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자와 관련하여서 저의 개인적 체험을 써보려고 합니다.
제가 경험한 것 중에 법무아님과 같은 상태가 있는지, 유사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보면 좋겠네요.
화엄에서는 내적인 정직성을 중요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표현의 담백함, 정확성, 세밀함을 중시하니까요.
저도 가능한 한 수사적인 표현을 최소화하고, 화엄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치려고 노력합니다.
다만, 도판에서 워낙 언어의 인플레이션이 커서…
차 떼고 포 떼고 표현하다 보면 체험의 본래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로, 화엄에서는 ‘근접삼매로 몸을 취한 즐거움을 얻었다’, ‘허나 선정에 이를 정도의 집중의 실현은 아니다’ 정도로 표현합니다
.
그런데 어떤 이는 ‘호흡으로 풀무질하여 오르가즘의 수 배에 달하는 해일과 같은 쾌감이 전신으로 퍼져서 마치 의식이 멈춘 것 같은 상태에서 대락(大樂)이 수십 분, 수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으니까요.
처음 오신 분들께는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잘 안 맞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과거의 기억과 당시 언어를 살려서 작성해보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일단 편의를 위해서 요약해보면요.
아사하1 상태 → 아사하2 상태 → 아사하3 상태의 순서로 왔습니다.
참고로, 저는 아사하1 상태가 법무아님의 명상 또는 그로 인한 결과와 유사해 보입니다 (비유비무 말구요.)
먼저 아사하1 상태입니다.
이 당시에는 마치 신령스러운 앎이 홀로 관조한다든지, 릭빠의 태양이 떴다든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초반에 누구나 그렇듯, ‘무한히 분열되는 보는 자’를 보는 항상하는 앎을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관련하여 다들 하신 것처럼 저도 힌두 성자들의 책부터 이것저것 많이 봤죠.
릭빠의 태양이 떠서 고통과 슬픔, 아픔, 일어나는 현상을 주시하는 앎을, 그리고 그 앎의 연속을.
비개아적으로 홀로 관조하는 항상하는 앎이라는 것을 찾았는데요.
일상에서도 보는 자를 보고 또 보고 그것과 무관하게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 보는 자를 보는 자를 또 보는, 개아적인 주시의 분열이 연속됩니다.
그리고 이내 이것을 통합적으로 보는, 모든 앎의 분열의 뒤에서 알고 있는 자, 즉 ‘비개아적 보는 자’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당시 표현입니다.)
이것을 저는 ‘최후의 주시자A’라고 하겠습니다.
이 주시자는 상태가 아니고 (당시 표현으로) 과거에도 있었고, 꿈 없는 잠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있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내가 알든 모르든 항상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근접삼매에 들고 일어나도, 자고 일어나도 항상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정직하고 세밀하게 보자면 추정이고 현상이고 느낌이고 또 그냥 앎일 뿐임.)
저는 그 앎을 그 당시에 ‘발견’했구요.
이 앎이라는 게 계속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앎은 알려지는 앎이 아니고, 아는 앎들의 무수한 상대 현상과 별도로, 본래부터 아는 앎의 ~ing인 느낌이었습니다.
한 번은 새끼손가락이 부숴지다시피 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 아픔을 아는 개인적 앎을 다시 아는 무한 앎의 분열의 뒤에서, 그 분열과 무관하게 평화롭게 항상하는 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상생활(군 생활 중)에도 항상했습니다.
저는 제가 깨달은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아사하2 상태
아사하1 상태에서 여러 인연을 통해 어떤 선지식을 만났습니다.
그분께서 제가 말한 ‘최후의 주시자’는 가짜라 하셨습니다.
마지막 주시자도 결국 식의 대상일 뿐이며, 진정한 최후의 주시자(최후의 주시자B)는 주시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를 주시할 수 없으며 사실 아무것도 주시할 수 없고 주시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때 큰 충격이 찾아왔습니다.
나보다 나은 분이, 나보다 더 많이 아는 분이, 더 잘 알고 경험도 많은 분이, 내 상태를 충분히 다 아는 분이, 내가 아니라고 말하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방문객님과 같은, 아주 엄밀한 의미의 선정삼매 초고수였습니다.
보지 않는 것이 뭘까? 최후의 주시자는 주시하지 않는다.
다들 아시겠지만, 주시자는 주시할 뿐이니까…
주시자를 보는 순간, 주시자가 또 생기는 분열이 있잖아요.
이치상으로 주시자는 주시자를 볼 수 없습니다.
주시함은 있을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분열 뒤에서 주시하는 자가 분명히 있는데,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 분열을 평온히 바라보는 최후의 주시자A가 분명히 있는데,
이것도 그냥 대상이고 주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뭘까? 사실 무엇도 절대로 주시할 수 없다는 것이 뭘까?
탐구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전에 방문객님께 질문드렸던 아사하2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나름 최연소 인가를 받았습니다.
사구부정에 해당하는 인식이라고 했습니다.
주시자의 분열을 무관하게 항상 주시하는 비개아적 앎은 여전하지만!! (아사하1의 최후의주시자A는 여전함)
그것과 무관하게 아무것도 보지 않는 상태, 애초에 볼 수 없는 상태(아사하2, 최후의주시자B)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고, 보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 둘 다 아닌..그 무엇도 아닌..(그 당시 표현입니다.)
당시에는 저는 또 진짜로 견성한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뭣도 아닌 분열, 주관적 인상 또는 상태 또는 그러한 행법 등을 내려놓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리고 내려 놓아도, 내면에서는
‘아 그래도 뭐가 있지 않을까? 이건 어떤 상태가 아니라 진짜 진실 그 자체인데..이 상태로 웬만한 선사들의 선시를 읽어도, 논서를 읽어도 다 이해가 되는 것만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일전에 뽀레뜨 수녀님의 소외된 영혼이라든지, 니콜라스 쿠자누스의 박학한 무지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도 그것의 의문점을 여쭙고 싶어서인데요.
“그리하여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해체되어, 자기 자신도 하나님도 보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신 선하심에 의해 완전히 자신만을 보신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영혼이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기 전에 의지를 소유하고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이유 없이 [의지를] 지니고 계시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나니,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사랑하시며, 자신만을 완전하게 보시며, 자신이 자신이라는 것에 의해서만(alone by His being Himself) 완전하게 찬양하신다.”
당연히 이 문구만 보고 위의 수녀님이 아사하2 상태라는 것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번역하신 분은 아사하2 상태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저랑 같이 동문수학하던 분이거든요.(불자이십니다.)
작고하셨지만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으니까요.
그분은 저와 같은 상태, 본인과 같은 상태(당시에는 견성)와 유사해 보이는 내용이 여러 종교나 계파에 나타난 문헌을 번역해오셨던 분인데요.
그 번역 자료를 가지고 함께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런데..지금은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내면의 정직성을 만나버렸습니다....
아 그리고..나이롱으로라도 얕은 집중 수행을 꾸준히 하다보나까.. 위의 상태들이 민망하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황벽님이 알게 모르게 질문 올리고, 댓글로 답변 받으셨던 것들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방문객님 말씀해주신 대로…
그런데 어차피 저는 나이롱이고 언젠가 염불 원툴로 갈 생각이어서 마음이 편합니다.(아사하3!!)
첫댓글 법무아님이 얘기하시는 <보는 마음을 아는 마음>과
아사하1<최후의 주시자>가, 유사하거나 동일한 결로 보이네요. 행자마다 다른 해석과 인상을 가질 수 있는걸 감안하고..기능적인 혹은 구조적인 측면에서요.
법무아님이 그쪽으로 열심히 하시면 본글의 최후의 주시자와 같은 과보로 향하겠죠. 저도 예전에 비슷한 경로로 마음을 일으키고, 상응하는 과보를 받은? 적이 있어서.. 제 얘기기도 하고 그렇슴다.
제가 명상 외에도 중관학 공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사하님의 사례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방법의 명상을 하든 승의로는 주시자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체와 객체, 작용 조차 없습니다. 아는 마음을 보는 걸 아사하님이 왜 주시자라고 표현하는지는 이해가 갑니다만 테라와다에서도 티벳 족첸에서도 그런 걸 상정하고 수행하는 게 아닙니다. 아사하님과 같은 논리로는 한국에서 위빠사나라고 많이 알려진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이름 붙이기 알아차림만 하더라도 평소 일상생활에서의 마음과는 또다른 어떤 주시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 또한 그저 알아차림하는 마음 작용일 뿐입니다. 아는 마음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팔정도의 맨 앞인 정견이 무엇인지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겠으나 (제일 일반적인 상식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죠) 개인적으론 정견으로서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무자성입니다. 쫑카파 스님이 말한 좋은 분별이란 이 무자성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무자성을 이해하면 무슨 수행을 하던 간에 어떠한 최후의 주시자라는 건 상정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실제로 주시자라는 걸 상정하진 않는데요.
이해하셨다고 쓰신 것처럼 주시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요.
보통 사람들은 주시하는 '자'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시자라는 건 없습니다. 어떤 학파든 주시자라는 걸 상정하지는 않죠.
편의상 주시자라는 이름을 붙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다보면 금방 '자'는 없다는 걸 관찰하게 됩니다.
이해하셨다면 주시'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분별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제가 여쭤본 것은요.
아사하1과 법무아님이 하시는 '보는 마음을 아는 마음 '과 같지 않냐는 것입니다.
견해가 다른데 같지 않냐고 물어보는 게 이질적이긴 한데요, 굳이 어느 것에 가깝냐고 물어본다면 아사하1이 가깝긴 합니다. 강조드리는 건 보는 마음, 아는 마음, 지켜보는 마음은 전부 다 방편으로서 수행할 때의 마음 작용일 뿐 어떤 대단하고 신비로운 무언가가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아사하2는 대상이 사라진 혹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진 혹은 힌두교의 범아일여 체험과 같은 것을 말하는 걸로 받아들여지는데요. 아사하2는 수행 상의 특정 느낌을 잘못된 견해로 인해 오해한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불교적으로) 대상 없는 식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법무아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견해는 체험을 해석하는 통찰의 영역이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댓글 주신대로 충분히 말씀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비로운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두요.
저도 그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건데요.
아사하1이든 뭐든 사실 상당히 초보적인 수준의 방편이고, 그 과보의 한계도 초보적인 것까지라고 생각합니다.
편의상의 표현이지만, 제가 언급한 아는 상대적 앎들을 무관하게 아는 ing두요. 초보적인 방편을 지속했을 때 얻는 과보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제대로 선정에 이를 정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한다면 신경증을 유발할 수 있다고 예전에 방문객님이 말씀해주셨던 것 같구요.
나이브하게 접근하기 때문에 행자에게 가능하다고 관찰되지만,
실상을 제대로 본다면, 불가능한 허튼 짓을 착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라 별 다른 방편이 되지 못한다는 게 그 간 카페 회원님들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하구요.
아사하2는 범아일여까지의 체험은 아니구요.
범아일여의 체험은 일상의 평면이 아닌 선정의 체험에서 했습니다. 그건 뭐 나중에 담론을 나누기로 하구요.
아무튼 간에 아사하2는 잘못된 느낌이 맞습니다.
@아사하2 다른 댓글에서도 말한 거 같은데 방법이 초보적인 거랑 과보랑은 관련이 없습니다. 어떤 수행이든 공부든 그걸로 탐진치가 해결되고 있다면 과보를 얻는 것입니다.
주리반특가는 머리가 나빠서 빗자루로 쓸고 닦는 수행만으로 아라한이 됐습니다. 빗자루 청소야 누가 못하겠습니까. 뽀띨라 장로는 교학에 매우 박학다식했지만 아무런 성취가 없었는데 꼬맹이 동자승에게 간청한 끝에 다섯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닫고 마음 하나를 지켜본다는 가르침으로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중요한 건 방법이 아니라 그 사람이 수행할 때의 오력에 달린 것입니다. 오력에 대한 정의도 수행처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법무아 오 제가 다른 댓글을 보진 않았구요.
쓰신 본글만 보고 적었습니다.
아는 앎을 아는 마음..
자주 나오던 주제여서요.
만약, 법무아님이 무엇이든 방편으로서 탐진치와 갈애가 해소되었다면 훌륭하시다 생각합니다.
탐진치라 쓰고 지우개로 지운다던지..
설거지를 하면서 업장이 소멸된다고 생각하고 광명진언을 외운다던지
물 떠 놓고 빈다던지..
뭐든 훌륭한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아무튼 그렇다면 무쟈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자는 일단 탐진치를 여의고 자비심과 보리심을 기르는거죠.
@아사하2 동의합니다. 요즘은 뵌불교의 잠을 자면서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꿈요가와 잠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중인데 물론 이 수행도 자각몽으로 근두운 타고 날아다니는 게 목표가 아니라 탐진치의 소멸이 목표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사하2 조금 더 적자면,
불교 수행이 탐진치를 여의는 것을 포함한 여러 선한 과보를 의도한다지만,
각 기법이 의도하는 일차적 과보는 다른 것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의 과보를 말한 거입니다.
예를 들면, 몸을 취한 즐거움을 얻는 것 또는 그 정도의 집중을 실현하는 것 등의 직접적인 과보요.
오력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방편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까요~
다른 수행자들도, 수 많은 선지식들이, 종파가 괜히 수행의 단계를 두고 수행법이라는 구체적으로 전승되는 방편을 두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같은 힘을 줘도 병따개로 따면 더 잘 따지는 것처럼요.
방편의 적합함도 중요한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한 취지는 그런 측면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회원분들도 그런 취지일 것입니다.
기법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서, 또는 의도하는 바와는 무관하더라도,
탐진치를 여의었다. 또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비심과 보리심이 증장되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법무아 여담 질문인데요. 그러면 탐진치의 소멸을 위한 방편으로서 불교적인 것만 취하는 건 아니신가요?
@아사하2 불교적인 것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미리 대답을 드리자면 제 생각엔 견해가 바르면 어떤 방법이든 불교적입니다. (그 중 핵심적인 견해가 앞에서 댓글 달았듯이 무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밀교의 여러가지 수행법들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게 많은데, 견해가 어떤지에 따라 같은 방법으로 수행을 하더라도 힌두교가 될 수도 있고 불교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법무아 왜 여쭤보냐면요.
저는 어떤 과보를 의도할 때,
가능한 한 그 과보를 실현하는 직접적인 방편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쿤달리니를 일으키고자 하면,
졸화보다는 척추 기저의 운동성을 동반한 열감을 깨우는 수행법을 하구요.
일상의 평면에서 지복감의 형성과 열감을 일으키고자 하면,
쿤달리니 수행법 보다는 졸화 수행을 합니다.
방문객님이 말씀하셨듯이요.
불교는 메타스쿨이기 때문에 근본을 놓지 않는다면, 비불교적인 텍스트도 방편으로서 취사선택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요.
탐진치를 다루는 방편과 일상에서 언어적 생각을 잠재우는 아주 직접적인 방편으로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놓아버림, 나의 눈, 호모스피리투스 등이 무쟈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분의 의식수준 지도나, 비불교적인 관점, 생각의 장에 대한 접근은 논외로 했구요.
개인의 위치성과 관념이 위배될 때 탐진치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제거하고 놓는 것과
일상의 언어적 생각의 무해함을 이해하고 내려놓는 실전적인 방식 등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탐진치와 언어적 생각을 놓는 측면에서요.
(제게 맞는 스타일로) 이 이상의 방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사하2 개인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았다는 전제 하에 댓글 의견에 동의합니다. 우린 빗자루 청소한다고 아라한이 되진 못하듯이 개인에게 맞는 수승한 수행법이 있는 거겠죠.
저한텐 (현재로는) 그 수행법이 중관학과 티베트 현교 불교철학 공부하는 거랑 명상적으로 알아차림을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잠이 들어서까지도요.
@법무아 질문 조금 더 드려도 되겠죠~
(제가 좀..ㅠㅠ)
말씀하신 공부가 재미있고, 신심이 드는 것과 별개루요.
1. 실질적인 면에서 어떻게 탐진치를 여의는 것에 도움이 되시는 건가여?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중관에 의지하여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탐진치가 녹아드는 것일지..
2. 다른 공부나 수행을 해보았는데, 비교적으로 중관학과 불교철학 공부가 일상의 탐진치 소멸에 더 직접적인 도움이 되신건가여?
아니면, 탐진치 소멸만을 주제로 다루진 않더라도 전반적인 공부와 함께 탐진치의 소멸도 자연히 이루어져서 중관학과 티베트 불교 철학을 유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일단 중관학과 티베트 불교 철학이 끌리고 좋고 위의 전반이 다 되기에 선호하는 것일까요? (왜냐면 다른 종파나 철학도 탐진치를 다루니까요)
저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무언가를 매우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을 선호해서요.
예를 들면,
누가 내 견해를 반박하여서 분노가 일어났을 때,
분노를 없앤다는 측면에서 보면요.
분노에 자성이 있는가? 이런 측면으로 살피는 것보다..
견해가 내 것이라는 착각을 다루고,
내것이 부정되면 분노로 이어지는 마음의 오류를 다루고 이런게 좋았거든요.
@아사하2 말씀하신 1번의 중관에 의지하여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탐진치가 줄어드는 것에 가깝습니다. 단, 이건 한 두번 이해하고 사유하고 땡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중관학적 사유에 습을 들여야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티샤 저작의 보리도등론을 보면 바른 사유를 통해 일으키는 사소생(思所生)의 반야 세 가지가 있는데 발생의 결과를 분석하는 파유무생인, 발생의 원인을 분석하는 금강설인, 제법의 자성을 분석하는 이일다인 입니다.
파유무생인: 있는 법이 다시 생하는 것은 정리(바른 이치)가 아니며 없는 법이 생하는 것은 또한 허공 꽃과 같다. 허물이 유무의 둘에 성립하기 때문에 사물은 둘로부터도 또한 발생하지 않는다. (제48송)
금강설인: 사물은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으며 다른 것과 그 둘로부터도 또한 아니며, 원인 없이 생하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사물에는 본질이 성립하는 자성이 없다. (제49송)
이일다인은 생략합니다. 이건 원문이고 주석은 또 따로 있는데(주석을 봐야 이해하기 편합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중관학 관점에서 글을 읽고 사유합니다.
@법무아 저는 삶을 좀 편하고 즐겁게 살아보자는 측면이 강해서요.
무엇보다도 즐거우려면, 탐진치가 적어야하니까요.
게으름은 그냥 두고요.
불교를 떠나서, 분노와 슬픔 등을 줄이려고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왔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주신 댓글을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정답은 없고 개인차와 선호가 있는거니까요.
탐진치와 관련한 제 의견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본글로 올려보겠습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말씀하신대로 중관에 입각하여 보는 수행을 정진력을 가지고 꾸준히 해나아간다면, 확실히 탐진치가 줄어들 것 같습니다.
연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경향성이 되고
곧 삶이 되고 그럴테니까요.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덕분에 방문객님이 자주 출현하셔서 좋습니다.
좋은 주말되세요.
@아사하2 예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되세요.
"나이브하게 접근하기 때문에 행자에게 가능하다고 관찰되지만,
실상을 제대로 본다면, 불가능한 허튼 짓을 착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라 별 다른 방편이 되지 못한다는 게 그 간 카페 회원님들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100%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