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집 외 1편
김영서
이사 온 지 20년 넘었다
철제 현관문은 삐그덕거리고
화장실은 스위치를 두 번 눌러야 불이 들어온다
아침에 약을 먹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한나절이 지나자 몸이 나른해진다
약봉지를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약은 걸러도 할부금을 15년 동안 꼬박 지불했다
이웃집에서 문을 두들겼다
그러고 보니 초인종도 고장 났다
버섯을 땄는데 먹어보라고 건넨다
나도 이웃집 문을 두들겨보았다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초인종을 고치지 않기로 했다
대출금 연장을 위해 농협에 들렀다
주민등록 초본을 떼어 오라고 했다
집 주소가 나란히 찍혀 있다
셋방살이 전전하다 여섯 번째 주소지다
집이 낡았어도 다시 이사할 일 없어 다행이다
천천히 뜯어보니 모든 것이 낡아 있다
돌아누운 아내 등을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집이 흔들릴 것 같은 공명이 몸속으로 울렸다
오래된 집에서 늙어가는 부부는
집에 상처가 나지 않게
설렁줄을 당기며 산다
꽃 진 자리
호미 들고 설치는데 들꽃 한 송이 피었다
뽑아버릴까 하다가 손이 부끄러워 돌아서는데
어느새 벌이란 놈 달려들고
들풀은 목숨 내놓고 젖을 빨리고 있다
봄이라 여기저기 흐드러진 것이 꽃인데
밭 가운데 들꽃 한 송이 보고 찾아든 벌이나
들판에 풀어헤친 젖가슴이나
살아보자고 그러는 것이다
마침내 꽃이 지자
세상이 과묵해졌다
가끔 고추잠자리가 쉬었다 갈 뿐
깔깔대는 소리는 꽃과 함께 지고 말았다
꽃 피던 시절이 그리운 건
왁자지껄해야 세상 사는 맛이 난다는 거
모든 꽃은 한눈에 들어온다는 거
그러다가 젖이 마르면
날개를 내려놓고 쉰다는 거
마침내 들판이 조용해진다는 거
뿌리까지 삭아 없어져도
꽃이 진 자리에 봄마다
어김없이 꽃이 핀다는 거
다시 세상이 시끌벅적해진다는 거
― 김영서 시집, 『낯선 곳에 도착했다』 (삶창 / 2023)
김영서
충남 예산 출생. 2005년 계간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으로 등단. 2006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시집 『언제였을까 사람을 앞에 세웠던 일이』 『그늘을 베고 눕다』 『우리는 새로 만난 사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