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한-인도 '특별 전략적 동반자관계' 실질화해야" 2018.07.10 | 오마이뉴스 | 다음뉴스
미래비전략그룹.연구혁신센터 설치, 양국 정상의 격년 방문, 허황후 기념공원 리모델링사업 조속 추진 등이 포함돼 있다. 문 대통령은 "이번 인도 국빈방문으로 양국간 전략...
학교에서 어떻게 배웠나. 그 배웠던 역사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왜 우리만 이렇게 엉터리
에 속고있는것인가 ...
부산 지역에 있었던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비이자 김해 허씨(金海許氏)의 시조모.
만약에 한반도가 가야가 아니고 인도 지역에 가야라면 밑에 내용이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그좁은 경상도 에 6가야가 번창했다는게 밑을수가 없다. 금관가야는 왜 금관가야라고 했을까?
김해는 왜 김해라는 이름을 작명으로 하였을까 ? 김해는 금의바다. ( 그많금 많다는 이야기)
유프라테스강 하류에 지금도 옛 금광과 금세공산업이 3000년이 흘러도 가업을이어온다고 한다.
강이 끝나는지점이 바로 페르시아만이다. 유프라테스강 상류에서 조금 더올라가면 실크로드의 유럽으로 넘어가는 관문이 바로 딜문이라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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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읽어버린 역사 를 다시 찾아조사하고 연구할문제가 산적해있다는 것은분명하다.
[활동사항]
허황후(許皇后)[33~189]의 다른 이름은 허황옥(許黃玉)이다. 허황후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바다를 건너와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과 혼인하였다. 국왕 부부가 낳은 11명의 자녀 가운데 10명이 아들이었는데, 8명은 수로왕의 성을 따서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되었고, 2명은 허황후의 간청에 따라 김해 허씨가 되었다고 한다. 허황후와 수로왕의 혼인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와 「금관성 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조에 상세하게 적혀 있다. 관련 기록에 의하면 9간(干)에 의해 추대된 수로왕은 토착 세력의 처녀 가운데 왕비를 간택할 것을 요청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와 혼인하였다.
허황후의 도래 설화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허황후의 출신지에 대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 동점(東漸)[점점 세력을 넓혀 동쪽으로 옮겨 감]에 대한 이야기라는 설, 아유타국은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이라는 설, 기원전 1세기 인도 아요디아 왕국이 태국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 또는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지역으로 집단 이주한 허씨족(許氏族)이 옮겨 왔다는 설, 낙랑 지역에서 도래한 유이민 혹은 상인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
허황후의 출신지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허황후가 바다를 건너올 때 한사잡물(漢肆雜物)[한나라의 여러 가지 호화로운 물건]을 잔뜩 가져온 것, 천부경·종정감·사농경 등 중국계 관직을 칭한 것, 황옥(皇玉)이라는 이름이 중국 ‘황제’와 관련 있다는 것 등이다. 이런 것들로 보아 허황후는 북방 유이민 집단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허황후 집단의 출현은 기원전 2세기 초반 위만 조선의 멸망과 한나라 군현 설치 이후 김해 지역과 북방 지역의 인적·물적 교류의 산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외 교역에 유리한 김해 가락국의 입지 조건이 허황후의 도래를 통해 보여 주는 선진 문물의 상징인 ‘선박 신앙’과 결합된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첫댓글 아랍에미레이트 에간 문재인 형제국에서 왔다고 융숭한 대접을 했다고 한 뉴스가 나왔습니다. 우리만 모르지 우리를 알고있는 국가들은 우리역사를 잘알고있습니다. 자기국가와 우리국가간의 역사적 진실을 아는데 왜 우리만 엉터리로 알고 살아야 하는것인지.. 하긴 있는역사도 아리라고 우기는 학자들이 판을치는 세상에 살았으니 ...
강단에 계신 사학자분들께서 공식으로 밝혀야만 되는 어려운 문제같더라구요
영화 "내부자들"에서 보면 대한민국 검사에게 기자회견하라고 하잖습니까? 그게 정말 먹힌다니까요
그렇지않고 일반인이 기자회견하면 진실도 거짓으로 변합니다
제발 사학 교수님들께서 나서주셔야 진정 해결될 문제이고
그후에 역사책을 수정하고 우리 문화재를 환수하며 현지 국가들과 유적발굴을 해야된다고 봅니다
제발 빨리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글쓴이는... 김해를 경상도가 아닌 유프라테스강 하류라고 주장하면서...
향토문화전자대전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중... 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 열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했는데...
글쓴이는 페르시아만 인근에서... 수로왕 후손들의 흔적을 찾았는지 여쭙니다.
열 자제 중... 한 자제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현지인을 찾았습니까?
한국에는 수로왕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분들이 수백만명 있습니다.
답을 부탁드립니다.
사부님께!
현재 세계사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가 꼬이고 꼬여 풀 매듭을 못 찾고 있습니다!
한가지 실마리는 다음의 사례에서 유추하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로마: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후손들이 콜로세움 및 오늘날의 로마 유적들을 건걸했습니다. 하지만 이 원조 로마인들과 현재 이태리 반도의 사람들은 유전적 친연성이 없습니다. 게르만 대이동 시 (훈족으로 인하여 촉발된!) 이태리 반도에 자리잡게된 게르만의 한 지류이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 암피 극장 및 그리스 곳곳의 신전 등 유적들의 건축자들과 현 그리스 국민도 유전적 친연성이 없습니다.
@economet 3. 신강/위구르 이슬람: 백오십년 전 경 영국 제국주의에 의해 이슬람화 되었는데 그 전의 종교를 떠나서 이 지역을 점거하고 있는 부족들이 이주민인 징후가 포착됩니다.
4. 제2차세계 대전으로 유럽에서만 약 5천만명이 이주해 그전의 삶의 터전을 떠나게 됩니다!
5. 예전에 베수브 화산 폭발 그리고 대지진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국경이 없었기에 굶어죽지 않기 위해 대이동이 벌어집니다. 오늘날 동남아의 쓰나미나 사천성의 대지진이 발생하면 그 지역의 주민들은 살기 위해 이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같은 견고한 국경과 그리고 백년 이상 내려오는 삶의 터전이 당연시 되던 시대는 없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economet 제 얘기는 시시콜콜...신강, 위구르가 어떻고... 영국이 어떻고가 아닙니다.
저는 발제문에서 주장한...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수로왕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살고있는가를 물었을 뿐입니다.
아들이 10명인데 후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만 밝혀주면 저는 더이상 할 얘기가 없습니다.^^
@사부님 사부님께!
그렇게 간단할 줄 알았는데 꼬이고 꼬인게 그렇지가 않다는 것 까지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마치 현재 외노자나 최저임금 논의 같이요.
단칼에 해결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지경입니다.
그러해 평소에 상식에 반하는 사부님의 40톤 돌같은 의문들이 쌓여 모이게 되고 이런 궁금한 점들을 풀어주는 한 역사의 가설로 대륙조선설이 대두되게 됩니다. 마치 뉴턴 역학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듯이요.
@economet 제가 우리 역사 체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된것은 경주때문입니다.
1997년 IMF 바로 전에 독일 BMW사장 그리고 Siemens부사장 등 경제인단 십여명 그리고 학계 인사 이십여명의 통역관으로 경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이 일행들이 너무나 실망하는 걸 접하고 왜?실망하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경주 즉 서라벌/금성에 대해 공부를 하고 6, 7세기 전 세계 2대 백만 도시에 대한 너무나 큰 기대를 하고 방문을 하였는데 정작 유물이 너무나 보잘 것 없었기에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economet ㅎㅎㅎ...
오늘은 안볼거라 생각했는데...
오늘도 같은 글을 보게됩니다.
옹알옹알...
@economet 독일의 쾰른이 독일 도시 중에 관광객이 제일 많이 몰리는 곳인데 여기의 로마 주둔군이 최전성기때 4천5백명에 기타 식솔까지 최대 5만명이 살았던 요새였습니다.
그런데 유물과 유적이 땅을 파기만 해도 무궁무진하게 나오는데 반해 한반도의 경주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신라 최대 전성기인 선덕/진성 여왕의 무덤이 현 대륙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제게는 많은 걸 시사했습니다.
서라벌/금성: 26만호 (호당 5명으로 잡아도 백만이 훌쩍 넘어갑니다!)
쾰른: 겨우 몇천가구 그것도 도시도 형성 못한 요새인데 무궁무진한 유물이 나옵니다. 건축유적과 함께요.
그렇기에 이 독일 방문단이 실망을 금치 못했던 것이죠.
@economet 토론의 기본은...
본문이라 불리는 발제문과... 그에 따른 반론에 재반박을 하는 것이 기본인데...
며칠전, 다른방에서, 다른 주제로 다투던 것을, 느닷없이 끌고와...
시비를 다투는 것은 기본도 모르는 맹추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국민학교때 배웠습니다.
^^
@economet 쾰론은 몇 천가구 밖에 살지 않은 한적한 곳이기에 유물이 남아 있었고...
경주는 백만이 넘는... 지금 따져도 어마어마한 인구가 살았기 때문에 유물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ㅎㅎ
@사부님 유물과 유적은 땅을 파야 나오는 것입니다.
현 한반도의 경주는 그 절대량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 다는게 1997년 독일방문단의 대실망의 이유였습니다.
이건 우리 나라 실증사학 고고학자 특히 서양사 전공자들에게 동일하게 물어보셔도 똑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걸 보실겁니다.
@economet 서라벌이 백만명 넘는 인구를 가졌을때 거의 유일하게 백만을 돌파한 도시가 바그다드입니다. 바그다드의 유물 유적량은 쾰른과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군데를 다 잘 아는 분들이기에 실망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고 저는 통역관으로 일주일 내내 동행하였기에 거기에 눈을 뜬것이죠!
@economet 경주는 지붕없는 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로... 지금도 땅을 파면 사방에서 유물이 나옵니다.
당시로써는 상상도 할수없는 26만 가구...
그 집들이 깔고앉은 땅속에 지금도 유물이 묻혀있고... 땅을 파면 유물이 쏟아지는 현실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십니까?
@사부님 경주에서 발굴되는 유물 유적의 절대량을 얘기하는 겁니다.
많다면 많을 수 있지만 겨우 5만정도였던 곳보다 못할리는 없겠지요!
@economet 바그다드는 저도 아직 못 가봤습니다. 하지만 쾰른은 자주 가봐 잘 압니다.
경주의 유물 유적은 너무나 적습니다.
@economet 학자들은 당시... 신라의 전성기 때... 백만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경주, 장안, 바그다드, 이스탄불, 로마로 추정합니다.
백만도시가 경주 뿐일거라는 주장은 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economet 한가지 덧붙이자면 무엇이 맞고 틀리다 이전에 이런 질문들을 갖게 되었고 여기에 대한 한 가설로 이런 걸 고려하게 되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부님께서도 40톤이 되는 돌이 어떻게 옮겨져 왔지 하는 궁금증을 가지셨듯이요.
@사부님 그 장안 지금의 서안 또는 시안이 바로 서라벌이라는게 대륙설의 핵심입니다!
@economet ㅎㅎ...
나는 건설인입니다.
40ton 아니라 100ton 짜리 돌도 어떻게 움직이는지 압니다.
방법은 같습니다.
백톤짜리나 사십톤 짜리나.
@economet 그게 거짓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사부님 예, 맞습니다. 사부님의 현장에서 얻어진 독창적인 통찰력 높이 삽니다.
그런데 이 사십톤의 돌을 인도에서 한반도로 육로가 아닌 해로로 옮겨왔을텐데 그런 범선이 운송수단으로 그 당시 존재했는지가 바로 다음 질문 같습니다.
@economet 돌이 와서 있으니까... 범선이건 땟목이건 왔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사부님 거짓이겠죠!
그런 운송수단이 없다고 봐도 되니까요?
여기에 한가지 가설을 제기해 보겠습니다.
현대적 증기선이나 범선이 생긴 이후 이런 유적들이 시범적으로 반도로 옮겨졌다면?
실제 독일 베를린의 Pergamon페르가몬 신전이나 파리 복판의 이집트 Obelisk오벨리스크 등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보다 더 크고 웅장한 건축물 자체가 유럽으로 옮겨진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economet 여기서 왈가왈부하지 마시고... 제가 올린 글에다 반론을 제기하세요.
지금은 자야할 시간.
내일 실컷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사부님 사부님께!
전 그저 해결이 안되는 미스테리 같은 문제들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자는 것 뿐입니다.
역사가 아닌 과학에서도 천동설에서 지동설 그리고 뉴턴 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 그리고 양자역학으로 패러다임 쉬프트가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물론, 음모론쪽으로 흘러가는 경향은 어쩌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절대적인건 없다는 걸 반추하고 있습니다.
@사부님 축구 안 보시나요?
그럼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의 경주전지역 인구가 28만명 아파트도 고대에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희한하네요 그당시보다 인구가 더 적을까요...
경주를 지금의 경주시로 보니까 그런 얘기가 나온 겁니다.
당시 금성은 지금의 경주시가 아닙니다.
변두리부터 논밭이 되고... 남은 것이 현 경주시가 된 것입니다.
전 우리역사에대해 대목대목 이해가 않가는 곳이 무척 많은데
않그런 분들도 많은거 같네요
우리나라 역사의 큰 사건들을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죠 마치 마블의 영화를 보는듯한 창작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