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말하자면 아는 마음을 보는 명상입니다.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에서 마음을 새로 내서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미얀마 쉐우민 수행처의 방식을 따라하고 있는데 사야도의 말씀을 빌려 묘사해 보자면,
아는 마음을 본다, 나중에 일어난 마음이 먼저 일어난 마음을 본다, 마음을 새로 내서 본다 등이 있습니다.
마하시 수행처에서도 수행 중 호흡이 사라지는 단계에 이르면 앎을 보라고 한다는데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카페에도 올라온 글인데 지산 스님이 쓰신 글 중에 ( https://m.cafe.daum.net/asavi/4vpF/355?svc=cafeapp )
선종의 달마 대사의 관심일법 총섭제행, 4조 도신 스님이 가르친 마음 관찰법, 일본 조동종의 묵조선, 티벳불교의 족첸 수행 등이 쉐우민 수행법과 비슷하다고 언급하시네요.
아래 글에서도
"John Dunne이라는 불교학자가 불교 명상을 크게 Classical하고 Non-dual로 나눈 적이 있는데 Classical은 경전과 논서에 입각한 명상으로 주류 테라와다의 위빠사나 명상/티베트 불교의 샤마타, 분석명상이 해당되고
Non-dual은 비이원적인 알아차림을 중시하는 명상으로 중국, 일본, 한국의 선불교/티베트 밀교의 족첸, 마하무드라/태국 숲 속 전통이 해당됨. 근데 티베트 불교나 태국 숲 속 전통은 Classical과 Non-dual을 병행해서 수행하기도 함."
선불교, 족첸, 마하무드라, 태국 숲 속 전통 수행법이 비슷하게 묶인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류 테라와다의 위빠사나 명상이란 쉐우민보단 파욱 수행처 혹은 청정도론의 16가지 위빠사나 지혜 단계들을 중시하는 미얀마 수행처들을 말하는 거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하무드라도 나로빠 6법에 포함되는 뚬모 수행, 환신 수행 등 보단 비이원적 알아차림으로서의 마하무드라 수행법을 말하는 거 같네요.
분노는 분명 어떤 행온과 상온의 결합니다. 그리고 상응한 수온이 함께 합니다. 이론적으로요. 우리가 힘에 초점을 맞추면, 분노라 이름하는 행온이 알려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악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요. 거기에는 분노라 이름할 힘이 없어요. 분노와 함께 하는 수온에 초점을 맞춘다면,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 알려질 뿐입니다.
비유하자면, 코끼리가 있는데, 코끼리의 다리와 코 그리고 꼬리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분노라 이름할 행온과 상온과 수온의 덩어리가 있는데, 우리가 굳이 분노라고 이름하는 이유는 그 힘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힘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분노라 이름할 수 없게 됩니다. 즉 통상 우리가 분노를 안다고 하는 거는, 그 힘을 대상으로 하는 거예요. 힘을 대상으로 하지 않을 때는 굳이 분노라 이름하지도 않고, 분노라고 알지도 못합니다. 유쾌하지 않은 느낌을 분노라고 하나요? 힘이 작용한다는 파악작용을 분노라고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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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논점으로 돌아가, 님이 주창한 양으로 승부하는 알아차림을 소개하는 분들에게 질문해 보세요.
너네들은, 푸른색을 결정하는 파악작용등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니?
그러한 미세작업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불가능합니다.
상좌부 수행에서 사마타든 위빠사나든 대상 없는 수행은 없습니다.
순수 위빠사나를 닦을 때 나타나는 집중을 찰나삼매라고 표현합니다.
방문객님이 말하는 푸른색을 결정하는 파악작용을 알아차림과 수행처의 (아는 마음을) 지켜보는 마음으로서의 알아차림은 다릅니다. 아는 마음은 수행 중에 활용하는 마음 작용으로서 명확하게 드러나거든요.
아니... 자기의 수행을 알려면, 그쪽의 수행법을 보라고 해놓고서는 또 딴소리 하시네...
그러니 님이 위에서 자신의 방식이라고 소개한 쪽에 가서 너네들이 하는게 그거냐고 물어보시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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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분명하게 적습니다.
법무아님은 양을 얼만큼 실현했나요? 그냥 대상을 아는 일만 얼마나 했나요?
그 대상을 가지고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리지 않고 그냥 일상의 님의 조건에서 알려지는 대상들의 알려짐만 있는 상태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했습니까?
그냥 대상만 아는 것을 하다가, 어떤 분명한 앎이 생겼습니까?
님이 적는 글을 보면, 위에 적었듯, 양으로 성립하는 쪽의 결론을 그냥 현실에 적용시키는데 마음을 썼을 뿐입니다. 님이 힘을 쓴 곳이 그곳이구요. 그처럼 방향성을 띈 힘은, 그 방향에 상응한 무엇을 형성합니다.
님은 알아차림을 한 것이 아니구요, 양으로 승부하는 알아차림 계열에서 제시한 결과를 현실에 덧씌우는데 힘을 썼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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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무엇을 했는지는 님 스스로 알 거예요. 자신이 했던 바를 솔직하게 바라보세요.
이거 정말 돈 되는 거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자신이 한 것에는 정말 솔직해야 합니다. 넘한테 고백할 필요는 없어요.
1주일 했는지, 1년 했는지, 10년 했는지보다 수행의 결과로서 체크할 수 있습니다. 니까야에도 법문 듣자마자 해탈하는 수행자가 있고 평생을 수행해도 아무런 성취가 없어 자살 직전까지 가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수행의 척도는 일상에서 탐진치가 얼마나 해결됐는지, 자비의 실천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지 등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미얀마 테라와다 수행법을 알고 싶어하지도, 잘 알지도 않는 분이 그 쪽 가서 너네들이 하는 게 그거냐고 물어보라는 건 허황된 말일 뿐입니다.
그리고 최소한 불자라면 테라와다든, 티벳불교든, 선불교든 그 쪽의 법맥을 이어온 곳에다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기본은 삼보에 대한 귀의입니다.
그러니까 님의 수행법이라고 소개했지만 정작 자신은 얼마 하지도 않았잖아요... 님이 위에 적은 내용이 이미 그런 고백이잖아요.
정말 돈 안되요... 님이 한 것을 저에게 알려줄 의무도 없구요, 그냥 스스로 아세요.
스스로 알고, 스스로 알기에 부끄러운 행동은 그냥 자제하면 그만입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수행의 척도는 스스로 드러냅니다. 댓글도 포함해서요.
정작 하지도 않아놓고 그쪽의 결론만 취한 다음 이리 저리 끼워맞추면서, 수행은 결과로 말한다고 하면요. 그건 좀 심한 거에요.
수행은요... 그 과정이 곧 지혜입니다. 과정을 떠나 지혜를 논할 수 없습니다. 행위와 과보는 따로국밥이 아닙니다.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검색해보세요.
살면서요. 그런 오류가 뭔지 몰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는 소리는 별로 들은 적이 없습니다. 종교 등이 없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말입니다.
돈 안되지만 소중한 거... 그거는요... 정말 업이 쌓인 거예요... 보통 버릴 방법조차 모르고, 알아도 도저히 버릴 수가 엄는 거지... 그러니 덧씌움에는 너무 업을 쌓지 말아요. 그런 덧씌움 잘한다고, 친구가 커피 한잔 사주지도 않잖아요.
제가 카페에선 본, 회원들과 감정적으로 논쟁하던 모습이랑 현실은 다르신가 보네요. 다행입니다.
제가 현실에서도 화를 좀 냅니다. 그래도 친구들이 억지를 부린다고는 안하더라구요. 고마운 거? 커피 대접 해야겠네. 하하하
전 현실에서 화 거의 안 냅니다. 내면에서 발생할 땐 종종 있는데 표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몇 달에 한 번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