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에너지 |
약한 에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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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잠재력
미국헌법, 권리장전, 독립선언문, 게티스버그 연설은 700의 높은 수치로 규정된 원칙을 담고 있다. 간디는 보편적인 법칙(700)에 호소하여 뭉치게 함으로써 거대한 대영제국을 굴복시켰다. 식민주의(175)는 통치 국가의 이익 추구라는 원칙으로 운영되었다.
처칠은 잠재력을 견지했고 히틀러는 표면의 힘을 대표했다. 잠재력은 겸손하며 결코 젠체하지 않는다. 표면의 힘은 거만하고 유혹적이며 애국심, 명예욕, 지배욕으로 위장하는 마력을 지닌다.
정치가는 잠재력을 쓰고 정치꾼은 표면의 힘을 이용한다. 잠재력은 방어할 필요가 없고 자명하다. 표면의 힘은 미사여구, 선전, 허울 좋은 정책에 의존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고 항상 변명을 한다.
잠재력은 생을 돕는 것과 연관되고, 표면의 힘은 개인이나 단체의 이익을 위해 삶을 착취하는 것과 연관된다. 잠재력은 통합적이고 표면의 힘은 분열적이다. 잠재력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만 표면의 힘은 자기 봉사만을 뜻한다. 잠재력은 성숙과 절제와 인내를 요구하지만 표면의 힘은 빠르고 쉬운 해결방법을 찾는다.
시장경제와 잠재력
월마트의 고용인들은 고객들을 보살필 줄 알고 따뜻하고 활기에 넘쳐 있다. 월마트상점은 고객이 아픈 다리를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
고용인들이 가족처럼 유대감을 느끼는 것은 사업의 성공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대접받고 부양받고 있다고 느끼는 고용인들은 생산성이 높고 고객에게 진실하게 대한다. 성공적인 사업체는 좌뇌에 의한 과학적인 경영보다는 마음을 더 중시한다. 미국의 자동차 업계는 질의 유지보다 수명을 미리 결정하는 전략으로 인해 실패했다.
고객들을 강화시키는 광고는 고객이 그 상품에 혐오감을 갖지 않고 항상 긍정적으로 느끼도록 한다. 시청자를 약화시키는 광고는 고객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게 한다.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흑백논리만을 구사하거나 상황 윤리에 의존해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칙은 잠재력에 있다. 잠재력은 승승의 해결을 가져오지만 표면의 힘은 승패를 초래한다. 약한 에너지의 끌개장은 반대편의 투쟁을 부른다.
스포츠와 잠재력
장거리 주자들이 뛰는 동안 평화와 기쁨의 상태에 도달한다. 운동선수 들이 혼신을 다함으로써 갑자기 기록의 장벽이 무너지고 동작이 유연해짐을 볼 수 있다. 이때 운동선수의 육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듯이 우아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으로 움직인다.
슬로 모션 기법을 통해 보면, 운동선수들의 느린 동작이 가져다주는 감동, 아름다움과 우아함 등이 높은 의식 세계로 빨려들게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피 댄서들은 피나는 훈련과 연습으로 오랫동안 정확한 동작으로 힘들이지 않고 춤을 춤으로써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운동선수들의 기록 돌파는 그들의 엄청난 노력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벽 돌파는 개인이 아닌 더 큰 힘에 의해서였다는 것, 이제까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또 하나의 자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진정한 스포츠의 힘은 우아함, 예민함, 내적인 고요, 그리고 치열한 경쟁자의 삶 속에서도 존재하는 비투쟁적인 온화함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경하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것, 그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그 자체이고, 이것이 모든 인류를 감화시키는 것이다.
자조(self-help)와 잠재력
영성이란 말은 관대함을 내포하지만 종교는 항상 독선을 내포하고 있다. 영성은 평화를 초래하는 반면 종교는 갈등과 유혈, 종교 범죄 등을 초래한다. 하지만 모든 종교의 내면에는 그것이 생겨나게 된 영적인 기초가 깔려 있다.
55년의 역사를 가진 알코올 중독자 갱생회는 자유를 존중하며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 그들의 잠재력 패턴은 정직, 책임, 겸손, 봉사, 포용, 호의, 우애 등이다. 그들은 특정한 윤리에 집착하지 않고 옳고 그름, 선악의 규칙이 없으며, 도덕적인 비판을 삼간다. 그들은 구성원뿐 아니라 어느 것도 통제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 대신 스스로 앞길을 정한다. 그래서 충만한 삶을 찾아 간다.
자조그룹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한계점을 시인할 때 참된 잠재력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의학과 첨단 과학보다도 잠재력이 그들을 회복시켰다.
원칙이 갖고 있는 잠재력은 시간과 관계가 없으며 변하지 않는다. 높은 끌개장의 힘은 흔히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기는 한 조각 헝겊에 물감을 입힌 것에 불과하지만 국기가 상징하는 것을 위하여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 힘이란 의미와 정신세계에서 온다.
예술과 잠재력
여러 세기에 걸쳐 우리에게 전해진 위대한 미술, 음악, 건축 작품들은 높은 끌개 패턴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이런 걸작들을 통해 문명을 대표하는 천재 예술가들이 절대와 은총, 인간의 존엄성에 헌신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예술의 아름다움에 눈뜰 때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과 민감성이 자라나기 시작하며, 혼란한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즐기고 기쁨을 갖게 된다.
사랑 없이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이란 영혼을 짓는 것이며,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합작으로 빚어내는 것이다.
음악은 눈물을 흘리게 하고, 춤을 추게 하며, 사랑과 창조의 절정에 오르도록 고무시킨다. 고전음악은 대부분 아주 높은 잠재력의 패턴을 보여준다.
성당은 건축물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로 측정된다. 성당은 음악, 조각, 그림, 공간 설계 등 여러 예술적 요인이 결합되어 세워진 것이다. 성당은 우리들에게 영감을 주고, 인간 내면의 가장 고귀한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고, 가르치고, 상징하며, 그것을 위해 봉사한다.
우아함은 미적 감각에 대한 잠재력의 표현이다. 우아함은 고상함, 세련됨, 낭비 없는 노력과 연관된다. 우아함의 힘은 삶을 인정하고, 돕고, 다른 사람들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지켜준다. 우아함은 조건 없는 사랑의 한 단면이며, 관대함을 의미한다. 우아함은 정숙과 겸손을 뜻한다.
아름다움은 다양한 문화에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아름다움이란 보는 이에게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바뀌지 않으며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형태만이 바뀔 뿐이다. 높은 의식 수준의 사람들은 모든 형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는 모든 생명이 신성할 뿐 아니라 형상을 갖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창조성과 잠재력
역사란 천재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명백한 진실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투쟁 기록이다. 천재는 높은 에너지 끌개 패턴(의식)에 접근할 능력이 있다. 천재들의 고민은 그들이 이해하는 사물을 남들에게 어떻게 표현하고 이해시키는가에 있다. 그들의 이해는 완전하고 자명하지만 남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일생이 걸리는 힘든 일이 된다.
우주에는 행운이나 우연적인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고 아무도 우주로부터 제외되어 있지 않다. 모두가 우주의 구성원이며 의식도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천재는 의식의 특징이므로 천재 또한 어느 곳이나,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다.
천재성은 모든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다. 다만 천재성을 발현할 수 있는 여건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동안 천재의 순간을 경험한다.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 하거나 패러다임이 바뀜으로써 천재성이 발휘되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눈뜸에 겸허해 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천재의 능력을 계속적으로 발휘하게 된다.
천재성은 풀 길 없는 의문과 아무런 보상도 없는 싸움을 벌인 끝에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문득 날개를 털고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패배에서 승리가 나오고, 실패에서 성공이 나오고, 겸손에서 자존심이 나온다.
천재들의 생활방식은 간소하다. 그들은 삶을 존중하고, 사물의 근본적인 가치를 보며, 독창성의 자원과 경제성을 중시한다. 조용한 생을 즐기며 필요한 경우 외에는 나서지를 않는다.
영감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하루에 20시간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고 자기 일에 열중할 수 있다. 집중력은 언뜻 침체의 기간으로 보이지만 실은 창조를 위해 필요한 발효기간일 뿐이다. 재능 하나로는 천재가 되지 못한다. 천재는 인내, 용기, 집중, 끌고 나가는 강한 힘, 절대적인 정직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천재들은 말한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분야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
성공과 잠재력
전인적 인격체로서의 성공이란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성공적인 삶의 방식을 뜻한다.
부, 권력, 명예, 인기를 얻은 사람도 자신의 에고를 왜곡시켜 작은 자아를 강화시킨다면 파멸로 가기 쉽다. 작은 자아는 재능을 뽐내고, 거만하고, 자만심에 차 있고, 남을 지배하려 한다. 큰 자아는 성공에 겸손하고, 재능을 감사의 대상으로 돌리는 성숙된 모습이다.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은 마음이 열려있고, 따뜻하고, 성실하고, 성공을 자신이 해야 할 책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를 동등하게 대하고, 친절하고 사려가 깊으며, 거만하게 행동할 이유를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잘 난 것이 아니라 행운이 따랐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봉사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고 믿고 있다.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ABC를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성공을 A→B→C의 범주 내에서 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성공의 첫 단계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중시한다. 즉 눈에 보이는 물질적 부에 따라 위상이 결정된다. 다음 단계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 가가 중요하다. 즉 개인의 지위나 활약상에 따라 위상이 달라진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인생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결국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전념하게 된다. 이들은 내면의 잠재력이 갖는 우아함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이 내뿜는 강력한 끌개 에너지를 느낀다.
진정한 성공이란 왜 아무런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까?
전류의 힘이 클수록 자기장의 범위는 더욱 커진다. 자기장은 주변의 모든 것들에 영향을 준다. 멋진 승리자들은 사람들이 찾기 마련이고, 사려 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
건강과 잠재력
지혜로워짐으로써 우리는 신체적으로 건강해지고 부유해진다. 높은 에너지와 결합하면 건강이 오고, 낮은 에너지와 결합하면 질병이 초래된다. 높은 힘의 끌개 에너지는 뇌에서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시켜 모든 기관을 튼튼하게 해주지만, 해가 되는 자극들은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게 하여 면역 반응을 억누르고 장기를 약화시킨다.
정신과 육체의 건강은 긍정적인 태도와 관계가 있으며, 질병은 노여움, 시기, 적대감, 자기 연민, 공포 같은 부정적인 태도와 관계가 있다. 정신의학에서 볼 때 긍정적인 태도는 복지의 감정이고, 부정적인 태도는 응급(emergency)의 감정이다.
스트레스는 인간의 수많은 질병과 병변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외부에서 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스트레스는 개인의 태도에 의해 내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은 인생의 사건들이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운동역학 시험에서 인공 합성물, 플라스틱, 인공 색소, 방부제, 살충제, 인공감미료 등은 약한 반응을 보이는 반면, 순수하고 유기적이거나 사람의 손이 간 것들은 강한 반응을 보여준다. 영양은 뇌와 혈액의 환경에 영향을 주고 행동과 감정, 정신적 병변에도 깊은 관계가 있다.
모든 태도, 생각, 믿음 등은 에너지의 경락이라 불리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신체의 장기와 연결되어 있다. 비선형 동역학과 임계점은 입력에서의 아주 작은 변화가 출력에서 커다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작은 변화의 반복은 점진적인 에너지의 증진을 가져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과 태도의 우주가 신체의 습관적인 반응의 결과로 가시화될 수 있다.
전통적인 의학은 저절로 고쳐졌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알코올 중독자 갱생회에서는 인격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치유될 수 없다고 말한다. 희망 없는 불치병에서 치유된 환자들에게는 의식의 대전환 현상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치유된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현저하게 커진 것을 본다.
어떠한 질병이든 그 치유는 자기 자신과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자발적인 태도에 달려있다. 믿음의 체계가 흔들릴 때 겪게 되는 내면의 두려움을 이겨 나갈 능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비밀스럽게 미움과 억울함, 원한이나 복수심, 적대감을 감춘다 해도 그것은 우리 몸에 생리학적인 공격을 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에 웃음과 유머는 우리 생활에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정의를 강조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평화의 적이다.
건강, 효율성, 번영이 현실과의 조화와 균형에서 오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믿는 이상, 이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불행을 외부로 돌리지 말고 자신의 내적인 반성에 정진해야 한다. 질병이란 마음의 작용이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세상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다.
500 이상의 의식수준에서 본다면 죽음이란 환상에 불과하며 삶이란 계속되는 것이다.
의식의 데이타베이스
칼 융은 패턴과 상징을 연구한 후 집단 무의식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우리는 이 집단 무의식을, 강력하고 우주적이고 조직적인 패턴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인간 의식의 거대하고도 숨겨진 데이터베이스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검색 과정을 기다리고 있는, 정보의 거대한 창고이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육감, 직감, 신통함, 꿈,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얻는 모든 정보의 원천이 있다. 이것은 천재성의 원천이며, 영감의 샘물이며, 신비로운 예지의 근원이다.
의식의 데이터베이스는 충전된 배터리라기보다는 잠재력을 지닌 정전기의 콘덴서와 같다. 질문과 해답은 같은 패러다임에서 나오며, 아래가 없이 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는 순서에 따라 일어나기 보다는 동시에 일어난다고 보아야 한다. (칼 융의 동시성) 여기의 사건이 저기의 사건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두 사건은 동시에 나타난다.
두 사건은 두 사건을 동시에 포함하는 동급의 에너지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눈앞에 현현하는 우주 전체는 동시적인 표현이며 경험 그 자체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이 모든 것은 실재도 아니며, 비실재도 아니며 단지 있을 따름이다. 있는 것은 모든 관점에서나 무의 관점에서나 있는 것이다. 음과 양, 나타나는 것과 나타나지 않는 것,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시간과 무시간을 포함하여 궁극적인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동시에 참된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주는 매우 협조적이다. 우주가 의식 자체와 다르지 않은 만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창조해 낼 수 있고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간은 관점의 이동에 따라 나타나는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홀로그램에는 시작이나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이미 완전하게 존재한다. 포갠 우주도 펼쳐진 우주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식되는 우주만 있을 뿐이다.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여행자 앞에 풍경이 펼쳐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펼쳐지는 것은 없으며, 그 무엇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존재할 것인가 저렇게 존재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 뿐이다.
의식의 진화
사람들은 평생 동안 평균 5점 정도의 의식 진전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평생 수많은 경험을 통해 불과 몇 가지의 교훈만을 배우는 셈이다. 지혜를 얻는 것은 더디고 고통스럽다. 아무리 익숙한 관점이라도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면 서슴없이 버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성장과 변화에 대한 저항은 이처럼 심각하다.
성장과 발전은 불규칙적이며 직선적이 아니다. 의식의 향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꺼이 하는 태도다. 자발성은 사물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고, 새로운 가설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의식의 수준에는 두 개의 분기점이 있다. 200의 수준은 잠재력을 차음 느끼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남을 비난하지 않고, 자기의 느낌, 믿음,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줄 아는 성숙이 시작된다. 500의 수준은 사랑, 비판 없는 용서, 모든 사람?사물?사건들에 대한 예외 없는 무조건의 친절함이다. 이런 믿음으로 행동하면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고 의식은 점차 진화해 나갈 것이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홀로그램과 같다. 특정한 관점들은 그의 독특한 의식 수준의 반영일 뿐이다. 홀로그램의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이 보고 느끼는 것은 다른 쪽에 서 있는 사람과 전혀 다르다.
600 이상의 수준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완전하고 동시성인 홀로그램의 가능성 속에서 말로 표현되기 힘든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시간이 초월된 상태에서 순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지금이라면, 거기에는 여기서 저기로 따라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홀로그램은 인과관계가 아닌 동시성의 끝없는 비선형 사건의 반영에 불과하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세상이 달라진다.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인식에 따라 결정된다. 의식의 흐름, 즉 생각과 인식, 느낌과 기억의 패턴은 끌개 에너지장이 이끌고 나간다.
자존심은 의식의 진전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세상 경험만이 정학한 것이라고 비밀스럽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마음은 자신의 옳음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정(否定)의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부정성이 사람의 평생 동안 의식 수준을 5점 정도밖에 진정시키지 못하는 요인이 된다. 의식의 커다란 진전은 내가 안다는 착각을 버릴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인생이란 배움의 터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삶은 진정한 스승이 되어 줄 것이다.
앎 자체 속에서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앎은 경험한 것을 단지 기록할 뿐이다. 마음이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감각이 경험한 바를 보고할 뿐이다. 오직 경험을 경험하는 것만 할 수 있다.
마음은 순수하여 잘 속아 넘어간다. 그래서 분별할 줄 알고, 늘 깨어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의식 수준을 높일 수 있다. 다 안다는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해 질 때 앎의 성숙이 시작된다. 우리가 곧 마음 자체라고 생각하면서부터 우리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바라본다.
생각, 믿음, 느낌, 견해의 주인은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우리의 모든 생각들은 거대한 의식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빌려온 것에 불과하고, 우리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순수 의식
의식 없이는 형태를 경험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형태는 순간적이며 한계가 있는 반면, 의식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무한하다. 의식이란 존재의 한 양상으로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기 한계를 지니고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인간이란 존재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을 물질적인 육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제한하기 쉽다.
물질적인 육체의 존재 → 감각이 보고해 옴 → 마음이 육체를 경험 의식의 내용만을 본다면 자아를 그 만큼 한정하는 것이 되고, 자아를 의식 자체와 동일시할 때에야 우리는 깨달은 사람이 된다.
순수 의식의 경험이 갖는 특성의 하나는 시간 관념의 상실이다. 의식은 모든 형태나 시간을 초월하여, 어느 것에나 똑같이 나타날 수 있으며, 있음, 존재, 스스로 존재하는 나, 부분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로 표현된다. 생각이 자유로운 상태에서도 이미 알고, 완전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며, 무엇을 필요로 하거나 원치 않으며, 자아가 경험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끌개 패턴에 동승하는 것이다. 그 열쇠는 의지이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선택의 행위이다. 혼돈 이론에서 보여주는 초기 조건에의 민감성은 영적 진보를 위한 과학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개인의 앎의 향상은 기꺼이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자발성의 지속이야말로 낡은 끌개장을 떠나 새로운 장으로 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자유 의지, 선택과 진화의 과정은 교차점을 이루고 결국 변화를 이끈다.
어떤 성인들은 자신이 성취한 경지는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의 은총, 밖에서 오는 커다란 힘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낮은 수준의 사람이 지신을 높은 수준의 영향 하에 놓을 때 나타나는 삼투현상이다. 이들에게는 늘 뚜렷한 계기가 있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기도와 명상이 높은 수준의 비약에 발판이 된다.
지구의 의식 수준
지구상 인구의 15%가 분기점인 200 이상의 의식 수준에 속하지만 15%의 집단적인 힘은 전 인구 85%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상쇄시킨다. 현재 지구에는 700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12명 존재한다.
700의 한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7천만 명을 상쇄한다.
600의 한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천만 명을 상쇄한다.
500의 한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75만 명을 상쇄한다.
400의 한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40만 명을 상쇄한다.
300의 한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9만 명을 상쇄한다.
하루에 몇 번씩 일어나는 사랑스러운 생각은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사랑 : 10-350만 두려움 : 10-7억5천만 마이크로와트
앞으로 나아 갈 길
개인의 작은 향상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전 인류의 의식 수준은 몇 세기 동안 190에 머물렀으나 1980년대 중반에 갑자기 204의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이제 위로 전진할 수 있는 발판 위에 서게 되었다.
우리는 200 이하의 정치조직, 공공기관, 공무원을 거부할 수 있다. 사회 문제 해결에 심각한 위험은 내면을 비밀스럽게 정복하는,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억지의 힘이다. 부정적인 끌개장들은 대중 의식에 편중하여 다채로운 수식어와 상징 조작으로 겉만 요란하게 꾸미게 마련이다. 인기 있는 사이비 철학은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영적인 통찰력과 종교성을 내세우는 문헌들도 보이지 않게 파괴를 불러 온다.
이러한 부정적 요인을 무서워하거나 싸우려 하지 말고 단지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어두움은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고 분별의 빛을 비춤으로써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에 겸손하게 자신을 맡길 때 발전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우리는 속기 쉽고, 감각에 의해 쉽게 유혹되며, 육체적 지적인 매혹의 환상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원적인 세상에서 파괴적인 것을 즉시 알아내어 아직 모르는 마음에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의식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지혜란 궁극적으로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을 피하는 과정이다.
과학적인 관점에서도 구원은 가능한 일이다. 구원이란 사랑의 생각이 부정의 생각보다 훨씬 힘이 크다는 사실에 보장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 속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에고와 동일시되는 마음은 한계를 지니고 있어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에고를 초월한 마음의 패러독스를 넘어서야 만이 존재는 마음의 무한한 절대성 속에서 스스로를 빛나는 자리에 세울 수 있다. 그럴 때 모든 말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또한 우리 모두의 눈멀음에 대한 자비심이 우러나와야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인류는 이제 비로소 자신들의 앎과 행동에 훨씬 진지해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집단적인 깨달음의 진화를 꾀할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
저자가 겪은 ‘내 영혼의 여정’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나 자신이나 에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무한한 힘을 가진 무한한 존재만이 있었다. 세상은 이 무한한 하나의 밝음으로 비치기 시작했고, 하나는 만물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완전함 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다.
이러한 고요함은 9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자신의 의지를 갖지 못했다. 내 육체는 무한하고 강력하고 끝없이 부드러운 존재의 의지에 완전히 통솔되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모든 진실은 자명했고, 어떠한 개념화도 불필요했다. 신경계는 극도로 피로해졌다. 순환에 필요한 허용량 이상의 에너지가 몰려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걱정과 두려움, 세속적인 동기들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완전했으므로 아무 것도 더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명성도, 성공도, 돈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개업을 다시 하고 환자를 치료하고, TV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책을 썼다. 나의 신경조직의 병변은 차츰 회복되었고,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 달콤하고 유쾌한 에너지의 줄이 척추에서 뇌로 흐르기 시작했고, 강렬한 열락의 세계에 나를 맡기곤 했다. 삶의 모든 것들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일어났고, 모든 것이 다 기적이었다. 나 자신이나 내 생각보다 위대한 그 ‘나’(위대하신 분의 현존)가 모든 일을 결정했다.
나는 부처, 후앙 포, 라마나 마하리시, 니사가다타 마하리지 등의 영적인 가르침을 읽기 시작했고, 이런 경험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바가바드 기타, 스리 라마 크리슈나, 크리스찬 성인들이 묘사한 영적인 엑스터시 상태를 경험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이 광채를 띠고 있었고, 절묘하게 아름다웠다. 살아 있는 만물이 고요함과 찬란함 속에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내적인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고 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침과 저녁에 하던 한 시간의 명상을 그만 두었다. 명상을 통해 오는 기쁨이 너무나 커서 일상생활이 어려워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황홀감을 떠나 세속으로 돌아오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만물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완전함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추악하다고 보는 것 속에서도 나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이러한 영적인 사랑은 내 모든 지각을 채웠다. 여기와 저기, 그때와 지금, 너와 나라는 모든 경계선이 사라졌다.
여러 해 동안 내면의 침묵에 잠겨 있었고 위대한 그분의 힘은 커져 갔다. 개인적인 생활이 없어지고 그 분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분이 내뿜는 오라(aura) 속에서 기이한 평화를 느끼곤 했다. 그들은 나에게 해답을 구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참나로부터 해답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의 눈 속에 나의 참나가 비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어떻게 그들의 육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놀라왔다.
여러 해 동안 고통 받았던 지병들이 사라졌다. 시력은 저절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끔씩 나는 축복의 에너지,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가 내 가슴에서 방사되는 것을 느꼈다. 어떤 때는 떨어져 보여야 할 물체와 사람들이 하나로 융합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절대의 침묵 속에서 나는 아무런 사건들도, 사물들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고통은 나라는 에고가 존재한다는 환상에서 온다. 자신이 곧 우주이고, 완전한 존재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사실은 모두 하나이며, 끝이 없는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에는 극도로 절망적인 환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불구의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나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정수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내면의 평화를 느끼게 됨에 따라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위대한 그분의 자비심이 치유를 한 것이다.
나는 세상을 떠나 시골에서 은둔하기 시작했고, 7년 동안 명상과 연구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영적 수련을 그만 두고 다시 연구와 저작 활동을 하기로 했다. 세상과 사귀기로 하고 사회적 관심사를 알게 되었다. 나는 평범한 존재 자체가 곧 신성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이유에서 한껏 평범해지기로 작정했다. 일상의 삶 속에서 관심과 친절을 갖고 사는 것이다. 나머지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드러난다. 다시 나는 위대한 그분의 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분을 조금 더 가까이 느끼도록 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위대한 존재는 침묵 속에서 평화를 실어 나른다. 그분은 온화하지만 바위와 같다. 그분과 함께 있으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영적인 기쁨은 설명할 길 없는 고요한 황홀 상태에서 나타난다. 시간이 멈추고, 근심 걱정, 후회, 고통, 어떠한 기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쁨의 원천은 끝이 없으며, 언제 어디에나 있다. 시작도 끝도 없고, 더 이상 상실감도 없고, 슬픔이나 욕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흠이 없다.
시간이 정지할 때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육체와 마음의 분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음속에서 침묵이 점점 커져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사라지게 되면 순수 의식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 빛을 비추어 줄 것이다. 온 우주와 시간을 초월한다.
이런 의식 수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단순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아무 예외 없이 누구라도 무엇이든지 용서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 모든 것에 자비심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이나 생각들에 대해서도 자비로워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어느 순간에나 자신의 의지를 항복시켜 치미는 욕망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의 생각, 느낌, 욕망, 행위를 그분에게 바쳐야 한다. 처음에는 문장과 구절을, 그 다음에는 생각과 관념을 바친다. 자신의 생각을 소유한다면 결코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없다.
나는 생각으로 무르익기 이전의 에너지까지도 그분께 맡길 수 있었다.
일상적인 활동을 해 나가면서도 나는 언제나 정신을 집중하여 초점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명상하는 동안에도 산만해지는 순간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지만 점차 습관이 되어 갔고, 나중에는 힘 들이지 않고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과정은 로켓이 지구를 떠나는 과정과 흡사하다. 처음에는 막대한 힘이 필요하지만 일단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나면 스스로의 타성에 의해 움직인다.
홀연히, 아무런 예고도 없이, 깨어 있음으로 이동이 이루어진다.
자아의 죽음과 함께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황홀한 새로운 경지가 열렸다. 에고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순간에는 공포가 다가왔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허무 자체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왔지만 에고가 죽은 그 자리에는 참나가 들어섰다. 모든 것이 오롯이 드러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참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 하나는 온전히 모든 것이었고, 완전했다. 모든 신분을 뛰어넘어, 모든 성을 뛰어넘어, 심지어는 인간성 자체를 뛰어넘어, 하나는 이제 더 이상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영적인 깨달음의 어느 경지에 이르면 신체의 병은 저절로 없어지거나 가벼워진다. 육체는 예정된 과정을 밟은 후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육체는 나라기보다는 방 안의 가구 같은 또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황홀경이 절대적으로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추락은 우리의 여정을 힘겹게 하며, 상황을 환원시키는 데는 커다란 의지가 필요하다. 황홀경의 영광을 포기하고 싶지만 무아경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어 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예기치 못했던 두려움,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외로움이 일어난다. 나는 비존재의 두려움이 엄청나서 번번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번민에 사로잡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새우고 나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뚜렷이 느껴졌다. 이것은 극도의 노력을 아끼지 말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존재에 대한 욕구마저 항복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전부와 무를,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하게 된다. 이때가 가장 어려운 고비이다.
이 정점에서 존재에 대한 신기루를 초월하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으며,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다. 그러나 자아의 마지막 대전환인 이 지점에서, 홀로 남아 있는 존재와 비존재의 이원성을 푸는 것은, 우주적 신성에 모든 것을 던짐으로써만이 가능하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개인적 의식도, 선택도 남아 있지 않다.
그 마지막 단계는, 그 때, 오직 신에 의해서만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