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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건 무슨 사서건 연도를 정확히 읽는 것이 정확한 해석의 전제 조건입니다. 일본서기 연도는 5세기 중반 이전만 정확히 읽으면 됩니다.
knjpark님께서 일본서기 고왕조에 관하여 글을 올리셨기에 고왕조 창업자라는 숭신천황의 즉위와 퇴위 연도를 알아보겠습니다. 결론인 연도부터 쓰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연도 증명이 안 되면 다 허상에 불과합니다.
<서기><왜><신라>
100, 숭신1, 파사21, 숭신 즉위
101, 숭신3, 파사22
102, 숭신4, 파사23
103, 숭신5, 파사24
104, 숭신6, 파사25
105, 숭신7, 파사26
106, 숭신8, 파사27
107, 숭신9, 파사28
108, 숭신10, 파사29, 4道장군을 전국에 보내 자신이 왜국 왕임을 알림
109, 숭신11, 파사30
110, 숭신12, 파사31
111, 숭신17, 파사32
112, 숭신48, 지마1
113, 숭신62, 지마2
114, 숭신62, 지마3
115, 숭신65, 지마4, 숭신이 죽어 임나에서 후계자 결정을 위하여 소나갈질지 일행이 도착
116, 숭신68, 지마5, “임나는 계림의 서남쪽인데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 [신라]김해가야를 공격
117, 수인1, 지마6, 수인 즉위
118, 수인2, 지마7, 소나갈질지 일행이 비단 100필을 받아 임나로 돌아가다 신라 수군에게 붙들려 뺏김.
119, 수인3, 지마8
120, 수인4, 지마9
121, 수인5, 지마10, [신라]부산반도에 대증산성 축조, [신라]왜가 (대증산성의) 동쪽을 공격.
122, 수인7, 지마11, [신라]봄3월 왜국과 강화 - 부산반도 철수(신라는 6세기에 다시 부산에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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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동이전은 왜국조에서 2세기 후반 야마대(야마토) 여왕 비미호의 출현 이전을 다음처럼 3단계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세기에 왜국에서 온 비미호의 사신을 통해 안 정보로 보입니다.
1. 남왕이 70~80년을 통치하였다.
2. 남왕 통치가 끝나고 대란이 발생하였다.
3. 대란이 끝나고 여왕이 등장하였다.
당시 왜국에는 수 십개 소국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비미호가 238년에 위나라로부터 왜왕(친위왜왕) 책봉을 받아갑니다.
1세기 초에 마한이 목지국에게 멸망하자 한반도 남부에 힘의 공백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1세기 중반에 가야제국이 일제히 건국되는데 김해의 남가야는 42년 건국입니다. 부산의 임나가야 건국도 이 무렵일 것입니다.
당시 김해평야가 바다라서 부산은 동서로 길게 뻗은 반도였고 서쪽 끝에서 좁은 바다를 건너면 김해였습니다. 부산에서 금성(경주)을 갈 때는 배를 타고 북상하였습니다. 당시 경주는 김해바다 최대의 내륙항구로 흑해의 이스탄불이나, 지중해의 바르셀로나에 해당하는 가장 좋은 전략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퇴적물이 쌓여 김해바다가 메워지고 김해평야로 바뀌는 것은 4~5세기로 400년에 광개토왕의 고구려 기마군단이 메워진 바다를 이용하여 임나가야 종발성(부산시 초읍동)까지 내려갑니다. 5세기가 되면 신라의 기마군단이 가야의 해상군단을 압도하며 가야에서 신라로 힘의 우위가 바뀝니다.
1세기 후반에 바다를 건너 구주에 도착한 임나가야인들은 2세기 초인 100년에 자신들의 분국을 건국하니 야마대국의 출현입니다. 연도를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중국과 한국 사료로 2중 검증합니다.
[검증 1]
숭신 10년인 108년을 보면 갑자기 전국에 4도장군을 보내 자신이 왜왕임을 알리고 따르지 않는자는 굴복시키라고 합니다. 즉위 직후도 아니고 10년이나 저런 행위를 한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이때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그 전 해(107)에 혹시 중원왕조로부터 무슨 책봉이라도 받았은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게 합니다. 그 전해인 107년은 후한 영초 원년입니다. 후한서를 펴고 영초 원년에 혹시 왜와 관련된 어떤 기록이 있는지를 찾아봅니다.
*<安帝><永初>元年, 倭國王 <帥升>等 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후한 안제 영초 원년, 왜국왕 수승이 생구 160명을 바치고 만나기를 청했다.) -후한서
'아, 후한에 가서 왜국왕 소리를 한 번 들었다고게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두 사서의 기록 연도가 1년도 틀리지 않고 일치합니다. 수승과 수인으로 발음도 비슷합니다. 사실 이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115년인 숭신 65년에 본국에서 소나갈질지 일행이 오는데 숭신이 죽자 분국을 통치할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숭신은 만 15년(100-115) 재위하였고 일본서기는 50년을 연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숭신이 120세로 죽었다고 했는데 연장한 50년을 빼면 70세 무렵 사망이므로 이 역시 매우 합리적입니다. 70세 사망은 85세 경에 돌아가신 수로왕보다는 짧지만 별로 이상한 것이 없습니다.
115년인 숭신 65년조에 임나는 계림(경주)의 서남쪽이며 북쪽이 바다로 막혔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부산반도를 정확히 표한한 것인데, 만일 섬이라면 島라고 하지 저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검증 2]
제3자로 기록된 수인은 원래 왕이 될 입장이 아니었으나 본국인 임나에서 그를 후계자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에 감사한 수인은 118년에 소나갈질지 일행이 돌아갈 때 비단 백필 등 엄청난 선물들 주어 보내는데, 돌아가다가 부산 앞바다에서 신라 수군에게 붙들려 선물을 다 뺏기는 외교문제가 발생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에 밀리던 신라가 116년부터 반격합니다. 임나와 가야는 동서로 위치한 형제국(任那.加羅.併在國)으로 그 사이인 부산반도 서쪽 끝을 점령하면 두 나라를 갈라놓게 됩니다. 이때 신라는 부산반도 서쪽 끝의 전략 요충지를 점령한 것입니다. 115년에 소나갈질지 일행이 부산에서 구주로 갈 때는 아직 신라군이 내려오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산반도 상황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 118년에 부산으로 돌아가는데 부산 앞바다에 신라 수군이 딱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부산반도를 점령한 신라가 안 나가고 아예 대증산성을 쌓고 정착하려고 합니다. 121년에 산성이 완공되자 임나는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군대를 보내 대증산성을 공격하여 신라군을 쫒아내려고 했는데 안 됩니다.
그러자 다음해인 122년에 두 나라가 봄3월에 화친합니다. 봄에 화친하는 것이 삼한사회의 가장 중요한 국가 기본구조입니다. 당시 삼한사회는 여러 소국들이 즐비하였는데, 여러 소국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려면 군사력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주변의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소국과 혼인하여 동맹을 맺고 이를 주변 후왕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부여에서 온 농경민족 풍습으로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건국한 신라에는 없었습니다.
신라와 임나(신라본기의 왜)는 국혼을 통하여 동맹관계를 맺는데, 이로부터 207년까지 거의 1세기 동안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없습니다. 임나는 부산반도에서 신라군을 철수시키고 임나왕은 가야사회 전체의 대왕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라는 지마이사금의 딸이 임나의 왕비가 되어 임나의 국정에 영향을 미쳐 평화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봄에 혼인해야 하는데 기후가 가장 좋은 3월을 선호하였습니다. 3월에 왜국을 떠난 청혼 선단이 배에 엄청난 보물을 싣고 3월에 신라 수도인 금성(경주)에 도착하면, 3월에 왕비 후보감을 골라 답례품과 함께 친척들까지 배를 타고 왜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왜국에 돌아와 3월에 거창한 혼례를 올리고 자신이 가야사회의 지배자임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모든 가야제국은 3월에 임나왕의 신민이 되는 것입니다. 함께 온 왕비의 친척들에게는 관직을 주어 임나의 지배층으로 흡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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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써보면 숭신 원년이 100년이고 10숭신-11수인-12경행-13성무-14중애까지인데 중애 9년이 173년입니다. 즉 야먀도국은 5왕이 74년 통치하였습니다. 따라서 남왕이 70~80년 통치하다 대란이 발생하였다는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은 믿을만 합니다.
173년에 중애가 죽고 대란이 발생하자 본국인 임나를 두려워한 중애 왕비였던 비미호가 신라에 구원을 청합니다. 이 사건이 삼국사기 아달아이사금 20년조에 나오는데 연도가 정확합니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박씨에서 석씨로의 교체기라 비미호의 청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20년(173), 여름 5월, 왜여왕 비미호가 친선 사신을 보내왔다.
중애가 죽은 것이 2월이므로, 3월 정도에 대란이 발생하고, 비미호의 사신이 신라에 오는데 1~2달 걸린다고 보면, 5월에 비미호의 사신이 왔다는 신라본기의 기록은 달까지도 믿을만 합니다.
6년동안의 대란이 끝나고 179년에 비미호가 왜왕에 즉위하니 이것이 신공황후 원년입니다. 비미호는 69년 재위하고 247년에 죽는데 이 해가 신공황후 말년입니다. 이때부터를 전기고분시대라고 하는데 390년에 응신이 출현할 때까지가 일본사의 공백입니다. 일본서기 편자들은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247년에 죽은 비미호를 22년 내려 269년으로 만들고, 390년에 즉위한 응신의 즉위년은 120년 올려 270년으로 만들어 이 둘을 이어 붙었습니다.
비미호 즉위 전에 있던 왜국 대란 6년은 삭제한 후, 173년에 죽은 중애를 179년에 즉위한 비미호 앞으로 연결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서기에는 174~178년이 없고, 신공황후 원년이 비미호가 즉위한 179년입니다. 학계통설은 왜국 대란이 끝난 것이 180년 무렵이라고 하는데 합당한 추론입니다.
제가 knjpark님께 일본서기에서 전기고분시대인 비미호와 응신 사이(248~389)의 사건 기록을 하나라도 찾아 보여달라고 하였는데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전기고분시대에는 일본에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역사를 기록할 사관도 없었고... 아직까지 어떤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도 전혀 없으며, 중국사료에도 비미호 직후의 일여까지만 있고 이후 전기고분시대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따라서 만일 하나라도 발견하면 동양 고대사의 엄청난 업적이 될 것입니다.
전기고분시대가 끝나고 일본에 국가가 출현하는 중기고분시대는 고구려군의 잔국토벌 다음해인 397년으로 삼국사기가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 여름 5월, 왜국과 더불어 우호를 맺고 전지태자를 볼모로 보냈다.
이것이 5세기 왜5왕으로 알려진 왜국의 건국기록입니다. 397년이라는 연도는 물론이고 5월이라는 달까지 정확합니다. 백제본기의 입장에서 그 전에는 왜국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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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에 아마 칠지도 이야기하시는 분이 나올텐데, 칠지도는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삼국사기에도 나오고, 삼국유사에도 나오고, 후한서에도 나오고, 삼국지에도 나오고,... 그리고 모든 사서의 내용이 동일합니다. 칠지도를 얼마나 이해하는지를 알려면, 고고학적 칠지도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고 가정하고, 한중일 사서만 보고 칼 표면에 나올 수 있는 글자를 예측해 써보는 것입니다. 20글자 이상 쓸 수 있으면 칠지도 전문가입니다.

첫댓글 반갑습니다 과거와 미래님.
제가 생각하고 있는 기년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군요.
조만간 제가 생각하는 고왕조 기년을 정리해서 올려보도륵 하겠습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