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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먼저 법무아님의 출현 덕분에 전 여기 화엄카페 방장님의 그동안의 가르침 또는 지적이 더 선명하게 와 닿았습니다..략..
오늘 법무아님의 링크를 따라 들어가서 묘원 법사님의 글을 한 자도 빠지지 않고 읽어보니
우선 진솔함이 느껴져서 순식간에 읽어 내려 갔는데 그건 그닥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감히
말씀드리건데 화엄 카페와 충돌을 일으킬 내용도
없었습니다.
그건 묘원 법사님 수행기라면 수행기 내용 어디에도 소위 주시자니 보는 주체니 작용이니
등등의 내용이 오히려 없어서 대체 법무아님이
말하는 보는 주체 ,작용 등의 개념과 묘원 법사님의
글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우리 같이 다시 한번
살펴보자는 의미로..퍼봤는데요..복사 방진지 뭔지
하루 종일 노가다로 퍼왔습니다..물론 저가 멍청해서 쉬운 기능을 아직 까진 몰라서 그랬겠지만 ..노트북이면 간단한데 여하튼 뭐뺑이 쳤습니다..그런 의미로 묘원 법사님 글을 다시 한번
살펴봐주십시오 ..().. 묘원 법사님 고생 많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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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마음을 아는 것에 대하여 - 묘원 법사
질문:
요즈음 아는 마음을 아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나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듣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을 아는 것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아는 마음을 아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수행방법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쉐우민센터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꼭 쉐우민센터에서만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도 사용하는데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중점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을 뿐입니다.
다른 수행센터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그냥 "앎"이라고 말합니다.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란 용어와 "앎"이란 용어가 마음에 관한 것으로 거의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쓰임에 있어서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쓰이고 있습니다.
이는 센터마다, 또는 스승마다 수행방법이 약간 다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수행의 주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는 마음을 아는 것"에 대하여 전제가 필요합니다.
이런 수행방법은 정신세계에 관한 것이라서 글이나 말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제대로 전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정신적인 상태에 이르러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이것과 관련된 수행에 대한 전반적이 것을 다루어 볼까합니다
"앎"에 관한 것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하시에서는 두 가지 경우에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수행을 할 때 무엇이 잘 안 된다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판단될 때는 모르겠다는 것을 아는 "앎"을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나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앎"을 합니다.
이 경우는 딱히 마땅한 명칭을 사용하기 곤란한 경우에도 사용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행을 하다보면 언젠가 몸이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 알아차릴 대상이 없으므로 마음 밖에 볼 것이 없어서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하는 뜻에서 "앎"을 하라고 합니다.
이때의 "앎"은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수행자들이 몸과 호흡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을 하라는 지시를 들을 수 없어서 익숙한 용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쉐우민에서 말하는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은 앞선 "앎"을 하는 것과 약간 다릅니다.
수행을 하다가 몸이 사라져서 볼 것이 없어서 "앎"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은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에서 마음을 새로 내서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로는 되지만 실 수행에서는 쉽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리는 힘과 집중력이 생겼을 때라야 가능한 마음 수행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손에 쥐고 있어도 모릅니다.
이것이 정신세계의 일입니다.
그래서 모르거나 안 될 때는 억지로 알려고 하거나, 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하면 무슨 큰 것을 얻을 것 같지만 실재로 하고 보면 여러 가지 수행방법의 하나일 뿐이라고 알게 됩니다.
쉐우민에서 말하는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제가 수행을 한 과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를 갖고 싶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행을 한 과정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 이 말이 나오는 것이 약간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경우에는 이해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나 그렇듯이 알면 아무 것도 아닌 말이 모르면 대단해 보이고 그래서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더욱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꾸 문자에 빠져서 더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생각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직관력입니다.
이 직관력은 문자나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에 집중력이 생기면 어느 한 순간에 자연스럽게 행해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평소에 이런 수행방법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느 경우에라도 이런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고 또 처음 경험을 했을 때 확신을 가지고 이 경험을 잘 살려서 계속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수행자가 의외로 좋은 경험을 할 경우에도 이것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계발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좋은 경험인데도 수행을 지도하는 사람이 잘못 말해주면 그 방법을 포기하게 되어 더 발전할 수 있는 것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수행에 대해서 잘 모르는 도반은 수행방법에 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 수행을 할 때는 곧잘 이런 경우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도반이나 경험이 적은 수행자는 틀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 잘 판단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미얀마에서 수행한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마하시와 쉐우민에서 수행한 내용과 아는 마음을 아는 것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얀마에서 처음 수행을 할 때 마하시 센터에서만 약 4년 간 수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보는 수행을 하는 곳으로 알려진 쉐우민센터로 갔습니다.
쉐우민은 양곤의 외곽에 있는 미야옥갈라는 곳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나무가 우거진 시골이었습니다.
마하시에서의 처음 수행은 매우 집중이 잘되었습니다.
하루종일 좌선 중에는 일어남, 꺼짐을 보고, 경행을 할 때는 오른발 왼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수행 초기에 우 자띨라 사야도께 인터뷰를 할 때 "호흡이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보고 무상을 알았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에서 다른 수행도 했었고, 위빠사나 수행경험도 있었고, 또 무상에 대해서 들은 말이 있어서 무상이 보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야도께서 "그것은 세간의 지식이고 이제 여기 왔으니 출세간의 법을 보아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며칠 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정말 그때의 심정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도 싶은 참혹한 마음이었습니다.
양심은 있었던가 봅니다.
그 때 제 나이 50세에 수행을 하러와서 그간 여러 가지 수행을 했던 제 경력도 인정받고 싶었든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을 지적 받은 것입니다.
수행을 하러 온지 며칠도 안 되는 수행자가 벌써 무상을 말하니 과연 저를 어떻게 보셨을까하는 마음에 부끄러웠습니다.
사야도의 그 한마디 말씀에 제 아상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래서 부끄러운 마음으로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차분히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이때 제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잘 고쳐먹었던 것이 매우 중요한 기회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이런 경우를 많이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에 흥미를 잃고 포기를 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위험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에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문제가 생겨도 자신의 마음이 수용을 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됩니다.
미얀마에서 처음에 수행을 할 때 한국에서 수행을 한 경험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억나는 것은 수행을 하다가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통증 때문에 괴로워도 죽지는 않겠지 하고 두려움 없이 알아차리게 되니 이내 수행을 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1시간을 앉아있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며 인터뷰 때 스승에게 보고하면 왜 좋은 것만 보고하느냐고 해서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1시간 내내 호흡만 볼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통역에게 계속 호흡만 보는 것이 좋은 것이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호흡을 그렇게 오래 보는 것이 좋은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나는 왜 호흡만 보아야 하는가 하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호흡을 알아차리다 보면 과연 이것이 누구의 호흡인지도 모르고 그냥 보기만 했다.
수행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아는 것도 없었고 허구 헌 날 호흡만 보다보니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무엇에 속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것이 혹시 호흡을 보는 종교가 아닌가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속아도 붓다께 속으니 크게 손해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우선 선원에서 돈을 내라고 하지 않고 공짜로 밥 먹여주지, 재워주지, 더구나 인터뷰까지 해 주지 해서 의심이 나도 그냥 넘길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비구계를 받고 승려생활을 하는데 미얀마 후원자가 있어서 일용품 일체를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불국토에서 과분한 대우를 받아 사실은 수행을 안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는 일 외에는 달리 할 일도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불교가 한문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는데 미얀마에 가니 또 알기 어려운 빨리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법문이나 인터뷰 때 쓰이는 빨리어를 몰라서 대충 이해하는 것도 괴로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법문을 들어도 개요만 알았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습니다.
수행에 대한 인터뷰를 할 때나, 법문을 할 때 사용하는 빨리어가 생소해서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가령 우뻬카(upekkha)라는 말이 평등이란 것은 몇 달이 지나서야 알 정도였습니다.
면담을 할 때 무슨 말인지 몰라도 수행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약간 갑갑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모두 알고 시작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르기 때문에 수행이 더 잘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수행이 잘 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수행이라는 것의 속성은 잘 안 되는 것이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잘되면 하루가 안되고, 하루 잘되면 며칠이 안 됩니다.
잘 되면 바로 좋아하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법을 얻을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좋아하면 알아차림을 놓치게되고 아만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것을 바라게 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경직되었습니다.
이것도 세월이 지나고 안 얘기이지 당시에는 알 수가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르기 때문에 고민하고 고생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을 거칩니다.
수행 중에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순간에 수행은 퇴보해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잘 되거나 잘 안 되거나 간에 바른 견해를 가지고 하는가, 바른 방법으로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수행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마음가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수행자는 무엇이나 대상일 뿐이고 그 대상은 좋은 것만이 아니고 안 좋은 것도 하나의 대상이라는 견해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좋으면 좋아하고 안 좋으면 싫어하는 것밖에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것을 대상으로 보고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무엇이 좋은지 나쁜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남들은 수행 중에 고통스런 느낌(둑카웨다나) 얘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언제 저런 것 좀 해보나 하고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좌선 중에 생기는 단순한 통증을 빨리어로 "둑카웨다나"라고 하니까 수행을 잘하면 생기는 무슨 대단한 현상처럼 동경하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4년여를 지나면서 생긴 것은 전자동으로 붙는 명칭이었습니다.
나중에 마하시를 떠나 쉐우민에서 수행을 할 때 명칭 없이 하게 되니 명칭을 붙일 때와 붙이지 않을 때의 장단점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하시에서는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부터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매우 집중이 잘 되었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되었습니다.
그 뒤 쉐우민 또야(숲)에 와서 마음을 보는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쉐우민 본원은 문명에서 원시로 온 것처럼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또한 어찌나 계율이 엄한지 생활이 쉽지가 않았지만 오직 마음보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 모든 불편을 감내하며 지냈습니다.
건물 아래층에서 자면 얼굴 위로 위층 바닥마루 틈에서 모래가 부슬부슬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쉐우민 본원은 철길 옆이며 공항과 가깝고, 늪지대에 있으며 그리고 빈민가와 붙어 있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개인용 명상모기장을 사용하지 않아 그냥 모기 밥이 되면서 수행을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터뷰가 주로 모기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사야도는 "따끔"하는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때 싫어하는 마음을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화가 날 때도 많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딱"하고 손으로 치 면 조용한 곳에서 크게 소리가 납니다.
그러고는 누가 보지 않나 얼른 주위를 돌아봅니다.
산다는 것이 괴로움이었지만 오직 청정하신 쉐우민 우 꼬딸라 사야도와 뛰어난 젊은 제자 우 떼자니아 사야도만 보고 행복 반, 불행 반의 생활을 했습니다.
참으로 스승과 법이 좋다보니 열악한 환경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한국에 와야할 일도 많았지만 이때를 놓치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지내다보면 일년이 잠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명칭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간에는 눈만 뜨면 호흡의 일어남, 꺼짐이요 오른발, 왼발이었는데 명칭을 붙이지 않을 수가 없어 고심했습니다.
명칭이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니 그간에 참으로 심각하게 중독이 되어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야도가 보라고 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지, 붙는 명칭은 떼라고 하지 그래서 적당히 나대로 수행을 했습니다.
보라고 해도 보이지 않는 마음은 보지 않고, 자동적으로 붙는 명칭은 비밀스럽게 붙이며 그냥 수행을 했습니다.
처음에 마음을 보라고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행자들이 사야도가 시킨다고 그대로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가 하던 것을 버리지 않으려는 강한 집착이 있으며, 실재로 이런 습관이 잘 고쳐지지도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하시에서 수행을 하면서 명칭 때문에 약간의 장애는 있었지만 스승으로부터 특별한 말씀도 없었고 붙는 명칭을 달리 어떻게 할 도리도 없어서 그냥 붙여왔던 것인데 이제 붙이지 않으려니 떨어지지 않아 문제였습니다.
마하시에서 호흡을 알아차릴 때 일어남, 꺼짐으로 명칭을 하는데 꺼졌을 때 "일어남"을 하고 일어났을 때 "꺼짐"이라고 명칭을 붙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경행을 할 때도 왼발을 움직일 때 "오른발" 이라고 하고 오른발이 움직일 때 "왼발" 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마하시에서 수행을 오래하다 보니 시먹은 상태로 일종의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상태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마하시의 습관이 쉐우민에 와서도 그대로 계속되었습니다.
그간에 대상을 정확히 보고 대상과 아는 마음을 일치시키지 않고 오직 명칭만 볼 때가 허다했습니다.
이것이 건성으로 수행을 하는 것인데 염불 외우는 것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도 했지만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수행이란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과 일치하는 것인데, 명칭이 붙으면 두 가지 것의 일치에서 세 가지가 일치 되어야하므로 실재를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내심 명칭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명칭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보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은 비 물질이고 미세한 것인데 관념적인 명칭이 붙으니 명칭을 보느라 미세한 마음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2개월을 고생하다가 어느 날부터 마음을 보기시작 했습니다.
참으로 한 순간에 제 마음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명칭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아직도 명칭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스승께 하소연을 하니 스승께서 그럼 그때 명칭을 붙이는 마음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좌선 중에 명칭이 붙을 때 명칭을 붙이는 마음을 보니 바로 그것이 탐심이었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지금 까지 그냥 붙는 줄 알았는데 내가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말로는 전자동처럼 붙는다고 했는데 그때의 마음을 보니 내가 철저하게 좋아서 놓지를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 명칭을 집착하고 있었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바로 그 순간부터 명칭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이 마음이 하는 것이란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어쩌면 그토록 질기게 붙던 것이 한 순간에 소멸될 수 있는지 이것이 지혜라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혜는 어둠에 전기불이 켜진 것과 같아서 한 순간에 대상의 성품을 환하게 보게 되므로 한 순간에 끊어 버리는 힘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이토록 특별한 효과가 있는 것을 경험하고 수행에 관해서 새로운 인식이 생겼습니다.
우선 수행이 매우 자연스러워 졌습니다.
인위적으로 하면 근엄해야하고 딱딱해지는데 마음을 알아차리니 물 흐르듯이 부드러워 졌습니다.
모든 것을 지나치게 천천히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무조건 천천히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덜었습니다.
평소에 조금 빠르게 할라치면 늘 죄의식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단체생활을 할 때 남을 의식해서 천천히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니 오히려 지나치게 천천히 하려는 것이 인위적이고 억지라고 알 수 있었습니다.
집중이 되어 자연스럽게 천천히 하게 되는 경우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수행은 알아차림을 위해서 반드시 천천히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폐해가 느껴졌습니다.
또한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서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많이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렇게 천천히만 하려고 하면 마음이 대상에 붙어있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안 뒤에 그냥 일상의 움직임 속에서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결국은 지금까지 알아차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한다는 것이 너무 교과서적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교과서적이라는 말은 원칙적이라는 말로 좋은 뜻이지만 너무 융통성이 없어 답답한 것이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행의 발전이 없습니다.
책에 쓰여있는 말은 원론적인 말입니다.
책은 전체적인 틀에서 완성된 말로 융통성을 가질 수가 없으며 순간, 순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수행방법에 대한 견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행에서 교과서의 필요성 또한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스승이 필요한 것이며, 또한 때로는 다른 스승의 배움도 필요한 것입니다.
수행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억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억제를 하면 그것에 대한 반작용이 있는 법입니다.
강하게 작용하면 우선은 정제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때를 기다리고 있게됩니다.
그리고 억눌렀기 때문에 그것은 전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 나옵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지요? 이것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가 평소에 억제해서 그렇게 조건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직자나 고결한 직무를 가진 분들이 의외의 스캔들에 휘말리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욕망이나 무엇이나 나타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알아차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알아차리지 못하고 억제만 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통념으로는 그런 것은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아야 하겠지만 인간적으로는 삶을 사는 방식에서 바른 방법을 몰랐을 뿐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은 선한 마음과 선하지 못한 마음을 항상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나 억제를 하면 억제한 것보다 더 큰 반발력을 가지고 튀어 오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보이는 무대 위에서 지나치게 선을 강조하면 커튼 뒤에서는 공허한 마음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때 무대 위에서와 다른 그렇지 못한 자신이 있기 때문에 의외로 그 갈등을 견디지 못해 발작적으로 지탄을 받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번뇌는 참으로 고독한 것입니다.
이것은 유명하다거나 성스럽다거나 한 직업을 가진 사람의 공통점일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럴 때 이런 마음을 다시 한번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핵심이 억제해서 보지 말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붓다가 강력하게 말하고자 하는 법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얼마 만에 비로소 마음을 볼 수 있는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1년을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 한 순간에 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며 이런 것은 관념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계속 마음이 보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계속 마음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스승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지시를 받고 상담을 해야 됩니다.
제가 2개월만에 마음을 볼 수 있었다고 했는데 처음에 저희 스승이신 쉐우민 사야도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손으로 가슴을 가르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스승이 마음을 보는 분이시고 가슴에 손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아서 마음을 그렇게 보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가슴을 통해서 무엇을 알아차리려고 했습니다.
걸을 때도 가슴에 집중을 하고 알려고 했으며, 먹을 때도, 무엇을 알아차릴 때 모두 가슴을 통해서 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가슴에 돌덩어리 같은 것이 무겁게 들어서서 어느 순간부터 마음보는 수행을 포기했습니다.
아니 마음을 보려고만 하면 가슴이 무거워서 편치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생각을 접고 지내다가 어는 순간에 탁! 하고 제 마음이 보였습니다.
그것이 2개월 만입니다.
그리고 그간에 제가 가슴을 통해서 보려고 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승의 말씀은 마음을 보고 나서 가슴에 있는 느낌을 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에는 호흡이 있었으며 맥박도 있었습니다.
한 곳에 알아차릴 대상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수행자에게는 즐거운 일입니다.
이 수행방법은 제게 있어서 참으로 새로운 신세계를 발견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보는 수행과 느낌을 보는 수행을 별도로 떼어서 염처별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방법들을 정리하여 체계화해서 마음과 느낌을 종합해서 함께 볼 수 있는 방법을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마음을 보게되니 내 마음이 너무 추악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하는 일이라고는 욕망과 화내고 미워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간에 위빠싸나뿐 아니라 이것저것 다른 수행도 했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생각되니 살고싶지 않은 혐오감도 생겼습니다.
공들인 것이 빗나갔을 때의 좌절이라서 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잠시 수행을 쉬기도 했습니다.
더 수행하고 싶지 않아서 귀국을 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스승께 그런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그것이 누구 마음이냐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이 아니고 그 순간의 마음인데 그만 내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나라고 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무아를 알고 있었지만 완전하게 알고있지 못해서 그만 좌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르면 당하고 알면 당하지 않습니다.
수행이란 좌절하는 그 마음을 봐야 하는데 그만 결론을 내고 주저앉아 버렸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을 피우는 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에 마음은 금방 숨이 넘어갈 듯이 소란을 피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일은 바르게 참견을 하는데 자기 일은 도무지 꽉 막혀서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면 자신에 대해서 혐오감을 갖는 과정은 누구나 불가피 겪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은 백말을 탄 정의의 기사로만 알았는데 음흉한 흑 기사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을 알고 보니 보잘것없다는 사실이 주는 상실감이 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기회라고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실상을 알았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좌절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아직 마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 과정을 슬기롭게 알아차리면 오히려 마음이 무엇인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이 때 그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마음은 매 순간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면서 반복합니다.
거기에 주인으로서의 나의 마음은 없습니다.
순간 순간의 새로운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과연 어느 순간의 마음이 진정한 나의 마음일까요?
이것이 무아를 말하는 것인데 무아는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같은 삼법인 중에서 무상과 고는 이해가 갈 듯하기도 한데 무아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은 매우 본질적인 법이고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생각으로 무아를 말하다가도 실재에 부딪치게 되면 무아라는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완전한 무아의 개념은 아라한이 되어야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으로라도 무아를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이 무아는 반드시 수행을 통해야 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아에 대해 지나치게 고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행자들이 때로는 아직 의식이 미치지 못해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너무 고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탐심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쉐우민에서 얼마동안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제는 "아는 마음을 알아차려 보라."는 것입니다.
우선 용어부터 복잡했습니다.
마음은 마음인데 또 아는 마음을 보라고 하니 처음에는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미묘하고, 섬세하고, 보이지 않는 것인데 도대체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신비롭기만 했습니다.
무엇이나 모르면 커 보입니다.
이제 겨우 이따금씩 마음을 보는데 다시 아는 마음을 알라는 말에 그것만 얻으면 큰 것을 얻을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이런 저런 방법으로 그것을 하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그 때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묻기도 했습니다.
보고 나서 또 보는 것이냐고 해도 스승은 아니라고 합니다.
수행자들이 그것을 못해 저마다 안달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에 천신만고 끝에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방법을 성취하고 의기양양하게 수행을 해나갔습니다.
그래서 매번 인터뷰 때마다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을 본 것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는 중에 어느 날 한 순간에 이번에는 제대로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알고 보니 지금 까지 알았던 방법이 완전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약간 계면 적기도 하였지만 사야도께 사실대로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새로운 방법이 맞는 방법이라고 말해주셨습니다.
제대로 된 방법을 스스로 알고 나니 그렇게 싱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몰라서 그렇게 대단하게 보였지 그저 간단한 하나의 수행방법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무렵 쉐우민에 다녀가는 수행자들을 통해 쉐우민은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을 보는데 대단하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한국에서는 쉐우민을 말할 때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을 본다고 하여 특별하고 신비한 것처럼 일부에서 회자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의 수행경험이 계신 지도자도 제가 귀국했을 때 몇 차례나 그것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별것이 아니고 마음을 보는 수행을 하다보면 집중이 된 상태에서 새로 마음을 내서 보는 방법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수행 중에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을 본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였습니다.
누구나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아는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좌선 중에나 수행 중에 알아차리고 있을 때가 있고, 또는 알아차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지금 현재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보는 수행자들은 때때로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봅니다.
또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있는가?"하고 새로 마음을 내서 보게 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수행 중에 어느 때 마음을 새로 내서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를 점검을 합니다.
이렇게 점검을 하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통증과 싸우고 있는 경우도 있고, 졸음에 빠지기 직전에 있는 상태도 있고, 그냥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상태를 알아차리고 다시 한번 알아차림을 새롭게 합니다.
이것은 수행 중에 언제나 현재로 돌아와서 마음을 점검하는 매우 좋은 수행방법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었다면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알아차림을 계속하게 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고 다시 한번 이것을 새로 아는 바로 이 방법이 아는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 또 알고 하는 것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려면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새로 마음을 내야 합니다.
수행을 하다가 한 순간에 이렇게 마음을 내니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을 하게되어 아! 이것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요약해 보면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망상에 빠져있을 때는 망상에 빠진 줄을 알고, 졸고 있을 때는 졸고 있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하고 있을 때는 지금 알아차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고 이것을 알게됩니다.
이것이 아는 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알아차렸는데 현재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는 이 기회를 통해서 다시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만약 알아차리고 있었다면 계속해서 더 자세히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방법이 왜 필요한 것일까요?
이처럼 알아차리고 있을 때 다시 알아차려서 보게되면 대상이 훨씬 자세히 보이고 밀밀하고 성성적적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의 알아차림보다 대상이 강력해 지며 정확히 밀착됩니다.
이것은 마치 망원렌즈로 사물을 당겨서 볼 때처럼 한 순간에 자세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수행자가 어떤 것이든 대상을 붙잡고 알아차림을 할 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알아차림(sati)과, 집중(samaadhi)과, 노력(viriya)입니다.
그래서 이상의 세 가지 수행조건이 항상 알맞게 갖춰져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을 할 때의 기본조건입니다.
여기에 추가되는 것이 있다면 믿음과 지혜입니다.
제일 앞에서 확신에 찬 믿음이 이끌어주고 가운데에서는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이 조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적절하게 균형이 맞으면 그런 상태에서 비로소 지혜가 나게 됩니다.
이것을 다섯 가지 근기라고 하여 오근(五根)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행(行)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언제나 이 세 가지의 조화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수행의 발전이 없습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므로 수행 중에 항상 알아차림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 마음을 내야합니다.
그래야 알아차림이 지속될 수 있고 자연스럽게 고요한 집중이 생기며 지혜가 나게 됩니다.
알아차림에 의해 고요한 집중(samadhi)이 생기면 알아차림이 더 강화되어야 합니다.
고요함으로 인해 알아차림과 혼침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집중에 빠지면 매우 미세한 한 순간에 잠으로 떨어집니다.
집중에도 강도가 있기 때문에 어떤 집중의 상태인가에 따라 졸음이냐 깨어서 아느냐 하는 칼날 위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생기면 이 때 또다시 아는 마음을 아는 알아차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위빠사나는 사마타(samaatha) 수행과는 달리 한 대상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대상 자체가 몸과 마음인데 이것들은 아는 것은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느낌은 매 순간 변하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차림을 한다면 깊게 들어갈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찰나집중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집중은 깊은 집중이 아니고 찰나 집중(khanika samaddhi)이어야 됩니다.
이런 집중에 의해서 대상의 성품을 알게 되어 지혜가 납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을 새로 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깊게 들어가면 선정의 상태가 되어 고요함과 멈춤만 있습니다.
이것이 사마타수행입니다.
이 수행은 깊게 집중하여 대상과 하나가 되는 주관적인 수행입니다.
그리고 지혜를 얻기보다 우선 고요함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고요함을 얻고 나서 위빠사나의 지혜수행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대상과 아는 마음으로 분리해서 주시하는 객관적인 수행입니다.
수행은 알아차리는 대상이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단조로우면 마음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달아납니다.
그래서 재미를 위해 대상의 변화를 보아야 합니다.
대상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 새로운 것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흥미를 잃지 않게 됩니다.
대상의 변화를 보면 수행의 진전이 매우 빠르게 됩니다.
변화는 대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을 알게되어 지혜가 나게 됩니다.
대상의 변화 속에 대상의 성품이 있습니다.
또한 대상의 변화란 내 마음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도 알게됩니다.
대상을 좋아했다거나 싫어했다거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대상을 통해 일어난 마음의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수행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항상 스스로 활로를 열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말은 수행이란 자동차를 타고 자신이 운전을 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자신의 직접적인 참여가 수행입니다.
운전을 한다는 것은 교통법규를 지키면서 온갖 상황을 스스로 대처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게으른 자는 수행을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게으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는 게으름을 피우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알아차림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긍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요약하면 마음을 늘 새로 낸다는 것이 오직 아는 마음을 아는 길로 가는 통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을 새로 내는 것이 노력을 하는 것으로 수행에서 에너지의 역할을 해주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마음을 새로 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좌선 중에는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눈을 감고 좌선을 시작하면 평소의 수행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고 오직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흐름이 펼쳐지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의도적으로 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흐름의 물결을 타게 되므로 이성적인 새 마음을 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려워도 마음을 새로 내야 합니다.
이것이 발심(發心)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새로 내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노력입니다.
마하시에서 수행을 할 때 스승들은 노력을 강화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노력을 어떻게 강화하느냐고 물으면 경행을 하라고 합니다.
사실 경행도 노력이 없으면 안 되는 수행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을 새로 내는 것이야말로 매순간 노력을 하는 제일 확실한 노력입니다.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가 가능한 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진입하지만 여기에는 청정한 마음의 집중이 있어야 됩니다.
처음에 거친 상태에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고요한 집중이 있는 상태라야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 밀밀한 알아차림의 상태로 됩니다.
마음을 새로 내서 알고있는 마음을 본다고 해도 집중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냥 보통의 알아차림에 불과한 효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있고 마음을 보는 수행자만이 이것을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는 마음을 아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라고 새로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을 아는 것과 마음을 새로 내서 본다는 것은 같은 뜻을 가진 말이기도 합니다.
바로 현재의 마음을 또 새로 일어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깨어있는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마음은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개념이 정리가 되면 더 빠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니까 대상을 오래 붙들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아는 마음을 아는 수행을 했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다 귀국을 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다시 미얀마에 수행을 하러 갔을 때 다시 아는 마음을 아는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전에는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가 잠시만 지속되다 말았습니다.
그러나 미얀마에 다시 가서 새로 수행을 하다보니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 한시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놀라기도 하고,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서 이것이 과연 무엇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가 순간적으로 생겼다가 마는 것 인줄 알았는데 오래 동안 지속되는 것에 일말의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혹시 신들린 것 아닌가 할 정도로 한 시간 내내 같은 상태가 유지되니 무어라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야도께 이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하는 것인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한 시간 동안 그렇게 보았다면 이제는 한 시간만 그렇게 보지 말고 하루종일 그렇게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한번 놀랐습니다.
그제야 이렇게 하루종일도 볼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청정하게 대상을 오래 주시할 수 있었던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정상적인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알아차림으로 안 되는 것이 없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의 수행상태는 한시간 내내 맑게 깨어서 대상을 볼 수 있었고 망상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 잠깐동안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한 시간 내내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새로 내는 것이 매 순간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힘이 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법의 힘으로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힘들지 않고 오히려 더 편안하고 더 분명하게 깨어있는 상태가 지속됩니다.
어떤 때는 수행을 하면서 매우 좋은 상태가 와도 두려운 마음이 들고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제대로 하는 것인지 일말의 불안과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습성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모두 처음 경험하는 것뿐이라서 스승의 지도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만약 확신이 서지 않으면 좋은 현상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게 됩니다.
스승은 바로 이때 좋은 것은 인정해 권장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줍니다.
그리고 나약해지는 마음을 새로 일으켜 줍니다.
스승의 중요성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좋은 법을 만나는 것,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 좋은 도반을 만나는 것 이것은 그냥 오지 않는 것입니다. 반
드시 선업의 공덕이 있어야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업이 없어 만나지 못한 스승 탓을 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어느 날 쉐우민에서 우리를 지도하시는 우 떼자니야 사야도와 면담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자기가 큰스승이 계시는 다른 곳에 가서 생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 꼬딸라 사야도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소바지공이라는 곳에서 요양을 하고 계신데 그곳에 가서 생활을 해야 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터뷰를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외국인 수행자들이 쉐우민에 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센터로 가느니 이곳에 있으면서 사야도가 계시는 곳으로 가서 일주일에 한번씩만 인터뷰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스승께서는 일주일에 한번 면담을 하면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열악한 교통편도 문제였습니다.
스승은 최소한 일주일에 두 번은 면담을 해야 바르게 수행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간에 잘못된 길로 가면 자기가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야도께서 그냥 우리를 지도해주는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책임을 지고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수행자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새로운 것입니다.
똑같은 호흡을 보아도 그것은 같은 호흡이 아닙니다.
새로 일어난 호흡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은 경험하지 않은 신천지를 가는 것이기 때문에 안내자가 없이는 바르게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버려 두면 수행자가 99%를 잘못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오직 혼자서 갈 수 있는 분은 붓다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삼마삼붓다라고 말합니다.
스승 없이는 어렵다는 말은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깨어서 알아차림의 상태에 있을 때는 선업의 마음이지만 알아차림이 없을 때는 불선업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마음이 항상 지속될 수 없기에 선업의 마음은 잠시입니다.
또 선한 상태의 알아차림을 한다고 해서 바른 수행방법으로 수행을 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수행을 하면 매 순간 또는 도처에 장애가 있습니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면 장애가 없을 때보다 더 좋은 것이지만 거의는 장애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의식이 고양되어 지혜가 나는 길은 멀지만 잘못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불선업의 마음 상태에서는 고정관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탐진치가 내 마음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면담이 없으면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수행을 할 때 내가 한다는 유신견으로 인해 아만심으로 수행을 하기 때문에 바른 수행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갖게된 고정관념에 대해 확신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지식은 잘못된 정보로 저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에 의해 저장된 정보만이 바른 것입니다.
평소의 우리의 견해는 잘못된 탐진치의 상태에서 형성된 고정관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살면서 자신의 견해에 대해 지나치게 고집을 피울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무지입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들의 수행을 위해서 우 떼자니아 사야도가 큰스승이 계시는 소바지공으로 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 외국인 수행자들은 쉐우민에서 수행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좋은 경험은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아만심을 수반합니다.
수행이 잘된다거나 새로 지혜가 나면 좋아하게 되고 한 순간에 교만해지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때의 마음은 미세해서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잘 안될 때보다 잘 될 때가 위험합니다.
좋아하게 되면 잘 되던 수행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런 때마다 "지금 내 마음이 좋아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놓친 것이고 탐심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탐심의 상태를 알 수가 없으므로 수행이 안 되는 이유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얼마간 수행이 왜 안 되는지 이유도 모르고 고생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안 뒤에 다른 많은 의문이 풀렸다는 사실입니다.
쉐우민 또야(숲)의 우 꼬딸라 사야도께서는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로 마하시에서 수행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우 빤디따 사야도보다 먼저 마하시에서 수행을 하시고 그 뒤에 우빤디따 사야도가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 꼬딸라 사야도께서는 그 뒤 마하시를 떠나 쉐우민 숲으로 가셔서 별도의 수행을 하셨습니다.
이때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하시면서 마음보는 심념처 수행을 집중적으로 하셨습니다.
쉐우민 사야도는 지금까지 미얀마에서 오직 유일하게 마음보는 수행을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에게 마음을 보는 수행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가르침을 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그렇게 많은 제자를 두지는 않으셨습니다.
미얀마에서 우 조띠까 사야도가 마음보는 수행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제자를 두고있지 않고 공개된 수행법의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습니다.
간혹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위빠싸나 수행이 신, 수, 심,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므로 당연히 네 가지 안에 마음에 대한 것이 있는데 무슨 마음을 보는 수행이라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것도 마음을 보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마음을 보는 수행을 한다는 것은 네 가지 대상 중에서 마음이 마음을 주 대상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사념처 수행은 대체로 마음이 몸을 본다는 것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있어서 몸을 보기 때문에 이것도 마음보는 수행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마음보는 수행이란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방법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보는 마음과 대상으로써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대상이 되는 마음이 법에 속합니다.
이 수행방법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스승이 쉐우민 사야도이십니다.
물론 다른 사야도께서도 마음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지만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신, 수, 심, 법이기 때문에 당연히 마음이 들어가지만 주된 대상으로 삼을 때의 마음을 보는 수행은 누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오직 마음을 보는 수행만을 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야도께서는 마하시 방식의 사념처 수행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cittanupassanaa)을 주 대상으로 하고 계십니다.
현재 마하시 방법의 다른 사야도들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말씀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다.
모두들 특별히 마음보는 수행을 하지 않으시고 4념처를 종합적으로 하셨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몸의 호흡을 보는 신념처와 느낌을 보는 수념처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쉐우민 방식은 마하시 방식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포함된 유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럼 마하시에서는 마음보는 수행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 마하시에서도 마음보는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4념처 수행을 하므로 네 가지 대상 안에서 당연히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만 호흡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특별하게 마음을 주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야도께서 강조를 하지 않으실 뿐 사념처 안에 있는 심념처 수행방법을 외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글이 시작될 때 처음에 밝힌 것처럼 제한적으로 앎을 하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앎"은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을 때 그것을 아는 "앎"을 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몸이 사라지고 호흡이 사라졌을 때 볼 것이 없으므로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입니다.
이때도 "앎"을 하라고 합니다.
"앎"에 대하여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마하시에서 수행을 할 때 55일 만에 호흡이 사라졌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앎을 보라고 했습니다.
앎이 뭐냐고 물으니 그냥 아는 마음이라고 했다.
이것은 마하시 사야도께서 밝힌 앎을 보는 수행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앎"이라는 단어에 매달려 이것이 무엇인지를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사야도와 통역에게 도대체 앎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아는 마음이라고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당시에 "앎"이라는 이것은 실재하는 현상이 아니고 일종의 화두였습니다.
무엇인지 모르겠기에 어떤 때는 "앎", "앎"을 외우다가 다시 "아는 마음", "아는 마음"하고 염불을 외웠습니다.
그래도 이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 항상 움직이는 대상인 호흡만 보다가 갑자기 호흡이 사라지니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일부러 호흡을 만들어서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또 호흡이 사라졌습니다.
없어진 호흡을 일부러 만들면 안 된다고 하는데 볼 것이 없어서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서 해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호흡뿐 아니라 몸의 느낌도 사라져서 아무 것도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터뷰 때 사야도와 통역이 저를 보고 웃으면서 저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두 분의 대화가 계속된 뒤에 말이 없어서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으니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재차 무슨 말을 했느냐고 다그쳤더니 사야도께서 한 삼일 정도만 잘하면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만 "삼일"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 삼일만 잘 해보자.
뭐가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뭔가 좋은 것이 올 것이다.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앎"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붙들고 강하게 밀어 부쳤습니다.
그러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면서 뭔가가 오면 이것이구나 하고 그 현상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늘고 약한 예리한 느낌이 올아 오면 이것이 이제 왔구나!,하고 반기다보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뭐나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이것이 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타나면 다시 그것을 반겼습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다 보니 나중에는 작은 외길 같은 느낌이 커다랗게 뚫린 대로처럼 거침없이 쑥쑥 올라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이것이 상기가 되어 수행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최초에 있었던 작은 느낌이 상기의 조짐이었던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항상 반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기 현상이 생기니 이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끝으로 강한 기운이 뻗치면 그만 두려움에 놀라서 얼른 집중을 포기하곤 했습니다.
이 현상은 좌선을 할 때나 경행을 할 때나 일상의 알아차림을 할 때나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중증의 상태가 되어서야 이것이 상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머리끝으로 강한 기운이 뻗쳐 올라오면 머리가 터지지나 않을까, 이러다 정신이상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이것처럼 기분 나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수행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시간이 되면 계속 이런 상기 현상을 말해도 사야도께서는 그냥 알아차리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한국인 통역에게 물으면 용을 써서 그렇다고만 합니다.
용을 쓰기는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치료 방법이 없어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낯선 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참으로 고립무원 했습니다.
이제는 수행이 문제가 아니고 병이 문제였습니다.
차츰 수행을 하지 않을 때에도 이런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선원의 후미진 한 곳으로 가서 노래하는 새들도 보고,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토란 잎 위에서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방울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 속으로 노래도 흥얼거리기도 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잎들이 가지런히 누어서 일렁이는 물결을 보기도 했습니다.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싱그러운 바람에 전해오는 꽃향기가 얼굴을 스치면 흠씬 남국의 정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든 행위는 어쨌거나 수행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이제는 수행을 안 하려고 노력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오직 상기가 오지 않도록 하려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물러날 수 없는 양자간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수행을 포기하고 귀국을 하거나, 아니면 죽어도 좋으니 정면으로 돌파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나이 50에 살만큼 살았고 돈도 명예도 얻었었고 해볼 것도 다 해봤는데 삶에 무슨 미련이 있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또한 이 병을 가지고 귀국을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데 죽거나 살거나 여기서 해결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조용히 앉아서 좌선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강한 기운이 머리위로 솟구쳤습니다.
전에는 그런 현상이 생기면 얼른 포기를 하고 수행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두려움 없이 가만히 그런 현상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머리까지 올라온 뒤에 어떻게 될 줄 알았더니 머리에 가만히 머물고 있었습니다.
상기도 머물고, 지켜보는 저도 가만히 주시했습니다.
일종의 겨루기였지만 저는 조건이 없이 그냥 지켜보았습니다.
죽기를 각오했는데 두려워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얼마간 강한 기운이 버티다가 제가 반응을 하지 않으니까 제물에 스러지듯이 안개처럼 살며시 머리 한쪽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참으로 긴장된 순간이었지만 저도 배수진을 친 입장이라 더 물러설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더니 머리가 맑아지고 상쾌한 기분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는 상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문제를 피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한 순간의 선택으로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살기를 각오하면 오래도록 죽어서 지내고, 죽기를 각오하니 한 순간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참으로 싱겁게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이제 상기가 해결되니 수행이 더 가속화되었으며 모든 것이 지나간 한 순간의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새로 수행을 하느라 언제 상기가 있었는가에 대한 기억도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앎"이었습니다.
아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몰라 헤매다가 밀어 부친 결과가 상기였습니다.
나중에 안 이야기로 한국인들이 이 대목에서 상기가 많이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얀마 수행자들은 상기가 잘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처럼 용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잘 알려주지 않아서 원망스러웠던 사야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야도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결국 알아차리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다만 두려움 때문에 피하거나 없애려 하거나 해서 치유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앎"에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몸의 호흡을 위주로 알아차리다가 호흡이나 몸이 사라졌을 때 마음을 대상으로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흡을 위주로 알아차림을 하더라도 평소에 앎에 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결국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은 앎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일이라는 말에 걸려서 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라는 마음으로 탐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앎은 아는 마음입니다.
이때 마음은 비 물질이라서 물질을 보는 것처럼 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호흡이 사라진 뒤에 앎을 할 때는 호흡이 사라진 것을 아는 앎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수행 중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잘못된 인식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앎을 하면 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할 때 특별한 것을 알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선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할 때 보려고 하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내가 마음을 보려고 하고 있구나 하고 아는 것이 보려고 하는 현재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한문에서 나온 관(觀)이라는 단어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지 이때는 느낀다, 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몸과 호흡이 사라지고 볼 것이 없어서 앎을 할 때 대상으로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고요한 것도 대상입니다.
그리고 덤덤한 것도 대상입니다.
이것은 몸의 느낌이 아니라 마음의 느낌입니다.
그리고 현재로 와서 현재를 보는 것도 대상입니다.
또한 마음은 흐름입니다.
현재라는 시간에 마음을 고정하면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됩니다.
이 현재라는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흐름을 대상으로 보면 됩니다.
저와 함께 수행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이것을 강조해서 좌선을 리드합니다.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합니다.
때로는 그냥 현재를 알아차리게 하기도 합니다.
이때는 시간의 흐름을 알아차리도록 합니다.
그래서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새로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기, 일어날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합니다.
일어날 마음은 하려는 의도의 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평소에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은 다양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복잡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공식은 하나 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래 간단치 않기 때문에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양할 뿐입니다.
마음은 총 121가지의 종류가 있지만 이것은 상황에 따른 마음이지 마음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상기 현상에 대하여 덧붙이자면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한번 상기가 온 사람은 언젠가 다음에도 또 상기가 나타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상기는 적극적인 성향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언제나 그 성향이 다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번 상기가 온 사람은 인간의 성향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언제고 다시 수행을 시작하면 다시 상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다음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상기는 전에 하던 노력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더 낮은 자세로 더 진중 하게 대해야 합니다.
한번 경험해서 없앨 수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면 그런 현상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성향을 축적된 성향이라고 하며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 생긴 것이라서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을 바꾸려 하지말고 다만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쉐우민에서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은 마하시 사야도께서 말씀하신 앎과 같은 것인데 수행방법에 따라서 약간 다르게 사용합니다. 쉐우민에서 말하는 것은 새로 마음을 내서 현재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합니다.
이것을 좀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알아차린다는 뜻의 노팅(noting) 하는 것을 다시 지켜본다는 뜻의 워칭(watching)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는 것을 다시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는 마음을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집중력이 있어야 되는데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이해가 쉽습니다.
흔히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볼 때 두 가지 것을 한 번에 보게되는 것 같이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어느 경우에 뒤나, 또는 위에서 또 하나의 자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경우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있는데 다시 이것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자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되는 때입니다.
바로 이것이 "알아차리는 것을 다시 지켜보는 것"과 같은 종류의 정신상태입니다.
이런 경험은 집중이 된 상태에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은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보려는 노력에 의해서 되는 현상입니다.
여기서 아는 마음을 다시 안다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두 가지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보이는 것은 마음이 빠르게 움직이며 보기 때문에 자신을 다시 지켜보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주석서에서 말하기를 마음이 존재하는 한 순간, 한 생각의 지속기간은 빛이 번쩍 하는 순간의 백만 분의 일보다 적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지속하는 것은 극히 짧은 찰나에 일어나서 찰나에 사라집니다.
바로 이런 현상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유체이탈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쉐우민에서 말하는 아는 마음을 아는 것과, 마하시에서 말하는 앎에 관한 방법이 같은 유형이라는 것은 제가 마하시와 쉐우민에서 모두 수행을 했기 때문에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두 곳에서 수행을 경험하고 나서 비로소 스승들의 수행방법이 각기 다르게 약점이 보완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하시에서는 먼저 사마타 수행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위빠사나로 수행을 합니다.
이것을 순수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수행 초심자들의 경우는 처음부터 위빠사나로 시작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자꾸 달아나서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께서 일차적으로 대상에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서 명칭을 사용했음을 알았습니다.
명칭은 초기에 매우 효과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별도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시다 보니 명칭이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세한 느낌이나 마음을 보려면 명칭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명칭은 거친 것으로 관념적인 것이지만 느낌이나 마음은 미세하고 실재하는 것인데 명칭이 이것들을 알 수 없도록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명칭이 없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명칭 없이 알아차림을 하다보니 대상을 지속해서 알아차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제 경우도 전에 명칭을 붙였을 때는 대상을 오래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이제 명칭이 없으니 마음이 대상에 오래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대상을 지속적으로 주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빨리어로는 아누빠사나(anupassanaa. 隨觀)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보기 시작하니 뿌리를 볼 수 있어서 수행 효과가 탁월하지만 오래 대상을 주시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생긴 방법이 아는 마음을 아는 것으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로 수행을 하게되니 오랫동안 대상이 끊어지지 않고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두분 사야도께서 수행방법을 보완하여 지도해 주신 사실에 대하여 알고 난 뒤 스승들에게 존경심이 절로 우러났습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붓다에 대한 믿음, 법에 대한 믿음, 상가에 대한 깊은 믿음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붓다와 스승들에 대한 공경심으로 초기에는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이것이 법열입니다.
닙바나(열반)에 드는 수행과정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에 사마타를 하고 나서 위빠사나로 넘어오는 방법, 위빠사나를 하다 사마타로 들어가는 방법,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섞어서 하는 방법, 처음부터 위빠사나로 출발해서 위빠사나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네 번째를 순수 위빠사나라고 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마하시 방식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닙바나에 들기 위해서는 사마타가 필요하지만 해당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방법이나 위빠사나를 통하지 않고는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순수 위빠사나 방법을 하셨기 때문에 초기에 집중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사마타 방법의 하나인 명칭이라는 빤냐띠(pa~n~natti)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수 위빠사나지만 약간 보완을 하는 차원에서 사마타적 요인인 명칭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런 수행방법에 대한 선택은 오직 수행자들을 돕기 위한 사야도의 자애로운 선택이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문제가 있다면 명칭 때문에 실재하는 성품인 빠라마타(paramatha)를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하시에서도 수행이 계속되면서부터는 꼭 명칭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적당히 알아서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명칭을 사용하므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붙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뗄 수가 없게 됩니다.
저의 경우로 비추어 보아도 한때 명칭으로 재미를 단단히 보았는데 그것을 버려야 할 때를 몰라 오히려 명칭의 폐해를 거론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더 확실히 갖게 된 것은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을 보고 나서입니다.
명칭을 붙이지 않고 마음을 보기 시작하니 참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느낌과 마음을 볼 수 있어 스승께 매우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몇 년 동안 마음보는 수행을 하면서 느끼기 시작한 것이 집중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이 한 자락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바로 전처럼 깊은 집중력이 생기지 않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명칭을 쓸모 없는 것이라고 헌신짝처럼 버리고 마음만 보았는데 돌이켜 보면 그 좋던 집중이 잘 안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 뒤에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음보는 수행법에 서서히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시는 마하시에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명칭을 붙이던 그 때의 집중력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부터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놀라운 집중력이 생기기 시작하여 비로소 알아차림이 오래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마하시 방법에서는 초기에 명칭이 효과가 있었고, 언제부터 명칭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수행자가 소멸의 지혜의 단계에 가면 명칭이 자동적으로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것도 사람 나름입니다.
쉐우민에서는 마음을 보기 위해서 명칭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는데 마음을 보아야할 때 명칭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보는 수행을 하게 되면 결국 언젠가는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을 보아야 제대로 마음보는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집중력 때문입니다.
쉐우민의 우 꼬딸라 사야도께서 제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어 매번 막힌 물꼬를 터 주셨습니다.
한번은 귀국인사를 하면서 쉐우민 사야도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제가 수행을 하면서 명칭을 안 붙이니 마음을 볼 수가 있어서 매우 좋았습니다. 스승님께 감사 드립니다."
"....."
"그런데 명칭을 안 붙이니 대상을 오래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여러 가지로 고심했습니다.
대상을 오래 볼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왜 오래 보려고 하느냐. 있는 그대로 보아라."
이렇게 사야도께서는 단 한마디로 왜 오래 보려고 집착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오래 유지하는 것이 수행자의 일차적 목표인데도 그냥 보면 되지 왜 오래 보려고 하느냐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오래 볼 수 없으면 볼 수 없는 것을 알아차리면 되지 어떻게든지 오래 보려고 하고, 또 그렇게 보아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이 사야도의 눈에 보였던가 봅니다.
이때의 제 마음은 수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특별한 묘수라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큰스승은 의례 남이 모르는 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구나! 오래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오래 알아차리려고 집착하는 것은 문제가 있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스승은 제가 가지고 있는 불만이 탐욕인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묘수였습니다.
우리는 늘 특별한 것을 찾는데 특별한 것이란 현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꾸 법을 다른데서 구합니다.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직 지혜가 성숙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귀국을 하는 비행기 안에서 "아! 훌륭하신 스승님이시어-" 하고 쉐우민 사야도께 내내 깊은 존경심을 가졌습니다. 누구나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까지 집착이니 버리라고 하는 말을 누구에게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한 번은 수행 중에 쉐우민 사야도께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호흡이 사라졌습니다. 그러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호흡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있는 호흡을 알아차려라."
그래서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얼굴을 붉히며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호흡이 사라져서 볼 수가 없는데 없는 호흡을 어떻게 보라는 말 인지요?"
이때 제가 퉁명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니 사야도께서는 저를 흘끔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신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사야도는 시선을 내리깔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는 마음을 보아라."
저는 다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는 마음을 우리말로는 "앎"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애매합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은 평소에 앎에 대해서 미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일어난 마음이 먼저 일어난 마음을 보아라."
다시 질문을 드렸습니다.
"제가 이 문제로 고통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자세하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다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마음을 새로 내서 보아라."
지금까지 앎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확연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로 낸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새로 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보기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가 마음을 보려고 마음을 새로 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무렵에 쉐우민에서 수행을 하면서 여러 가지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마하시에서는 호흡이 사라지면 앎을 하라고 하는데 쉐우민의 작은 사야도께서는 자꾸 호흡이 사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보라는 말만했기 때문입니다.
호흡을 말할 때 보통은 알아차림이 약해서 잘 볼 수 없는 경우에도 호흡이 사라졌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알아차림과 집중이 안되어서 호흡을 볼 수 없는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 가면 호흡이 미세해서 감지할 수 없는 상태가 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자꾸만 호흡이 있다고만 하니 참으로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작은 사야도께서 호흡이란 원래 있는 것이니 다시 자세히 보라고 하여 더 깊게 집중을 해서 보면 다시 호흡이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호흡을 찾아서 보려하니 만들어진 감이 없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미 호흡이 사라진 뒤에 앎을 알아차리는 것을 마하시에서 많이 경험한 상태라 이런 수행방법에 대한 불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겹이 무수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려가고, 또 다시 더 내려가고 해도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여튼 더 보라고해서 보면 거기에 더 깊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불만이 있었지만 이런 수행방법도 경험해보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디한번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며 수행을 하다가 귀국을 할 때 큰스승에게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쉐우민에서 귀국질문은 한번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귀국을 세 차례나 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큰스승에게 인터뷰를 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지도를 받는 사야도가 있기 때문에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큰스승도 작은 스승과 똑 같이 호흡은 있는 것이니 자세히 보라고 하셔서 같은 말에 제가 발끈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발끈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큰스승은 호흡이 사라진다는 것을 인정하셨고 그 뒤에 앎을 알아차리는 확실한 방법까지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보다 구체적인 방법까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수행 중에는 항상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제는 마음을 보는 수행을 오랫동안 하다보니 오직 마음으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앞서 밝힌 것처럼 오래 집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보는 수행이 좋은 것이고 수준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제 심념처(心念處)만을 고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심념처만 해서 수행이 효과가 있으면 더 할 수 없이 좋겠지만 마음만 붙잡고 있으니 어딘가 부실한 면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전면에서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했을 때 알아차리는 방법인데 집중력이 좋을 때는 괜찮지만 집중력이 없을 때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는 호흡이 있는 배로 간다던가 몸의 느낌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마음만 보고 있으면 이내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약해지고 맙니다.
수행을 할 때는 아무리 좋은 수행방법이라도 노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한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면 안 됩니다.
위빠싸나는 다양한 수행대상과, 수행방법이 있다는 것이 최대의 강점이므로 수행방법도 때에 따라서 탄력적으로 운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혼자서 만들어 가는 작품에 속합니다.
여기서 가장 선행되는 것이 노력입니다.
알아차림도 노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한 순간도 계속될 수 없습니다.
노력은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내가 열반으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생겨도 그냥 마음만을 붙잡고 있다보니 수행이 지지부진해졌습니다.
이때는 마음보는 수행이 최고이므로 다른 것은 별 볼일 없다는 배타적인 이기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수행방법을 바꾸어 스스로 단계를 만들어서 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시작해봤습니다.
이때 또다시 제게 깨우침을 주신 분이 쉐우민의 우 꼬딸라 사야도이십니다.
이렇게 자신의 수행에 대해서 불만이 생기자 어렵게 면담을 신청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호흡을 주시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드렸습니다.
"마음을 주 대상으로 하는 심념처 수행 위주로 하니 어떤 경우에는 몸의 느낌이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몸에서 느낌이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소홀히 하고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러자 사야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이 중요한 것이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노 스승의 깊게 들어간 눈에는 자애로움이 그득하셨습니다.
그리고 단호함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열반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스승을 뵈온 순간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거의가 전면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사야도의 이 말씀에 사념처 신, 수, 심, 법의 고른 활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보는 수행도 중요한 것이지만 마음보는 수행과 함께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중요성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시는 쉐우민사야도께서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가 중요한 것이야."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념처의 필요성이 절실했습니다.
그렇다! 마음을 본다고 몸을 보는 것을 소홀히 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위주로 보시는 큰 스승님께서 몸을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셔서 4념처의 균형 잡힌 수행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자신 있게 저 나름대로 염처별로 나누어서 세분화된 수행방법을 실천해 보았습니다.
물론 경전 안에서, 스승의 가르침 안에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이렇게 4념처를 매 염처별로 나누어서 해보니 안될 것도 없었습니다.
이미 기본적으로 하는 신념처 외에 수념처, 심념처 만으로 수행을 해보기도 했었습니다.
한시간 동안 느낌을 보기도 하고, 한시간 동안 마음만 보기도 했습니다.
느낌을 보는 것은 가슴의 창에서 마음의 작용인 느낌을 보니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염처별로 수행을 하는 방법을 하나 하나 만들어 갔습니다.
염처별로 독립해서 수행방법을 계발할 수 있었던 결정적 배경은 심념처입니다.
마음보는 수행을 모르고서는 염처를 구별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마음을 알아차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염처별 수행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쉐우민 사야도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이 우러났습니다.
쉐우민 사야도께서 마음보는 방법을 알려 주신 것 외에 가슴에서 느낌을 보는 방법을 알려 주신 것에다가 고엔까 수행방법에서 느낌을 보는 방법까지 접목을 하니 하나의 훌륭한 수념처(vedananupassana)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염처별로 나누어서 수행을 해보니 이것이 바로 경전에서 말하는 4념처를 염처별로 나누어서 하는 수행방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염처별로 나누어서 수행을 하도록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염처별로 나누어서 수행을 하게 된 배경도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다보니 그런 것들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수행법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위빠사나 수행이라도 스승에 따라서 약간의 방법이 다를 수 있음은 이미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 중에 호흡하나만 가지고 말하자면 어느 스승은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오직 배의 호흡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경우에는 호흡에 모든 우선권을 두지 않습니다.
호흡은 항상 볼 수 있는 것이고 호흡이 아닌 느낌, 통증 등등 다른 대상이 나타나서 마음이 그곳으로 갔으면 그것을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없어졌을 때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것이 순수 위빠사나의 자연스러운 수행방법에 따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좌선을 하면서 나타나는 대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을 계속했습니다.
이때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주시하기만 했습니다.
그랬는데 얼굴에 가려움과 미세한 느낌이 한 시간 내내 계속되어 그것만을 알아차리다 보니 한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뭔지 부족하고 수행을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터뷰 때 사야도께 말씀드렸습니다.
"얼굴에 가려움과 여러 가지 느낌이 많아서 한 시간 내내 느낌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호흡을 한번도 못 보아서 수행을 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무엇이나 알아차렸으면 됐지 꼭 호흡만 알아차려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한 번은 이렇게 말씀드린 적도 있습니다.
"가슴에서 일정하게 호흡이 나타나서 얼마간 계속 호흡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좌선이 끝나고 나서 보니 호흡인줄 알고 붙잡고 있었던 것이 호흡이 아니고 맥박이었습니다.
대상을 잘 모르고 했구나 하고 아쉬웠습니다."
사야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맥박이나 호흡이나 모두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다.
수행자는 어떤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나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맥박도 하나의 대상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호흡을 위주로 하는 신념처 수행뿐이 아니고 수념처 하나만으로도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 방법을 익혀나갔습니다.
수념처는 심념처와 함께 쉐우민 사야도께서 주장하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야도께서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린 뒤에 가슴으로 가서 마음으로 인해 일어난 느낌을 주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호흡으로 가면 신, 수, 심, 법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을 모두 다 하는 셈입니다.
이때 저는 가슴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을 계발하느라고 약 2개월 동안 줄기차게 가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에 대한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물론 사야도께서 귀찮았겠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같은 질문에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사야도께서나 동료 수행자들은 제가 수념처 수행방법을 완성하느라고 그런 줄 몰랐을 것입니다.
이때 마음의 작용 중에서 느낌에 대한 질문을 하여 제가 의문을 풀기도 했지만 다른 쟁점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나서 마음이 일으킨 느낌을 저는 가슴에서 보는 것으로 말하고 작은 사야도는 왜 가슴에서 봐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서로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작은 사야도는 가슴보다 머리를 강조하시고 저는 가슴을 강조하여 약간 견해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대놓고 옳고 그름을 말하기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실재로 가슴에서는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心所]이 있는데 이것이 느낌입니다.
저는 쉐우민 사야도의 방식대로 가슴에서 느낌을 보는데 작은 사야도는 머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귀국을 하고 어느 날 불현듯 작은 사야도의 방식에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사야도는 마음이 일어나면 먼저 머리에 강한 현상이 나타나고 저는 마음이 일어나면 가슴부터 콩닥거렸기 때문에 가슴의 느낌을 대상으로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평소에 작은 사야도께서 두통이 잦아서 관자놀이에 무엇을 자주 붙이는 것이 생각나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안 뒤부터 마음의 작용인 느낌은 가슴이나 머리에서 알아차리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봐 수행은 자기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방편이고 테크닉입니다.
방편이란 수행자들이 수행을 이롭게 하게 하기 위한 유익한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근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석서에서 말하는 수행은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수행방법을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수행방법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수행자의 성향에 따라 방법을 선택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제시한 것입니다.
1.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성향에 따른 분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감성이 발달한 갈애형 중에서 무딘 사람은 신념처 수행을 할 것
2) 감성이 발달한 갈애형 중에서 영민한 사람은 수념처를 할 것
3) 이성이 발달한 이론형 중에서 무딘 사람은 심념처 수행을 할 것
4) 이성이 발달한 이론형 중에서 영민한 사람은 법념처 수행을 할 것.
2. 사마타 수행을 하던 수행자가 청정한 도를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무딘 사람은 신념처 수행을 할 것.
2) 영민한 사람은 수념처 수행을 할 것.
3. 위빠싸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청정한 도를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무딘 사람은 심념처를 할 것
2) 영민한 사람은 법념처를 할 것
3. 대상에 집착하는 정도에 따라서 분류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름다움을 집착하는 수행자는 신념처 수행을 통하여 몸의 부정함을 알도록 할 것
2) 즐거운 느낌을 집착하는 수행자는 수념처 수행을 통하여 느낌은 괴로운 것임을 알 것
3)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수행자는 심념처를 통하여 영원한 것이 아닌 무상을 알 것.
4) 자아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수행자는 법념처 수행을 통하여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할 것
이렇게 염처별로 나누어서 수행을 할 때 어느 것 하나 만을 가지고 수행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신념처를 한다고 해서 어떻게 몸 하나 만을 보거나 호흡 하나만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호흡도 보고, 느낌도 보고, 망상하는 마음도 보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신념처를 할 때는 주로 호흡을 위주로 한다거나, 수념처를 할 때는 주로 가슴의 느낌을 대상으로 한다거나 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염처별 수행에 따라서 주 대상을 더 많이 삼는 식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장애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위주로 보는 수행을 할 때 산란하거나 집중이 안될 때는 계속해서 마음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수행을 하든지 새롭게 단계를 만들어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수행을 시작할 때부터나 아니면 수행 중에 어느 때나 수행이 안될 때는 3단계로 나누어 시도해 보았습니다.
제 1단계는 단순하게 몸의 모양과 움직임만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가령 배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단순하게 움직임만을 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호흡의 일어남 하나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얼마동안 호흡의 일어남 하나만 알아차리다 다시 꺼짐 하나를 알아차립니다.
쉽고 간단한 것을 선택하여 마음이 싫어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보니 산란한 마음이 차츰 안정이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경행을 할 때도 여러 가지를 알려고 하지 않고 오직 발에 닿는 것 하나만 알아차립니다.
닿음 하나만 알아차리고 나서 오른발의 움직임, 왼발의 움직임으로 옮겨갑니다.
1단계에서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고 안정이 되면 2단계로 자연스럽게 넘어 갑니다.
이것은 특별한 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집중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넘어 가면 됩니다.
제 2단계에서는 호흡을 볼 때 일어남 꺼짐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차츰 보는 힘이 생겼을 때 일어남, 꺼짐, 쉼을 알아차립니다. 이때는 호흡을 3분절로 나누어서 쉼까지를 알아차립니다. 이때는 실재하는 현상인 공기의 수축, 팽창하는 압력 등등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호흡의 자연스러운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경행을 할 때는 들어서, 놓음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가벼움과 무거움, 단단함과 부드러움 등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제 3단계에서는 전면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기를 합니다.
호흡이나 몸의 통증이나, 걸음걸이를 모두 마음의 창에서 주시를 합니다.
이 단계에서 아는 마음을 아는 수행을 하면 지속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집중력이 배양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익숙하지 않은 수행자는 3단계를 할 수가 없으므로 2단계 수행을 하시면 됩니다.
단계가 낮다고 해서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다가 대상이 약해지면 어느 때나 다시 1단계로 내려와 쉽게 대상에 접근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알아차리는 힘과 집중력이 생기면 다시 2단계로 가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방법은 수행 중에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의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은 항상 같은 조건 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어느 때, 어떤 돌발적이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초심의 수행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실천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몇 번을 하다 보면 1시간이 쉽게 지나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단 1회만에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강화되어 안정적인 수행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4념처를 염처별로 나누어서 하는 방법과, 장애가 생기면 수행을 3단계로 나누어서 하는 방법을 사용해보니 훨씬 유익한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꼭 염처별로 나누어서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 이렇게 특정 염처별로 나누어서 하지 않을 때는 신념처 수행인 호흡을 기본으로 알아차리면서 느낌과 마음을 적절히 알아차리며 4념처를 종합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4념처를 염처별로 나누지 않고 종합해서 할 수도 있고, 또는 염처별로 나누어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염처별로 나누어서 할 때는 염처별 수행방법을 배워 본 뒤에 자신에게 알맞은 하나의 염처를 선택하여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적성에 맞는다고 할 때는 수념처를 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성향에 맞을 때는 심념처를 하시면 효과적인 수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4념처를 염처별로 나누어서 해보고 나면 각 염처 마다 다양한 방법을 배운 뒤이므로 우리가 통상적으로 하는 종합적인 위빠싸나 수행을 할 때에도 전보다 깊고 다양한 수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염처별 수행을 배워두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익할 것입니다.
수행방법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수행은 4념처를 종합적으로 하는 통상의 방법이 있고, 또 다른 방법은 4념처를 염처별로 나누어서 집중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수행을 할 때는 3단계로 나누어서 처음 1단계는 몸의 단순한 움직임과 모양을 위주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면서 집중력이 생기면 2단계로 몸에서 실재하는 것 다양한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다시 이렇게 알아차리다가 자연스럽게 3단계로 넘어 가서 마음을 보는 수행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수행상태에 따라 아는 마음을 아는 것으로 수행을 진행합니다.
이런 방법은 수행을 시작할 때나, 또는 수행 중에 집중이 안될 때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활용을 하면 유익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얀마 수행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미얀마라고 해서 모든 것이 그냥 성취되지 않습니다.
미얀마에 가지 않는 것 보다 가서 수행을 하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그러나 미얀마에 간다고 다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
떤 마음으로 가느냐, 어떤 수행방법과 스승을 선택하느냐, 통역은 있느냐 하는 것 외에도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미얀마에 오는 많은 수행자가 제대로 수행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수행방법의 문제, 통역의 문제, 기후와 각자의 개성의 문제, 도반의 문제 등등으로 쉽게 공부할 수가 없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자기는 수행을 잘하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더구나 스승의 수행지도에 대한 문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또 다른 문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여행 삼아 오는 경우, 한국에서 수행을 한 것을 인정받기 위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미얀마에 와서 한국 수행법과 비교만 하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별일도 많겠지만 이런 문제들을 슬기롭게 대처하지 않으려면 꼭 미얀마에 가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제대로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귀국을 해서 그나마 하던 수행도 계속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무조건 미얀마에 가야만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을 한국에서처럼 자세하게 가르쳐 주는 곳이 없습니다.
그저 간단한 인터뷰만 있는데 그것도 한국어 통역이 없으면 안 됩니다.
어떤 때 쉐우민에서 몇 개월 수행하고 떠나면서 사실은 마음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몸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신념처를 충실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처음부터 마음을 보는 수행은 다소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이런 저런 정황을 보고 이런 염처별, 단계별 수행방법을 구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 자신은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앞으로 차츰 더 좋은 방법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마하시와 쉐우민의 수행방법을 말함에 있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여 허물이 있었다면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을 강조하여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모든 수행자들께서 열심히 정진하시어 도과를 얻어 열반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묘원 올림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그리고 수행법 관련해선 특정 기법은 한계가 있어서 나아갈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게 요지이신 거 같은데 전 그 의견엔 명확히 반대합니다. 온갖 수행법에 정통하고도 염불 일념으로 평생을 정진하시는 스님도 있고 저번에도 말씀드렸던 빗자루 청소로 아라한이 된 수행자도 있습니다. 겔룩파의 위빠사나는 잘 다스려진 집중력으로 중관에 입각한 분석명상을 하는 것인데 이해가 없는 혹자는 저렇게 머리 굴려서 하는 게 무슨 수행이고 명상이냐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수행 자체는 방법보다 그 밑바탕인 오력, 수행의 척도는 탐진치의 줄어듬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길게 써주셨는데 제가 빠트린 부분이나 위 글 중에 더 얘기하시고 싶은 부분을 달아주시면 나중에 다시 쓰겠습니다.
그러니까..전생에 뭐였다 이렇게 알려진 건..당연히 보았다는 걸 돌려말한건데요..
예로 저는, 직전생에 독일의 군인이었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전생은 일본에 있었습니다. 티벳에도 있었구요.
저에게 알려진 최근 생의 기억은 시간선에 따라 순차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개별혼(그런 건 없지만)의 시간선과 세계의 시간선은 다르기 때문에 내세가 과거가 될 수도 있고, 전생이 미래였을 수도 있으니까요. 개인적인 이야기구요.
방문객님은 체험해보았다..한줄로 이야기하시고, 저는 주저리 떠드니까..길게 돌려 이야기한거에요.
그래서 진짜 보았냐는 측면에서 대화를 나누는게요..
뭔가 좀 갑자기 수준떨어지는 논쟁으로 보인다는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머리 좀 식히시라는 거구요.
나머지 이야기는요.
방문객님과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저는 아사하님 사례처럼 단순히 그런 체험을 물어본 것입니다. 진짜 본 게 맞냐, 제대로 본 게 맞냐 이런 대화는 논쟁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저도 나가야되는데요~
수행법과 관련해서는요
수행법이라는게 방편이잖아요.
설마 모든 전승을 무시하는 건 아니실거구요.
지금도 저기 동굴에서 평생 칩거하며 복잡한 수행하시는 분들이
다 오력이 딸리고, 근기가 딸려가지고, 한 마음 못 일으켜서 그러고 앉아있다. 이건 아니시잖아요.
그러니 방편이 필요함을 인정하자는건데요. 인정하시죠?
저도 마음의 힘으로 안되는 건 없다는 걸 동의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히 됩니다. 다 돼요. 실제로 사람 콧구멍에 코끼리가 들어갈 수가 있어요.
오력이 높은가, 신심이 더 깊은가가 중요하다. 이런 논의는 빼자구요.
그건 이미 된다고 말씀드렸으니까요. 그리고 마음의 측면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제 말이 맞을거라 봐요.
법무아님 말씀대로라면,
왜 다들 빗자루 쓰는 것으로 부처가 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 실제로 빗자루 쓸면서 아라한이 되라는 게 아니고,
그 만큼 오력인가요? 마음인가요? 그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잖아요.
관세음보살님보면 주렁주렁 방편들 매달고 계시잖아요.
그거 관세음보살님이 오력의 중요성을 몰라서 그런 건가요?
적어도 오력의 중요성을 알게 할 방편은 필요하겠죠.
방편이 필요함은 논쟁의 여지가 없어요.
필요하다면 이왕이면 중생에게 근기에 맞게 더 쉬이 적용되는 좋은 방편을 써야겠죠?
이것도 사실 논쟁의 여지가 없어요..
이 논쟁을 하시려면 다른 대승의 스님분들과 하면 좋겠습니다.
거친 대상으로 일반인들은 선정에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그런 즉 거친 대상을 잡는 수행법은요. 그 자체로 의도하는 바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거 들고 선정에 들려고 평생 노력하는 이가 선정에 못들어가고 있다고 해보면요.
그 사람한테 너는 마음의 힘이 딸려서 선정에 못들어가는거다.
고승들은 물 떠놓고도 다 했다. 이렇게 이야기하실건가요.
근기에 맞는 방편으로 하나씩 알려줘야할거잖아요.
병따개로 흙구덩이 팔 수 있습니다. 다 알죠?
근데 흙 파려면 삽이나 포크레인이 일반적으로 더 나은 방편 아닙니까?
누군가가 신심을 내어서 병따개로 흙파는 고수가 될수는 있겠죠.
근데 그 사람도 신심이 같다면 삽으로는 더 잘 팔거에요.
그리고 신심은 방편에 붙는 건 아니니까요.
아미타 염불해서 극락정토 간다고 믿는 이가, 방편이 관세음보살로 바뀐들 마음가짐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병따개는 병따는 방편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 타고난 사람들은 논외로 하자구요.
그냥 우리 같은 일반인의 측면에서요. 이야기하는거에요.
이 정도를 못 알아드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굳이 이거 다시 이야기하신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일반 중생들에게 더 잘 붙는 방편을 있다는 측면에서 이야기하는거니까요.
저도 오력의 중요성을 아주 매우 많이 동의합니다.
밀교한다고 그릇에 금칠하고 폼 잡아봐야 우리 어머니들 절에서 천수다라니 하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굳이 다 아실만한 이야기 누가 맞냐고 저와 논쟁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칩거하는 수행자분들이 오력이 딸려서 그러고 앉아있다, 불경한 표현이긴 하지만 아사하님의 의도한 의미로서는 맞는 말입니다. 오력의 정의 자체가 그렇습니다. 오력의 구성 요소를 살펴보세요. 오력은 한 번에 얻은 상태로 수행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수행하면서 점차적으로 갖춰나가는 것입니다. 오력의 완성은 곧 수행의 완성입니다.
@법무아 그럼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방편의 높고 낮음이 어디있겠어요.
적합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원만 돈초 수행을 왜 마지막에 하겠어요.
왜 선정 삼매 수행을 끝낸 이가 입단에 들고 무수행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단계별 적합함이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 있다는거죠.
병따개랑 포크레인이랑 수준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냥 방편일뿐인데요.
그런 의미입니다.
저 나가볼게요~
@아사하2 단계별 적합함을 말하셔서요. 이전 예를 들어 아사하님이 읽으신 묘원 법사님의 글도 해당 수행법 전부를 말한 건 아닙니다. 단계를 논하려면 해당 수행법 안에서 논해야지 이것과 저것을 섞어 그것은 이미 체험해본 것이다라고 말하는 건 그 또한 넘겨짚는 것이지요.
진실로 이쪽 계열의 수행으로 정진해보셨으면 사람과 대화 중에도, 밥을 먹을 때도, 업무를 볼 때도 깨어있는 모든 시간에 자연스러운 알아차림이 유지되고(혹은 잠에 들어서도) 청정도론 16가지 위빠사나 지혜가 나투어야 합니다.
음..
묘원법사님의 쓰신 부분만 가지고 보고 이야기한 건 맞아요.
쓰지 않으신 부분은 모릅니다.
그 분은 더 깊은 성취가 있으신가보네요.
저의 체험과 전혀 다르거나요.
저의 경우
얼마 전 본글에 작성했듯이,
새끼손가락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차별없이 평온히 아는 앎이 있었습니다.
편의를 위해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작성해보면요.
아픔이 알려지고,
아픔을 아는 마음이 알려지고,
아픔을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이 알려지고,
.
.
.
연속..
이것을 본 글에서 개아적 주시의 분열이라 이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앎의 상대적 연속 작용과 무관한..
앎의 연속적 분열을 따로 비추는..
노력없이 항상하는 평온하고 차분하고 따듯한 비개아적인 알아차림이 있었습니다. (최후의 주시자A)
항상이요.
꿈없는 잠에서도 있었고,
꿈에서도 있었고,
당연히 일상에도 항상 있었습니다.
순간 화가 나도 평온한 앎이 비추고 있어서 금새 스러집니다.
아시겠지만, 보면 사라진다 이런 류와 메커니즘이 다릅니다.
뭘 힘주어서 보는게 아니거든요. 알려고 계속 노력하는 것도 아니구요.
이게..지금 화엄의 언어로 표현한 게 아니고..
당시의 언어입니다. 오해하지마세요~ 쿨럭...
손가락 부서진게..
그게 생각보다 사실 많이 아픈거거든요.
주변에 손가락 부숴진 사람 있으면 한번 물어봐주세요.
보통 사람이었으면 바로 병원에 갔을텐데 저는 안갔어요.
아프긴 생생하게 아픈데..
평온하게 비추는 앎이 있으니 그렇게 아프지 않다? 잘 설명이 안되네요.
그런데 다음 날에 보니까 손가락이 탱탱부워서 몬 일이 일어났나보다 하고 병원에 갔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다른 곳에서 마하무드라 입단 수행을 할 때 유사한 과보를 의도하셔서,
기법이 의도하는 바와 관련해 이런 저런 유사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당시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고,
이것을 본 글에서 최후의 주시자A라 했습니다.
개인적 체험입니다.
이것이 법무아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묘원법사님과 유사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각 수행은 해당 행법 안에서 논해야하니까요.
같다, 다르다, 이렇다 또는 저렇다 이야기하는 게 무의미하구요.
저는 적합함이 있다는 것과 여러 유사체험에 대한 경험이 있다는 측면으로 이야기한거에요.
아사하님이 깨어 있든 잠을 자든 말씀하신 손가락이 부러지는 경험 포함해서 모든 순간에 작의 없는 알아차림이 유지된다면 분명 오랜 수행으로 정진하신 과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묻고싶은 건 아사하님이 불교의 정견을 갖추고 기본 심성을 닦은 상태로(알아차림 기법은 외도들도 하는 것이니까요) 그 수행을 진실하게 행하였다면 위빠사나 지혜가 드러났어야 합니다.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4. 생멸의 지혜
5. 소멸의 지혜
6. 두려움에 대한 지혜
7. 고난의 지혜
8. 혐오감에 대한 지혜
9. 해탈을 원하는 지혜
10. 다시 살펴보는 지혜
11.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12. 적응의 지혜
13. 성숙의 지혜
14. 도의 지혜
15. 과의 지혜
16. 회광반조의 지혜
가 나투었습니까 어떤 식으로 드러났습니까
물어보는 이유는 모든 테라와다 수행처는 각자의 기법은 달라도 이 위빠사나 지혜를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달라도 도달하는 지점은 같습니다. (해탈, 열반과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법무아 위와 같이 열거하는 거는 소용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거는 넘한테 묻는 것도 아니고, 님이 하고 싶으면 님은 하세요.
열거한 거, 하나 하나 체킹하면서 해보세요.
@방문객 전 테라와다 수행법을 말했고 아사하님은 다는 아니겠지만 해당하는 단계를 거쳤다고하시니 묻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거'는 남한테 묻는 게 맞습니다. 실제로도 물어봅니다. 방문객님은 테라와다 수행에 대한 존중이 없으니 관심도 없고 남한테 묻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남한테 묻는 게 맞습니다.
@법무아 그냥 적은 바 있는 내 이야기해주께...
내가 중학교2학년때... 오락실에서, 오락게임을 너무 잘하는 애가 하는 거 본다고, 난로의 안전철망에 손가락이 닿은 거를 몰랐어요. 그래서 게임이 끝나고 "이야, 진짜 잘하네..."하고 감탄하는데 손이 난로 위에 있는 거야... 놀라서 얼른 손가락을 움츠리고 보니까, 손가락이 움푹 파였더라고...
수행 같은 거 안해도, 그냥 눈 돌아가면 원래 그래...
@방문객 저도 하고 싶은 얘기나 할게요. 위빠사나 지혜를 남한테 묻는 건 맞습니다.
@법무아 아뇨...^^;
그리고..저는 처음부터 테라와다 수행을 한게 아니어서요.
여러 노력 끝에 비개아적 알아차림이 있었다는 것이구요.
위의 알아차림의 공효라고 할까요? 그런 게 있긴했어요.
평온하고 항상하는 알아차림이 있는데, 어떻게 공효가 없겠어요.
탐진치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있었으니,
하나의 예시로, 분노와 관련한 이야기를 한 것이구요.
알려지는 일상의 평면에서 지혜의 카테고리에 속한 여러 공효들이 제 수준에서 얕게 조금씩 나타나기는 한 것 같아요.
이것과 별개로요.
'논서에 보면 이렇다고 하던데?
경전에 보면 이렇게 된다고 하던데?
청정도론에 보면, 이렇다고 하던데 너는 정말 이렇게 다 되었냐?'
이렇게 물어보면요. 다 성취되었다고 선언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요.
부처님 밑으로 다 조용히 해 이런 거 아니잖아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테라와다 수행처의 수행승들도 그것을 목표로 해서 닦아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경험한 비개아적인, 편안히 항상하는 알아차림도 작은 수행의 과보이자, 궁극적인 과보를 위한 과정일 뿐이죠.
청정도론이 맞다면 끝까지 정진하여 닦아나아가서 성취한 분들은 16가지 지혜를 다 성취하시겠죠
@아사하2 그런데 설마
저런 것이 다 안되었으면,
외도의 알아차림이라던지, 이런 비약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좀 전까지 방편과 상관없이
'탐진치의 소멸, 무상, 고, 무아, 자비심, 보리심' 등을 불교 수행의 중대 과보로서 이야기한 것으로 아는데요.
@법무아 저는 위의 16가지 안해요, 관심 없습니다. 나의 길이 아니거든...
아... 법무아님은 그 16가지 하고 싶은데 몰라서 묻는거라면, 그 16가지 하는 사람을 찾아서 물어보세요.
맞다... 대답을 들으면, 님이 질문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니까 이곳에 소개 좀 해주시구요.
@아사하2 제가 계속 수행 방법보다 정견, 오력, 기본 심성을 말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똑같은 수행을 하더라도 밑바탕이 다르면 결과도 달라집니다. 오력 중 하나인 신심은 해당 승가에 대한 믿음도 포함됩니다. 방문객님 댓글 보십시오 불법승이 아니라 불에만 귀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금 다른 얘기지만 불자는 설령 본인이 재가자로서 최소 수다원 이상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해도 계를 방금 받은 젊은 스님께 먼저 절을 올립니다.
@법무아 기본 심성... 하하하
정말 법무아님은 기본 심성을 정말 갖추셔야 해요.
비판은 못하면서, 비약해서 비방하고... 메뚜기로 변신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아무거나 가져다 복사해서 가져다 붙이고...
처음에 지적 토론하자고 하시두만...
처음부터 줄곧 말하지만, 하나만 해요. 하나라도 분명하게 세운 다음에, 정 원하면 문어로 변신해서 문어발 확장하시든가...
저는요... 성격이...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하지마라고 잘 안해요. 그런데 매뚜기는 아니잖아... 중심도 없는데 문어로 변신하고... 그러면서 지적 토론 운운하면 말이 안되잖아요.
@법무아 정견, 심성 등 동의해요.
그런데 저 이제 또 가야 해서요.
처음 댓글에 질문 드렸듯이 정말 초보로서 궁금하신 게 있으셨던 건지..
아니면 한 동안 불법을 빡시게 공부했고, 체험면에서도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것 같으니..법담 스파링?을 하러 오신건지..
뭐..이러나 저러나 화엄에 오셔서 도움이 된 것이 있으면 좋겠네요.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습니다.
이왕 오셨으니,
시간 되시면 방문객님께서 쓰신 맞춤불교나 여러 장편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항상 즐겁게 수행하시고 걸음 걸음마다 수구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사하2 미안합니다. 편안한 토요일 저녁 보내세요.
@방문객 방문객님 본인이 쓰신 글과 댓글들의 단어 선택과 넘겨짚기들을 고려했을 때 어떻게 그리 적반하장식으로 기본 심성을 갖추라고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 있습니까. 예전에도 다른 분들과 비슷한 문제로 논쟁하셨죠?
아티샤 존자의 말처럼 착한 사람부터 되지 않고 문사수를 닦는 건 의미없는 일입니다. 쫑카파 스님의 말처럼 예비 수행 없이 중관과 유식을 배우면 미친 지혜가 됩니다.
또한 불법승이 아니라 불에만 귀의한다 이런 견해를 갖춘다면 불교에 입문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법무아 네, 많이 봤습니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좀 봉쇄식으로 질러버려 말문이 막히면, 그때부터 광분해서 인신 공격을 하시더라구요.
사교를 위해 이곳에 글을 적는 것도 아니구요. 이런 저런 이유에서, 직설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는 편입니다. 물론 근거 없이 그러지는 않구요. 그런 경우에도, 근거를 제시하고 평가를 하는 형식으로 적습니다.
감정은 한정된 자원입니다. 이게 총량이 있어요. 그러니 소중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가치가 없는 일에는 감정을 소모하지 않으려고 해야합니다. 가치 있고 필요할 때 사용해야 합니다.
===
위에도 적었듯, 이전부터 저는 "오직 부처님께만 귀의한다"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제 믿음의 토대는 저의 일인 것이고, 타인이 입을 댈 부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직 부처님께만 귀의하는 경우 불자가 아니라고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거는 저의 일은 아니니까요.
@방문객 넘겨짚기의 달인이시니 상대방들이 질려버릴 수 밖에요. 비슷한 상황들을 여러 번 겪으셨으면 얻는 교훈이 있지 않나요?
테라와다 수행이 나이롱이라 말하고 말한 동기는 보살심이라, 웃긴 얘기지요. 본인 스스로도 솔직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보리심이란 달라이라마조차 평생을 예비 수행하고 심성을 닦은 끝에 겨우 갖추었다 합니다.
불법승 얘기야 제가 백번 말해도 견해를 바꿀 분이 아니시니 어쩔 수 없죠. 닝마파고 티벳이고 관심없고, 테라와다 수행도 나이롱이고, 각묵스님도 뭘 모르는 스님이라고 하던 댓글들이 왜 쓰여졌는지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네.
제가 적은 내용에 대한 지적은 없고, 어떻든 삼보를 비방했다는 건가요?
과거 적었는데요. 저는 오직 부처님께만 귀의합니다.
나이롱이라는 표현이 과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요. 해당 내용을 쓴 동기는, 거품 포장해서 그냥 보살심이라고 합시다. 하핫
비약이 너무 심한데 말입니다. 단지 오늘날 상좌불교 특정 스쿨 두개의 기법을 비판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를 제시하면서요. 그것이 상좌부 전체를 배격한 건가요? 그런데 상좌불교 내부에서도 스쿨 상호간에 문제 삼는 경우가 있는 거 같던데요. 재가불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고...
제가 적은 내용을 보면, 비판한 기법을 가르치는 스쿨조차 부정하지 않습니다. 장점을 거론했고, 그 기법도 나름 유효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법은, 제가 적은 것과 같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위와 같이 적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까?
전생 기억... 제 기억으로, 부처님께서는 "전생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권장하시는 편이죠? 그러니 전생 기억을 언급할 필요성등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적다보면 묻어나기도 하구요.
지금 전생 기억이 나올 필요성등이 있었나요?
물론 상좌부 특정 스쿨에서 전생을 묻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사다함이나 수다원인지 점검할 필요성이 언급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거는 그 스쿨에서 수행한 이에게 지도한 분이 묻는 겁니다. 경우가 완전 다른 거예요. 이런 걸 구별할 수 없어요? 조건, 경우, 상황이 완전 다른데?
과거 그 스쿨에서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그런 거 안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지금도 누가 물어보면, 그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그 스쿨에서 자기들끼리 그렇게 하는 거는 그들의 문제입니다. 그거를 못마땅해 하는 것은 저의 문제입니다.
비판도 필요성에 따라 하는 겁니다. 위 본글과 같은 글을 여러 차례 봤지만, 왜 하필 지금 그런 이야기하는가... 그것도 아주 강한 표현을 사용해서... 뭐든 조건을 봐야 합니다.
특정 기법을 비판하다고 해서, 기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 기법을 중심으로 하는 스쿨 전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며, 그 스쿨이 속한 거대 전승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정 행위를 비판한다고 해서, 상대의 전인격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위 본글에 소개된 글을 적으신 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밑에 댓글엔 이제 달아봅니다.
방문객님 말하신 지적 토론 얘기가 이 상좌부 명상 기법 얘기였나요? 제가 낮부터 해당 내용에 굳이 대응 안 한 이유는요, 방문객님은 스스로 카페에 올라온 펌글로 기법을 파악했다고 하셨습니다.
본인도 제대로 모르는 내용에다 독자적인 해석을 붙이고 거기에다 제 생각을 쓰라는 건 허항된 요구입니다. 어리석음에 어리석음을 씌우는 형태에요. 전 실제로 파욱수행 관련 책을 읽기도 했지만 제가 직접 해본 것도 아니고 코칭받은 적도 없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분석하지 않습니다. 나이롱이라고 평할 일은 더욱 없구요.
진짜 지적 토론이라면 저번부터 제가 방문객님한테 나가르주나는 보는 작용과 보는 놈을 왜 구분지었겠냐는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하셔야죠.
아니 아직도 그거를... 이미 꼬리말에서 적었었는데...
안읽었나? 제법 길게 적었는데... 너무 쉬운 거고...
그래도 집요하게 하나 물고늘어지는 거는, 다른데선 그러지 말고, 법에 대해서는 나쁘지만은 않아요.
좀 더 쉽게 다시 설명하께요.
간단합니다. 그야, 법무아님처럼 보통은 "내가 눈으로 형상을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죠.
본다는 것에서 꼭 '나'에 상응한 주체 따위가 있어야 하는 거야, 업의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아함부(나 니까야)는요. 아함도 중도이기에, 중도를 말하는 반야부쪽에서 함께 다루기도 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눈으로 형상을 본다 ... 아함에서 '내가'를 부쉈어요.
내가 업을 지어 과보를 받는다 ... 역시 아함에서 '내가'를 부쉈어요.
아함에서는 일체를 오온(18계,12처)으로 살펴보니, '나'가 없다는 거예요.
중론에서는 애초 '본다'나 '업을 지음'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니, '나'는 더더욱 당연히 없다는 겁니다.
'본다'가 없는데, '보는 나'가 어디 있겠어요?
'업을 지음'이 없는데, '업을 짓는 나'가 어디 있겠어요?
즉 중론은 업이나 바라봄 등에서 아함도 포섭하여 적었을 뿐입니다.
쉽잖아요, 그렇죠?
눈과 형상 얘기로 이번에도 어김없이 넘겨짚기 하시네요.
제가 주체(보는 놈), 작용(보는 작용), 대상(보이는 것)은 승의로는 없다고 몇 번씩이나 적었습니다.
요지는 주체와 작용을 언어로 가립할 수 있냐 없냐는 겁니다. 전 가립할 수 있다는 입장이니까 이 용어를 쓰는 겁니다. 이건 기초적인 개념이에요.
전 초반에 댓글 쓸 때부터 (주체와 작용을 말하면서) 주체든 작용이든 세 가지 분류든 뭐든 결론적으론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길 위한 가정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방문객님은 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건지 파악을 잘 못하는 거에요.
아니, 누가 쓰지 말래?
'나'도 매일 '나'라는 말을 쓰는데...
어떻게든 자신은 옳다는 거를 증명하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정작 자신이 한 말을 다 까먹었어요?
식온이 뭔지 물었더니, '식온'이 주체라고 했잖어. 식온이 주체와 식작용이라면서...
그러고는 식온이 주체임을 증명한답시고 오만데서 글을 퍼왔잖어...
그러면서 식온이 주체임을 의미한다는 증거를 든답시고, 중론이 보는 자,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으로 나누지 않았느냐... 그러니 자기 말이 맞다고 했잖어...
===
그러면 내가, 식온이 뭔지 묻는 게 왜 나왔나?
처음에 자기 체험 운운하면서 뭔가 깨달았는데, 깨달은 이는 깨달은 시간도 기억한다고 들어서 그 시간까지 기록했다면서...
그래가지고는 자기 체험이 어떤 수행이었는데, 그 깨달음이 어떻게 나왔니 뭐니 했고...
그래서 내가, 그거는 체험이 아니다, 그냥 판단이다... 그러니까...
그런데 굳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체험을 했다고 하길래...
그래서 내가 "식온이 뭔데 그걸 체험했다고 하냐?"고 물은 거라고...
===
님이 한 거를, 님은 기억할 수 없어도...나는 기억한다고...
===
대상을 아는 연습을 하다가... 님 스스로 인정한 바 있지만, 얼마하지도 않았어요...
어쨌든 그러다 "마음은 알려지지 않는다"는 널리 알려진 사실에 착안해서,
"마음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니까 알려지지 않는 거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러니 마음의 대상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결론도 내려서,
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것을 체험했다...
깨달은 시간 정확히 안다니까, 시간 기록해 놔야지...
이상이 님의 체험이에요. 님이 그렇게 적었어... 내가 적은게 아니고...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님이 지금은 그 글 본문 삭제했어. 하지만 나는 그거 기억한다고....
===
그래서 내가 그 글 아래 적었지...
보아하니, 님의 체험 즉 님에게 알려진 건 대상이 있다는 건데, 대상이 있으면 마음도 있다고 해야 맞는 거 아니냐...
그런데 알려진 대상은 던져 두고, 왜 느닷 없이 마음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널리 알려진 사실에 착안해, 갑자기 그걸로 대상을 규명하고 그것을 체험했다고 하냐?
님은 대상이 있는 거를 알려진게 아니냐... 그렇게 반문했고...
나의 그 반문이, 이 모든 난장판의 출발점이야... 안그래?
===
물론 나에게 이 난장판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
나도 정말 모처럼, 언어적 생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제법 오랜 시간 표현하고 말이지...
언어적 생각하는 김에, 그냥 지나간 것들 중에서 논점과 관련 있으면서 한번 참고하면 좋을 것들 적기도 하고...
어쨌든 이해 득실은, 얻는게 있으면 잃는게 있고 잃는게 있으면 얻는게 있고, 잘 알 수가 없는 거야...
중생은 원래 잘 몰라. 정확한 인과는 부처님께서 아시거든...
좀 짜증스러울 때도 있었지, 내가 님을 미워하거나 님에게 이길려고 하거나 그런 거 엄어.
님에게 내가 옳다는 증명을 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냥 말을 했으니, 내 말에 책임을 지는 거 뿐이지.
===
내가 중론을 별로 안좋아하는데, 이유는 쓸데 없이 어려워 그래.
용수보살께서 일부러 어렵게 적으셨나? 그건 아니야. 뭐든 조건 발생이거든.
용수보살께서는 당대 여러 종파 논사들을 고려해 적으셨어, 그 논사들을 논파하려고 그렇게 적으셨던 거야. 그게 조건이야.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불자들이나, 나같이 체험에 비춰 보는 이에게는 그러한 세부 논리까지 필요가 엄어.
즉 용수보살의 중론등이 틀린게 아니라, 대상이 다른 거야.
모든 난장판의 출발점은 방문객님의 이제에 대한 이해 부족이에요.
식은 없어요. 주체도 없어요. 식도 있고 주체도 있어요. 오온은 있어요. 오온은 없어요. 일체법은 있어요. 일체법은 없어요. 일체법은 있지 않아요. 일체법은 없지 않아요. 대상은 생해요. 대상은 무無생이에요.
위에 쓴 문장 다 맞는 말입니다. 무엇을 진제로 썼고 무엇을 속제로 썼는지 방문객님이 구분을 못하니까 난장판을 스스로 만들고 계신 거에요. 중론을 읽었는데 어떻게 이 구분을 못합니까
진제 속제는 무슨 진제 속제여... 상좌불교 개론이라도 읽어. 책 한권이라도 읽어야지, 떠다니는 글만 봐서는 혼동해.
상좌불교에서 속제와 진제가 이미 있어. 속제는 인습적 진리, 세간적 진리라고 표현하기도 하고...진제는 궁극의 진리, 출세간적 진리라 그래.
상좌불교에서 인습적 진리가 왜 나오나?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부처님께서 '나'라는 표현등을 사용하셨어.
부처님 말씀이기에 '진리'인데, 아함이나 니까야의 부처님 말씀을 구별한 거야...
반야부에서의 속제는... 아함의 출세간적 진리를 칭하는 경우도 있고... 아함의 세간적 진리와 출세간적 진리 모두를 칭하는 경우도 있어.
단어가 같다고 같은 뜻은 아니니까, 문맥을 살펴 그 뜻을 파악하면 돼.
위에서 내가 가능한한 쉽게 적은 거 참조하고, 그래도 모르면 어쩔 수가 엄어.
모르겠으면 기존에 안다고 자부하던 거 다 던져두고, 기초 개론 책 한권이라도 읽어.
내가 위에 한 말 이해되더라도, 책 한권은 꼭 읽어.
===
이야... 이거 다음 말 모처럼 적어보네...
세상은 크다. 세상은 만만한게 아니야. 정말 커.
책 한권도 안읽고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여.
책 한 권이라도 읽었다면 제가 하는 말 다 알아들으실 텐데요. 용수 스님 이후로 공사상과 같이 진제 속제의 의미가 확장됩니다. 그게 지금 대승 현교의 근간이구요. 표현이야 세간적 진리, 출세간적 진리라 하면 여기 붙이든 저기 붙이든 다 맞죠.
진제로는 조건과 발생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진제는 자성적 측면에서 서술하는 거고, 속제는 언어적 가립이라는 전제 하에 서술하는 거에요.
솔직히 말해서, 법무아님 책 한권이라도 읽었어요? 그러니 읽어요. 상좌불교 기초 개론서... 아주 쉬운 거라도 읽어요. 시간 오래 안걸려.
이제 그냥 내용은 관심 없고 책읽어라로 일관하기로 결정하셨나요. 전 방문객님처럼 넘겨짚기하는 게 싫어서 이런 말은 가능한 피하려고 했는데요, 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거로 유추해봤을 때 높은 확률로 중론도 제대로 정독 안하신 거 같은데요?
그래도 사람이 참 착해. 훌륭해요. 거짓말로라도 읽었다고 안하는 거 보면...
유뷰브나 떠다니는 글이 나쁘다는게 아니라, 중심이 없으면 여기 저기서 표류할 공산이 커요.
이거 굉장히 복잡한 미로거든...
배를 몰려면, 닻이 있어야 돼, 돛만 있으면 골 때리는 경우가 생겨요.
닻이란 쉽고 친숙하고 잊지 않는 거야 되요.
다음에 봅시다.
이제 개념이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언제든 익히면 그만이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삼보에 귀의하고 기본 심성을 닦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직 부처님이고...
심성이야, 그럽시다. 심성 닦는 거야 좋은 거니까.
참고로, 월폴라 라훌라 스님이었나? [ 붓다의 가르침 ]이라고 아주 앏은 책이 있어요. 그거라도 읽으면 좋겠어요.
검색해 보니까, 전재성님이 번역한 [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가 같은 책인 거 같은데, 잘 모르겠네요.
좋은 밤 보내요.
고 김성철 교수님의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부터 읽으시고 시중에 나와있는 중론 번역본 아무거나(신상환, 김성철, 가츠라 쇼류 등) 읽으시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