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안 샤비시 저자(글) · 이세진 번역
교양인 · 2024년 05월 22일
‘남자는 쓰레기다’라고 말하면 성차별인가?
2017년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군 ‘남자는 쓰레기다’ 해시태그 운동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남성의 강간·폭력 문화를 폭로했다. 그러나 곧바로 문제 없는 ‘평범한’ 남자들까지 싸잡아 욕한다는 거센 비난을 받았고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라는 반발에 직면했다. 논의의 중심을 문제 있는 남성에서 문제 없는 남성으로 교묘하게 옮기는 전형적인 논점 이탈이자 주의 흐리기 전략이었다. ‘남자는 쓰레기다’가 ‘혐오 표현’이라면 ‘어떤 남자는 쓰레기다’라고 고쳐 말해야 하는 걸까? ‘남자는 쓰레기다’라는 말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
암호화된 혐오 ‘도그휘슬’, 감춰진 혐오 ‘무화과잎’
‘도그휘슬’과 ‘무화과잎’은 차별과 배제를 선동하는 이들이 취하는 간접적인 말하기 방식인데, 타인의 정치적 견해를 은밀히 조종하는 힘을 갖고 있다. ‘도그휘슬’은 언뜻 평범한 말처럼 들리지만 특정한 사람들만 알아듣게끔 정치적 메시지를 암호화하는 것을 뜻한다. 보수 정치인들이 ‘자유’를 거듭 강조함으로써 사회주의적 가치를 표방하는 세력을 배제한다는 신호를 보내거나 ‘불법 시위’라는 말로 집회의 당사자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식이다. 한편 ‘무화과잎’은 “나는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나는 이슬람 친구가 많지만…” 하고 덧붙이는 말인데, 자기 발언에 담긴 공격성을 은폐하거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교묘한 술수다. 이들은 혐오의 말을 내뱉으면서도 뻔뻔하게도 혐오주의자라는 혐의는 피하려 한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말은 왜 문제적인가?
2020년 백인 경찰의 과격한 진압으로 인해 비무장한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 남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가 거세게 일었고, 그 영향은 전 세계로 퍼져 반(反)흑인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잇따랐다. 반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점차 힘을 얻자, 이 구호에 반대하는 이들이 나타나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인종차별은 극복되었고 우리가 ‘탈인종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피부색을 따지는 것이 오히려 분열을 자초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구호는 사실상 다른 생명, 특히 백인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는 뜻을 내포한다고 주장했다. 왜 백인들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말 속에서 백인에 대한 배척을 읽어내는 것일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가 담고 있는 함의는 무엇일까?
‘정치적 올바름’은 좌파의 독단주의인가?
‘정치적 올바름’은 흑인, 여성,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 표현과 차별 행동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정치적 행동을 가리킨다. 대표적으로 영어에서 흑인을 비하하는 ‘검둥이’라는 뜻의 인종차별적 비방인 ‘니그로(Negro)’, ‘니거(Nigger)’라는 단어를 피하기 위해 ‘N단어’로 지칭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의 ‘과도한’ PC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문화 전반을 경색시키는 ‘독단주의’라고 비판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군중의 광기”(더글러스 머리), “좌파의 집단주의”(조던 피터슨)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표현이 자유로워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혐오 표현을 막는 금기어를 늘린다고 해서 문화 전체가 경색되고 전체주의로 흐를 것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지나친 비약이자 논리적 오류(미끄러운 비탈길 오류)에 해당한다.
불신당하는 여성의 말
여성과 유색인종의 말은 왜 자꾸 의심받는 걸까? 신뢰에는 인종과 젠더에 따른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특정 집단은 지나치게 신뢰받고(신뢰 과잉) 다른 집단은 툭하면 의심받는다(신뢰 결여). 신뢰받는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존중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을 키우지만, 반대로 불신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신뢰를 배분하는 방식을 근본부터 제대로 돌아봐야 한다. 특정 집단만 무비판적으로 믿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이미 그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신뢰를 내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탄소 발자국’이라는 사기극
개인이 직‧간접적으로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 총량을 가리키는 ‘탄소 발자국’ 개념은 기후 위기 시대에 환경적 정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 수치에 따라 자가운전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육류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지향하며 찬물로 세탁하는 일에 사람들이 점점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탄소 발자국’ 개념은 구조의 결함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기 위해 글로벌 석유 회사가 의도적으로 대중화시킨 것이다. 공정 무역 커피, 친환경 세제, 자선 단체 기부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죄의식을 자극해 사회적 시스템의 결함을 가리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장을 창조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마케팅이었다. 하지만 개인이 끼치는 기여가 미미하고 지배적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기후나 빈곤 문제에서 개인의 책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평등한 구조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