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총리가 '일단 경제부터 살리고.....'라는 말을 반복하는 걸 얼핏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경제를 살리자'는 말을 들은지 어언 20년도 더 되는 것 같다. 여지껏 민생을 살피겠다는 말을 하지 않은
대통령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뻔한 캐치프레이즈에 지나진 않는 '경제 살리고'도 자주 듣다 보니
식상하고 별반 기대도 되지 않는다. 한편 '경제 살리고'에 허물어진 우리나라의 도덕과 윤리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 논리가 지배할 때 나머지는 불평 불만의 선동에 지나지 않는 최고 가치로 등극한다.
따라서 조선 민족은 어쩌면 '경제 살리고'에 영혼을 팔아 먹었는지도 모른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이 나라의 많은 백성들에게, 그를 왜 뽑았는지 묻는다면 어쩌면 깊은 속마음에
그가 대기업 사장 출신으로, 경제와 장사에 도가 튼 인간이기에 잘하리라 믿었던 마음 한 구석이 있었으리라
본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온백성이 4대강 개발에 반대했지만 강행했고, 그 후유증과 유지비만 해도 천문학적이고
해외자원을 개발한다고, 공기업 몇 군데에서 또 천문학적인 금액을 날려 먹었다고 한다. 그에게 뭐가 없어서
이 꼬라지로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머리일까, 양심일까, 윤리일까....
노무현이 불쌍타. 그가 재임시절 방송언론, 대기업 재벌, 새누리당, 정부 할 것 없이 상고 출신 촌놈이
뭘 하겠다고 하며 온통 흔들어 놓았다. 노무현이 잘하고 못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도 실수나 미숙함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이 사회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을까'하는 하나의 강렬한 지향점은 있었고
그는 어쨌든 여기에 충실했지 않았나 싶다. 한국, 앞으로 몇 십년 간 더 '경제 살리고'를 얼마간 우려 먹을까.
인자 그 말은 치아 삐라.
실체가 없다라는 말은 적지 않는 복잡함을 감추고 있다. 영원하고 황홀한 알맹이가 없다라는 이야기로도
해석되고 결정론이나 환원론으로도 해석되고, 과정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양파처럼 껍질로 이루어진 식물은 까 보았자 더 작은 양파가 나오기 마련이고 그걸 하나 하나 껍질을 벗기면
최후에는 양파가 없어진다. 불교 무자성 원리를 이러한 양파 논리에 가져다 붙이는 사람도 있고, 물리학의
장(field)이나 에너지로 해석해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오온 논리로 실체화 없음을 증명하는 걸
샘플로 삼았는데, 이는 뜯어 보니 요소만 남았고, 그 요소에는 실체가 없더라는 식으로 결론을 도출한다.
나중에 논리를 확장시켜 하나 하나의 요소도 살펴보니 실체가 없더라가 되어 최종최후에 뭐든지 실체가 없더라는
방점을 찍는다. 이 논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교가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론이나 결국 허무적 효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분해하면 엔진, 바퀴, 벨트 등으로 분해 되지만 그 부품들에는 자동차라는 실체가 없고
하나하나 낱개의 부품 요소도 분해해 보니 그것도 더 작은 부품으로 환원되고 그기에도 실체가 없더라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치명적 모순이 있다. 시간을 알고 싶어 시계를 분해해보니 시계 속에 시간이 없더라는
말처럼 되는 모순. 강아지를 찾기 위해 강아지를 잡아 죽여 해부하여 보아도 강아지가 없더라는 말도 된다.
즉 하나의 완결체를 이루는 요소들에 그 완결체의 의미는 없어진다. 사실 인간도 죽여서 해부해 보면 오장육부와
피와 뼈가 나오고 다른 동물과 별반 차이도 없다. 그러나 완결된 하나의 존재로서 인간은 개, 돼지, 소, 말과는
전혀 다른 완결된 속성을 드러낸다. 이걸 현대말로 하면 부분의 합은 항상 부분을 모아 놓고 그 이상의 합이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불교는 도저히 해석해 낼 수 없다는 점이다. 즉 해체가 아닌 정반대의 통합체에는
이 논리에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물리학과 화학은 과학 과목 중에서 주로 환원론의 법칙에 따르고, 생물은
정반대의 다층론적 법칙을 따른다.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해체론적 설명은 따라서 지나치게 환원론적 사고 방식에서
기인했고, 생물 진화에 나오는 세포가 세포끼리 만나 다세포가 되고 다세포가 모여 요소세포가 되고 그러한 집합과
모임이 신경계를 형성하고......그 말단의 정점에 하나의 생명이 나오는데, 불교는 밑으로는 분해 했지만 위로는
통합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을 분자적, 원자적으로 아래 단계의 끝까지 해체하고 분해하면
인간이라 할만한 실체는 없다. 그러나 하나의 인간은 비록 분자와 원자의 결합이기는 하지만, 분자와 원자적 속성을
뛰어넘어 인간적 특질을 전체적으로 구현해 내는데, 반대의 방향을 불교적 논리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딛친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실체가 없다는 논리를 극단적으로 밀어 붙이면, 부처고 깨달음이고 윤회이고 그게 아무런 소용도 의미도
없어지는 이상한 궤변처럼 보이는 측면도 생겨난다. 즉 인간은 영원히 구원 받을 수도 없고, 구원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구원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모든 게 실체 없음으로...불교는 윤회의 주체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체가
없다고 하면 윤회를 하든, 윤회를 끊든 아무런 의미도 없다. 실체가 없다고 하면.
고대 유럽인은 영혼을 '지니어스'라고 불렀는데 요즘 이 말이 천재를 의미한다. 무척 천재적으로 보이며 비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육체적으로 뛰어난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월등한 자질을 가졌기에 그렇게 불렀다. 플라톤은
지니어스 같은 영혼만이 기억을 할 수 있고, 육체와 몸덩어리는 기억을 못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죽어서
어쩔 수 없이 이 무지막지한 육체의 형상을 가질 수 있는데, 결국 이 몸덩어리를 벗어나 영혼, 지니어스 만이 무량한
자유를 얻고 다시 한 번 더 육체를 가지지 않는 게 해방이라고 생각하였다. 논리야 어떤 든.....
첫댓글 현상계에서는 선악이 엄정하고 인연연기가 작동합니다. 현상계 너머는 간택이 없는 불이에 세계라고 봅니다. 불교 말씀 중에는 현상계에 대한 가르침과 현상계 너머에 대한 가르침이 구분 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 둘을 섞어서 얘기하기 시작하면 타락을 합리화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환원론적인 해석은 전형적인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
그러니, 그러한 접근으론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