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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렸을 적 여자친구들 이야기
갑자기 옛날 여자친구들 생각이 났다
제목에 여자친구들이라고 쓴 이유는
한 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플레이보이였다는 얘기도 아니고
여성편력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딱히 애인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친구들이었다
예전에 단편적으로 개별적으로 언급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모아서 정리해 보기는 처음인 듯하다
애석한 것은 사진이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결혼 전에 증거인멸 차원에서 다 없앴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되살려
자꾸만 흐릿해지는 추억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요즘 내 기억력이 영 예전만 같지 못하다
1. 내가 처음 여자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아이다
우리집과 같은 골목 위에 위에 집에서 살았다
북촌처럼 조금 경사진 골목에 한옥들이 마주보고 있었다
같은 골목 안에 김영조 농협 야구감독도 살았고
최계환 방송국 아나운서도 살았다
우리 아랫집은 한국택시 사장네가 살았다
그 여자애 아버지는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그 여자애 위의 언니와 오빠들이 공부를 잘 했다
언니는 경기여고, 오빠는 경복고를 다녔다.
언니는 서울공대 섬유공학과, 오빠는 서울공대 기계과엘 갔다
바로 위에 오빠가 하나 더 있었고, 남동생도 있었다
세 남자 형제들의 이름도 모두 기억이 난다
우리 누나와 동갑인 큰 오빠는 올해 팔순이 되었을 것이다
맨 위의 언니는 멀리 부산으로 시집가서 살았다
집에 전화가 없어서 부산 언니가 늘 우리집으로 전화를 했다
주로 내가 뛰어가서 전갈을 했다. 전화 왔다고...
전화를 걸 일이 있어도 우리집으로 왔다
4학년까지 남녀공학이었는데 나랑 한 반이었다
내가 반장을 하고 그 여자애가 부반장을 했다
둘이 함께 학급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놀기도 했다
방학숙제를 한다고 함께 곤충채집, 식물채집도 다녔다
그런다고 다른 아이들이 놀리기도 하고 그랬다
운동장에서 하는 아침 조회시간에는 맨 앞에 섰다
내가 남자 줄, 그 애가 여자 줄의 맨 앞이었다
늘 둘이서 붙어 다녔던 1년이었다
5학년부터는 남자반, 여자반이 따로 있었다
둘 다 중학교 1차에 실패해서 2차엘 갔다
그 애는 숙명여중에 낙방하고 풍문여중엘 갔고
나는 서울중에 실패하고 휘문중엘 갔다
두 학교가 사촌학교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두 학교의 설립자들이 부부였다
중1 초에 우리집이 북아현동에서 통인동으로 이사를 했다
둘이서 본의 아니게 서로 떨어지게 됐다
많이 섭섭했던 걸로 기억에 남아있다
나중에 고등학생 때 서로 교외 클럽엘 나갔는데
바로 옆의 클럽이었다. 서대문 신우회관이란 곳
가을에 전체 클럽 대항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 만났다
그 전에는 그 애가 거기 나오는 줄도 몰랐었다
그 애의 클럽과 내가 나갔던 클럽이 배구결승에서 맞붙었다
나도 우리팀의 앞 줄 가운데 서서 뛰었다
나중에 그 애와 잠깐 마주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1968년 가을의 일이다
2. 위에서 얘기한 봉사클럽에 나갈 때 만났던 아이
얌전하게 생긴 진명여고생이었다. 1학년때
나와 같이 통인동 가까운 곳에 살았다
아주 부잣집 딸이었다.
한옥집도 좋았고 통인시장에 빌딩도 갖고 있었다.
아버지가 을지로에서 유리도매상을 하셨다.
클럽은 매주 수요일날 방과 후에 만났다
클럽이 파하고 나면 함께 귀가도 했다
서로 호감을 느꼈는지 따로 만나기도 했다
물론 클럽의 봉사활동에도 함께 다녔다
고궁앞 청소하기, 고아원 아이들 떡국 끓여주기 등
봉사활동을 위한 모금활동도 했다
매년 함께 회지도 만들었다
가을에 열리던 미술전람회에도 둘이서 함께 다녔다
겨울이면 경복궁 경회루 스케이트장에도 함께 갔다
둘이서 손잡고 스케이트도 타고 어묵도 사먹고 그랬다
고3 올라가면서 공부에 전념하자고 만남을 중단했다
1년이 지나고 둘 다 대학에 붙고 나서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다가 2학년에 올라가고 나서 다시 만났다
아래 아래 동생 중학교 졸업식 때 마주친 인연으로 다시 만났다
그 애 동생과 내 동생이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다
교실 복도에서 마주치고 서로 놀랐다
아주 멋진 파란색 가죽 롱코트와 롱부츠를 신고 왔었다
머리는 당시 유행했던 파라 포셋트 쉐기커트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죄다 쳐다볼 정도로 아주 멋쟁이가 돼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만나자고 먼저 연락을 했다
그 애는 춘천에 있던 성심여대엘 다녔다
축제 때 파트너로 초대되어 갔었다. 기숙사 방 구경도 하고 그랬다
매주인가? 매달인가? 나오던 학교 신문도 서로 부쳐 주었다
접힌 신문 안에 작은 쪽지를 적어 보내기도 하였다
나랑 기숙사 한 방을 썼던 후배들이 막대그래프를 그렸다
누구한테 여학생한테서 편지가 더 많이 오는지
내가 군대에 입대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남이 끊어졌다
나중에 들으니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했다
아들 둘은 의사와 약사로 잘 키웠다고 들었다
절친의 처형이 그 애랑 대학 같은 과 동기였다
절친 처형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지금도 통인시장 입구에 서있던 그 애네 빌딩을 보면
그 시절 그 애와 만났던 생각이 난다
3. 고 2때 중국집에서 꼬셨던 아이
수학학원에 다닐 때였는데, 중국집엘 갔다
방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두 명의 창덕여고생
나도 친구와 함께였는데, 한 아이가 아주 예뻤다
무작정 방으로 혼자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사귀자고 제안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며칠 후 태을당에서 만났다
이후 몇 번 만나다가 조금 덜 예쁘게 생긴 아이와 인연이 됐다
성격이 아주 활달하고 꾸밈없는 아이였다
대학교 1학년 때 그 아이 부탁으로 막내동생을 가르치게 됐다
위로 언니 2, 오빠, 아래로 여동생 2, 남동생 하나 였는데
그 막내 남동생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약 1년 동안 상도동의 그 아이네 집으로 다녔다
지금은 상도터널 앞 도로 확장으로 철거되었다
이화약국 바로 건너편이었다
가끔씩 예쁜이가 와서 셋이서 맥주도 마시고 그랬다
우리 누나 결혼식 때도 왔었고 부모님과도 인사했다
우리 식구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그랬다
내가 기숙사생활을 할 때 왔었고 함께 딸기밭에도 갔었다
군대 입대 전 제야의 종 타종행사를 함께 보러 갔었다
행사가 끝나고 둘이서 걸어서 한강다리를 건넜다
사회에 나온 이후에도 종종 만나서 영화도 보고 그랬다
내가 다녔던 외국인회사 직원과 대학 같은 과 동기였다
그 직원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친구였는데
미국본사에서 채용되어 훈련을 마친 후 한국지사로 왔었다
양수리의 부잣집 맏며느리가 됐고 아주 잘 살았다
서울에 있는 빌딩 집세를 받으러 나오면 내게 연락을 했다
이후로도 계속 만남을 유지했고 1986년까지 만났다
그해 내가 미국 본사로 발령을 받아 미국으로 가면서 헤어졌다
지금도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4. 대학교 1학년 때 첫 미팅에서 만났던 아이
동덕여고 출신 숙명여대 재학생들과
우리 고교, 대학 동기들 15명 정도가 만났었다
덕수궁 안의 서양식 건물 카페에서였다
15 커플 중에서 우리 커플만 성사가 됐다
이후 한 반 년 정도 거의 매주 만났던 거 같다
그 애 집이 낙원동이라서 종로2가 다방에서 만났다
영문학과를 다닌 키가 훤칠하게 큰 여자애였다
함께 여기저기 다니고, 영화구경도 가고 그랬다
세브린느라는 까트리느 드 느브가 주연한 영화를
대한극장에서 본 날 서로 손을 꼭 붙잡고 보았다
영화를 보고나서 내가 다녔던 학교 캠퍼스엘 갔다
늘 올라가서 점심을 먹던 뒷산에 올라가서
첫 입맞춤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영화덕분이었나?
무슨 이유였는지 가을쯤에 내가 먼저 연락을 끊었다
5. 대학 1학년 교양과정부에 다녔을 때 만났던 누나(?)
또래가 아니고 나중에 알고보니 나보다 2년 연상이었다
재외국민교육연구소에 재학했던 재일교포였다
일본에서 와세다대학을 다니다 왔다고 했다
내가 살았던 서강에서 신촌로터리로 매일 버스를 타러 나왔다
신촌로터리에서 출발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청량리까지 갔다
청량리에서부터 공릉동까지 스쿨버스가 다녔기 때문이다
그 신촌~홍릉 1번 시내버스에서 만났던 여자였다
함께 캠퍼스 뒷산에서 점심 도시락도 까먹고 그랬다
일본에서 온 남동생과 함께 놀러도 갔었다.
내 생일날 우리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서 놀랐다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내 선물과 누나 화장품, 그리고 남동생을 위한 우표도 갖고 왔다
일본 화장품이 좋았던 시절이고 일본 우표가 참 예뻤다
내 선물은 옅은 하늘색 예쁜 남방셔츠였다
내가 2학년 때 중앙대 국문학과로 진학했다
그해 봄 여학생 기숙사 축제 때 파트너로 초대받았다
3학년 때는 반대로 내가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됐고
역으로 내가 그 여자를 초대했었다
3년 정도 잘 만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내가 군 입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통신보안상 제약이 많아서 편지를 주고받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대충 내가 만났던 어렸을 적 여자친구들 얘기다
군대에 가면서 관계가 소원해 진 것은 보안문제도 있지만
제대 후에 기운 집안 형편때문에 내가 연락을 끊었다
사회에 나와서 만났던 여자들도 몇 명 있었지만
어릴 때와 같은 그런 순수한 만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성인들 간의 만남이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추억으로 떠올려 얘기를 하기에는 좀 그렇다
앞으로 더 나이를 먹게되면 털어놓을 수 있으려나?
그러다가 나이 30되던 해에 중매로 집사람을 만났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결혼으로 지금까지 함께 산다
따져보니 벌써 44년이 지났다. 세월이 참 빠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의 순수했던 만남이 참 좋았던 거 같다
아직 보관하고 있는 학창시절 일기장을 들춰보면
여자친구들과의 얘기가 제법 많이 나온다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 이야기다
사회에 나와서 만났던 사람들과는 가슴아픈 사연도 있다
맺어지지 못한 인연으로 가슴 아파했던 적도 있다
당시에는 꽤나 심각하고 절실했던 문제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일장춘몽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74세나 되고 보니 한낮 물거품 같은 추억이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할 때도 있다
부디 모두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그 들의 행복을 기원해 본다
첫댓글
몇 점의 수채화처럼 순수하고 수수하게 펼쳐 보인 이야기지만 그 속에 절절함과 애절함도 담겨 있겠지요. 누구에게나 있을 사연이라 더욱 공감이 갑니다. 추억을 먹고 사는 나이라 더욱...
가끔씩 그 시절을 생각합니다
절절함과 애절함이라기 보다는
그 때 그 아이랑 잘 됐었더라면?
그런 쓸데없는 공상을 하게 됩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에게나 있었던 추억이지요
맞습니다
이제 추억을 먹고살 나이가 됐습니다
자꾸만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ㅜㅜ
감사합니다
선배님 더러더러 겹치기도 하는데요
여사친 이어서 그랬을거라고 미뤄 짐작 할께요 ㅎ
때론 절절한 순간이 왜 없으셨겠어요
다~~ 아름다운 시절 의 얘기 잘 보고 갑니다
네 겹칩니다
그냥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만났습니다
만난 시기와 계기가 다 달랐으니까요
순수한 마음으로 만났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후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니 아주 많이 달랐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초등때 남녀 공학이 아니었고
대학 다닐때 첫 미팅때 여자와 사겨보았죠
삼성에 입사하고 난후에 사랑을 해보았죠
사랑에 늦깍기랍니다 ㅎㅎㅎㅎㅎ
추억이 있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행복이랍니다.
선배님의 추억 잘 읽고 갑니다^^
남녀공학이 아닌 초등학교도 있군요
저희는 5학년부터 남녀반을 갈랐습니다
4학년까지는 섞여서 배웠지요
네 저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스스럼없이 섞였으니까요
감사합니다 ^^*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을 만나 피란해 시골에서 자랐기에
지금 말로 하면 촌스럽기 그지없는 성장과정을 거쳤는데
소위 서울, 그것도 중상그룹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기의
건강한 성장일기를 읽게 되네요.
그렇게 건강하게 자란 사람들이 사회의 일익을 담당해야
사회가, 국가가 건강하게 유지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건강하게 사시기 바라요.^^
그러셨군요
저희 때도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습니다
교외활동을 금지하는 학교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자유롭게 컸던 거 같습니다
학교 분위기도 매우 자유로웠습니다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교시절부터 교외활동을 하면서
여학생들도 만나고 그랬습니다
불교클럽인 룸비니란 곳에도 나갔구요
위에 얘기한 클럽은 봉사클럽이었습니다
서울의 좋은 학교 학생들이 주축이었지요
건전한 사교모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학창시절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건설 자재상을
돌보며 힘든 여건이라
여친과도 인연이 별로
없는줄 알았습니다
여러 여친중에서
재일교포 여학생이 유독
제 눈길을 끌었고
그 인연이 성사되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첫 상면에서
예의를 갖춘 모습들이
느낌이 무척 좋았습니다
건재상 일은 제가 군대간 이후에 벌어진
제대 말년에 벌어진 일입니다
제가 군대 가 있던 시기에
이사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집을 줄이며 연명한 시기지요
첫 휴가 나올 때 이사간 집을 몰랐습니다
입대할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제가 알바도 했구요
재일교포 여학생이 절 좋아했지요
방학 때 보냈던 편지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하늘의 구름을 보세요
만났다 헤어졌다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해요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빨리 다시 만나면 좋겠어요
많이 보고 싶어요"
저희집에 찾아와서 부모님 뵙고 간 날
식구들이 온통 칭찬 일색이었지요
예의 바른 여학생이라구요
와서 기거하고 있던 친척집 언니랑
함께 찾아 왔었습니다
저도 나중에는 아주 호감을 가졌습니다
나이가 조금 걸렸지만요
그 여자랑 사연이 아주 많습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순수했던 그시절
각각의 다른 환경에서 만나고 느꼈던 감정도
조금씩 달랐겠지요
가끔 떠올려보는 여친들의
모습은 그시절 그대로의
풋풋한 모습 그대로...
저는 얼굴도 이젠 생각이
잘안나고 이름만 생각 나네요 ㅎ
맞습니다
순수한 친구사이였지요
다른 시기에 다른 인연으로 만났던...
겹치기 만남이란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 다른 만남이었지요
저절로 이어진 다른 인연들
네 지금도 모습들이 생각납니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있던 모습들
가슴에 백선 두 줄의 진명여고 교복
고바우 모자를 빼딱하게 쓴 창덕여고 교복
제가 다닌 학교도 모자가 특이했지요
모자 위에 가는 백선
모자 뒤쪽에 굵은 백선
장발 미술선생님의 도안이라고 합니다
늘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모습들입니다
그리운 그 시절입니다
감사합니다
@청솔 창덕여고 교복이네요.
그리운 시절~~~
@초록사랑 네 고바우모자가 특이했지요
중학생은 왼쪽으로
고등학생은 오른쪽으로
빼딱하게 쓴 모습이 예뻤지요
교복의 날카로운 칼라가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비슷하게 겪었는데 이렇게 생생하게 글로 쓰지 못 하는 사람입니다. ㅎㅎㅎ
그러셨군요
대충 다 비슷비슷했을겁니다
나이드니 가끔씩 생각납니다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사는지...
감사합니다 ^^*
옟날엔 전화기 한대 있는집은 부잣집 이엇죠.온도네사람이 같이 사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불행하게도 여자친구가 없었죠.ㅎ
네 동네에 전화있는 집이 거의 없었던 시절입니다
매년 입시철이 되면 우리집에 모여서
방송국에 전화하던 생각이 납니다
지나고 보니 좋은 추억입니다
여자친구들 이름과 얼굴이 떠오릅니다
죄송합니다 ^^*
동시대를 살아온 청솔님의 이야기들~~
광화문에 크라운 제과점이 있었지요.
그곳에서 시화전이 열렸었고~~~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우리가 가끔 갔던 곳~~
우리 때는 중, 고등학교 진학할 때
전기, 후기로 나뉘었지요.
5대 극성학교라 불렸던 학교도 있었고
하굣길 내 뒤를 졸졸 따라왔던 남학생은
까만 동복 소매에 하얀 줄이 있는 양정고등학교
등, 하교시 같은 동네라 자주 부딪치고 했는데
어느 날 용기를 내 만나자고 해 제과점에서
친구들과 같이 몇 번 만났던 기억이~~
그 애도 나도 둘이 만나기 어색해
친구들과 함께 만나곤 했었는데~~~
그때의 그 애도 지금 70대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겠지요.
청솔님의 글을 보면서 까마득한 내 여고시절을
추억해 봅니다.
71학번 친구들~~~
모두들 그립고 보고 싶네요.
광화문 크라운제과점 저도 가끔 갔었습니다
그 때는 빵집이 대세였던 시절이지요
맞습니다.
1차, 2차, 5대공립, 5대 사립
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
보성, 중앙, 휘문, 배재, 양정
중앙과 휘문만 2차였지요
대학교 가니까 체육대회도 하드라구요
5대 사립이 먼저 시작했구요
곧이어 5대 공립이 따라 했지요
여고도 서열이 있었습니다
경기, 이화, 숙명, 창덕, 진명
5대 극성은
덕성, 보성, 명성, 나머지는???
동기들 중에도 양정출신이 있었고
함께 일했던 후배도 양정출신이었죠
저와 같은 71학번이시네요
회원정보엔 어리게 나오시는데...
긴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