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시범단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어린이날에 유진이 비위 맞춰할 일이 없어진 때문인지 생뚱맞게도 되레 허전했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채비를 갖춰 이 지역의 어린이날 공식행사장에 보내면 그것으로 만사형통이다. 그 행사장에서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시범단 일원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가 친구들과 펼치는 태권도 시범을 보일 장소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거듭했다. 별일도 아닌데 동네방네 소문나거나 야반법석을 떠는 것은 질색이란다. 별난 주문을 무시할 수 없는 법처럼 받들어 그 행사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눈길도 보내지 않고 있다.
올해는 제96회를 맞는 어린이날로서 ‘어린이날 큰 잔치’가 돝섬 일원에서 KFME(창원시소상공인연합회)가 주관하고, 지역의 다양한 기업을 비롯해 기관의 협찬과 후원을 받아 펼친단다. 기본적으로 민·관·군이 함께 참여하는 어린이 대축제라는 취지이다. 그래서 마산소방서와 육군 39사단을 위시해서 한국해양구조협회가 참여해 119 대원의 응급처치와 소화기 사용 체험, 요트와 래프팅, 군악대 공연과 특공무술시범, 헌병 모터사이클 포토 존(photo zone) 따위가 펼쳐진다는 전언이다. 아울러 돝섬 잔디광장에서는 난타 공연과 마술쇼, 비눗방울 체험 등등의 행사가 이어지는 모양이다.
행사가 열리는 돝섬은 다양한 휴식공간을 갖추고 있다. 마산 제2부두(마산연안크루즈터미널)에서 배를 타면 10분 만에 가뿐하게 닿을 수 있는 마산 내만에 자리한 앙증맞은 미니 섬이다. 예로부터 ‘돝*’ 다시 말하면 돼지(猪)에 대한 전설이 전해진다는 맥락에서 ‘돝섬’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그동안 개발에 우여곡절을 겪다가 오늘의 해상유원지로 발돋움하며 도심에서 쉽게 접근해 조용히 쉴 수 있는 힐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돝섬을 오가는 유람선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항된다. 그리고 왕복요금은 일반 대인 8천원, 중ㆍ고생을 비롯해서 국가유공자나 경로자와 장애우 등은 7천원, 소인(24개월~초등생) 5천원이다.
유진이가 태권도와 연이 닿았던 시기가 유치원이었기에 올해로 6년째 수련 중으로 국기원 공인2품(No-21669706)을 취득(2016년)한지 세 해째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운동을 전공시킬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시작부터 입때까지 일주일에 사흘(월∙수∙금) 도장에 나가 수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태권도에 대한 나의 식견은 맹추에 가깝다. 따라서 유진이의 수련수준이 어느 경지에 다다랐는지 가늠해 볼 재간이 없다. 그런 까닭에 유진이가 하는 얘기를 칠흑 같은 오밤중 어둠 속에서 퍼즐 맞추듯이 더듬더듬 꿰맞추며 어림짐작해 볼 뿐이다. 오늘 어린이날 행사에는 마산의 수많은 태권도장 중에서 기껏해야 서너 군데에서 기껏해야 열 명씩 대표로 참가한단다. 유진이가 적을 둔 도장 수련생이 백 명을 훌쩍 넘을 터인데 그 중에 열 명 내에 뽑혔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되는 걸까? 녀석의 믿을 수 없는 말잔치이다. 자기 도장에서 “탑 5(top five) 안에 든다고.” 이는 평소 대인관계에 너울가지*가 있고, 매사에 걸싸다*는 것을 나타내는 단면이 될 법도 하다. 또한 매달 제 날짜에 수련비를 꼬박꼬박 입금시켜주는 나에 대한 립 서비스(lip service)라고 치부하고 별 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웃어넘겼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던가! 지난 여섯 해에 걸쳐 도장을 드나들며 주워들었던 풍월과 어설프기 짝이 없던 설익은 경험들이 시나브로 쌓여 지식이 되었지 싶은 편린이 대화중에 언뜻 비춰졌었다. 우연히 격파(擊破)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였다. 녀석의 얘기는 틀림없는 진리로 논리 정연했다. 어린이들이 격파 시범에서 실패를 많이 하는 이유를 이렇게 예리한 지적을 했다. 첫째로 정확도(正確度)가 떨어지면 격파력(擊破力)이 강해도 실패하며, 둘째로 격파력이 강해도 정확도가 떨어지면 실패한다. 그러므로 격파에 성공하려면 정확도와 격파력을 골고루 갖춰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둘 다 갖춰서 거의 실패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의문의 여지가 없고 나볏함*이 보일 뿐 아니라 그동안 쓰렁쓰렁* 시늉만 내며 허송세월했던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 말문을 닫고 말았다.
열두 살이기에 만지면 아리아리할 정도로 연약할 것이라는 예단을 할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아침에 늦잠에 빠지기 일쑤인 녀석을 깨우기 위해 서툰 마사지를 하려고 몸에 손을 대보면 뼈대가 빳빳하고 여간 억센 게 아니다. 아마도 태권도 수련을 통해 시나브로 단련된 다부진 모습으로 변한 방증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제 학교에서 실시했던 간이 건강 검진결과가 집으로 전달되었다. 키가 145.3센티미터(cm), 몸무게는 32.1킬로그램(kg), 시력은 좌측 0.7, 우측이 1.0, 나머지는 정상이었다. 체중 부족이나 좌측 시력의 문제는 배냇불행*에 대한 애난* 경고가 아니기 때문에 운동을 시킴과 함께 정밀검진 결과에 따라 합당한 후속 조치가 따른다면 너끈하게 극복 가능하리라.
일반적으로 태권도복은 흰색이 기본이다. 그에 비해 시범 요원에게 입히는 시범단 도복의 바탕 색깔은 진한 군청색으로써 가시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지 싶었다. 오늘 아침 챙겨 입고 나서는 살핀 시범단 도복의 실상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도복을 만든 천이 군청색이고 거기에다 균형과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 흰색과 빨간색의 줄이나 무늬를 비롯해 문자를 배치했다. 그런 때문에 다양한 무리의 군중 속에 마구 뒤섞여도 단박에 가려낼 수 있다는 견지에서 겨냥했던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게 아닐까?.
오늘 어린이날 행사에 태권도 시범단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녀석의 뒷바라지를 하는 아랫것 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신의 축복일까? 이른 아침부터 녀석을 밭에서 무 뽑듯이 집에서 쑥 뽑아내 흥겨운 어린이날 행사장으로 옮겨 놓다니. 그것도 내키지 않는 것을 억지로 내몬 것이 아니라 한껏 기분이 고조되어 “룰루~ 랄라~” 흥얼거리며 총총히 집을 나서게 했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이것저것 주전부리와 생수를 챙긴 가방을 건네는 제 할머니 옆에서 물끄러미 건네다 봤다. 그러다가 행사가 끝나고 무언가를 사 먹고 싶을 때 쓰라며 율곡 이이의 존영이 모셔진 지폐 한 장과 퇴계 이황으로 회자되는 지폐 다섯 장 등 모두 만원을 가방 주머니에 슬며시 찔러 주었다. 그랬더니 입이 귀에 걸려 다물지 못한 채 신이 나서 현관문을 나섰다.
“유진아! 풋풋하고 싱그러운 오월이구나.”
“끝없이 높고 청청한 하늘 높이 훨훨 날며, 어른들의 잔소리나 편견이 없는 무지갯빛 꿈나라에서 맘껏 즐거움을 누리렴.”
“사랑한다!”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하늘만큼 땅만큼,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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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돝 : 돼지의 방언(함경). 돼지의 옛말. 돼지를 이르는 말.
* 너울가지 : 남과 잘 사귀는 솜씨. 붙임성이나 포용성 따위를 이른다.
* 걸싸다 : 일이나 동작 따위가 매우 날쌔다. 성미 따위가 몹시 괄괄하고 세 차다.
* 나볏하다 : 몸가짐이나 행동이 반듯하고 의젓하다.
* 쓰렁쓰렁 : 남이 모르게 비밀리 행동하는 모양. 일을 건성으로 하는 모양.
* 배냇불행 : 타고난 불행
* 애나다 : 안타깝고 속이 상하다.
2018년 5월 5일 토요일(어린이날)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교수님^^
씩씩하게 운동 잘하고 건강하게 잘 자리는 유진이의 귀엽고 멋진 모습이 그려집니다.
교수님, 사모님의 손자 사랑도 지극하십니다.
결론이 참으로 싱그럽고 감격적입니다.
강의 하실 때 말씀하신 촌철살인적인 문구로 엮으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