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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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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 법무아님 덕분에..
우몽 추천 0 조회 153 24.11.08 19:53 댓글 9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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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11.12 16:56

    그리고 수행법 관련해선 특정 기법은 한계가 있어서 나아갈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게 요지이신 거 같은데 전 그 의견엔 명확히 반대합니다. 온갖 수행법에 정통하고도 염불 일념으로 평생을 정진하시는 스님도 있고 저번에도 말씀드렸던 빗자루 청소로 아라한이 된 수행자도 있습니다. 겔룩파의 위빠사나는 잘 다스려진 집중력으로 중관에 입각한 분석명상을 하는 것인데 이해가 없는 혹자는 저렇게 머리 굴려서 하는 게 무슨 수행이고 명상이냐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수행 자체는 방법보다 그 밑바탕인 오력, 수행의 척도는 탐진치의 줄어듬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길게 써주셨는데 제가 빠트린 부분이나 위 글 중에 더 얘기하시고 싶은 부분을 달아주시면 나중에 다시 쓰겠습니다.

  • 24.11.09 15:22

    그러니까..전생에 뭐였다 이렇게 알려진 건..당연히 보았다는 걸 돌려말한건데요..

    예로 저는, 직전생에 독일의 군인이었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 전생은 일본에 있었습니다. 티벳에도 있었구요.
    저에게 알려진 최근 생의 기억은 시간선에 따라 순차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개별혼(그런 건 없지만)의 시간선과 세계의 시간선은 다르기 때문에 내세가 과거가 될 수도 있고, 전생이 미래였을 수도 있으니까요. 개인적인 이야기구요.

    방문객님은 체험해보았다..한줄로 이야기하시고, 저는 주저리 떠드니까..길게 돌려 이야기한거에요.

    그래서 진짜 보았냐는 측면에서 대화를 나누는게요..
    뭔가 좀 갑자기 수준떨어지는 논쟁으로 보인다는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머리 좀 식히시라는 거구요.

    나머지 이야기는요.
    방문객님과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 24.11.09 15:28

    네 저는 아사하님 사례처럼 단순히 그런 체험을 물어본 것입니다. 진짜 본 게 맞냐, 제대로 본 게 맞냐 이런 대화는 논쟁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 24.11.09 15:36

    저도 나가야되는데요~

    수행법과 관련해서는요
    수행법이라는게 방편이잖아요.

    설마 모든 전승을 무시하는 건 아니실거구요.
    지금도 저기 동굴에서 평생 칩거하며 복잡한 수행하시는 분들이
    다 오력이 딸리고, 근기가 딸려가지고, 한 마음 못 일으켜서 그러고 앉아있다. 이건 아니시잖아요.

    그러니 방편이 필요함을 인정하자는건데요. 인정하시죠?

    저도 마음의 힘으로 안되는 건 없다는 걸 동의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히 됩니다. 다 돼요. 실제로 사람 콧구멍에 코끼리가 들어갈 수가 있어요.

    오력이 높은가, 신심이 더 깊은가가 중요하다. 이런 논의는 빼자구요.
    그건 이미 된다고 말씀드렸으니까요. 그리고 마음의 측면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제 말이 맞을거라 봐요.

    법무아님 말씀대로라면,
    왜 다들 빗자루 쓰는 것으로 부처가 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 실제로 빗자루 쓸면서 아라한이 되라는 게 아니고,
    그 만큼 오력인가요? 마음인가요? 그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잖아요.

    관세음보살님보면 주렁주렁 방편들 매달고 계시잖아요.
    그거 관세음보살님이 오력의 중요성을 몰라서 그런 건가요?

    적어도 오력의 중요성을 알게 할 방편은 필요하겠죠.

  • 24.11.09 15:47

    방편이 필요함은 논쟁의 여지가 없어요.
    필요하다면 이왕이면 중생에게 근기에 맞게 더 쉬이 적용되는 좋은 방편을 써야겠죠?

    이것도 사실 논쟁의 여지가 없어요..
    이 논쟁을 하시려면 다른 대승의 스님분들과 하면 좋겠습니다.

    거친 대상으로 일반인들은 선정에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그런 즉 거친 대상을 잡는 수행법은요. 그 자체로 의도하는 바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거 들고 선정에 들려고 평생 노력하는 이가 선정에 못들어가고 있다고 해보면요.
    그 사람한테 너는 마음의 힘이 딸려서 선정에 못들어가는거다.
    고승들은 물 떠놓고도 다 했다. 이렇게 이야기하실건가요.

    근기에 맞는 방편으로 하나씩 알려줘야할거잖아요.

    병따개로 흙구덩이 팔 수 있습니다. 다 알죠?
    근데 흙 파려면 삽이나 포크레인이 일반적으로 더 나은 방편 아닙니까?
    누군가가 신심을 내어서 병따개로 흙파는 고수가 될수는 있겠죠.

    근데 그 사람도 신심이 같다면 삽으로는 더 잘 팔거에요.

    그리고 신심은 방편에 붙는 건 아니니까요.
    아미타 염불해서 극락정토 간다고 믿는 이가, 방편이 관세음보살로 바뀐들 마음가짐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병따개는 병따는 방편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 24.11.09 15:41

    그러니 타고난 사람들은 논외로 하자구요.
    그냥 우리 같은 일반인의 측면에서요. 이야기하는거에요.

    이 정도를 못 알아드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굳이 이거 다시 이야기하신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일반 중생들에게 더 잘 붙는 방편을 있다는 측면에서 이야기하는거니까요.

    저도 오력의 중요성을 아주 매우 많이 동의합니다.
    밀교한다고 그릇에 금칠하고 폼 잡아봐야 우리 어머니들 절에서 천수다라니 하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굳이 다 아실만한 이야기 누가 맞냐고 저와 논쟁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 24.11.22 01:27

    칩거하는 수행자분들이 오력이 딸려서 그러고 앉아있다, 불경한 표현이긴 하지만 아사하님의 의도한 의미로서는 맞는 말입니다. 오력의 정의 자체가 그렇습니다. 오력의 구성 요소를 살펴보세요. 오력은 한 번에 얻은 상태로 수행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수행하면서 점차적으로 갖춰나가는 것입니다. 오력의 완성은 곧 수행의 완성입니다.

  • 24.11.09 16:14

    @법무아 그럼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방편의 높고 낮음이 어디있겠어요.
    적합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원만 돈초 수행을 왜 마지막에 하겠어요.
    왜 선정 삼매 수행을 끝낸 이가 입단에 들고 무수행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단계별 적합함이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 있다는거죠.

    병따개랑 포크레인이랑 수준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냥 방편일뿐인데요.

    그런 의미입니다.

    저 나가볼게요~

  • 24.11.09 17:57

    @아사하2 단계별 적합함을 말하셔서요. 이전 예를 들어 아사하님이 읽으신 묘원 법사님의 글도 해당 수행법 전부를 말한 건 아닙니다. 단계를 논하려면 해당 수행법 안에서 논해야지 이것과 저것을 섞어 그것은 이미 체험해본 것이다라고 말하는 건 그 또한 넘겨짚는 것이지요.

    진실로 이쪽 계열의 수행으로 정진해보셨으면 사람과 대화 중에도, 밥을 먹을 때도, 업무를 볼 때도 깨어있는 모든 시간에 자연스러운 알아차림이 유지되고(혹은 잠에 들어서도) 청정도론 16가지 위빠사나 지혜가 나투어야 합니다.

  • 24.11.09 18:39

    음..

    묘원법사님의 쓰신 부분만 가지고 보고 이야기한 건 맞아요.
    쓰지 않으신 부분은 모릅니다.

    그 분은 더 깊은 성취가 있으신가보네요.
    저의 체험과 전혀 다르거나요.

    저의 경우

    얼마 전 본글에 작성했듯이,

    새끼손가락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차별없이 평온히 아는 앎이 있었습니다.
    편의를 위해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작성해보면요.

    아픔이 알려지고,
    아픔을 아는 마음이 알려지고,
    아픔을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이 알려지고,
    .
    .
    .
    연속..

    이것을 본 글에서 개아적 주시의 분열이라 이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앎의 상대적 연속 작용과 무관한..
    앎의 연속적 분열을 따로 비추는..

    노력없이 항상하는 평온하고 차분하고 따듯한 비개아적인 알아차림이 있었습니다. (최후의 주시자A)

    항상이요.

    꿈없는 잠에서도 있었고,
    꿈에서도 있었고,
    당연히 일상에도 항상 있었습니다.

    순간 화가 나도 평온한 앎이 비추고 있어서 금새 스러집니다.
    아시겠지만, 보면 사라진다 이런 류와 메커니즘이 다릅니다.
    뭘 힘주어서 보는게 아니거든요. 알려고 계속 노력하는 것도 아니구요.

  • 24.11.09 18:38

    이게..지금 화엄의 언어로 표현한 게 아니고..
    당시의 언어입니다. 오해하지마세요~ 쿨럭...

  • 24.11.09 18:46

    손가락 부서진게..
    그게 생각보다 사실 많이 아픈거거든요.
    주변에 손가락 부숴진 사람 있으면 한번 물어봐주세요.

    보통 사람이었으면 바로 병원에 갔을텐데 저는 안갔어요.

    아프긴 생생하게 아픈데..
    평온하게 비추는 앎이 있으니 그렇게 아프지 않다? 잘 설명이 안되네요.

    그런데 다음 날에 보니까 손가락이 탱탱부워서 몬 일이 일어났나보다 하고 병원에 갔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다른 곳에서 마하무드라 입단 수행을 할 때 유사한 과보를 의도하셔서,
    기법이 의도하는 바와 관련해 이런 저런 유사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당시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고,
    이것을 본 글에서 최후의 주시자A라 했습니다.

    개인적 체험입니다.

    이것이 법무아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묘원법사님과 유사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각 수행은 해당 행법 안에서 논해야하니까요.
    같다, 다르다, 이렇다 또는 저렇다 이야기하는 게 무의미하구요.

    저는 적합함이 있다는 것과 여러 유사체험에 대한 경험이 있다는 측면으로 이야기한거에요.

  • 24.11.09 19:07

    아사하님이 깨어 있든 잠을 자든 말씀하신 손가락이 부러지는 경험 포함해서 모든 순간에 작의 없는 알아차림이 유지된다면 분명 오랜 수행으로 정진하신 과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묻고싶은 건 아사하님이 불교의 정견을 갖추고 기본 심성을 닦은 상태로(알아차림 기법은 외도들도 하는 것이니까요) 그 수행을 진실하게 행하였다면 위빠사나 지혜가 드러났어야 합니다.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4. 생멸의 지혜
    5. 소멸의 지혜
    6. 두려움에 대한 지혜
    7. 고난의 지혜
    8. 혐오감에 대한 지혜
    9. 해탈을 원하는 지혜
    10. 다시 살펴보는 지혜
    11.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12. 적응의 지혜
    13. 성숙의 지혜
    14. 도의 지혜
    15. 과의 지혜
    16. 회광반조의 지혜

    가 나투었습니까 어떤 식으로 드러났습니까

  • 24.11.09 19:04

    물어보는 이유는 모든 테라와다 수행처는 각자의 기법은 달라도 이 위빠사나 지혜를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달라도 도달하는 지점은 같습니다. (해탈, 열반과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 24.11.09 19:12

    @법무아 위와 같이 열거하는 거는 소용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거는 넘한테 묻는 것도 아니고, 님이 하고 싶으면 님은 하세요.

    열거한 거, 하나 하나 체킹하면서 해보세요.

  • 24.11.09 19:18

    @방문객 전 테라와다 수행법을 말했고 아사하님은 다는 아니겠지만 해당하는 단계를 거쳤다고하시니 묻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거'는 남한테 묻는 게 맞습니다. 실제로도 물어봅니다. 방문객님은 테라와다 수행에 대한 존중이 없으니 관심도 없고 남한테 묻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남한테 묻는 게 맞습니다.

  • 24.11.09 19:22

    @법무아 그냥 적은 바 있는 내 이야기해주께...

    내가 중학교2학년때... 오락실에서, 오락게임을 너무 잘하는 애가 하는 거 본다고, 난로의 안전철망에 손가락이 닿은 거를 몰랐어요. 그래서 게임이 끝나고 "이야, 진짜 잘하네..."하고 감탄하는데 손이 난로 위에 있는 거야... 놀라서 얼른 손가락을 움츠리고 보니까, 손가락이 움푹 파였더라고...

    수행 같은 거 안해도, 그냥 눈 돌아가면 원래 그래...

  • 24.11.09 19:27

    @방문객 저도 하고 싶은 얘기나 할게요. 위빠사나 지혜를 남한테 묻는 건 맞습니다.

  • 24.11.09 19:29

    @법무아 아뇨...^^;

    그리고..저는 처음부터 테라와다 수행을 한게 아니어서요.

    여러 노력 끝에 비개아적 알아차림이 있었다는 것이구요.

    위의 알아차림의 공효라고 할까요? 그런 게 있긴했어요.
    평온하고 항상하는 알아차림이 있는데, 어떻게 공효가 없겠어요.

    탐진치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있었으니,
    하나의 예시로, 분노와 관련한 이야기를 한 것이구요.

    알려지는 일상의 평면에서 지혜의 카테고리에 속한 여러 공효들이 제 수준에서 얕게 조금씩 나타나기는 한 것 같아요.

    이것과 별개로요.

    '논서에 보면 이렇다고 하던데?
    경전에 보면 이렇게 된다고 하던데?
    청정도론에 보면, 이렇다고 하던데 너는 정말 이렇게 다 되었냐?'

    이렇게 물어보면요. 다 성취되었다고 선언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요.

    부처님 밑으로 다 조용히 해 이런 거 아니잖아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테라와다 수행처의 수행승들도 그것을 목표로 해서 닦아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경험한 비개아적인, 편안히 항상하는 알아차림도 작은 수행의 과보이자, 궁극적인 과보를 위한 과정일 뿐이죠.

    청정도론이 맞다면 끝까지 정진하여 닦아나아가서 성취한 분들은 16가지 지혜를 다 성취하시겠죠

  • 24.11.09 19:29

    @아사하2 그런데 설마
    저런 것이 다 안되었으면,
    외도의 알아차림이라던지, 이런 비약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좀 전까지 방편과 상관없이
    '탐진치의 소멸, 무상, 고, 무아, 자비심, 보리심' 등을 불교 수행의 중대 과보로서 이야기한 것으로 아는데요.

  • 24.11.09 19:36

    @법무아 저는 위의 16가지 안해요, 관심 없습니다. 나의 길이 아니거든...

    아... 법무아님은 그 16가지 하고 싶은데 몰라서 묻는거라면, 그 16가지 하는 사람을 찾아서 물어보세요.

    맞다... 대답을 들으면, 님이 질문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니까 이곳에 소개 좀 해주시구요.

  • 24.11.09 19:49

    @아사하2 제가 계속 수행 방법보다 정견, 오력, 기본 심성을 말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똑같은 수행을 하더라도 밑바탕이 다르면 결과도 달라집니다. 오력 중 하나인 신심은 해당 승가에 대한 믿음도 포함됩니다. 방문객님 댓글 보십시오 불법승이 아니라 불에만 귀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금 다른 얘기지만 불자는 설령 본인이 재가자로서 최소 수다원 이상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해도 계를 방금 받은 젊은 스님께 먼저 절을 올립니다.

  • 24.11.09 19:57

    @법무아 기본 심성... 하하하

    정말 법무아님은 기본 심성을 정말 갖추셔야 해요.

    비판은 못하면서, 비약해서 비방하고... 메뚜기로 변신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아무거나 가져다 복사해서 가져다 붙이고...

    처음에 지적 토론하자고 하시두만...

    처음부터 줄곧 말하지만, 하나만 해요. 하나라도 분명하게 세운 다음에, 정 원하면 문어로 변신해서 문어발 확장하시든가...

    저는요... 성격이...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하지마라고 잘 안해요. 그런데 매뚜기는 아니잖아... 중심도 없는데 문어로 변신하고... 그러면서 지적 토론 운운하면 말이 안되잖아요.

  • 24.11.09 19:57

    @법무아 정견, 심성 등 동의해요.

    그런데 저 이제 또 가야 해서요.

    처음 댓글에 질문 드렸듯이 정말 초보로서 궁금하신 게 있으셨던 건지..
    아니면 한 동안 불법을 빡시게 공부했고, 체험면에서도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것 같으니..법담 스파링?을 하러 오신건지..

    뭐..이러나 저러나 화엄에 오셔서 도움이 된 것이 있으면 좋겠네요.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습니다.

    이왕 오셨으니,
    시간 되시면 방문객님께서 쓰신 맞춤불교나 여러 장편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항상 즐겁게 수행하시고 걸음 걸음마다 수구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 24.11.09 20:03

    @아사하2 미안합니다. 편안한 토요일 저녁 보내세요.

  • 24.11.12 16:56

    @방문객 방문객님 본인이 쓰신 글과 댓글들의 단어 선택과 넘겨짚기들을 고려했을 때 어떻게 그리 적반하장식으로 기본 심성을 갖추라고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 있습니까. 예전에도 다른 분들과 비슷한 문제로 논쟁하셨죠?

    아티샤 존자의 말처럼 착한 사람부터 되지 않고 문사수를 닦는 건 의미없는 일입니다. 쫑카파 스님의 말처럼 예비 수행 없이 중관과 유식을 배우면 미친 지혜가 됩니다.

    또한 불법승이 아니라 불에만 귀의한다 이런 견해를 갖춘다면 불교에 입문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 24.11.09 20:25

    @법무아  네, 많이 봤습니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좀 봉쇄식으로 질러버려 말문이 막히면, 그때부터 광분해서 인신 공격을 하시더라구요.
     사교를 위해 이곳에 글을 적는 것도 아니구요. 이런 저런 이유에서, 직설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는 편입니다. 물론 근거 없이 그러지는 않구요. 그런 경우에도, 근거를 제시하고 평가를 하는 형식으로 적습니다.

     감정은 한정된 자원입니다. 이게 총량이 있어요. 그러니 소중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가치가 없는 일에는 감정을 소모하지 않으려고 해야합니다. 가치 있고 필요할 때 사용해야 합니다.

    ===

     위에도 적었듯, 이전부터 저는 "오직 부처님께만 귀의한다"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제 믿음의 토대는 저의 일인 것이고, 타인이 입을 댈 부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직 부처님께만 귀의하는 경우 불자가 아니라고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거는 저의 일은 아니니까요.

  • 24.11.09 20:40

    @방문객 넘겨짚기의 달인이시니 상대방들이 질려버릴 수 밖에요. 비슷한 상황들을 여러 번 겪으셨으면 얻는 교훈이 있지 않나요?

    테라와다 수행이 나이롱이라 말하고 말한 동기는 보살심이라, 웃긴 얘기지요. 본인 스스로도 솔직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보리심이란 달라이라마조차 평생을 예비 수행하고 심성을 닦은 끝에 겨우 갖추었다 합니다.

    불법승 얘기야 제가 백번 말해도 견해를 바꿀 분이 아니시니 어쩔 수 없죠. 닝마파고 티벳이고 관심없고, 테라와다 수행도 나이롱이고, 각묵스님도 뭘 모르는 스님이라고 하던 댓글들이 왜 쓰여졌는지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네.

  • 24.11.09 18:57

     제가 적은 내용에 대한 지적은 없고, 어떻든 삼보를 비방했다는 건가요?

     과거 적었는데요. 저는 오직 부처님께만 귀의합니다.

     나이롱이라는 표현이 과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요. 해당 내용을 쓴 동기는, 거품 포장해서 그냥 보살심이라고 합시다. 하핫

     비약이 너무 심한데 말입니다. 단지 오늘날 상좌불교 특정 스쿨 두개의 기법을 비판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를 제시하면서요. 그것이 상좌부 전체를 배격한 건가요? 그런데 상좌불교 내부에서도 스쿨 상호간에 문제 삼는 경우가 있는 거 같던데요. 재가불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고...
     제가 적은 내용을 보면, 비판한 기법을 가르치는 스쿨조차 부정하지 않습니다. 장점을 거론했고, 그 기법도 나름 유효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법은, 제가 적은 것과 같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위와 같이 적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까?

     전생 기억... 제 기억으로, 부처님께서는 "전생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권장하시는 편이죠? 그러니 전생 기억을 언급할 필요성등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적다보면 묻어나기도 하구요.
     지금 전생 기억이 나올 필요성등이 있었나요?

  • 24.11.09 18:56

    물론 상좌부 특정 스쿨에서 전생을 묻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사다함이나 수다원인지 점검할 필요성이 언급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거는 그 스쿨에서 수행한 이에게 지도한 분이 묻는 겁니다. 경우가 완전 다른 거예요. 이런 걸 구별할 수 없어요? 조건, 경우, 상황이 완전 다른데?
     과거 그 스쿨에서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그런 거 안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지금도 누가 물어보면, 그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그 스쿨에서 자기들끼리 그렇게 하는 거는 그들의 문제입니다. 그거를 못마땅해 하는 것은 저의 문제입니다.

     비판도 필요성에 따라 하는 겁니다. 위 본글과 같은 글을 여러 차례 봤지만, 왜 하필 지금 그런 이야기하는가... 그것도 아주 강한 표현을 사용해서... 뭐든 조건을 봐야 합니다.

     특정 기법을 비판하다고 해서, 기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 기법을 중심으로 하는 스쿨 전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며, 그 스쿨이 속한 거대 전승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정 행위를 비판한다고 해서, 상대의 전인격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위 본글에 소개된 글을 적으신 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 24.11.09 22:42

    밑에 댓글엔 이제 달아봅니다.

    방문객님 말하신 지적 토론 얘기가 이 상좌부 명상 기법 얘기였나요? 제가 낮부터 해당 내용에 굳이 대응 안 한 이유는요, 방문객님은 스스로 카페에 올라온 펌글로 기법을 파악했다고 하셨습니다.

    본인도 제대로 모르는 내용에다 독자적인 해석을 붙이고 거기에다 제 생각을 쓰라는 건 허항된 요구입니다. 어리석음에 어리석음을 씌우는 형태에요. 전 실제로 파욱수행 관련 책을 읽기도 했지만 제가 직접 해본 것도 아니고 코칭받은 적도 없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분석하지 않습니다. 나이롱이라고 평할 일은 더욱 없구요.

    진짜 지적 토론이라면 저번부터 제가 방문객님한테 나가르주나는 보는 작용과 보는 놈을 왜 구분지었겠냐는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하셔야죠.

  • 24.11.10 19:30

    아니 아직도 그거를... 이미 꼬리말에서 적었었는데...

    안읽었나? 제법 길게 적었는데... 너무 쉬운 거고...

    그래도 집요하게 하나 물고늘어지는 거는, 다른데선 그러지 말고, 법에 대해서는 나쁘지만은 않아요.

    좀 더 쉽게 다시 설명하께요.

    간단합니다. 그야, 법무아님처럼 보통은 "내가 눈으로 형상을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죠.

    본다는 것에서 꼭 '나'에 상응한 주체 따위가 있어야 하는 거야, 업의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아함부(나 니까야)는요. 아함도 중도이기에, 중도를 말하는 반야부쪽에서 함께 다루기도 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눈으로 형상을 본다 ... 아함에서 '내가'를 부쉈어요.

    내가 업을 지어 과보를 받는다 ... 역시 아함에서 '내가'를 부쉈어요.

    아함에서는 일체를 오온(18계,12처)으로 살펴보니, '나'가 없다는 거예요.

    중론에서는 애초 '본다'나 '업을 지음'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니, '나'는 더더욱 당연히 없다는 겁니다.

    '본다'가 없는데, '보는 나'가 어디 있겠어요?

    '업을 지음'이 없는데, '업을 짓는 나'가 어디 있겠어요?

    즉 중론은 업이나 바라봄 등에서 아함도 포섭하여 적었을 뿐입니다.

    쉽잖아요, 그렇죠?

  • 24.11.10 21:53

    눈과 형상 얘기로 이번에도 어김없이 넘겨짚기 하시네요.

    제가 주체(보는 놈), 작용(보는 작용), 대상(보이는 것)은 승의로는 없다고 몇 번씩이나 적었습니다.

    요지는 주체와 작용을 언어로 가립할 수 있냐 없냐는 겁니다. 전 가립할 수 있다는 입장이니까 이 용어를 쓰는 겁니다. 이건 기초적인 개념이에요.

    전 초반에 댓글 쓸 때부터 (주체와 작용을 말하면서) 주체든 작용이든 세 가지 분류든 뭐든 결론적으론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길 위한 가정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방문객님은 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건지 파악을 잘 못하는 거에요.

  • 24.11.10 23:05

    아니, 누가 쓰지 말래?

    '나'도 매일 '나'라는 말을 쓰는데...

    어떻게든 자신은 옳다는 거를 증명하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정작 자신이 한 말을 다 까먹었어요?

    식온이 뭔지 물었더니, '식온'이 주체라고 했잖어. 식온이 주체와 식작용이라면서...

    그러고는 식온이 주체임을 증명한답시고 오만데서 글을 퍼왔잖어...

    그러면서 식온이 주체임을 의미한다는 증거를 든답시고, 중론이 보는 자,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으로 나누지 않았느냐... 그러니 자기 말이 맞다고 했잖어...

    ===

    그러면 내가, 식온이 뭔지 묻는 게 왜 나왔나?

    처음에 자기 체험 운운하면서 뭔가 깨달았는데, 깨달은 이는 깨달은 시간도 기억한다고 들어서 그 시간까지 기록했다면서...

    그래가지고는 자기 체험이 어떤 수행이었는데, 그 깨달음이 어떻게 나왔니 뭐니 했고...

    그래서 내가, 그거는 체험이 아니다, 그냥 판단이다... 그러니까...

    그런데 굳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체험을 했다고 하길래...

    그래서 내가 "식온이 뭔데 그걸 체험했다고 하냐?"고 물은 거라고...

    ===

    님이 한 거를, 님은 기억할 수 없어도...나는 기억한다고...

  • 24.11.10 23:03

    ===

    대상을 아는 연습을 하다가... 님 스스로 인정한 바 있지만, 얼마하지도 않았어요...

    어쨌든 그러다 "마음은 알려지지 않는다"는 널리 알려진 사실에 착안해서,

    "마음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니까 알려지지 않는 거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러니 마음의 대상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결론도 내려서,

    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것을 체험했다...

    깨달은 시간 정확히 안다니까, 시간 기록해 놔야지...

    이상이 님의 체험이에요. 님이 그렇게 적었어... 내가 적은게 아니고...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님이 지금은 그 글 본문 삭제했어. 하지만 나는 그거 기억한다고....

    ===

    그래서 내가 그 글 아래 적었지...

    보아하니, 님의 체험 즉 님에게 알려진 건 대상이 있다는 건데, 대상이 있으면 마음도 있다고 해야 맞는 거 아니냐...

    그런데 알려진 대상은 던져 두고, 왜 느닷 없이 마음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널리 알려진 사실에 착안해, 갑자기 그걸로 대상을 규명하고 그것을 체험했다고 하냐?

    님은 대상이 있는 거를 알려진게 아니냐... 그렇게 반문했고...

    나의 그 반문이, 이 모든 난장판의 출발점이야... 안그래?

  • 24.11.10 23:21

    ===

    물론 나에게 이 난장판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

    나도 정말 모처럼, 언어적 생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제법 오랜 시간 표현하고 말이지...

    언어적 생각하는 김에, 그냥 지나간 것들 중에서 논점과 관련 있으면서 한번 참고하면 좋을 것들 적기도 하고...

    어쨌든 이해 득실은, 얻는게 있으면 잃는게 있고 잃는게 있으면 얻는게 있고, 잘 알 수가 없는 거야...

    중생은 원래 잘 몰라. 정확한 인과는 부처님께서 아시거든...

    좀 짜증스러울 때도 있었지, 내가 님을 미워하거나 님에게 이길려고 하거나 그런 거 엄어.

    님에게 내가 옳다는 증명을 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냥 말을 했으니, 내 말에 책임을 지는 거 뿐이지.

    ===

    내가 중론을 별로 안좋아하는데, 이유는 쓸데 없이 어려워 그래.

    용수보살께서 일부러 어렵게 적으셨나? 그건 아니야. 뭐든 조건 발생이거든.

    용수보살께서는 당대 여러 종파 논사들을 고려해 적으셨어, 그 논사들을 논파하려고 그렇게 적으셨던 거야. 그게 조건이야.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불자들이나, 나같이 체험에 비춰 보는 이에게는 그러한 세부 논리까지 필요가 엄어.

    즉 용수보살의 중론등이 틀린게 아니라, 대상이 다른 거야.

  • 24.11.10 23:21

    모든 난장판의 출발점은 방문객님의 이제에 대한 이해 부족이에요.

    식은 없어요. 주체도 없어요. 식도 있고 주체도 있어요. 오온은 있어요. 오온은 없어요. 일체법은 있어요. 일체법은 없어요. 일체법은 있지 않아요. 일체법은 없지 않아요. 대상은 생해요. 대상은 무無생이에요.

    위에 쓴 문장 다 맞는 말입니다. 무엇을 진제로 썼고 무엇을 속제로 썼는지 방문객님이 구분을 못하니까 난장판을 스스로 만들고 계신 거에요. 중론을 읽었는데 어떻게 이 구분을 못합니까

  • 24.11.11 01:56

    진제 속제는 무슨 진제 속제여... 상좌불교 개론이라도 읽어. 책 한권이라도 읽어야지, 떠다니는 글만 봐서는 혼동해.

    상좌불교에서 속제와 진제가 이미 있어. 속제는 인습적 진리, 세간적 진리라고 표현하기도 하고...진제는 궁극의 진리, 출세간적 진리라 그래.

    상좌불교에서 인습적 진리가 왜 나오나?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부처님께서 '나'라는 표현등을 사용하셨어.

    부처님 말씀이기에 '진리'인데, 아함이나 니까야의 부처님 말씀을 구별한 거야...

    반야부에서의 속제는... 아함의 출세간적 진리를 칭하는 경우도 있고... 아함의 세간적 진리와 출세간적 진리 모두를 칭하는 경우도 있어.

    단어가 같다고 같은 뜻은 아니니까, 문맥을 살펴 그 뜻을 파악하면 돼.

  • 24.11.10 23:45

    위에서 내가 가능한한 쉽게 적은 거 참조하고, 그래도 모르면 어쩔 수가 엄어.

    모르겠으면 기존에 안다고 자부하던 거 다 던져두고, 기초 개론 책 한권이라도 읽어.

    내가 위에 한 말 이해되더라도, 책 한권은 꼭 읽어.

    ===

    이야... 이거 다음 말 모처럼 적어보네...

    세상은 크다. 세상은 만만한게 아니야. 정말 커.

    책 한권도 안읽고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여.

  • 24.11.10 23:43

    책 한 권이라도 읽었다면 제가 하는 말 다 알아들으실 텐데요. 용수 스님 이후로 공사상과 같이 진제 속제의 의미가 확장됩니다. 그게 지금 대승 현교의 근간이구요. 표현이야 세간적 진리, 출세간적 진리라 하면 여기 붙이든 저기 붙이든 다 맞죠.

    진제로는 조건과 발생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진제는 자성적 측면에서 서술하는 거고, 속제는 언어적 가립이라는 전제 하에 서술하는 거에요.

  • 24.11.10 23:46

    솔직히 말해서, 법무아님 책 한권이라도 읽었어요? 그러니 읽어요. 상좌불교 기초 개론서... 아주 쉬운 거라도 읽어요. 시간 오래 안걸려.

  • 24.11.10 23:49

    이제 그냥 내용은 관심 없고 책읽어라로 일관하기로 결정하셨나요. 전 방문객님처럼 넘겨짚기하는 게 싫어서 이런 말은 가능한 피하려고 했는데요, 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거로 유추해봤을 때 높은 확률로 중론도 제대로 정독 안하신 거 같은데요?

  • 24.11.10 23:52

    그래도 사람이 참 착해. 훌륭해요. 거짓말로라도 읽었다고 안하는 거 보면...

    유뷰브나 떠다니는 글이 나쁘다는게 아니라, 중심이 없으면 여기 저기서 표류할 공산이 커요.

    이거 굉장히 복잡한 미로거든...

    배를 몰려면, 닻이 있어야 돼, 돛만 있으면 골 때리는 경우가 생겨요.

    닻이란 쉽고 친숙하고 잊지 않는 거야 되요.

    다음에 봅시다.

  • 24.11.10 23:58

    이제 개념이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언제든 익히면 그만이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삼보에 귀의하고 기본 심성을 닦으시기 바랍니다.

  • 24.11.11 00:09

    저는 오직 부처님이고...

    심성이야, 그럽시다. 심성 닦는 거야 좋은 거니까.

    참고로, 월폴라 라훌라 스님이었나? [ 붓다의 가르침 ]이라고 아주 앏은 책이 있어요. 그거라도 읽으면 좋겠어요.

    검색해 보니까, 전재성님이 번역한 [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가 같은 책인 거 같은데, 잘 모르겠네요.

    좋은 밤 보내요.

  • 24.11.11 00:25

    고 김성철 교수님의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부터 읽으시고 시중에 나와있는 중론 번역본 아무거나(신상환, 김성철, 가츠라 쇼류 등) 읽으시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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