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13: 13 제일은 사랑이라. - 사랑이 제일입니다.
.
2]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이 제일입니다 : 박조준 목사
고린도전서 13장은 성경 중에 가장 많이 읽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큰 산맥처럼 몇 개의 봉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기운이 솟아나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의 신경이 곤두서고, 실망하고 낙심될 때 이 말씀을 읽으면 이 말씀을 통해서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이 말씀의 표현도 아름답습니다만, 그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 살아서 무엇 하느냐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병든 사람이 아니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고, 권력 없는 사람이 아니고, 돈 없는 사람이 아니고 바로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방언을 하거나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복음송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하나님 말씀 전한다 해도 그 무슨 소용 있나,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언, 예언, 비밀, 지식, 그리고 믿음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할지라도, 또 내 몸을 불살라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내어 준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완전한 희생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실 바울도 사랑이 무엇이라고 꼬집어서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사랑을 무엇이라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꿀이 무엇인가 말하라면 그저 “꿀은 벌들이 만들어 내는 아주 달고 끈쩍끈적한 물질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정의는 못됩니다. 꿀을 한 통 주면서 맛을 보라고 할 수 있지만 누구도 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먼저 소극적인 표현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탕자의 형과 같은 시기하는 마음이 한구석에 있습니다. 그는 먼 나라에 가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돌아온 동생을 사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동생을 얼싸안고 있는 것을 본 순간 시기심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집에 돌아온 동생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아 즐거워하기는 커녕 어두운 구석에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시기는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에게도 파고들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리비아 사막을 건너가다가 어느 성자를 괴롭히는 자기 부하를 만났습니다. 마귀들은 그 성자를 꾀어서 죄를 짓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귀들이 꾀이는 제안을 할 때마다 이 성자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때 그의 부하들이 실패하는 것을 인상을 쓰면서 지켜보고 있던 마귀 두목이 귓속말로 부하들에게 “너희들은 너무 서툴러. 내게 맡겨!” 그리고 마귀 두목은 이 성자의 귀에다 속삭였습니다. “당신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됐다는군요.” 이 말을 듣자 성자의 그 청정한 얼굴에 금방 험상궂은 시기의 표정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마귀 두목은 승리감에 찬 어조로 그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권하는 방법이 바로 이런 것이야.”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게를 담은 그릇에는 뚜껑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어떤 게 한 마리가 그릇의 둘레를 기어올라가면 다른 게가 쫓아와서 올라가는 게를 끌어내린다고 합니다. 사람들 중에도 이 게를 닮은 사람이 많습니다.
사랑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어떤 정신적인 재능을 시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흔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좋은 성품을 시기한 적이 있습니까? 그보다는 다른 사람의 지위나 부, 재능 같은 것을 시기합니다. 시기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자기 땅 옆에 붙어 있는 땅을 사지 못해서 안달이 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농부가 만족하려면 세상에 있는 땅을 다 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 자체를 생각하지 않으므로 만족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사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사랑은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시기가 동전의 한쪽이라면 자랑과 교만은 동전의 다른 쪽입니다. 두 가지가 다 옆의 사람보다 위에 서고자 합니다. 시기는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것이고, 자랑과 교만은 자신을 위에 두려는 것입니다. 사랑은 겸손할 줄 알게 하고 겸양을 여러 가지로 배우게 됩니다. 인생에서 겸양을 배우는 지름길은 고통을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에게 위를 쳐다볼 수 있도록 눕혀 놓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미덕인 겸손을 배우는 것은 이렇게 밑에서 위를 쳐다봄으로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기가 쉽습니다. 종종 우리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에 유명했던 설교가 필립 부룩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해지는 진정한 길은 어떤 높은 인격을 가진 분 앞에서 자신의 참높이를 깨닫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넓히고 높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코펜하겐에 있는 한 교회에는 소왈슨이 만든 예수님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동상 앞에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뭐, 그렇게 유명한 동상이라고 해서 와 봤더니 별거 없군”하며 실망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실망하는 모습을 눈치채고 그 동상을 아주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가까이 다가서서 보셔야 돼요. 그리고 그 동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아야 그리스도의 얼굴이 바로 보여요.”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는 주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 데는 아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꿇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셋째로,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 같으면서도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절도 있고 좋은 몸가짐 같은 아주 간단한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신사답고 숙녀다운 행동과 인품을 갖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의 바르다는 말은 가장 친절한 방법으로 가장 친절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의 바른 행동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축복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내 생활 속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찾아서 고쳐야 합니다. 아주 간단하고 작은 습성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넷째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사랑은 항상 주려 하고, 사랑은 또 항상 줄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던 길에 한 앉은뱅이 거지가 성문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구걸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직업적인 거지였습니다. 그가 알고 배운 지식은 단 하나 성전에 가는 사람은 구걸을 청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자 베드로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라” 했습니다. 베드로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고 싶어했고, 주지 않을 구실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주고자 했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믿음을 생각해 냈고, 그는 그것을 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면서 “오른손으로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때 거지는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했습니다. 사랑은 줄 때 항상 축복이 따릅니다.
다섯째로,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압니다. 앞에서 말한 탕자의 형은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왜요? 그 형에게는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말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면서 그 동생을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부드럽게 이것을 “네 동생이라”고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사랑의 관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질투 섞인 분노뿐이었습니다. 사실 버려진 아들은 형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그만둔 사람을 보세요. 대개가 어떤 기분 나빴던 일 때문에 그만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사랑의 소극적인 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엔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불평 없이 기다립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수없이 말썽을 부리는 아들의 아버지가 아들을 쫓아다니며 뒷치닥거리를 하느라 평생 번 돈을 다 써 버렸습니다. 이웃 사람이 그 아버지에게 “나는 내 아들이 그랬으면 벌써 버렸을 것이요.” 그때 아버지는 “형씨 아이 같으면 나도 잊어버렸을 것이지만 그 애는 내 아들이 아니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기다림을 배웁니다. 사랑은 음침한 골짜기가 끝이 아닌 것을 압니다. 사랑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내에는 보람이 있습니다.
둘째로, 사랑은 온유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다가 곤하여 우물가에 앉았을 때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습니다. 더구나 그 여자는 평판이 아주 좋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더러운 여자로 소문이 나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여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보시지 않는 곳에서 이 일에 대해 수군거렸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을 건네셨다는 것이 중요할 뿐 아니라 말씀하신 내용 역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대우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어느 정도 존엄성을 갖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온유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온유는 친절로 나타납니다. 친절은 행동으로 나타날 때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월리엄 젠은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나는 항상 내 인생에 있어서 지금 이 시간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친절이거나 동료 누구에게나 좋은 일을 해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뒤로 미루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없을테니까요.”
미국 사업가들 중 월급을 한 달에 1억원 이상 받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챨스 슈와브가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강철왕 안드류 카네기가 그에게 이렇게 많은 월급을 주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철강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다른 사람과의 대인관계를 잘 유지해 나갈 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은 슈와브에게 경제적인 이득만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은 만족까지도 안겨 주었습니다. 슈와브가 일흔이 넘었을 때인데 어떤 좋지 않은 사람이 그에게 귀찮은 소송을 걸었습니다. 물론 그는 재판에서 이겼습니다. 자리를 뜨기 전에 몇 마디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여 재판장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 말의 내용이 대략 이러했습니다.
“여기 이 법정에서 나는 노인으로서 내가 처한 곤경의 십중팔구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젊은이 여러분, 나와 같은 곤경에 처하지 않고 싶거든 냉정하고 차게 나가십시오. 누구에게든지, 아무에게든지 큰 소리로 ‘안 돼요’ 하고 얼른 말씀하십시오. 이것만 지키면 평생을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슈와브는 온유한 성품의 미소를 지으며 쉬었다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단 그렇게 하면 친구도 없고, 고독하고 또 아무 즐거움도 없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사랑은 완전한 답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모를 때가 너무 많습니다. 왜 불치의 병에 걸리는지, 왜 어려운 일을 당하는지, 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는지, 왜 파산지경에 이르는지, 왜 세상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지, 왜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지, 왜 사람이 갑작스런 사고로 죽어야 하는지, 그밖의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우리는 한번쯤 “왜?” 하고 묻고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확실하고 정확한 해답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습니다. 짧은 것이 있으면 긴 것이 있습니다. 강한 것이 있으면 약한 것이 있습니다. 더운 것이 있으면 추운 것이 있습니다. 쾌락이 있으면 고통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랑이란 요소를 거두어 내보세요. 정말 그것은 비극일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해가 부족함을 체험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 가운데서 힘을 얻습니다. 시편 147편 3~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다시 말하면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역시 그의 자녀 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도 관심을 기울이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나 언젠가는 우리 쪽에 유리하도록 다 해결될 것이라는 축복된 약속이 우리에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주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7절에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는 사실이 매우 고마운 일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사 미래를 뚜렷이 내다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만족할 것입니다.
넷째로, 사랑은 성장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성장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했습니다. 우리의 생에는 어린 시절보다 더 축복된 시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이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크지 않고 자라지 못한다면 이것은 비극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성장하나 성숙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린이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의 일로 웁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다른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 같으면 시기를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는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생의 모든 축복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어린이는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릴 만한 일에 흘리지 사소한 작은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면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의 아픔 때문에 우는 사랑의 눈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은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립니다. 성숙하게 자랍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마지막 절에서 절정을 이루며 이제까지 말한 사랑에 대해서 가장 완전한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오늘 사람들이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실망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모든 물질적인 재산도 어느 날인가는 다 없어질 것이고, 육신의 힘도 언젠가는 약해져 버리며 아름다움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했던 일생도 끝이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던 인기라 할지라도 침묵이 찾아들기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재물에 대한 만족이 내일도 만족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항상 있을 것,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것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영원히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것, 세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 중에 제일이 사랑입니다. 세 번째가 아니라 제일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 됩니다.
본 장의 교훈을 정리해 보자.
첫째, 사랑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다.
기독교는 단순히 은사 추구, 기적 추구의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고 그의 뜻대로 서로 사랑하는 도이다.
둘째,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고 교만치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이기적이지 않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른 지식과 믿음과 거룩하고 선한 인격과 삶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의식보다 더 중요하다.
셋째,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쳤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덕목이지만,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은 참 믿음과 소망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것이다.
|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가 건강함에 감사하고, 오늘 내가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오늘 내가 누군가를 만남에 감사합시다.
모든 일을 감사하고, 감사하다 보면 감사 못할 일이 없으며,
감사가 넘치다 보면 우리의 삶도 저절로 행복해질 것 입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