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50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맥국의 터였던 춘천
이 일대의 지형을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 곳에 비하면 춘천과 원주가 조금 낫다. 춘천은 인제 서쪽에 있는데 한양과는 물길로나 육로로나 모두 200리 거리다.
춘천부 관아 북쪽에 청평산이 있다. 산속에 절이 있고 절 옆에 고려 때의 처사 이자현이 살던 곡란암(鵠卵菴)의 옛터가 있다. 이자현은 왕비의 인척이었지만 젊은 나이에 결혼도 벼슬도 하지 않은 채 이곳에 숨어 살면서 도를 닦았다. 그가 죽자 이 절의 승려가 부도(浮屠)를 세워서 유골을 갈무리하였는데, 지금도 산 남쪽 10여 리 지점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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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 평야가 펼쳐치고, 두 강이 그 가운데를 흘러간다. 기후와 바람이 고요하고 강과 산이 맑고 훤하며 땅이 기름져서 사대부들이 여러 대를 이어가며 살고 있다.
춘천은 원래 고대에 규모가 큰 원시부족국가였던 맥국(貊國)의 터로, 삼국시대에 들어와 백제ㆍ고구려ㆍ신라의 지배를 차례로 받은 뒤에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부터 현재의 이름인 춘천으로 불렸다. 강원도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된 강릉과 원주에 밀려 한적한 고을이었던 춘천이 하나의 전환기를 맞은 것은 1888년이다. 그때 춘천은 유도부(留都府)로 승격되어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서울에 난리가 일어나 조정이 위험해질 경우를 대비하여 임금과 신하가 피난할 궁궐을 지금의 강원도 도청 자리에 짓게 하였다. 궁궐이 들어선 뒤로 춘천은 강원도의 행정 중심지가 되어갔고 결국 1895년에는 영서지방을 통괄하는 관청인 관찰부가 들어섰다. 이듬해에 전국을 13도로 나누는 과정에서 영동지방, 즉 강원도 전체를 다스리는 관찰사를 이곳에 두게 되었다. 춘천은 그때부터 강원도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910년에는 관찰부를 도청으로 바꾸었다.
춘천호주변 산수가 아름답고 춘천댐을 중심으로 호반에 유원지 시설이 들어서서 휴양객이나 낚시꾼이 많이 찾는다.
북한강 상류인 의암호ㆍ춘천호ㆍ소양호 등의 인공호수와 구절산ㆍ연엽산ㆍ대룡산ㆍ가리산ㆍ촛대봉ㆍ북배산ㆍ청평산 등의 크고 작은 산들이 있고, 북한강변에 그림같이 떠 있는 남이섬이 있는 호반의 도시 춘천은 천혜의 관광지로 손꼽힌다. 특히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신동면 의암리의 신연강(新延江) 협곡을 가로질러 축조된 의암댐, 즉 의암호가 봄내라고도 불리는 춘천을 물의 도시, 호반의 도시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의 좋은 경치 그림으로는 못 그리겠네. 사면(四面)의 산들은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쌍 내[쌍천(雙川)]에 다다랐다”라고 이변이 노래했던 그 옛날의 정취는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다.
한편 춘천시내를 흐르는 공지천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조선시대의 큰 유학자인 이황이 이곳에 와서 산 적이 있어 그가 살았던 곳을 퇴계동이라 하였는데, 이 마을이 공지천을 끼고 있었다. 이황이 이곳에 살 때 짚을 썰어서 강에 내던지자 짚 부스러기가 모두 공지, 곧 공미리라는 고기로 변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내를 공지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춘천 소양강소양강은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무산에서 발원하여 강원 중부 지역을 남서류한 뒤 춘천 북쪽에서 북한강에 합류한다.
이 밖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옛날 이곳에서 두 사람이 도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살생을 금하라는 계율을 어기고 이 강에서 고기를 잡아서 먹었고 그러자 속이 뒤틀려 토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목구멍에서는 고기 한 마리가 산 채로 꼬리를 치면서 나왔고, 다른 한 사람의 목구멍에서는 꽁지(꼬리지느러미)가 없는 죽은 고기가 나왔다. 산 고기를 토한 사람은 도를 깨달았고, 죽은 고기를 토한 사람은 도를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내를 꽁지천이라 부르다가 말이 바뀌어 공지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춘천의 대표 음식인 춘천 닭갈비와 춘천 막국수는 전국에서 유명한 음식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닭갈비에 대한 유래가 고사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촉나라의 제갈공명은 위나라 조조의 대군을 한중(漢中)에서 맞아 싸웠다. 조조의 부대는 너무 지루한 원정에 보급도 시원치 않아서 천하의 조조인들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대군 앞에서 호령하기를 “계륵(鷄肋)!”이라고 하였다. 어느 누구도 그 호령의 뜻을 몰라서 서성대고 있는데, 주부 벼슬인 양수가 알아듣고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무슨 뜻이냐고 다른 사람이 묻자 “닭의 갈비는 뜯어먹자니 하찮고 버리자니 아깝다. 한중 땅도 닭갈비 같은 것이니 철수의 의향을 그렇게 구령으로 나타낸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별로 대수로운 것은 아니지만 버릴 수 없는 사물이나 사리를 빗대는 말로 계륵(닭의 갈비)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선조들은 자신의 글재주를 겸손하게 여겨서 문집 이름도 『계륵집(鷄肋集)』이라고 많이 붙였다. 이 고사에서 ‘계륵인심(鷄肋人心)’이란 말도 나왔다. 그렇게 하찮게 여겼던 닭갈비를 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들어낸 곳이 춘천이다. 오늘날엔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