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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떻게 아시아 최고의 부자가 되었을까
왕펑 지음 / 황보경 옮김
아인북스 / 2005년 9월 / 352쪽 / 12,500원
비결 1 立 : 역경에 굴하지 않고 우뚝 서다
하늘은 큰 소임을 맡기기 전에 생각과 의지를 시험한다
맹자는 ‘하늘은 한 사람에게 큰 소임을 맡기기 전에 반드시 생각과 의지를 시험한다’고 설파했다. 역경은 인간을 분발하게 만들어 생존과 발전을 모색하게 만든다. 시련을 이겨내는 과정에 성공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많은 곤경에 처하지만 투지가 식지 않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리자청은 10대에 학교를 중퇴하고 무일푼으로 사회에 뛰어들어 세계적인 기업군단을 일궈냈다. 평생을 몸 바쳐 일하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리자청의 유년 시절, 중국은 몹시 혼란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리자청의 고향 광둥(廣東)성의 차오저우(潮州)도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이로 인해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리자청의 아버지 리윈징(李雲經)은 직장을 잃었다. 초등학생인 리자청도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 일본군을 피해 점차 그곳을 떠났다. 리윈징도 가족을 데리고 초등학교 교사인 동생에게로 갔다. 하지만 동생도 곧 실직을 했고 저축한 돈도 바닥이 나고 말았다.
리윈징은 홍콩으로 떠나기로 했다. 홍콩에는 시계무역업으로 꽤 성공한 처남 좡징안이 살고 있었다. 리윈징 가족이 찾아가자 좡징안은 기꺼이 누이 가족에게 방을 내주었다. 하지만 리윈징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인척을 회사에 개입시키지 않으려는 처사였다. 리윈징은 처남의 마음이 이해는 되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해 여러 가지 잡일을 했다. 그러나 그때는 2차 세계대전 중이라 홍콩경제도 어려웠다. 게다가 힘든 일을 해보지 않았던 리윈징은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결국 리윈징은 누적된 피로와 영양실조 등으로 결핵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때 리자청은 중학교 1학년이었다.
상인으로 성공할 유전자는 없어도 타고난 포부와 식견, 용기를 가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리자청은 학교를 그만두고 찻집(가벼운 식사인 딤섬(點心)과 차를 파는 곳)에서 일을 했다. 외삼촌이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도록 권유했으나 사회생활을 해보고 싶었고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거절했다. 리자청은 매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찻집에 출근하여 찻물과 딤섬을 준비했다.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15시간이 넘었다. 외삼촌에게서 자명종을 선물 받은 그는 10분 빠르게 시계를 맞춰놓고 가장 먼저 출근했다. 퇴근도 가장 나중에 했다. 이런 습관은 반세기 넘게 계속되어 왔다. 지금도 그는 손목시계를 실제 시간보다 10분 빠르게 돌려놓고 생활한다.
찻집에서 일을 배우면서 그는 두 가지를 실천했다. 첫째는 손님들의 신분, 고향과 연령, 직업, 성격 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손님들이 돈을 쓰는 심리를 파악하고 정성껏 서비스를 해서 기꺼이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어떤 손님이 새우만두를 좋아하는지, 쌀국수에 고추를 넣어먹는지, 홍차와 녹차를 좋아하는 손님은 누구인지 등을 기억했다. 이러한 서비스로 매상이 더욱 오르게 되자, 찻집주인은 리자청을 총애하여 월급도 많이 올려주었다.
찻집에서 일을 한지 1년이 다 될 무렵, 리자청은 외삼촌의 시계회사에서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또한 독학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기로 결심했다. 리자청은 매일 저녁 열심히 공부했다. 또한 영어도 열심히 익혔다. 생전에 리자청의 아버지가 “홍콩에서 뿌리를 내리고 국제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광둥어와 영어를 마스터해야 한다.”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리자청은 부친의 뜻에 따라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여 몇 년 후에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훗날 그에게 영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외삼촌 회사에 들어간 리자청은 잔일을 했다. 그는 하루빨리 기술을 익히기 위해 틈틈이 기술자들의 어깨 너머로 눈 도둑질을 했다. 회사직원들은 리자청이 사장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나이는 어리지만 영리하고 부지런하다’며 사장에게 칭찬을 했다. 기술자들은 리자청을 기특하게 여겨 기꺼이 시계를 조립하고 수리하는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리자청은 반 년 만에 시계에 관한 기술을 거의 마스터했다. 외삼촌은 그런 리자청의 발전이 기뻤지만 겉으로는 칭찬 한 번 하지 않았다.
목표는 아주 높게, 멀리 정하라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홍콩경제는 영국정부의 산업시설 복구 정책에 힘입어 활기를 띄고 인구도 100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외삼촌의 ‘증난’시계회사도 활황의 물결을 타고 매출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래서 외삼촌 좡징안은 시계조립공장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제는 조립과 수리가 아닌 자체 생산한 시계로 홍콩의 시계시장을 석권하기로 결심했다. 리자청은 외삼촌회사의 미래에 대해 낙관했지만 외삼촌의 그늘에 있으면 안일해져 투지를 상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자청은 자신의 생각을 외삼촌에게 말하면서 홍콩 시계업계의 전망에 대한 생각도 말했다. “스위스의 시계 제조기술은 세계 최강이고, 일본은 틈새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전자시계를 개발했습니다. 고가시장은 스위스가 독점하고, 중가시장은 일본이 석권하고 있으니 하루 빨리 중저가 시장을 차지하세요.”라고 건의했다. 외삼촌은 조카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고, 리자청은 외삼촌의 회사를 나왔다. 얼마 후, 리자청의 예상대로 홍콩은 중저가 시계 생산에 주력함으로써 스위스와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시계 생산기지가 되었다. 리자청은 어린 나이에도 평소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높은 안목과 식견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이룬 오늘의 성공에는 풍부한 지식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고, 적극적․능동적으로 행동하라
1946년 초, 열일곱 살이 된 리자청은 플라스틱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1등으로 영업실적을 올렸다. 이는 2등보다 6배나 많은 실적이었다. 근면함과 재빠른 두뇌회전 능력을 가진 그는 영업을 하면서도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플라스틱 시장 동향에 대한 정보를 얻고 홍콩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눈 뒤 각 구역의 소비수준과 시장현황을 기록했다. 이것을 상세히 분석한 뒤, 사장에게 각 상품별 생산량과 판매 전략을 건의했다. 사장은 리자청의 건의를 그대로 반영했고, 그 결과 회사는 큰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리자청은 능력을 인정받아 1년 후에는 세일즈 매니저로 승진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사장으로 승진하여 회사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사장이 되었고 고소득자가 되었지만 리자청은 창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세일즈를 하면서 플라스틱이 급부상할 것을 예견했다. 게다가 제조가 쉽고 가벼우며 색깔과 형태를 다양하게 구현해내는 플라스틱에 매료되었다. 당시에는 사치품에 속할 정도로 가격이 비쌌지만 조만간 플라스틱이 대중적인 소비품이 되리라 확신했다. 리자청이 창업을 결심하고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사장에게 전달하자 사장은 승진과 월급인상을 약속하며 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마음을 굳힌 리자청은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익에 급급하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리자청의 창업 자본은 5만 홍콩달러였다. 그동안 어머니께 수입전부를 드렸으므로 창업자금은 어머니와 주변사람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미 신용을 얻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그의 창업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플라스틱공장에 창장(長江, 양자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양자강은 작은 물줄기도 받아들여 만리를 도도하게 흐르듯이 비록 시작은 보잘 것 없지만 창장플라스틱공장은 중국인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공장을 세웠을 무렵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래서 홍콩의 영국 정부는 대중국무역을 봉쇄했다. 중개무역으로 경제를 지탱하던 홍콩이 큰 타격을 입자 정부에서는 산업정책을 조정하여 가공무역을 경제의 중심으로 삼으려 했다. 이런 상황에 리자청이 플라스틱 업종을 선택한 것은 적절한 대응이었다.
처음에는 리자청도 다른 공장들과 마찬가지로 플라스틱완구를 생산했다. 그런데 생산량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품질관리에 소홀하여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거래처에서 제품의 질이 조악하다며 반품을 요구해왔고 줄줄이 창장과의 거래를 중단한 것이다. 창고에는 불량제품과 반품된 완구들로 가득 찼고, 소문을 들은 은행은 대출상환을 재촉했다. 리자청은 우선 직원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직원들 탓만 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회사사정에 맞춰 인원을 해고해야 함을 밝히고 회사사정이 회복되면 다시 채용할 것을 약속했다.
직원들과 얘기를 마친 리자청은 은행, 자재공급상, 거래처 등을 방문하며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했다. 기한 내에 빚을 갚고 손해배상도 틀림없이 하겠다고 약속했다. 창장이 문을 닫으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은행과 거래처들은 어음 기한을 연장해 주었다. 이렇게 주변의 이해를 구한 리자청은 직접 뛰어다니며 재고를 팔고 불량제품은 싼값에 넘겼다. 그 돈으로 채무의 일부를 변제하여 급한 불을 끈 후 공원들에게 기술을 훈련시키고 새 기계를 들여놓았다. 리자청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자 은행과 거래처들은 신뢰를 보냈다. 어려움이 어느 정도 극복되자 리자청은 해고했던 직원들을 다시 복직시키고 해고기간의 임금까지 계산해 주었다.
사업이 순조로울 때도 변혁과 발전을 꾀하라
리자청이 플라스틱 업계에 몸담은 지 7년째 되던 해, 자신이 아직도 이 분야에서 두각은커녕 평범한 업자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평소와 다름없이 영문 잡지를 뒤적이던 그는 눈에 확 들어오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탈리아의 한 회사가 플라스틱조화의 제조에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서구사회는 급속한 산업화로 주부들의 취업률이 상승하고 있었다. 서구인들은 꽃으로 장식하길 좋아하지만 바쁜 생활 때문에 신경을 써서 꽃을 키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플라스틱조화는 진짜 꽃을 대신하면서도 무궁무진한 모양을 만들어낼 수가 있으므로 현대인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리자청은 플라스틱조화의 인기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먼저 선점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홍콩 전역을 돌아다닌 결과, 플라스틱조화를 갖춘 상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리자청은 당장 이탈리아로 향했다. 리자청이 잡지에서 보았던 회사를 찾았을 때, 수많은 디자인의 제품들을 볼 수는 있었지만 생산 공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호텔로 돌아온 그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신문을 펼쳐보다가 방문했던 회사의 생산 공장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구인광고를 발견했다.
그는 곧장 공장으로 찾아가 원서를 냈다. 그러나 외국인인데다 여행비자만 갖고 있었기 때문에 허드렛일만 해야 했다. 그가 맡은 일은 폐기물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공장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는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작업반장의 눈에 들었고 숙련기술자들과도 사귈 수 있었다. 휴일이면 리자청은 그들을 중국음식점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면서 기술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시간이 지니고 플라스틱제조에 대한 요령을 거의 익힌 그는 샘플과 자료를 가지고 귀국했다.
플라스틱 조화를 생산하게 된 리자청은 빨리 시장을 점유하기 위해 저가 전략을 취했다. 그러자 몇 주일 만에 홍콩의 크고 작은 꽃가게와 일반 가정, 사무실, 택시 안에까지 플라스틱조화가 진열되었다. 그의 회사는 무명의 작은 회사에서 일약 홍콩 플라스틱업계의 강자로 부상했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플라스틱조화를 생산하는 회사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동종업계에서 선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장의 규모를 늘리고, 생산설비를 강화해야 했다. 리자청은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7년 말, 리자청은 창장플라스틱공장을 창장공업유한공사(주식회사)로 전환하고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비결 2 進 : 지혜와 용기로 기회를 포착하여 과감히 나아가다
세인의 허를 찌르는 기세로 밀고 나가라
흔히 자신과의 싸움이 다른 사람과의 싸움보다 훨씬 어렵다고 한다. 이 말은 리자청의 인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일생은 항상 도전의 연속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비롯된 투지와 끊임없이 공부하여 얻은 지식 그리고 체험으로 얻은 안목으로 그는 계속되는 도전에 성공해 간다. ‘날지 않을 때는 조용하지만 한번 날면 하늘을 찌른다’라는 말은 위대한 인물의 공통된 속성을 묘사한 것이다. 확신이 섰을 때는 과감히 뛰어드는 용기야말로 영웅이 갖춰야 할 기질인데, 리자청이 바로 그런 기개를 갖추었다. 리자청의 결단성 있는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은 바로 지하철 건설공사의 입찰이었다. 플라스틱산업으로 두각을 나타낸 리자청이 부동산 개발 사업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지하철 건설의 1기공사는 주룽반도의 관탕(觀塘)에서 해저터널을 뚫어 홍콩섬의 센트럴까지 연결하는 공사로 15개역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센트럴역과 진종(金鐘)역은 부근에 정부기관들이 들어서 있었고 센트럴의 은행가에서 지척에 있었으므로 승객이 가장 많은 중요한 역이었다. 그래서 이 두 역위에 건물을 지으면 돈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 했다. 건설 회사들은 하나같이 이 지역에 군침을 흘렸다. 리자청도 마음이 동하기는 했지만 창장은 시의 외곽지역과 시골의 산지에 건물을 지은 경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건설경험을 쌓았으므로 이제는 이미지 변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7년 1월 14일, 지하철공사는 역사 공개입찰을 공고했다. 개발지역은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있던 자리로, 지하철 역사가 세워지면 주변지역을 재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선두권에 있는 부동산개발 회사와 건설 회사들의 경쟁 속에 창장이 수주를 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당시 홍콩의 재계에는 자딘 매디슨 그룹(Jardine Matheson Limited, 영국계 중국기업으로 무역, 조선, 보험, 부동산 등에 진출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회사)과 같은 영국계 건설회사가 참여할 것이 확실했다. 언론에서는 이미 자딘 매디슨 그룹의 승리를 당연시하는 기사를 냈다.
리자청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생각으로 자료들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지하철공사는 홍콩정부의 공영기업이다. 하지만 중국의 국영기업과 달리 독립적으로 경영된다. 그래서 자금의 조달에서부터 설계와 시공, 경영면에서 민간기업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 지하철공사는 개발 지역에 대한 지가 책정금액으로 약 6억 홍콩달러를 정부에 지불했고, 부족한 돈은 차후 상권개발로 발생하는 수익으로 보전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현금과 지하철 채권으로 지불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정부 측에서는 현금만을 고집했다. 지하철공사는 지가책정금액도 고금리로 대출을 받아 지불했기 때문에 원금을 상환하기 위해 더 큰 수익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리자청은 전략을 짰다. 그리고 ‘상업빌딩 건설계획안’을 지하철공사에 제출했다. 그가 구상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 지하철공사의 현금부족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건설비용을 현금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둘째, 지하철공사가 정부에 원금을 상환할 수 있도록 수익을 창출해주는 것이었다. 즉 빌딩을 모두 분양한 후에 발생하는 수익을 지하철공사 51%, 창장실업 49%의 비율로 배정했다. 물론 리자청의 입장에서는 현금부담이 막중했지만 이미 입찰에 대비하여 1976년 겨울, 주식공모를 통해 1.1억 홍콩달러를 조달했고, 입찰을 따내면 2억 홍콩달러를 대출받을 수 있도록 은행과의 교섭에도 성공했다. 여기에다 전년도 이익을 더해 여유자금까지 확보했다.
경매에 응한 기업은 30개사였다. 1977년 4월 5일, 홍콩의 언론매체는 ‘창장! 자딘 매디슨 그룹 격파’라는 제목으로 입찰결과를 보도했다. 지하철공사측은 “창장이 입찰에 성공한 이유는 제출한 프로젝트 안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자청은 ‘업계를 경악시킨 놀라운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는 평소 투자를 할 때마다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때로는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이로 인해 결코 패기와 박력이 부족한 인물이 아니라는 평을 받았다. 신중함과 과감함을 모두 겸비하기는 힘든 법이다. 이런 면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리자청은 충분한 연구가치가 있는 인물이라 하겠다.
비결 3 謹 : 욕심을 삼가고 신중한 태도로 발전을 꾀하다
전체적인 국면을 고려하며 치밀한 전략을 세워라
리자청은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는 습관을 잃지 않았다. 1966년 말, 중국대륙에서는 ‘문화혁명’이 시작되어 그 불길이 홍콩에까지 미쳤다. ‘중국 공산당이 무력으로 홍콩을 수복하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홍콩사회는 대규모 이민 붐이 일어났다. 그러자 경제는 공황상태에 이르고 새로 건축된 아파트는 매물만 쏟아져 나왔다.
리자청도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냉정하게 분석했다. “만약 중국정부가 홍콩을 접수하려 했다면 1949년 광저우를 점령했을 때 홍콩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정부는 홍콩을 대외무역창구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고, 무리한 행동으로 국제적인 물의를 빚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러한 결론을 내린 리자청은 매물을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는 보통사람이 보기에 대세에 역행하는 행동이었다.
홍콩의 경제위기는 1969년까지 지속되다가 1970년에 소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부동산 시장도 활황을 맞이했다. 이때 리자청은 이미 사들인 대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로서 리자청은 부동산재벌로서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 일부에서는 그가 도박가로서 승리를 거둔 것이라 평했다. 하지만 그의 도박은 상황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분석을 거친 것이지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모든 업종은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을 갖기 마련이다. 이때는 회복이 불가능할 것인지 일시적인 불황인지를 분석해야 한다.
그는 다국적 투자를 위해 1980년대 중반부터 홍콩의 영국계 기업들을 합병했다. 다국적 투자를 하게 되면 그룹 내의 기업들이 상호보완적으로 이익을 취할 수 있고, 어려운 상황에서는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자청은 1986년 12월, 캐나다 허스키 오일사(Huskey Oil Limited)의 지분 52%를 매입했다. 세계 유가가 하락하여 석유회사의 주식은 인기가 없었지만 리자청은 석유화학공업의 전망을 낙관하여 큰 투자를 한 것이다. 리자청은 지분을 계속 늘려 1991년에 이르러서는 95%의 지분을 점유했는데 총 투자액은 80억 홍콩달러였다.
1993년에는 베이징의 왕푸징(王府井)에 둥팡(東方)광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이 건물은 2만평이 넘는 규모로 70미터 높이의 호텔과 상가, 아파트가 복합된 건물을 짓는 건설이었다. 홍콩에는 고층건물이 워낙 많아 100미터 이상이 아니면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베이징은 중국의 심장부이므로 고층빌딩 건설은 큰 화젯거리였다. 국가계획위원회에서는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자금성에서 360도 시야 내에는 어떤 건축물도 눈에 띄면 안 되었다. 자금성의 성벽은 약 10미터 높이인데, 그 내부에서 밖을 쳐다봤을 때 성벽과 하늘만 눈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창장은 베이징시가 계획안을 국가계획위원회에 제출하기도 전에 이미 공사에 들어갔다. 그래서 1995년 정초에 건설 중단 명령을 받았다. 중국정부는 원칙에 관해서는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는다. 리자청은 수차례 설득 끝에 용적률 감소로 인한 손해를 감수하는 조건으로 국무원의 비준을 받아냈다. 이로 인해 창장의 주가도 변동이 없었다. 몇 차례 파문이 더 있었지만 1999년, 중국 건국 50주년(10월 1일)을 며칠 앞두고 둥팡광장이 준공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 투자에 대한 화교 기업의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비결 4 略 :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통해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얻다
적의 힘을 역이용해 승리하다
허치슨 왐포아 그룹은 홍콩에서 두 번째로 큰 상사와 컨테이너 터미널 회사를 가진 회사였다. 1973년에는 세계적인 오일쇼크와 홍콩 부동산시장의 불황으로 인해 홍콩증시가 붕괴되었다. 허치슨 왐포아는 방만한 투자로 인해 2억 홍콩달러에 가까운 적자를 내면서 과중한 채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1975년 8월, 후이펑은행은 허치슨 왐포아에 1억 5천만 홍콩달러를 구제 금융으로 제공하면서 33.65%의 지분을 확보했다. 이로써 후이펑은행은 허치슨 왐포아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홍콩의 외국계, 중국계 기업들은 허치슨 왐포아 인수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홍콩의 최대 금융기관인 후이펑은행의 통제를 받는 관계로 섣불리 나서지를 못했다.
리자청은 후이펑은행의 허치슨 왐포아에 대한 지배권이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주식회사법과 은행법에 의하면 은행은 비금융 부문의 업무를 할 수 없는데다, 채권은행은 상환능력을 상실한 기업만을 인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금융구제를 받는 기업이 정상화되면 투자은행은 지분을 되팔거나 다른 기업에 매각해야 한다. 하지만 창장의 자산은 6억 9,300만 홍콩달러에 불과하다. 반면 허치슨 왐포아의 시가는 62억 달러에 달한다. 창장의 능력으로는 뱀이 코끼리를 삼키는 격이지만, 후이펑은행의 도움을 받는다면 인수합병의 절반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리자청은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선박왕 바오위강에게 접근했다.
바오위강은 후이펑은행과 20년 이상 거래하면서 이사가 되었고 훗날 후이펑은행의 부총재가 된 사람이다. 리자청은 해운화물회사인 주룽창의 주식을 20%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회사는 홍콩의 화물 하역과 보관, 여객선 영업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리자청은 바오위강이 주룽창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허치슨 왐포아를 합병하기 위해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주는 주룽창의 지분을 바오위강에게 넘기기로 한 것이다. 리자청은 주룽창의 주식 1천만 주를 바오위강에게 넘기는 대신 후이펑은행이 보유한 허치슨 왐포아 주식을 매입할 수 있도록 알선을 제안했다.
1979년 9월 25일 밤, 리자청은 허치슨 왐포아의 지분 22.4%를 매입한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다음날 허치슨 왐포아의 주식은 상종가를 기록했고, 종합주가지수가 25.69포인트가 올랐다. 투자자들의 리자청에 대한 신임과 기대가 불러온 결과였다. 1981년 1월 1일, 리자청은 허치슨 왐포아의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 홍콩에서 최초로 영국 자본 그룹의 총수가 된 것이다. 자산의 열배가 넘는 그룹을 합병한,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이 사건으로 리자청은 부동산 업계뿐만 아니라 증시에서도 거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다원화전략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다
기업가의 입장에서 보면 경영의 다원화는 사업에서 실패하지 않는 황금률이자 철칙이다. 리자청도 일찍이 다원화전략을 추구해왔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조화 생산에서 시작하여 부동산업계에 진출해 선두주자가 된 후, 기업의 인수합병과 다국적 투자를 통해 주식, 호텔, 컨테이너, 전력, 통신, 방송사 등으로 사업범위를 확장했다. 그런데도 창장의 자산대비 부채비율은 놀랄 정도로 낮다. 불확실한 투자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테크 산업에 대해 뛰어든 것도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8년, 홍콩정부는 케이블 TV의 신속한 성장세와 홍콩텔레콤의 독점성에 주목하여 제2통신 사업자 선정계획을 발표했다. 리자청은 합병한 허치슨 왐포아와 영국의 통신회사와 더불어 통신서비스를 제공할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리하여 아시아 최초의 위성방송인 스타 TV를 개국하게 되었다. 이어 1989년에는 영국의 한 통신회사를 합병하여 GT2 이동전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두 사업 다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힘을 인식하고 있던 리자청은 1994년, 다시 GSM 이동전화사업에 착수했다. 오렌지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휴대폰은 점차 시장에서 호응을 얻게 되어 1,100억 홍콩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1999년에는 독일 최대 이동전화회사인 만네스만(Mannesmann)을 합병하여 창장의 계열사인 허치슨 왐포아는 유럽최대의 통신회사로 부상했다. 그해 11월, 영국의 통신회사 보다폰(Vodafone)이 만네스만의 지분 52.8%를 매입하고자 했다. 그래서 리자청이 보유한 10.2%의 지분을 결사적으로 매입하려 했다. 지분을 넘긴다면 리자청은 1달 만에 318억 홍콩달러의 수익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자청은 보다폰의 제안을 거절했다. 수백억 달러의 이익을 거부한 그의 행동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나왔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는 만네스만을 통해 유럽의 통신시장을 석권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으며, 만약 그리된다면 318억 홍콩달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 분야의 사업을 5년, 10년 단위로 계획하고 추진한다.
비결 5 術 : 교묘한 세의 이용과 기발한 방법으로 승리하다
적은 자본으로 10배가 넘는 이윤을 창출하다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이다. 자금이야말로 기업의 혈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자청은 첫 번째 사업으로 플라스틱공장을 경영할 때 자금의 여유가 없어 거의 도산할 뻔했다. 북미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플라스틱조화의 생산규모를 늘려야 했을 때도 자금부족으로 고민을 했다. 그가 정상의 기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바로 뛰어난 자금조달능력이다. 처음에는 지인이나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융통했지만 그들이 선뜻 리자청에게 도움을 준 것은 그의 성실성과 사업능력에 대한 신뢰가 밑거름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플라스틱조화시장을 탐색할 때, 리자청은 서구의 경영방식과 기업조직 등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주식제도를 도입했고 증시에 상장함으로써 대규모 여유자금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세계로 진출할 때는 현지의 인지도가 높은 기업과 합자하여 그 국가의 증시에 상장했다. 홍콩과 해외 증시를 통해 자금력이 강화된 창장은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고, 세계적인 부호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자본은 곧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리자청은 자신의 이미지에 매우 신경을 써왔다. 성실과 신용을 바탕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은행을 원군으로 활용하는데 주력했다.
비결 6 人 : 인재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양성하다
포용력을 갖고 인재를 발굴, 양성하다
한 기업의 성장과정에서 경영주는 각 단계마다 역할이 달라져야 하며, 그를 보좌하는 인재들도 각기 다른 성격을 지녀야 한다. 창업 초창기에 리자청은 변변한 부하직원 없이 본인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생산설비의 설치, 제품의 설계와 생산 등 모든 작업을 직접 하고, 홍콩 전역을 발로 뛰며 원자재를 구입하고 세일즈를 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이 시절 그는 자신의 분신처럼 뛰어줄 인재를 원했다. 그 무렵 같이 일하게 된 인물들이 성송성(盛頌聲)과 저우첸허(周千和)였다.
두 사람은 창장의 ‘창업공신’이나 다름없다. 두 사람은 박봉에도 열심히 일을 했고, 리자청은 그들을 가족처럼 보살폈다. 1980년과 1985년에 리자청은 두 사람을 각기 부회장으로 임명하여 부동산과 주식투자그룹의 양대 업무를 책임지게 했다. 1985년, 성송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자 리자청은 성대한 환송파티를 열어 그를 감동시켰다. 리자청은 창장에 공헌을 한 직원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준다는 원칙을 실천한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직원들을 대했기 때문에 창장에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만일 머슴을 부리듯 직원들을 대했다면 리자청은 결코 뜻을 같이하는 협력자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리자청이 인재를 발탁하고 활용하는 데는 세 가지 특색이 있다. 첫 번째는 창업 초기의 원로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혁신과 발전을 꾀하기 힘들다. 그래서 두 번째로는 서양인들을 과감히 기용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경영과 해외에서의 적극적인 경영을 위해서 외국 인재들을 많이 기용했다. 세 번째의 특색은 창장의 고위층에 젊은 인재들이 많다는 점이다. 원로에서부터 청장년을 망라한 임원층은 리자청 ‘내각’ 구성의 묵계처럼 되어 있다. 이런 구조로 인해 창장과 허치슨 왐포아는 대그룹의 경직성을 탈피하여 유연하고도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장점을 발휘하고 있다.
리자청의 인사원칙 : 합리성, 전문성, 연공서열의 파괴
리자청은 친인척을 등용하는 기업구조를 타파하고 뛰어난 두뇌와 뜻이 맞는 엘리트들로 ‘친위대’를 구성했다. 적임자라고 판단한 인재를 발탁하면 리자청은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자신은 사업 전반의 중요한 결정만 내렸다. 예전에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는 스타일이었던 리자청은 이제는 일이 아닌 사람을 관리하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리자청은 자신과 교분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싱크탱크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한다. 두뇌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합하면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리자청은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주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예를 들어 그가 중용한 외국인 간부 사이먼 먼레이가 받는 연봉과 인센티브는 1,000만 홍콩달러에 달했다. 이는 당시 홍콩 총독의 연봉보다 4배 이상 많은 것이다. 리자청은 부하들에게 저가로 창장의 주식을 구입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 일례로 먼레이는 창장의 주식을 8.19홍콩달러로 160만 주 매입했는데 매각할 때 시가는 23.84홍콩달러여서 2,500만 홍콩달러 이상의 차익을 남겼다.
비결 7 正 : 믿음, 의리, 정직함으로 일관하다
성실과 신용으로 성공의 기초를 놓다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어본 리자청은 동향 사업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73년 중동전쟁으로 오일쇼크가 터졌을 때였다. 세계경제가 위기를 맞게 되자 플라스틱의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홍콩에서는 원료가가 폭등하여 대부분의 플라스틱 공장들은 파산의 위기에 직면했다. 원료를 수입하는 무역상들이 독점행위를 일삼은 것이었다. 리자청은 자신이 이미 확보하고 있던 원료는 시가의 절반가격으로 동종업계에 판매하고, 자신이 수입한 원료는 원가에 다른 공장에 넘겼다. 그리고 영세한 플라스틱공장들과 힘을 모아 공동으로 원료를 대량 수입하여 배분했다. 이로 인해 회생한 공장의 수가 수백 여 곳에 달했다고 한다.
1980년대 그가 건설업을 할 때였다. 80년대 홍콩증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1987년 10월 1일에는 헝성지수(종합주가지수)가 역사상 최고기록인 3,950포인트를 돌파했다. 그런데 10월 19일,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돌연 508포인트나 폭락하자 홍콩의 지수도 420포인트가 떨어졌다. 그리고 10월 26일에는 헝성지수가 1,121포인트나 하락했다. 홍콩증시의 15%를 차지했던 창장계열 기업의 주가는 평균 30%가 떨어졌다. 리자청의 주식을 취급했던 증권사뿐만 아니라 투자자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리자청은 홍콩 증권감독위원회에 ‘증시안정화’ 방안을 제출했다. ‘20억 달러 정도의 자금을 투입하여 창장 계열 4개 기업의 주식을 사들인다’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매입량 제한을 철폐하되, 지분이 35%를 넘을 경우에는 구입량을 공표하고, 1년 내에 한도액 이상의 주식을 팔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만약 1년 내에 주가가 계속 하락한다면 리자청은 엄청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더구나 홍콩이나 해외증시의 동향은 거의 예외 없이 증시가 붕괴되면 2~3년 동안 불황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1988년 4월 14일 헝성지수는 전년도 초반수준에 근접한 2,684포인트를 기록했다. 리자청은 1년 동안 매입했던 주식을 팔면서도 손해는커녕 수천만 홍콩달러의 차익을 남겼다.
일각에서는 그가 ‘증시 호전의 시기를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지만 리자청은 불안정한 이익을 위해 엄청난 모험을 걸 성격이 아니다. 리자청이 막대한 위험을 감수하고 구제책을 편 것은 자신의 주식을 보유한 수많은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의 행동으로 인해 그는 재계의 영웅이자 홍콩인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는 리더로 부상하게 되었다.
근검하지만 타인에게는 크게 베풀다
큰 부자가 된 다음에도 검소하게 살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리자청은 세계적인 갑부가 된 후에도 근면성과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회사 내에서 일반직원과 같이 식사를 하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검은색 낡은 양복을 입고 다니지만 많은 공익사업과 자선활동에 앞장서왔다. 1978년, 중국 국경일 행사에 참석하면서 조국의 빈곤과 희망을 같이 본 그는 자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했다. 그래서 그해 말, 고향인 차오저우에 9개동의 아파트를 건설하고 2,200만 홍콩달러를 기부하여 차오안 현과 차오저우시에 병원을 지었다. 이밖에도 장애인기금회에는 7천만 홍콩달러 그리고 고향에 대학을 설립하는데 지금까지 총 20억 홍콩달러가 넘는 금액을 출연했다.
중국 동부지역에 수재가 발생했을 때도 리자청이 취한 행동은 중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1991년 5, 6월에는 수재로 인해 중국의 18개 성, 자치구 등에서 1,270명이 사망했다. 경제적 손실은 90억 위엔에 달했고, 20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리자청은 보도를 접하면서 무거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2억 홍콩달러를 신화사 홍콩지사에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냈다. “우리는 중국인들의 후손입니다. 그러니 홍콩기업은 마땅히 중국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의 동참을 바랍니다.” 그의 호소는 홍콩 사람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7월 23일까지 12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홍콩에서 접수한 성금은 4억 7천만 홍콩달러였다.
의리를 중시하고 이익에 연연하지 않다
성공한 대상(大商)들 중에는 사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담담하게 몸을 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간의 물욕은 한이 없다는 속성에서 볼 때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리자청은 증시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린 후 점차 발을 빼기 시작했다. 1984년,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사유화’를 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화는 공개적인 상장기업을 증시에서 퇴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사유화를 실행하려면 시기를 잘 선택해야 한다. 시기에 따라 주식을 매입하려는 대주주나 매도하려는 소액주주가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주가가 하락하는 시기에는 대주주에게 유리한 때이다. 그러나 소액주주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1985년 10월, 리자청은 인터내셔널시티를 사유화 하면서 주식을 시가보다 10% 비싼 가격에 사들였다. 주가가 하락할 때 사들이면 이익이지만 소액주주의 이익을 고려한 것이다. 1988년 시멘트회사를 사유화할 때도 13% 올려 매입했고, 1992년 자홍인터내셔널을 사유화할 때도 주당 32%를 올려 인수했다. 리자청은 10여 개 회사의 회장이나 이사직을 겸하고 있었지만 연봉은 상징적 액수인 5천 홍콩달러(한화 약 65만원)만 받아왔다. 20년 동안 변함없이 이 금액만을 받았다. 대신 이러한 리자청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창장그룹에 대한 주주들의 믿음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는 작은 것을 버려 큰 이익을 얻는 지혜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익보다는 주주와 기업의 이익을 생각하는 큰 그릇이다.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다
리자청은 외삼촌의 딸, 즉 외사촌 여동생인 좡웨밍(莊月明)과 결혼했다. 좡웨밍은 리자청보다 4살 아래로 용모가 뛰어났고 머리도 좋았다. 그녀는 홍콩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에 유학했다. 리자청은 총명하고 예쁜 그녀에게 점차 연정이 싹텄고 좡웨밍도 무척 리자청을 따랐다. 하지만 리자청은 자신이 성공을 해야만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삼촌과 외숙모도 리자청을 사위로 맞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리자청이 35세가 되고, 장웨밍이 31세가 되자, 리자청의 사업도 번창하고, 둘의 사랑도 변함이 없는 것을 본 외삼촌 부부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다.
결혼 후 좡웨밍은 창장에 들어와 남편을 돕기 시작했다. 그녀는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근면함으로 직원들의 호감을 받았다. 당시 리자청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아내를 위해 63만 홍콩달러를 들여 3층짜리 양옥을 샀고, 지금까지도 이곳에 살고 있다. 좡웨밍은 두 아들을 낳은 후 전업주부로서 시어머니와 가족을 돌보며 살았다. 그런데 1990년 1월 1일,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 58세였다. 온갖 풍파를 다 겪은 리자청이지만 아내의 돌연한 별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부와 건강을 소유한 리자청은 유혹을 많이 받았지만 여성문제로는 한 번도 스캔들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그들 부부는 금슬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지금까지도 재혼을 거론하지 않는다. 제대로 처신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특히 돈 많은 유명인사가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처신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리자청은 명예란 ‘깨끗한 이름’이지 ‘영예’가 아니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선비가문의 가풍을 이어받은 그는 항상 겸손한 군자의 풍모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 상인, 儒商’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비결 8 情 : 은혜에 보답하고 인간관계에 정성을 쏟다
리자청은 덕을 쌓으며 선을 베푼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은 사업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때 철물공장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던 리자청은 이직을 만류하는 사장을 뿌리치고 회사를 그만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철물공장 사장을 찾아가서 ‘플라스틱으로 철물이 대체되고 있으니 경쟁이 없는 품목을 중점 생산하라’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사장은 계속해서 파이프를 생산하다가 도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리자청은 다시 그를 찾아가 카라비너(암벽등반시 자일을 연결하는 고리)를 생산하라는 권고를 했다. 이번에는 리자청의 말을 귀담아 들은 사장은 카라비너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플라스틱회사에 몸담았을 때에도 리자청은 사장의 신임을 받았다. 리자청이 회사를 그만둘 때도 사장은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리자청은 감동과 함께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면서 사장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저는 플라스틱공장을 차리려 합니다. 여기서 배운 기술로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사장님의 고객이나 거래처를 빼앗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플라스틱공장을 차리자 먼저 회사에서 알았던 고객들이 거래를 위해 찾아왔지만 모두 거절하고 먼저회사의 우수성과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여 돌려보냈다. 20년 후, 오일쇼크로 플라스틱업계에 비상이 걸리자 리자청은 자신이 보유한 원료를 그 사장에게 넘겨주었다. 이미 환갑을 넘긴 사장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다’고 감격해했다.
사람들은 리자청이 부동산과 증시에서 크게 성공한 뒤 플라스틱제조업을 그만둔 것으로 알고 있다. 플라스틱조화는 오래전에 사양사업으로 전락해서 수익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장실업은 소규모이나마 조화를 생산했다. 몇 안 되는 나이든 직원들을 위한 배려였다. 리자청이 말하건대, “기업은 가정과 같아서 직원들은 바로 가족이라 할 수 있다.”라고 정의하면서 “경영자는 직원들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린다. 그 돈은 바로 그들이 벌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더 많이 배려하고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 또한 이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수시로 자성한다.”라고 말한다.
‘성공하면 천하를 구한다’는 가훈을 깊이 새기고 있는 리자청은 사회, 교육, 문화, 의료, 복지 등에 관심을 갖고 행동함으로써 대자선가라는 명예를 얻었다. 2004년에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 동남아 국가들이 지진해일참사를 당하자 세계 각국으로부터 지원이 쇄도했다. 우리나라는 당초 6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지원 상황을 보고 300만 달러로 금액을 올렸다. 그런데 리자청이 개인 자격으로 310만 달러를 선뜻 내놓자 다시 지원금을 500만 달러로 수정했다. 리자청은 1977년 이후, 매년 ‘익명’으로 1억 홍콩달러를 홍콩과 중국의 의료 및 교육 사업에 기부하고 있다.
그의 수많은 기부행위를 보고 ‘돈을 물 쓰듯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홍콩 사람들은 리자청을 ‘돈을 쓸 줄도, 부릴 줄도 아는 사람’이라고 존경한다. 리자청은 중국의 한 교육기관에 장학금을 기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 돈은 사회에서 나왔기 때문에 당연히 사회를 위해 쓰여야 한다. 내가 중국인으로서 조국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면 어떤 고생도 가치가 있고,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아마도 그의 인생관을 압축한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