시작하지 마십시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오늘도 승리할 것을 그려 보십시오. 오늘 하루를 즐기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시편기자처럼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이날은 주님이 만드신 날이다. 행복하게 살겠어. 기쁨으로 살맛나게 살겠어. 열심히 일하고 복의 통로가 되겠어. 오늘은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다.” 내면의 부정적인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에 일치시켜 내면을 강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복을 기대함으로 살아가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관계의 달인이 되라.
바울은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즉 승리의 비결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던 헌신과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는 관계의 달인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관계에 있어서 열려 있는 모습을 통해 그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처세술과 같은 관계 기술을 배운다고 해서 관계의 달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고 그른 것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잘못된 것을 품고 사랑으로 감싸 안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온유함을 닮아갈 때, 우리의 마음은 더 넓어지고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허물과 실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바르게 돌아설 때까지 참아주고 기다려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적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품고 사랑으로 안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수할 때에는 잘못된 길에서 바른 길로 돌아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내함을 닮아갈 때, 상대를 배려할 수 있고, 참아 기다려 줄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참고 기다려 주는 것이 관계를 아름답게 한다는 것입니다. 삼락가족 모두가 예수님처럼 온유한 자가 되어 사랑으로 세상을 품고, 인내함으로 기다릴 줄 아는 관계의 달인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르라!
바울은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생각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역사를 완성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많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 모든 생각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각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든지, 아니면 자신만의 생각이든지, 또는 사탄이 주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생각들이 부정적인 것이라면, 그것들은 반드시 사탄에게서 온 것이기에 즉시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상태에서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말씀대로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에는 그 어떤 걸림돌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빛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통해 위대한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단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원수는 우리에게 문제가 너무 커서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는 우리를 하찮은 존재라고 깔아뭉개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에게 위대한 인생을 약속하십니다. 원수는 우리가 성공할 수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의 말을 믿겠습니까? 누구를 따라 가겠습니까? 빌4:8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 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원수의 거짓말에 속지 말고 그 꼬리를 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결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따라감으로 승리하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삼락가족 여러분 모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영적전쟁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가르쳐준 비결을 꼭 기억하십시오. 먼저 자신의 내면을 강하게 하십시오. 관계에 있어서 달인이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십시오. 그러면 이번 한 주간을 마무리 할 때에 우리 모두가 승리를 안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할렐루야를 외치고, 승리의 기쁨을 가슴에 안고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더 깊게 높게 넓게
엡 3:14-19 / 민경설 목사
001년도를 맞이하여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올해에는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영.육으로 강건하고 풍성한 열매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들려오는 많은 어려운 소식이 있지만 긍정적이고 축복된 마음으로 주님을 더 깊고 높고 넓게 알고 체험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발생되는 어려움과 많은 문제들은 기초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약할 때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그 어느 것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신앙의 기본이 든든해야 승리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기본이 든든한 신앙이 생산력이 있고 힘이 있어서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사단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21C를 본격적으로 열어가는 2001년도의 표어를 예수를 더 깊고 높고 넓게 알고 체험하는 교회와 교인이 되자고 정한 것입니다.
(고전2:10-11)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고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를 얼마나 더 깊고 높고 넓게 아는가가 승리의 관건이며 신앙 기초의 원리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를 아는 신앙의 기본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1. 속사람이 강해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신앙은 겉이 아니라 속사람이 강해야 합니다. 속사람은 거듭난 생명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영이기에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오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속사람이 강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나님은 겉을 보시는 분이 아니며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이 중요합니다. 속 사람이 강건하려면 속 사람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말씀이 구체적으로 역사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때 속 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예수를 모시는 신앙입니다.
(엡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가 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신앙의 원리는 믿음으로 우리 마음속에 예수를 모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마음에 역사 하는 조건이 우리가 믿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성도의 문제는 실제 상황 속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늘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것이 신앙의 두번째 기본 원리입니다.
3. 예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엡3:17-19)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믿고 예수사랑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 신앙의 기본은 작은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때 믿음이 커지므로 사단이 엄습하지 못하여 최고의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은 믿음으로 모시고 헌신할 때 받는 것입니다. 모두 이러한 사람으로 올 한해를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등록자: 광진교회
2002/5/31(금)
주님을 더 깊게 높게 넓게 (엡3:14-19)
2001년도를 맞이하여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올해에는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영.육으로 강건하고 풍성한 열매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들려오는 많은 어려운 소식이 있지만 긍정적이고 축복된 마음으로 주님을 더 깊고 높고 넓게 알고 체험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발생되는 어려움과 많은 문제들은 기초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약할 때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그 어느 것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신앙의 기본이 든든해야 승리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기본이 든든한 신앙이 생산력이 있고 힘이 있어서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사단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21C를 본격적으로 열어가는 2001년도의 표어를 예수를 더 깊고 높고 넓게 알고 체험하는 교회와 교인이 되자고 정한 것입니다.
(고전2:10-11)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고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를 얼마나 더 깊고 높고 넓게 아는가가 승리의 관건이며 신앙 기초의 원리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를 아는 신앙의 기본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1. 속사람이 강해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신앙은 겉이 아니라 속사람이 강해야 합니다. 속사람은 거듭난 생명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영이기에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오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속사람이 강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나님은 겉을 보시는 분이 아니며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이 중요합니다. 속 사람이 강건하려면 속 사람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말씀이 구체적으로 역사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때 속 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예수를 모시는 신앙입니다.
(엡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가 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신앙의 원리는 믿음으로 우리 마음속에 예수를 모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마음에 역사 하는 조건이 우리가 믿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성도의 문제는 실제 상황 속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늘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것이 신앙의 두번째 기본 원리입니다.
3. 예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엡3:17-19)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믿고 예수사랑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 신앙의 기본은 작은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때 믿음이 커지므로 사단이 엄습하지 못하여 최고의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은 믿음으로 모시고 헌신할 때 받는 것입니다. 모두 이러한 사람으로 올 한해를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엡 3:14-19 / 백장흠 목사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한 아내가 되고 싶고 행복한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교회생활도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복하겠습니까? 행복의 제1조건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건강입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의 『행복론』에서 행복한 사람은 네 가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첫째가 명랑한 정서라고 하였습니다. 매사가 즐겁게 보이는 것입니다. 주부가 남편 위해서 열심히 도와주면서 삽니다. 그것이 좋아야 합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수고할 때에 기쁨을 느끼는 것 같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즐겁다면 이는 분명히 행복한 주부입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려야 합니다. 모든 게 마음에서부터 즐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감사가 충만합니다. 매사에 만족입니다. 이런 이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건강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먹고 쓸 수 없다면 재산이 아닙니다. 건강해야 여행도 다닐 수 있습니다. 건강해야 음식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건강해야 자랍니다. 건강한 자녀를 가진 이들은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관심은 건강입니다. 교회도 건강한 교회는 복된 교회요, 그런 교회는 성장합니다. 소위 말하면 멋진 교회가 됩니다. 멋진 교회 타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입니까? 매스컴을 타는 교회, 목사님이 설교를 잘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 좋은 이미지가 있어서 좋게 소문난 교회, 목사님과 장로 및 제직자들과 갈등이 없어 평화로운 교회, 교회 재정으로 예배당 치장보다는 외부에 선교와 구제에 사용하는 교회, 그리고 담임 목사님이 청빈하고 윤리적으로 본을 보이는 교회 등을 멋진 교회라 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게 이상적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는 지상에는 많지 못합니다.
문제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도 멋진 교회가 되는 것도 나 자신이 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혹은 교회적으로 건강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1. 사랑이 있습니다.(행전 2:42)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거룩한 가족 공동체입니다. 가정에 사랑이 없다면 그건 하숙방만도 못합니다. 가정이 좋은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합니다. 교회를 가정같이 가정은 교회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을 우리는 새 가족 이라합니다. 그러면 이미 있는 성도들은 무슨 가족입니까? 그대로 가족입니다. 신자들이 교회에 오시면 가정 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똑똑한 아들과 함께 공원을 산책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아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애야 너 아빠 존경하니 아들이 아빠를 정말 존경해요. 그때에 아버지는 좋은 것입니다. 왜 가족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그렇게 좋답니다. 그래 무엇이 존경스러우냐. 저는 아빠가 엄마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이 존경스러워요. 그리고 엄마가 아빠를 너무나 사랑하시는데 존경스럽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사랑하니까 보기가 좋다는 말입니다. 자녀들에게서 존경받고 싶으면 가족간에도 사랑하여야 합니다. 가정이 건강하면 사랑이 있어야 하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사랑으로 일치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정치적으로 일치됩니다. 아니 이익집단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면 하나됩니다. 그것을 당이라고 합니다. 당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닙니까? 진정한 사랑이란 이익추구 하는 게 아닙니다. 나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상 당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남편이 남의 집에 일 다니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아내를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하루는 아내에게 돈 만원을 은밀하게 주면서 당신 많이 피곤해 보여 내일 몰래 혼자 가서 값이 싼 고기뷔페에 가서 영양보충 좀 하구려 그럽니다. 돈을 받아 든 아내는 혼자 고기 먹으러 갈 수가 없습니다. 아침식사 마치고 노인정으로 가시는 시아버지 손에 쥐어드립니다. 아버님 용돈 한 번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것으로 가장 친한 분과 함께 점심이라도 사드세요. 너무나 고마움을 느낀 시아버지가 고생하는 며느리를 생각하면서 그 돈을 쓰지 못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설날이 돌아왔는데 손녀딸이 할아버지께 세배합니다. 며느리가 주었던 그 만원을 자라서 학교 다니는 손녀딸에게 세배 돈으로 주었습니다. 손녀딸이 엄마에게 주면서 나중에 가방이나 사달라고 합니다. 돈을 받은 아내는 남편이 생각납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요즈음 남편이 힘들어 보입니다. 조용히 양복 호주머니 속에 딸이 맡긴 만원을 넣었습니다. 여보 이 돈으로 점심이라도 한 끼 드세요 라는 쪽지와 함께 말입니다. 이런 가정은 건강한 가정입니다.
사랑하면 서로가 위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서로 위해 주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야말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사랑하여 위해주는 가족들이 서로가 흠낼리 없습니다. 목회자가 신자를 진정으로 위해주고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주는 즉 세워주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사랑하면 허물을 가리워줍니다. 약점은 말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약점이나 허물을 남들에게 소문냅니까? 감춥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면 서로가 대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셔서 누구와 만나 이야기해 본 일이 있습니까? 만남이 반가워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와 자매입니다.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말을 합니다. 교회에 나오신 분들이 친구가 세 명 이상 있으면 그 교회에 정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깊이 교제하십시오. 만나시고 인사하고 이름도 알리고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란 용서입니다. 사랑에는 오해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섭섭한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일시적이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서로 용서합시다. 섭섭했던 것 노여웠던 것을 잊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헌신입니다. 서로가 희생합니다. 사랑이란 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헌신합니다. 건강한 교회 진단을 하는 이들이 성경적인 교회인가? 헌신이 있는가? 에 따라 진단결과가 나옵니다. 주님께 헌신적으로 일하세요. 봉사하세요. 그런 말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약해서 그럽니다. 건강한 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온전히 헌신합니다.
2. 건강한 교회는 기도에 전혀 힘씁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숨기려고 합니다. 숨겼다고 문제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문제를 잊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십니다. 여행을 다닙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습니다. 잊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해결하여야 합니다. 어떻게요? 기도로 해결합시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올 수 없느니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면 답이 나옵니다. 한나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가슴에 맺힌 한이 있었습니다. 자녀가 없습니다. 미친 듯이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태 문을 하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는 게 있습니까?
소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필요가 있어 기도하면 하나님은 채워 주십니다.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식욕이 왕성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이같이 기도로 욕망이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합니다.
교회가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성도들이 기도하면 충성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교회의 일꾼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니까 영웅심이 생깁니다. 내가 굉장한 사람인 줄 압니다. 기도하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저절로 고백이 나옵니다. 겸손해집니다. 기도하면 절망에서 소망이 생깁니다. 잃었던 것을 다시 찾게 됩니다. 건강을 잃었습니까? 계속 기도하세요. 건강을 되찾게 하십니다.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었습니까? 무조건 기도하세요.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무런 염려 없이 복되게 승리하시던 분이 왜 갑자기 넘어지던가요? 중요한 건 한 가지입니다.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분주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분주하더라도 우선이 기도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덜 분주합니다. 영적인 축복을 가로막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기주의와 기도하지 않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중보기도 하세요. 우리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위하여 기도해 본 일이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았으면 다시 생각해보세요. 나는 남편으로서 부족한 게 있구나. 아내로서 남편 위해 기도하지 않았으면 문제의 아내입니다. 남편들이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아내의 기도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잘못이 없습니다. 성도가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으면 신자 자격이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선한 목자는 못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주는 게 사랑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면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충성입니다. 우리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예배 전에도 기도합니다. 예배가 끝나고 기도합니다. 기도하세요. 그때 새로운 비전이 생깁니다. 꿈을 꾸게 됩니다. 비전이란 무엇입니까? 미래에 대한 목적이며 청사진입니다. 왜 피곤합니까? 지칩니까? 비전이 없거나 있어도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비전은 위대한 사람을 만듭니다. 이런 비전은 언제 주어집니까? 기도할 때 주십니다. 비전이 있는 교회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승리의 자세를 갖게 합니다. 언제요? 기도할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누가 이깁니까?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뒤로 물러서지 않는 사람, 투지의 사람이 이깁니다. 진정한 용기는 기도할 때 주어집니다. 힘들어도 어려워 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기도를 시작합시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구하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기도하면 승리합니다. 마귀의 유혹에서 승리합니다. 사람들이 시험할 때에도 승리합니다. 교회가 전심으로 기도할 때에 능력 있는 교회가 됩니다. 병든 이들이 나음을 얻습니다. 기도하다가 병이 낫지 않는다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호전이 되는 것입니다. 낫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로 충성합시다. 기도회에 동참하세요. 먼저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어디를 갈 때에도 기도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일을 마쳤으면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전성도가 기도카드를 지니고 기도합시다. 기록해 남겨보세요. 언제 어떤 제목으로 기도하였는데 언제 어떻게 응답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기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3. 건강한 교회는 일하는 교회입니다.
사람이 일하면 건강해집니다. 어디를 가던지 병원에 가보세요. 무어라고 합니까? 운동하세요. 그럽니다. 운동해야 합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이 무엇입니까? 일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여야 합니까? 주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전도하는 일입니다. 전도는 우리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입니다. 왜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까? 왜 교회가 그렇게 많습니까? 전도하라는 명령에 의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전등에 불이 켜지지 않으면 전등불이 아닌 것 같이 교회가 전도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니라는 심한 말까지 합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생동안 하신 게 전도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해 왔노라”(막 1:38)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동안에 전도하셨습니다. 교회는 일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지옥가게 되었는데 우리가 전도하여 예수 믿게 하면 천국 갑니다. 남녀 노소 불문하고 예수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르면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예수를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여기에다가 하나를 더한다면 지속적으로 전도하라 입니다. 전도는 어느 기간에만 하는 게 아닙니다. 전도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게 세상이 좋아졌으면 합니다. 살기 좋은 세상이 왔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다같이 잘사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 가야 합니다. 방법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몰라서 안 믿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도리입니다.
전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특정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야 합니다.
전도는 하면 됩니다. 하지 않아서 안 되는 것이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면 듣습니다. 전도는 쉽습니다. 어렵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전성도가 전도하는 일을 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전도와 선교하는 일에 분주하면 다른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5. 건강한 교회는 평신도의 사역이 왕성합니다.
이상적인 초대교회를 보세요. 사도들보다 집사들이 크게 사역을 수행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목회자 중심에서 평신도 사역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한 예를 들면 구역을 누가 지도합니까? 구역장입니다. 구역장들이 구역원들을 잘 돌보면 교구담당자는 쉽습니다. 어느 외국 목회자는 한국의 구역제도를 보면서 이것이 교회와 성도를 건강하게 하고 지역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는 훌륭한 조직체라 하였습니다. 구역이 살아 활동하는 데는 평신도의 역할이 큰 것입니다.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소그룹 활동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소그룹은 개별성이 강합니다. 개성에 맞는 순서를 만들어서 같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소그룹은 친밀감이 대단합니다. (관계성) 아픔과 기쁨을 같이 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소그룹은 번식력이 강합니다. 구역을 통해서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관계전도입니다. 이 소그룹을 누가 합니까? 바로 평신도들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평신도가 성도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위로합니다. 권면 합니다. 성도들을 치유합니다. 싸매줍니다. 지난날의 교회는 목사 혼자 다 하였습니다. 목회자 중심의 교회는 예배 한 번 드리고 가면 그만입니다. 평신도 사역중심이 되면 훈련을 받고 섬기는 일에 앞장섭니다.
전 성도가 사역을 수행하여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달란트 대로 봉사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신도들의 의식변화입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새해는 전 성도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가지 이상의 봉사를 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건강하고 복된 교회가 되어져야 합니다.
병들어 있는 현대인을 가장 건강한 정신과 믿음을 심어줍시다. 우리 교회가 건강하여 사명을 다하는 교회를 이룹시다. 주님이 이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면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무릎을 꿇고 비는 기도
엡 3:14-19 / 이삼규 목사
어느 날 세 사람이 ‘가장 좋은’ 기도 자세를 놓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양손을 모아 위로 치켜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일어서는 것이 무릎을 꿇는 자세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작업을 하며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전화수리공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제가 겪어본 바로는 12m 높이의 전봇대에서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드렸던 기도가 가장 강력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자세로 기도하느냐가 아니라 여러분이 기도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든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육신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 참으로 좋은 자세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자세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하는 기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울은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칼빈은 ‘바울이 이 순간 실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라고 말합니다. 클라크도 ‘본문 전체에 가득 차 있는 경이롭고 영광스러운 광경이 그의 마음에 찼을진대 그가 실제로 무릎을 꿇었다고 한들 하등 부자연스럽지는 않다.’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기도할 때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두 손을 벌리고 서서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부복할 정도로 열렬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토록 간절하게 무릎을 꿇고 드린 기도는 어떤 것입니까?
1.능력을 위한 기도(16절)
여러분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제일 먼저 하십니까? 자신이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도제목을 제일 먼저 하실 것입니다.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그토록 무릎을 꿇고 그토록 간절하게 비는 첫 번째 기도는 능력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왜 바울이 제일 먼저 이런 기도를 드렸을 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지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닙니다.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넘어뜨리기 위하여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지금 별 걱정이 없이 사시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많이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이 진정한 축복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상생활입니다. 성경이 바로 요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생명은 죽음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생활’ 이것이 모든 성도들의 소망사항이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성도들을 보면 너무나 허약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성도들이 교역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이 당한 어려움을 완화시켜달라는 것입니다. ‘진통제’를 놓아 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교역자 손으로 넘어가는 것만큼 비극은 없습니다. 자신들은 뒤로 빠지고 교역자를 전명에 내세웁니다. 그러나 교역자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위로하고 무마하는 정도입니다. 물론 목회자가 해야 할 일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절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대신 살아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가서 부추길 수는 있고, 충고할 수 있고, 권면할 수 있고, 같이 걸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 걸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옥중에 갇혀 있는 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안타깝습니다. 제가 가서 그들에게 직접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가서 직접 뛰고 가꾸어서 그들은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지시고 빚으시고 고쳐내어 그들을 완전함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환난이 있습니까? 그 환경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그것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고난은 잠깐이지만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능력으로 강건케 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요구하는 기도 제목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속사람이 어떻게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을 까요?
1)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서 강건해집니다.
이 말씀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임재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출 33: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지치지 않고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었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사랑하는 세 제자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 그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었습니다. 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그런 영광을 목격하게 하였을 까요? 그들이 감당해야 할 중차대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의 영광을 체험한 그들은 다른 제자들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그토록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면서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영광은 부활하신 주님, 영광스럽게 된 주님을 그들이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 했을 때 ‘이가봇’의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이가봇’이란 ‘영광이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엘리 제사장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할 때입니다. 우리가 죄악 가운데 살면 영광이 떠납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영광의 풍성함을 체험하게 되고 따라서 속사람은 더욱 강건해집니다.
2)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속사람의 속성은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의 건강은 영적인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이 가능해 지는 법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영적인 힘을 키울 수 없습니다. '영적인 힘'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힘, 능력'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뒤나미스'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인 삶'과 '속사람'의 변화를 위해 활동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능력', '힘'을 의미합니다. 오직 이 성령의 힘, 능력만이 사람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토록 무능한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능력 있는 증인들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이라는 예수를 박해하던 자가 그 예수를 증언하는 전도자가 되게 된 것도 그 자신의 경험이나 내적인 성찰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성령의 힘에 의해서 된 것입니다. 즉 인간의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힘에 의해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건강해 지기를 원합니다. 건강한 정도가 아니고 강해지기를 원합니다. 이 '능력, 힘'을 뜻하는 헬라어 '뒤나미스'에서 영어단어 'dynamic'과 'dynamite'가 생겼습니다. 이 두 단어 모두 '활력이 넘치고', '강한 능력이 있는', '폭발력을 지닌'이란 뜻으로 쓰입니다.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된 사람은 이 사회의 어두움과 더러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파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조용하지만 그 마음속에 있는 이 놀라운 '성령의 파괴력'(dynamic power of the holy spirit) 때문에 그는 연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속사람'이 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무릎을 꿇고 비는 첫 번째 기도가 무엇입니까? 능력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속사람은 어떻습니까? 연약합니까? 강건합니까?
2.믿음을 위한 기도(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이 말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도의 '속사람'안에 좌정하시고 편히 계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속사람을 마치 편안한 집처럼 여기시고 오랫동안 기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계시게 하옵시고'라는 헬라어 ‘카토이케오’라는 말인데 이 단어는 ‘카타’와 ‘오이케오’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그 뜻은 “살다, 거주하다, 정착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 속사람의 집에 찾아오셔서 편히 거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Robert Munger라는 사람이 쓴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My Heart Christ's Hom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의 '집'으로 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들어가시자 그는 그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는 이방 저 방으로 다니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의 도서관으로 들어가셔서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모두 버리신 후,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셨습니다. 그 후 부엌으로 들어가시자 세상적인 메뉴로 짜여진 더러운 욕망들을 발견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사랑과 온유함으로 채우셨습니다. 부엌을 지나 식구들이 모여 교제를 나누는 거실을 들어서자 그 곳에서 세상적인 친구들과 게임들, 그리고 신변잡기들을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만나셨습니다. 옷장 속에는 숨겨진 더러운 죄악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방들과 옷장들, 찬장들을 청소하신 후에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런 후에야 이 집에서 편히 머물러 계실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내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내주하신다는 것은 그분과 같이 살면서 교제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그분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십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계시려면, 우리의 마음이 먼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관심과 꿈과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초점은 예수님에게 고정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실 수가 있습니까?
찬송가에는 몇 가지 유형들이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회개’입니다. ‘날마다 주와 버성겨 그 크신 사랑 버리고 방탕한 길로 갔다가 어머니기도 못 잊어……. 나 집에 돌아갑니다.’(333장)
둘째는 나를 구원해 주신 데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405장)
셋째는 그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내게 무엇인가를 하시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와 계심을 표현한 찬송이 있습니다. 85장입니다.
1절‘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여러분들도 구주를 생각만 해도 마음이 좋습니까?
2절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의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3절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앞부분은 객관적인 그의 사역에 대한 감격을 표현하는 찬송이라면 뒷부분은 주관적 문제에 대한 그의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4절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이 부분은 주관적입니다. 이것은 받은 사람만 아는 것입니다. 다른 부분은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확신하면 천국 가는 그 확신은 누구나 같은 것입니다.
5절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이것이 신앙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찬송이 저와 여러분의 찬송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기 위하여 속사람이 강건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만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모시고 살고 계십니까?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왕좌에 찾아오셔서 그 왕좌를 차지하시고 우리 삶의 왕 노릇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3.사랑을 위한 기도(17-19절)
우리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그리스도를 모실만하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면 드디어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도 않았는데 사랑이 어쩌고저쩌고 한다는 것은 결혼도 안 해 본 사람이 부부학을 강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안에 모시지도 않고도 모신 것처럼 ‘사랑’하고, 그분을 모셔야 되는 생활을 대신하기 위해서 ‘구제’를 합니다. 전도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오시고 나서야 어떤 의미에서 전도도, 구제도, 사랑도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시무하던 교회에 그 동네에 사는 분이 계셨습니다. 옛날에는 전도도 하여 그분이 전도한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막상 자신은 주님을 멀리하고 타락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모셔드릴 때 사랑이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후 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졌기를 바라노라
고후 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이것은 나무와 건물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나무가 든든히 서 있으려면 뿌리가 깊이 박혀야 합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나무는 뿌리가 깊이 뻗습니다. 그러기에 지진이 일어나도 그곳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건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터가 굳어지지 않으면 그 건물은 부실 건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까?
1)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2)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3)하나님의 충만하신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하는 이 질문은 사실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식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18절에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했는데 지식에 넘친다는 것은 지식을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도량형으로는 그리스도 사랑의 너비, 그 길이, 그 높이, 그 깊이를 잴 수 없습니다.
운전을 하고 가다보면 가끔 화물차들의 중량을 점검하는 곳들을 만나게 됩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는 화물차들은 반드시 중량을 재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는 칸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 무거운 것을 싫은 차가 도로나 다리를 달리면 파손되기 때문에 제한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저기 있는 저울은 어떻게 된 저울이기에 저렇게 짐을 잔뜩 실은 대형 트럭의 무게를 단번에 잴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그 저울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무게는 잴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려고 시도해 보았습니다. 유대교의 문헌 가운데 「시락서」라는 것이 있는데 「시락서」는 이 구절을 "하늘의 높이, 땅의 넓이, 바다의 깊이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느 성경주석은 그리스도 사랑의 너비는 전 세계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사랑이고, 길이는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내려가신 무한한 긍휼의 길이이고, 깊이는 무덤에 내려간 자와 같은 고통과 고난을 담당하는 것이고, 높이는 지금도 살아 계시어 우리를 위해 중재 기도를 드려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경 주석가는 "나는 이 구절을 실감 있게 주석하기 위해 힘썼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 세기에 걸쳐 여러 주석가들이 그렇게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고백이며 효과적인 설명입니다.
찬송가 404장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다 기록할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을 유한한 인간이 제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의 사랑을 측량하려고 하는 것은 태평양 한복판에서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재보려고 하 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범위밖에 있는 인간이 없고 그의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장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각(知覺)으로, 지식적인 깨달음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영각(靈覺), 영적인 깨달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새롭게 깨달으면 세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채워지는 유익이 있습니다.
둘째, 로마서 8장 35절에서 39절까지의 환희의 노래를 우리도 부를 수 있습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셋째, 우리 앞에 있는 문제들 때문에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빌었던 그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되 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를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채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속사람을 건강하게
엡 3:14-19 / 서정호 목사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곳에 해당되는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남미 지역 3개국에서 원주민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가족들 200여명이 모인 선교사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원주민 선교를 하면서 외롭고 소외된 마음과 선교현장에서 상처받은 마음들이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갈망하는 선교사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지원해온 파라과이 임성익 선교사님이 선교하는 파라과이 원주민 교회와 운영하는 남미 기독교학교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5000평 대지를 구입하여 원주민들을 위한 교회는 물론 유치원생들로부터 시작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그 나라에서 가장 수준 높은 학교로 운영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선교에 참여하시고 협력하신 우리 영암교회 성도님들께 눈물겨운 감사를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선교사대회에서 말씀 전하면서 그리고 선교지를 방문하는 중에 틈틈이 들려온 교회의 소식들, 몇 분 장로님들을 비롯한 열심히 투병하고 있는 병상에 계신 성도님들의 소식들과 권사님과 집사님의 모친상과 부친상, 그리고 목회자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아프게 하는 교회의 여러 소식들을 접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매일같이 기도하면서 여러 날들을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 사도의 세밀하고 포괄적인 기도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교회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이 풍성한 은혜와 능력으로 성도들 개개인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새해에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대체로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며, 자녀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느냐 하는 질문에도 그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인사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인사말이 건강하십시오 라는 인사입니다. 무엇보다도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건강하면 여유가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도 건강만 하다면 그것만으로 사회와 가정을 위해 크게 봉사하는 일이 됩니다. 가정에서 내가 건강하면 온 가족에게 여유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 식구 가운데 누구 하나가 병들면 온 집안이 우울합니다. 병든 사람만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가족 전체가 영향을 받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어떤 것을 먹어도 좋습니다. 차가운 것을 먹어도 좋고 뜨거운 것을 먹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약한 사람은 가는 감기 오는 감기 모두 다 걸립니다. 어쩌다 찬바람 한번 스치면 콜록거리고 콧물 흘리고 야단입니다. 툭하면 신경질을 내고 자기 아프고 남까지 괴롭힙니다. 이것은 모두 허약해서 그렇습니다.
어느 의사의 말이 건강한 사람은 위가 손바닥만큼 두툼해서 어떤 것을 먹어도 잘 소화시키는데, 신경질적인 사람은 종잇장처럼 얇아서 무엇이 들어가면 발끈하고 화를 내고, 화가 지나치면 위천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허약해서 휘청휘청하면 온통 문제투성입니다.
건강의 비결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결국 적당한 음식을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그리고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건강의 75퍼센트가 정신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한다고 뛰어보아야 그것은 25퍼센트 범위에 속하는 것이고 75퍼센트가 마음의 건강에 달려 있고 정신 건강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건강에는 외적 건강이 있고 내적 건강이 있습니다. 모든 병은 외적 건강을 잃어버리는 대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적 건강을 잃어버리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건강이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정신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면 육체적 건강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말은 속사람이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속사람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속사람의 건강은 오직 경건에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거룩합니다. 거룩함, 경건함, 그 속에 건강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떠나서는 건강이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성경말씀은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16절)" 성령이 능력을 공급할 때에 비로소 강건하다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내적 건강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육체적으로는 건강치 못한 사람이었지만 내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에 그 불편 한 몸으로도 순교할 때까지 건강을 지켜 일할 수 있었으며, 오늘 본문에서는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건강이란, 세계보건기구의 정의에 따르던 단지 무병하거나 허약치 아니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완전히 양호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병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건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건강하고야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에 육체도 따라 건강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말은 속사람이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속사람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이 속사람은 물질로써 건강케 할 수가 없고 사회적인 문제로써 건강케 할 수가 없습니다. 속사람의 건강은 오직 경건에 있습니다.아브라 함 헤셀이라고 하는 학자는 산다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함, 경건함, 그 속에 건강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경건이 없는 건강이라면 몸부림이요 발악입니다. 거룩함 속에 진정한 건강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떠나서는 건강이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성경말씀은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16절)"-'성령으로'입니다. 성령이 능력을 공급할 때에 비로소 강건하다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적 건강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약적인 경건이란 성령충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속사람과 겉 사람을 구분 짓습니다. 비록 겉 사람은 세월과 함께 후패해져 갈지라도 속사람은 복음 안에서 날로 젊어지고 싱그러워진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속사람이 강건하다는 말을 '건강한 인격'을 말합니다. 칼 융(Carl G. Jung)이라는 심리학자는 '존재에 대해서 개별화된 의식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라고 '존재의 개별성'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요즘 소위 신세대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그들은 남의 눈치를 많이 보지 않고 자기 나름의 자기주의가 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만 잘 살고 나만 부자 되겠다는 '이기주의적 개별성'과는 다르고 남과의 비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비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건강한 인격체가 못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한테 질질 끌려 다니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각기 개성이 있고 장단점이 있다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 다 자신에게 적절한 달란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좋은 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비굴의 노예가 되고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병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존재를 개별적으로 생각하여 남과 비교하지 아니하고 항상 개별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방황은 잘못된 자기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부정적 자아형성의 배후에는 상처받은 자기이미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나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나의 이웃들은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의 물음보다 더욱 절실하고 중요한 것은“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자아인식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자아인식에 대한 서로 상반된 두 개의 가치관이 존재하고 있는데 하나는 비교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의식입니다. 비교의식은 부정적 자아형성에 기여하고 창조의식은 긍정적 자아형성에 기여합니다. 모든 부정적 자아형성은 끊임 없는 비교의 갈등에서 빚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외모와 내 외모를 비교하는 것을 시작으로 환경이나 출신이나 지식이나 재능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하는 자기존재에 대한 회의에 빠집니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자기의 모든 것에 대해서 반항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반면에 창조의식을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 절대로 나와 유사한 다른 존재는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나는 누구를 향해 질투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나를 나답게 지으신 하나님은 내가 걸어야 할 나의 삶의 모습을 작정하시고 이를 위해 내 생애 속에 활동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나의 독특성, 나의 유일성을 독선의 차원이 아니, 창조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받아드립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히 나의 나다운 모든 상황과 존재의 모습을 사랑하고 수용합니다.
긍정적인 자아형성을 위한 세 가지 절대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소속감의 문제로 “나는 받아들여지고 있는가?”의 물음이고 둘째는 가치감의 문제로 “나는 요구되고 있는가?”의 자기 가치에 대한 물음이고, 셋째는 신뢰감의 문제로“나는 할 수 있는가?”하는 자기 능력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자아용납이 없을 때 우리는 소외감, 열등의식, 피해의식의 늪 속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롤로 메이(Rollo May)라는 심리학자는 건강한 사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란 수용성이 큰 사람, 즉 마음이 큰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은 마음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고 누구의 이야기도 잘 듣습니다. 다 받아들이고 다 수용하며 좀 더 깊이 사고하는 사람, 그가 바로 건강한 속사람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건강한 인격은 건강한 영혼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속사람을 향해야 합니다. 속사람이란 믿음으로 거듭나 새롭게 창조된 자아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생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때마다 '죽겠다, 망했다,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항시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입니다. 이런 사람 인격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왜 죽고 망하는 얘기만 하는 겁니까? 살고 흥하는 얘기 좀 하면 안 됩니까? 특히 지도자가 이런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큰일입니다.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남을 독려하고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항시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을 일으키는 말을 해야지 상대방을 주저앉게 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불씨에 기름을 갖다 끼얹어야지 불씨에 찬물을 갖다 끼얹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건강한 인격은 건강한 영혼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속사람을 향해야 합니다. 속사람이란 믿음으로 거듭나 새롭게 창조된 자아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인생의 멀미를 느낄 때
여러분은 멀미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차나 혹은 버스나 배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아주 정신이 혼미해지고 속이 매스꺼워지는 경우가 있는데 어디에 문제가 생겨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속에 만들어 주신 평형을 잡는 기관에 문제가 생겨서 그러합니다. 그 기관은 바로 우리의 귀에 있는데 달팽이 관이라고 하는 부분에 세 가지 관이 있는데 하나는 수직관이요 또 하나는 수평관이요 하나는 45도가 되어 있는 관입니다. 그래서 꽉 차있는 인파 액이 이 관에 있는 융털들을 이렇게 건드리면서 우리 몸으로 하여금 균형을 잡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멀미라고 하는 것은 너무 정신없이 막 움직이니깐 잠깐 동안 평형을 잡는 달팽이관에서 혼돈을 일으키기 때문에 속이 매스껍고 머리가 아프고 또 여러 가지 혼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이런 멀미를 느끼는 순간들이 더러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뚝 떨어지는 그런 순간도 있습니다. 성공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실패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돈을 다 잃어버리는 순간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는 기분이 우쭐하고 아주 좋습니다만 욕을 먹고 사람들에게 질책을 받을 때는 우리 마음마저도 아주 혼돈을 일으키게 되지 않습니까? 건강할 때가 있는가 하면 우리 몸에 병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해서 진행되면 우리 영적인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균형을 잡지 못하게 됩니다. 높이 올라갔을 때는 우쭐하게 되고 밑으로 떨어졌을 때는 낙심하게 되는 현상을 우리는 영적인 멀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에도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런 복잡한 삶을 사시면서 얼마나 많은 멀미를 느끼셨습니까? 오늘 우리 주님은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영적인 달팽이관을 수리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멀미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지혜를 말씀을 통해 주시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한 주일동안 다시 우리는 세상 속에 수많은 복잡한 일들을 바라보며 나가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또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7절)"-그리스도적 신앙, 십자가 중심적인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가만히 보면 저희 마음대로 노는 것 같아도 그 마음속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습니다. 장난감 가지고 같이 놀고 친구들과 놀고 하지만 그래도 여기 가까이 우리 어머니가 있다 고 하는 것을 의식하고, 그 믿음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멀리 갔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시간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여 달라고 말씀합니다. '계시다' '거한다'하는 말은 헬라어에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파로이케오'로 이것은 천막을 친다는 뜻이며 임시적으로 나그네가 거한다는 뜻이고, 또 하나 '카도이케오' 라는 말은 영구 거주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계시다는 말은 카도이케오를 말합니다. 주께서 우리 마음에 영원히 거주해 계셔야 된다, 그래서 그가 주인이 되시고, 그가 목적이 되시고, 그가 주도하사고 해야 내가 건강하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을 다스릴 때에 나는 건강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지수는?
어떤 청년이 차 사고로 인해서 큰 충격을 받아서 그만 두 눈, 안구를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 "내가 너무 출혈이 심하기 때문에 수술을 하겠지만 어차피 안구가 다 빠져나가서 눈을 볼 수는 없을 것일세" 하고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장님으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지"그런고로 나 수술하지 말아달라고, 이대로 죽을 것이라고, 바락바락 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 사람아, 생명은 소중한 것이야.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그리고 강제로 붙들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며칠 후에 붕대를 풀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 "축하하네. 자네는 분명히 실명을 했지만 자네를 위해서 안구를 기증해 주는 분이 있어 눈 하나는 볼 수 있을 것 같으네. 축하하네" 그랬습니다. 또 소리 질렀습니다. "애꾸눈으로 살기보다 죽는 게 낫지." 의사는 크게 책망을 했습니다. "자네를 위해서 멀쩡한 눈을 빼준 고마운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무슨 망령된 발악인가?" 그러며 붕대를 풀어주었습니다. 뿌옇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 점점 밝게 환하게 보이는데 눈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청년은 여기서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저는 한평생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감사한 이 감격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건강지수는 얼마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얼마의 건강이 있습니까?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을 주께 바쳐버리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사랑을 확인하세요. 그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사랑을 확인하고, 병들면 병드는 대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할 때 ,그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하게 은혜로 충만하게 될 때, 삶 자체가 소중해지고 세상도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정말로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속사람이 건강해 지는 순간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을 알게 됩니다. 지식에 넘치는 사랑, 분에 넘치는 사랑을 느낄 때에 거기서부터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 건강이 있습니다. 사랑을 느낄 때에, 사랑을 행할 때에,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이 있을 때에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건강할 때에 많은 사람에게 건강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건강할 때에 참아줄 수도 있고, 사랑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 모두에게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이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새롭게
엡 3:14-19 / 곽선희 목사
우리 한국 역사에 이태조와 무학대사의 대화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기에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태조께서 어느 때 무학대사와 대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사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돼지상이네, 그려." 돼지 닮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아, 물론 농담이지요. 그런데 무학대사는 이태조를 쳐다보다가 하는 말이 "임금님은 부처님 상입니다" 그랬어요. 이태조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 아무리 임금님과 신하의 이야기이지만은 농담은 농담인데 나는 자네더러 돼지 같다고 했는데 자네는 어째서 날더러 부처님 같다고 하는 건가?" 이때에 무학대사는 시침을 떼고 한마디했습니다. "그거야 물론 누구든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의 얼굴 보는 거죠." 나는 내 마음이 부처님 같으니까 다 부처님으로 보이고, 당신은 돼지 같으니까 나를 돼지로 보는 거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그래 뭐, 할 말이 없었지요.
여러분, 자기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을 봅니다. 자기 마음 생긴 대로, 행동도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 여러분 다 같이 앉으셨지만 여러분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들려지기도 하고 안들려지기도 하고, 이렇게 듣기도 하고, 저렇게 듣기도 하고, 이렇게 깨닫기도 하고 정반대로 깨닫기도 합니다. 내 마음 생긴 대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잠언 16장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용사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 mind control,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느냐? Mind control by my self is impossible, 이게 유명합니다. 여러분,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 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걸 인정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가끔 보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한다, 내 생각대로 한다. 뭐, 자신만만하게 얘기합니다만 그건 철없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소중한 요 내 마음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더라구요. 그걸 인정을 하면서부터 이제 그 생활이 시작됩니다요. 그래서 윤리학에서는 생각과 마음이 함께 하지 않는 행위를 행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몸만 움직인 거니까요. 그 마음이 문제거든요. 브라이언 카바로프라고 하는 분이 쓴 '마음의 정원'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마음의 정원. 마음은 마치 정원과 같다. 그래서 거기에 잡초가 나기도 하고 좋은 곡식이 자라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잡초는 심지 않아도 잘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요. 그런데 좋은 곡식은 좋은 종자를 심어도 잘 자라질 않아요. 그리고 잡초와 곡식이 함께 있으면 어느 사이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그리고 곡식은 시들시들 말라서 그만 죽어버려요. 그러기 때문에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그게 가꾼다는 얘기 아닙니까? 곡식을 가꾸고 김을 매주는 거예요. 부지런히 김을 매서 잡초를 제거해 주어야 그 땅에서 오는 좋은 기운을 받아서 영양을 받아가지고 곡식이 잘 자랄 수가 있는 것이거든요. 자, 우리 이 마음에 정원, 알게 모르게 못된 생각은 그저 무성하게 자라는 거예요. 별 노력 없이도 자라는 거예요. 그러나 좋은 생각과 착한 마음은 애써 보전하려고 애써도 어느 사이에 그만 시들어 버리고 마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그래서 불끈 화를 내고 깜짝 놀라요. '내가 언제 이런 사람이었던가? 내 마음속에 무서운 생각이 들어올 때, 어찌 내 마음속에 이런 악한 마음이 있단 말인가?' 놀라는 거죠. 놀랄 수 밖에요.
사람의 건강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사회학 적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Social Isolation. 이 사회적으로 소외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많은 사람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고 느낄 때, 고독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서며 그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때. 그런가 하면 Major Life Change 라고 해서 중요한 사건에 부딪힐 때가 있어요. 바로 배우자가 죽었다던가 자녀가 죽었다던가 엄청난 사건에 부딪힐 때, 그만 감당을 못합니다. 또한 자신감이 없고 자기 만족이 없을 때, 그리고 일에 대해서 불만할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생의 의미를 잊어버릴 때, 그만 점점점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건강이 허약해 질 때, 허약해지기 시작하면 가속화되면서 점점 무너져 내려갑니다. 그리고 Pessimism 이올시다. 염세주의요. 이런 잘못된 세계관, 비관주의가 내 마음을 자리잡게 됩니다. 딱 자리잡고 나면 만사가 어둡습니다. 만사가 괴롭습니다. 만사가 짜증이 납니다. 도대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벌써 자살을 하게 됩니다. 만성 자살이 문제입니다. 그래 요새 뭐 술을 먹지 마라, 담배를 피우지 마라, 뭐 그런 얘기들 많이 합디다만은 아, 누군 모르나? 그 사람 건강을 위해서 피우는 거 아니에요. 죽을테면 죽어라 하고 피우는 거지. 살고싶지 않아서 마시는 거예요. 폭탄주를 마시는 사람이 살자는 겁니까? 오늘 밤 죽어라, 하고 마시는 거죠. 불행하게도 다음날 아침에 살아나니까 걱정이지. 안 그렇습니까? 그거 살자는 게 아니거든요. 왜 이래야 되냐? 정신적으로 이미 죽었어요. 정신적으로 죽었기에 죽음을 위한 행동을 과감하게 거침없이 행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살고 싶지 않으니 남의 생명도 해하는 거죠. 너도 그만 살자 그 말이요.
이제 내 마음을 누가 다스릴 수 있습니까? 이 같이 기울어진 마음에서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이냐 말이요.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해야 될 사람이 쓰러지고 또 쓰러질 때, 졸고 있을 때, 예수님 말씀 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음에는 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해요. 마음과 의지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정말로 마음이 원했을까? 정말로 마음이 원하면 어떻게 잠이 오겠습니까? 정말로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님 내일 아침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어쩌다가 돈 몇 푼만 잃어버려도 잠이 안 오는데, 어쩌다 기분 나쁜 전화 한 통만 받아도 잠이 안와서 걱정인데, 그래 이게 잠이 올 시간입니까? 그러나 저들은 잤어요.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참, 이건 자비와 긍휼로 충만한 그런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이성과 마음은 별도라고 합니다. 지식과 감성이 다릅니다.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 또 의지와 마음이 별도로 갑니다. 이 따로따로 노는 괴리를 인정하고 바로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감성이라고 하는, 이 감정이라고, feeling 이라는 것은 이성과 의지보다 더 원초적입니다. 보세요. 자, 사랑해야될 줄 알면서 사랑해지질 않아요. 어차피 저 사람하고 이제 한평생 살다가 갈 거예요. 그러면 사랑해야 하잖아요. 마땅히 사랑해야 할 줄 알면서 만나기만 하면 미워해요. 또, 용서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잘못했다" 하고 내가 얘기해야겠다.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얘기를 해야겠다고 입으로 외우다가도 딱 만나면은 "용서 못해" 이래 버린다고요.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마음이 이렇단 말이에요. '정직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번번이 거짓말해요. '부지런해야 되겠다' 생각하면서 오늘도 여전히 게을러요. 때로는 '봉사해야 되겠다. 나는 봉사하며 살아야겠다' 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앞서요. 생각하면 감사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라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정말 따져서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죠. 그런고로 나는 범사에 감사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한숨이 나오고 원망소리가 나와요. 걱정근심에서 헤어나질 못해요. 이거 왜 이러는 겁니까? 내 마음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에요. 마음은 별도더라고요. 이 속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것보다 더 깊은 세계, 더 원초적인 그런 속성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이란 오직 성령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네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 말은 의지 이전의 말입니다. 내 생각이나 의지로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주의 영이 내게 함께 해서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을 주장해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먼저 깊은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니고데모에게 가르쳐 주실 때 '바람이 임의로 와서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성령도 그와 같으니라' 그랬어요.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성령이 내 마음을 주장할 때, 성령이 내 마음에 오실 때, 내가 이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내 심령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그의 어두운 과거, 그의 나약함, 다 이기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에 충만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룬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완덕에의 길' 이라고 하는 요한 타울러 라고 하는 분의 책이 있습니다. 그건 아주 수도사적인 글 입니다만은 그 속에서 내적 생명을 고갈하게 하는 것이 무어냐 이겁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세속적 교만'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라. 무엇인가 교만했다 이거요. 또 하나는 감각적 만족이다. 감각적 만족에는 반드시 죄책이 따라와요. 육체를 따라간 일에는 반드시 후회가 있게 마련이요. 또 하나는 분노와 의심과 성급함이다. 자, 그런데 이런 것들을 무엇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까? 내가 이길 수 있는 겁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내가 겸손할 수 있습니까?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까? 이 모든 악한 마음을 물리칠 수 있더냐고요. 그래서 말입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 중생하게 됩니다. 중생한 심령만이 이 모든, 이 어두운 마음을 물리치고 밝은 마음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것이고요.
또 두 번째는 오늘 성경에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해서 그리스도가 나를 주장하게 하는 것이지요. 요한복음15장 7절에 보면 '내 마음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알게 모르게 주님이 나를 주장하고 주께서, 주의 말씀이 내 안에 있어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실 때, 지식에 넘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항상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믿음으로 우리는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여러분, 소위 크리스챤이라는 말을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게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이, 그 믿음이 바로 믿는다는 뜻이에요. 교회 다닌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달라요.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에게 내 마음을 바쳐요. 그리고 그가 나를 다스려 주세요. 이건 희한한 능력이에요. 그때만이 자유할 수가 있고요.
또 하나는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이 새사람의 윤리성을 말하는 것이에요. 오직 사랑을 깨달아 나가는 것이에요. 계속 사랑을 깨닫는 것이에요.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그렇습니다. 물질로 되는 게 아니에요. 환경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집을 몇 번 이사가도 안돼요. 중요한 것은 은혜로써만 마음은 깨끗해 질 수 있고 굳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십자가의 사랑, 넘치는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요. 그리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겸손해 질 수 있어요. 내 힘으로 겸손할 수가 없어요. 몇 번 맹세해도 안돼요. 오직 성령으로만이 나를 부정하고 내가 참으로 겸손할 수 있고요. 겸손하게 될 때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모든 번민은 아직도 교만이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또 하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될 때 여유가 있습니다. 충만함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 확실한 종말과 미래가 보장되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이런 여건에서도 저런 여건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올시다.
데일 카네기의 '세가지 유형의 인간'이라고 하는 비판이 있습니다. 하나가 방관자입니다. 대부분이 방관자인데 방관자이면서 막연한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성공해도 두렵고, 실패해도 두렵고. 또 하나는 패배자입니다. 철저하게 패배의식으로 삽니다. 항상 실패한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왜요? 다른 사람과 같이 못하기 때문에 가진 것은 생각하지 않고 못 가진 것만 생각합니다. 항상 패배의식에 삽니다. 그런가 하면 참된 은혜의 사람은 승리의식으로 삽니다. 오늘 실패해도 이것은 다음에 성공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합동하여 선을 입은 것을 압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스케줄 속에 시나리오 속에서 된다고 믿습니다. 그런고로 그에게 여유가 있습니다. 또한,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의 응답은 사랑이요 사랑의 결과는 선함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의 마음은 선해집니다.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로 사랑받는 사람은요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아세요? 두 사람밖에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불쌍히 여기는 사람, 그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 사람들의 허물이 보입니까? 남 잘못하는 게 보입니까? 못마땅한 것이 있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내 죄를 구속하신 주님의 엄청난 사랑을 깊이 감격하고 보면은 두가지밖에 없어요. 아무 허물도 보이지 않아요. 잘못된 사람 보면 불쌍해요. 이것도 불쌍해요 저것도 불쌍해요. 나를 괴롭히는 그 누구도 불쌍하게만 보일 뿐이에요. 그 사람이 나쁘게 보이질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불쌍히 보이는 사람밖에는 없어요. 그리고모든 사람의 장점을 보게 됩니다. 단점이 보이지 않아요.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이에요.
어떤 청년이 차 사고로 인해서 큰 충격을 받아서 그만 두 눈, 안구를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 "내가 너무 출혈이 심하기 때문에 수술을 하겠지만은 어차피 안구가 다 빠져나가서 눈을 볼 수는 없을 것일세"하고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장님으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지"그런고로 나 수술하지 말아달라고, 이대로 죽을 것이라고, 바락바락 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 사람아, 생명은 소중한 것이야.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그리고 강제로 붙들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몇 일 후에 붕대를 풀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 "축하하네. 자네는 분명히 실명을 했지만 자네를 위해서 안구를 기증해 주는 분이 있어 눈 하나는 볼 수 있을 것 같으네. 축하하네" 그랬습니다. 또 소리 질렀습니다. "애꾸눈으로 살기보다 죽는 게 낫지." 의사는 크게 책망을 했습니다. "자네를 위해서 멀쩡한 눈을 빼준 고마운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무슨 망령된 발악인가?" 그러며 붕대를 풀어주었습니다. 뿌옇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점점 밝게 환하게 보이는데 눈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청년은 여기서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저는 한평생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감사한 이 감격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건강지수는 얼마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얼마의 건강이 있습니까?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을 주께 바쳐버리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사랑을 확인하세요. 그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사랑을 확인하고, 병들면 병드는 대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할 때 ,그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하게 은혜로 충만하게 될 때, 삶 자체가 소중해지고 세상도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정말로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그 사랑의 확증을 얻지 못하여 우리의 마음은 잡초로, 세상욕심으로, 그 더러운 것들로 얼룩질 때가 많습니다. 주님, 용서하시고 우리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순간순간 확인하면서 늘 감격하며 늘 찬송하며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우리의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변화의 믿음
엡 3:14-19 / 송영태 목사
현대 심리학 용어에 고착상태(fixation)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종내의 유치한 습관 혹은 부정적인 습관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변화를 무조건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옛날에 그 낡은 것에 메어서 거기서 안정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생명이라는 것에 정지상태란 없습니다. 지금 주변에 모든 것들이 변하고 있는데 나만 변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착상태에 빠지면 구제불능입니다. 더구나 영적 고착상태가 더 큰 문제입니다. 벌써 영적 주도권을 육체의 욕망에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아주 구원받은 은총에 감격하는 신앙으로 출발했는데 신앙생활 해가면서 자기 나름으로 자기가 율법이 되어서 있으면서도 그 주제에 오히려 생생한 생명력 넘치는 영적 상태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 역사에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나눈 유명한 대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어느 날 이성계가 무학대사보고 이렇게 농을 던집니다. “대사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돼지 상이오 그려” 그러자 무학은 이성계를 새삼 쳐다보고는 “임금은 부처 상입니다.”라고 화답합니다.
“이 태조가 다시 말하길 아니 아무리 임금과 신하사이의 농담이라고 해도 그렇지 나는 대사가 돼지 같다고 했는데 대사는 어째서 내가 부처 같다고 하는거요?” 이때 무학이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합니다.
“그야 사람이란 누구든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의 얼굴 보는 법이니까요, 나는 내 마음이 부처 같으니까 다 부처로 보이는 것이고, 임금 마음이 돼지 같으니까 나를 돼지로 보는거 아니겠습니까?”
사람이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을 봅니다. 자기 마음 생긴 대로 행동합니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말씀이 들려지기도 하고 안 들려 지기도 하고, 이렇게 듣고 저렇게도 듣고, 이렇게 깨닫기도 하고 정반대로 깨닫기도 합니다. 내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그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데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잠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16: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할렐루야-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용사보다 더 낫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좀 더 솔직하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인간다운 사람이될 것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 나는 내 생각대로 한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는데, 젊은 사람 같으면 철없는 소리라고 하겠는데 나이든 사람은 뭐라고 해야할지 답답합니다. 아무튼 무식의 소치라고 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사람이 가장 소중한 내 마음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걸 인정하면서부터 사람은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100% 십자가 앞에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마음은 마치 정원과 같다고 정의를 했습니다. 정원에는 잡초가 나기도 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기도 합니다. 이상하게도 잡초는 심지 않고 가꾸지 않아도 잘 나고 잘 자랍니다. 그런데 좋은 꽃들은 좋은 종자를 심어도 잘 자라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꽃들과 잡초들이 함께 있으면 어느새 잡초는 무성해지고 꽃들은 시들시들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정원을 가꾸는 일입니다. 부지런히 김을 매서 잡초를 제거해 주어야 땅에서 좋은 기운을, 영양을 받아서 꽃들이 잘 자랄 수 있고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도 그렇습니다. 알게 모르게 못된 생각은 그저 무성하게 자랍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잘 자랍니다. 그러나 좋은 생각, 착한 마음은 보전하려고 애를 쓰고, 좋은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도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불끈 불끈 화를 내고 깜짝 깜짝 놀라고 맙니다. “내가 이 정도의 사람 밖에 안되나, 어찌 내 마음속에 이런 악한 마음이 있었단 말인가?” 놀랄 것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존재들입니다.
육신의 건강을 잃어버리게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몇 가지를 사회학적으로 지적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많은 사람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고 느낄 때, 고독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서면서 그 마음이 병들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대개 병이 생깁니다.
둘째는, 중요한 사건에 부딪힐 때입니다.
예를 들면 배우자나 자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사고 같은 엄청난 사건에 부딪힐 때, 그만 감당을 못하게 되면서 병이 생깁니다.
암환자들에 대한 내과의사의 기록을 보면 대개 한3-4년전에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충격이 오늘에 암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일에 대한 불만이나 자신감이 없을 때입니다.
자기만족이 없어집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즉 생의 의미를 잃어버릴 때 의욕이 없어지면서 병이 생깁니다.
넷째는 정신건강이 허약해질 때입니다.
마음이 심약해지기 시작하면서 가속화하여 점점 무너져 내려갑니다.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보려고 해도 왠지 슬퍼지고, 우울하고, 불안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심해지면 병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염세주의입니다.
비관주의가 내 마음을 차지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불안스럽게 보입니다. 세상이 다 어둡게만 보입니다. 죽고만 싶습니다. 이런 잘못된 세계관을 갖게 되면 만사가 어둡습니다. 만사가 괴롭습니다. 만사에 짜증납니다. 도대체 살아야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정신적으로 벌써 자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술, 담배가 얼마나 건강을 해치는지 연일 T.V에 방영이 되고 있습니다. 아! 그게 얼마나 나쁜지 누구 모릅니까? 알면서도 피우고 마시는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게 아니라 죽을테면 죽어라 하고 마시고 피우는 겁니다. 살고 싶지 않아서 피우고 마십니다.
보세요! 폭탄주를 마시는 사람이 살자는 사람입니까? “오늘밤 죽어라!”하고 마시는 겁니다. 불행한 것은 다음날 아침에 살아나니까 걱정이지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이 살자는게 아니지요? 그러면 왜 이래야 되느냐? 정신적으로 이미 죽었기에 죽음을 위한 행동을 과감하게 거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문제는 내가 살고 싶지 않으니까 남의 생명까지도 해하려고 마시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나 죽고 너 죽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내 마음을 누가 다스릴 수 있습니까? 이같이 도저히 자신도 어쩔수 없는 마음에서 누가 나를 건저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가의 다락방에서 행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입니다.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시고 저만치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힘써 부르짖어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해야할 제자들이 쓰러지고, 또 쓰러지며 졸고 있을 때 말씀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는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마음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시면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실 정말로 마음이 원했을까요? 하는 의문입니다. 정말로 마음이 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잠이 오겠습니까? 보세요! 어쩌다가 돈 몇푼 잃어버려도 잠이 안오고, 어쩌다 기분 나쁜 전화 한통만 받아도 분을 삭이느라 잠이 안와서 걱정인데, 그래 스승께서 내일 돌아가시는데 잠이 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잠을 잤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참으로 이는 자비와 긍휼로 충만하신 그런 판단이요, 권면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과 마음은 별개라고 합니다. 지식과 감성이 다릅니다.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 또 의지와 마음이 별개로서 이따로 따로 노는 괴리를 인정하고 바로 터득해야 합니다. 감성이라고 하는 것, 감정 Feeling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과 의지보다 더 원초적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안됩니다. 이성으로는 사랑해야되고 의지로서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니까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어차피 저 사람하고 이제 한평생 살다가 갈 거라면 사랑해야지 생각은 합니다. 마땅히 사랑해야될 사람인데 사랑해야할 줄 알지만 만나기만 하면 밉습니다. 얼굴만 보면 미워집니다. 이걸 어떻게 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또 용서해야 되겠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래서 잘못했다 하고 내가 먼저 얘기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입으로 뇌다가도 딱 만나면 “용서 못해”하고 맙니다. 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정직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번번이 거짓말합니다. 부지런해야 되겠다. 생각하면서도 오늘도 여전히 게으릅니다. 봉사하고 섬기며 살아야지 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섬김 받으려는 마음이 앞섭니다. 생각하면 감사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국가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정말 따져서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범사에 감사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한숨이 나오고 원망소리가 나옵니다. 걱정 근심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이거 왜 이러는 것입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별도더라고요, 컨트롤이 안됩니다.
속 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것보다 더 깊은 세계, 더 원초적인 그런 속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는 16절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첫째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은 오직 성령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네 속 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시켜라 네 의지이전에 네 이성 이전에 먼저 네 마음을 성령으로 뒤집어 바꾸어라 입니다.
내 생각이나 의지로 마음을 컨트롤 할 수 있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의 영이 내게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을 주장해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먼저 깊은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3:8절에 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모르게 성령이 내 마음을 주장할 때 성령이 내 마음에 오실 때 내가 이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내 심령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도 실수 투성이었던 베드로가 성령충만할 때 그의 어두운 과거, 그의 나약함 다 이기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에 충만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룬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수없이 “구조조정”이라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몸부림 쳐 왔습니다마는 구조조정을 하는 그 사람이 구조조정이 안됩니다. 사람이 달라지기 전에는 구조를 백 번 바꿔도 안됩니다. 또한 제도를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안됩니다.
먼저 가치관을 바꾸기 전에는 안됩니다. 내적인 것은 내적으로,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내적인 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사회도, 인간도 변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사람이 사람됩니다.
근본은 영적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문제요, 하나님과의 만남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온전히 고백하고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 중생하게 되며 중생한 심령만이 이 모든, 이 어두운 마음을 물리치고 밝은 마음으로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7절)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해서 그리스도께서만이 나를 주장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내 마음이 변화 되는 것입니다. 요15: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렇습니다. 알게 모르게 주님께서 나를 주장하시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어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실 때 지식에 넘치는 역사, 사랑에 넘치는 역사, 평안이 충만한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나의 마음을 지배하시도록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말씀을 아멘으로 영접해야합니다.
기독교인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 그 믿음이 바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교회 다닌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내 마음을 기꺼이 바칠 때 주님은 나를 다스려 주십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희한한 능력인데, 그 때만이 비로소 모든 것에서 자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 아름다운 날 즐거운 날, 내 어이 잊으리요, 어두움 속에서 헤매던 나 예수님 만났다네 하늘 영광 내 맘에 넘치네 주 십자가로 나를 구했네” 할렐루야-
그리고 세 번째 18절에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말씀하십니다.
새 사람의 윤리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사랑을 깨달아 나가는 것입니다. 계속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히13:9절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물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백번 이사가도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은혜로써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만 마음은 깨끗해질 수 있고 은혜로써만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넘치는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옛사람으로부터 벗어나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백번 천번 맹세해도 안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나를 부정하고 내가 참으로 겸손할 수 있게 됩니다. 겸손하게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번민이 있는 것은 아직도 교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실 때 여유가 있고, 충만함이 있으며,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 확실한 종말과 미래가 보장되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고, 이런 여건에서도 저런 여건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방관자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관자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그냥 무심히 바라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막연한 두려움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공, 실패 모든 것이 두려운 사람입니다.
둘째는 패배자형입니다.
철저하게 패배의식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 같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에게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못 가진 것만 생각합니다.
셋째는 참된 은혜의 사람으로 승리의식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 실패해도 이것은 다음에 성공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스케줄 속에서, 그 시나리오 속에서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고로 그런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또한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의 응답은 사랑이요, 사랑의 결과는 선함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의 마음은 선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로 사랑 받는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아십니까? 두 가지로 밖에 보질 않습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또 하나는 불쌍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 외의 아무 것도 보이질 않고 다르게 보려고도 하질 않습니다. 여러분! 혹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십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하는 것이 보이십니까? 못 마땅한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분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내 죄를 구속하신 주님의 엄청난 사랑을 깊이 감격하고 눈물로 보게 되면 두 가지 밖에 안보이는 것입니다.
아무 허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사람을 보면 불쌍합니다. 이것도 불쌍하고 저런 모습도 불쌍하게 보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그 누구도 불쌍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불쌍히 여기는 사람 밖에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건강 지수는 얼마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느 만큼의 건강이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지수는 또한 어떻습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우리의 건강지수와 믿음 지수가 정상이 될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을 주께 바쳐버리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사랑을 확인하십시오.
이러한 믿음의 지수를 갖은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사랑을 확인하고, 병들면 병드는 대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할 때, 은혜로 충만할 때, 삶 자체가 소중해지고 세상도 아름다워 보일 것이며, 정말로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사랑으로 보이고, 은혜로 보이며, 다 감사한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비결
엡 3:14-19 / 이동아 목사
우리 모두는 환경에 영향을 받아가며 살고있습니다. 좋은 여건과 환경이 주어지면 평안했다가도 좀만 어려웁고 힘든 상황을 만나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평안이 깨어집니다. 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속상한 말을 들을 때도 분이 나고 섭섭한 생각이 들고 또 미운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는 자존심이 상하고 불쾌한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아직도 내 자존심이 살아있고 아직도 내 감정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 겉사람의 지배를 받고 살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환난가운데서 승리하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환난을 당하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당당하게 아버지께 나아가고 담대함을 얻어 육의 모든 문제를 이기고 나아갑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원동력은 기도의 힘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주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엡3:14-15)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환난이 다가서면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능력의 주님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친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체포되어, 가이사랴에서 2년 간 감금되어 지내게 됩니다. 그 후, 죄인의 몸으로 로마로 후송되어, 만 2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데, 거기서 로마의 한 병사와 쇠사슬로 묶인 채 생활을 하게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 유명한 4권의 옥중서신을 집필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바로 그 책입니다. 옥중서신을 쓸 당시 바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은 너무 혼탁하여서/죄 없는 바울에게 사형이 선고될는지, 유배를 가게 될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이 때는 바울의 활동 말기에 접어든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치 유언을 남기는 심정으로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마 에베소교회 성도들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그들을 생각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막연히 의자에 앉아 조용히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걱정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형무소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내가 당하는 환난으로 인하여 저들이 낙심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능하게 하신 성령의 권능으로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 속에 거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옵소서.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그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끌어 올려 주시옵소서."(엡3:17-19) 이렇게 기도한 이유는 에베소 교인들이 머리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가슴으로는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겉사람은 육에 속한 자요 속사람은 영에 속한 자입니다. 로마서 8장 5~6절에서는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사람이 날로 새롭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김장을 하기 위해 무를 잘랐을 때 속이 새까맣게 되어있는 것, 이러한 것이 속이 후패한 것입니다. 심령 골수까지 새까맣게 변해있는 것, 이것이 병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살 때는 흠도 없고 맛있게 생겼어도 속을 볼 때 썩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속사람이 건강해야 겉사람도 건강한 것인데 속사람이 모두 썩었습니다. 그렇다면 속사람도 겉사람도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의 충만함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속사람안으로 속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생명으로 갖고 우리의 거듭난 영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며 하나님의 영과 연합된 우리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데 까지 이르도록 그리스도를 체험하려면 우리는 속사람으로 강건케 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의 존재는 영들이 아니라 혼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개성이나 인격은 혼안에 있습니다. 옛인격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혼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이제는 새로운 인격은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는 영입니다. 거룩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 우리의 영이 이제는 우리의 속사람입니다. 영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강건해 집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은 혼란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혼란이 없이 기도하려면 우리의 전존재가 속사람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네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 말은 의지 이전의 말입니다. 내 생각이나 의지로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주의 영이 내게 함께 해서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을 주장해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먼저 깊은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니고데모에게 가르쳐 주실 때 '바람이 임의로 와서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성령도 그와 같으니라' 그랬어요. 나도 모르게 성령이 내 마음을 주장할 때, 성령이 내 마음을 지배할 때 내가 이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내 심령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그의 어두운 과거, 그의 나약함, 다 이기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에 충만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2)그리스도를 마음에 계시게 하며
성령으로 능력으로 강건케 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이어서 그분 자신이 우리 심령 각 부분 안으로 확장되시도록 우리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완전히 비어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모든 내적 부분들의 총체이며 내적 지, 정, 의의 중심입니다. 그리므로 그분이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고 그분이 우리의 내적 전 존재를 통제하시고 모든 내적 부분을 그분 자신으로 공급하시며 강건케 하시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항복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엡3: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예수 안에 갇힌 자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갇힌 자가되면 고물에서 주무시던 주님의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샘솟는 기쁨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이 거하고 있습니까?
전인격을 주님이 주장하고 주께서, 주의 말씀이 내 안에 있어서 내마음을 다스려 주실 때, 지식에 넘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하여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주님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것이 강건한 삶인 것입니다.
로버트 멍어가 지은 내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소책자가 있습니다. 이 작은 책의 내용은 내 마음의 집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서 서재와 주방, 거실, 작업실, 침실, 오락실, 벽장, 등을 다 둘러보시고 곳곳에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치우고 그 자리에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으로 채우고 마지막에는 집의 모든 권리를 주님께 명의 이전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3)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주의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로 충만하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어 그의 충만한 것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처를 정하시게 되면 그분이 내적인 우리의 지정의를 사로잡으시며 소유하시며 스며들고 적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고 능히 그리스도의 차원을 깨달아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한 데까지 그리스도로 충만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차원은 그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라는 입방체로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 된 우주입니다. 그리스도의 대한 입방체처럼 삼차원이 되는 것입니다. 넓이와 길이 그리스도를 면으로 체험합니다. 우리의 체험은 실이 아니라 견교한 양탄자와 같은 체험을 말합니다. 높이와 깊이를 체험하는 것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지성소에서 평면이 아닌 입방체의 교회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농장이요 건축물입니다. 하나님의 농장으로 우리는 성장을 위해 뿌리가 박혀야 하며 하나님의 건축물로서는 건축을 위해 터가 굳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고 능히 그리스도의 차원을 깨닫고 지식에 초월하는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된 우리에겐 뿌리가 박히는 생명과 터가 굳어지는 건축이 이루어지게 되어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체험하려면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깨닫게 하며 사랑은 그분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1)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바다보다 넓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넓이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그 범위가 너무나 좁습니다. 사랑의 범위는 단지 가족이나 친구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범위가 측량할 수 없이 넓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구애되지 않고 전 세계, 전 우주를 품에 안으시는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이 넓어져야 합니다. 극히 제한적이고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덮어주고 품에 안는 사랑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2)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오늘은 사랑하다가 내일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익에 따라 변하고, 감정에 따라 변하고,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프게 하고 실수하고 죄를 짓고 잘못을 할 때도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까지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무궁한 사랑입니다. 오래오래 계속되는 사랑이지만 끊어지지 않습니다.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아무도 이 사랑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죄를 범하는 그 현장에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계십니다. 내가 실수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웃음과 욕을 당할 정도의 처참한 자리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믿어야 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3)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 깊이는 너무 깊어서 인간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얕은 사랑을 합니다. 껍데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쉽게 변하고 맙니다. 나무도 뿌리가 깊지 못하면 쉽게 넘어지고 가뭄에 말라죽습니다. 샘도 깊지 못하면 날이 가물면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깊은 샘물은 오래갑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깊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면 쉽게 변하는 것입니다. 돈 있고 건강하고 잘 살 때는 친구도 많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만 실패하고 건강 잃고 어려워지고 실패의 깊은 수렁에 빠지면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습니다. 다 떠나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람이 다 떠나가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어려워지면 더욱더 주님은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는 너무 기어서 감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입니다. 여러분 그 사랑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처럼 여러분도 다른 사람이 고통과 괴로움의 깊은 수렁에서 고통 당할 때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코자 죄인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천한 사람이 되신 사랑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비참한 죄수의 모습으로 매달려 죽는 자리까지 간 사랑입니다. 그리고는 무덤에까지 들어간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갈 때까지, 내려갈 수 있을 때까지 내려가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4)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를 알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다가도 너무 쉽게 헤어지고 미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얼마나 조건적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과는 다른 차원이 높은 사랑입니다. 친구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합니다. 나에게 덕이 되는 사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손해를 끼치는 사람까지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 허물 많고 죄많은 우리도 사랑하셔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고상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넓고, 길고, 깊고, 높은 그 사랑을 용서받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높이는 비천한 우리를 높이 올려서 자기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꿔 놓기를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모양은 저마다 각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로 들이시면 우리 모두 형님 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뀌어집니다. 작은 예수가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고 계시는 모든 영광을 우리와 함께 누리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신의 우편에 앉히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는 신비스러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맛을 보면 볼수록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꿉니다. 사랑의 힘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속사람으로 자유와 평안을 주십니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분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근심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박탈 감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마음에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심령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걱정거리가 생겨도 하나님의 사랑을 조용히 묵상하면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잘 해주실 거야.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인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이 정도 문제쯤이야...하나님이 잘 해주실 거야.' 그리고 나면 그만큼 근심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풍성한 세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 독차지하고 있는데, 아무리 내 형편이 어려워도 하나님은 이대로 두시지 않는다.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실 것이다.'바로 이런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믿음의 확신으로 자리잡아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소망적으로 봅니다. '잘 될 거야.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 비관적으로 볼 이유가 없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격려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면 알수록 강한 자가 됩니다. 능력을 갖게 됩니다.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을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부모든, 형제든, 자식이든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을 아무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면, 우리를 이길 자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인생의 짐이 무거워도 그 무거운 짐 앞에 꺾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 마음이 고통스럽고 비참해도 그 비참한 운명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경험하는 사람은 그 사랑의 힘에 꽉 붙들려서 절대로 쉽게 꺾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로마서 8장 35절 이하의 말씀은 이를 얼마나 웅변적으로 잘 선언하고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냐?' 우리는 그런 상황을 다 안 당해 봤습니다. 이 7가지 중에서 우리가 실제로 당해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극한적인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언합니다.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 놓여도 절대로 우리를 이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일 죽임을 당케 되면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 그저 참혹한 자리에 끌려 들어가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랑의 힘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시오. 그 사랑의 힘에 우리가 붙들리기만 하면 우리를 꺾을 자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영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잠깐 느끼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상식적으로 조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에 뛰어난 엄청난 4차원의 세계가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넓이가 있습니다. 길이가 있습니다. 높이가 있습니다. 깊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충만한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사모합시다. 그 사랑에 깊이 젖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그러면 그 사랑의 힘이 나로 하여금 자유하게 만들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능력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소망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기뻐하면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 사랑을 사모합시다. 이 사랑을 우리가 마음에 담고, 세상을 살면 우리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우리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면?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LA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그 교회에 부흥강사를 초대해서 몇 일간 집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흥강사가 설교 중,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간증적인 이야기를 했던가 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제일 사랑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만 사랑합니다.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사랑하시고, 나만 제일 사랑하십니다." 그 설교가 다 끝나자, 담임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서 "오늘 강사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강사를 제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제일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나만 사랑합니다." 하고 대뜸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은 이 지구에 나 한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체험하면서 살게되면 속사람이 강건하여 어떠한 시련과 환난과 문제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넘어지지 않고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2023년도 한해는 주의 능력의 성령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사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늘 계시게 하여 그 충만한 사랑으로 풍성한 생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넘치도록 주옵소서
엡 3:14-21 / 박종순 목사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우고 양육한 에베소 교회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 시종 에베소 교회를 위한 축복의 기도를 드립니다. 새해 첫 주일 바울의 축복기도가 여러분을 위한 기도가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소서
16절을 보면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했습니다. 겉사람은 육체를 말하고 속사람은 영혼을 말합니다. 영혼은 언제나 육체를 통제하고 조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혼이 건강해야 육체도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영혼도 건강하고 육체도 건강한 것을 전인건강이라고 합니다. 육체건강의 경우 오장육부, 사지백체 모든 장기와 기관과 뇌에서 손가락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건강한 것이 전인건강입니다. 그러나 육체건강보다 속사람 건강이 더 중요한 이유는 영혼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정하고, 관장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건강하려면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45:12을 보면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친히 손으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사람을 만드신 분인데 그 하나님과 다투거나 하나님을 성나게 하면 남는 것은 멸망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도 세상도 만드신 분입니다.
내 영혼이 건강하고 내가 가진 것들이 온전하려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금년 한해 언제나 속사람이 강건하시고 잘되기를 축원합니다.
2.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17절을 보면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했습니다. 나무뿌리가 깊이 박히고 터가 굳어지면 흔들려도 죽지 않게 됩니다.
고층빌딩일수록 기초깊이가 깊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제일 높다는 63빌딩의 경우 그 기초 깊이는 수십 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이 흔들리지 않고 내 삶이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으려면 17절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 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 속에 주님이 계셔야 내 믿음의 뿌리가 튼튼해져서 내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시험을 당하고 힘든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다 보면 누구라도 흔들릴 때가 있고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마음속에 계시면 내 믿음의 닻줄을 주님께 매어두었기 때문에 흔들릴 수는 있어도 세상 밖으로 밀려나진 않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좋은 것은 시험도, 환난도, 고통도 겪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 일뿐 그렇게 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더라도, 이 어려움을 피하거나, 이기거나, 극복하면 됩니다.. 이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단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면 가능합니다.
내가 힘쓸 일은 내 믿음의 분량을 키우는 일입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고 했습니다. 새해에는 믿음의 폭이 넓어지고, 길이가 길어지고, 높이가 높아지고, 깊이가 깊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전인적이고 전인격적 신앙인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3. 넘치게 하옵소서
19절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고, 20절을 보면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했습니다. 「충만」이라는 말은 헬라인들은 `플레로마`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가득 채운다는 것입니다. 넘치도록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넘치도록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1) 건강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건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신의 관리와 섭생도 건강을 좌우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건강도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건강도 하나님이 채워주셔야 합니다.
2) 물질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 땅 바다, 짐승, 나무 등 물질을 만드셨습니다. 이 말은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주실 수도 있고, 가져가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일찍이 깨달은 다윗 왕은 역대상 29:11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라고 했고, 12절에서는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께서 금년 한해 물질의 복을 넘치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3) 믿음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꿈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하고, 병을 고치고, 성공을 도출해냅니다. 믿음은 절망을 이기고, 희망을 줍니다. 믿음은 패배감을 벗어버리고, 비젼과 소망을 갖게 해줍니다.
믿음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영생을 누리게 해줍니다.
믿어야 죄사함 받고,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 중 가장 큰 은혜는 믿음이고,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은 믿음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모든 분야 모든 삶에 절대로 필요합니다. 이 믿음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금년 한해 온갖 것을 채우시고, 충만케 하시고,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바울의 기도
엡 3:14-21 / 안병호 목사
요한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석에서 13-16장까지 길게 설교한 후 17장에서 길게 기도하셨다. 설교만 있고 기도가 없다면 아무런 능력없는 지식이 되고 만다. 본문도 에베소서 1:-3:13절까지 주옥 같은 교리를 가르치신 사도께서 그 말씀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박히도록 기도하신 내용이다. 이번 우리는 부흥 사경회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은 줄 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고 말씀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자칫 이제 부흥회도 끝났고 특별 새벽기도도 끝났고 대림 강변 아파트 입주도 끝났으니 좀 쉬자 하는 생각을 갖기 쉽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리에게 기도는 절대 절명으로 필요하다. 참으로 기독교의 교리가 우리의 삶에 적용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자신의 기도와 중보기도가 필요한지 이것은 아무리 설명해도 다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리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천된다는 것이 쉽게 가능한 것인가? 흑인과 백인이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효과적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세 가지 기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Ⅰ.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한다. 본문 13,14을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다. 하늘에 있는 족속은 천사를 의미하고 땅에 있는 족속은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 각 족속이란 헬라어로 pasa patria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한 조상을 가진 한 그룹의 사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유대인, 혹은 헬라인등을 의미한다. 이 족속이 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2:8)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또한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름을 주셨다는 의미는 모든 성정을 다 아신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모든 성정을 다 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그 하나님께 우리의 관심이 집중 될 때, 그 하나님께 나가면 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인생문제를 해결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하나님께 기도한 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가 ?
또한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부성의 원천을 의미한다. 마 7:11에서 보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보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더욱 확실히 채워 주신다고 하였다. 또한 여기서 '아버지'는 구속 주로서의 아버지 구원사적인 개념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주기도문에서도 처음 나오는 단어가 ?아버지?인데 이것은 신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음을 강조 해주고 있다.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은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신자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구속 주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새 생명이 자라게 해 주시는 분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나를 양자로 삼아 주셔서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깊은 확신과 의식이 있어야 우리의 기도는 힘이 있고, 참다운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Ⅱ. 우리는 기도하는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 되어야 한다.
15절에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 굴복 당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을 항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자 앞에 철저히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기도 할 때 자신에 대한 분명한 identify가 필요하다. 하나님 앞에서 권리를 주장하듯이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 다만 처분을 바랄 뿐이다. 가끔 교회에 구걸하러 온 사람들 가운데 마치 맡겨 놓은 돈을 찾으러 온 것처럼 돈을 달라고 하고 몇 천원의 돈은 받지도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자들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다만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바랄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간절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처지는 어떠한가를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다는 간절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도 되고 안 도와 주셔도 된다는 식의 기도는 참다운 기도가 아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들 가운데 복음의 진리가 삶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이해,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깨닫는 것처럼 기도의 능력을 발휘하는 길이 없다.
위대한 기도자의 특징은 그들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 가를 알 수 있다. 개혁자들은 얼마나 개혁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존 녹스같은 사람은 일생동안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의 나라 스코틀란드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나라를 주시든지 내 목숨을 가져가든지 하십시오'
에딘버러에 로비 플록하트라는 나이 많은 목사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분은 수년동안 에딘버러 길에서 수년동안 외쳤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은 어떤 신사가 그 분을 만나기 위하여 어느 날 밤에 그분을 보기 위하여 그 집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 집은 너무 가난하여 한국으로 말하면 달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밤에 찾아갔는데 촛불마져 꺼져 있었다.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아 문을 열고 방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훌륭한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오, 주여 에딘버러를 잊지 마소서.이 유서 깊은 도시에서 주님의 손을 거두지 마소서. 주여, 이 도시를 잊지 마옵소서. 주의 종은 주께서 주의 성령을 에딘버러에 부어주실 때까지 주님을 쉬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 신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고뇌와 절규 어린 기도를 들어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기도자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도움의 필요성에 대한 간절함의 인식이 필요하다.
Ⅲ. 기도 내용에 대한 관심의 집중
첫 번째의 기도의 내용은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이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3:16)
내주 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하여 그리스도의 일을 잘하도록 기도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6:13, 빌4;13을 참조하라.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할 사람은 무엇보다도 속 사람이 강건해야된다. 아무리 겉 사람이 강하게 보여도 속 사람이 약하면 사단의 공격을 받을 때 금방 쓰러져 버린다. 골리앗이 아무리 강해도 다윗의 물멧돌 하나에 쓰려wu 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무리 겉 사람이 약하게 보여도 속 사람이 강하면 끝까지 인내하여 일을 이룰 수 있다. 많은 유혹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끝까지 중심을 지키며 묵묵히 일을 감당할 수 있다.
둘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3:17)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된 것은 내주 하는 성령의 사역으로 된 것이다.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실 때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 진다. 성령은 다른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계실 때 능력만 있을 뿐 아니라 지혜가 넘치고 영감이 떠오르며 무엇보다 사랑이 넘친다. 그리스도인이 생명력 있게 주를 섬기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그 마음에 사랑이 넘쳐 흘러야한다.
셋째, 사랑이 넘치도록 기도한다.
17하-19을 읽어보자.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신앙 생활이 입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넘쳐야한다. 사랑은 지식보다 훨신 더 높은 차원에 있다. 이 사랑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참 사랑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1) 사랑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뿌리가 박힌다는 것은 나무에 비유한 표현인데 나무는 뿌리가 깊을수록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생명이 넘쳐 푸르름을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 내리는 자만이 항상 사랑이 넘쳐흐른다. 터가 굳어진다는 말은 건축에 비유한 말이다. 견고한 터위에 세워진 건물은 어떠한 비바람이나 지진에도 견고하게 서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의 터위에 견고히 서 있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이 와도 끝까지 미움과 증오에 휘말려들지 않고 끝까지 깊은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게 된다.
2)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기도한다. 진리는 고립된 개인에 의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도를 닦음으로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리키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모든 성도와 함께 하는데서 진리를 깨닫는다. 여러 종류의 인간들을 만나면서 그들을 섬기며 사랑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거듭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사회에 들어 왔다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의 한 지체로서 교회를 섬기도록 각각 은사를 받게 되었다. 성령의 선물은 하나이나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다. 다양한 은사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과 분리된 가운데 개인적으로 아무리 진실하게 살고 열심히 살고자 해도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모든 성도와 함께 거하며 함께 할 때 지식에 뛰어난 사랑을 배우게 된다. 사랑이란 비밀은 이론으로 알 수 없고 체험을 통해서 알아가게 된다.
3)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기도한다. 우리 신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했고 또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한 경험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혀 모른 사람은 신자일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기 위해서 기도해야한다. 우리가 다양한 인생 경험을 쌓을 때 사랑이 깊어진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과 같이 지내면서 사는 가운데 우리 인격이 부서지고 깨어져서 새로운 인격으로 빚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하여 많은 시련을 주신다. 그와 같은 시련을 참으면서 하나님을 붙들 때 우리의 사랑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린 결과는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3:20-21)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적으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때 가능하다.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 없다.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때 하나님께 큰 영광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도로만 가능하다. 기독교의 교리가 우리의 실제의 삶에서 적용하는 길은 절대로 기도가 필요하다.
담임목사가 바라는 강변 성도
엡 3:14-21 /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에는 십자가 설교를 다음 주로 미루고 색 다른 제목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강변성도"라는 제목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예배는 박치원 장로님의 시무장로 취임을 겸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담임 목사로서 강변교회의 장로님들과 성도들에게 바라는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교회에 대한 소원과 바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처음 사랑을 되 찾기를 바라노라." "죽도록 충성하기를 바라노라."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기를 바라노라."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도 자기가 세우고 목회한 교회들에 대한 간절한 소원과 바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원과 바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바라노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기를 바라노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노라." 저도 강변 성도들을 향한 소원과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를 말씀 드립니다.
1 첫째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강변의 성도는 첫째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지난 수 개월 동안 출애굽기를 공부한 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우리들을 구원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강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한 다는 것은 우선 시간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 시간이 다 되어서 헐레 벌떡 들어오는 사람은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사람이 됩니다.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은 모든 예배에 늦어도 15분 전에는 교회당에 와서 앉아 있어야지요. 뒷 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려는 사람도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은 언제나 앞 자리에 앉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주일 아침 예배는 물론 주일 저녁 예배와 수요일 저녁 예배에도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 강변교회 교인의 의무 일곱 가지 중 둘째는 "예배를 삶의 중심으로 삼으며 오든 예배에 참석한다" 입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예배를 소홀이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고 맙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하시는 강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 기도에 힘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강변의 성도는 둘째 기도에 힘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라고 했고(눅22:44) 120명 제자들도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고 했습니다. 기도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힘을 써야 됩니다. 그리고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 집니다. 기도는 괴로운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축복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장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방편입니다. 지난 수요일 말씀 드린 대로 사도행전은 사도의 행전이고 성령의 행전이지만 동시에 기도의 행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20명은 모두 사사로운 일들을 제쳐두고 다 함께 모여 열흘 동안 힘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도는 새벽에 드린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로 시작해서 새벽기도로 자라오고 있습니다. 저는 강변교회의 장로님 권사님들이 새벽 기도에 힘을 다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사실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장로나 권사의 자격이 없습니다.
지난 금요일 새벽기도에 참석한 어느 사람이 이런 글을 써서 강변 홈페이지로 보냈습니다. "강변교회에 와서 새벽기도 훈련을 잘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새벽 말씀은 너무 중요한 내용이었고 은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설교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주시면 오늘 참석치 못한 성도들에게 많은 도전이 될 것 같습니다. 늘 목사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새벽 기도회를 중심으로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강변교회 새벽 성도 올림." 얼마나 반가운 글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비교적 긴 답을 써서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강변교회 새벽 성도님에게, 감사합니다. 저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가장 좋고 귀중하게 보입니다. 기도의 은혜가 가장 좋은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새벽 말씀이 은혜가 되었다고 하시니 감사한 일입니다. 사모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설교 내용을 기억을 더듬으면서 간단히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새벽 성도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기도의 삶을 통해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늘 목사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새벽 기도회를 중심으로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합니다. 2001년 6월 22일 김명혁 목사" 기도는 이렇게 좋습니다. 주님과 가까워지고 목사님과 가까워지고 성도들과 가까워 지고 은혜를 받습니다. 기도는 승리의 비결이고 기쁨의 비결이고 행복의 비결입니다. 기도에 힘을 다하시는 강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제에 마음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강변의 성도는 셋째 교제에 마음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교회의 특징의 하나는 교제입니다. 구원의 특징도 교제이고 천국의 특징도 교제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의 하나는 교제하며 떡을 떼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제는 끼리끼리 하는 교제는 아닙니다. 유대인끼리 헬라인끼리 하는 교제는 아닙니다. 권사끼리 장로끼리 하는 교제도 아닙니다. 새신자끼리 구신자끼리 하는 교제도 아닙니다. 본 회퍼라는 신학자는 신자들의 교제에 어떤 인간적인 요소가 끼어있으면 그 교제는 성도의 교제가 아니라고 단정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하는 교제만이 참된 성도의 교제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함께 있으며 교제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그곳에 복을 명하신다고 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의 복이로다"(시133:1-3). 사도 바울도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항상 마음을 다하여 서로 돌아보며 교제하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 라"(빌2:3,4).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4:2). 같은 마음을 품고 친밀하게 교제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마음을 다해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담임 목사도 기뻐합니다.
강변교회의 특징의 하나는 따뜻하고 친밀한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보고 싶어하고 만나면 좋아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잠시 마닐라에 간 이숙영 집사님이 강변 홈 페이지로 소식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강변교회 성도들의 친절한 사랑에 감사를 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마닐라에서 인사드립니다.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정신없이 떠나 왔습니다. 반가운 것은 제가 떠나 오던 지난 주일날에도 막 등록하신 아버님께서 교회에 혼자 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강변교회에 나가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청평 야유회에서 본 목사님과 성도분들의 겸손함, 친절함, 성실함의 모습이었다고 하십니다. 다시 한번 목사님을 비롯한 성도님들께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메일을 보내는 또 다른 이유는 엊그제 서울 어머님과 통화하던 중 저희 구역장이신 김인숙 집사님께서 부모님 드시라고 백숙거리를 무거운데 가지고 오셨는데 아직 교회에 안 나가시는 어머님께서 잘 몰라 인사를 잘 못 드렸다고 안타까워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대신 꼭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꼭 인사를 여쭈어 주시길 부탁 드리며, 멀리 서나마 김집사님의 정성과 수고에 정말 기쁘고 감사하다는 저의 인사 또한 전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내용의 편지입니까? 성도들의 관심과 사랑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딸이 모두 고마워하는 내용의 편지가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강변교회 성도들이 마음을 다하여 교제하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그러면 천국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교제에 마음을 다 쏟으시는 강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봉사에 몸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강변의 성도는 넷째 봉사에 몸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봉사에 손과 발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은 입의 말이 아니라 몸의 봉사입니다. 주님의 삶의 모습이 바로 몸의 봉사였습니다. 교회의 삶의 모습도 몸의 봉사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기는 삶 즉 봉사의 삶을 살려고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 성도의 궁극적인 삶의 모습도 봉사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엡4:12). 성도를 온전케 하는 목적이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데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소 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을 권면하면서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벧전4:10).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 안에는 몸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막 안의 모든 기구들을 만들고 깨끗이 청소하고 질서있게 정돈하는 일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몸으로 청소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안내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음식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찬양을 드리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성도들을 돌아보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병든 자들을 찾아 위로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구제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전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봉사에는 기쁨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몸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용히 교회에 와서 청소하는 사람들도 있고 장애인들과 병든 자들을 찾아보고 위로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웃을 찾아서 전도하는 사람들도 있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찾아보고 위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봉사가 많은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봉사가 많은 교회는 주님을 닮은 교회입니다. 봉사가 많은 교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입니다. 봉사에 몸을 다하시는 강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구제에 물질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강변의 성도는 다섯째 구제에 물질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교회의 특징의 하나는 구제입니다. 구제란 물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며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물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는 구제의 일에 힘을 썼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행2:45). 구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인 동시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또한 구제를 베푸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고넬료가 구제를 힘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고넬료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나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잠11:24,25). 저는 강변교회 성도들이 구제에 물질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강변교회에는 구제에 언제나 빠지지 않고 물질을 바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불우한 강남의 주민들을 위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장애인들과 소년소녀 가장들을 위해서 항상 구제의 물질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6월 8일 이선희 전도사로부터 쌀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강변의 성도들과 배화의 성도들이 물질을 모아 굶주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구제의 쌀을 보냈습니다. 이선희 전도사로부터 감사의 편지가 왔습니다.
"곡간이 찼어요! 곡간이 차서 배 불러요. 다시 하얀 쌀 밥으로 쉼터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중국동포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 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은 쌀 걱정 않아도 될 것 같아서 허리가 펴 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김해성 목사님과 제가 느끼는 아슬아슬함과 가슴 졸임을. 그리고 주변의 고마운 까마귀(강변가족들을 졸지에 까마귀로 만든 것 용서 바람!)들을 통해서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을 때의 감격들을. 부담을 느끼고 짜증을 내실만도 한데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지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한도정 권사님과 배화 가족들께 사랑을 전합니다. 한 권사님의 애정어린 전화 "이전도사 먹을 것이 부족해서 영양실조 걸렸었나 봐. 목사님 말씀 듣고 눈물이 났어. 계속 기도 할께," - 하나님 나라에 계시는 친정 어머니 생각이 났어요. 얼마나 가슴 뭉클 했는지 몰라요. 작년 여름에도 교회 사무실 보증금을 지원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배화 가족들이 5백만원의 거액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배 부르게 해주신 모든 분들께 하나님께서 갚아주심을 기대합니다. 6월 19일 먹을 것 걱정 없어 홀가분하고 기쁜 마음으로 이선희 드림" 그 전에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은 이러합니다. "목사님의 사랑과 섬김을 그대로 닮은 강변의 식구들이 행사와 절기 때마다 성남과 서울에 있는 외로운 나그네들을 열심히 섬기고, 그 섬김을 통해서 상처받은 심령들이 회복되어지고 문제 만난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지친 자들이 삶의 용기를 얻는 일들을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구제에 보다 많은 물질을 다하시는 강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전도에 생명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강변의 성도는 여섯째 전도에 생명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사명은 전도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말씀 드린 대로 사도행전은 전도의 행전입니다. 생명을 바쳐 전도한 전도의 행전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란 말과 순교자란 말은 같은 어원에서 왔습니다. 스데반은 생명을 바쳐 전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강변교회에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동네에서 전도에 열성을 다하시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황규민 집사는 전도와 돌봄에 열성을 다하는 분들 중의 한 분입니다. 전도에 보다 많은 열성을 다하시고 생명까지 바치시는 강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 드림에 버림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강변의 성도는 일곱째 드림에 버림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성도의 삶의 중심과 마지막은 모두 다 드리는 것이고 모두 다 버리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리는 것이 성도의 삶의 중심이고 목적입니다.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찬71). 사도 바울은 자기의 물질과 생명을 다 드리기를 소원했습니다. "내가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5). 드린다는 것은 버림을 의미합니다. 나의 재물과 몸을 허비하고 버려야만 주님께 다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것은 손해 보는 삶이 아니라 축복을 넘치게 받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 은행에 맡기거나 드리지 말고 천국 은행에 맡기거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너희 보물을 하늘 은행에 쌓아두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드리되 버림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사람이 죽을 때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것을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미리 버리시고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바나바는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다 드리는 강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재물이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가기 전에 몸이 다 쇠하여져서 아무 쓸모가 없어지기 전에 다 주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다 드리는 사람은 참으로 부요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아침 담임목사가 바라는 강변성도의 모습 일곱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성도, 기도에 힘을 다하는 성도, 교제에 마음을 다하는 성도, 봉사에 몸을 다하는 성도, 구제에 물질을 다하는 성도, 전도에 생명을 다하는 성도, 그리고 드림에 버림을 다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릎 꿇고 빕니다
엡 3:14-21 / 박조준 목사
이미 봉독하신 말씀 중에 14-15절을 다시 읽습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이것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권세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 런데 창조에 대해서 말할 때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에 있어서는 하나님보다 아버지가 더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그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가 구할 때는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 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아무런 공로가 없지마는 단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가 돈이 필요하면 돈을 달라 하고 옷이 필요하면 옷을 사 달라고 합니다. 맡겼던 것 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 당당하게 부모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떤 자세로 기도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했습니다. 본래 유대 사람들은 기도하는데 세 가지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마가복음 11장 25절이나 누가복음 18장 11절 이하에서 서서 기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보통 유대 사람들이 기도 드리는 자세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스가랴 10장 1절이나 누가복음 18장 13절에 엎드려 드리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 것은 보통 자복하는 기도의 자세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다니엘서 6장 10절, 누가복음 22장 41절, 사도행전 7장 60절 그밖에 여러 곳에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간절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겸손한 기도의 자세이 기도 합니다.그러므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두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역대하 6장 13절에 보면 솔로몬 왕도 화려하게 지은 성전을 봉헌할 때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면 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신의 선지자들과 생명을 걸고 하 나님이 참신인가 아니면 바알이 참신인가 하는 것을 판가름하게 되었을 때 그는 무릎 사이에 머 리를 박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 속에서 무릎을 꿇고 이방의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첫 부분에 드린 기도는 주로 성도 들의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세계의 능력을 알게 하는 것이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무릎 꿇고 빈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서 무릎 꿇고 빌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라고 기도했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속사람인 심령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한 것은 얼마나 차원 높은 기도인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가장 모범적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의 생활을 가만히 보면 부끄러운 말이지만 향상보다는 퇴보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 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세상의 것보다는 하늘의 것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 는 것, 육신보다는 영혼에 더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왜요? 육신, 보이는 사람, 겉사람은 병들고 후패해지고 결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도 평생 병이라는 것은 감기 한번 앓지 않고 건강하게 80, 90, 100살을 사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다고 해서 병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금년 일년 다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여러분의 속사람 심령이 더욱 강건해 지시기를 기원합니다. 차라리 육신의 사람이 병들어 고생하는 일이 있어도 우리의 심령이 건강해진다면 저는 그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속사람에게는 이성의 사람이 있습니다.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이 바로 이성입니다. 이성이 건강할 때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감정의 요소가 크게 작용합니다 마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 때 이성을 잃게 되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성이 흐려지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이 드린 이 기도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위해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 중생하는 역사가 있 기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가 된 사람이 거룩한 기업을 받은 자녀가 보다 강건한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더 자랄 여지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 내가 이미 얻어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 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깊은 신앙과 고상한 인격, 성숙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 로 달음질해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왜요?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이르려면 아직도 너무 먼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 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이성이 건강할 때 속사람이 바로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17세기의 신학자 클라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이 땅 위의 음식물로 살 아가고 자라나는 것 같이 우리의 속사람은 하늘의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신령한 지식, 사 랑, 평화 그리고 성결 같은 것은 속사람이 자라는 영양이요 양식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사람에는 양심의 사람이 있습니다. 양심이 민감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이 인간 의 양심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하나 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할 때는 칭찬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중상 모략을 해 도 양심이 칭찬하기 때문에 담대합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귀합니다. 사람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에 존귀한 것입니다. 짐승은 잘못해도 괴로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슨 잘못을 범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그 일로 인해 아무리 칭찬을 한다고 해도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잠자리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고민을 합니다. 양심이 책망을 해서 그렇습니다. 양심은 이처럼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 양심이 절대적인 것은 아 닙니다. 이 양심이 마비될 수가 있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 든 판단이 왜곡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절대적인 양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의 속에는 의지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의지의 사람이 든든하게 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느끼는 것만 가지고도 부족합니다. 알 고 느낀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의지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 를 범하게 되면 의지가 약해집니다. 의지가 약해지면 옳은 줄을 알면서도 행하지를 못합니다. 그 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옳은 줄 알고 그대로 행해야 되겠다고 생각은 하 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의지가 약해서 그럽니다. 사도 바울도 이 문 제로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고민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고민입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범하게 되는 인간,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행하는 인간, 이 자리를 떠나야 하는데 하면서도 그 자리로 더 깊이 빠져들어 가는 인간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든든하게 해 주셔서 주님의 뜻을 분별할 뿐더러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우리 속사람이 강건하지 못하면 시험 에 듭니다. 우리 몸이 약하면 오는 병 가는 병이 다 걸립니다. 만가지 병이 침노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했습니다. 우리의 심령 이 강건해야 시험에 들지 아니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 심령에 계셔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 속에 계시면 악이 침노 하지 못합니다. 오늘 주신 17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은 강제 로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야 주님을 기 쁘시게 할 수 있으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새해에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여러분의 심령이 강건해 지고 어떤 유혹과 시험이 있다 할지라도 능히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 심령에 계시려면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고 주님을 마음 속에 모심으로 우리 심령에 천국 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새해에는 비록 우리의 몸은 땅에 살지만 우리 심령은 주님과 더불어 천국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무릎 꿇고 빌었습니다. 뿌리가 박힌다 는 말은 나무를 두고 한 말이고,터가 굳어진다 는 말은 집을 두고 한 말입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처럼 든든히 서고, 터가 굳어진 데 세워진 집처럼 견고히 서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언제나 흔들립니다. 젊은이가 사랑할 때는 추운 겨울 날씨도 모를 정도로 뜨겁게 서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합니다. 세상을 얻은 것처럼 좋아합니다. 꿀처럼 답니다.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를 모를 정도입니다. 그러나 얼마를 살다보면 서로 모르던 것을 알 게 됩니다. 세상에 천사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툭탁거리며 다툽니다. 산다 안 산다 하 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지나 애를 낳습니다. 그렇게 되면 애를 보아서라도 싸우고 싶어도 못 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면 정이 듭니다. 가만히 앉아서 척 바라보기만 해도 좋아집니다. 사랑의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의 사랑은 흔들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숙한 그리 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가 박혀야 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는 것은 그 뿌리가 물줄기에 든든히 박고 있기 때문입 니다. 우리의 심령이 든든히 뿌리 박은 나무와 같이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더라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굳세게 서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터가 굳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집을 짓는 데는 기술 좋은 건축가가 필요하고 질이 좋은 건축 자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견고한 기초가 있어 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세 반석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해 동안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여러분의 심령의 나무가 뿌리를 든 든히 박아 아무리 세상의 죄악의 바람이 태풍처럼 불어 친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믿음 의 장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의 집이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져서 환난의 폭 우가 쏟아지고 역경의 창수가 부딪쳐 와도 무너지지 않고 우뚝 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무릎 꿇고는 빌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가 어떠함을 깨달아...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백성을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고 확고하게 믿게 되기를 바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믿으면 더욱 더 잘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 랑을 모르면 내 마음에 들 때는 좋고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주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나이 많아 세상을 떠나게 된 다음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시지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 을 때도 하나님을 절대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노래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 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아는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크신 사랑을 알게 해주셔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 이른다고 해도 행복 하게 감사하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 며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끝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무릎꿇고 빌었습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때 조금씩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충만하게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 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 찬양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하신 분이십니다.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안겨 주십니다. 충만히 주십니다. 금년 일년 사랑하는 여러분이 주 안에서 바라는 모든 소원이 넘치도록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도
엡 3:14-21 / 박조준 목사
본문은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한 바 있는 에베소서 1장 17절 이하 에도 바울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그리고 성도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기도의 더 높은 차원을 볼 수 있습니다. 14∼15절을 보세요. 이러하므로 내 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했습니다. 이 아버지 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권세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창조에 대해서 말할 때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적합한 표현일 것입니다. 창조주 아버지 라 는 말보다는 창조주 하나님 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에 있어서는 하나님 보다 아버지가 더욱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는 그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 녀가 구할 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산상보훈 중에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시면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 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 느냐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아무런 공로도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 에 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자녀가 돈이 필요하면 돈을 달라 하고 옷이 필요하면 옷을 사 달라고 합니다. 맡겼던 것을 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 당당하게 부모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입니다. 또 한 이제 앞으로 생각하게 될 4장 이후에서는 성도로서의 충실한 생활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그 와 같이 되려고 하면 우선 어떠한 성도가 될까에 대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떤 자세로 기도했습니까? 본문에서는 무릎을 꿇고 비노니 했습니다. 유 대 사람들이 기도하는 자세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마가복음 11장 25절이나 누가복 음 18장 11절 이하에서 볼 수 있는 서서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이 보통 기도드리는 자세였습니다.스가랴서 10장 1절, 누가복음 8장 13절에서는 엎드려 하는 기도 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자복하는 기도의 자세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다니엘서 6장 10절, 누가복음 22장 41절, 사도행전 7장 60절, 20장 36절, 21장 5절에 나타난 모습으로서 무릎 을 꿇고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간절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겸손한 기도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역대하 6장 1 3절에 보면 솔로몬 왕도 화려하게 지은 성전을 봉헌할 때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무릎을 꿇 고 기도하였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 신의 선지자들과 생명을 걸고 어느 신이 참신인가 하는 것을 판가름하게 되었을 때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간절 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 속에서 무릎을 꿇 어 이방의 뭇성도들을 위해서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장에 기록된 기도와 상통하 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드린 기도는 주로 성도들의 영안이 열려서 하나 님 세계의 능력을 알게 하는 것이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을 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네 가지 면으로 기도했습니다. 첫째로,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16절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라고 기도했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고 우리 속사람, 심령의 강건을 위하여 기도한 것은 얼마나 차원 높은 기도인 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가장 모범적인 기도라고 생각합니 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가만히 보면, 부끄러운 말이지만 향상보다는 퇴보하 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에서도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며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 라 (골 3:1∼2)고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것보다는 하늘의 것,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 육신보다는 영혼에 더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왜요? 육신, 보이는 사람, 겉사 람은 병들고 후패해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평생 병이라는 것 모르고 건강하게 80, 90, 100살을 사시는 분이 계십니다. 물론 이 말이 예수 믿는 사람은 병들 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 믿는다고 병들지 않는다는 보장을 찾아볼 수 는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다 건강하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의 속사람이 더욱 강건하기를 기원합니다. 차라리 육신의 사람이 병들어 고생하는 일이 있어도 제 심령이 강 건하다면 저는 그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기 위한 기도에는 몇 가지 면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이성(理性)이 강건케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이 바로 이 이성입니다. 이성이 강건할 때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감정의 요소가 크 게 작용합니다만,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 때 이성을 잃게 되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어 버 리고 맙니다.
이성이 흐려지지 않아야 합니다.이 기도는 은혜 받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 을 위하여 성령의 은혜를 힙입어 중생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기도라면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거룩한 기업을 받은 자녀가, 거듭 난 사람들이 보다 강건한 자리에 들어가기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더 자랄 여지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고 말했는데,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 12절에 내가 이미 얻 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깊은 신앙과 고상한 인격, 성숙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달음질해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왜요? 우리의 목표는 예 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이르려면 아직 너무 머나먼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이성이 강건할 때 속사람이 바로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 랴서 4장 6절에도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하나님)의 신으 로 되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길은 오직 성령밖에는 없습니다.17세기의 신학자 클라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이 땅 위의 음식물로 살아가고 자 라나는 것같이 우리의 속사람은 하늘의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신령한 지식, 사랑, 평화, 그리고 성결 같은 것은 속사람이 자라는 영양이요, 양식이다. 둘째, 인간의 양심이 민감해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철학자 칸트의 말과 같이 하늘에는 별 이 있고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는 도덕의식, 말하자면 양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양심 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입 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할 때는 칭찬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중상 모략을 해도 양심이 칭 찬하기 때문에 담대합니다. 청년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바로 살려 하다가 보디발 장군 아내의 중상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법적으로 말하면 죄수였습니다. 그러 나 요셉은 담대했습니다. 강하게,늠름하게 지냈습니다. 그의 양심이 그를 칭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양심은 귀합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짐승에게 는 양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나쁜 짓을 해도 나쁜 짓인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괴로 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짐승이 잠 못 자고 고민하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짐승에겐 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슨 잘못을 범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그 일로 인해 아무리 칭찬을 한다고 해도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없습 니다. 그래서 잠자리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고민을 합니다. 양심은 이처럼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의 양심이 귀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양심이 마비될 수 있습니다. 화인맞은 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렇게 되면 모든 판단이 왜곡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절대적인 양심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양심을 바로 잡 아야 합니다. 셋째,인간의 의지를 튼튼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느끼는 것만 가지고도 안됩니다. 알고 느낀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의 지적인 요소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의지가 약해집니다. 의지가 약해지면 옳은 줄을 알면서도 행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옳은 줄을 알고 그대로 행해 야 되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 18절 이하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 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고민입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범하게 되는 인 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행하는 인간, 이 자리를 떠나야 하는데 하면서도 그 자리로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인간,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 속사람을 강 건케 해주셔서 주의 뜻을 분별할 뿐더러 주님의 뜻인 것을 알게 될 때 그대로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영혼을 강건케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강건하지 못하면 시험에 듭니다. 우리의 몸이 약하면 오는 병, 가는 병에 다 걸리게 됩니다. 만 가지 병이 침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는 구절 이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강건해야 시험에 들지 아니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 심령에 계셔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에 계시면 시험에 들지 아니합니다. 악이 침노하지 못합니다. 본문 17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려면 그리스도가 들어와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은 절대로 강제로 들어오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 와 계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우리의 심령이 강 건해져 어떤 시험과 유혹이 있다 할지라도 능히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서 계시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의 전(殿)이 깨끗해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면 그 심령 에 주님이 계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더럽혀진 심령이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고 주님을 모심으로 우리 심령에 천국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국 생 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뿌리가 박힌다 는 말은 나무를 두고 한 말이고, 터가 굳어진다 는 말은 집을 두고 한 말입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처럼 튼튼히 서고, 터가 굳어진 데 세워진 집처럼 견고히 서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하 지만 언제나 흔들립니다. 젊은이가 서로 사랑할 때는 추운 겨울 날씨에도 추운 줄을 모를 정도 로 뜨겁게 서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합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자기네만 결혼한 것처럼 행복해 합니다.밀월이 지나고 얼마를 살고 나면 서 로 모르던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천사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툭탁거리며 다툽니 다. 신부는 친정집에 온다 간다 합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지나 애를 낳습니다. 그렇게 되면 애 들을 보아서라도 싸우고 싶어도 못 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면 정이 듭니다. 가 만히 앉아서 쳐다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사랑의 뿌리가 박히게 되고 터가 굳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따 라서 우리가 온전한 성도, 강건한 성도가 되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가 박혀야 합 니다. 시편 1편의 말씀과 같이 복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뿌리가 튼튼히 박혀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흔들리지 아니할 뿐더러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 니합니다. 생명의 강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있을 때, 우리의 심령은 튼튼히 서 있 는 나무와 같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튼튼히 뿌리 박힌 나무와 같아서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터가 굳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집을 짓는 데는 기술 좋은 건축가가 필요하고 질이 좋은 건축 자재가 필요합니다.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견고한 기초입니다. 63빌딩처럼 높은 집을 짓는 데는 그 기초 공사를 얼마나 공들여 하는지 모릅니다. 암반이 나올 때까지 깊이 파고 그 암반을 뚫어서 거기서부터 집을 세워 간다고 합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아니합니다.예수 그리스도는 만세 반석이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세우는 지혜로운 건축자 같아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부딪쳐 와도 무너지지 아니한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3장 10∼11절에서 진 정한 우리의 인격을 세울 만한 집터는 반석과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우리의 심령의 나무가 뿌리를 튼튼히 박아 아무리 세상의 죄악의 바람이 심하게 태풍처럼 불어닥친다고 하여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믿음의 장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심령의 집이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져서 환난의 폭우가 쏟아지고 역경의 창수가 부딪쳐와도 무너지지 않고 우뚝 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본문 18절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라고 했습니 다. 이 말씀은 그 백성을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고 확고하게 믿게 되기 를 바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믿으면 더욱더 잘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모르면 그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다음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시 지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창 50:20). 요셉 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어떤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직면했어도 하나님을 절대로 원 망하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시편 23편에서 노래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 나이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아는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셔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 이른다고 해도 행복 하게 감사하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높은 수 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때 조금씩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충만하게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 이다 라고 찬양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하신 분이십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안겨 주십니다. 충만히 주십니 다. 우리 모두에게 주 안에서 바라는 모든 소원이 넘치도록 충만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공동의 몸
엡 3:14-21 / 김경호 목사
오늘 우리교회 8주년 기념예배입니다. 그리 길지는 않는 역사이지만 8년이면 그리 짧지도 않은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길게 봐야 33세 정도로 봅니다. 그런데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그분보다 한 타스를 더 산 저는 정말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들 자신과 교회의 역사를 반성해 보는 마음으로 이 예배에 임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넓이, 길이, 높이, 깊이의 네 차원은 ‘측량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구약적 용법입니다(욥 11,7-9; 집회 1,3). 이 네가지 차원이 무엇을 말하는 지는 분명치 않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구원의 신비,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가 무한함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나타내는 주체가 개인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엡3,6에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함께 약속을 받은 지체가 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에배소서는 교회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바로 한 몸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집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주체여야 합니다. 개인이 가지는 한계를 보충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실천에 완벽을 기하도록 하기 위하여,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실천의 단위를 개인보다는 공동체로 하는 신학, 즉 교회의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개인은 오늘 위대한 생각을 하다가도 내일이면 그 생각을 접을 수도 있고,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는 공동체야말로 이러한 개개인의 변화와 도덕성, 의지등을 집단의 판단과 인격에 의해서 여러차례 걸러내기에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감정과 한 개인의 외적, 내적 조건에 의하지 않고 각 개인의 신앙의 온전함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집단의 신앙, 집단의 인격은 보다 온전한 상태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 신앙, 개인적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서 나를 전율시키듯이 감동시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이루는 단위는 이미 한 개인적 결단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보다 온전한 형태를 갖출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와 함께 형성되는 교회의 신학입니다. 전에는 예언자나 사사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했지만 이제 교회의 출현이후에는 교회라는 집단인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 나갑니다.
교회의 신학은 예수를 따르는 삶의 주체를 ‘개인’이라고 하지 않고 ‘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아니고, 그 집단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대변하고 그분의 삶을 오늘에 되살려 살아가고 만들어 가는 주체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러한 실천이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곧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집단이 되어가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실천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만 교회의 자기 확장을 꾀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고,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삶을 더욱 우아하고 편안하게 만들어갈까 하는 것을 궁리하게 되었으며, 자기들이 헌금하고 그것을 자기들을 위해 재투자하여 더욱 편리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가는 데에만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교회됨을 상실해 버리고 자기가 싼 똥을 자기가 다시 먹고 점점 비대해져 가는 이상한 동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더 이상 그리스도의 실천이 나오지 않게 되었고, 교회는 단지 광범위한 친목단체가 되어 교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돌보아주고 즐기는 폐쇠된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쉽게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의 친화력이 주는 편리함, 안락함 속에 빠져들어 자기들끼리만 친교하고 즐기려고 하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고 전하는 실천에는 등한하거나, 겨우 인사치레이거나, 전혀 관심이 없기가 쉽습니다. 교회는 단지 전율과 감동을 받는 개인들이 함께 앉아 있는 장소라면 이것은 스스로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중요한 기능을 방기하는 것입니다. 너무 비대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쓸모 없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적절한 인원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적절한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몸이 되어야 합니다. 아주 훌륭한 신앙을 가진 개인들이 모였으나 그들이 만들어 내는 집단적인 실천은 아무 것도 없거나 극히 미약한 것이라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실천이 고작해야 이미 돼지 같이 비대증에 걸린 자기의 몸뚱아리를 더욱 부풀리는 것이라면 그리스도 역시 게걸스러운 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은 개인의 판단에 맡겨 버립니다. 그리고 교회는 자체 증식만을 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사실 교회(공동체)의 단위로 실천을 만들어가고, 그리스도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런 일들을 하기에는 이미 비대해져 있거나 너무 그 관심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기에 그들의 공통의 관심사를 찾을 수 없고 따라서 아무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오늘 창립 8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어떤 의미있는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지 우리들의 교회가 무슨 행동과 무슨 실천에 나서야 할지 하나님께서 그 깨달음조차도 공동으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저는 가끔 아주 엉뚱하고 근본적인 물음을 물어봅니다. “나는 왜 교회에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곧 “네게 있어서 신앙이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되는 가치에 있는가?”하는 질문이 되어 다가옵니다. 우리가 갖는 믿음은 “우리 삶의 중심점”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서저 멀리 떨어진 다음다음의 문제들로 신앙적인 문제들을 미루어 놓습니다. 어쩌면 신앙을 통해서 나를 보다 그럴듯하게 장식하는 장식물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바울을 생각하고 베드로를 생각하고 그 당시 제자들이 가졌던 어리석음과 한계까지를 거론합니다. 머리의 고백으로는 베드로도 바울도 훨씬 넘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몸은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지난 주 이병일 목사 고별설교에서 조심스럽게,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관념적 진보성”에 대한 말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생각은 굉장히 앞서 있습니다. 금방 앉은자리에서 온 세상사를 다 논하고 우주의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으로 하는 실천은 과연 무엇입니까? 냉철하게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작년 겨울에 예배 시작하려니 성가대 빼고는 교우들이 채 10명도 안되었습니다. 제가 그날 약간 흥분되어 “다음주일에는 정시에 문을 잠그겠습니다.”라고 선언을 했고 그 주간 내내 고민을 했습니다. 한 교우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선생님이 아이들이 떠든다고 떠드는 아이들 운동장으로 내어 쫒고 수업한다면 그것이 교사의 올바른 자세이겠습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제 고민을 더해 주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초등학교 교실인가? 우리가 꾸는 꿈은 매우 고상하고 높은데 우리의 몸의 수준은 이 정도인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평소에 제 철학에도 안맞고... 염려하며 주일을 맞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배 시작 전에 교우들 2/3이상이 정숙하게 앉아서 예배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날의 고마움과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과 5개월 지났는데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가 버렸고 또 문 잠글 것을 고민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왜 우리가 가진 꿈은 고상하고 매우 높은데 현실적인 것은 그런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보수교회, 보수교회라고 하고, 초기 장로님들 기도 가운데, “서울 하늘에 많은 십자가에 단지 하나의 십자가를 더 보태는 교회가 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의 실천을 볼 때 무엇이 그렇게 크게 다른가하고 의구심을 갖을 때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바울 같고 베드로 같다면 우리교회 8년 역사에 이렇게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벌써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지나간 8년간 우리는 교회갱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갱신된 교회의 모습을 갖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 교회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라기 보다는 한국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을 수정하고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당회원과 교역자들이 권위적이지 않고 열려있다는 것, 시민단체를 파트너 쉽으로 이 지역의 정의 문제에 관여한다는 것, 빈민촌 선교, 특히 꿈나무학교를 조그만 교회가 중심이 되어 끌고 가고 있다는 것 등등 겉으로 내 놓을 것은 그런 대로 챙길 것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우리끼리 그 내용을 반성해 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우리교우들의 삶에 역동성을 주는 요소냐? 얼마나 중심을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이 숙제로 남습니다.
교회갱신의 문제는 우리교회 혼자만의 작업이 되어서는 지극히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질적인 개혁의 강도를 자꾸 높여가는 데에도 한계가 명확합니다. 한국교회의 전체적 수준을 고려해서 개혁도 함께 진행되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한 교회가 지나치게 앞서 나가서 일반의 교우들의 정서를 가진 분들이 기피하는 정도로 튀는 교회가 되는 것은 하나의 실패한 예 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개혁은 함께 가는 공동체들, 전체 교회의 수준이 밑밭침 될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병일목사가 학교에서 동료들이 함께 공부할 때는, 갱신 개혁의지가 충만한데, 교회에 부임해서 일을 하게되면은 파김치가 되어 도무지 개혁이니 갱신이니 하는 말이 씨도 안 먹히니 그 고민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목회 철학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른 방식의 목회를 끌어가야 하는 좌절과 아픔 때문에 많은 신학생들이 풀이 죽어 있습니다. 기운이 넘치는 사람들 중에는 일찌감치 뜻을 접고 이미 그 이상으로 동화되어 “신학교육은 현장교회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교수들이 은혜가 없다. 현장에서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앞장서 펴는 일찌감치 전향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전체 변화가 수반되어야 개 교회의 갱신과 변화도 심도있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한 2-3년 마다 같은 설문을 놓고 교우들의 의식 변화를 살펴보는 징검다리 설문을 합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예배와 설교에 대한 선호가 매우 높은 것으로 드러납니다. 점점 더 그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목회자의 설교는 혼자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공동체와 함께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그런 설교를 받아들이고 함께 하기에 가능한 것이지 교회가 원치 않는 설교를 설교자 혼자 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공동의 설교자로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 나가는 것이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개신교 예배에서 매우 의미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을 단지 설교의 내용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자칫하면 머리만 큰 교인들이 되기 쉽습니다. 머리의 논의는 점점 더 과격해 지는데 그 몸은 따르지 않는다면 신앙적 괴리만 더해질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자에게도 굉장한 부담이 됩니다. 그 교회에서 선포하는 말은 진보적이고 혁명적인데 우리의 몸은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가장 그럴듯한 큰 쇼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목사들을 설교로 평가하고, 신통치 않네 어쩌네 하고 비토하는 아주 좋지 않은 전통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향린교회 48주년 기념예배와 장로임직식에 참여하였습니다. 순서를 맡은 여러분들이 한결같이 10년전 홍목사님의 구속 때에 교회가 일치 단결해서 교회를 지켰다는 이야기를 감격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그 때 마다 “그때 젊은 부목사를 중심으로 교인들이 일치단결해서....”라고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일동 웃음). 그러나 제가 지도력이 있다거나... 제가 잘해서 된 일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습니다.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홍목사님이 감옥에 가신 사건이, 그 사건 자체가 목회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목회를 안하고 감옥에 있었으나 어느 때 보다 밀도 높은 신앙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분이 일년 반 동안 강단을 비우셨지만 어느 때 보다도 강한 웅변으로 교우들에게 감동적인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아마 그 때 제가 아니라 어느 막대기를 꽂아 놓아도 같은 결과가 생겼을 것입니다.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웃음). 홍목사님께서 신앙의 길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 주셨고 그것으로 인해 향린교회는 50년 역사에 어느 때 보다도 가장 신앙적이고 체험적인 사건을 갖게 된 것입니다. 설교자가 백번, 천번 설교해서 신앙이 바뀌어지는 것보다는 하나의 사건을 경험으로 갖게 될 때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의 그 건강성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경험을 평생 한번도 못하는 사람은 참 불행한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까짓 비난 정도를 우습게 여기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일이 분명히 훨씬 높은 가치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별로 실천하는 일없이 먹고 마시기만 한다면 -그 비난을 넘어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친교가 중심이 되다가는 점점 더 편한 사람, 친한 사람들끼리의 모임으로 축소되어가고 보이지 않는 장벽, 다른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장벽을 쌓아 놓는 폐쇠적인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편하다. 이제 안정적이다”고 하는 때가 바로 다음의 목표를 제시하고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 편함 속에 안주하면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잘못된 물량주의에 빠지는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교회가 자꾸 숫자적인 경쟁 속에 빠져들어가 자꾸 목표를 높여가며 교회의 전력을 숫자적인 증가에 쏟는 이유는 그래야 그나마 공동체가 자폐적이지 않고 건강하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진보주의가 무엇입니까? 저는 진보라는 것은 ‘자신이 당연한 것으로 누리는 기득권을 보다 발전된 사회를 위해 내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역사를 위해 지금 당연한 나의 몫을 양보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중요한 사건이 되어 우리에게 더욱 내적인 확실성을 더하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더욱 간절한 신앙의 자리에, 더욱 더 간절한 헌신의 자리에 서게 할 것입니다. 진보적인 사람은 그 헌신의 정도만큼 각자 몸으로 고달프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당연한 몫을 포기하는 아픔입니다. 그 아픔 없이는 우리의 역사는 어느 곳에서도 한발짝도 나아가지 않습니다. 역사의 진보라는 것은 수많은 피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십자가의 행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몸과 삶이 따라가지 않으면서 머리로 만의 진보성! 이것은 매우 위험한 독선주의이며, 입으로는 정의와 선을 외치면서 고도의 지적 엘리티즘을 누리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들 자신 또는 우리 공동체의 가진 것들을 아주 유익하고 보람있는 일에 선뜻 덜어내어 몸을 가볍게 하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그것이 신앙이고, 갱신이고, 진보 아니겠습니까? 저는 작은 대안으로 작년 7월 전교인 수련회 설교인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 거취 문제까지 연계해서 분가선교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줄 것을 여러분에게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상당히 냉담하고, 부정적인 것 같이 보여집니다. “시기상조다” 또는 “아직 작은 교회에서....”라는 반응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제가 반문하겠습니다. 언제가 시기입니까? 우리 것이 넘치고 넘쳐 지천에 남을 때라야 남을 도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우리 신앙에 대해 간절하고 헌신적이라면 시무장로 5-6분이 되고, 제직이 80명이 넘는데 이분들이 힘을 합쳐서 한 개의 교회도 만들어 내지 못하겠습니까? 바울, 베드로.... 우리가 때로는 비판하지만 한분이 여러개의 교회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그 1/10의 믿음만 가진다면 하나 뿐 아니고 여러개의 공동체도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작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큰 교회가 되기 위해 전도도 하고 노력합니까? 물론 목회자들이 그런 것을 주문하지도 않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그런 욕구도 없지 않습니까? 마음에 그림도 없는데 어찌 현실로 나타나겠습니까? 이대로 앉아 있는 다면 고여 흐르지 않는 물이 썩어지듯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분가선교는 우리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고, 우리를 신앙의 중심 사건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는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건강한 공동체와 건강한 연결구조를 만들어가면서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은 중요한 것이고 우리의 신앙을 역동적이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얼마 전 기념식을 성대히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이 갖는 공통의 고민은 100년 역사에 별로 내세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쓰려니 갑갑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를 덜어내는 사건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만 역사는 진보할 수 있고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한번 심각하게 고려해 주시기를 교우들께 부탁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결단하지 않으신다면 마음이 없으신 것으로 알고 제가 두 번 다시 이런 설교를 할 기회를 갖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 분가선교를 성공적인 선교가 되기 위해 어떤 경우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고 어떤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만이 우리교회가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건강해 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 저의 기도를 통해 갖은 확신입니다. 교회 역사에 한 전환점을 이룰 수 잇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여러분들의 신앙적 헌신도와 진실성이 매우 높아지고 이제 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슴 뜨거운 신앙경험들이 여러분들의 삶을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전통을 만들어 갈 때 보십시오 제가 장담합니다 앞으로 20년 후에 한국교회의 중요한 건강하고 갱신된 신앙의 한 흐름- 종교개혁과 같이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 개혁의 중요한 흐름이 여러분들의 기도와 결단 가운데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공은 여러분에게 넘어갔습니다. 다음 창립기념일까지 교우들께서 어떤 합의를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분가하는 교회의 규모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의 건강한 기도와 합의로 그런 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원이 문제라면 저도 혼신을 다해서 사람을 불리는 목회를 해보겠습니다만 우리가 어쩡쩡하게 지내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전 교회가 뜨겁게 기도하고 전도도 하면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오병이어의 역사가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결단과 헌신에 우리교회의 건강성과 장래와 한국교회의 미래까지도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그 동안 제가 기도하며 얻은 결론입니다.
성령으로 속 사람을 강건하게
엡 3:14-21 / 성흥모 목사
우리는 몇 해 동안 교회 안에서 장년부 수련회를 개최하다가 오랜만에 교회를 벗어나서 가지게 되었습니다. 금년 2005년의 우리 교회의 표어는 "임하소서 성령이여 부흥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표어는 2년 동안 사용하려고 하는데, 금년 1차 년도에는 "임하소서 성령이여"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내년 2차 년도에는 "부흥하게 하소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배당을 벗어나고 자연과 더불어 숨을 쉬면서 한 자리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말씀과 기도로 영력을 얻게 된 것은 참으로 감한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다 성령의 사람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사로잡혔으며, 그의 전 삶을 다 드려 사역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어떤 이론에 있지 않고 능력이요, 성령의 역사요, 큰 확신에 있습니다.
스가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 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지도자에게 이르신 말씀인데,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데는 자신의 경험이나 사회적인 지위, 자신의 의지로만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하여야겠습니다. 먼저 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아니 내가 믿었다고 할 수 없고, 믿어졌습니다. 어떤 힘에 이끌렸는지 몰라도 감격 속에서 믿어졌습니다.
엡2:8-9에 의하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먼저 있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가 믿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룩해놓으신 구원을 믿음이라는 손을 내밀어 받아라 하시기에 손 내밀어 받아들였습니다.
고전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 말씀을 들으신 우리 주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똑똑하고 고상한 생각이 있어서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그 이름을 믿어 우리는 사랑받고, 합법적이요,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1:13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예정되었고,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6:37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붙여준 자요, 예수님에게 주신 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읽어보면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하여 나 같은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도록 택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여 주셨고, 성령을 보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님은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내주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며, 날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확신하면서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말고, 우리 안에 영주하시고 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여 주님과 동행하시는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성령님의 감동 감화의 역사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이 임하신 분이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이미 받은 구원입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받은 구원에서 이루어가는 구원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이 성화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할 때에 이룩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구원을 보존하시고 끝까지 붙잡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과 함께 하는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 하는 것으로 영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영성을 가진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주도권을 인정하면서 성령 안에서 성령과 의논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주도권을 자기 스스로 가진 사람은 성령님을 모시고는 있지만, 성령 안에 거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외면하고, 주님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영성이 없는 사람이요, 무디어진 사람, 세상 중심으로 치우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에게 나의 전 존재를 맡기고 그의 인도하심을 순종하는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영성신학에서는 존재변환(transformation)이라고 하여 내면적인 변화, 존재의 정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매우 교인답게 행동하는 기능적인 교인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형성을 가져오게 하는 내면적인 훈련에 관심을 두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영성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이며,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실제적인 영성이란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의미하는데, 영성은 거룩한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우리 주님의 인격과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이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을 바르게 하며 열정적인 영성을 가져야 이 어려운 시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힘써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혼으로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지금 나이 86세이십니다. 그는 지난 7월 26일 생애 마지막 부흥회를 마쳤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열렸는데, 24-26일 까지 무더위 속에서도 23 만명이 참석하여 그의 마지막 설교를 경청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님은 전립선암과 뇌수종 파킨스씨 병과 싸우고 있습니다. 빌 크린턴 전 대통령도 참석하여 "언제나 신념에 입각한 삶을 산 유일한 인물"이라고 그레이엄 목사를 칭송하였습니다.
지난 60여 년간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기독교 전파의 일선에 섰던 그레이엄은 1999년 시사주간지 타임에 의해 "20세기 100대 인물"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타임}은 그를 "미국 개신교계의 교황"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의 설교를 직접 들은 사람만 2억 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활동하시는 지난 60년 동안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사라졌습니다.
그런 중에도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영성을 유지하였으며, 영성의 마음 밭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성령님에게 이끌려 살았습니다. 항상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제 직접 하나님을 뵙고 싶습니다”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압니다. 이제 직접 하나님을 뵙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잘 믿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연습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잘 관리하여야 합니다. 딤후2:15에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라고 하셨습니다. 신실한 일꾼은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드리기를 힘쓰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나아갈 곳을 바라보면서 달려가야만 합니다.
성령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기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아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고, 지금도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2000년 전 팔레스틴에 있었던 고고학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책 속에 기록된 하나의 인쇄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므로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나를 위한 사건이 되었고, 나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정말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수없이 읽어보았고, 증거하였습니다. 에배소서의 귀한 말씀 중에 가장 귀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아버지라는 표상을 가져왔지만, 성서적인 표현은 "모성적인 하나님"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보면 어머니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한신대학의 김이곤 박사는 "모성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을 많이 강조하신 분입니다. 그는 그의 논문에서 "끝도 없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사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아버지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4-15)라고 하셨습니다.
20-21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성령 충만한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영력있는 신앙생활은 속 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속 사람이라고 하면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의지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라고 하면 우리의 영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의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롬7:22)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라고 하셨습니다. 속사람이라고 하면 우리의 영혼, 우리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운동하고 적극적이고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좋은 약을 먹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은 성령님과 교류하고 사귈 때에 강건해지는데,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성전 삼고 임재하고 내재하십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이제부터는 성령으로 인하여 속사람은 능력으로 강건해져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다만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이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강건하다는 말씀은 이것은 건강하라는 말이 아니라, 원문의 뜻은 강하게 하고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건실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리에 어긋나지 말아야 하고 순리에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심도 그렇습니다. 양심이 민감해야 하는데, 무디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떠나가셨지만,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악한 사탄 마귀까지도 두려워 떠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 우리 안에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우리 안에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큰 믿음의 사람이며, 우리 주님은 크게 역사하고, 우리가 작은 믿음이라면 주님도 작게 활동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 주님이 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키워야 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녁 침대에 누워서 주님에게 보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고 하였지만, 제가 주님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저를 따라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내일도 주님만 따르게 하옵소서"라고 다짐합니다. 주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여 주님으로 흐믓 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17절 하반절에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신앙의 현주소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말씀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뿌리를 박으며, 터가 굳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나무를 심는 것을 예로 드는 것이요, 터가 굳어져야 하는 것은 건축하는 것을 예로 드는 것입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잎이 마르지 않습니다. 건축하는데 있어 기초가 대단히 중요한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신앙이란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허다한 허물까지 덮어주셨으며, 원수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랑해주셨고,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의 희생적인 사랑의 깊이는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 큰 사랑을 받고 보니 이제는 보답하려는 마음 뿐이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었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겠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니 사실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걱정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기에, 걱정하시면 주님이 걱정하실 것이지, 주의 종이 걱정할 것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여러분의 속사람, 영혼은 지금 허약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속 사람이 강건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엡 3:14-21 / 방원철 목사
지난 7월 1일은 저에게 아주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부임할 때, 저는 향후 3년이 아주 중요한 기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은 개인적으로 세검정 교회를 충분히 배우고, 또 저 나름대로 준비한 목회 계획들을 실행해나가면서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만 3년이 지난 지금,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로서는 대과없이 3년을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께, 그리고 또 여러 교우들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저 감상에만 젖어있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는 설교제목을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이것은 요즘 우리나라에도 그분의 쓴 책이 많이 소개되고 있는 필립 얀시 라는 분이 쓴 책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책은 소년시절에 열심이 특심했던 저자가 왜 교회를 등지고 떠나야만 했는가, 그리고 왜 다시 돌아와야만 했는가 하는 것을 고백한 자기고백적인 책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제목만 가지고 교회를 향한 나의 고민과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지금까지 결혼한 이후 줄곧 가정에서 보낸 시간보다 교회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지난 3년 동안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나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하는 만큼 교회가 나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 같고, 특히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괴감 같은 것이 제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그래서 지금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바로 그런 교회를 이룰 수 있을까를 지금도 고심하고 있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한번쯤 교회 전반적으로 지나간 3년 동안의 일들을 돌아보고(과거),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지 우리의 좌표를 찍어보고(현재), 나아가서 간단하게나마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지나온 날들
지금도 저는 제가 우리 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설레임 반, 두려움 반' 이었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이루어갈 일들을 생각하면 설레임이 앞섰고, 반면에 정말 내가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부임해서 저는 먼저 저 나름대로 교회를 진단해 보았습니다. 그때의 모습을 열차에 비유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진단한 세검정 교회의 모습은, 세검정교회라는 열차 속에 성도들이 가득 타고 있는데, 열차가 굴러갈 레일이 여기 저기 파손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퀴도 아주 낡아서 교체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선로보수작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1차 년도에는 우선 '교육' 이라는 선로를 보수했습니다. 새로 교육담당 목사님을 초빙하고, 교육담당 목사님과 함께 교육의 틀을 다시 짜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2차 년도에는 '선교' 라는 선로를 보수했습니다. 그래서 새가족 위원회를 다시 구성하고, 대각성 전도집회, 중보기도실을 운영하는 한편, 제자양육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해외단기선교도 다녀왔습니다.
3차 년도에는 '봉사' 이라는 선로를 보수했습니다. 이미 시작한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열린강좌를 더욱 활성화하는 한편,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의 일들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사회 복지사들과 함께 지역사회를 위해서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함께 의논해가면서, 연말에, 부활절에, 여선교회 바자회를 통해서, 그리고 수시로 미력하나마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의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난 3년 동안의 일들은 한 마디로 '선로보수작업'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것을 저 혼자 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제가 한 일은 어디를 보수해야 할지 그때그때 자리를 정해준 것뿐입니다.
그러면 열차에 타고 계시던 교회의 일꾼들이 열차에서 내려서 팔을 걷어붙이고 보수작업을 해주셨습니다. 어떤 일은 열 분이 할 일도 있었고, 어떤 일은 오십여 분이, 또 어떤 일은 이백여 분이 힘을 모아주신 적도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지난 3년이라는 시간이 한편으로는 어제일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한 10년 이상으로 길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서 모든 교우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장로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돌아보면 제가 항상 잘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니 마음에 잘 안들 때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장로님들이 앞장서셔서 열심히 뒤에서 밀어주시고, 또 모든 실수와 허물들을 감싸주셨기에 오늘 이 만큼이나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러면 지금우리는 어디에 와 있습니까? 그것을 다시 열차에 비유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제 '선로보수작업' 은 대충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의 문제는 '열차 바퀴' 의 문제입니다. 물론 지금 세검정 교회라는 열차의 바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낡고 오래돼서, 교체해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아직 그래도 쓸 만 한데 굳이 바꿔야 하느냐고 하실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사실 바꾸기에는 지금의 바퀴가 정도 들었고, 버리기에 다소 아까운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체하지 않으면, 선로를 애써서 보수한 의미가 없어집니다. 젊은 승객들은 열차가 너무 승차감이 나쁘다고 갈아탈 사람도 많이 생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대로 운행하다가는 언제 바퀴가 빠져서 탈선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 바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와 '공동체' 라는 두 개의 바퀴입니다. 왼쪽 열에는 예배의 바퀴들이, 그리고 오른쪽 열에는 소그룹 공동체라는 바퀴들이 균형을 이루면서 열차는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3년이 지나고 다시 3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시급히,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다운 예배를 회복하는 일과 활력이 넘치는 소그룹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일 것입니다.
1990년경을 기점으로 우리 한국교회는 급격하게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서서히 마이너스 성장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럴 즈음에 교회는 이런 저런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자연스럽게 교회의 이슈가 양적인 성장으로부터 질적인 성숙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교인들의 수가 아니라, 질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수가 적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 성도들이 성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담은 책들이 많이 번역되기도 하고, 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책들 중에 대표적인 책 하나를 꼽는다면, 빌 벡햄이라는 목사님이 쓴 「제2의 종교개혁」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분은 본래 초대교회의 모습을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새' 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는 대그룹 예배라는 날개와 소그룹 공동체라는 두 개의 날개로 날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날개가 튼튼했을 때, 교회는 어떤 박해나 어려움 속에서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A. D.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면서부터 기독교는 지하에서 제도권으로 나오게 됩니다. 건물을 짓고, 제도를 형성하는 등, 이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기체가 아니라, 거대한 조직으로 바뀌어가면서 교회의 본질과 생명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예배와 소그룹이라는 두 개의 날개 중에서 소그룹이라는 날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남아있는 예배라는 하나의 날개로는 더 이상 교회가 날아오를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남아있는 하나의 날개마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기존 질서에 익숙해져 있어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 교회의 예배와 공동체성 역시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미래의 청사진을 바라보며
그렇습니다. 이제 모든 교회가 그 생명력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예배를 회복하는 일과,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부를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앞으로 3년 동안 우리는 축제로서의 예배를 회복하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활력이 넘치는 소그룹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에 주력하게 될 것입니다.
서서히, 그러나 끈질기게 예배를 개혁하는 작업들을 이루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분위기로 바꾸어 갈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성을 회복해서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고, 섬기고, 감싸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힘든 일을 만나도, 공동체 속에서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변화를 출애굽 사건에 비유하자면,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애굽을 빠져나와 가나안을 목전에 둔 느보 산쯤에 와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우리가 애굽을 나온 것은 광야에 머물기 위함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여기서 걸음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지난 3년 전에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시작했던 그 느낌이 지금 저에게 배가되어 전해져 옵니다. 우선 저에게 지난 3년 전보다 더 큰 '설레임' 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예배와 공동체성을 회복하게 될 때, 우리가 누리게 될 감격과 기쁨은 지금의 그것과 결코 비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저에게 지난 3년 전보다 더 큰 '두려움' 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사탄의 시험에 빠져서 교회가 어려움을 겪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지난 3년 동안에는 세검정 교회라는 열차에 타고 계신 교우들이 모두 열차에 내리실 일은 없었습니다. 비교적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분들이 앞장서기만 하면 됐습니다. 열차에서 수시로 내려서 선로보수작업에 참여하신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지난 3년 동안 단 한번도 열차에서 내리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바퀴를 교체하기 위해서 잠시 동안 열차에서 모두 다 내려야 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계시는 동안을 참지 못해서 다른 열차로 옮겨 타겠다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때로는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그리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어떤 저항이 있을지, 솔직히 저에게 이런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지금 교회 생활이 아주 편안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편안한 것을 찾자면 교회보다 쿠션이 좋은 극장에서 맘에 드는 영화를 한 편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감격과 기쁨을 누리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해 놓고 어젯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쉽게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내 생각인가"
"지금 그 일을 꼭 해야 하는가?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꼭 해야만 할 일이라고.
일평생 청년사역을 전담하신 어떤 선교사님 한 분이 청년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첫째는 청년들의 고민과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콘텐츠(contents), 둘째로 그것을 청년들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전달능력(delivery), 마지막 셋째로 청년들을 향한 뜨거운 열정(spirit)입니다.
저는 이것을 기초로 교회 개혁을 위한 세 가지 요소를 꼽아보았습니다. 그것을 저는 첫째로 교회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 둘째로 모든 회중들을 설득하고 움직일 수 있는 설득력,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그것을 위해 자기의 전부를 걸 수 있는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식견에 관해서 저는 교회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 지금까지 일주일에 하루 이상씩 배우고 연구하는 일에 투자해 왔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계속 노력하면서 채워갈 것입니다.
모든 회중들을 설득하고 움직일 수 있는 설득력에 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세검정 교회에 부임한 이래, 저의 가장 큰 관심은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위해 자기의 전부를 걸 수 있는 열정은 아직 저에게 남아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이 다 식을 때까지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맺는 말
'지동설'과 관련해서 조르다노 브루노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두 사람의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는 시대에 두 사람은 똑같이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종교재판소는 죽음으로 위협하면서, 그 주장을 철회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러자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학설을 철회했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 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조르다노 브루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확신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음을 택했습니다.
후에 사람들은 두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갈릴레이에게 있어서 지동설은 단순히 지식이었다. 그러나 브루노에게 있어서 지동설은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브루노는 지동설을 통해서 사물의 근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예배와 공동체 회복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브루노의 그것과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끈질기게 그 길을 가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떼놓고 혼자 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저와 여러분이 이 길을 함께 걸으면서 교회의 참 모습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엡 3:14-21 / 성흥목 목사
저는 구약의 선지자 중에 미가라는 선지자를 아주 귀하게 여깁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신 분입니다. 미가라는 이름의 뜻이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냐?}라는 뜻입니다. 그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고민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 내가 번제물로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6-8)라고 하셨습니다. 6-7절의 말씀은 미가 선지자는 약간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외치고 있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해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일생 벌어들인 모든 재산을 드려보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릴 수 있다면 무엇을 드릴 것입니까? 일년 된 송아지를 드려보겠습니까? 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선지자는 자기의 맏아들을 드려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물질이나 제물이나 심지어 자기 자식을 제물로 드리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드리면 되는 것으로 아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드리는 것으로 다 된 것으로 알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드려야 하지만, 드리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걷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 분과 걸어가면 됩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어떤 이와 동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와 동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인생관을 형성합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사도 바울의 서신을 주로 읽게 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우리는 사도바울을 건너 뛰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 사도바울이 고민한 것들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민하고 깊이 묵상한 것들이 우리에게 지침이 되고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 중에 정말 아름다운 서신은 에배소서입니다. 기독교회의 경건 문학과 신학서 중에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는 성경이 바로 에배소서입니다. 위대한 시인이며, 철학자인 코울릿즈(Coleridge)는 "인간이 쓴 가장 신성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 성경입니다. 기독교회가 주장하는 모든 핵심적인 교훈을 담고 있으며, 모든 자연 종교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이며, 인간 됨을 위한 교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배소서는 옥중서신이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옥중에서 쓰신 성경은 에배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의 시위대 뜰에 연금상태로 갇혀 있었습니다. 이 때 사도바울은 예수의 일로 갇힌 자되었다고 했습니다. 엡3:1에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4:1에서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는 "쇠사슬에 매였다"(엡6:20)고 하였으니, 사도 자신이 이제는 마지막까지 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동안 쓰신 여러 다른 편지들은 어느 교회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으로 즉시 해답을 주어야 하였고, 혹은 졸속하게 쓰셨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에배소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옥중에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차분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면서 과연 기독교회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히 저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편지를 쓰면서 서둘지 않았습니다. 졸속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깊은 사색과 묵상으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감옥에 집어넣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위대한 신앙을 정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선용하셨습니다.
에배소서는 서정적인 기도의 언어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결코 논쟁적이거나 반론을 펴거나 견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교회들과 사회와 일반역사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고, 연합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과 일치가 되고 연합을 이루고 통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정말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수없이 읽어보았고, 증거하였습니다. 에배소서의 귀한 말씀 중에 가장 귀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만나는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산다고 생각하실 지 모르나,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우리들이 만나는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아버지라는 표상을 가져왔지만, 성서적인 표현은 "모성적인 하나님"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가부장적인 전통 아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말로 사용하였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보면 어머니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한신대학의 김이곤 박사는 "모성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을 많이 강조하신 분입니다. 그는 그의 논문에서 "끝도 없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사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어머니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라고 하면 모든 것을 공급하고 보살피고, 인도하시는 능력이 많으시고, 사랑이 많으신 부모님과 같으신 분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사랑의 관계요, 사귐과 돌봄을 통하여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독재자요, 심판자요,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아버지가 되시는데, 우리는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아버지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4-15)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0-21절에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습니다.
옛날 이름을 지어주는 이는 주인이요, 이름을 부여받은 이들은 그의 소유물이 되었고, 종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할 때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본문을 통하여 보면 우리의 기도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것으로 옮겨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도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잘 살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요,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도 아니요, 출세하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인 은사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세상적인 것에서 하늘에 속한 것으로 옮겨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에배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두 번째 기도문인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창조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언제나 겸손한 마음가짐과 진지한 자세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무릎을 끓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보다는 "부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땅에 엎드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각오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는데,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형편과 처지를 너무나 소상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더 오래가고, 완벽한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옛날 다윗은 노래하기를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후히 되어 누르고 넘치도록 하여 우리에게 안겨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딤전1:14에서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1. 신앙생활은 성령 충만한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영력있는 신앙생활은 속 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속 사람이라고 하면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의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라고 하면 우리의 영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의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롬7:22)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라고 하셨습니다. 속사람이라고 하면 우리의 영혼, 우리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운동하여 강건해지지만, 그런데 우리 영혼은 성령님과 교류하고 사귈 때에 강건해지는데, 우리 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성전 삼고 임재하고 내재하십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이제부터는 성령으로 인하여 속사람은 능력으로 강건해져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다만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이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강건하다는 말씀은 이것은 건강하라는 말이 아니라, 원문의 뜻은 의지를 강하게 하고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건실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리에 어긋나지 말아야 하고 순리에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심도 그렇습니다. 양심이 민감해야 하는데, 무디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떠나가셨지만,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악한 사탄 마귀까지도 두려워 떠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2.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우리 안에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큰 믿음의 사람이면, 우리 주님은 크게 역사하고, 우리가 작은 믿음이라면 주님도 작게만 활동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렸지만, 미가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여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려면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데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려고 힘쓰면 정의를 행하게 되고 인자를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 자신에게는 공의롭게, 이웃에게는 인자를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 주님이 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키워야 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녁 침대에 누워서 주님에게 보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걷는다고 하였지만, 제가 주님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저를 따라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려고 주님에게 보조를 맡추면서 살겠습니다. "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신다면 그 무엇도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으로 인하여 주님이 기뻐하셔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3.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17절 하반절에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신앙의 현주소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말씀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뿌리를 박으며, 터가 굳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나무를 심는 것을 예로 드는 것이요, 터가 굳어져야 하는 것은 건축하는 것을 예로 드는 것입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잎이 마르지 않습니다. 건축하는데 있어 기초가 대단히 중요한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는 사랑이어야 사랑이고, 베푸는 사랑이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을 초월합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계속적인 과정에 있고, 점진적인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이란 어느 것도 소홀할 수 없는 입체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허다한 허물까지 덮어주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위로 거룩한 천사들과 아래로 불순종의 사람들까지 포함하며,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희생적인 사랑의 깊이는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였지만,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어려운 형편을 나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본문을 강해하면서 십자가를 깊이 음미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너비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높이는 소망입니다. 길이는 인내요, 깊이는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입체적이요, 다양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교회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하여 있고, 우리들이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21절에 말씀에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른 교회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교회 안에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설교만 듣고 가시는 것은 진정으로 교회에 속하여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돌보아주고 사랑해야 교인이 됩니다.
속 사람이 강건해지니 사실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걱정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인데, 걱정하시면 주님이 걱정하실 것이지, 주의 종이 걱정할 것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부인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고 힘드신 분들이 있습니까? "미안해라는 말로는 안돼!!"라고 외치는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합니까? 그래도 우리는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찾아가고 다가가서 말 한 마디라도 따듯하게 하여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성숙한 기도로 자라가야 합니다. 나 중심에서 벗어나고, 소유를 위한 기도에서 사람을 위한 기도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속사람, 영혼은 지금 허약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분명한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자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우리도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여지고, 믿음으로 예수님 충만해지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여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으로 충만하라
엡 3:14-21 / 박기완 목사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요1:12, 갈3:7∼9).
성도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는 자부심을 갖아야 합니다.
영국에 '줄리안 모리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미아가 되어서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느 굉장한 부자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되고 졸지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부자가 되고 나서도 걸인 행세를 지속하는 유별난 행동을 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걸인의 옷차림으로 비누, 샴푸, 좀약 같은 것을 집집마다 팔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도 한 달에 한 번쯤은 자기 소유의 최고급 리무진을 타고 런던의 초호화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1년에 한 두 번은 파리를 비롯한 구라파의 다른 도시들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이면 다시 비누와 샴푸를 팔러 다녔습니다. 그는 그런 생활이 좋은 것입니다. 좋다기 보다는 그런 거지생활이 자기에게 맞았던 것입니다.
다 떨어진 남루한 옷차림, 초점 없이 방황하는 눈동자를 보면 그는 영락없는 거지 중에도 상거지인 것입니다.
때로 저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왕자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주께서는 엄청난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감격해 하며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 딸, 곧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무력해 하고, 좌절하고, 방황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락없는 거지 신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풍요로움을 회복하는 놀라운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왕자요 공주이지만... 거지같은 삶을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을 향하여...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편지를 쓴 것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읽어보면, "풍성"이라는 단어와 "충만"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풍성'이 양적인 강조라면 '충만'은 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풍성하고도 충만한 삶, 그 삶의 회복을 위해서 바울 사도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빈궁하고 연약하게... 이 땅의 싸움에서 지친 모습으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주님이 예비하신 풍성하고도 충만한 하나님의 부요를 알았다면, 결코 실패자의 모습으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6절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단어는 '속사람이 강건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야 한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현대는 반대로 속사람 보다는 겉사람을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육체를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아마도 현대인들의 초미의 관심사, 최대의 관심사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유행처럼 번져 나가는... 소위 건강 산업이나, 겉모습을 치장하는 여러 가지 장신구나 화장품의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건강과 육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도 중요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겉사람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속사람입니다.
바울은 고런도후서 4:16절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치장하고 바르고 두들기고, 맛사지를 하고 운동을 해도... 그 육체는 결국 늙고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므로.... 썩어져 가는 겉사람, 후패해 가는 겉사람을 위해서만 노력하지 말고, 속사람을 위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1967년에 캐나다의 '리키 갤런트'라는 아이가 '프로제리아'란 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병은 나이는 어리지만 노쇠, 동맥경화, 탈모, 근육이완, 주름살 등... 노인의 육체적 증세가 나타나는 조로 증세를 나타냅니다. 이 아이는 당시 11세였지만 신체는 90세로 보이는 노인이었던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나이만 가지고 늙었다거나 젊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는 젊은 늙은이가 있고 늙은 젊은이가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청년이란 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붉은 뺨이나 입술이 아니라 굳센 의지, 상상, 감정, 생명력에 달렸다. 청년은 용기로 비겁을 이기며 모험으로 앞일을 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젊고 패기 있는 청년의 때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곱디고운 피부도....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지내다 보면 얼굴에 잡티가 많이 생겨나고... 팽팽하던 피부의 탄력은 흐물흐물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흰머리가 많아지고, 치아는 빠지고... 뼈는 약해집니다. 점점점... 후패해 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나 신앙이나 생활은... 젊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적 젊은이로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젊은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속사람이 새롭고 건강하다면.. 육체는 후패하지만 영육간이 동시에 건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하루야마 시게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글을 쓰는 작가인데,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30년 동안 책을 쓰면서 건강의 6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려면 이 여섯가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시한 것이....
첫째는 피곤하지 않게 사는 것이요,
둘째는 적절한 잠을 자는 것이요,
셋째는 식욕을 절제할 것이며,
넷째는 화내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는 계속적인 두뇌의 사용이며,
여섯째는 적당한 운동입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후에 이 사람은 '뇌내혁명'이라는 책을 쓰면서... 정말 인간에게서 필요한 것 여섯 가지에 한 가지를 더 첨가했는데, 그것은 '마음의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평화가 건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55%로 보았습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라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의 겉모습 보다는 속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몸은 정신에 의해 지배를 받고.... 정신은 영혼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부요하지 못하다면.... 건강한 삶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서 기도하기를,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풍성하심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7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여기서 '계신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쉽게 말하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 하는 정도의 표현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계신다'는 단어는 존재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문에 보면, 매우 독특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는 '손님으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인이 되어 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고도 손님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주장합니다. 내가 주인이고 주님은 손님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성도는 주님이 주인이 되어.... 주님의 뜻대로 결정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주님은 우리 안에 오실 때 손님으로 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내 삶의 모든 영역, 내 생각의 모든 영역들을 온전히 지배하는... 그런 주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손님이 점심을 먹기 위해 한 식당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의 테이블 보는 더러웠고, 음식을 나르는 웨이터들의 옷도 추했습니다. 친절과 정성이 부족했고 음식 맛도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기대를 가지고 음식점에 들어갔던 그 손님은 실망을 하고 나왔으며... 그 식당을 예약하여 다른 손님들을 초대하려던 계획을 취소해 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그 식당 앞을 지나면서 보니까 그 식당 문 앞에 큰 팻말이 붙어 있는데 거기에는 '새 주인이 경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시 한 번 그 식당에 들어가서 새 주인이 경영하는 그 식당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인상 좋은 사람이 나오더니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안내를 했습니다.
식탁의 테이블 보는 깨끗이 세탁이 되었고, 웨이터들의 옷도 깨끗한 차림이어서 얼마나 기분이 상쾌한지 몰랐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친절하고 겸손했으며 음식 맛도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기회에는 많은 손님들을 청해서 그 식당에서 대접하리라고 뜻을 정했습니다.
어떻게 이 식당이 달라졌습니까?.....
주인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삶을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삶이 바뀌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주장할 때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심령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오십니다.
그분이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오신다면, 내가 그분을 향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주인님, 마음대로 다니면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그분에게 열쇠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의 열쇠 뿐만 아니라, 모든 열쇠가 다 있는 열쇠 꾸러미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모습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배할 때에는, "하나님! 저를 온전히 지배하고 다스려 주십시오!, 내 미래의 계획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깁니다. 하나님, 인도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업을 위해서, 또 어떤 진로를 결정하거나 어떤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 이 문제만은 제게 아주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세요!" 그러면서 자기 뜻대로 진행해 나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내 사고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나를 지배하십니까?....
풍성한 삶, 충만한 삶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주인이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주권 앞에 내 삶을 복종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풍성한 삶을 원하십니까? 충만한 삶을 소원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도록,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도록 맡기시고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약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기꺼이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직도 그런 삶의 모습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거짓입니다. 위선입니다. 자신을 속이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에베소서 3:18절 이하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원하노라!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랬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 주님이 내 삶과 내 사고의 모든 영역에 당연히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결코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두 가지 경우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원수이거나, 아니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원수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원수 같은 이가 있으면 그 사람 생각에서 자유 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잊고 싶어도 자꾸만 더 새겨집니다.
또 한 경우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있으면... 사랑하는 이의 환상에서 자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서 늘 떠나지 않습니다.
걸어가도 그렇고, 차를 타고 가도, 공부를 해도..., 또 무엇을 먹어도, 심지어는 잠을 자도 꿈속에서까지... 그 사람의 지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누구를 사랑하든 무엇을 사랑하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그것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그런 뜻으로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모든 사고와 존재의 영역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를, 그 길이를, 그 깊이와 높이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넓이는 무엇이고 사랑의 길이, 높이, 깊이는 무엇입니까?
한 신학자는 말하기를, "이 모든 것은 십자가로 설명 될 수 있다. 십자가야말로 그 사랑의 넓이를, 길이를,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준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랑의 네 가지 차원을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얼마나 넓을까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사랑의 넓이는 온 세상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습니다(요3:16).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만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도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란 사실은.. 하나님이 이방인도 사랑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방인까지 품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넓은 것입니까?
마태복음 28:19∼20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종족, 모든 인종과 문화와 사상을 다 뛰어 넘는 넓은 주님의 사랑... 그래서 그 하나님은 나도 사랑하시고 내 이웃도 사랑하시고 이방인도 원수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의 넓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둘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풋내기의 짧은 사랑이 아닙니다. 변절하고 변심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의 영원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을 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주의 영원하심입니다. 자그마치 시편에서만 112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100:5)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07:1)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얼마나 깊을까요?....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담당하고 지옥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우리말 사도신경에 보면 번역할 때 생략된 내용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음에 "장사 당하신 후에 지옥에 내려가셨더라" 하는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지옥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저 죄악의 깊은 심연, 지옥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나를 위해서 음부까지 내려가셔서 나를 끌어올리신..... 그 사랑의 깊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넷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입니다.
에베소서 2:6절을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우리를 하늘의 보좌에 함께 앉도록 하셨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나를 구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혀 놓고 함께 교제하기를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 지옥 밑바닥에서 나를 끌어올려... 저 천성, 주님의 보좌에까지 나를 올려놓으신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의 높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사랑...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절)
바로, 여러분이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사랑하신 주님이 내 삶을 온통 지배하도록 방안의 모든 열쇠 꾸러미를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인이심을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아직 몇 개의 방 열쇠는 꼭꼭 숨겨놓으셨습니까?...
주님이 내 삶을 온통 지배하실 때..., 그때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십시오!...
다시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충만, 하나님의 어떤 충만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이것은 엄청난 선언입니다.
주님의 것이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작은아들이 외국에 가서 재산을 다 탕진해 가지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를 반기며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토라진 큰아들.... 아버지의 행동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5:31∼32절 말씀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랬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내 부요가, 내 평안이, 내 은총이, 내 능력이, 내 임재가, 내 사랑이 다 네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를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지금 무엇이 필요합니까?...
평안이 필요하십니까?.. 물질이 필요하십니까?... 건강이 필요하십니까?....
얽히고 설킨 어떤 문제의 해결을 원하십니까?...
바울은 에베소서 3:20절 말씀에서 그랬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구하라!" 그랬습니다.
주님은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더 풍성하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주의 권속들에게... 하나님의 그 풍성하심이 충만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바울의 기도
엡 3:14-21 / 김태복 목사
성경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기도문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가 있고, 또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의 기도의 자세와 그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참으로 중요시 알고 늘 사용하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도 깊이 연구하고 배우심으로 성숙한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기도의 대상과 방법이 나옵니다.
14-15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 했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각 족속은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이 얼마나 광범위 합니까? 또한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족속은 각각 다르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면 곧 하나님의 가족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는 어떤 가족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다가 먼저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 있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물론이거니와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포함된 말입니다. 또한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는 자는 전부 하나님의 가족임으로 기도의 대상에 포함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가족을 위해 바울이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에 무릎을 꿇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응답 받는 기도들을 보면 한나나 엘리야의 기도, 가나안 여인이나 바디메오 기도 등은 한결같이 불타는 마음,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들입니다.「교인풍속도」라는 책에는, 기도에는 이런 재미난 유형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붕어형: 소리 없이 입만 움직이며 기도하는 성도요, (2)한나형: 엎드려 자는지, 기도하는지 잘 모르게 기도하는 성도요, (3)엉엉형: 초장부터 엉엉 울어대는 성도요, (4)무지막지형: 말이 되든지 안 되든지 뒤죽박죽 기도하는 성도요, (5)눈코범벅형: 눈물과 콧물로 엉겨 범벅이 된 성도요, (6)유구무언형: 3분 정도 하면 간구할 것이 없어 답답해하는 성도입니다.
(7)고아설음형: 처음부터 ‘아버지’ ‘아버지’만 불러 대는 성도요, (8)고성충만형: 너무 큰 소리를 외쳐 옆 사람에 지장을 주는 성도요, (9)노조운동형: 주먹 쥔 오른손만 반복으로 흔들어 대는 성도요, (10)개구리형: 마루 바닥이 뜨거운지 펄쩍펄쩍 뛰는 성도입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유형이 가지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고 들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심의 기도는 어떠한 기도입니까? 유대 사람들의 기도는 세 가지 자세가 있었습니다. (1)보통 기도인 서서하는 기도로, 두 손 바닥을 하늘을 향하여 펴고 받는 자세로 ‘하나님 주십시오.’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2)자복하는 기도로서 엎드려 하는 기도입니다. (3)간곡한 기도로서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는 종이 주인 앞에 취하는 자세요. 간절한 자세입니다. 저는 습관적으로 무릎을 꿇어야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의자에서 기도할 때도 올라가서 무릎을 꿇습니다. 때로 설교의 요청을 받고 어느 교회는 가보면 강대상에 신발을 신고 올라갑니다. 자연히 의자에서 기도하게 됩니다. 왜인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번 40일 동안 기도할 때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 보십시오. 마음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비는 자녀를 당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할 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일본 최대의 고아원을 창설한 이시이 쥬지는 기도의 사람이었는데 누가 와서 묻기를 “어떻게 이 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렸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이시이 쥬지는 그 분을 데리고 고아원 본관에 있는 어떤 외딴방으로 데려가더니 “저기 있는 구멍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고아들을 먹일 돈을 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손님을 그 곳 바닥을 보니까, 기도하기 위해 깔아 놓은 돗자리가 무릎 모양만큼 깊이 파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수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시이 쥬지의 제자 도미다씨가 간증한 바에 의하면 그는 곧잘 옛날 기도한 일을 읽어 주면서 몇 년 몇 월 며칠에 기도한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말해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이 이번 40일 동안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응답을 받는 것은 물론 성령 충만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바울의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16절에 나옵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 했습니다. 바울의 기도의 내용은, 에베소 교인들이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혹은 평안한 삶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의식주나 건강, 사업 문제도 다 중요합니다.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고 내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외적인 사람인 겉 사람과 내적인 사람인 속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시고” 이것이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본래 인간은 겉 사람도 약하지만, 속사람은 더 약합니다. 왜냐하면 부패성을 갖고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선하게 행하려다가도 악이 함께 하고, 바른 길로 가다가도 구부러지기 쉽고, 옳은 일을 결심했으나 결국 본능을 이기지 못해 죄를 지을 때가 많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질그릇처럼 깨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해야 죄를 이길 수 있고, 사단의 시험이나 유혹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속사람을 어떻게 건강하게 됩니까? 인간의 의지나 결심으로 안 됩니다. 16절에 보면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우리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현상이 나타납니까? 17절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이전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겉 사람과 같이 계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심령 밖에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 성령 충만 받은 후에는 그들 심령, 즉 속 사람에 들어오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의 속사람은 변화 받고 강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과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말은 거의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고 계십니다. 그럴 때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거하시고”라는 말은 여관이나 호텔에 머무는 것처럼 일시적인 숙박이 아니라 주인으로 자기의 집에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성도들 마음 가운데 정착하여 주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사람이 강해지려면 예수님이 우리 심령의 주인이 되시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심령가운데 모시고 살지만, 손님으로 모십니다.
평소에는 자기 생각대로 살다가 어려울 때, 필요할 때만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평안해지면 예수님을 손님격으로 대우합니다.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이 평소에는 사업을 하면서 부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위기를 만나서야 도와달라고 한다면 괘씸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 속사람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점점 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순종하는 삶이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17절 하반절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사랑 가운데 뿌리가 내리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했습니다.
이방에 에베소 성도들이 여러 가지 신분이 다양하고 종족이 다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로마인 등, 수많은 종족들이 섞어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온 배경 문화와 언어가 다르고, 지금까지 섬겨온 신들도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문제가 많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지금은 남북한으로 갈라져서 서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만 남한 땅 덩어리 안에서 영남과 호남이 정치적으로 언제나 갈라지고 있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앞으로 대통령 선거 때가 되면 다시 동서로 강하게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심히 염려가 됩니다. 이렇게 한 민족 간에도 오랫동안 지역감정으로 갈라지기 있다면, 바울 당시의 교회들은 수많은 종족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으니 얼마나 문제가 많았겠습니까?
그러한 교인들끼리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의 터에 정착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두 가지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뿌리가 박히고’라는 식물학적 용어이고, ‘터가 굳어지고’라는 건축학적인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의 삶에 뿌리를 내릴 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 든든한 기초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온갖 족속,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용해되면 이전의 종족이나 문화, 종교는 다 사라지고 모두가 하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신실한 미국의 어느 가정은, 자기의 아이들이 둘이나 있음에도 한국에서 성씨가 다른 두 아이를 입양해서 키웁니다. 외적으로 보면 얼마나 문제가 많은 가정입니까? 그러나 처음에는 서로 다투면서 자랐지만, 나중에는 친 형제, 친 자매처럼 서로 아끼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 부모의 뜨거운 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용해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으로 양자가 됨으로 우리는 형제와 자매가 되었지만,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자라가야 합니다. 어떻게 자라갑니까? 18-19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안다’라는 말은 이성적인 지식을 강조한 단어입니다. ‘깨닫다’라는 말은 지적인 의미보다는 차라리 영적인 의미가 강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처음 교회를 다니다 보면 자연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배웁니다. 그러면 지식적으로 잘 알게 됩니다. 세례 받을 때도 또박또박 대답을 잘 합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고 있는 상태이므로 마음에 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또는 기도하다가 ‘아, 그렇구나!’하면서 무릎을 치면서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성령에 의해서 홀연히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라는 찬송을 부르게 되고 가슴에 십자가 사랑이 젖어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흘러넘치어 눈물이 나게 되고 간증하게 되고 더 나가서 주님이 원하는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점점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 높이와 길이를 깨달아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할수록 얼마나 넓고 깊으며, 얼마나 높고 긴지 측량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점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평소에는 부모의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언제 깨닫기 시작합니까? 남자들은 군대에 가서 깨닫기 시작하고 여자들은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부모의 사랑을 점점 깊이 깨닫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의 간증을 들어보았습니다. 자기는 과거 자기 아버지 속을 너무나 많이 태워드렸다고 합니다. 자기 아버지는 오직 교회 밖에 모르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논이나 밭일을 하시면서 항상 시골교회를 돌보시는데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청소나 종치는 일, 구진 일은 도맡아 하셨고 외부에서 강사가 와도 없는 살림에 대접함으로 어머니가 너무나 고생을 하셨답니다. 그런 아버지의 외골수적인 신앙과 무능한 생활능력에 대해서 너무나 화가 나서 사춘기 때부터는 교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여 살면서 나쁜 친구들과 사귀다가 어느 날은 사고를 쳐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오셔서 겨우 방면되었는데, 아버지는 자기에게 국밥을 사주시면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런 모습이 너무나 싫어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너무나 속이 상하신 때문인지 아버지가 몇 년 후에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자기가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키우는데 아들이 점점 자기를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춘기 때부터 점점 비뚤어져 나가더니 나중에는 자주 사고를 치고 경찰서에 붙잡혀갑니다. 정말, 얼마나 화가 나는지 때려죽이고 싶습니다.
그 때마다 자기에게 국밥을 사주시면서 우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자기는 아버지 사랑에 비하면 만 분지 일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너무나 그리워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꺼이꺼이 울면서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충성한 결과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들도 점점 변화여 간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부모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수록 부모의 관계와 깊어가는 것처럼 우리성도들이 주님의 사랑에 대해 깨닫는 깊이에 따라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갈 뿐 아니라 속사람이 그 만큼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번 40일 동안 기도하시면서 주님의 사랑을 보다 넓고 깊게, 그리고 길고 높게 깨달으시므로 속사람이 한 단계 더 성숙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기도 응답을 넘치게 주십니다.
20-21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는 모든 것을 들어 주시며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크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우리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자입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응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이 약하므로 응답을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 이상으로,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빌4:19 “우리 주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더 풍성한데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살면서 이런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반드시 응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되 자신만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더 범위를 넓혀서 교회와 사역자들, 선교사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보기도에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한 조종사가 나이지리아의 어느 정글 위를 날고 있었을 때 비행기 엔진이 작동을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위기에서 불붙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눈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초록색 깃발을 보았고, 그곳을 향해 미끄러져 하강했습니다. 그곳은 깨끗하게 정돈된 공지였습니다. 착륙하면서 비행기가 조금 상하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었습니다. 두 달 후의 안식년에 그 사고에 대해 간증을 하였을 때 한 여성도가 사고가 난 날짜와 시간을 물었습니다.
날자와 시간을 가리켜 주자 여성도는 놀라워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당신이 절박한 필요에 처해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30분쯤 당신을 위해 기도했을 때 내 마음에는 평안이 임했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런 간증도 있습니다. 한 OMF 선교사가 선교비를 들고 역으로 가고 있을 때, 강도들이 그를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강도들은 곧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후에 강도 중 하나가 구원받았을 때, 선교사는 왜 그때 강도들이 자신을 죽이고 돈을 탈취해 가지 않았는지를 물었습니다. 회개한 강도는 “우리는 군인들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기도후원그룹이 그 선교사를 위해 그때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 판명되었고 강도들이 본 군인들의 숫자는 기도후원자들의 수였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기도의 능력, 특히 중보 기도의 능력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능력을 주셨음에도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고 무슨 일을 만나면 근심하고 염려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울고 불면서 사정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모독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이번 40일 동안 무슨 제목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사랑을 보다 더 깨달을 수 있게 해달라고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 다음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 우리가 구한 것이나 생각한 것 이상으로 풍성히 채워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온전한 신자
엡 3:14-21 / 임덕순 목사
학생은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담임선생님이 바라는 학생이 되어야 훌륭한 학생이고 공부를 잘 하게 됩니다. 성도는 담임목사가 바라는 신자가 되어야 훌륭한 신자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제 사사로운 유익을 위해서 말하고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바라는 신자의 모습은 곧 주님이 바라는 신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해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자세가 어떠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신앙자세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새해를 준비하는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처음 사랑을 되찾기를 바라노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기를 바라노라."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도 자기가 목회한 교회들에 대한 간절한 소원과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원과 바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바라노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기를 바라노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노라."
저도 한가람 성도들을 향한 소원과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여러분의 모습 일곱 가지를 말씀 드리렵니다.
첫째,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한가람 담임 목사가 바라는 성도는 첫째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출애굽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갈 때, 애굽 왕에게 그들이 왜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간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우리들을 구원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요, 예배하는 삶이란 예배시간 한 시간 교회에 와서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 예배시간에 와서 예배하지 않으면 바르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 한 시간 와서 말씀 듣고, 돌아가서는 한 주간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바른 예배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한가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한 다는 것은 우선 시간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 시간이 다 되어서 헐레벌떡 들어오는 사람은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예배가 시작된 뒤에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습관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은 모든 예배에 늦어도 15분 전에는 교회당에 와서 앉아 있어야지요.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려는 사람도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집사님, 권사님들은 언제나 앞자리에 앉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주일 아침 예배는 물론 주일 오후 예배와 수요일 저녁 예배에도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교인은 예배를 삶의 중심으로 삼으며, 모든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하십시오. 예배에 정성을 다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예배를 소홀이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떠납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하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에 힘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성도는 둘째 기도에 힘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힘쓰셨습니다. 눅22:44에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라고 했고, 120명 제자들도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고 했습니다. 기도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힘을 써야 됩니다. 그리고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 집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방편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120명의 예루살렘 초대 성도들은 사적인 일들을 다 제쳐두고 한 자리에 모여 열흘 동안 힘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나가시곤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로 시작해서 새벽기도로 자라온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장로님 권사님들이 새벽 기도에 힘을 다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사실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장로나 권사의 자격이 없습니다. 지도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안목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민13장 보면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여행 2년을 한끝에 가나안 접경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하여 열두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열 명은 엉뚱한 보고를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손길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은 열악한 환경만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주려고 보내셨기 때문에 저 땅은 우리가 꼭 점령한다고 가나안을 보았지만, 열 명은 왜 잘 있는 애굽에서 나왔을까 과거가 지금보다 나았는데 하면서 뒤만 바라보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주의 종과 같은 것을 바라볼 수가 없고, 같은 방향을 바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죄와 속박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아름다운 일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나와서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침마다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기대할 수가 있고, 기도하고 바라며 기대하는 사람만이,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날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인도하시는 손길을 체험합니다. 기도하다보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생각이 바뀝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어렵고 힘든 일을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용기와 능력을 얻습니다. 기도에 힘을 다하는 우리 한가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전도에 생명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성도는 셋째 전도에 생명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교회의 최대 사명은 전도입니다. 사도행전은 전도의 행전입니다. 쉽게 전도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과 성도들이 모두 생명을 바쳐 전도한 전도의 행전입니다.
스데반은 생명을 바쳐 전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한가람교회에는 전도에 열성을 다하시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박화자 집사님은 전도와 돌봄에 열성을 다하는 분들 중의 한분입니다. 이수자 권사님 조은하 집사님 도 전도에 힘썼습니다. 전동태 장로님도 지난해에 네 명의 전도를 했습니다. 전도를 잘한 분들에게 오후에 시상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장로님에게도 시상하려고 했더니 장로님은 받지 않겠다고 해서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이 앞장서 전도했으니 목사가 참 힘이 됩니다. 장로님들이 전도하기는 다른 사람보다 힘든 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장로쯤 되면 교회에서 살다 시피 하는 분들인데, 세상 친구들을 이미 오래 전에 끊은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전도를 열심히 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새해에는 전도에 최선을 다합시다. 전주에 어느 교회는 전도하지 않는 사람, 그 해에 전도에 열매가 없는 사람은 집사도 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해마다 전도하는 것을 보아서 일군을 맡긴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전도에 힘을 다하는 분들을 보면 저는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습니다. 새 해에는 전도에 최선을 다하는 한가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봉사에 몸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성도는 넷째 봉사에 몸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은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봉사입니다. 여러분 들으셨어요? “노무현 대통령의 눈을 수술한 의사가 구속되었답니다. 왜 그랬는지 아세요? 입을 꿰매야 하는데 눈을 꿰맨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이 하도 말로 사고를 치고 말로 계층 간에 싸움을 붙여서 백성들을 시달리게 하니까 이런 웃지 못 할 농담도 말이 생겨난 듯합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입으로, 말로가 아니라 몸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몸과 생명으로 우리를 섬겨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성도의 궁극적인 삶의 모습도 봉사라고 사도 바울은 지적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엡4:12). 성도를 온전케 하는 방법은 서로 봉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을 권면하면서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벧전4:10).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 안에는 몸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막 안의 기구들을 만들고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하는 일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몸으로 청소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안내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음식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찬양을 드리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병든 자들을 찾아 위로하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 구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봉사에는 기쁨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몸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몸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용히 교회에 와서 청소하는 사람들도 있고, 말없이 평일에도 식당에 와서 김치를 담그고 주일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얼굴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김성렬 집사님은 성가대 좌석이 삐걱거리고 불안정한 것을 보고 일 년에 한번 쓸 수 있는 직장의 사흘 연가를 일부러 내서, 자기의 목수 기술로 이 성가대 단을 다시 짰습니다. 여성도 세 명이 교육관 청소를 스스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육관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봉사를 하고 싶어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봉사부장 김양신 권사님의 봉사는 여러분이 다 아십니다. 우리교회에는 무엇이든지 봉사를 좀 하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 새로 나오신 분들이 우리교회가 참 좋다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 처음 부임한 심성웅 목사님은, 한가람교회에 와보니 젊은 성도들이 한가람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려는 자세가 남달라서 너무 좋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특별찬양을 한 성가대 김천아 자매는, 우리교회에 와서 보니 어른들이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고 앞장서서 봉사를 하려고 하는지, 그것이 너무 좋더랍니다. 과거에 이런 교회를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학을 다녀와서도 한가람교회에 돌아와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도 우리교회가 늘 자랑스럽습니다. 봉사하는 분들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봉사가 많은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봉사가 많은 교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입니다. 봉사에 몸을 다하시는 한가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선교와 구제에 물질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성도는 선교와 구제에 물질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사함을 받았다. 사단의 얽매임에서 해방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자식으로 산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사람은 사실, 이 세상에서 더 오래 살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받은 성도들을 모아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남아 있게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전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도 전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만 전도할 것이 아니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면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그 일에는 돈이 필요합니다. 선교지에서 사랑과 복음을 주려면 구제와 전도가 동시에 시행되어야 합니다. 선교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은 교회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계속해야 하는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물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는 구제에 힘을 썼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행2:45). 구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인 동시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또한 구제를 베푸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고넬료가 구제에 힘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고넬료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나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잠11:24, 25).
요즘 장학헌금이 모아지지 않는다고 장학회 임원들이 염려합니다. 여러분, 과도하게 아껴도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으면 다른 데로 샙니다. 병이 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아끼고 모았던 돈은 다 날아갑니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교와 구제를 위해서 기쁨으로 헌금하는 일에 열심 해야 합니다. 그러면 병든 몸도 고쳐주십니다. 저는 한가람교회 성도들이 선교와 구제에 물질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실 한가람 교회는 선교에는 한국에서 일 등하는 교회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십일조 이상을 바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물질을 아끼는 분들이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장학 사역도 알고 보면 일종의 구제입니다. 교회에서 헌금을 하는 것은 선한 일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교회는 재정의 1/3 이상을 선교와 구제를 위해서 쓰고 있습니다. 건물유지나 목사님들의 사례보다 선교를 위해서, 구제를 위해서 더 많이 쓰는 교회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교회는 헌금으로 예배당 치장하고 허세를 부리는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깝게 헌금한 돈인데 그렇게 씁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은 투명하게 관리하여 오직 복음사역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구제와 선교를 위해 물질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섯째, 교제에 마음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성도는 여섯째 교제에 마음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모임입니다. 서로가 교제하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의 하나는 교제하며 떡을 떼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제는 끼리끼리 하는 교제는 아닙니다. 유대인끼리 헬라인끼리 하는 교제는 아닙니다. 권사끼리 장로끼리 하는 교제도 아닙니다. 새신자끼리 구신자끼리 하는 교제도 아닙니다. 본회퍼라는 신학자는 신자들의 교제에 어떤 인간적인 요소가 끼어있으면 그 교제는 성도의 교제가 아니라고 단정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하는 교제만이 참된 성도의 교제라고 말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교회에서는 계하는 모임, 같은 지역 사람끼리 모이는 모임, 인척간에 모이는 모임 등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요소가 끼어들게 되면 참된 교제가 아닌 것입니다. 어느 교회는 성도들이 다단계 업체에 단체로 등록해서 영업망 구실을 하는 교회도 있다는데, 그런 교회는 주님의 교회, 진리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가 믿음과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을 보시면 주님이 기뻐하시며 그곳에 복을 명하신다고 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사도 바울도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항상 마음을 다하여 서로 돌아보며 교제하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3,4). 고 하였습니다. 교제의 정신은 상대를 높이는 것이고 자기의 일을 감당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줄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순수하고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목사도 그것이 제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마음을 다하여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아직 우리가 땅에서 살고 있지만 천국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교제에 마음을 다 쏟으시는 한가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째, 바르게 버리는 성도입니다.
담임 목사가 바라는 성도는 일곱째 바르게 버리는 성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아끼던 것도 마지막에는 다 버리고 갑니다. 죽은 사람은 손에 힘이 다 풀려 있어서 아무리 꼭 쥐고 죽었어도 놓아버리고 맙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쓸데없는 것을 욕심내어 붙들고 있다가 놓치지 말고 모두 다 드리고, 모두 다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치거나 구제를 위해서 드리거나 되받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버리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버릴 것을 바르게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사진 찍기를 싫어합니다. 얼굴에 주름살이 많고 머리가 희어져서 사진을 보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는 사진을 찍어봤자 그것을 보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잔뜩 찍어서 쌓아놓고 죽으면 나중에 자식이 부모의 사진이라고 그것 차곡차곡 다 보관해 줄 것 같습니까? 결국 어느 날 혼자 지난 날 젊었을 때를 생각하며 눈가를 적셔가며 혼자 사진을 정리해서 불태워야 할 날이 옵니다. 사진은 몇 장만 남겨놓고 다 버려야 합니다.
사진만 그런 줄 아십니까? 성도는 버릴 것이 많습니다. 쓸데없는 욕심 버려야 하고, 명예와 사치심을 버려야 하고, 이 세상에 대한 기대도 버려야 합니다. 앞으로는 과학이 더 발달하니까 더 살기 좋아질 것 같습니까?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가 좋았습니다. 이 세상은 갈수록 험악해집니다. 물질 욕심도 버려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물질과 생명을 다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5). 성도들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버리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버림을 의미합니다. 되받으려는 투자가 아니라 아예 버리는 심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손해 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바나바는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다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재물이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가기 전에, 몸이 다 쇠하여져서 아무 쓸모가 없어지기 전에 다 주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다 드리는 사람은 참으로 부요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교회 김정숙 성도님은 이북에서 월남해서 여기에 연고가 한분도 없는 분인데, 나이 많고 몸이 약하고 가난합니다. 그분이 임종이 오기 전에 드린다면서 전세문서를 교회에 바쳤습니다.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버리고 바치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짜피 버리는 것 옳은 일에 버리듯이 바쳐야 합니다.
오늘 아침 담임목사가 바라는 성도의 모습 일곱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하는 성도, 기도에 힘을 다하는 성도, 전도에 생명을 다하는 성도, 봉사에 몸을 다하는 성도, 구제에 물질을 다하는 성도, 교제에 마음을 다하는 성도, 그리고 드림에 버림을 다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평가해 보셨습니까? 몇 가지나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족한 것이 많이 있습니까? 한해가 지나갑니다. 그러나 다시 기회가 주어집니다. 새 해에는 정말 잘해봅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옳고 가장 착하고, 가장 복 받을 만한 성도로 성도를 섬기며 주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합시다. 그러면 후회할 것 없는 바르고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더욱 더 강건해지는 생활
엡 3:14-21 / 피종진 목사
오늘은 “더욱 더 강건해지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몸에 좋은 약을 복용하기도 하고, 등산이나 조깅도 하며, 또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자기의 건강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16절). 여기에서 ‘속사람’이란 속에 있는 영적인 사람으로 영혼이 잘 되어야 범사가 잘되고 육체도 건강하게 됩니다(요삼 1:2). 더욱 더 강건해지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 성령님을 항상 내 안에 모셔야 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6) 성령님을 항상 모시고 사는 사람은 성령께서 항상 더욱 더 강건해지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십니다. 성령님은 ①우리 가운데 믿음의 역사를 일으켜주십니다(고전 12:3). ②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십니다(롬 8:2). 사람은 누구나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질병에 포로가 된 사람은 질병에 벗어나서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은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③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십니다(엡 3:16).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말미암아 연약하고 탈진 상태에 있는 영혼들이 강건해지고, 환난과 시험 중에서도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항상 내 안에 모시고 생활해야 됩니다. 얼마나 많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소유하고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안전과 축복으로 여러분을 이끌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내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이 지켜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④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갈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입니다. ⑤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 16:13). ⑥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게 하십니다(고전 2:10).
둘째, 믿음의 부요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히브리어에 보면 ‘신임한다. 의지한다, 소망을 둔다.’라는 의미이고, 헬라어에 보면 ‘기대한다. 맡긴다. 받아들인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 11:1).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롬 10:9). 믿는 자들에게는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 고침을 받는 표적이 따르며((막 16:17~18)),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막 9:23). 고린도전서 16:13에 보면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빈약하면 모든 것이 약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오직 믿음이 무기입니다. 존 칼빈은 ‘믿음 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말했고, 일본의 가까마 요모꼬는 ‘믿음은 사탄을 막는 최강의 무기’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을 사탄이 제일 무서워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사탄이 자기 부하로 생각합니다. 믿음이 강할 때 사탄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됩니다(엡 3:17).
우리는 특별히 믿음의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부자가 되고 재물의 부자가 되어야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재물의 부자만 되면 교만하여 허랑방탕한 삶에 빠지기 쉽습니다. 헤롯은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한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행 12:23).
셋째, 하나님의 말씀의 무장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하나님의 말씀의 무장이 있는 자는 강건하여 승리자가 됩니다. 요한일서 2:14에 보면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흉악한 자를 이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미움, 시기, 걱정, 근심, 불안’ 이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 있으면 흉악한 자가 우리를 이기는 것입니다.
또 예레미야 23:29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같이 굳은 마음, 교만한 마음도 부스러뜨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말씀을 들은 자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죄를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는 인간이 번민하는 90%의 이유는 성경을 읽지 않는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읽음으로 강건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을 항상 여러분 안에 모시고, 믿음의 부요한 자가 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더욱 더 강건해지는 생활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의 기도(3)
엡 3:14-21 / 박덕기 목사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한 내용들은, 영적인 점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기를 기도하였고, 다음으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셔서, 사도 바울 자신이 고백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에베소 교인들이 살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늙고 시들고 점점 후패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속사람이 오히려 날마다 새로워 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제가 전에 시무하던 교회에 민은숙 집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의 시모님인 이수녕 권사님은 속사람이 아주 강건한 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권사님은 우리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분이라서, 저는 그 분에 대해 자세히 알지를 못했는데, 권사님의 발인예배 때, 그 교회 목사님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실로 큰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권사님은 91세를 향수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 분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귀는 좀 어둡더라도 하나님께서 눈을 밝게 해주셔서,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있는 신자들로 키워 달라고, 그래서 이상하고 그릇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항상 목사님께 부탁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집사로 임직을 받았을 때 그렇게 기뻐하시면서, 목사님께 “우리 아들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거동이 불편해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할 때에도, 자녀들이 드린 용돈을 모아 두었다가, 목사님이 심방을 오시면 그 동안 드리지 못했던 헌금을 전해드리고, 그리고 어려운 성도들을 도우라고 구제헌금을 남몰래 목사님 손에 쥐어드리곤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감동을 받은 것은, 그 교회 목사님이 예배당 건축하는 일을 앞에 두고, 교인들 형편을 생각하면서 망설이고 있을 때, 오히려 팔순이 넘은 노 권사님이 “목사님! 교인들에게 성전 건축의 비전을 제시해주셔야지요” 하면서 자주 격려하여 큰 용기를 얻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새 성전을 지어 이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권사님의 신앙을 회고하면서, 그 교회 목사님은 이제 누가 그 자리를 메워 줄 것인가 몹시 아쉬워하는 것을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 같은 권사님의 속사람이야말로 90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강건한 분이었다고 확신이 되어 집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처럼 신앙이 훌륭한 권사님들이 배출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해 봅니다.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세 번째 기도는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거하시는 결과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한다는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첫째는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하게 하며, 둘째는 한 건물을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라고 할 때에, 우리는 작은 비바람에도 뽑혀지는 어린 나무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반대로 뿌리가 사방으로 뻗혀 단단한 땅과 바위를 뚫고 땅 속 깊이 박혀져, 어떠한 강풍에도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를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을 나무에 비유한 것은, 나무는 생명이 있고, 성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터가 굳어져서’라고 할 때에, 우리는 견고하고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진 거대한 건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삼풍백화점처럼 붕괴되는 건물이 아니라, 강한 압박과 충격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건축물을 생각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은 마치 커다란 빌딩이 깊고 단단한 토대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랑의 터 위에 건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물이 크고 높을수록 기초는 더욱 더 중요하게 됩니다. 만일 나무판자 집이나 임시 건물을 세우려 한다면, 기초에 대하여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마천루나 중력이 큰 대형 건물을 세우려 한다면, 굳건하고 견고한 기초는 절대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참된 힘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흔히 약하고 여성적이고 감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강합니다. 아 8:6에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고 했는데, 사실 참 사랑은 죽음보다 더욱 강한 면이 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 동안의 머슴살이를 해야 했지만, 그 고달픈 세월들이 불과 수일처럼 여겨졌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라헬에 대한 그의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불굴의 전도자로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쉴 사이 없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넜으며, 끝없는 박해와 모욕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힘든 전도여행과, 핍박과 투옥의 고통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 도다.”라고 한 그의 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과연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혔고, 터가 굳어진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변하는 것을 알면 같이 변하고/상대방이 식어지면 따라 식는 것/그것은 사랑이 아니랍니다./ 폭풍우가 세차게 불어 닥쳐도/굳건한 반석처럼 끄떡없는 것/그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흔들리며, 변덕스럽고, 돌변하는 사랑은 정욕적이며, 본능적인 사랑이지, 성경이 가르치는 아가페가 아닌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올 때의 해변의 광경을 본 일이 있습니까? 파도가 절벽이나 바위에 부딪치는 광경을 본 일이 있습니까? 그 파도는 뒤로 물러갔다가는 다시 더 강한 힘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바위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바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끄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과연 이렇게 견고합니까? 어떠한 시험과 환난의 비바람에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까? 주님께 대한 사랑의 뿌리가 깊고 터가 굳어진 신앙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 힘겨운 고난의 날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여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은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커다란 단점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도대체 얼마나 넓은 것 같습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주님의 사랑의 넓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 5:9에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했고, 11절을 보면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했습니다. 계 7:9에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고 했습니다. 찬송가 317장의 작시자는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주님의 넓은 사랑에 대하여 아십니까?
이번에는 주님의 사랑의 길이에 대하여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에 관하여 읽게 됩니다. 렘 31:3을 보면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주님의 무궁한 사랑을 아십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창세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이 사실은 참으로 지극히 놀라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 무궁하신 사랑인고로, 그 사랑은 영원토록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고, 또는 우리를 잊어버리셨나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길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근심이나 문제나 시련이 닥쳐오고, 어려움이나 실망과 마주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으십니다.
FOOTPRINTS라는 다음과 같은 감동 깊은 英詩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모래 위에 두 짝의 발자국을 보았네./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내 삶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자주 내 삶의 길에/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보았네./그 때는 내 인생이/가장 비참하고 슬픈 계절이었네./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약속하셨지요?/그러나 보십시오!/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그 때 거기에는/한 짝의 발자국밖에는 없었습니다./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지요?/주님께서 대답하시었네./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들아/나는 너를 사랑했고/너를 결코 떠나지 않았단다./네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네가 본 오직 한 발자국 그것은/내 발자국이니라./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다음으로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빌립보서 2장을 보면 주님의 사랑의 깊이가 어떠한 것인가를 조금은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사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생명의 창조자요, 만물의 창조자이신 주님께서, 죽어 무덤 속에 장사 지낸바 까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 모든 일을 하셔야만 했습니까? 놀랍게도 그 대답은, 여러분과 저를 위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서였습니다. 즉 그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깊이입니다! 다른 설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들을 죄인들을 위하여, 그의 원수 된 우리들을 위하여, 사악하고 죄로 가득한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무 가치가 없는 인생들을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사랑의 높이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대부분 주님의 구원을 죄의 용서라고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러나 여기에서만 멈춰버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버릴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목적이시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모든 축복과 기쁨을 나누어 갖기를 갈망하는 것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가 그 분의 영원한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를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위한, 그리고 주님께서 사랑하는 우리를 위한 계획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영혼과 육체가 다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조그만 흠도 결점도 주름잡힌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완전하고 완벽하게 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높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한결같이 믿음이 자라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이 자라날 수 있습니까? 다른 비결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길밖에 없습니다. 즉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만큼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만큼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헌신하게 되고,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사랑의 문제이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천재 못지않게 탁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았던 성도들이 부른 찬송가를 보십시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주 달려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와라. 내 머리 주 앞에 조아려 하는 말, 내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주 예수 사랑 못 잊어 나 항상 눈물 흘리네. 이 세상 어디 가든지 내 주만 생각하도다.” 이렇듯 대부분의 찬송가가,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은 성도들이, 그 은혜에 감격하여서 부른 신앙고백들인 것입니다.
금년 들어 벌써 4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금년에도 우리 모두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신앙의 열도, 신앙의 강약, 충성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주일 성수, 봉헌 생활 등등..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만큼 정비례합니다.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바라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의 가장 소중한 왕좌에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해주시기를 바라며, 사랑 가운데서 신앙의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앞서 간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 주님께 더욱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