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정동(槐亭洞)
부산광역시 사하구에 있는 법정동.
사하구의 북동쪽에 위치하여 북쪽과 서쪽은 당리동, 남쪽은 신평동·구평동·감천동, 동쪽은 서구와 접한다. 북쪽은 구덕산(565m)에서 이어진 시약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높이 200m 내외의 산지가 마주하고 있다. 시약산에서 발원한 괴정천이 서쪽으로 흐르며, 시가지는 북쪽 산지의 남쪽 사면에 발달하여 있다.
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서구 서대신동, 서쪽과 북쪽은 당리동, 남쪽은 신평동·감천동과 접해 있다.
괴정동에는 청동기 시대 분묘 유적이 있어 오랜 거주 역사를 알 수 있다. 또한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이 지역은 사천면(沙川面)의 하단(下端)으로 목장리(牧場里)로 기록되어 있고,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목마성[목장의 말이 울 밖으로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성]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1866년(고종 3)에는 사하면(沙下面)이 되었고,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는 사하면(沙下面)에 괴정리(傀亭里)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동래군 사하면(沙下面) 지역이었고,
-189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0년 부산부 사하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대티리(大峙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동래군 사하면 괴정리(槐亭里)로 되었고,
-1942년에 부산부로 재편입되며 사하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부산시 서부출장소 사하지소에 속하게 되고,
-1957년 서구 소속으로 되어 서구 사하출장소 괴정동이 되었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하였고,
-1975년 시 직할 출장소로 승격되었다.
-1983년 서구에서 분구된 사하구 관할로 바뀌었다. 사하구 괴정동이 되었다가,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괴정동은 행정동으로는 괴정 1동과 괴정 2동, 괴정 3동, 괴정 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괴정동의 옛 이름은 목장리(牧場里)였다. 조선 시대에 목장이 있어 말골·마하곡 등으로도 불렸다.
괴정동은 다대첨사의 폭정과 동래부사의 가렴주구가 심하여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동민들은 팔정자(八亭子)나무 밑에 모여 이를 성토하고 항거하다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이 팔정자나무는 회화나무[槐木]로 지금은 부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괴정동의 동명은 이 회화나무에서 유래한다. 괴정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에 회화나무[괴목(槐木)으로 홰나무라고도 함]가 많이 서식하였는데, 특히 수령 600년 이상의 팔정자(八亭子) 나무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면적은 4.89㎢이며, 인구는 2만 7,030가구에 총 5만 8,621명으로 남자가 2만 8,299명, 여자가 3만 322명이다(2021년 12월 현재).
북쪽의 산지와 남쪽의 산지 사이 평지 사이로 낙동 대로와 부산 도시 철도 1호선이 관통하고 대티역과 괴정역, 사하역이 있다. 동의 북동쪽으로는 대티 터널이 있어 서구 서대신동과 연결된다. 도로를 중심으로 남북의 산지 쪽으로 중소 규모 주택과 아파트 등이 밀집한 주거 지역이 발달해 있다. 관내에 동주대학교와 괴정초등학교, 동주여자중학교, 사하초등학교, 사하중학교, 당리중학교, 사남초등학교 등이 있다.
자연 마을로 고분들 마을·대티 마을·신촌 마을·목마장 마을·양지 마을·희망촌 마을·괴정마을 등이 있다.
대티마을은 괴정2동 일대에 있던 마을이다. 괴정동에서 서대신동으로 넘어가는 대치터널 위쪽에 있는 고개가 대티 또는 대치고개인데, 이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을 대티마을이라고 한다. 지금은 지하철 1호선이 대티고개 아래를 지나면서 고개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으며, 지하철 서대신동역과 괴정동역 사이의 역명이 대티역이다.
옛날 괴정동 지역에는 목장이 있었는데, 다대포 관할의 목장으로는 괴정동 목장의 규모가 가장 컸다. 목장으로 인해 괴정동을 목장리(牧場里)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지금의 희망촌 일대를 마꼴[馬谷]이라고 하였다.
관내에는 동주대학과 사하도서관·사하구보건소·상수도본부 사하사업소 등의 공공기관이 있다. 낙동강 하류지역 최남단에 있는 괴정동 고분군(古墳群)은 5세기 후반 부산지방 고분들과의 상호관계와 낙동강 하류지역 고분 문화의 전반적인 성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괴정동(槐亭洞)
대전광역시 서구의 북쪽에 위치한 행정동 및 법정동.
북쪽으로 갈마동·탄방동, 동쪽으로 탄방동·용문동, 남쪽으로 내동·가장동, 서쪽으로 갈마동과 접해 있는, 서구의 중북부 도심 지역이다.
괴정동 244번지 일대에는 초기 철기 시대의 석관묘를 비롯한 선사유적이 분포한다.
원래 고려 시대의 공주 관할이었고 조선 시대에 공주목 천내면에 속했다.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개편 때에 회덕군 천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동(芝洞:지치울)·하응리(下應里)·응기리(應起里:옹기터)·백운리(白雲里:배우니) 일부를 병합하여 괴정리(槐亭里)라고 하여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부제 실시로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되어 독립하면서 대전군이 폐지되면서 대덕군에 편입되어 대덕군 유천면에 편입, 편제되었다가
-1963년에 대전시 시역 확장으로 다시 대전시에 편입되어 괴정동이라고 하여 용문동(龍汶洞)에 통합되었다가 그 뒤 분리되었으며, 가장동(佳狀洞)·내동(內洞)이 통합되고,
-1970년 용문동으로부터 괴정 · 가장동이라는 행정동으로 독립하였고,
-1971년에 출장소 설치로 서부출장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
-1977년 중구가 신설, 설치되면서 대전시 중구에 편입되었다가
-1982년 괴정 · 가장동으로부터 괴정동과 가장동, 내동이 분리·독립되고,
-1988년 중구를 분구하여 신설된 서구에 편입되어 서구 괴정동으로 편제되었다.
-1989년에는 대전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전직할시 서구 괴정동이 되었고,
-1991년 탄방동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고,
-1993년 일부 지역이 내동에,
-1995년 광역시 개칭에 따라서 대전광역시 서구 괴정동으로 편제되었다.
-1995년 일부 지역이 갈마동에 각각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지도서』에 가장동(佳壯洞)이라는 지명과 함께 호수는 38호로 확인된다. 『호구총수』에 가장동(佳藏洞)이라는 지명으로 나타난다. 『조선지지자료』(회덕)에는 취락으로서 '가장골'이라는 한글 지명과 함께 '괴정리(槐亭里)'라는 한자 지명이 병기되어 있다. 이점을 보면 '괴정'이라는 한자 지명이 원래 '가장'이라는 한글 지명을 음차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행정동인 괴정동은 행정동명과 법정동명이 같다.
동명의 유래는 정자나무인 느티나무(귀목나무)가 있으므로 괴정(槐亭)이라고 하였다. '괴정(槐亭)'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과거 이 일대의 중심 마을인 가장골에 수량이 풍부한 좋은 샘이 있었고 그 옆에 정자처럼 잘 자란 괴목이 있었다는 유래로부터 기원한다는 설이 있다. 이 괴목은 높이 13m, 둘레 4.6m,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였는데 20세기 후반 도시화와 도로 확장에 따라 사라졌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 있던 임야는 모두 택지로 개발되어 대단위 아파트단지와 직교형 가로망을 갖춘 시가지가 되었으며, 번화가는 북부를 가로지르는 대전-공주 간 32번 국도변과 중앙부를 관통하는 대로변에 집중되어 있다.
괴정동파출소·괴정동우체국·한국토지공사 충남지사 등의 공공기관이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서부를 관통하는 대전-논산 간 국도와 동북부를 가로지르는 대전-공주 간 국도가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괴정동 244-4번지의 한국통신 뒷산에서 돌널무덤이 발견되고, 간석기 돌화살촉 3점·옥 귀걸이 2점·흑도(黑陶) 목항아리 1점·점토 테두리 토기 1점·한국식 동검(銅劍) 1점(32.4㎝)·동경(銅鏡) 2점·칼집형 동기(銅器) 3점·방패형 동기 1점·오목한 접시 모양 동기 1점·반원형 고리가 달린 방울 2점 등 13종이 나왔는데, 한국식 동검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유물이며, 오목한 접시 모양 동기는 영월 지방의 출토 유물과 같은 것으로 보아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면적 1.26㎢, 인구 1만 8161명(2008)이다.
괴정동(槐井洞)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마을.
용동궁 동쪽에 회화나무가 있어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회화나뭇골이라고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