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특집1
3.15부정선거에서 4월혁명으로
강사 : 서중석(성균관대 명예교수)
*2014.3.15(토) 15:00시 190회 우리문화사랑방 강좌에서 서중석 교수의 강의내용입니다. 강사는 1948년 충남 논산생, 67년 서울대 국사학과와 연세대/서울대대학원 석박사이다. 74년 유신반대 데모시위와 민청학련사건(이철, 유인태 연루)으로 제적, 옥고와 고문을 치르고 79-88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를 거쳐 90년 ‘한국근현대민족운동연구’ 논문으로 현대사박사 1호이다. 강만길 교수와 더불어 가장 권위있는 역사학자이다. 2010년 역사비평 편집주간, 2013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를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한국현대사 외 10여권이 있다. 전날 연세대 용재석좌교수 선정시상식 전격 취소사건이 있었으나 이날은 3월15일로 강의의 주제와 부합되는 뜻 깊은 날로써 열강을 보여 주었다.
#3월15일은 동서양에 걸쳐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날이다.
유럽에서는 1815년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에 즉위(卽位)하고, 아시아에서는 1521년 스페인 탐험가 마젤란이 핀리핀을 발견하였고 1874년 제2차 사이공조약체결로 베트남은 프랑스 보호령(保護領)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1960년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선거일로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자행(恣行)된 날이다.
-역사교육의 중요성
일본 아베정권과 야수쿠니신사 참배(參拜)와 금년의 일본 도쿄도지사 선거를 보면 젊은층이 보수파를 지지하는 성향이 강하니 놀라운 일이다.
한국근대사 연구는 6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전에는 자료를 보기가 어렵고 여건도 미미했다.
-4월혁명과 헌법(憲法)
해방 60년이 되는 2005년에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자랑스런 민족이다. 헌번 전문에도 3.1운동과 4.19정신을 계승(繼承)한다고 적시(摘示)되었다.
한국은 1960년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이 30여년간에 걸쳐 펼쳐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나라이다. 그것은 독립운동이 1910년부터 1945년 8.15까지 계속되어 주체적으로 해방(解放)을 맞은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3.1운동은 물론이고 독립군의 존재나 청산리전투 등도 동시대에 유례를 찿기 힘든 사건들이다.
1.3.15부정선거(不正選擧)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기획위원회가 부정선거를 기획, 모의(謀議)하였다.
이 대통령은 3.15부정선거를 몰랐을까. 이는 지나친 주장이다.
인구 2125만, 선거인수 1119만, 투표자 1086만, 이승만 단독후보 88.7%, 부통령 이기붕 833만 79%(이것이 문제다), 현직 부통령 장면 184만(서울 이기붕 40만 대 장면 37만). 그런데 56년 선거에서는 장면 401만, 이기붕 380만(서울 장면 45만 대 이기붕 9만)이 역전된 것이다. 당시 서울은 부정선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86세 고령으로 58년 이후 사실상 이기붕이 전권을 행사했다. 이승만은 6대독자, 개성이 강하고 원고도 직접 모두 썼다. 정적에 가혹하여 김구, 조봉암, 장면 등을 핍박했다.
부정(不正)의 출발은 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의 패배에서 출발한다. 내무에 이익흥, 치안국장에 김종원, 그해 8월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의 부정선거. 58년 5.2총선에서 야당이 도시에서 선전하여 헌법개정이 불가하게 됨. 부정선거 노하우는 5.10선거, 5.30선거와 최초의 정부통령 직선제(直選制)인 8.5선거에서 습득했다.
3.15부정선거 공보물
`1958년 5.2총선에서 조봉암, 진보당사건(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다)에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대도시에서 79석을 차지하였다. 서울 16석 중 14석 석권한 지방자치 선거였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죽기전에 살길 찿자’는 유명한 선거구호(口號)였다.
`1958년 12.24 신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개정안 통과, 경향신문 정간 처분.
`1959년 3 최인규 내무부장관 취임사에서 이 대통령 위하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해야 한다는 사실상 공무원선거를 지시함. 6인 위원회를 설치. 최내무는 당42세 약관(弱冠)으로 몇달전 교통부장관에 임명된 강골(强骨)이다.
`1959년 6.29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정부통령후보 조기 지명으로 부정선거기간 최대화를 모색. 보통 후보자 지명은 선거 2개월 전에 하는 것이 관행이다.
`1959년 12.21 이 대통령 담화 발표, 농번기(農繁期)를 피해 하겠다고 한다.
`1960년 1.27 조병옥 박사 치료차 도미. 2.3 최내무 3.15선거일자 발표. 2.15 조병옥 미국 병원에서 사망으로 정국 혼란.
`1960년 3.3 민주당 부정선거 계획 신문에 사전 폭로됨. 이미 1959년 12월부터 내무장관 지시로 경찰이 구체적인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다. 당시 신문은 동아, 조선, 한국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으며 서울은 관제신문으로, 경향은 기 정간(停刊)되었다. 이때는 자유 언론의 자유가 어느정도 있던 시기다.
`1960년 3.15부정선거는 4할 사전투표, 3인조 선거, 완장부대, 4할 무더기 투표, 대리투표 등 온갖 부정이 만행(漫行)되었다. 부통령은 허수아비 함태영이 선출되었다.
왜 3.15부정선거가 저질러졌는가.
1.이승만과 장면과의 관계 : 정적(政敵)이자 경쟁자 관계이다.
2.이승만의 절대권력 욕구 : 자유당 내각책임제, 부통령 러닝메이트제 선호.
3.이기붕과 3.15 : 이승만은 고령(高齡)으로 이기붕은 건강상태 악화로 어려우나 자유당과 이기붕은 반드시 당선시키겠다고 과욕을 부렸다.
4.친일파와 공직자의 가치 윤리 : 당시 친일파(親日派)가 득세하고 공직자는 어용(御用), 수하(手下)로 전락하였다.
2.4월혁명(革命)
`1960년 2.28 야당도시 대구 경북고 등이 시위(示威)를 했다. 경북고는 이날이 일요일인데 3.3일 대신 학기말시험을 치르고, 대구고는 토끼사냥,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수업 등으로 피하려 했다. 최초의 학생데모이다. 당시는 4.1일 신학기 개학이고 3공화국 이후 3.1일 학기제가 변경되었다.
`3.5 장면후보 서울 유세(遊說) 후 1000명 시위.
`3.8 대전고 시위. 수업시간에 이승만 연설을 틀어 주는 등 민주당 강연회 가지 말라했다.
`제1차 마산 3.15의거(義擧)
3.15 마산시당 10:30분에 선거포기 선언. 경남도당은 13:30분 선거무효 선언. 중앙당 16:30분에 불법무효 선언. 7시경부터 시위 격화로 8명 사망. 경찰이 실탄(實彈) 장전상태로 총격을 했다.
그뒤 3.17 성남고 시위, 부산에서 잇단 시위 진행되었다.
4.6 민주당 재야단체 불법 무효 선언식 뒤 시위, 중앙당 마지막 시위이다.
`제2차 마산 4.11-13일 항쟁(抗爭)
이것이 4.19의 도화선(導火線)이 된 역사적 사건이다.
마산을 공포의 도시, 빨갱이 도시로 몰았다. 3청소년 시체에 이승만 죽여라, 인민공화국 만세 등이 나왔다고 발표했는데 경찰의 조작이었다.
4.11 이승만정부 물러가라 구호가 등장하였다. 10시 김주열열사 시신이 저수지에서 발견되었다. 이승만은 당시 국보(國寶), 민족의 태양, 세계적 반공지도자 등 감히 넘볼 수 없는 지존(至尊)이었다.
1인의 죽음과 한국현대사 : 한국 근현대사를 보면 1인의 죽음이 역사를 바꾸었다.
`1919년 3.1운동은 고종(高宗)의 장례식날 거행되었으며 유관순(柳寬順)열사가 있다.
`1926년 6.10만세사건 조선 마지막황제 순종(純宗)의 인산일(因山日) 시위가 일어났다.
`60년 4월 마산의 김주열열사(당시 고교생)가 있다.
`87년 6월항쟁에 박종철(서울대), 이한열(연세대) 열사가 있다.
민중(民衆)의 참여, 여성(女性)의 활약이 있었다.
이 대통령의 2차례에 걸친 특별담화도 소용이 없었다.
`피의 화요일 4.19
4.18 고대 학생 데모가 있다.
4.19 피의 화요일, 서울문리대, 연세대, 동국대, 서울사대, 대광고, 동성고 등이 참여하여 110명이 사망한다. 시청앞, 을지로입구에서 중앙청으로 가자. 효자동에서 3차 저지선(沮止線)에서 충돌한다. 계엄령(戒嚴令)이 선포되어 송효찬 육참총장이 게엄사령관이 된다. 부산, 광주에서 시위로 사망자가 속출한다.
`승리의 화요일 4.26
4.25 대학교수단 데모 : 서울의대 자리 함춘원에서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고 봉기한다.
4.26 승리의 화요일. 이 대통령 하야성명, 민주주의 승리의날이다.
-4월혁명은 어떻게 가능했나.
1.왜 중등학생이 중심인가 : 사상자(死傷者)도 증등학생(현 중고교생)이 많았다. 이들이 가장 순수했으며 당시 대학생(상아탑 아닌 후굴탑으로 불림)은 10만 정도로 적고 살기 어려워 실업자, 구두닦이 등이 많이 사망했다.
2.언론(言論)의 역할 : 동아, 조선, 한국 등 언론의 자유가 있던 시절이다.
3.미국(美國)의 역할 : 복잡한 국제정세가 숨어 있다.
4.이 대통령 노령과 이기붕 건강문제로 나약함. 친일파 들의 패주가 되었는데 1979년 10.26과 비교된다.
-4월혁명의 의의
1.기본적 자유(自由)의 확대, 자유민주주의 기틀 마련 : 군사 쿠데타조차 무시 못해.
2.민족(民族), 자주(自主), 통일운동, 교원노조 등 노동운동 : 반공통일, 북진통일.
3.법치주의(法治主義), 공무원 공채와 신선한 바람(성취형) : 핵심세력으로 성장. 허정 내각수반은 당시 선임인 외무장관으로 4.25일 취임하여 대행.
4.경제(經濟) 제일주의 : 국토개발사업과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후 정권에서 계승.
5.반민주(反民主) 행위 처벌 : 사회정화, 특히 정치깡패 소탕. 무법, 탈법.
6.김구, 조봉암사건 등의 제기와 거창양민사건 : 과거사(過去事)청산의 계기가 됨.
#자유당 당시 장차관은 최고 엘리트(경성제대 출신 많음)이었으나 하수인(下手人)으로 전락하였고 58년부터는 이기붕이 불치(不治)의 병으로 서대문집에서 칩거(蟄居)정치를 하였다. 그 출입자 기록을 입수 분석하였다. 이승만은 결국 망명(亡命)지 하와이에서 91세로 서거(逝去)하고 이기붕은 부인 박마리아, 아들 이강석 등 일가족 자살(自殺)로 마무리되었다. 장차관의 7-80%가 친일파 가치윤리를 가졌으며 치안국장, 서울시경국장 등 요직(要職)은 더욱 그러했다.
#교육 수강 후 약 100명 참석자를 대상으로 행운권 추첨(3명)이 있었는데 당첨이 되었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상품은 (사)한국의 재발견에서 발간한 궁궐 문화여행 도서 ‘궁궐나들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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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