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을 주신 아버지(3)
엡 3:14-21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 설 교 >
하나님의 사랑
엡 3:16-19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우리 마음이 굉장히 흐뭇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보면 사랑이라는 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에로스라는 사랑입니다. 에로스라는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인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에로스가 없으면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로스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남녀가 서로 끌리고 서로 가정을 이루게 되고 자녀를 양육하고 사람들이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헬라어에서는 친구 간의 사랑인 필레오 사랑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는 형제보다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친구의 사랑이 사라지면 신뢰를 잃어 버리고 사회생활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필레오 사랑 친구의 사랑은 참으로 귀중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셋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는 사랑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 사랑의 너비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를 첫째 우리가 한번 알아보십시다. 여러분 우리가 평온에 가면 평온은 아주 넓지 않습니까? 그러나 평온 가운데 골이 터져서 계곡이 있으면 계곡은 좁지 않습니까? 계곡은 좁고 거기에 물이 흐르고 계곡을 뛰어 넘으면 넓은 평온이 있는 것처럼 넓은 사람의 마음은 마치 넓은 평온과 같아서 좁은 사람의 마음은 계곡과 같습니다. 아주 좁은 사람의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그러나 마음이 넓은 사람은 모든 것을 관용하고 받아들이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30절에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마음이 넓어서 평온하면 육신도 건강하고 그리고 마음에 시기가 꽉 들어차면 계곡같이 좁은 마음으로 뼈를 썩게 하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이와 같이 한없이 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으냐. 상상을 초월하지요.
여러분 요한일서 4장 7절로 9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왜 한이 없이 넓으냐. 증명된 사랑으로 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외아들을 기르는데 그 외아들을 동네나 시민을 위한 제물로 내놓으라면 절대로 내놓지 않을 것이지요. 외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도 부모의 마음이 아픈데 제물로 한 동리를 위해서 한 국가를 위해서 내놓으라면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인류들을 대신해서 짓지도 않은 죄를 대신 짊어지우고 범하지 않은 범죄를 범한 것을 여겨서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내어 주시고 우리를 건지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이 넓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사랑이 얼마나 넓으냐 하면은 모든 죄인 버림받은 사람도 찾아오면 환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뭐 저란 사람이 다 교회 나오냐? 세상이 다 아는 죄인인데 저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 하겠느냐.” 그렇게 말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가 하도 넓기 때문에 그 품안에는 모든 죄인을 다 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백인이나 홍인이나 흑인이나 유색인종이라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계층의 높고 낮은 계층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부자라고 특별히 잘 대해주고 가난하다고 멸시천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넓은 사랑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사마리아성 우물가의 여인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여자를 보고 다 손가락질 했습니다. 결혼을 5번하고 이혼을 5번하고 6번째는 오다가다 만난 남자하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기피하고 손가락질하고 죄인 여자라고 하므로 그는 아침에 우물물을 기를 수 없습니다. 아침에 여인들이 다 우물물을 기르러 오는데 하도 욕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피해서 대낮 쨍쨍한 햇빛이 비칠 때 혼자 우물가에 물을 기르러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주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사마리아 우물가에 땡볕에 앉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와서 쳐다보지도 아니하고 물을 기르는데 주님이 말을 붙였어요.
“여자여 물을 좀 주소서.” 여자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면서 “당신이 유대인으로써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나이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주님께서는 세상이 다 아는 죄인 자기도 죄인인줄 알고 예수님이 말을 붙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인 그 여자를 주님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메시아로 나타내시고 영원한 생명수를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보면 간음 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보십시다. 바라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들이 현장에서 잡은 간음하는 여인을 끌고 간 것입니다.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고 와서 예수님 발 앞에 던져 놓고 “주님이여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나이까?” 여러분 정말로 예수님이 어려운 입장에 도착했습니다. 만일 돌로 치지 말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는 자니 이단이라”고 해서 당장 정죄할 것입니다. 치라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서 땅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어깨 넘어 보았으나 뭐라고 썼다고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주님께서 쭉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이 고개를 들어 큰 사람부터 작은 사람까지 다 눈을 맞춰 보시고 난 다음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이 여자를 치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이 자기들 죄를 환하게 들여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보고 있구요. 그러니까 양심에 가책이 불같이 타올라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모두 다 돌멩이를 버려두고 도망을 치고 만 것입니다. 한참만에 예수님이 고개를 그 여자보고 말했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예수님도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백일천하에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정당하게 돌로 맞아 죽어야 할 여자도 주님의 그 넓은 사랑은 그를 용납해서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지 죽이려고 오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든지 살리려고 하는 그 넓은 사랑을 여기에서 읽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비춰볼 때 우리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나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과 다름없는 죄인이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살리려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 죄를 대신 청산했기 때문에 그 피가 마음속에 모든 죄를 청산해 주시고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은 이렇게 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우리들은 쉽게 남편을 정죄하거나 아내를 정죄하거나 부모를 정죄하거나 이웃을 정죄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용서한 사람을 왜 우리가 정죄합니까? 예수님이 품어준 사람을 왜 우리가 밀어내는 것입니까? 오늘 이 세상에 가장 큰 문제는 서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기 죄는 덮어놓고 남의 죄만 자꾸 바라보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와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없는 넓은 사랑을 가지고서 남녀노유 빈부귀천 죄인 의인을 모두 다 끌어안아서 변화시켜 주시는 위대한 역사를 베푸는 예수님인 것입니다.
2. 하나님 사랑의 길이
둘째,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를 알라고 그랬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기냐. 시작과 끝이 안 보이는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주를 보십시오. 이 시작하는 데하고 끝나는 데하고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기냐. 우주보다 긴 것입니다.
욥기 11장 8절로 9절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바다가 넓다고 하는데 어림도 없고 땅이 길다고 하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절에 “옛적에 야훼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영원한 사랑, 1년 사랑하다가 말고 10년 사랑하다가 말고 천년만년 사랑하다가 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
여러분 제트기가 시속 960킬로미터 속도로 가면 지구를 단숨에 지나 16일이 되면 달에 도착합니다. 17년이 되면 태양을 지날 수 있습니다. 690년이면 명왕성(현,소행성 134340)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0년을 달려도 제트기는 태양계조차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주에 조그마한 태양계를 이렇게 960킬로미터 제트기가 달려도 700년이 되어도 이 태양계를 떠나지 못하니 이 우주의 길이가 얼마나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안 보이는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는 인간의 사고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죄를 짓는 사람보고 “저것을 하나님이 참고 견디시냐? 그냥 박살을 내버리지.” 그렇게 합니다. 그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한없이 길게 길게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나 때리실 것도 또 안 때리고 화나 때리실 것도 또 안 때리고 왜 하나님은 안 때리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길고 길게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빠지면 또 일으켜 놓고 기다리시고 넘어지면 또 일으켜 놓고 기다리시고 길게 길게 기다리는 사랑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여러분과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와 있지 못합니다. 벌써 우리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때 종종 “하나님 북한정권을 왜 저토록 오래 그대로 내버려 둡니까? 빨리 북한의 주민들을 하나님이 구출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도 대답이 없습니다. 왜냐, 하나님은 우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들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길게 길게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이 벌을 받지 않고 오래 기다리는 것을 보고 탄식하고 우리가 잘못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기다리지 못할까 싶어 겁을 집어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8절로 9절에 “야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잠시 동안 노하시다가도 곧장 잊어버리고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길고 깁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년 남편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회개하지 못하니 하나님이 버리시는가 보다. 무슨 말씀입니까? 10년이면 하나님이 딱 한순간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20년, 30년, 50년, 내가 죽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받아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5만번 기도해서 5만번 다 응답을 받았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꼭 한가지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친구의 아들이 죽기 전에 자기에게 부탁하기를 “여보게 내가 우리 아들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안타깝다. 자네가 꼭 예수께로 인도해 달라.” 그래서 이 목사님은 이 친구를 위해서 평생을 기도했습니다. 죠지 뮬러의 기도가 5만번 응답을 받았는데도 죽는날까지 친구의 아들은 회개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죽고 난 다음 장례식날 문상을 왔습니다. 관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꿇어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고 회개를 했습니다. 기도는 죽고 난 다음에도 계속 응답이 와서 마지막 다 응답을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시편 103편 8절로 9절에 있는 말씀처럼 영원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번념하시고 권장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사랑의 높이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를 알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꿈은 모자람이 없는 온전한 신앙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막무가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넓고 길지만 또 높은 사랑인 것입니다. 막되 먹게 내버려 놓고 내 멋대로 하라는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돌보시는 높은 고상한 사랑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로 18절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높은 사랑, 고상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온전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개망나니 같은 우리, 되먹지 못한 우리를 그 사랑으로 구원하셔서 그때로부터 온전한 사람을 기르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8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에베소서 4장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늘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옛날에 비교하면 많이 발전은 되었지만 아직 온전한 사람이 되기에는 많은 껍질이 벗겨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아직 새까맣게 멉니다. 그 온전한 사랑에 이를 때까지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고 하니 여러분에 대해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돌보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방종하게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격려하고 매를 드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나가서 도박을 하든지 방종하게 놀든지 술 취하든지 마약을 하든지 내버려둔다. 왜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입니다. 무관심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는 끝까지 따라가면서 달래고 경책하고 매를 때리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13장 24절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여러분 징계하지 않는 부모는 자식에 대한 무관심한 부모인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인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관심 있는 사람은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며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상줄 것은 상주고 꾸짖을 것은 꾸짖고 때릴 것은 때려야 참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채찍과 꾸지람을 하면 그때는 자식이 괴로워하더라도 나중에 그대로 내버려 놓으면 나중에 부모에게 욕되고 가슴 아프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도 학교 다닐 때 못되게 구는 선생님이 있어서 늘 미워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콩코드라는 영어 문법 선생인데 언제나 이만한 대몽둥이를 가지고 교실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어 문장을 만드는데 시제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정확하게 문장을 못 만들면 나오라고 해서 그 몽둥이로 때리는데 살짝 때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불이 번쩍번쩍 나도록 때립니다. 그래서 다른 과목은 열심히 공부 안 해도 그 과목만은 눈이 빠지도록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늘 생각하기를 “저 선생 빨리 자동차 사고가 나서 죽지 않느냐? 그 많은 유행병이 오는데 왜 저 선생은 유행병이 안 걸리느냐?” 그렇게 미워했는데 오늘날에 내가 돌아볼 때 오늘날 정도 제가 영어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콩코드 선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막무가내 영어가 아니고 질서 있는 영어 그래도 고상한 영어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무섭게 매를 때리던 선생님이 문장마다 콩코드 콩코드 문장의 일치, 문장의 일치.. 그 말을 해왔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 동사를 분명하게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엄하게 기르는 자식이 나중에 효도합니다. 방종하게 기르는 자식은 나중에 불효하기 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우리를 기르실 때 높은 사랑으로 기르지 낮은 사랑으로 기르지 않습니다.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느 날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제가 아무리 죄를 범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꾸짖지도 않으시고 채찍질도 안하는 것 보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무디 목사님이 그 여자 교인을 가만히 “자매님, 자매님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왜 안 믿어요? 내가 얼마나 교회를 나오는데” “교회는 나와도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왜요?” “자식을 징계하지 않는 부모가 없는데 한번도 징계를 안 당했다면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징계하지 당신 길거리에 남의 자식이 흙탕에 노는 것 보고서 징계합니까?” “지나가지요.” “자기 자식 흙탕에서 온몸에 흙칠을 하고 놀면 불러서 꾸짖고 징계하잖아요? 교회는 왔다 갔다 하지만 당신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안 믿은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징계는 사생자가 받는 것이 아니라 친 자녀가 받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친 자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계와 교훈으로 우리를 돌보는 사랑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징계와 교훈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높은 사랑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히브리서 12장 5절로 11절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친 아들이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여러분 몸에 하나님 채찍자국이 한두개는 꼭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까닥도 안하시더라. 중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식이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하나님이 한두번 경계하시다가 안 되면 때리시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더니 고난당한 후에는 지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 맞고 난 다음 회개하고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어떤 젊은 부부가 내게 간증을 합니다. 자식들을 데리고 휴가를 가서 주일날 교회 안 나가고 외국에 있으니까 애들을 데리고 바다 물에 들어가서 놀다가 그만 해파리에게 쏘여서 다리가 퉁퉁 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치료를 받고 의사가 하는 말이 잘못 했으면 다리를 자를 뻔 당했다고 그래서 제게 와서 회개하면서 간증을 합디다. 내가 주일날 지키지 않고 놀러 나갔다가 해파리에게 쏘여 가지고서 죽을 뻔해서 이제는 주일날 꼭 지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참 해파리 감사한 해파리구나.. 그렇게 고난당하면 사람이 뼈에 아로 새기고 배우는 것입니다. 고난당하지 않으면 배우지 않아요. 말과 채찍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4. 하나님 사랑의 깊이
넷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라고 했습니다.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 당신의 일거수일투족 생활 전체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좋을 때 함께 좋아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마음이 깊은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고 내가 안고 일어섬, 생각까지 밝히 아시는 것입니다. 왜,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우리 머리털을 다 헤아립니까? 내 머리털은 헤아릴 때 수가 많지 않으니까 쉽지만 여러분 머리털은 어려워요. 다 헤아리려면.. 그래도 헤아리고 있습니다. 왜,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의 일어서고 앉음 까지도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 우리하고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환난 때 내가 저와 같이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환난당할 때 천지가 아득하고 다 나를 버린 것 같을 때 하나님도 나를 버렸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깊은 사랑이기 때문에 내가 깊은 흑암에 처했었을 때 하나님도 그 자리에 들어와 계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인도하심이라. 안위하심이라. 여러분 그러므로 깊은 골짜기에 가있다고 해서 여러분은 혼자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즐거워하는 자들은 함께 가서 웃어주고 우는 자에게는 가서 함께 울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동정과 사랑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동정은 그저 마음으로 ‘참 안됐다.. 쯧쯧쯧.. 불쌍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동정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가서 함께 끌어안고 울고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불한당 만나 피투성이 되어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 놓고 동정만 하고 지나가 버렸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자기 짐승을 가지고 와서 내려서 그 사람을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바르고 붕대로 싸매어서 주막집에 가서 치료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이요, 자비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나흘만에 예수님이 오니까 그 누이 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절식하고 통곡을 하고 울어서 초췌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딸들 보고 “오라비를 어디 두었느냐? 가자!” 그래서 묘지로 앞서 가는데 머리를 산발을 하고 허리를 굽히고 흐느껴 울면서 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그냥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살리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다 알면서 왜 웁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번연히 살아날 사람을 보고 알면서 왜 우느냐.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연약함과 그 마음에 고통에 동참을 한 것입니다. 그냥 동정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로 35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여러분이 울 때 예수님이 우십니다. 여러분이 웃을 때 예수님이 웃으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이 즐거워 할 때 예수님도 같이 즐거워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께 예수님은 운명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자기 죄도 아니고 자기가 범한 흉한 악도 아닌데 여러분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저 고난당하신 것을 보십시오. 1시간도 아닙니다. 2시간도 아닙니다. 3시간도 아닙니다.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절실합니까?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열두명 되는 그 천사가 와서 예수 그리스도 말씀 한마디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어요. 내려오시면 우리 죄는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는 지옥에 갈수밖에 없습니다. 끝까지 우리의 죄를 걸머지고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그 사랑의 깊이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사랑이요, 헤아릴 수 없이 우리를 동정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늘 묵상하고 알아야 될 것입니다.
오래 전에 “크리스천 투데이”에 실렸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본에 나가오 마끼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는데 그가 목회자가 되어서 교회를 개척하며 5년 동안 설교했으나 한 사람도 안 나왔습니다. 목사가 교회를 개척해서 5년 동안 목회를 하는데 한 사람도 교인이 안 오니까 얼마나 외롭고 고독합니까? 5년 만에 젊은이 한 사람이 교회 참석했어요. 그 한 사람을 두고 아주 신바람이 나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난 다음 같이 점심을 먹자고 그래서 같이 점을 먹는데 한참 점심을 먹다가 이 젊은이가 기침을 쿨럭쿨럭 하더니만 피를 토합니다. 폐병 환자입니다. 그 당시에 폐병은 암보다 더 무섭습니다. 걸리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목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폐병 환자구나.’ 당장 마음속에 ‘당장 쫓아내야 되겠다.’ 그러나 그 다음 생각에 ‘주님께서 이 청년을 내게 보낸 것은 이유가 있어 보낸 것이다. 이 사람을 돌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 피를 다 닦고 그를 같이 점심을 먹고 집으로 데려가서 물었습니다. 자기는 유명한 정치인의 사생아인데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공부하다가 폐병에 걸려서 지금 학교를 못나가고 이리저리 유리하다가 이 교회 소재를 듣고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하간 이 청년이 온 것을 기뻐하고 “너 우리 집 식구가 되어서 같이 살자” 그 폐병 앓는 젊은 청년을 감싸주고 치료하고 돌봐주고 기도해 주고 동정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 청년이 신앙이 점점 나아지자 폐병이 낫고 신학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그 다음 나와서 목사가 되었는데 빈민촌에 들어가서 빈민을 구원하는 세계적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된 것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라면 우리 세대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만큼 빈민굴에 들어가서 빈민을 끌어안고 함께 울고 함께 먹고 함께 자며 빈민들을 구제하고 전도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빈민들과 나누어 준 것입니다. 동정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와 왜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칩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동정했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주님께 더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를 조금만 알면 주님께 조금만 헌신합니다. 깊이 깨달으면 깊이 헌신합니다.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보다 높은 사랑을 어떻게 다 알며 바다보다 깊은 사랑을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그러나 사랑의 깊이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깊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부모도 갖지 못하고 남편도 갖지 못하고 아내도 갖지 못하고 자식도 갖지 못하는 그 사랑을 나에게 주신다. 나는 아무도 나를 몰라준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알아주시는 분이 여러분 속에 와서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믿음도 소망도 천국가면 다 이루어집니다.
<결론>
성경에는 믿음, 소망, 사랑 다 언제까지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은 제일이라고 했는데 믿음도 천당 가면 끝장나지 않습니까? 믿음이 이루어졌으니까 소망도 천국 갈 소망을 가졌는데 천국가면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사랑은 천국가면 더 끌어 오르기 때문에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천국가면 더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당해도 영원히 남아있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와도 여러분 속으로 생각하십시오. 얼마 안 있으면 지나가고 말 것이다. 슬픈 일이 다가와도 얼마 있으면 지나갈 것뿐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뿐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영원히 인종도 국경도 시간도 세월도 초월해서 남아있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랑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그 한없는 넓은 사랑과 한없는 긴 사랑과 한없는 높은 사랑과 끝이 없는 깊은 사랑으로 사랑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우리도 사랑의 자녀로써 성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율법의 옷을 벗어 버리고 율법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사랑의 옷을 받아 입고 사랑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자신의 건강지수는 얼마나 되나?
엡 3:16-19 / 서정호 목사 / 영암교회
여러분은 고향이 어디입니까?신앙인의 고향은 교회이고 이민생활자에게 있어서 마음의 고향은 고국이며 인생의 고향은 어머니의 품입니다.어른이 되고 늙어도 어머니는 여전히 마음의 고향입니다.그래서 군에 간 아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이 어머니입니다.아플 때나 외로울 때 가장 그리운 사람도 어머니입니다.어머니가 이렇게 고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입니다.아버지는 늙어가면서 더 윤기가 나고 중후함이 풍기고 고상해지는데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누님같이 보입니다.열남매를 낳아 기른 어머니의 젖은 속이 텅 비어 쭈글쭈글해지는 것은 속알맹이를 모두 자식에게 먹였기 때문입니다.어머니에게 자식은 아주 고상한 우상입니다.새삼 어머니를 생각해 봅니다.
어떤 청년이 차 사고로 인해서 큰 충격을 받아서 그만 두 눈,안구를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수술을 받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내가 너무 출혈이 심하기 때문에 수술을 하겠지만 어차피 안구가 다 빠져나가서 눈을 볼 수는 없을 것일세" 하고 말하니 이 청년은 소리소리 질렀습니다."장님으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지"그러니 나 수술하지 말아달라고,이대로 죽을 것이라고, 바락바락 했습니다.그러나 의사는"이 사람아,생명은 소중한 것이야.이 어려움을 극복해야지."그리고 강제로 붙들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수술 며칠 후에 붕대를 풀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축하하네.자네는 분명히 실명을 했지만 자네를 위해서 안구를 기증해 주는 분이 있어 눈 하나는 볼 수 있을 것 같으네.축하하네" 그랬더니 또 소리 질렀습니다."애꾸눈으로 살기보다 죽는 게 낫지." 사는 크게 책망을 합니다."자네를 위해서 멀쩡한 눈을 빼준 고마운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무슨 망령된 발악인가?"하며 붕대를 풀어주었더니 뿌옇게 보이기 시작하며 점점 밝게 환하게 보이는데 눈앞에 서있는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는 것을 보고서 여기서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감사합니다.어머니,저는 한평생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오로지 감사한 이 감격으로 살아가겠습니다.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여러분의 건강지수는 얼마인가요?여러분의 마음에는 얼마의 건강이 있습니까?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내 마음을 주께 바쳐버리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사랑을 확인하세요.그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사랑을 확인하고,병들면 병드는 대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그리할 때,그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하게 은혜로 충만하게 될 때,삶 자체가 소중해지고 세상도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정말로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대체로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며,‘자녀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느냐?’하는 질문에도 그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우리가 인사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인사말이 ‘건강하십시오’라는 인사인 것을 보면 무엇보다도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건강하면 여유가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도 건강만 하다면 그것만으로 사회와 가정을 위해 크게 봉사하는 일이 됩니다.가정에서 내가 건강하면 온 가족에게 여유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식구 가운데 누구 하나가 병들면 온 집안이 우울합니다.병든 사람만 불행한 것이 아니고 가족 전체가 영향을 받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어떤 것을 먹어도 좋습니다.차가운 것을 먹어도 좋고 뜨거운 것을 먹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약한 사람은 가는 감기 오는 감기 모두 다 걸립니다.어쩌다 찬바람 한번 스치면 콜록거리고 콧물 흘리고 야단입니다.툭하면 신경질을 내고 자기 아프고 남까지 괴롭힙니다.이것은 모두 허약해서 그렇습니다.어느 의사의 말이 “건강한 사람은 위가 손바닥만큼 두툼해서 어떤 것을 먹어도 잘 소화시키는데,신경질적인 사람은 종잇장처럼 얇아서 무엇이 들어가면 발끈하고 화를 내고,화가 지나치면 위천공이 된다”는 것입니다.허약해서 휘청휘청하면 온통 문제투성입니다.건강의 비결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결국 적당한 음식을 먹고,운동을 열심히 하고 마음이 평안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건강의 75퍼센트가 정신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아무리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한다고 뛰어보아야 그것은 25퍼센트 범위에 속하는 것이고 75퍼센트가 마음의 건강,정신 건강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물론 건강에는 외적 건강이 있고 내적 건강이 있습니다.모든 병은 외적 건강을 잃어버리는 대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적 건강을 잃어버리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 건강이 소중하다는 말입니다.정신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면 육체적 건강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영적으로 건강하다는 말은 속사람이 건강하다는 말입니다.속사람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속사람의 건강은 오직 경건에 있습니다.산다는 것은 거룩합니다.거룩함,경건함,그속에 건강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거룩함을 떠나서는 건강이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성경말씀은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16절)" 성령이 능력을 공급할 때에 비로소 강건하다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내적 건강이 여기에 있습니다.사도 바울은 본래 육체적으로는 건강치 못한 사람이었지만 내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에 그 불편 한 몸으로도 순교할 때까지 건강을 지켜 일할 수 있었으며, 오늘 본문에서는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건강이란, 세계보건기구의 정의에 따르던 단지 무병하거나 허약치 아니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완전히 양호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병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건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에 육체도 따라 건강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신약적인 경건이란 성령 충만을 의미합니다.성경은 속사람과 겉 사람을 구분짓습니다.비록 겉 사람은 세월과 함께 후패해져 갈지라도 속사람은 복음 안에서 날로 젊어지고 싱그러워진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심리학자들은 속사람이 강건하다는 말을 '건강한 인격'을 말합니다.모든 부정적 자아형성의 배후에는 상처받은 자기 이미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나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나의 이웃들은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의 물음보다 더욱 절실하고 중요한 것은“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이것을 자아인식이라고 부릅니다.건강한 인격은 건강한 영혼에서 나옵니다.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속사람을 향해야 합니다.속사람이란 믿음으로 거듭나 새롭게 창조된 자아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또 말씀합니다."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7절)"-그리스도적 신앙,십자가 중심적인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다는 것입니다.어린아이들을 가만히 보면 저희 마음대로 노는 것 같아도 그 마음속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습니다.장난감 가지고 같이 놀고 친구들과 놀고 하지만 그래도 여기 가까이 우리 어머니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의식하고, 믿음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그 어머니가 멀리 갔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시간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우리 마음에 영원히 거주해 계셔야 된다,그래서 주님이 주인이 되시고,가 목적이 되시고,주도하셔야 내가 건강하다,그리스도가 내 마음을 다스릴 때에 나는 건강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오늘의 현대인들은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할 것 없이 사랑 실조에 걸려서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사랑 실조에 걸려서 심각하게 앓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건강하고 성숙한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렇게 사랑실조에 걸려서 중병을 앓고 있는 이 시대와 이 사회 속에서 교회가 제시할 수 있는 복된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제시해 주면서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살리는 것입니다.이것이 이 시대와 이 사회 속에서 교회가 제시할 수 있는 복된 소식이며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어떻게 하면 이 시대와 이 사회 속에서 교회가 교회의 자리를 바로 지키면서 복된 소식을 전하는 건강하고 성숙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건강하고 성숙한 사랑의 공동체를 제시해 주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해 중요한 몇 가지 요소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본문 말씀에 보면,"성도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나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교회 안에서 건강하고 성숙한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첫째는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케 되기를 기도하고 있고 두 번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으며 사랑의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으며 셋째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케 되기를 기도합니다.'속사람'이란 '겉 사람'에 대조되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을 '겉사람'이라고 하고 '속사람'은 '겉사람'안에 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겉 사람이 아니고 우리의 속사람입니다.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와 다릅니다.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마음 중심에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갖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가 겉 사람에게만 관심이 많았습니다.용모,인기,명예,재물,권력,학력 모두가 겉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는 겉 사람을 보고 판단합니다.그 사람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고,어떤 집에 살고,어떤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가 등 그 사람이 가진 그 무엇에 의해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특히 우리 사회와 같이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는 겉사람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큽니다. 겉으로 보아 화려하게,보다 크게,보다 능력 있게,보다 위엄 있고 보다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가면을 씁니다.그러나 그러한 가면을 쓰면 쓸수록 보다 나은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황폐해지고 마음에 참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게 됩니다.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속사람에 있으며 우리의 속사람이 좀 더 강건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어느 날 인생의 석양을 앞에 두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했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은 겉 사람에게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겉 사람에게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그 겉 사람이 사라질 때 그의 모든 희망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나 불멸의 속사람에게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면,겉 사람이 사라져도 괜찮습니다.오히려 영원한 가치와 의미들이 점점 더 무르익어 가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이 속사람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겉 사람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내 속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품,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이것은 속사람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얼마나 순결해져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인격을 더 닮아 가는가?"이러한 속사람에 대한 관심과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사도바울은 본래 육체적으로는 건강치 못한 사람이었으나 속사람이 건강해서 그 불편한 몸으로도 순교할 때까지 건강을 지켜 일할 수 있었으며,
오늘도 본문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사람에게 있어서 건강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건강하면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기쁨이 있습니다.어떤 환경도 잘 적응하고 어떤 음식도 잘 먹습니다.내가 건강하면 온 가족에게 여유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가족가운데 누구하나가 병들면 온 집안이 우울합니다.여유와 기쁨이 사라집니다.병든 사람만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가족 전체가 영향을 받습니다.내가 건강하면 그것만으로도 가정에 평강과 기쁨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건강의 75%가 정신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등산도 하고,이런 저런 운동을 하며 뛰어 다녀도 그것은 25퍼센트 범위에 속한다는 것입니다.75퍼센트가 마음의 건강,정신건강에 달려 있습니다.세계보건기구도 건강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건강이란 단지 무병이라든가 허약치 아니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으로,정신적으로,사회적으로 완전히 양호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단순히 육체적으로 병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건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정신적으로 건강할 때에 육체도 따라서 건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런데 정신적으로 건강하려면, 영적으로 건강해야 정신이 건강하게 됩니다.그러므로 무엇보다 속사람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속사람을 아름답고 강건하게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좋은 책을 많이 읽는다든지,또는 자기 성찰에 힘을 쓴다든지 또는 극기 훈련으로 수양을 쌓는다든지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그래서 본문 16절에 보면,"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했습니다.우리의 속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됩니다.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속사람의 건강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습니다.본문은 또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본문 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했습니다.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고 내 마음을 다스릴 때에 속사람이 건강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어린아이들을 가만히 보면,자기 마음대로 마음껏 노는 것 같아도,그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습니다.장난감을 만지며 정신없이 놀고,친구들과도 정신없이 노는 것 같지만 그 어린아이 마음속에는 어머니가 내 옆에 가까이 있다 하는 것을 의식하고,그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정신없이 노는 것입니다.그렇게 정신없이 놀다가도,순간 내 옆에 가까이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거나 또는 어머니가 멀리 갔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장난감도 친구도 버리고 어머니를 찾으며 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의식하며 살 게 될 때 속사람이 강건해 집니다.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의 속사람은 더욱 강건해지며 새롭게 됩니다.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기만 하면,주님의 사랑에 감격이 되기만 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저절로 살게 됩니다.주님의 사랑이 어떠합니까?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를 깨달으셨습니까?성령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거룩한 마음을 지니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속사람은 강건하게 됩니다."내 신앙은 얼마나 건강한가"그 건강을 재어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나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만큼,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는 만큼,우리의 속사람은 강건해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무로 비유하고 건물로 비유합니다.나무는 뿌리는 깊게 내려야 튼튼한 좋은 나무가 됩니다.건물은 터가 단단해야 창수가 나고 비바람이 쳐도 무너지지 않는 든든한 집이 됩니다.하나님의 자녀들도 사랑가운데 뿌리를 박고 기초를 놓아야 속사람이 강건해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속사람이 강건해지는 방법을 본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여러분,예수님 안에 있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들이 되어서,내가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면,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적응하고,자족해가는 생활을 하는 성도가 됩니다.사도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빌립보서 4장에서"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도,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며 자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의 능력으로 자족할 수 있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자족하며 만족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면,모든 일을 기쁨으로 참고 견디는 인내의 사람이 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 됩니다."사랑함으로 그 사람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신앙생활에서 체험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체험은 신앙성장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없이는 온전한 회개도 어렵고 온전한 헌신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계속 성장하는 데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반복되어야 합니다.그리스도의 사랑을 순간 순간 깨닫고 또 깨닫고,그럴 때마다 속사람은 건강해집니다.사랑을 느낄 때에,사랑을 행할 때에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내가 있는 곳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넘치게 할 때 속사람이 강건해 집니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야 합니다.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야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고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힘입어 자족하는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산소망안에서 모든 일을 기쁨으로 참고 견디며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가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며 사랑받는 기쁨을 누리며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됩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이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효도는 안전한 보험]여름 휴가철에 한 가족이 바닷가 해수욕장에 놀러왔는데 얼마후에 아들이 '엄마,바다에 들어가도 돼요?'엄마는 '물이 너무 깊어서 안돼!'한참후에 아들은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서 엄마를 다시 조릅니다.'엄마 아빠는 바다속에 들어가 수영하고 있는데 왜 못들어가게 해요.'그러자 엄마가 이렇게 대답했다.'야,너희 아빠는 생명 보험에 들었단다.'여러분은 어떤 보험에 가입하셨나요?요즘에 불안한 시대라 그런지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험 상품 광고를 많이 합니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 두 개씩 이상 보험을 들어 놓은것 같습니다.보험에도 참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암 보험,건강 보험,국민 연금 보험,노후 보험,입원비 보험,자동차 보험, 등등."장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 보험인데보험을 계약하고 막상 일이 생겨 보험금을 신청하면 이런 조항,저런 조항을 대면서 기대한만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계약할 때는 약관과,계약서를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그러나 설사 본다 해도 전문가가 보지 않으면 이해 안되는 용어로 써놓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고,광고 문구만 보고 믿고 했다가는 큰 낭패를 봅니다.까다로운 세상 보험과는 달리 아주 간단하고 쉬운 최고의 좋은 보험은 오늘 어버이 주일에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면 장래,미래를 보장 받는 보험입니다.하나님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자에게 장래를 보장해 주시고,잘살게 해준다고 약속하여 하셨습니다.보험에 약관이 있듯이 하나님이 약속한 '효도 보험'에도 확실한 약관이 성경에 있습니다.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구약,신약 약속입니다.하나님이 성경을 통한 약관으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출20:12절에 십계명을 주시면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5:16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엡6장 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자에게 1),잘되고 형통하는 축복을 약속하셨고 2),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장수하는 복을 준다고 약속하셨고3),우리가 효도를 해야 우리 자녀들도 본받아 효도하게 됩니다.그래서 효도가 하나님이 약속한 가장 좋은 보험입니다.세상 보험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지만'효도 보험'은 선택권이 없습니다.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것이 아닙니다.이 '효도 보험'은 필수 과목으로 반드시 해야 하고,반드시 들어야 합니다.우리가 효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명과,명령을 불순종하는 죄를 짓게 되고,짐승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은 무엇인강? 사람은 깨닫는 존재이고,짐승은 깨닫지 못합니다.그래서 시49: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고 하셨습니다.존귀한 인간이면서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효도를 하지 않으면 짐승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우리가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고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효도를 하는것이 마땅한데 하나님은 효도하는 사람에게 큰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하고,효도를 해야 할까요?잠언에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라고 하셨는데 청종은'잘 듣고,이해하는것입니다.'영어로“이해”라는단어는 understand입니다.understand under[아래]+stand[서다]의 합성어입니다.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말을 아래에서 듣는다'는 것입니다.부모님의 말과 교훈이 내 머리로 이해가 안되고 답답할지라도 내가 부모님 아래에 내려서서 들어야 합니다.그래야 부모님과 대화가 되고,부모님 말씀에 청종이 이루어지나 내가 아래가 아닌 위에서 들으면 부모님을 무시하고,교만하게 되고 청종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부모님이 제일 즐거워하는 것은 자녀들과 대화하는 시간입니다.자식이 어떻게 사는지,무슨 생각을 하는지,무슨 고민이 있는지,그리고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싶어 하나 늙으신 부모님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지라도 understand하면 되는 것입니다.효도가 용돈만 드린다고 효도가 아니고 늙으신 부모님을 가족 구성원으로 대우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부모님 말을 청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불가능한 일도 아니고,시간이나 돈이 드는 일도 아닙니다.부모님 말을 청종하면 지혜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되지만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불순종 하면 발속에 들어간 작은 모래 알처럼 평생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부모님 말씀에 잘 청종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게 되고 선생님이나,직장 상사의 말도 잘 듣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세상에서 대인 관계가 좋아져 성공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머니의 마음/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어머니가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비탄에 잠겼는데 식음을 전폐하고 애끊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 아들을 단 5분만 만나보게 해주세요.단 5분만”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듣고 천사가 말했습니다.“아들을 5분 동안만 만나게 해드리죠.아들의 언제 모습을 보고 싶으세요.어머니의 품에서 재롱 피우던 모습인가요,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인가요.”어머니는 한참 생각한 뒤 천사에게 말했다.“아들이 잘못을 저질러 제게 용서를 빌던 모습입니다.눈물 흘리던 그 모습이 제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아요.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집니다.”어머니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자녀에게 많은 사랑을 주면서도 더 못해준 것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어머니는 지우개가 되길 원하는 사람입니다.자녀들의 아픔과 슬픔을 모두 지워주고 싶은 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우리 나라 어느 관광지에 가든지 '효자손'이라는 것을 판매하는데 이 효자 손이 나오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어느 아들은 어느 날 나이 드신 아버지가 등 긁는 것을 보았는데 그후 이 아들은 '아버지 스스로 등을 긁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연구하는 중에 대나무를 가져다가 구부려서 효자손을 만들어드렸습니다.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너도나도 효자손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언제인가,발명왕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학생은 '최보아'라는 중학교 2 학년 여학생입니다.이 학생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군산에 사시는 부모님을 대신하여 할머니를 돌보는데,목욕시켜 드리는 것과 대소변 받아내는 일이 너무 힘들어 연구해낸 것이 환자용 의자라고 합니다.의자 밑에 바퀴를 달아 이동하기 쉽게 하고 의자 밑받침에 구멍을 내고 그 밑에 휴대용 변기를 달은 것입니다.이 여학생은 중풍에 걸리신 할머니를 돕다가 국무총리상을 받았던 것입니다.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여러분은 부모님이 살아생전에 부모공경을 잘 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라며,효도하려도 해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분들은 교회 안에 계시는 연로하신 노인 교우들이나 이웃 노인들에게 대신 효도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
엡 3:16-4:6 / 윤창용 목사
우리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가 되고 난 뒤에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친구 그토록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외롭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네"
외로움은 하나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지금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데이빗 왓슨(David Waston)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의 책 "당신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영어 제목은 "You are My God"이라고 하는 책에서 기독교적인 성공을 가져와도 그 성공이라는 이면에는 고독, 외로움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고독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남자 여자가 사랑을 하면 여자 친구 어깨 위에 떨어진 비듬도 멋있어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이렇게 이야기한답니다. 물론 여자친구의 등에 떨어진 비듬을 털어 주면서 말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말해야 합니다. "아니. 이 얄미운 천사들, 아무리 우리 꽃사슴의 미모에 질투를 느낀다 해도 구름가루를 뿌려놓다니!" 낯간지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사람이 좋으면 비듬도 구름가루라고 생각이 드는 모양입니다.
자폐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작은 변화에도 견디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어떤 대상에만 집착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 어린이 정서 발달 장애가 자폐증이라는 병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돌잔치를 해보면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눈을 맞추지 않으면 자폐증 진단을 내릴 수 있는데 거의 91%의 확률이라고 합니다. 자폐는 나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조차 힘든 병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보통 성인들조차 이 자폐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 이 자폐의 경험을 갖는 것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 쇼핑할 경우입니다. 여자분들은 새로운 환경에 늘 새로움을 느끼고, 신선하게 생각하는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남자분들은 새로운 구조가 고통입니다. 상점마다 새롭게 디자인되어 있고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물건을 보는 것은 그러니까 여자분들에게 신선한 도전과 자극이 되지만 남자들에게 상점마다 적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쇼핑에서 남자들은 자폐 증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자폐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 문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것을 많이 내 보입니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것을 내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사랑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신앙의 자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 뉴스거리가 된 분들의 집을 기자가 찾아가면 여지없이 문이 굳게 닫혀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질 않습니까? 그 사람들을 만나면 대처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문을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겸연쩍고 창피하기 때문에 문을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저 사람과 내가 상관할 바 없다는 마음가짐이라면 마음의 문을 닫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살려고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성도들 가운데 마음 문을 닫고 앉아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의 말씀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영이 우리 모두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아들의 영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성도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 113절에서 "내가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미워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마음 문을 연다는 말이고, 곧 순종을 의미합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원래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문을 열므로 해서 한 마음이 되고 한 마음이 된다는 말은 일치가 된다는 것이고, 일치가 되었다는 것은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았으니 마음의 문을 열고 일치와 사랑의 단계에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어떻게 하면 일치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에베소서 4장 3절 말씀에 "힘써 지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힘써 지키라는 말을 우리는 유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분들이 모여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다 자기처럼 모든 성도들이 생각할 것이라고 믿고 자기 말 만 하면 분명히 그 공동체는 깨어지게 됩니다. 저는 이 힘써 지키라는 말씀은 4장 1절, 2절에 나오는 말씀을 힘써 지키라는 것이 주석의 해석이지만 저는 '우리가 남의 입장이 되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일치가 되기 위해서 겸손도, 온유도 인내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여러분과 제가 모두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매너가 무엇입니까? 다른 입장에 서서 행동하는 것이 매너입니다. 신사답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남자를 신사라고 부릅니다.
힘써 지키되, 남의 입장에서 서서 힘써 생각하는 것이 우선 일치를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 저녁 '목사 장로 세미나'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웠습니다. 장충단 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홍순우 목사님이 당회를 운영하실 때 당회원 전체 만장일치가 되지 않으면 그 안은 절대로 실시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당회안을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다수결은 교회 공동체를 깨기 아주 쉬운 무기입니다. 특히 당회가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하게 되면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 일에 방관하게 되고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그 결과를 묻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다수결보다는 만장일치를 통해서 일치되는 것이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일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면서 일을 하면 무엇합니까? 영혼에 상처를 내고 일을 해서 무엇을 얻으려 하겠습니까?
힘써서 하나 되길 위해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힘써 지킬 것들이 무엇인지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힘써 지킬 것은 겸손입니다.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지킬 것은 겸손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 속에서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썩 좋은 덕목이 아닙니다. 겸손하고 낮아지고 자기를 숨기는 세상이 아니라 지금 세상은 자기를 드러내고, 튀어야 하고, 자기를 소개하고 알려야 합니다. 튀기 위해서 어떤 여자 분은 바지도 찢어 입고, 코걸이도 하고 머리도 하얗게 노랗게 염색을 하고 다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겸손하라니요?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가장 최대의 덕목 중 하나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노예와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서 겸손해야 합니다.
제발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가 옳은 양 말하고 다니고, 자기가 다 잘하는 것처럼 남을 비방하고 다니고, 자기가 제일 잘 난 줄 알고 남을 헏뜯고 다닙니다. 다 겸손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온유입니다. 온유란 부드럽고 온순한 태도입니다. 화가 났을 때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피가 끓는다' 혹은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 '머리 뚜껑이 열린다' 아주 들어도 섬뜩한 말입니다. 머리가 뚜껑이 있고 본체가 있는 모양입니다만, 저는 아직 머리에 뚜껑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화가 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잠언에 보면 "분노 자체는 잔인한 것"이라고 27장 4절에서 말씀하고 30장 33절에서는 "분노에서 싸움이 생긴다"고 했고, 15장 1절에서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분노를 어리석고 비이성적이고 악을 행하는 것으로 규정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19장 29절에서 "분노는 칼을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분노는 자살과 우울증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으면 자기 머리를 벽에다가 막 박습니다. 분노를 어쩌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당하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갑자기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시어머니에게 향하던 분노가 자기에게로 돌아왔기 때문에 우울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 분노가 원인입니다.
셋째는 인내입니다.
일치를 위해 지켜야 할 방법중 세 번째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합니다.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예배 후에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남이 잘못한 것을 참아주고 받아주고 용납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옛날 여자 분들이 하는 말 가운데 '벙어리 냉가슴'이란 말이 있는데 벙어리 냉가슴 앓이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인내는 분노의 감정을 절제하고 정당하고 바른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분노를 잘 다스리되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평안입니다. 앞에서 겸손, 온유, 인내를 이야기했습니다만, 이 겸손, 온유, 인내 이 세 가지도 평안과 강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말로는 화목입니다. 화목해야 하나의 공동체를, 하나의 몸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는 평안의 매는 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의견과 다양한 주장과 다양한 개성을 하나로 묶어서 한 몸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목이라는 줄을 가지고 한 몸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하나로 묶는데 요즘은 다양한 것들이 나와 있습니다. 강력 접착제가 있습니다. 본드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순간 강력 접착제는 얼마나 빨리 붙는지 순간 붙어 버린다고 해서 그 이름도 순간 강력 접착제입니다. 손에 묻으면 손도 붙어 버립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줄을 가지고 꽁꽁 묶었습니다.
이 강력 접착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화목이라는 것 또는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광 성도 여러분 !
우리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이라는 접착제로 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희생하시고 사랑을 베푸심으로 사람과 사람을 그 화목이라는 접착제로 붙였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품격을 만들어 내는 학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평안과 인내, 겸손과 온유함으로 사랑의 품격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사람도 품격이 있는 사람이 보기도 좋습니다. 성도도 품격이 있는 성도가 좋습니다. 부정적인 품격이 아니라 사랑의 품격으로 우리가 다듬어질 때 사랑의 능력을 발휘함을 믿으시고 오래 참고,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품격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지식에 넘치는 사랑
엡 3:17-19 / 손영만 목사
사도 바울은 에베소 3장에서 성도를 향한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그들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케 되기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v.17) 사도가 기도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려 나갈 수 있을까요” (How do we enjoy the Christ’s love that surpasses our knowledges?) 그것은 무엇보다도,
첫째, ‘성령의 강건케 하심으로’ (Throug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가능할 것입니다: 사도는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6)라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주의 사랑을 누리기 위해 먼저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강건하게 되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속사람의 강건함이 없이는 영적 성장이 없고, 또한 악한 영 사단 마귀와 싸워 이길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의 신뢰함으로’ (Through the trusting of faith) 가능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케 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v.17)라고.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할 뿐 아니라, 그분이 내 마음에 계시도록 믿음으로 그분의 자리를 비워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을 적용함으로’ (Through applying the Christ’s love)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아 나갈까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또한 신실한 성도들이 주님과 누렸던 깊은 사랑의 관계를 신앙서적을 통해 배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도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심령 가운데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 5:14)는 바울의 고백처럼 내 삶 속에서 실제하시는 주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가 우리 성도의 미션인 것입니다.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 깊이 뿌리 내림으로 그 귀한 사랑의 열매를 날마다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 중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우리 인간에게 강력한 영향력과 살아가는 의미를 주는 말이 또 달리 있을까요? 그러나 실제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이라는 말처럼 그 사랑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으며, 그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를 우리는 뼈저리게 절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를 향한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그들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케 되기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왜 에베소서가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를 여러분과 살펴 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주저없이 ‘사랑’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것이 성경전체의 메시지며, 동시에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가 우리에게 강조하는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우리 크리스챤과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 사이에서 대부분 이견 없이 서로 동의하는 흔치 않는 몇 가지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가 이성 간이든, 부모자식 간이든, 혹은 인간과 신의 관계든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은 마치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원동력이자,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하는 물과 햇빛과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가치와 중요성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그러나, 좀더 나아가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가?’ 라고 질문했을 때 그 대답은 너무도 다양할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저는 ‘사랑에 대한 그 사람의 이해정도가 그의 인격과 성숙도를 결정한다’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이 <에베소 3장>을 시작하면서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비밀을 성취해 나가시는지?’를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주제로 풀어나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도는 이런 놀라운 그리스도의 비밀을 성도들이 깨닫아 나가기를 원했습니다. 단순히 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빈다고 그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그분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케 하시기를 무릎 꿇고 빈다’고 사도가 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하나님께서 성도를 그분의 충만하심으로 충만케 하는 핵심’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은 이해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을 누리게 된다’고 그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잡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데 그 사랑은 우리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선 측량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성도가 진정한 성숙을 이룰수 있는가는 그 무엇보다도 ‘지각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얼마만큼 깨닫고, 그 사랑을 삶 가운데 누릴 수 있느냐’ 로 결정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의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v.17)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 보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려 나갈 수 있을 것인가요?” (How do we enjoy the Christ’s love that surpasses our knowledges?)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첫째, ‘성령의 강건케 하심으로’ (Throug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가능할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 바로 앞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비는 내용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v.16)라고. 여기서 보면, 사도는 간절히 성도들을 향한 축복의 기도를 하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기를’ (may strengthen you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your inner being)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성령으로 강건하게 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물론 이것은 ‘불신자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지금 편지하고 있는 대상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수 믿고 그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에베소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되기를’ 가장 우선적으로 기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거듭나게 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을 통한 강건케 하시는 도우심 없이는 영적 성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에베소성도를 위한 축복의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도의 마음 가운데 충만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한 첫걸음은 언제나 그의 영,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지켜 주심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실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성령의 강건케 하심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왜 우리는 강건하게 되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 모든 거듭난 자는 영적으로 자라나야 하는 존재임을 이해한다면 왜 영적 강건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 3:2)고 바울은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고린도 성도들을 책망한바 있습니다. 속사람이 성령으로 강건해 지지 못할 때 우리는 자라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강건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악한 ‘원수 마귀’의 존재 때문입니다. 사도는 에베소서를 마감하면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로 이 악한 영들과 대적하여 싸워 결코 이길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우리는 강건케 되고, 이 악한 영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의 신뢰함으로’ (Through the trusting of faith) 주의 사랑을 누려 나갈 수 있습니다. 사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를 강건케 하여 주실 것’을 구한 다음에, 계속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계실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v.17)라고. 제가 앞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는 것이 예수님을 처음 믿고 영접한 상태가 아니라고 설명했듯이,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마음에 계시기를’ 구하는 상태 또한 예수님을 처음으로 영접하는 상태가 아님을 우리는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서, 성도들이 잘못 오해하는 대표적인 말씀의 하나가 <계시록 3:20>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고 부활하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그 대상은 불신자가 아니라, 이미 주님을 믿은 <라오디게아교회>성도들이었습니다. 주님을 이미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지도 덥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한 신앙생활’ (3:16)하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입니다. 주님께서 이들에게 더욱 성숙하고,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영적으로 성숙할 것을 아직 미성숙한 성도들에게 도전하시면서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저는 이점이 오늘 본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는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믿습니다.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은 영적 출생의 상태, 곧 ‘영적 아기’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몸이 자라고 육체가 자라듯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에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계셔야 함을 이해하십니까? 이를 위해 주님의 임재를 구하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영적 성장을 위해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계셔야 함을 인정하신다면,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 ‘믿음으로 주님을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할 수 있다’고 사도가 주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계시게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계신다” (dwell)는 말의 의미는 ‘집으로 삼고 그 안에 산다’는 뜻입니다. 어쩌다가 한번 잠깐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정착하여 집으로 거처를 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엡. 2장>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자신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자신의 영원한 거처로 삼으셨다’고 했을 때와 정확히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 가운데 거처를 삼으시고, 영원히 함께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다는 의미는 단순히 영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와 더불어 먹(는다)”는 의미는 주님과 더욱 깊은 관계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라” (갈. 2:20)는 사도의 고백이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말해 줍니다. 그럼으로, 주석가 매튜헨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신다’는 의미를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영혼의 문을 여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그를 용납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다” 라고.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도록 믿음으로 그분이 계실 자리를 비워드리고, 그분께 참된 신뢰와 순종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각자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을 적용함으로’ (Through applying the Christ’s love)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사도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핵심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진행되는 <에베소서>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v.17~19)고 사도는 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그리스도의 대한 본질과 성품과 인격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난 성자 하나님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중심된 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신앙서적을 통해 위대한 성도들의 그리스도와 깊은 하나됨을 체험했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주님의 인격과 사랑의 위대하심을 이해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아 가는 핵심은 내 마음 중심에 주를 모시고 살아감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의 형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의 권능을 통하여 성도 산사람 한사람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영적으로 살아가는 매우 다양한 삶의 적용인 것입니다. 어떤 훌륭한 신앙의 위인이 어느 성경구절을 읽고 충만한 영감을 받고 놀라운 깨닫음을 받았다고 해서, 나도 꼭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으면 자동으로 커피 한잔이 나오는 식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 각자가 본격적인 영적 체험의 세계로 들어가는 지점인 것입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는 충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적용하고 누리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것을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 5:14)라고 묘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이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고 통치하심을 온 몸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도’일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더 깊은 사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담대하게 나아가게 되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깨닫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려 나가는 것이 성화, 곧 영적 성장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이러한 영적 성장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질문해 볼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나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계속 해서 추구하는가?’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확신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재의 영적 상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속사람이 강건해 가고 있습니까?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풍성하게 열매 맺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령님의 강건해 하심으로 여러분의 심령속에 더욱 뿌리내리고 견고케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날마다 깨닫아 가고, 풍성히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깊어지는 묵상의 은혜
엡 3:17-19, 시 119:18-19 / 이정익 목사
사람은 쉼과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특히 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쉼을 제도화 하셨습니다. 그래서 7일 만에 하루씩 쉬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은 몸도 정신도 영혼도 쉬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6일 동안 일하고 7일 날 하루 쉬라고 친히 제정하셨습니다. 프랑스 무신론 혁명 당시무실론자들이 주일예배를 막기 위해 일주일을 10일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이때 생산력이 40% 감소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도 레닌이 일주일을 8일로 바꾸었습니다. 그랬더니 생산량이 30% 감소했습니다. 다시 6일로 바꾸었더니 여전히 30%가 감소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7일로 환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과학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너무 잠을 많이 자도 적게 자도 탈이고 많이 먹어도 적게 먹어도 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가장 적당한 쉼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또 사람은 묵상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역하시다가 종종 산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도시생활에 지치면 가끔 산으로 조용한 곳으로 갑니다. 원래 사람은 생각하고 묵상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는데 시끄러운 도시생활을 계속하면 생각하는 기능이 마비됩니다. 디히트리히 본회퍼는 죽기 전까지 제자들과 동료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권면하기를 “기도와 말씀과 묵상생활을 계속하라”고 했습니다. 최전선의 군인에게도 편지를 해서 “날마다 말씀을 고요히 묵상하는 시간은 내 삶의 질서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묵상은 평안과 인내와 기쁨의 원천이다. 묵상은 우리 삶에서 모든 힘들을 한데로 끌어 모으는 자석과 같다. 자기 훈련, 묵상, 치유, 만족의 영역에 지존하신 분을 모심으로서 그 분을 모시는 일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묵상의 삶은 영적 바다로 깊이 들어가게 하는 길입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옥중에서 쓴 서신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삶의 깊이를 잘 몰랐습니다. 대부분 유대교나 이방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중에 자꾸만 돌아갔습니다. 이 복음과 십자가의 진리의 깊이를 잘 모르니까 그런 것입니다. 옥중에서 이 소식을 듣는 바울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옥중에서 이 진리의 깊이를 너비를 길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설명해도 잘 모릅니다. 어느날 갑자기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서 호소합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러한 복음과 은혜의 깊이를 그냥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추천하신 방법이 묵상생활입니다. 이 말씀을 이 진리를 이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복음과 은혜의 깊이와 길이와 크기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아 안 사람들은 한결같이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묵상의 방법
묵상의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화로서의 묵상입니다. 대화로서 하는 묵상방법에도 찬송과 기도가 있습니다. 찬송은 곡이 있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찬송은 음악성보다 영감이 충만해야 합니다. 찬송을 음악적으로 불신자나 가수가 더 잘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가대가 너무 음악적으로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얼마나 영감 있는 찬양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배워야 합니다. 기도에도 기본과 틀이 있습니다. 특히 대표기도는 법이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 아닌 기도를 하게 됩니다. 또 청중들이 공감하지 못하고 은혜도 안 됩니다. 오히려 기도 속에 내 욕망으로 가득 차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기도가 욕망표출이나 내 요구의 관철을 위한 수단으로 혼동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렵습니다. 처음 기도하는 사람들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적어서 기도하게 됩니다. 특히 대표기도 할때는 기록해서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기도하는데 바람이 휙 불어서 기도문을 적은 종이가 날아가 버리니까 “주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 주어다가 다시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장로님은 대표기도를 너무 길게 하니까 뒤에서 목사님이 잡아끌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다 말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뒤에서 계속 잡아당기니까 “주님 뒤에서 자꾸 잡아당겨서 오늘은 이만 끝내려고 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기도는 큰소리로 하는 기도가 있고 조용히 묵상으로 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조용한 기도는 침묵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조용히 내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기다리는 기도입니다. 본회퍼는 “아이가 아버지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배우듯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법을 배운다. 고로 기도는 말씀을 배운대로 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묵상의 방법에는 대화로서의 묵상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배로서의 묵상입니다. 구약성경은 묵상과 예배를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묵상은 예배의 기초입니다. 묵상은 우리를 예배로 이끌어 줍니다. 예배는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방법으로 쓰시던지 마음대로 나를 사용하시게 쓰시게 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는 무엇인가 보상을 받으려고 드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만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더 깊은 더 진지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묵상시간에 할 일
묵상시간에 할 일이 3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정화입니다. 지난 주일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는 자기정화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자꾸만 땅의 것을 생각하면 묵상이 안됩니다. 묵상은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자리를 만들기 위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전에 묵상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헛된 생각, 상상, 다른 사람들에게 품은 악한 마음 등을 비우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생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 제거하고 내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에 집중된 마음은 생명을 가져오지만 육에 초점을 맞춘 마음은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묘한 곳입니다. 마음은 단순해야 합니다. 마음에 무엇인가 가득 채워져 있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9절에서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의의 것을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 18절에서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입니다. 영적 생활은 신비한 눈을 여는 삶입니다. 그렇게 열린 눈으로 저 높은 세계를 보고 알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신앙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의 눈이 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읽을 때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깊이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꾸어 주는 다리입니다. 우리들이 묵상할 때 내가 아는 지식을 넘어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게 하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내가 내 생각과 마음의 문을 열 때 주님은 내 맘에 주님이 거하실 공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고로 묵상은 주님이 나에게 오시고 나를 만나시고 나에게 임재하시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묵상은 내 마음을 여는 시간입니다.
두번째는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또 말씀에 집중시키는 시간입니다. 내 안에 있는 더럽고 불필요한 생각들과 산만한 잡생각들을 없애는 시간입니다. 사람은 모든 일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이 산란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묵상도 그런 상태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묵상 전에 우리는 먼저 그런 것들을 다 없애야 합니다. 즉 주님께서 내 안에 임재하시도록 초점을 하나로 맞추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초점이 중요합니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먼저 초점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진이 흐리고 불분명하고 모습이 이중으로 겹칩니다. 마이크도 조율이 잘되면 음이 아주 부드럽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듣기에 피곤한 소리가 납니다. 주파수 맞추는 일도 필요합니다. 방송을 깨끗이 들으려면 주파수가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묵상시간에는 마음의 모든 잡된 생각들을 욕망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묵상의 목적은 채움입니다. 본문 엡 3:19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묵상을 통해 주시는 말씀은 내 마음 깊은 곳을 채우는 시간, 담는 시간입니다. 요셉이 매일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형제들은 그런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창 37:11) 다니엘은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장차있을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때 다니엘은 “내가 이 일을 마음에 감추었었느니라.”(단 7:28)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목자들이 와서 별이 인도하여 왔다고 하자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었습니다. 그 말은 마음에 담아 두었다는 말(눅 2:19)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은혜를 담는 시간입니다. 주어진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되새김입니다. 묵상은 말씀을 새김질하는 시간입니다. 사슴이나 소 그리고 양이나 둔한 동물들은 대개 네 개의 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에서 빨리 풀을 뜯어 먹은 다음 맹수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루 종일 되새김질을 합니다. 먼저 먹은 먹이는 첫 번째 위로 보내집니다. 20초 동안 되새김질을 하고 둘째 위로 보내집니다. 그것을 다시 꺼내 20초 동안 되새김질을 하고 네 번째 위로 보내서 소화가 될 때까지 다시 되새김질을 합니다. 그렇게 되새김질을 하는 시간이 보통 8시간에서 12시간까지 됩니다. 소가 그렇게 되새김질 하는 시간이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되새김질 할 때 맛과 영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렇게 천천히 씹고 되새김질 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을 내 안에서 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되새김질 하지 않고 첫째 위에서 넷째 위까지 그대로 보내는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은 빨리빨리 시대입니다. 이미 빨리 빨리는 세계 공용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동남아 여러 나라를 가보면 한국 사람만 지나가면 빨리 빨리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빨리 빨리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신앙세계에서 빨리 빨리는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도 다독을 합니다. 일 년에 수십 번 읽으면 상을 주지만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밥을 빨리 빨리 많이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음식은 천천히 씹어서 먹어야 맛과 영양이 되듯이 신앙인은 매일 묵상으로 주시는 말씀을 곰곰이 맛보고 즐기고 내게 주시는 은혜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렘 15:16에서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입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내면을 채우면 채울 수록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은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명도 점점 더 풍성해 질 것입니다. 그 묵상의 시간에 성령은 나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주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때 내가 주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안에 있고 주님이 내안에 거하시게 되는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강해질 때이고 가장 큰 능력이 주어지는 때입니다.
결론
그래서 성경은 연합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반드시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이 연합의 이유입니다. 양은 목자가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양은 우선 연약합니다. 겁이 많고 둔하고 시력은 10m밖에 못 볼 정도입니다. 강한 이도 없고 뾰족한 발톱도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양에게는 반드시 인도해 주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또 양은 성격이 바보처럼 온순하고 소극적이고 무저항적이고 지극히 의존적입니다. 양은 반항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이 양입니다.
그런데 양은 청력은 뛰어 납니다. 멀리에서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양은 아무나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목자의 소리에만 알아듣고 따라가며 순응합니다. 험악한 광야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양은 목자의 인도만 따라가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목자의 손에는 손잡이가 굽어진 지팡이가 들려 있습니다. 이 지팡이는 양이 길을 잃거나 구덩이에 빠졌을 때 굽은 부분으로 목을 감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또 양이 병들면 양을 눕게 하고 지팡이를 땅에 세워서 옷을 걸어 그늘지게 만들어 병든 양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목자와 양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양에게는 반드시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요 너희는 내 양이라”(요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는 나와 연합되어야 살아 갈 수 있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실을 음미하고 되새기면 반드시 해답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잠시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양이 10m 앞 밖에 모르는 것처럼 우리들도 잠시 후의 일도 내일 일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목자 되시는 주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은혜이고 복이고 순종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치를 모르면 괜히 잘났다고 이탈하게 되고 이탈하면 곧 광야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거나 맹수의 밥이 되거나 광야에 버려지게 됩니다. 본문은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묵상하라고 하십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라.”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원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엡 3:17-21 / 박기완 목사
거리나 길이를 잴 때 Cm, m, Km 라는 단위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지구와 태양의 거리, 지구와 별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미터나 킬로미터로는 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큰 숫자를 표현하기 위하여 로그라는 것을 고안해 냈는데, 그 어원은 통나무(log)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즉, 항행 중인 배가 선수(船首)에서 나무 조각을 던져 넣고, 그것이 선미(船尾)까지 흘러간 시간과 배의 길이에 의해 속력을 산출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로그는 10의 몇 승으로 표현하는데... 그러나 10의 몇 승으로도 표현하기 힘들어서.... 빛이 일년간 달려가는 거리인 '광년'이란 단위가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빛은 진공 속에서 1초 동안에 약 30만km를 진행하는데, 1년 간에 도달하는 거리는 약9.46×1012km이며, 이 거리를 1광년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는 보통 사람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길이입니다. 대충 짐작만 할 뿐이지 그 실제적인 거리를 알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너무 큰 것은 표현하기조차 힘이 듭니다.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크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크기는 어떻게 잴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를 얼마만큼 좋으냐?"고 물어 보면 양 팔을 벌리며 "이 만큼!"이라고 대답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사 주고 나면 허리까지 뒤로 재끼면서 "이만∼큼!"이라고 하고, 혹은 "하늘만큼, 땅 만큼!"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아이 나름대로 아주 큰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만합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그 사랑의 크기를 재어 보라는 것입니다.
흔히.... 고생을 한 사람이 고생을 알고, 사랑을 맛 본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크게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작은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작게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5:20절에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죄가 너무도 큰 것을 깨닫고, 이 큰 죄까지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큰 사죄의 은총을 받은 만큼... 하나님의 큰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를 재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넓을까요?
흔히 사람들이 하는 사랑을 가리켜 '핑퐁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를 받으면 나도 하나를 넘겨주고, 둘을 받으면 둘을 넘겨줍니다. 마치 탁구를 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잘하고, 못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5:46절에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죄인들도 이 정도는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유익성을 말하고, 사랑을 높이 노래하지만... 너무나 좁은 사랑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넓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외면하는 세리도 사랑하셨고, 몸을 팔고 웃음을 파는 천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도 품어 주셨습니다. 고아나 과부...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더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착한 일이라고는 별로 해보지 못한 강도에게까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며....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런 사랑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8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랬습니다.
죄인이지만.. 허물이 많지만... 우리를 품어 주시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 때문입니다.
감히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마귀의 자녀인 우리를.. 아무런 조건없이 받아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해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넓은 사랑 때문입니다.
마치 바다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다를 보면, 바다는 아무리 더러운 물이라도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어느 것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저 높은 산골짜기에서부터 흐르는 작은 물에서부터.... 시냇가에서 흐르는 물, 강물... 더러운 물이나 오염된 물이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다 포용합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다 용납하시고 맞아 주시는... 이 넓은 사랑에... 바로 내가 주인공에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
두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는 얼마나 높은 사랑입니까?...
수년 전에 괌에서 일어난 KAL기 추락 사고를 기억하실 겁니다.
이 사고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정치인 한 분이 목숨을 잃었죠... 바로 신기하 의원입니다. 그런데 이 비보를 들은 신기하 의원의 노모에 관한 애처로운 기사가 신문과 텔레비전에 나와 한 동안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늙은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너무도 괴로워서 그 날부터 전혀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습니다. 노모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서 지내다가 결국 50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으로 너무나 가슴아픈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20절에 보면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시 아버지의 적극적인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상속받을 돈을 미리 받아 먼 외국 땅에 가서 허랑 방탕 다 쓰고...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먼 거리에 있는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달려나가 맞습니다. 그 아버지는 여러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저렇듯 아들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대번에 알아보고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집을 나가서 창기와 함께 어울리며 그 많은 재산을 다 탕진한 녀석을 누가 기다립니까?
피를 나눈 형제도, 친구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매일매일 동구밖에 나가 아들이 떠난 곳을 향하여 애달픈 심정으로 바라보며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있지..." 하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라면 아마 부모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사랑이 있습니다.
이사야 49:15절 말씀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6:37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그랬습니다.
세상의 부모가 혹시 그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단코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 것처럼....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친구와의 우정도 소중하고, 부부간의 사랑도 소중하고, 부모의 사랑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보다 더 높은 사랑은 없습니다.
이 높은 사랑의 크기를 깨닫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세 번째로, 하나님 사랑의 깊이는 어떻습니까?...
미국의 어느 시골에 지미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외아들로 자란 열 살의 그는 여섯 살의 어린 여동생을 여간 귀여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놀던 동생이 자전거에서 떨어졌습니다. 흔히 있던 일이라 처음에는 대단치 않게 여겼더니... 다리의 동맥이 끊겼는지 이만저만 출혈이 심하지 않았습니다.
여동생은 백지처럼 창백해지더니 이내 의식을 잃고 소년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의사가 달려왔을 때에는 소녀는 거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당장에 수혈을 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녀와 혈액형이 같은 사람은 지미 소년밖에 없었고, 일분일초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의사는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지미야, 넌 네 동생을 살리기 위해 네 피를 뽑아 줄 수 있겠니?" 순간, 소년의 얼굴은 굳어지더니 곧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의사는 소년을 식탁 위에 눕혀 놓고 그의 팔에서 피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피를 소녀의 팔에 수혈했습니다.
그렇게 한지... 반시간 동안... 의사와 가족들은 소녀가 호전되기만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차츰... 소녀의 맥박이 정상을 되찾기 시작하고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을 놓은 의사는 이마에 고인 땀을 닦으면서, 그제서야.... 식탁 위에 여전히 꼿꼿이 드러누운 채 벌벌 떨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왜 넌 그러고 있니?" 의사가 물었습니다.
소년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의사에게 들릴까 말까 하는 목소리로 되물었습니다.
"저는 언제 죽나요?"
의사는 그제서야 동생에게 피를 뽑아 줘야겠다는 의사의 말을... 이 소년이 잘못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소년은 자기의 어린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 몸 안의 모든 피를 뽑아 줘야 하는 것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를 뽑아 달라는 의사의 말에 동의했을 때... 소년은 자기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데 동의했던 것입니다.
지미는 자기 동생을 대신하여 죽으려 했던 것입니다.
사랑에는 다섯 가지의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사랑을 받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마치 젖먹이 아기들처럼 무엇을 받음으로써만 기쁨을 가지려는 이기적이고 유치하며 미숙한 사랑의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상대가 사랑해 주는 정도만 사랑하고 상대가 변하면 미움으로 쉽게 변할 위험이 있는 단계입니다. 이런 사랑은 품앗이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이 많은 사람이요, 봉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에게 해롭게 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사람은 희생정신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죽어주는 단계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5:13절 말씀에서 주님께서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은 너무 깊어서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
네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는 얼마입니까?...
최근 통계청에 의하면 한국의 이혼율이 아시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이혼율이 많았던 대만이나 일본보다도 더 앞서게 된 부끄러운 사실입니다.
연령별로 보면 젊은층의 이혼율이 더 많이 늘어나고 또한 황혼 이혼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정해 주셨으니 살고, 정 때문에 살고, 인연이니 살고, 내 운명이겠거니.. 하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온갖 이유로 이혼하므로... 사랑의 길이로 따진다면 너무나 짧아지는 추세인 것입니다.
'죤 덴버'라는 유명한 가수가 있었는데 애니 송이라는 멋진 노래를 발표하였습니다.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애창했습니다.
'애니'는 자신이 사랑하는 부인의 이름입니다. 아내를 위하여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멋지게 불렀던 것입니다. 여인들이라면 모두가 부러워할 아름다운 모습이죠....
그러나 슬프게도 얼마 있지 않아 죤 덴버와 애니는 헤어져서 서로 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식장에서 뒤돌아 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신혼여행을 갔다가 갈라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만의 사랑.... 한달 만의 사랑.... 그 사랑의 길이가 너무도 짧습니다.
때로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갑작스런 사고로 인하여... 혹은 건강치 못하여... 사랑하던 사람과의 이별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사랑은 길어야 100년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 길이가 한이 없는 그런 사랑입니다.
요한계시록 21:6-7절 말씀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28:20절에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은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세상이 끝이 나도.... 그 뒤에도 함께 하시는 분, 영원까지 함께 하시는 분, 영원히 우리의 삶을 복되게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우리 구원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길이는 끝이 없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는 사랑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헤르만 헷세의 글 가운데 '어거스터스' 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거스터스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아주 이상하게 생긴 노인 하나가 그 어머니를 찾아와서 말합니다.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주겠소!"
그때 어거스터스의 어머니는 "이 아기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그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아이는 자라서... 정말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평생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사랑만 받았지만.... 그는 교만해 졌습니다. 방탕했고 안하무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말년에 가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아주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늙은 몸으로 거지가 되어 이곳저곳을 헤매게 되었을 때.... 다시 옛날의 그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당신이 너무 비참하니 이 시간에 한가지의 소원을 다시 들어주겠소!"
그때 어거스트는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대답합니다.
사랑을 받았으나 그는 사랑 할 줄을 몰랐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사랑할 줄 아는 것이.. 최고의 행복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으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깨달아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알게된 사람은... 이제 그 사랑을 받으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12절 말씀에서 주님은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가정이 사랑으로 충만하고, 우리의 교회가 사랑으로 충만하고... 이 나라와 민족이 주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엡 3:18-19 / 강성찬 목사
친구들이 케이트(Kate) 라고 부르던 아라벨라 케더린 행키(Arabella Katherine Hankey) 양은 1834년 영국 클ㅤㄹㅐㅍ햄에서 태어났는데 부친 토마스 행키는 은행가이며 윌리암 윌버포스가 인도하던 클ㅤㄹㅐㅍ햄 부흥 전도단의 일원이었다고 합니다. 행키 양은 이 부흥 전도 대 들로부터 감화를 받아 전도 사업에 매우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아직 나이 어린 소녀 때부터 크로이돈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 했다고 합니다. 그가 18세 때에 가난한 소녀들이 공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성경공부를 못하는 것이 가련해서 그들을 위한 성경 그룹을 조직하여 런던의 서부 한 모퉁이에서 성경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비록 같은 나이 또래였지만 공장의 직공 소녀들은 행키 양을 매우 좋아 하게 되었고 어떤 소녀들은 평생을 그와 가까이 지냈으며 그의 장례식에도 그때 배웠던 소녀들이 5명이나 참예했다고 합니다. 이 성경 그룹은 그가 50년을 봉사했고 그 후 해산 되었다고 합니다. 32세 때 너무 과로하여 중병에 걸렸기 때문에 의사의 권고로 1년 간 휴양하게 되었을 때 병상에서 찬송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1년간에 100절의 장편시를 완성하였는데 전반부 50절은 1부 "내가 원하는 이야기"로 예수에 관하여 들어야 할 이야기를 묻는 형식으로 썼고, 후반부 50절은 그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들은 이야기"를 썼다고 합니다. 그 때 마침 카나다 몬트리얼에서 기독청년회(Y.M.C.A.) 국제 연합회로 모였는데, 미국 대표로는 남북전쟁의 용장이었던 룻셀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룻셀 장군이 대회 참석 시에 행커 양의 장편시를 가지고 갔었는데 자신이 대회 주제 설교 시에 아무 말 없이 이 100절의 장편시를 또박 또박 낭독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청중들은 큰 감명을 받았고 낭독하는 룻셀 장군은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고 몇 차례씩 도중에 낭독이 중단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참석했던 작곡가 윌렘·하워드·돈(W.H.Doane 832-1915)은 미국 코네티컷 주 프로스톤 출생으로. 존경받는 사회사업가. 교회 지도자, 찬송 시 작가였는데 그 가사를 얻어가지고 호텔로 돌아오는 마차 속에서 불일 듯 떠오른 멜로디로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제 1부 50절에서 발취하여 4절을 만들고 자신이 후렴을 추가하여 "또 들려주시오"라는 제목까지 달았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 호텔 응접실에서 동역 자들에게 발표하여 큰 감명을 주었고, 곧 이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이 찬송이 찬송가 205장이라 합니다.
(1절)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주시오 나 항상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저 뵈지 않는 천국 주 예수계신 곳 나 밝히 알아듣게 또 들려주시오
(2절) 아침의 이슬방울 쉬 사라짐같이 내 기억 부족하여 늘 잊기 쉬우니 잘 알아듣기 쉽게 늘 말해주시오 날 구속하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3절) 주 예수 나를 위해 이 세상 오셔서 날 구속 하신 은혜 말하여 주시오 나 같은 사람 위해 주 보혈 흘렸네 이 복스러운 말씀 또 들려주시오
(4절) 이 세상 헛된 영화 날 미혹 할 때에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들려주시오 천국의 빛난 영광 내 눈에 비칠 때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후렴) 나 항상 듣던 말씀 나 항상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나 항상 듣던 말씀 나 항상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성도의 사랑은 "주 예수 크신 사랑"을 깨닫는데서 시작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얼마나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여 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
(렘 31: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영원한 사랑, 즉 한이 없고 끝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신 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는 우리만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는 중단됨이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한 차원 높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려줍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기까지 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그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끊을 자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신지 그분의 눈에 열방은 물통에 떨어지는 한 방울 물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사 40: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실 때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 40: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그만큼 강대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티끌 같은 존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충격과 감동입니까? 얼마나 황홀합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감동이 충격이 없다고들 합니다.
어느 큰 회사는 쇠 드럼통에서 오염 물질을 뽑아내기 위해 흡입기를 사용합니다. 강력한 펌프가 통 속에서 물질들을 뽑아내는데, 작업하는 사람들은 이 펌프들의 힘을 조심스레 조절해야 합니다. 공기를 너무 많이 뽑아내면, 바깥의 압력이 통 안의 압력보다 더 커지기 때문에 그 드럼통들은 종이컵과 같이 오그라들고 만다고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역경이나 고난이 우리 삶 속에 찾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부로부터 힘을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또는 기독교인 친구들로부터 든든한 도움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를 견디게 하고 또 부서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적 토양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라고 합니다.
생물학적 비유와 건축학적 비유가 결합된 묘사인데(F.F. Bruce),골2:7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라는 말씀과 유사합니다. 식물의 뿌리와 건물의 기초는 식물 및 건축물이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기반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중적 표현은 에베소 성도들이 그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강조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에베소 교인들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사랑의 토양에 내 심정의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토양으로부터 모든 영적인 영양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의 모든 뿌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둘 때 엄청난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자양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활기를 얻습니다.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보는 것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느낌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합니다.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나 차원이 높고 넓어서,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공동 번역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로 번역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의 지식에 비교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유한한 지식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체화된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범한 인간을 위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최고의 저주와 형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구하고 학구적으로 따지며 논리를 펴도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차원 높은 사랑입니다. 이렇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볍게 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는 신비스러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맛을 보면 볼수록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꿉니다. 사랑의 힘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해 라반에게 봉사했던 햇수가 무려 7년을 일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증거 합니까?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 29:20)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동기가 될 때 사람의 활동력은 무한대로 배가됩니다. 무엇이든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이 되고,사랑을 위해 일하면 희생도 즐겁고,무엇을 해도 행복합니다.
흔히 “사랑을 받은 사람이 베풀 줄도 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이 고맙고,그 사랑이 감격스럽고,그 사랑에 감동되어서 반드시 자신도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사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광장고심이 있습니다.
(엡 3: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를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인류를 수용할 만큼 넉넉하게 넓고 (광 廣)’ 세상의 시간을 넘어서 계속될 만큼 영원히 ‘길고 (장 長)’(엡1:4.5),그리스도를 하늘로 올릴 수 있을 만큼 지극히‘높으며 (고 高’,가장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만큼 충분히 ‘깊다(심 深)’ (엡2:1-3)(스토트 J. stott)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너비 곧 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넓습니다. 사도 요한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계 7:9)라고 합니다. 사랑은 몇 사람에게 제한된 것이기에 범세계적으로 모든 인류를 다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을 빠짐없이 다 사랑할 수 있는 넓은 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개개인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데서 오는 불만족스러운 사랑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되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세상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고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 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길이 곧 장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고 합니다. 오래오래 계속되는 사랑이지만 끊어지지 않습니다.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아무도 이 사랑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고 합니다. 설혹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으로 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나도 모르게 말로써 남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죄를 범하고 뒤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해 주실까? 이렇게 더러운 죄인, 용서를 빌었는데도 또 죄를 범하는 이 못된 죄인을 하나님이 과연 사랑해주실까?' 하고 허탈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는 엄청나서 내가 아무리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죄를 범하는 그 현장에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계십니다. 실수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웃음과 욕을 당할 정도의 처참한 자리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믿어야 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 장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높이 곧 고가 있습니다. 그 높이는 비천한 우리를 높이 올려서 자기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꿔 놓기를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라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로 들이시면 우리 모두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뀌어 집니다. 작은 예수가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고 계시는 모든 영광을 우리와 함께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신의 우편에 앉히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좋은 것이면 다 나누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누리는 모든 권세와 영광, 부귀와 행복, 영생의 축복들을 우리와 나누길 원하십니다. 그런 수준에까지 우리를 끌어올리기를 원하시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 고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깊이 곧 심이 있습니다. 얼마나 그 깊이가 대단한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코자 죄인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천한 사람이 되신 사랑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비참한 죄수의 모습으로 매달려 죽는 자리까지 간 사랑입니다. 그리고는 무덤에까지 들어간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갈 때까지, 내려갈 수 있을 때까지 내려가신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그 다음에 죽으시고 무덤에까지 내려가신 그 깊은 사랑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날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린다 할지라도 어찌 그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낮아지시고, 무덤에까지 내려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인 심인 것입니다.
괌 해변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바다에 마리아나 해구가 있는데, 1960년 1월 23일 자크피카드와 도날드 월시가 잠수정을 타고 차갑고 적막한 암흑의 그 바다 속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곳의 깊이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합니다. 마리아나 해구는 바다 해면에서 거의 11킬로미터 아래에 있다합니다. 해구 바닥의 수압은 평방 센티미터당 1,100 킬로그램이나 된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생명체가 존재한다합니다. 월시는 그 바다 밑에서 압력과 암흑을 견디고 사는 납작하게 생긴 물고기를 보았다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마리아나 해구가 얼마나 깊은지조차 이해하기 힘 든다고 합니다. 만일 고독하고 누구에게서도 사랑 받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즉 캄캄한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는 오늘 주신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마리아나 해구보다 더 깊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는 훨씬 더 힘든 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어떻게 묘사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어떻게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엡 3:18)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랑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알 수 있도록 사모하고 기도하며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고 성령을 통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그 사랑을 가슴 가득히 부어주셔서 아름다운 은혜의 경지를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감사하며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사랑
엡 3:18-19 / 정근두 목사 / 울산교회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한 주간 보내길 원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세상에 오셨으며, 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았는지 알고 싶어 이 자리에 나오신 이웃 여러분, 고난주간을 앞두고 여러분과 함께 그 아들을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위한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살피길 원합니다.
생사 간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 대해서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과거, 여러분의 현재, 여러분의 미래, 그 어떤 영역도 영향을 주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불행히도 많은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자란 환경이 잘못된 신관(神觀)을 갖게 합니다. 여러 가지 대중 매체들이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도록 합니다. 고통스런 경험이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한 말로 인해서, 불안한 우리의 삶이, 때로는 우리가 지은 죄가 하나님을 바로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왜곡되고 부정확한 그림을 갖게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실로 어떤 분인지 바로 알지 못합니다. 멀리 계신 분처럼, 아니면 엄청난 힘 인양 여기기도 합니다. 언제나 자녀의 잘못을 찾는 부모처럼, 아니면 잔인한 독재자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를 부인하고 “나, 하나님 같은 거 믿지 않아”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 분이 있으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한 번 물어보십시오. 아마 그런 하나님이라면 저나 여러분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곧 바로 우리 나름의 휴대용 하나님 만들 것입니다. 우리에게 편리한 하나님을 만들어 필요한 순간에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나 우리가 가진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바른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여러분의 삶은 모래 위에 건축되고, 생의 위기를 만나면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 지를 살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스티커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아니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돌보십니다”라고 기록된 스티커를 보셨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면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입증하고 계십니다. 오늘 고난주간을 앞두고 그 가운데 세 가지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신을 나타내시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두뇌로 하나님을 알려고 드는 것은 개미의 머리로 인간을 이해하려 드는 것처럼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두뇌는 하나님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용량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갖기를 원하셔서 자신을 알 수 있는 실마리를 남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첫 째는 1.1 창조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밤하늘의 별들과 항성들을 배치한 것을 보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지구의 기울기가 조금이라도 달라졌다면 우리는 얼어 죽든지 타죽든지 했을 것입니다. 태양과의 적절한 거리로 인해 우린 지금 살아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체구조를 보십시오. 그 정교함 때문에 오죽하면 소우주라고 부르겠습니까? 우리 주변 환경도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균형이 깨뜨려지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능력 많으신 분이십니다. 힘 있게 비치는 태양이, 불고 있는 바람이, 바다에 밀려오는 파도가, 아니 작은 원자 하나의 힘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줍니다. 해마다 불어오는 태풍과 가끔 보도되는 무서운 지진, 그 결과로 밀어닥친 해일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만물을 만드시되 각기 다른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즐기시는 분이십니다.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 종류, 여러 가지 기묘한 곤충들, 바다 속에 있는 형형색색의 해초들과 물고기를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아름다움을 사랑하십니다. 제발 여유를 갖고 저녁 노을을 바라보십시오. 시시각각 변하는 그 색깔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은 푸른색과 회색으로만 짓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모든 색깔들을 배합하시고 우리의 눈이 그것을 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자연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유머감각이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우랑우탕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곁에 앉아계신 분을 쳐다보셨습니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을 부부로 만나게 하시는지 하나님의 유머를 감상해 보십시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연으로부터 배울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는 제 2의 방법을 취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2000년 전에 1.2 사람의 몸을 입고 직접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개미와 의사소통을 하려면 개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와 의사소통을 원하셔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헤아리는 2013년이란 연대도 그 분 오심을 기점으로 산출한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세계 역사는 주님 오시기 전과 후로 갈라집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의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2)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 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리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제자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대단한 선언입니까? 그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엄청난 선언들을 하시곤 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내가 문이요 . 나는 생명의 떡이로다 . .”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런 주장을 한 예수께서 하나님이신지 아니면 거짓말쟁이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에 따라서 여러분의 남은 생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영원이 결정될 것입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위대한 분, 인류의 스승, 탁월한 예언자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를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분을 인류의 4대 성인으로 추앙할 수 없습니다. 그의 주장대로 하나님이든지 아니면 희대의 사기꾼입니다.
한 사람을 자주 속일 수는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한 번 정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계속해서 2000년이 넘도록 속일 수는 없습니다. 보십시오. 수십억의 사람들이 내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을 그 분의 고난을 기억하고 보낼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그 분의 부활을 모두 축하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오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목적이 있어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향한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을 살펴보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아무리 실수와 결점이 많아도 여전히 우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가지 비유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잃은 양의 비유를 아시지요?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뒤지길 멈추지 않습니다. 찾도록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 비유는 잃은 동전에 관한 것입니다. 열 개의 동전 가운데 하나를 잃고 나서 온 집안을 샅샅이 찾습니다. 비질과 걸레질을 하면서 안팎을 뒤집니다. 먼지 쌓인 장롱위에도 카펫 밑에도 들추어 봅니다. 마침내 찾아,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잃어버린 아들, 탕자의 비유입니다. “제 몫을 주십시오.”라고 당돌하게 나선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그 청을 허락해 줍니다. 해외로 나가서 흥청망청 술과 여자로 재산 말아먹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돼지를 치는 농장에 취직해서 돼지 먹이조차 눈길을 보내다가 제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꾼 노릇을 해도 나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나 멀리서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는 달려와서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며 종들에게 지시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자” “죽은 아들이 살아났다”고 기뻐합니다. 세 이야기 모두 값진 것을 잃은 점에는 공통입니다. 목자에게 양 한 마리는 소중합니다. 여인에게 동전하나는 소중합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해하는 것보다도, 앞으로 알게 될 것보다도 소중합니다. 세 비유 모두 찾기까지는 쉬지 않고, 돌아오기까지는 포기하지 않는 점이 감동적입니다.
2. 우리를 구출하시기까지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다 알지를 못합니다. 세 살짜리 아이가 부모가 얼마나 자기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자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을 리 없습니다.
주님이 탄생하신 밤에 천사가 목자에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12) 여러분을 건져내기 위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2.1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부터 구출하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은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일말의 후회나 죄책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실수를 하고 불완전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하나님의 벌칙을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는 만족되어야 합니다. 살인을 했는데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잘못에 대한 처벌은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히 9:15) 우리를 죄에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누군가는 값을 치러야 합니다. 입힌 손해에 대해서는 누군가 대신이라도 값을 치러야 합니다.
성 금요일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출하셨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지은 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모든 죄 값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다만 받아드리면 여러분의 모든 죄는 용서를 받습니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질 않습니다. 사람은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갑니다. 고난 주간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여러분이 지은 죄를 용서하기 위함입니다. 용서받은 기쁨을 누리시는 이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2 예수님은 우리를 무의미한 삶에서 구출하십니다. “ . .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참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이 일을 손대기도 하고 저 일을 해보기도 합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일을 반복하며 지냅니다. 정말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존재할 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왜 그들을 여기에 두셨는지를 모릅니다. 삶의 의미를 모르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오셔서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우릴 만드셨고 우리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2.3 예수님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구출하십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어린 아이가 어두움을 무서워하듯이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에게 죽음은 종착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암 선고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다만 거처를 옮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세력을 십자가에서 끝장이 났고 그 결과 우리는 이제 부활의 축제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지만 주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은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우리의 몸은 끝날 때가 오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맛보신 것은 여러분과 제가 지옥의 고통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은 완벽한 곳입니다. 고통과 눈물, 슬픔과 애통이 없는 곳입니다.
완벽한 곳에는 완벽한 사람만이 거기 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아무도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계획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완벽한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죽게 하심으로 그분의 포인트로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붙잡기만 하십시오. 구명대를 던지면 재질이 무엇이고 얼마나 튼튼할지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붙잡고 버티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없는 삶은 재난으로 치닫는 삶입니다. 주님을 붙잡으면 모든 것이 보장됩니다.
3. 우리를 회복하시기까지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갖도록 만드셨습니다. 돈 벌고 살다가 퇴직하고, 늙거나 아파서 죽고 말도록 우리를 이 땅에 보내지 아니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 분을 사랑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만드셨습니다.
난해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진리입니다. 제 멋대로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 두기에는 인간은 너무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에 따라 살다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관계를 회복시키시려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소원해지면 기도를 해도 십리나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무너진 다리를 다시 놓기 위해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회복 작업을 주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고후 5:18)
여러분이 누구라도 하나님은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세상에 알려진 무신론자라도 상관치 않습니다.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간음을 했건, 낙태를 했건, 마약에 찌들어 있건, 동성애에 빠져있건 하나님은 여러분과 새로운 관계를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누구냐에 달려 있질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보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희망이라곤 없어 보입니까? 하나님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의미한 삶에 충만한 의미를 공급하십니다.
지금껏 어떤 종교를 믿어왔건 하나님은 개의치 않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기도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앞에는 새로운 삶이 펼쳐집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친구로 만들어 주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롬5:11, 현대어성경)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친구보다 더한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끔찍이 사랑하는 자녀로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과 친한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만나서 대화합니다.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알아가고 신뢰합니다. 오직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분은 여러분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짝사랑에 마음 아파본 경험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사랑의 불이 지펴졌는데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프지요? “파도야,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고 애꿎은 파도만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 심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대화하고 교제하고 알기로 결단하면 교제는 시작됩니다. 결혼서약과 같습니다. “아내로, 남편으로 받아드리기로 작정합니까?”란 주례자의 질문에 “예”라고 한 마디만 대답하면 결혼관계가 시작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주로 섬기기로 작정합니까?” “예”라는 한 마디가 여러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면 놀라운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필요한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체적인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영적인 필요와 정서적인 필요도 포함됩니다. 경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고 사람사이의 모든 것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린 하나님은 별 볼일 없습니다. 나라도 그러한 하나님이라면 믿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십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새벽이든 저녁이든 함께 모여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보십시오. 주님을 놓치면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놓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그들은 대부분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자들,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딤전 6:21, 현대어성경)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기도회로 나아오십시오. 특히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의 이름을 두고 부르짖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처럼 그들도 하나님께 매우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특별기도기간에 불러지면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표준새번역으로 한 번 더 상기시키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엡 3:18-19)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엡 3:18-19 / 문기태 목사
어떤 갓 믿은 자매가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수술결과가 좋지 않고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게 되어 마음에 불평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배웠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니 기도응답은 커녕 오히려 상반된 결과만 빚어졌고, 그통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 여부까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약 두 달 간 더 병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자매를 담당하는 간호사는 온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해주었습니다. 이 간호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매의 병든 몸을 간호할뿐 아니라 이 자매의 아픈 마음까지 섬세하게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자매의 어머니는 그때까지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었고, 자기의 딸이 기독교 신앙 갖는 것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병원에 머문 2개월 동안 이 간호사의 사랑을 통해 점점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드디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회심은 퇴원 이후 온 집안에 복음이 전파되는 강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퇴원하고나서 그 자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이 뜻대로 되지 않아 더 긴 시간 병상에 있어야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났고 가족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자매는 교리가 아닌 체험으로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기쁨이 가득하고, 진정이 담긴 찬양을 하며, 감격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원하면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역사하시는 분인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우리 믿음이 반듯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20)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밖에서 역사하시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저 하늘에만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저 멀리에 계시며 나와 상관없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큰 일, 적어도 나라와 나라간에 있는 일, 세계 역사에나 관여하시지, 개인의 일상사에는 관심도 없고 특히 나같은 연약하고 시시한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관여하지도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큰 일도 주관하십니다. 어머어마한 일, 우리로서는 알기 어려운 대단한 일을 계획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성경 20절에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과 기후와 세계 정세에 관여하시는 것보다도 더 많이 더 자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고 감동하시고 깨우치시며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때로는 말씀에 순종하도록 감동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또 미움을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하늘에 속한 거룩한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게 역사하십니다. 사단과 죄의 공격을 이기고 시험을 극복하며 하나님앞에 열매를 맺도록 도우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참 많은 활동을 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치유하십니다. 우리로 죄용서함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크게 도우십니다. 우리로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잘 자라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이 큰일을 감당할 수 잇도록 은사와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고 의의 도구로 쓰임받도록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이 휴가를 얻어 어느 시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암소를 외양간에 집어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암소는 뒷발에 힘을 모은 채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에머슨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한 소녀가 다가왔습니다. 소녀는 암소의 콧잔등을 한참 쓰다듬더니 그곳에 얼굴을 부벼댔습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암소를 끌고 외양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에머슨은 그때 사람이나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을 통해서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아십니다. 우리의 밖에서 활동하시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더 풍성하게 해 주실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더 선호하십니다.
목사이지만 저도 종종 힘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시기나 미움의 감정을 주체못해서 괴롭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상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서 쩔쩔매기도 있습니다. 그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면 기도도 안 나옵니다. 설교도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너무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조용히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분께 불편한 감정을 고백합니다. 조용히 힘든 문제를 아뢰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주님, 억울합니다. 미움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내 맘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면 얼마 안 있어 말씀이 들려옵니다. 밖에서가 아니고 안에서 들려옵니다. 그렇게 내 영이 하나님의 영과 교통을 하면 어느사이에 평화가 밀려옵니다. 미움이 녹아버립니다. 불안과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대신 기쁨이 솟아납니다. 그러면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보다 우리 안에서 더 많이 활동하시고 더 큰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날마다 우리 안에 사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에 넘치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 아닙니다. 후한 분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라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자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긴 것과 진실되게 행한 것을 기억해 주세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 선지를 보내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시며 히스기야의 목숨을 15년 연장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구하지 않은 것까지 주십니다. 앗수르왕의 손에서 그의 나라를 건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후하신 분입니다. 온갖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주시는 분임을 믿고 부지런히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하고 구하지만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아들이 구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도록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바로 그 아버지가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그런 아버지같은 분입니다. 잘못이 있어도 뉘우치고 돌아와 회개하면 그리고 은혜를 구하면 품군의 하나가 아니라 아들로 받아 주십니다. 제일 좋은 옷, 가락지, 좋은 신발, 살진 송아지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 주십니다.
2차 대전 때 전사한 한 무명용사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수첩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 나는 출세를 위해 당신에게 힘을 구했으나, 당신은 저에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당신의 선을 이루시려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당신에게 부귀를 원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만민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파 명예를 구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나는 홀로 있기가 외로워 당신의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삶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원했으나,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다른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구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으나, 그러나 당신께서는 당신이 내게 주시기를 원하시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채워 주셨습 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더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실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게 주십니다. 기도하는 것 못지 않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기도를 많이 할지라도 생각하는 것이 늘 부정적인 사람은 풍성한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기도해 놓고 돌아서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후욕이라는 죄가 있습니다. 후욕이란 사람앞에서 말을 못하고 돌아서면서 속으로 욕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돌아서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같은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늘 기도하고 나서 돌아서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기껏 기도해 놓고 돌아서서는 '안 되겠지!' '불가능해 보이는데' '망했다' '큰 일 났네, 어쩌면 좋아'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사단이 기도하고 난 이에게 그런 생각을 심습니다. 그런 생각에 계속 사로잡혀 있으면 될 일도 안됩니다. 응답이 오다가도 다시 달아납니다.
하나님은 구한 것에 더 넘치게 하실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에도 넘치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복되게 가져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 기도응답을 많이 받아 축복을 누리는 사람을 보면 항상 생각이 긍정적인 사람들입니다. 반면 늘 실패하고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응답의 체험도, 감격도 없는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비판적이고 불평과 불만으로 생각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엇을 때 뉴욕 타임즈는 '두 친구'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에 아주 가까운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미국인 유학생이고 머리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다른 한 친구는 자살로써 인생이 끝났습니다. 두 친구의 차이점은 단순히 한 사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다른 사람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클린턴의 친구는 프랭크 알렌이었는데 두뇌와 경제적 배경이 클린턴보다 나았으나 늘 불평이 많아 투덜거리며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합니다. 클린턴은 가난한 집에서 두 이복 동생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 환경이었으나 언제나 사회를 낙관적으로 보고 늘 어머니께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생각의 차이가 그처럼 한 사람은 성공한 미국의 대통령으로 다른 한 사람은 중간에 비참하게 끝난 실패한 인생으로 나누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이까짓 어려움 정도야..' '위기는 주님이 일하시는 위대한 기회야!' '오늘은 어떤 축복을 경험하려나?' 이런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가득찬 생각, 비젼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여러분 안에 넘치게 하시기 바랍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이 정복할 땅을 둘러보고 비록 성벽이 높고 군사들이 모두 거인들임을 보았지만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는 믿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갖는다면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고 절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생각하는 것에 넘치게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좋은 생각을 하십시오. 믿음의 생각을 하십시오. 큰 비젼을 품고 늘 꿈꾸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바라보며 미래에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생각합니다. 10년 후, 20년 후 여러분에게서 나올 믿음의 거인들을 기대합니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큰 믿음을 가지고 활약할 위대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 날을 꿈꾸며 기도하며 기대속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계신다고 믿는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러나 역경의 순간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믿음은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소하고 작은 것 하나조차도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든 역경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평안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은 사람들로 그의 위대하심에 대해 경탄케 만듭니다. 그러나 그분이 실제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또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강한 팔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믿음을 통해 나를 사랑하는 대속자로서 아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그 체험이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라
엡 3:20-21 / 문기태 목사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오해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속에서도 오해를 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막 12:27)"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해하였기에 부활을 의심하고 부정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오해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잘 못 믿는 것 때문에 안타까와 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앞에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영원무궁토록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하실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감사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어떻게 하면 고마우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기쁨이 가득하고, 진정이 담긴 찬양을 하며, 감격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원하면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역사하시는 분인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우리 믿음이 반듯하게 되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우리의 밖에서 역사하신다는 오해를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밖에서 역사하시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저 하늘에만 계신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습니다. 적어도 저 멀리에 계시며 나와 상관없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큰 일, 적어도 나라와 나라간에 있는 일, 세계 역사에나 관여하시지, 개인의 일상사에는 관심도 없고 특히 나같은 연약하고 시시한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관여하지도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큰 일도 주관하십니다. 어머어마한 일, 우리로서는 알기 어려운 대단한 일을 계획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성경 20절에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과 기후와 세계 정세를 위해 일하시는 것보다도 더 많이 더 자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고 감동하시고 깨우치시며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때로는 말씀에 순종하도록 감동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또 미움을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하늘에 속한 거룩한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게 역사하십니다. 사단과 죄의 공격을 이기고 시험을 극복하며 하나님앞에 열매를 맺도록 도우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참 많은 활동을 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치유하십니다. 우리로 죄용서함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우리를 크게 도우십니다. 우리로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잘 자라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잇도록 은사와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말씀으로 감동을 주십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고 의의 도구로 쓰임받는 삶을 살도록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이 휴가를 얻어 어느 시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암소를 외양간에 집어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암소는 뒷발에 힘을 모은 채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에머슨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한 소녀가 암소에게 다가왔습니다. 소녀는 암소의 콧잔등을 한참 쓰다듬더니 그곳에 얼굴을 부벼댔습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암소를 끌고 외양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에머슨은 그때 사람이나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동기라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을 통해서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아십니다. 우리의 밖에서 활동하시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더 풍성하게 해 주실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더 선호하십니다.
목사이지만 저도 종종 힘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시기나 미움의 감정을 주체못해서 괴롭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인간 관계의 갈등을 경험하거나 상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서 쩔쩔맬 때도 있습니다. 그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면 기도도 안 나옵니다. 설교도 힘이 없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고역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너무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조용히 내 안에 계신 하나님, 영이신 그분과 영적인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분께 불편한 감정을 고백합니다. 조용히 힘든 문제를 아뢰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주님, 억울합니다. 미움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내가 피해를 당했는데 왜 내 맘이 편치 않는 것입니까?'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얼마 안 있어 말씀이 들려옵니다. 밖에서가 아니고 안에서 들려옵니다. 그렇게 내 영이 하나님의 영과 교통을 하면 어느사이에 평화가 밀려옵니다. 미움이 녹아버립니다. 불안과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대신 기쁨이 솟아납니다. 그러면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만 역사하신다는 오해를 떨쳐 버리기 바랍니다. 우리 밖에서보다 우리 안에서 더 많이 활동하시고 더 큰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날마다 우리 안에 사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못 미친다는 오해를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깍으려고 합니다. 아예 깍일 것을 예상해서 많이 청구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인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 아닙니다. 후한 분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라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자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긴 것과 진실되게 행한 것을 기억해 주세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 선지를 보내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시며 히스기야의 목숨을 15년 연장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구하지 않은 것 까지 주십니다. 앗수르왕의 손에서 그의 나라를 건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색한 분입니까? 후하고 넘치게 주시는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후하신 분입니다. 기도하면 온갖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주시는 분임을 믿고 부지런히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하고 구하지만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아들이 구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도록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바로 그 아버지가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탕자의 아버지같은 분입니다. 잘못이 있어도 뉘우치고 돌아와 회개하면 그리고 은혜를 구하면 품군의 하나가 아니라 아들로 받아 주십니다. 제일 좋은 옷, 가락지, 좋은 신발, 살진 송아지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2차 대전 때 전사한 한 무명용사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수첩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 나는 출세를 위해 당신에게 힘을 구했으나, 당신은 저에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위대한 일 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당신의 선을 이루시려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당 신에게 부귀를 원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만민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파 명예를 구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나는 홀로 있기가 외로워 당신의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삶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원했으나,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다른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구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으나, 그러나 당신께서는 당신이 내게 주시기를 원하시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채워 주셨습 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주신다는 믿음을 놓지 말고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 확신을 갖고 더욱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를 실망시킨다는 오해를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실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게 주시는 분입니다. 기도하는 것 못지 않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기도를 많이 할지라도 생각하는 것이 늘 부정적인 사람은 풍성한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기도해 놓고 돌아서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후욕이라는 죄가 있습니다.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10) 후욕이란 사람앞에서 말을 못하고 돌아서면서 속으로 욕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들이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돌아서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같은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늘 기도하고 나서 돌아서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기껏 기도해 놓고 돌아서서는 '안 되겠지!' '불가능해 보이는데' '망했다' '큰 일 났네, 어쩌면 좋아' 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까? 물론 사단은 기도하고 난 이에게 그런 생각을 심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생각에 계속 사로잡혀 있으면 될 일도 안됩니다. 응답이 오다가도 다시 달아납니다.
하나님은 구한 것에 더 넘치게 하실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에도 넘치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복되게 가져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 기도응답을 많이 받아 축복을 누리는 사람을 보면 항상 생각이 긍정적인 사람들입니다. 반면 늘 실패하고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응답의 체험도, 감격도 없는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비판적이고 불평과 불만으로 생각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엇을 때 뉴욕 타임즈는 '두 친구'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에 아주 가까운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미국인 유학생이고 머리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다른 한 친구는 자살로써 인생이 끝났습니다. 두 친구의 차이점은 단순히 한 사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다른 사람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클린턴의 친구는 프랭크 알렌이었는데 두뇌와 경제적 배경이 클린턴보다 나았으나 늘 불평이 많아 투덜거리며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합니다. 클린턴은 가난한 집에서 두 이복 동생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 환경이었으나 언제나 사회를 낙관적으로 보고 늘 어머니께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생각의 차이가 그처럼 한 사람은 성공한 미국의 대통령으로 다른 한 사람은 중간에 비참하게 끝난 실패한 인생으로 나누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비판과 불평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긍정적인 말, 존경하는 말, 칭찬의 말에 풍성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새롭고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말을 들은 사람들도 한결같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훈련해 봅시다. 따라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 주실 것입니다." "어려워보이지만 꼭 승리할 것입니다." "두려워말고 도전해보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기도해드리겠습니다." 얼마 기분 좋습니까? 용기를 북돋아주고 새 힘을 주는 은혜로운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 나오게 하려면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정말 재수없네.'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왜 다들 나를 싫어하는 거야'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이까짓 어려움 정도야..' '위기는 주님이 일하시는 위대한 기회야!' '오늘은 어떤 축복을 경험하려나?' 이런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가득찬 생각, 비젼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여러분 안에 넘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역사하십니다. 생각하는 것에 넘치게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좋은 생각을 하십시오. 믿음의 생각을 하십시오. 큰 비젼을 품고 늘 꿈꾸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바라보며 미래에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생각합니다. 10년 후, 20년 후 여러분에게서 나올 믿음의 거인들을 기대합니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큰 믿음을 가지고 활약할 위대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은퇴할 무렵 저는 그 열매들을 자랑스럽게 볼 것입니다. 그 날을 꿈꾸며 기도하며 부지런히 복음의 씨를 뿌리며 기대속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예수를 믿기에 종종 작은 일에 매달려 싸웁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크신 분입니다. 여러분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큰 영광을 위해 작은 자랑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큰 기도의 응답을 위해 큰 꿈의 성취를 위해 사단이 가져다주는 불신과 의심의 유혹을 물리치고 여러분안에 성령의 감동과 말씀의 은혜로 늘 충만하게 채우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원대한 꿈을 꾸십시오
엡 3:20-21 / 이명규 목사
중국속담에 “고래는 바다 넓음을 알기에 무한량 바다를 마셔 들이고, 붕새는 하늘 높음을 알기에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큰 꿈을 꾸라는 말입니다. 전 대우그룹의 회장 이였던 [김우중]씨는 한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원대한 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큰 꿈을 꾸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에 대하여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에베소서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고 꿈꾸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꿈을 소유하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은사입니다. 사실, 꿈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를 동물과 구별하는 한 가지 요소입니다. 동물은 꿈을 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창의력과 생각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꿈을 계획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나폴레옹(Napoleon)은“상상력은 세계를 지배한다.”(Imagination rules the world.) 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교회사역이든 또는 그 어떤 분야에서든지 지금까지 성취된 위대한 일들은 누군가가 꿈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시작될 수 없습니다. 아인쉬타인(Einstein)은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처럼 우리는 또한 꿈을 꾸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설계하셨습니다. 꿈꿀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유산입니다. 위대한 꿈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우리의 삶을 유익되게 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품은 이상만큼만 비상할 수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에 피그말리언 효과(Pymalion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피그말리언 박사의 학설).
어떤 사람을 다룰 때 그 사람의 정도나 수준만큼 다루면 그 정도 이상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아들딸이나 학생을 다룰 경우, 그의 장래성, 잠재력 등을 감안하여 현재의 수준 이상으로 대할 때 그는 자기가 대우받고 기대되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 큰 비전과 큰 믿음을 가질수록 우리의 수준은 높아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고, 작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도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꿈만큼 당신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꿈을 세우라, 그러면 꿈이 당신을 세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점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꿈을 세우라. 그러면 꿈이 당신을 세울 것이다.”이 말을 이렇게 해봅시다.
“위대한 꿈을 세우라. 그러면 그 꿈이 당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세울 것이다.”
위대한 꿈을 가지고 위대한 일을 이루어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웰리암 케리(William Cary)는 근대에 들어 최초의 선교사이었습니다. 누구도 해외선교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젊은 나이의 웰리암 케리는 [인도]로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집을 떠나 미지의 선교지인 그 곳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선교를 위한 후원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말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교도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면 그 분은 스스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윌리암 케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신자들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윌리암 케리는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향해서 떠났습니다. 그가 바로 첫 번째 선교사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Attempt great things for God.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그는 그의 꿈대로 결국 인도에 기독교를 세우게 하는 신앙 개척자가 된 것입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꿈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큰 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꿈을 가지되 원대한 꿈을 가지고 위대한 일을 시도하며 위대한 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통하여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원대한 꿈을 가지기 위해서는)
1.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에베소서 3:20-21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실천되게 하는 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불가능한 분으로 생각하면 교회이든 개인이든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역대상 29:12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크게 할 수 있고 강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때 원대한 꿈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4: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 믿으십니까?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 우리의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채워주실 줄 믿습니까?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큰 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원대한 꿈을 가지지 않을까요?
첫째, 꿈은 우리를 평가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Dreams make us accountable). 우리는 이러한 압박이나 압력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꿈을 말하고 알리는 순간 프레셔(pressure)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심지어는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시기심을 갖습니다.‘그래 당신이 말한 대로 되는가 보자’라고 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꿈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부끄러움의 압박에 이미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사람들은 꿈을 작게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애물을 넘으십시오. 사람들의 평가를 이겨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요셉이 자신의 꿈을 형들에 말하였듯이 확신 있게 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from fear of failure). “만약 꿈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사람들로부터 창피 당하고, 체면이 깎이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아예 꿈을 소유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자신의 꿈을 말하지 않습니다. 실패가 두렵다면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합니다. 변화를 거부하고 새로움을 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약한 사람은 꿈을 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강한 사람이나 성공하는 사람들은 모두 실패보다 성공을 먼저 생각하며 꿈을 크게 세운 사람들입니다. 에디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발명한 대부분의 것은 다른 사람이 시도하다 실패하여 그만 둔 것 들이였다.”에디슨은 수많은 실패를 하였지만 그의 마음의 생각과 꿈이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비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The fear of criticism).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비웃거나 비난할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의 사역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이나 비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교회의 꿈을 선포하고 도전하는 일을 주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동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꿈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보다 큰 것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고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명예와 명성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성장에 두십시오. 당신이 이 일을 행하든, 그렇지 않던, 당신은 실패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려는 그 일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며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대한 비전을 품고 살아가라고 큰 포부와 용기를 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결국 나보다 더 크고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라”(요 14:12)는 원대한 비전 지향적 말씀입니다. 우리가 큰 비전을 품는 만큼 큰일을 이루어나갈 것이요, 위대한 비전에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 적극 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꿈이 있는 자는 열정이 있습니다.
“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이란 책을 지은 [폴 마이어]라는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의 [성공 동기 연구 소장]으로 각종 기업의 세미나를 강연하는 그런 분입니다. 지금은 백만장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에 관한 세미나를 하지만 그는 원래 거지였습니다.
어느 날 깡통을 차고 거리에 앉아있는데 고급 승용차 한 대를 보고 분노합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누구는 거지냐? 나무를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주여! 나도 꿈과 축복을 주소서. 기도하는 중 그는 사업가가 되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사업가가 되되 큰 사업가가 되겠습니다.”
그 이후로 세일즈맨으로 출발해서 기도하며 온갖 열정을 다 쏟았습니다. 거리에 앉아 고급 승용차 넘버를 적었습니다. 조사해서 찾아가면 다 부자이고, 사장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자기 고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어떤 사장 한 분이 바쁘다는 핑계로 안 만나줍니다. 그는 야고보서1:5을 읽으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다른 사람은 다 만났는데 왜 사장님만 안 만나 주십니까? 사장님은 하나님보다 더 높으시나 보지요? ---”뭐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냥 보내면 안 볼 것 같아서 예쁜 상자를 만들어 포장해서 비서에게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사장이 호기심을 가지고 뜯어보고는 만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연락을 받고 만나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큰 꿈을 갖은 그는 이런 열정으로 30대에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세일즈맨을 훈련시키는 교관, 성공 연구소 소장입니다. 전 세계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책 “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 25가지” 가운데22번째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나도 내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그 때마다 그분에 대한 나의 믿음과 신뢰가 자라갔다. 또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하는 행동의 최종 결과가 어떨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늘 믿음으로 순종했다. 모든 말과 행동으로 순종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분의 성품을 이해했으며 그분이 친히 책임지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주의 벗’(대하20:7)이라는 호칭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유산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 자신을 깊이 알기 원하신다. 그것이 곧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채워주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알 때 우리는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원대한 꿈을 갖기 위해서는)
2. 기도를 통해 꿈을 키워가라.
시편81: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네 입을 넓게 열라는 뜻은 기도의 필요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응답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불신자와 신자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불신자들의 삶에는 기도가 없습니다. 왜 그들은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응답을 전혀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까? 마가복음 11:23-24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영국의 [비숍템플]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옥스퍼드 대학에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을 설교하면서 유명한 일화를 말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한창 종교박해가 일어날 때 어떤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피해 산으로 피신할 때 군사들이 그를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굴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우사 지켜주시옵소서” 그런데 기도하는 순간 어디선가 거미가 나오더니 그들 앞에서 부지런히 거미줄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들을 추격하던 사람은 동굴입구에 거미줄이 쳐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갔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입니까? 예배가 끝나자 한 학생이 오더니 이렇게 템플목사님께 묻습니다. 목사님, 이런 대명천지에 어떻게 기도 응답 같은 미신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목사님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 말대로 그것이 우연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상한 사실이 있네. 내가 기도를 그치면 그 우연도 그치고 만다는 걸세.
기도할 때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기도할 때마다 입을 넓게 열면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네 입을 넓게 열라는 것은 기도를 통해 삶의 비전을 크게 가지라는 뜻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네 입을 그냥 열라고 하지 않고 네 입을 넓게 열라고 합니다. 페르샤왕국에서는 왕이 충성스러운 신하에게 이따금 선물을 내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왕이 선물을 내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신하가 무릎을 꿇으면 ‘네 입을 넓게 열라’ 그러면 신하가 입을 엽니다. 왕은 신하의 입에 보석을 넣어줍니다. 왕은 빛나는 보석을 손에 쥐고 신하에게 네 입을 넓게 열라고 말하면 신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황송한 마음으로 입을 넓게 열어 왕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기대감을 가지고 입을 넓게 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채우시겠다고 약속했으니 입을 넓게 열어 큰 것을 구해야 합니다.
[윌리암 케리]는 죽기 전에 이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
입을 여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입을 넓게 여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능력으로 채우시며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를 통해 큰 삶의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3세때 죠지 뮬러]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그것을 공급하실 것을 처음으로 믿었을 때 나는 1달러를 구하기 위해 나의 모든 믿음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매일 기도로 나의 믿음을 양육하고 단련하여 50년이 지난 지금에는 50년 전 1달러를 구했던 것처럼 아주 쉽게 백만 달러를 믿음으로 구할 수 있다.”
인도 캘커타의 [마더 테레샤]는 1946년 하나님께 받은 꿈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동전 세 개가 있고,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아원을 세우려고 합니다.”고 하자 동역자들과 어른들이 동전 세 개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하고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금 담대하게 말했습니다.'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동전 세 개로도 할 수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1948년 수도원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여 이 밤에 어디서 자야하며, 내일 아침 어디서 먹어야 하며, 이 옷이 헤어지면 무엇을 입어야 할지 나는 모릅니다. 오직 주만 따라 가오니 제 일생을 책임져 주소서!” 하고는 수도원을 나섰습니다.
그는 기도로 하나님이 주신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시작 된지 30여 년이 지났을 때 그녀는 세계 100여 군데 이상 고아원을 짓고, 빈민촌의 성녀가 되어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돈도 풍성하고, 아이디어도 많고,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없는가?
꿈이 없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삶의 의지와 철학이 없습니다. 다니엘 같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뜻을 정해 봅시다(단1:8). 반드시 길은 열립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의 필요가 무엇입니까? 채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19)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꿈을 위해 헌신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 필요를 풍성히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24:1). 돈은 성령이 깨우쳐 주신 비전이 있는 곳으로 흘러갑니다.
기도로 꿈을 키워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원대한 꿈을 갖기 위해서는)
3. 생각을 크게 해야 한다.
에베소서3:20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꿈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생각을 크게 해야 합니다.
어떤 뇌 학자의 발표에 의하면 괴테가 일생동안 0.4%를 아인슈타인이 0.6%를 사용하였고, 인간 중 1%이상의 두뇌를 사용한 사람은 인류역사상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무한한 능력과 잠재력을 주셨는데 인간이 그것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능력을 활용하고 사용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미처 생각도 하지 못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영적인 신앙생활이나 육신적인 현실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빌립보서4:13절에서 바울은 외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큰 꿈을 품고 크게 생각하십시오. 저는 자라면서 어른들로부터 이런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놈아야, 이왕 그림 그리는 것 호랑이를 그려라. 그래야 고양이라도 나올게 아니가? 고양이를 그리면 잘해야 고양이고 못하면 쥐밖에 안되느니라.”꿈을 크게 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크게 생각할 뿐 아니라 원대한 꿈을 품고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크게 해야 합니다. - 성공을 생각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 신경학계에서 최근에 발견한 바에 의하면 뇌 속에 언어 중추가 모든 신경계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언어 중추 신경이 신체에 대해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을 통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온 몸을 조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라고 계속 말하면 당장 모든 신경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서 말하기를 ‘자 약해지도록 준비하자 우리의 중앙 전달 센터에서 지시가 왔으니 우리는 약해져야해’그래서 그들의 신체적 상태가 약해지도록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면 당장에 모든 신경들은 똑같이 그렇게 선언하고 반응한다는 것입니다.‘그래, 우리는 아무 능력이 없다고 중추 신경 조직에서 지시를 받았어, 우리는 어떤 가능한 능력을 개발하는 것도 포기해야 돼 우리는 이 사람이 무능한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 준비해야 돼.’라고 모든 신경조직이 그렇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삶의 의욕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대한 일을 이루기를 원하십니까?
생각을 크게 가지십시오, 긍적적인 생각을 하고,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의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누린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 뿐 이였습니다. 이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생각의 차이였습니다. 말의 차이였습니다.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온 백성이 부정적인 말을 하고 원망의 말을 하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을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렇게 믿고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고 믿음의 생각을 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삶은 승리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성취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뉴욕의 U. N 빌딩이 세워진 곳은 원래 쓰레기장이었습니다. 그 쓰레기장을 보면서 다르게 생각하고 원대한 비전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 윌리엄 젤겐 돌프]라는 사람입니다.
그 쓰레기장이 비전을 가진 이 사람에 의해 오늘날세계적인 빌딩이 된 것입니다. [윌리엄 젤겐 돌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웅대한 계획만이 진실로 쉽게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꿈은 위대한 사고를 낳고, 위대한 사고는 위대한 신념을 낳고 그 믿음이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자동차 왕이라 불리는 [헨리포드]가 자동차를 만든 동기가 있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 병세가 위독해서 급히 말을 타고 의사를 모시러 가게 되었습니다. 다급한데 말이 얼마나 느렸는지 의사를 모시고 왔더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슬픔에 잠긴 소년은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급한 일에 사용이 될 수 있도록 말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교통수단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 꿈을 가지고 연구하고 노력한 결과 자동차를 만들게 되었고, 자동차 때문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포드 부부가 죽은 후에 디트로이트에 기념관을 세웠고, 그 안에 포드 부부의 사진을 걸어놓은 밑에 "꿈꾸는 자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꿈과 소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이루어내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새 천년의 위대한 꿈을 꿉시다.
내 일생의 꿈, 자녀대의 꿈, 가문의 큰 꿈을 꿉시다. 교회의 큰 꿈을 꿉시다. 하나님은 그 꿈대로 이루시고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왕이면 큰 꿈을 꿉시다. 큰 꿈을 꾸면서 기도, 열정, 희생의 댓가를 지불합시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새천년이 되도록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원대한 꿈을 갖고 위대한 일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원대한 꿈을 가지십시오.
기도를 통해 꿈을 키우십시오,
생각을 크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아 멘 ----
넘치는 응답
엡 3:20-21 / 박덕기 목사
사도 바울은 그가 3년 동안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했던,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속사람, 곧 영혼이 강건하기를 기도하였고, 둘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의 왕좌에 계시기를 기도하였으며, 셋째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리던 사도 바울은 돌연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래서 송영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먼저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엡 3:7에서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기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내가 일군이 되었노라’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보십시오! 나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지독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최선의 일로 알았고, 그래서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으며,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에는 가편 투표를 하였고, 여러 번 신자들을 고문하면서 강제로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고,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라는 대제사장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떠났습니다. 나만큼 기독교를 핍박하고 반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런데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러면 이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만 일어났습니까? 내게 일어난 일과 똑같은 능력이 에베소 교인 바로 여러분들에게도 또한 역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깨우쳐주었습니다. 곧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여러분을 살려주신 것이라고 한 말이 그것입니다. 여러분도 믿기 전에는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습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인간적으로는 그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나와 여러분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보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희망이 전혀 없었던 여러분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것도 하실 수 있으며, 또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라는 의미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을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고후 9:8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라고 했고, 히 7:25에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으며, 빌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고, 딤후 1:12에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했으며, 유 24에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 있으며, 복종케 하실 수 있으며, 거룩하게 하실 수 있으며, 채워주실 수 있으며, 안전케 하실 수 있으며, 만족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일 뿐 아니라, 풍성하도록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후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후히 주심은 우리의 바람이나 소원을 능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한 많은 예증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구에 대하여 더욱 넘치도록 응답하신 몇 가지 실례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사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천 천만 성도들로 넘치도록 응답해주셨습니다.
야곱이 그의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하란으로 가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는데, 그 때 그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라고 구하였습니다. 그의 구한 것은 기껏 먹을 양식과 입을 옷 이상을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후히 주심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소 떼와 양떼와 종들을 거느리는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시편 21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거기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생명을 구했더니, 생명을 건져주심은 물론이려니와, 그에게 정금 면류관을 씌워 왕좌까지 허락해주셨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 천 번제를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솔로몬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넘치도록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던 여인 ‘한나’와 ‘엘리사벳’에게, 하나님께서는 각기 ‘사무엘’과 ‘세례 요한’이라는 아들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속사에 참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축복받은 아들들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응답하시는 은혜가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만 이겠습니까? ‘신이냐? 문학이냐? 돈이냐? 사랑이냐?’ 아니면 ‘문학이냐 신이냐 사랑이냐 돈이냐’ 또는 ‘돈이냐 사랑이냐 신이냐 문학이냐’ 혹은 ‘사랑이냐 돈이냐 문학이냐 신이냐’ 하면서,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그러면서도 영원한 구원의 길을 갈망하던 한 청년을, 넘치도록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저를 이 자리에 목사로 서 있게 해주셨습니다.
목회하면서도 구한 것보다 더욱 넘치는 응답을 받은 경우 또한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4년 동안 전도사로 시무하던 첫 번째 사역지에서 예배당을 건축하던 때의 일입니다. 예배당이 천민 동네로 소문난 마을(역촌)의 한쪽 구석에 박혀 있어서, 적당한 터를 물색하는데, 논은 절대농지라 안되고, 밭은 또 상대농지라 해서 안 되고, 그런가하면 노인 장로님은 양지 바른 산 속으로 들어가자 우기시고, 그래서 “하나님 천지가 다 주의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전을 지을 땅 하나 마련하지 못해서 이 고생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고 호소했더니, 결국 제일 좋은 장소를 주셔서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한 적이 있습니다. (꽃들이 만발한 예배당의 꿈)
모든 그리스도인은 저 자신뿐만 아니라,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주신다는 증거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시고, 여러분의 이름을 생명책에 쓰신 것은, 여러분이 기도하여 받은 응답이 아니라,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지옥이나 가기에 합당한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 것은, 여러분의 어떤 간구의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나기 훨씬 전인 2000 년 전에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사, 죄와 허물로 죽은 여러분을 다시 살려주셨기 때문이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의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아더 핑크’는 그의 저서인 ‘바울의 기도’에서,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1)그것은 엄위한 능력이다. 왜냐하면 그 능력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사 그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였기 때문이다. 2)그것은 무적의 능력이다. 왜냐하면 그 능력은 우리의 깊은 고집을 꺾으셨고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요, 왕으로 맞아들이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3)그것은 거룩한 능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의를 더러운 옷으로 판단하도록 하며, 우리 자신이 보기에도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4)그것은 은혜로운 능력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런 공로가 없을 때뿐 아니라, 전혀 바라지 않았을 때에라도, 그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했기 때문이다. 5)그것은 영광스런 능력이다. 왜냐하면 그 능력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경건한 열정이 지탱되고, 우리의 모든 합당한 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6)그것은 무한한 능력이다. <죄악 된 부패성이 그 능력을 막을 수 없다. 사단과 그의 군대들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고, 죽음과 무덤도 그 능력을 약화시킬 수 없다. 그 능력은 깨끗지 못한 것에서 깨끗한 것을 만들고,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급박하다 할지라도 그 권능은 우리를 살릴 수가 있고, 우리의 궁핍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능력은 채울 수가 있다. 우리의 유혹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 능력은 우리를 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시련이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그 능력은 우리를 시련 가운데서 지탱케 할 수 있고,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비참하다 할지라도, 그 능력은 우리의 마음을 완벽한 평강 속에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능력이다. 그것은 아무리 지출한다 할지라도 적자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약화되거나 쇠미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보도록 권고합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만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실 때에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산들도, 강들도, 소용돌이치는 바다도, 번개와 천둥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이 머리가 되신 그의 몸 된 교회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와 같은 사람들, 곧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만큼 더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하였고,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만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 있습니다. 또한 그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특정한 세대만이 아니라, 무한한 영원의 세계까지 영광이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교회는 영원무궁토록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도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깜짝 놀라 우리를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면서 모든 존귀와 영광과 위엄과 능력과 주권과 권능을 하나님께 돌릴 것입니다. 그 하늘의 장엄한 합창대에 우리 모두 동참하여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고 송영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이 땅위에서도 여러분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넘치는 응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자는 이것을 믿어라
엡 3:20-21 / 민경설 목사
미국 시카고에서 제일 큰 교회인 윌로우 크릭교회에 빌 하이벨스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쓴 책 중에 ‘too busy not to pray’라는 책이 있습니다. 즉 너무 바빠서 기도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나는 하루 평균 2시간 기도하는데, 바쁘면 3시간 기도한다.” 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께 크게 쓰는 사람은 일 때문에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일을 정복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 때문에 기도를 못하고 하는 일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라도 기도로 정복한 일만 하나님이 복되게 하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원리입니다. 작은 일에서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것,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기도하지 않고 무엇인가 되어가고 있다면 결국에는 그 일로 인해 근심이 오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10:22) 기적은 대단한 일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사소하고 간단한 일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평생 가도 풀리지 않을 일이 순간 열립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일, 새 일을 창조하기 원하신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은 그의 신앙입니다. 인품이 아니라 그의 기도가 위대했습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62:8)
기도자가 믿어야 할것은
1. 기도자는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이 응답하실 능력이 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엡3: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미 우리에게 능력이 와 있습니다. 응답의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가지고 천사들이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도를 하십시오. 기도하는 자만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2. 기도자는 구하고 기도한 것에 넘치도록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엡3: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주십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다니엘은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것임을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합니다. 그로 인해 그는 사자굴에 떨어졌지만 살았습니다. 다리오왕이 살아있는 다니엘을 보며 다니엘이 믿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원수들이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고 다니엘은 총리가 됩니다.
3.기도자는 기도할 때 주님의 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엡3: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예수의 몸이 됩니다. 기도하게 되면 주님의 생각을 갖게 되고 주님의 영이 임합니다. 주님의 영은 믿는 자 속에 계십니다. 주님의 몸은 이 땅에 없지만 믿는 자 속에서 계셔서 나타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서 주님이 나타나면 영광이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의 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의 몸이 될 때 나의 일이 주님의 일이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응답을 받아 축복 받는 광진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