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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2)
엡 4:1-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설 교 >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엡 5:8-16 / 김진홍 목사
1. 사람은 어디 조금 아프면 큰 병을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른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좋은데 겁이 나서 병원에는 가지 않고 걱정만 태산같이 쌓는다는 말씀입니다. 저도 2009년쯤 치질수술을 받았습니다. 제가 치질이 생긴 것이 아마 고등학교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말도 하지 못하는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해서 몇 십 년을 그냥 달고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고생을 하면서 수술을 하고나니 얼마나 좋은지 화장실 갈 때마다 이 좋은 걸 하루라도 빨리 할걸 하면서 용기를 내어 수술을 받은 제 자신을 칭찬합니다.
그런데 제가 왜 수십 년 동안 치질을 달고 살았는가 하면 수술 받으러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치질이 아니고 대장암이라고 할까봐 그게 겁나서 그냥 달고 산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요. 저처럼 조금 고생하면 아주 오랜 시간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걸 지레 겁먹고 하지 않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제가 그래서 위대한 깨달음을 하나 얻었습니다. 건강검진을 왜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깨달은 겁니다. 왜 건강검진을 받아야 하느냐 하면,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 검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건강검진에서 그런 큰 질병의 위험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은, 머리가 조금 아파도 ‘머리가 아프구나. 잠이 부족한가? 신경을 많이 썼나?’하는 생각만 하지, ‘뇌졸중 증상인가?’ 하는 걱정까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구역질이 나도 ‘간암인가?’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다. 검진을 통해 큰 병이 없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작은 통증이 있을 때 침소봉대해서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필요한 것이 ‘확신’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신앙생활에서 이 ‘확신’이 없으면 장식용 신앙이 될 위험이 아주 높습니다. 무능한 믿음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가 기우뚱 거리며 금방이라도 전복될 것 같아서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8,23ff 막4,35ff 눅8,22ff 등 세 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배가 침몰할까 두려워하다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8,26),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8,25)라는 책망성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긴 했지만 작아서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마태복음의 지적이고, 믿음이 없어서, 적어서 무서워하는 믿음이라는 거시 마가복음의 지적이며, 이럴 때 쓰라고 준 믿음을 어디에다 두고서 두려워하느냐는 것이 누가복음의 지적입니다. 즉 제자들의 믿음은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는 믿음, 무능한 믿음, 무용지물인 믿음, 생각에만 머무르고 현실문제에 대하여는 아무 효력도 없는 믿음이라는 책망을 하셨던 것입니다.
힘 있는 믿음, 효능이 있는 믿음, 써먹을 수 있는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확신’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우릴 용광로에 던져넣으세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건져내실 것을 믿습니다. 혹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지 당신들이 힘이 강하여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수준과 같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읽은 성경에서 말씀하십니다. 8-11절입니다. “(8)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여러분, 성도는 어둠과는 아무 상관없는 빛의 자녀입니다. 어떻게요? 앞에 있는 2절에 그랬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모든 징벌을 다 받으셨기 땜분에 그분을 구주로 영접한 나는 전혀 죄에 대한 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때로 넘어지기도 하고 미혹을 받을 때도 있지만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아무도 예수님 손에서 우릴 빼앗아 갈 수 없으니, 성도는 이 확신으로 인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나 풍랑이는 바다에서나, 적진을 달릴 때, 험산준령을 넘을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셨음을 확신하십시오. 이제 성도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과만 관계가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확인하여 확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따라 하시겠습니다. “이 확신은 갱신되어야 합니다. 확신은 계속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51,10ff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뭐라 하였습니까? 11절,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12-13절,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을 은밀히 행하는 것을 빛으로 드러내라 14절, 잠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들어주소서!” 성도들은 두 주먹 불끈 쥐고 결단을 해야 합니다. “나는 잠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리라” “나는 신선한 물길을 따르는 물고기처럼 빛, 빛을 따라 달려가리라”
과거에는 확신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잠이 들어서 비몽사몽간에 있는 것처럼 확신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분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 다시 갱신하시고 거침없이 빛을 따라 생명과 복의 물줄기를 따라 일어나시고 새 출발을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빛 속에 들어오십시오. 그래서 영적인 수면에 빠져있던 동안에 나의 영혼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어둠의 덤불들을 걷어내시고 벌떡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는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성공한 것이 아니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사람이 성공했습니다. 믿음이 원체 좋은 사람이란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갱신한 사람, 믿음을 회복한 사람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잠24,16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다윗은 한참 잘 나가던 중에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잘못을 감추기 위해 그 충성스러운 부하를 사지로 몰아 죽게 하는 끔찍한 죄를 저지릅니다. 그 죄가 선지자 나단에 의해 드러났을 때 다윗은 눈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처분을 기다립니다. 눈물로 베개를 적시고 요를 적시며 나중에는 침상을 통째로 눈물로 적실만큼 울부짖으며 영성회복을 구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회복되기를 구합니다. 힘들었지만 그는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회복합니다. 더욱 겸손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으로 일생을 살아 영원히 ‘성군’으로 남게 됩니다.
여러분, 당신은 십자가의 피로 죄씻음을 받은 거룩한 하늘백성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다운되어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을 갱신하십시오. 회복하십시오.
3. 마지막 14-16절 말씀입니다.
14절 말씀은, 주님은 일어나는 자에게 회복할 수 있는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15절 말씀은,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란 잠1,7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니, 간단하게 말하면 ‘생각할 때마다 믿음의 편으로 결론을 내리라는 뜻입니다. 16절은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 다른 말로는 ’기회를 붙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저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함께 잠든 자여, 깨어 일어나기만 하여라 너를 인도할 그리스도의 빛이 러를 비추리라고 하십니다. 늘 누가 뭐라 하고 어떤 그럴듯한 그림이 눈앞에 보일지라도 언제나 따라나서는 것은 신앙적인 편을 선택하여야 한다. 거짓을 참으로 포장한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주의를 줍니다.
오늘 마침 성찬을 받는 주일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잠들어 있다 일어나는 마음으로 날 구원하시려고 주신 주님의 떡과 잔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자신의 몸을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들인 몸임을 깨달아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변화된 신앙모습이 빛이 되어 많은 이웃들을 깨우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축복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엡 5:8~14 / 김광일 목사
‘하버드 천재들, 하나님을 만나다’라는 책은 세계 최고 석학들의 신앙 이야기를 켈리 먼로 컬버그(Kelly Monroe Kullberg)가 엮은 이야기입니다. 하버드 출신 엘리트 36명을 소개하는 가운데 ‘약물중독 교수에서 그리스도인으로’의 주인공 글렌 로리(Glenn Lowry) 교수의 고백입니다. “나는 하버드대 종신 교수로 전문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의미가 없고 우울하며 기쁨이 없었습니다. 어떤 성공도 나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인생은 높은 점수를 받고 돈을 벌기 위한 끝없는 경쟁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마약과 술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서 몸과 마음은 점차 파괴되어 갔습니다. 그때 친구가 예수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예수가 술과 마약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이라며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그 후 나는 약물남용에 대한 치료프로그램에 참가했습니다. 그때 만난 교인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듣고 잘못된 과거를 생각하며 두 시간 동안이나 울었습니다. 그 후 성경 공부를 시작하고 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의 궤도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성경 공부를 하면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상상했던 것보다 영적인 기쁨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인이 된 후 가족과의 관계와 친지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결혼생활도 회복되었습니다. 죽어 있던 것들이 살아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나의 인생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고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기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에 대한 기대가 생겼습니다. 나는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의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바울은 빛이란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는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여기의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원어로 ‘호스 테크나 포토스 페리파테이테’인데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명령형을 사용하였는데 계속하여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빛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빛의 자녀들처럼 어떻게 행하라’고 교훈합니까?
첫째로 주를 기쁘시게 하라
40대 중반의 남자가 여덟 번이나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 보조식품을 제조하는 회사를 세웠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통해 깨달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업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업장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매출액의 상당 부분을 선교비로 드렸습니다. 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1994년 자본금 1억으로 시작된 회사는 10년 만에 전국에 7백 여개의 지사를 두고, 연 매출이 3천 억이 넘었습니다. 천 개가 넘는 지사를 둔 큰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알로에 마임의 회장 유영섭(柳英燮)장로입니다. 사업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빛의 자녀처럼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여기의 ‘주를 기쁘시게’는 원어로 ‘유아레스톤 토 퀴리오’인데 '빛의 자녀들은 은혜로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먼저 생각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시험하여 보라’는 것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찾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빛된 자녀들의 기준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두어야 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기준이요 방식이고 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빛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어둠에 참여하지 말라
시골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으나 재능을 높이 산 이웃의 도움으로 도시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실력이 뛰어난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좋은 어머니는 하나님을 잘 믿는 아들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설득하였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행위라고 생각하고 당시 지성인들이 심취한 철학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리고 돈과 명예와 쾌락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믿고 이것들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18세가 되었을 때는 여자와 동거를 하여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름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지어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젊은이는 뛰어난 웅변술과 수사학적인 솜씨로 명예와 돈을 많이 얻을 수 있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부족을 무엇으로 채울까 고민하던 중에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32세 되던 해였습니다. 정원에 앉아 있는데, 담 너머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펼쳐 읽으라, 펼쳐 읽으라.’ 그는 순간적으로 옆에 있던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로마서 13장 11절과 12절이 보였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그는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난 찰나, 확실한 것이 마음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나를 가두었던 어둠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영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삶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여기의 ‘어둠의 일’은 원어로 ‘에르고이스 스코투스’인데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죄악 가운데 거하던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로 타락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까봐 빛을 거부하고 어둠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빛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라고 교훈합니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하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어둠 가운데 살았으나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는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어둠을 책망하는 편에 서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꾀가 좋아 보여도 따라 하지 말고, 그들이 가는 길에 서지도 말고, 그들이 앉는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그들의 생각이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가 부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허무한 것임을 알고 결코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둠에 참여하지 않으려면 핍박과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십자가 지는 각오로 주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어둠을 물리치는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잠에서 깨어 일어나라
미국의 방송 설교가 짐 베이커(Jim Baker)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횡령죄로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는 잘못되었다’라는 책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방송을 통해 유명한 목사가 되었고 3천 명의 직원을 두고 1년에 1억9천만 달러 예산으로 200개 채널의 텔레비전 방송국을 통하여 일할 때는 정말 바빴습니다. 하루에 16시간씩 일하다 보니 조용히 앉아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었고, 엎드려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아예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때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격하여 물리칠 수 있는 어떠한 무기도, 영력도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깊이 잠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체적인 것은 우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오직 깨어 있는 믿음만이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빛으로 교회를 비추는 영적 운동이었습니다. 청소할 때 문을 열고 햇빛을 비추어 더러운 것들을 드러내는 것처럼, 종교개혁을 통해 잠에 빠져 있던 교회를 깨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 일어나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의 ‘깨어서’는 원어로 ‘에게이레’인데 ‘즉시 일어나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죽은 것을 잠을 잔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영혼이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일어나는 것은 영적 죽음의 상태로부터 소생함을 가리킵니다. 빛의 자녀로 태어나는 거듭남을 뜻합니다.
말씀이 그 속에 있지 않으면 영혼은 잠자는 상태와 같습니다. 기도의 줄이 끊어지면 영혼은 죽은 것입니다. 찬송 소리가 사라졌다면 신앙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봉사와 섬김이 없다면 잠들어 있는 신앙입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무기력한 자리, 나태와 게으름의 자리, 죽음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빛을 발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지 3년된 사람에게 친구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교회를 다닌지 3년이나 되었으니 예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겠군. 예수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아는가?” “모르겠네” “예수는 몇 살 때 죽었지?” “그것도 모르겠군” “며칠 만에 살아나셨지?” “그것 역시 모르겠군” “아니, 기독교로 개종했다면서 아는 것이 별로 없군. 그래서야 어디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나?” “자네 말이 맞아. 나도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무척 부끄럽다네. 그렇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지. 자네가 알다시피 나는 지독한 술주정뱅이가 아니었는가? 가정은 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아내와 아이들은 저녁에 내가 집에 돌아오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었지. 하지만 나는 예수를 믿고 부터 술을 끊었다네. 모든 빚도 청산했고, 더 이상 못된 짓도 안 하네. 이제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저녁에 일찍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네. 전에는 가족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웃음이 가득하다네.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 우리 가족은 가정예배를 드리지. 주일이면 온 가족이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린다네. 전에는 어둠에 살았었는데 이제는 예수 안에서 빛으로 살고 있다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로 행할 때 어두운 구석들이 밝아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빛의 자녀들은 세상과 벗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기 바랍니다. 어둠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 일어나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빛의 자녀
엡 5:8-9 / 손영만 목사
이번 주부터 <에베소서 5장>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것 이상으로 더 시급한 점은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v.8)고 성도들을 향해 촉구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먼저 5장을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5:1)하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의 백성 이스라엘민족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2)고 명하셨습니다. ‘거룩’하기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이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하는 그 중심되는 이유에는 빛 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을 좇아 우리도 빛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빛된 삶’은 ‘빛이신 하나님’ (요일.1:5)과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 (요.1:4-5)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만큼 더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무엇이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인지?” (What means to live as children of light?)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정체성을 자각하라’ (It means to realize our identities)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는데 (엡.2: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의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고후.4:6). 이 빛을 통해 그분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둘째, ‘빛을 발하라’ (It means to shine our lights)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크리스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4) 말씀하시고 나서,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고 명하십니다. 빛을 비추라는 것입니다.
셋째, ‘빛의 열매를 맺으라’ (It means to bear our fruits)는 것입니다: 사도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v.9)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본문 앞에 있는 어둠의 열매들, 즉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5:3)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생명과 진리의 빛을 비추며, 어둠을 몰아내는 하나님의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이번 주부터 <에베소서 5장>을 시작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전체 내용에서 볼 때 오늘 말씀은 이제 결론부에 접어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오늘 말씀은 이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이 놓치지 않고 강조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놀라운 신분’을 밝히며,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살아라’고 성도를 향해 도전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는 이제 후반부에 이르러서 더욱 구체적으로 성도들의 삶 가운데 복음의 진리가 적용되고 행해지기를 격려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이 에베소서 강해말씀을 준비하면서 더욱 더 분명하게 깨닫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 크리스챤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심각한 문제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어떤 구체적인 악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심각한 죄에 빠지는 것 이상으로 중대한 영적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진정한 스스로에 대한 ‘영적 자각’ (spiritual awareness) 보다 더 본질적이고 시급한 것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것, 그럼으로 그 자녀가 가지게 되는 권세와 특권을 자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여러분은 오늘 사도의 격려와 같이 하나님의 ‘빛된 자녀’로 살아가길 다짐하고 소망하십니까?
사도는 <5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v.1-2a)라고. 그런데 여러분이 기억하시는데로 사도는 <4장>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4:30a)고 도전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4:30b)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그 사실에 그치지 않고,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마지막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을 보증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이제 우리 성도 안에 그의 거룩한 거처를 삼으셔서 언제나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동행하셔서 성도와 함께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왜 사도가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 (4:1)고 4장을 시작하고 나서,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결론적으로 4장을 마무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만약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너희와 동행하시고 마지막 그리스도의 날까지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성령님을 결코 근심케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는 성도들에게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도전하고 나서 5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앞서 본데로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 (v.1a)라고 바울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앞선 말씀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적극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가 이어서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v.1b)고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본받는다’라는 말은 실로 엄청난 말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2)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실 뿐 아니라, 그를 믿는 그의 자녀들에게도 거룩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어떤 인간도,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은 완전한 거룩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믿는 그의 자녀에게 그분을 본받아 ‘거룩하라’고 분명히 요구하신다는 점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우리 인간은 연약하고 실수할 수 있으니, 감히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지고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과 연약을 잘 아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심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서 함께 큐티로 묵상하는 <레위기 말씀>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구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규례와 정하고 부정한 기준을 하나님께서 가르쳐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레위기서의 말씀을 요약하여 한 말씀을 고르라면 바로 조금 전 말씀드린 <레위기 19:2>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들을 이제 바로의 손에서 이끌어 내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뿐 아니라, 그곳에서 가나안 백성과 주위의 이방민족과 같이 헛된 우상숭배를 하며 죄악된 삶을 살지 않고, ‘거룩하고 순결한 자기 백성이 되도록’ 먼저 분명히 그 거룩의 삶을 가르치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시면서 출애굽기에서 이렇게 분명히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5-6)고 말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백성, 그의 자녀가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는 거룩하라’고 명령임과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축복으로 주신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너희는 거룩하라’는 말씀을 신약성경의 개념 (=버전)으로 표현했을 때 가장 적절한 말씀의 하나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는 오늘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빛’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빛은 하나님 자신을 특징짓는 단어로 쓰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고. 그렇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성경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빛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하나님의 ‘진리, 거룩하심, 순결, 그리고 지혜로우심’을 뜻합니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4-5)고 사도 요한은 또한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자신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선하게 다스려 나가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조금도 어둠이 없는 빛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살리고자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추는 빛’ (요. 1:9)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사도가 우리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한마디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빛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 삼으셨음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리고 그분의 독생하신 아들로서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그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기 원한다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사도 바울은 지금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빛과 우리 성도와의 관계를 정리해 본다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 크리스챤은 빛 되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의 자녀일 뿐 아니라, 이제 우리 자신이 빛이 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 속에 거하시는 빛 되신 성삼위 하나님으로 인함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빛 되신 하나님의 자녀일 뿐 아니라, 우리 또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가 에베소서를 통해 계속해서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우리 믿음의 성도를 깨우쳐서 어떻게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고자 하는지를 우리는 결론적으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일까요?” (What means to live as children of light?) 그것은
첫째, ‘정체성을 자각하라’ (It means to realize our identities)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예수님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전과 후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분명치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변화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한 시기가 오래 전이라는 점이 아니라, 영적 차이점을 여전히 잘 인식하지 못해서 입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과거의 삶이 어둠이라면, 현재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2장을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1)고 시작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세상 풍조를 따랐고,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을 따랐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2:2-3). 이것이 바로 어둠에 속한 과거의 삶인 것입니다. 바로 육체로는 무할례당이라 불렸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자가 어둠에 속한 자입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4:18) 자들이 어둠에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러분이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음으로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깨닫고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허락하신 진리와 생명의 빛인 것입니다.
둘째, ‘빛을 발하라’ (It means to shine our lights)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크리스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4)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빛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인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등불이 길을 비추지 않고, 말아래나 침상 밑으로 숨어 들어간 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말 아래에나 침상 아래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 (막. 4:21)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도전하십니다. 등불이 존재하는 이유는 주위를 밝게 비추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빛된 성도들이 그 빛을 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빛을 드러내기를 귀찮아 하고, 두려워하고,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다는 사실 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빛을 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빛,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어두운 세상을 향해 찬란하게 비추고 있습니까?
셋째, ‘빛의 열매를 맺으라’ (It means to bear our fruits)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를 향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도전하고 나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v.9)고 선언합니다. 앞서도 살펴본 것처럼, 사도는 빛과 어둠을 계속해서 대조적으로 비교합니다. 어둠에서 오는 열매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5:3)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우리 모두는 이전에 모두 이런 어둠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가시나무에서 가시를 맺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안에서 우리는 빛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제는 ‘빛의 열매를 맺자’는 것이 사도의 결론인 것입니다. 내가 빛의 자녀임을 확신한다면, 빛을 발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요 미션임을 이해한다면 그 빛을 발하며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는 결국 ‘성령의 열매’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비추셔서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800여년전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절망과 어두움 가운데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1)고. 세상은 여전히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울지라도 (사. 60:2), 하나님의 빛된 자녀는 이제 일어나 그 찬란한 빛을 발하여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두 발을 딛고 일어서 진리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 여러분과 저의 미션이자 진정한 축복임을 믿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생명과 진리의 빛을 비추며, 어둠을 몰아내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
엡 5:8-14 / 성흥모 목사
오늘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떻게 살아가야 진정 행복한 사람으로 사는 것인지, 고민될 때가 많습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성공이나 실패는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슨 일들이 닥쳐왔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닥쳐오는 일들을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실패나 역경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패배자로 인정하면서 비관적인 해석을 내릴 때에 그에게는 결코 새로운 기회나 성공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해, 나는 실패할 것이야, 나는 예전에도 그러하였고, 앞으로도 일어서지 못할 것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영영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우리 입으로 말한 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인 칼 메닝거(Karl Menninger)는 이런 말을 합니다.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Attitude is more important than facts) 인간의 행복과 성공은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와 사물을 보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사람,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사람, 매사를 희망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으며, 절망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불리한 조건으로 태어났지만,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지옥 같은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발 한 켤레의 사랑]이라는 감동 깊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고 은퇴하신 침례교회의 윤영준 목사님이 편집하신 책입니다. 그 책에 '전화위복의 기회'라는 글이 있습니다. 청년 월터(Judd Walter)는 얼굴의 여드름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하는 과정에서 엑스레이를 너무 과다하게 사용하는 실수로 얼굴이 볼품 없이 나빠졌습니다. 월터는 심한 우울증과 함께 열등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흉한 얼굴의 이 청년이 신앙과 의지를 발동하여 새롭게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나의 최선을 다하여 일생을 살리라" 그는 다짐하였습니다. 그는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최선으로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중국에 가서 의료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고, 미국으로 다시 들어가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데, 유례 없이 10번이나 당선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일생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다보니 일생을 참으로 의미 있게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드 월터라는 사람처럼 외모에 신경 쓰지 말고,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헌신하며, 희생하며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잘 살려고 하실 것입니까? 잘 죽으시려고 하실 것입니까? 우리들이 어떻게 살며,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은 그가 결정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좀 야박한 말씀 같지만, 먹는 즐거움에 빠져 지내지 말기 바랍니다. 청년의 때라고 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후회막급한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임금이 제국을 건설하고 거대한 궁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런데 궁전의 많은 방들 중에 하나에는 언제나 임금이 직접 잠근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임금은 하루에 꼭 한번씩 그 방에 들어가서 얼마동안 시간을 보내고 나왔습니다. 임금 이외는 어느 누구도 그 방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 방에는 왜 들어가는 것인가? 모든 신하들과 가족들이 궁금해하였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보물을 숨겨놓고 그 방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나오는 것인가? 별의별 추측을 다하였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궁금해하던 몸종 하나가 잠겨진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는 금은보화가 하나도 없었고, 값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목동이 입는 낡은 옷 한 벌이 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옷은 임금이 왕좌에 오르기 전에 어렸을 때에 입던 낡은 옷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이름 없는 목동이었으며, 나는 왕이 되기 전에 한낮 목동에 불과하였다. 나 한 사람의 부귀영화를 꿈꾸지 말고 양 떼를 보살피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이 나라를 잘 이끌어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누구냐 하는 자기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정립하여야겠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케플러라는 사람은 "기쁨은 인생의 요소이며, 인생의 욕구이며 인생의 힘이며, 인생의 가치이다. 인간은 누구나 기쁨에 대한 욕구를 갖고 기쁨을 요구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기쁨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진정한 기쁨이란 다른 말로 하면 감격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감격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감격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격이 있으니 하는 것이요, 기쁨과 보람을 얻을 수 있으니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밥 아니 먹어도 배부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보람을 먹은 것이요, 감격이 그를 사로잡았고, 기쁨이 넘치기 때문에 밥을 먹지 않았어도 배부를 수 있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아본 사람은 아니지만 설교하는 사람이기에 깊은 명상의 시간을 종종 갖게 됩니다. 그래야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하루를 즐거운 마음으로 살며, 감사하면서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살아갈 때에 그것이 곧 보람이요, 의미 있는 생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데 어제의 내가 어제와 같은 삶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는 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내가 살아야 합니다. 행3:19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전 성경에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 새롭게 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심리학책을 보니 어른들은 하루에 열 번도 웃지 않는다고 하며, 어린이들은 보통 하루에 200번 이상 웃는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기도원에 가보니 중한 환자들만 고치기 위하여 모여드는데, 곳곳에 "웃으면 산다"고 쓴 표어가 걸려 있었습니다. 중병으로 인하여 하도 인상 쓰다고 죽으니 웃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오늘 제목을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10절 말씀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 아주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있고, 또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수 백 구절이 있는데 일일이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중에 제가 은혜 받은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이 돌아와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말씀과 신약에 주된 사상입니다.
겔18:23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은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이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한 사람도 더 돌아와서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겔18:32에 보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죽을 자라고 해서 어서 죽으라고 하지 않고, 그런 사람이라도 돌아와서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 하나가 돌아와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는 비유를 통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눅15:7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눅15장에서 계속하여 잃은 드라크마 은돈을 찾는 여인의 비유를 마치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고 하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죄인 한 사람은 바로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요,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진정한 기쁨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들,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하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생활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으로 하나님에게 기쁨도 되고, 슬픔도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147:10-11입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이 아주 많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직을 기뻐하시고, 올바른 간구를 기뻐하시고, 공평한 저울과 추를 기뻐하시고,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산 제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에배소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주님이 기뻐하시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1. 빛의 자녀로 살자. (8-9)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빛으로 표현하고, 이 세상에 속하여 멸망 받을 것은 어두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살아가면서 빛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이 빛을 지으셨기에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참된 빛으로 오셨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라고 했으며, 요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된 빛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빛이 가진 사람이요,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은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어두움이란 빛이 들어와야 물러가지요, 빛이 없는 한 어두움은 그 어떤 것으로도 물러가지 아니합니다. 빛으로 어둠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절)고 하셨습니다. 빛은 식물로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빛은 곧 열매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이라도 이 빛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데, 모든 식물은 빛이 비취므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빛 가운데 살아가면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빛으로 살아야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착함의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여러분, 착하게 사세요. 이 착하다는 말은 악하지 않고 선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악한 생각을 버리고, 선한 생각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가든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든지 선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 하시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라고 하면 솔선해야 하고, 헌신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이들이 뒷짐지고 피동적으로 따라가고, 자기 몫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을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그 빛을 받아 빛을 반사하고 빛을 발하여야 하는데 빛이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빛된 삶을 살아야 빛이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모나고, 유별나고, 말만 앞세우고, 행실이라고는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악하다고 하면 그것이 어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까?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 빛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촛불은 자기를 태우는 아픔이 있을 때 빛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친구 하나가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만 사용하는 자물쇠로 잠겨 있는 책상의 깊은 서랍을 열어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음란한 책들과 나체사진들이 들어 있더라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겉 다르고 속 다른 분이라고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긴 이 소년이 마침 혼자 집에 있게 되어 아버지의 깊은 서랍을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버지의 일기장이 들어 있는데 읽어보니 기도문으로 쓰신 일기장이었습니다. 소년은 아버지의 기도 일기장을 펴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매일 같이 자기의 이름,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일 같이 기도의 일기장을 쓰면서 아들의 이름을 빼놓지 않고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한 소년은 수천 볼트의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을 받고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힘들지만 빛의 자녀로 살아가면 우리 때문에 함께 은혜 안에 들어오는 이들이 생기고, 빛의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지금은 좀 여유 있고, 쉽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하여 악한 방법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선하지 않은 방법으로 처신하였는데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으로 의식이 굳어지고 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의로움의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라는 것은 의롭게 되는 것과 함께 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의롭게 되는 것 따로 있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어야 의롭게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우리 주님의 의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므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매사에 있어 옳고 바르고 정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면 의롭게 사는 것이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되살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진실의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진실이라고 하였지만 진리라는 말입니다. 도덕적인 진리, 구원을 주는 진리, 행함이 있는 진리, 진실이란 살아있는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을 진실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1:3-4)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믿고 진리를 간직하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절망과 의심의 그늘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진리 안에서 살지 않으니 모든 일에서 짜증스럽고, 내가 나 자신을 봐줄 수 없는 증오에 가득 찬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 명명백백하게 살아가시면 밝은 대낮과 같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답게 살기 바랍니까?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진리 안에서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힘들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면 진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2.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11-12)
11절-12절입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사회에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기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데,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할 때가 생깁니다. 어쩌면 좋을 것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어둠의 일은 매력 있어 보이고, 무언가 흥미진진하고, 그 속에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들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열매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 매력 있어 보이는 것들은 대개 어둠에 속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혼을 죽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은밀하게 행하려는 일들을 끊어야 합니다. 공개적인 시간관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하는 일들을 드러내놓고 일해야 합니다. 혼자서 은밀하게 처리하는 것은 잘못되기 쉽습니다.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여도 그렇습니다.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대낮같이 드러나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지 말고, 두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13-14)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발광체는 아니요, 반사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방송 설교가였던 짐 베이커(Jim Baker)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다가 타락하여 철창 신세까지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는 잘못되었다]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해 유명한 목사가 되고 3천명의 직원을 두고 1년에 1억9천 달러라는 예산으로 200개 채널의 텔레비전 방송국을 통하여 일을 할 때에 정말 바빴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16시간 씩 일하다 보니 더 이상 조용히 앉아서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었고, 더 이상 엎드려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혹이 왔을 때 나는 그것을 반격하여 물리칠 수 있는 아무런 무기도, 영력도, 하늘의 도움도 없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력을 받아야 하고, 빛을 받아야 하고,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여야 빛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경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도 없이 승리할 것으로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우선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고, 연구하고, 찾아보아야 하지만, 우선 주님 그 분을 기뻐해야 합니다. 시편7:4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느헤미야8:10에는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다같이 따라 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요즈음 잘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예수님을 먼저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빛 되신 주님 안에 거하면서 빛을 받아 그 진리의 빛 아래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빛의 열매를 맺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자
엡 5:8-14 / 이수영 목사
새문안교회의 2000년의 교회표어는 "주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였습니다. 그리고 2001년의 표어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자"였습니다. 그 연속선상에서 2002년의 표어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자"로 정했습니다. 하나되고 새로워지는 일은 각각 1년씩이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되고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되고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계속하면서도, 이제 다른 한편으로는 어두운 밖을 향해 빛을 발하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안으로는 꾸준히 예배, 교육, 친교의 내실화를 꾀하면서, 밖으로는 선교와 봉사를 확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금년 교회표어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자"로 정한 것은 오늘 본문말씀 첫 절의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신 말씀에 응답하자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까? 그것은 본문 8절 말씀대로 우리가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빛의 자녀요 빛이기 때문에 본문 11절에서 말하는 대로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본문 9절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 10절이 말해줍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주님이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하고, 우리의 영이 아니라 우리의 육이 즐거울 일만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자들은 어둠의 자녀들입니다. 빛의 자녀들은 오로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고 또 분별할 줄 아는 이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2:2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동시에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은 단지 소극적으로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어둠의 일들을 폭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책망한다는 것은 폭로한다,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12절에서 말하는 어둠의 자녀들이 "은밀히 행하는 그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을 폭로하고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빛은 무지의 어두움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죽어가는 불쌍한 심령들에게 진리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빛은 죄와 불의의 어두움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죄와 불의는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악과 부정은 주로 어두운 곳에서 은밀히 이루어집니다. 그 어두운 곳에, 부패와 부조리의 구조악으로 그늘진 사회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죄가 죄로, 불의가 불의로 드러나도록 의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빛은 절망의 어두움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만 맡겨진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은 인간의 죄와 탐욕과 거짓이 너무나 강해서 선하고 의롭고 진실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악이 더 큰 악을 낳고, 불의가 더 많은 불의를 양산하며, 불행이 더 심한 불행을 빚어내는 세상에서 착하고 약한 사람들은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세상에 희망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은 미움의 어두움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심과 불신으로 가득찬 세상은 갈등과 반목과 미움과 싸움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회에서 사랑의 빛을 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3절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이 구절의 앞부분인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난다"는 것은 빛은 책망 받을 모든 것, 즉 모든 악과 불의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 구절의 뒷부분인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한 것은 사도 바울이 말을 너무 절약함으로써 그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어지긴 했으나 본래 빛이 아니고 어두움 가운데 있던 것이 빛을 받으면 드러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빛을 반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빛은 어두움 가운데 있던 것을 비춤으로써 그것이 또한 빛을 발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진리입니까? 사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복음에 무지했더라면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 없는 어두움의 존재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을 받음으로써 이제 우리가 비록 작지만 복음의 빛을 발할 수 있는 존재로 바뀐 것 아닙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우리가 이 진리의 빛, 의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을 잘 비추기만 하면 살만한 세상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꾸시는 것이며 우리는 그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빛이십니다. 우리는 그 빛을 받아 반사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하면 어두움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빛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빛의 반사체가 되어 어두운 세상을 비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자로서 거역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신 말씀도 바로 세상을 향한 우리의 이 사명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서 깨어 일어나 그리스도의 빛을 힘있게 비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부터 어둡고 잘 안 보이는 구석구석에도 선과 의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은밀히 행해지는 부끄러운 일들이 있다면 모조리 드러내고 추방하며, 나아가 이 세상을 향하여,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빛을 발하는 일에 온 교우들이 함께 힘쓰는 이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8-21 / 김명혁 목사
에베소서는 교회의 모습과 신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1장에서부터 4장 16절까지는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4장17절부터 6장까지는 신자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고 신자가 신자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새벽기도회 시간에 엡5:8-21절까지의 말씀을 여러분들과 함께 묵상하면서 저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엡5:8-21절까지의 말씀이 신자의 모습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성령 강림 주일을 맞이해서 엡5:8-21절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들을 일곱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들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그 존재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어두움의 존재에서 빛의 존재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 존재의 질이 바뀌어진 사람입니다. 그 존재에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인 변화와 영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어두움이던 존재가 빛이란 존재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장소에서 설던 존재가 빛과 생명의 장소로 그 현주소가 옮겨진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주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주 안에서 빛이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특징이 ‘주님 안에서’ 인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이 바로 ‘주님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주님 안에서 봉사하고,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살기도 하고, 주님 안에서 죽기도 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존재의 질이 변화되고 존재의 현주소가 바뀌어진 사람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그 행동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2). 여기서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인 동시에 행동의 종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의 모토로 ‘믿음만'을 내 세웠는데 그것은 좀 잘못된 주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믿음만의 종교가 아닙니다. 믿음의 종교인 동시에 행동의 종교입니다. 그 행동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산상 설교에서 주님 안에서 소금과 빛이 된 사람들이란 착한 행실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이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착함이란 이웃에게 좋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착함이란 이웃에게 누추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을 하지 않고 덕을 세우는 말과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는 것을 말하고, 이웃에게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며 사랑과 구제의 손길을 펴는 것을 말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4).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4:28). 그리스도인은 그 행동이 변화된 사람이고 선한 일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라.” 사람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로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면서 사는 못된 존재입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12:19). 이 말은 눅12장에 나오는 부자의 독백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소원이고 독백입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 이성택 목사님도 그런 욕망을 품고 살았다고 고백했고 지난 4월 8일 아침 조용기 목사님도 그런 욕망을 품고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 기쁨의 대상이 돈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시게 하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15:3). 사도 바울도 자기를 기쁘게 하는 대신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을 기브게 하며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 “우리 강한 자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15:1,2).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그리스도인은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 ‘세월’이란 말은 ‘시간’이란 말도 되고 ‘기회’란 말도 됩니다. 헬라어는 ‘카이로스’입니다. ‘기회’ 또는 ‘때’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시간과 기회와 때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여기 ‘아끼라’라는 말은 ‘사라’라는 말도 되고 ‘붙잡으라’는 말도 됩니다. 값을 치루면서까지 기회를 붙잡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허송세월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회,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꼭 붙잡는 사람입니다.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그 기회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주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며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조선족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그 기회들을 재빨리 붙잡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을 채우는 내용물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술로 채우든지 욕심으로 채우든지 정욕으로 채우든지 지식으로 채우든지 무엇으로든지 채웁니다. 그런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술이나 욕심이나 정욕이나 지식으로 채우는 대신 성령으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을 하나님 자신의 일부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기와 기운으로 자기를 채우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으로 자기를 채우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사모하므로 성령을 자기 몸에 채울 때 기도가 뜨거워지고 찬양이 뜨거워지고 봉사가 뜨거워지고 구제가 뜨거워지고 사랑이 뜨거워지고 착함이 뜨거워지고 기쁨이 뜨거워집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할 때 삶이 부드러워지고 삶이 따뜻해지고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여섯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새들은 물론 인간은 노래하는 동물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은 노래하기를 좋아합니다. 논 밭을 갈면서도 노래하고 고기를 잡으면서도 노래하고 운동을 하면서도 노래합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노래방이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조용필의 노래와 신승훈의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이 송정미의 노래나 박종호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고, 유행가를 좋아하던 사람이 찬송가와 복음찬송을 좋아하게 된 사람입니다. 여기 시는 시편의 노래들을 말하고 찬미는 찬송가의 노래를 말하고 신령한 노래들은 복음찬송을 말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찬송은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이고 서로 부르는 찬송인데 궁극적으로는 주께 노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은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이고 항상 주께 노래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일곱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삶의 자세에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인은 지배하는 자세에서 복종하는 자세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인의 자세에서 종의 자세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피차 복종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상전에게 순종하고 종들에게 순종하게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복종하는 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2:8). 사도 바울도 자기를 종이라고 부르면서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의 종 바울과”(빌1:1).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사람은 본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좋아하고 다스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그 존재와 행동과 가치관이 변화된 사람은 지배하려는 삶에서 복종하려는 삶을 삽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모든 사람의 종처럼 모든 섬기는 살았다고 어거스틴이 참회록에 기록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의 종처럼 살았고 손양원 목사님도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의 종처럼 살았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삶 복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 일곱 가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존재와 행동과 기쁨의 대상과 시간 개념과 마음과 입술의 노래와 삶의 자세가 변화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보여주시고 사도 바울이 보여주시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히 변화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날마다 변화를 받는 삶이라고 롬12:2에서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오직 변화를 받아." 변화를 경험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주위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어린 아기가 거름 마를 배울 때 자신도 기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우리 동혁이가 요사이 훌라 후프를 배워서 엄마보다도 잘 하고 할머니 보다도 잘하고 아빠 보다도 잘하니까 너무 신이 나고 너무 좋아하고 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니까 동혁이 엄마도 기뻐하고 할머니도 기뻐하고 아빠도 기뻐합니다. 할아버지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서너 번 밖에 하지 못하지만 동혁이가 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 우리의 영적인 삶이 변화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성도들도 기뻐하고 우리 사회도 기뻐할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 두 가지만 말씀 드립니다. 첫째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늘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늘 사모하고 성령을 의지하고 구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강변의 성도들 여러분들, 주님을 늘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항상 주님 안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늘 사모하고 의지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변화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뻐하시고 행복 하시기를 바랍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14 / 박덕기 목사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의 생활을 어두움 가운데서 사는 생활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빛 가운데서 사는 생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과 어두움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우리는 먼저 빛이 없는 자연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햇빛도, 별빛도, 촛불도, 전기 불도, 아무런 빛도 없는 칠흑 같은 캄캄한 세상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도, 아름다운 꽃들도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어떠한 위험이나, 죽음까지라도 전혀 알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자동차나,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달리는 도중 갑자기 이런 흑암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순간 온 세상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될 것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활동은 즉시 정지되고, 온갖 폭력만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마치 이와 비슷한 흑암의 세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영적 흑암의 세계입니다. 영적 흑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지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영혼이 있는 줄을 모릅니다. 그 때문에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영혼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 안에 빛이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영혼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참된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삶의 진정한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삶이란 다만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주의인 것입니다. 구원의 길도 모르고, 영원한 하늘나라도 모르고,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참 삶의 길을 찾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과 심판도 모른 체 살아가는 인간,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심령의 암흑세계입니다. 결국 어두움이란 마귀, 죄, 사망, 저주, 무지, 혼란과 절망 상태,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인류가 처한 운명이었습니다. 일년에 육 개월밖에 햇빛이 비치지 않는 북극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해가 떠오를 때가 되면 화려한 옷들을 입고서 산꼭대기에 모여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리다가, 그 첫 햇살이 비치면 큰 소리로 ‘아! 해가 떠오른다!’고 외친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에 대하여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밤하늘에는 찬란한 영광의 빛이 비취었습니다. 그리고 한 큰 별빛이 동방의 박사들을 베들레헴까지 인도하였고, 지금도 진리의 참 빛은 뭇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천국과 영생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바로 이와 같은 비참한 상태, 어두움 자체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광명의 신이십니다. 하나님께는 털끝만큼의 어두움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빛의 근원이십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신 고로, 어두운 것을 미워하시고, 빛 가운데서 사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또 우리 더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곧 빛이신 하나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1)빛의 특성은 가르는 역할을 합니다.
빛은 낮과 밤을 가르고, 어두움을 가릅니다. 빛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빛은 모든 것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해줍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게 합니다. 시 119:120절에 “주의 말씀이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귈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빛 가운데 거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어두움에서 분리되시기 바랍니다. 어두움에 속한 것들은 음행, 더러운 것, 탐욕, 비열함과 누추함, 어리석은 말, 우상 숭배와 같은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어두움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2)빛은 모든 것을 폭로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 빛이 비취이면 어둠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폭로됩니다. 빛은 모든 것을 다 드러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는 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정체가 드러날 때 우리는 이 빛 앞에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도망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빛 앞에 드러난 것들을 새로이 정리하는 것입니다. 참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셨을 때, 그래서 이 빛이 내 모든 정체를 폭로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피합니다. 빛으로부터 도망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직하게 이 빛 앞에 노출된 자기 자신을 보며, 그 추한 모습이 자신임을 인정하며 회개하기를 주저치 않습니다.
3)빛은 열매를 맺습니다.
빛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본문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첫 번째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착함’은 ‘모든 악함’과 정반대되는 말입니다. 엡4:31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했고, 벧전 2:1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착하지 못함이 무엇입니까? 악독한 것, 노하고, 분내는 것, 훼방하는 것입니다. 궤휼과 외식, 시기,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착한 그리스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착함은 무엇입니까? 착함은 곧 하나님의 성품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선함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그리스도인은 관용한 사람입니다. 모나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가 무서운 것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중심적인 사람,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합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입니다. 그는 자기의 욕심, 자기의 소원을 채우려고 하고, 그 욕심을 채우면 그것으로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이웃을 만나게 될 때,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하고, 악한 것을 막아 주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한 사람 착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라고 하면서 화목케 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아마 이러 저러한 뜻이었을 거야”라고 하면서 긍정적입니다. 밝고 명랑하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원망 불평을 일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착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합니까?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도저히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말 듣고도 가만히 있어?”라고 하면서 불화케 합니다. 부정적입니다. 매사를 비뚤어지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평, 불만, 원망을 일삼습니다. 착하고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은 접촉하는 사람도 서서히 감화시킵니다. 그러나 착하지 않고 부정적인 그리스도인은 접촉하는 사람도 서서히 물들어 가게 합니다. 우리 모두 악하고, 나쁘게, 비뚤어지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고,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힘쓰십시다. 간교함이나 간사스러움이 없는 착하디착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힘쓰도록 하십시다.
빛의 열매 두 번째는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이란 법적인 개념을 가지게 하여 준다는 의미에서 선함과 다릅니다. ‘의’란 법적으로 준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착함보다는 더 좁은 의미를 갖습니다. 벽돌을 쌓을 때, 혹은 문을 세울 때, 수직으로 잘 서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림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의’의 개념을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판단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코 자기의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눈치나 경험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정당한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에 의해서 판단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누군가가 말한 시류, 소위 시대 조류를 따라서 살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적인 불의한 수단 방법을 모릅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처세술에 능하다면, 그는 의로움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미련할 만큼, 우직스러울 만큼 곧은 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편견이나 독선과는 결코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빛의 열매 세 번째는 진실함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그 안에 속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춘 것이나, 숨긴 것이나, 정직하지 못한 것이나,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이며, 투명하고 명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진실함 때문에 그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사로잡기 때문에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너무도 진실치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12:1-2에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도다.”고 탄식한 말씀이 있습니다. 약4:8에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도 중요하지만, 사람 앞에서의 진실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도의 인격, 성도의 언행은 그 나라 그 사회의 양심의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성도의 세계를 떠나, 그 어디서 보다 나은 진실을, 보다 깨끗한 양심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불신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성도의 말 한 마디면 보증수표보다 더 신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세상 사람들은 차치해두고라도, 신자들에게서 마저 불신을 받고 있는 현실이고, 성도들 세계에서도 불신풍조는 만연되어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어떠한 오해나 억측이라도 성도들 끼리 만나서 한 마디 해명하고 밝히면, 그 진실성 때문에 모든 오해가 풀어져야 할 터인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진실치 못한 사람들끼리의 만남에서 무슨 신뢰가 생기겠으며, 무슨 사랑이 싹트겠으며, 어떻게 단합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겠습니까? 사랑, 사랑하고 백 번 천 번 부르짖지만,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무조건 경계하는 데서는, 온갖 거짓과 불신만 무성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성이 없을 때, 그 신앙은 생명력이 없는 죽은 것이고, 언행에 거짓이 많을 때, 그 인격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언건대 신앙과 인격의 생명력은 진실한데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000는 참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말을 듣도록 삽시다. 000는 참 진실한 집사였었다 하는 말을 듣도록 삽시다. 000는 참 진실한 장로였었다는 말을 듣도록 삽시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되고 진실무망한 나의 종아!”라는 말씀과 선언과 평가를 받도록 삽시다. 그보다 가치가 있고, 또 성공적인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하고 갈망했습니다. 어느 누군가는 또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으나,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몰라도,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가 꼭 건강해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몰라도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가 다 성공하고, 우리가 다 장수해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몰라도,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어떤 의미에서 그 나무의 생명의 표현입니다. 열매는 그 나무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빛 그 자체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그래서 우리가 과연 빛이라고 하면, 그 빛 된 성격을 나타내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물론 우리의 구원이 윤리나 도덕의 실천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나 언행은 최고 수준에 있는 불신자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빛의 자녀들이 되어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께 하듯 모든 사람에게
에베소서 6:5~9 /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 당시 로마 제국 안에는 수백만 명의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세계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다고 할 정도입니다. 자연히 그 사회에서 노예들이 담당하는 부분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자유인들에게 있어서 힘들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노예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가운데는 노예들도 있었고 주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교회는 주인과 노예 사이의 관계의 문제를 진솔하게 다루어야 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바울의 언급은 노예제도를 정죄하지도 않지만 너그럽게 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는 주인들과 노예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함께 살 것인지에 관해 말합니다. 바울 당시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예들은 별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그들에게 사회가 그들에게서 부인하는 자유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남편들과 부모들과 주인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악한 때에 세월을 아껴야 할(엡5:16)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한 일련의 권면 끝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했습니다. 그 권면을 사도 바울은 먼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적용시켜 썼고(엡5:22-33), 다음에는 자녀들과 부모 사이에 적용시켜 말했으며(엡6:1-4), 그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종과 상전 사이의 관계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부 사이나 부모자식 간의 바른 관계의 이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종들과 그 상전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인식은 그 사회적 영향력이 대단히 큰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 도처에서 노예제도가 대부분 폐지된 오늘날에도 일반적인 직업관과 노동관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의 글에서 기독교 신앙 속에서의 종들과 상전들과의 바른 관계, 보다 확대해서 말하자면 신앙인의 관점에서 본 대인관계의 바른 자세를 살피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들과 상전 사이의 도리를 말하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본문 5절), "주께 하듯 하라"(본문 7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는 어떤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먼저 본문 5절에서는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에서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합니다. 그런데 "행하라." 하면서 "마음으로"라 한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라는 말은 실제로는 행하지 않는 것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음으로"라 한 것은 "목숨으로"라는 뜻입니다. 즉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말입니다. 옛날의 종들은 주인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즉 흔히 사람들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자기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질 경우에는 남을 기쁘게 하는 일을 눈가림으로만 하기 쉬운데 반해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는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당신의 존귀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놓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7절에서는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목숨까지 걸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되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라는 말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해주시기를 우리 모두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도리라고 여긴 것을 그대로 그 당시 종의 신분으로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상전들에게 행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본문 5-7절을 다시 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본문 8절에서 제시합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사람을 향해서 한 모든 일에 대한 판단과 그에 따른 상벌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육체의 상전" 즉 이 세상에서의 상전으로부터 오는 상벌도 있을 것입니다. 잘 한 일에 대해 상응하는 칭찬과 상급을 주는 지혜롭고 선량하며 공평한 상전도 있을 것이고, 아무리 잘 해도 인정해줄 줄 모르고 칭찬과 상급에는 인색하며 오히려 멸시와 학대와 혹사만을 일삼는 상전도 있을 것입니다. 또 정말 잘 한 종과 눈가림만 잘 하는 종을 분별하지 못하고 논공행상을 부적절하게 하는 어리석은 상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상전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삶은 고달픈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받는 평가와 상급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대범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보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며 그가 만사를 가장 공정하게 처리하실 것이라는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안심하고 열심히 일하게 만들 뿐 아니라 정말 두려움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에게 주실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직장에서의 참기 힘든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게 해주는 힘이 될 것입니다.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합니다. 종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자유인 즉 상전들에게도 꼭 같이 해당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할 사람의 도리는 종의 신분을 가진 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전 된 자유인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사도 바울은 본문 9절에서 밝힙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바울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 하는 것입니다. 종들이 상전에게 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상전들도 종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또 다시 본문 5-7절을 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러니까 상전들도 그들의 종들을 두려움과 성실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눈가림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를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종들을 대하기를 주님을 대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종들을 거느린 주인이며 상전인 자유인들에게 이러한 권면을 하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는 KBS 주말드라마 <정도전>을 통해서 자기 시대를 앞서 가며 백성이 주인이 되고 왕이 아닌 재상이 다스리는 나라의 통치이념을 제시한 정도전이라는 한 걸출한 인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보여주는 사고는 그보다 더 혁명적일 뿐 아니라 무려 근 1400년이나 앞서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에게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위협은 상전들이 종들을 다스리는 효과적인 관리방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방법을 버릴 것을 권합니다: "위협을 그치라." 위협을 그치라는 것은 관리방법, 통치방법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새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밑바닥에는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고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본문 9절 하반절에서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란 종들에게나 상전들에게나 꼭 같이 진정한 상전 되시는 이를 말합니다. "그가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곧 하늘에 계신 이 즉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종이나 상전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종이었는지 상전이었는지 하는 것은 전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신1:17에 보면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외모를 보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사람에게서 "귀천을 차별하지 말라"는 뜻이고 재판을 할 때도 "지체 높은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 사람들도 종이든 상전이든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오늘 본문에서 종들에게 행한 사도 바울의 권면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성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사람들을 상대로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의 책임감과 정직성을 중요시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고는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디에서 누구에게 고용되어 일을 하든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고용주이거나 감독관이신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용주나 감독관이 선량하고 공정한 사람이건 아니건, 지혜로운 사람이건 아니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듯, 주님을 위하여 하듯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며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일이든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직업관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 무슨 일이든 맡은 일은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며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노동관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일에 있어서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대하기를 주님께 하듯 해야 한다는 생활관을 세우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매사에 누구와도 하나님 앞에서 하듯 하고 주님을 위하여 하듯 할 때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존경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도록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시험하여 보라
엡 5:10 / 조상호 목사
옛날 어느 도시에 살고 있는 효자가 시골에 굉장한 효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시골 효자가 살고 있다는 집을 찾아가서 보니까 매우 낡은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기다렸더니 그 집 아들이 나무를 한 짐 가득 담은 지게를 마당에 세워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부엌에서 부리나케 뛰어 나와 지게에 실려 있는 그 나무를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마루에 앉혀 놓고 부엌에서 대야에 물을 떠오더니 아들 발을 일일이 씻어 주면서 즐거운 얼굴로 아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시 효자가 가만히 보다가 ‘이런 고약한 놈이 있나. 효자라고 이름 난 사람이 어머니가 짐을 내리는데도 가만히 있고, 부모의 발을 씻겨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젊은 놈이 앉아서 부모에게 발을 씻게 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내가 효자란 말을 들었는데 이제 보니까 고약한 사람이군. 나이 드신 어머니를 이렇게 부려 먹는 법이 어디 있나?” 그러자 시골 효자라고 알려진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효자인지 아닌지 그것은 몰라요.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내 짐을 받쳐서 내려 주고 어머니가 내 발을 씻기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들은 도시의 효자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한다고 했는데, 어머니께서 한 번도 웃거나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일을 하기보다 자기가 기뻐하는 일을 하면서도 효도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하기보다 우리가 기뻐하는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의 기쁨을 위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지난 12월부터 기도하며 우리 교회가 달려갈 2012년도의 표어와 목표를 생각하다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를 2012년도의 표어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주제 말씀으로 정했습니다. 한 번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 오늘 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다같이 본문을 읽겠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여기에 보면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민수기 14장 22절에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9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당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를 시험하여 보라‘고 하는 본문 말씀이 서로 모순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한국말 번역을 보면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원어로 보면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할 때의 ’시험하다‘는 헬라어로 ‘페이라조’ (히브리어로는 ‘나싸’)인데, 이것은 test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할 때의 ‘시험하다’는 헬라어로 ‘도키마조’인데, 영어로 ‘prove' 즉 ‘확인하여 보라, 입증하여 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를 사용한 곳은 성경에서 몇 곳이 되지 않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 하나보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서 ‘시험’은 ‘도키마조’ 다시 말하면 ‘입증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원어대로 해석하면 ‘십일조를 통해 너 자신을 하나님께 증명해보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도 원어대로 해석을 한다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주님께 증명해보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내 증명해 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오늘은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믿음으로
첫째로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장로님이 시장에서 소 판 돈을 전대에 차고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때 인적이 없는 산을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사람의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사람이 자기를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로님이 너무 무서워 급한 걸음으로 가면 뒤에 오는 사람도 급하게 따라오고, 천천히 가면 뒤에 오는 사람도 천천히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밤길에 집에 까지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중간에 있는 마을의 여관에 들어갔습니다. 여관방에 들어가서 쉬려고 하는데, 여관 주인이 방문을 열고 “손님, 괜찮으시면 이 손님과 한 방을 사용하면 어떨까요? 사실 오늘 저녁에 빈방이 없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방이 없어 손님 하나가 묵을 곳이 없다는 말에 장로님이 허락을 하자 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산을 넘어올 때 자기 뒤를 따라오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장로님은 방 아랫목에서 자고, 그 사람은 윗목에서 잠을 자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내가 잠이 들면 저 사람이 내 주머니를 뒤져서 돈을 가져갈지 모르니, 잠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5분마다 ‘음’ ‘음’ 하며 잠을 안자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 사람 역시 잠을 안자고 있다는 뜻으로 ‘에헴’ ‘에헴’하며 헛기침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날을 새었습니다. 식사시간이 되어 방안으로 아침 밥상이 들어 왔을 때, 장로님이 식사기도를 하자 상대방도 역시 식사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궁금해서 밥을 먹으면서 장로님이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묻자, ”저는 목사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장로님과 목사님 두 사람이 밤새도록 서로 상대방을 의심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사람은 의심을 받을 때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자기를 믿어줄 때 기쁩니다. 만약 친구가 나를 믿어주지 않으면 속이 상하지만, 다른 사람이 다 나를 의심해도 친구가 나를 믿어주면 기쁩니다. 다른 사람이 다 나를 의심해도 아들이 아버지를 믿을 때, 아버지는 기쁨을 느낍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인정해주지 않거나 아버지를 믿지 않을 때, 그보다 더 큰 불효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베풀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믿음으로 고백했을 때, 주님은 깜짝 놀라며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눅 7:9)고 기뻐하시며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제물이 많거나 학식이 많거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지 믿음이 없는지를 보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게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올해 2012년에는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배함으로
둘째로 예배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찬송하게 하려고 우리를 지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르기 위해서 지으심을 받은 존재들인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제12대 대통령은 ‘재클리 테일러(Zachary Taylor 1784~1850)’입니다. 노예해방을 반대하는 남부지방 사람들과 달리, 그는 남부지방 출신이었지만 노예제도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에 오르는 취임식을 거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취임식 날이 주일이었기 때문입니다. 1849년 3월4일 12시가 되면 전임 대통령의 임기는 끝이 나는데, 대통령 당선자가 3월4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대통령에 취임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국회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그래서 미국 국회는 예정된 3월4일 주일 12시부터 다음날 월요일 12시까지 24시간 동안 당시 상원의장이었던 애치슨 의원(Acheson)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재클리 테일러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식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제클리 테일러와 같이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 지구상에 60억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 보면 아무렇게나 예배하는 자가 아닌 ‘영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시편 69편 30절과 31절을 보면 “내가 노래로 야훼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야훼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고 감사하며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에릭 리델(Eric Liddel)’이라는 육상선수에 대해서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1981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 1981)”의 실제 주인공입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당시 그는 100m 세계 신기록 보유자로서 영국을 대표해서 올림픽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정이 바뀌면서 100m 결승경기가 주일에 열리게 되자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영국국민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를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100m 결승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금메달을 포기하면서도 주일을 성수하는 그의 이 모습을 보시고 그의 이름을 높여주셨습니다. 갑자기 400m 경기에 출전하는 다른 선수에게 문제가 생겨 출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번도 400m 경기에 출전해본 적이 없는 단거리선수였지만 선수 단장의 지시로 400m 경기에 출전합니다. 그리고 당시 47.6초의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됩니다. 나중에는 신학을 공부하고 중국선교사가 되어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높여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하시기 바랍니다.
3) 동행함으로
셋째로 동행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사람들과 달리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무엇 때문에 에녹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성경을 보면 에녹은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다니엘 등의 믿음의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엄청난 일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가 한 것은 무두셀라라는 아들을 낳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를 산채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동행한다”는 말은 ‘함께 걷는다’ ‘함께 산책한다’는 뜻입니다. 동행하는 두 존재 사이에는 아무런 거리감도 없습니다. 따라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아무런 거리감도 느끼지 않고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격적인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얼마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까? 하루 이틀, 일년 이년, 십년 이십년이 아니라, 무려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에녹은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2장 43절과 44절에 보면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요셉과 마리아는 착각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동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룻길이나 간 후에 그제 서야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 중의 하나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지 않는데도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사실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방문했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선생들과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요셉과 마리아가 주님 곁을 떠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날 뿐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前) 미국대통령은 기도를 많이 했고, 기도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남북 전쟁이 시작되어 많은 병사들이 죽어갈 때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끄는 북군은 병사의 숫자가 많고 또 여러 가지 여건상 유리했지만,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 때문에 늘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북군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통령을 위로했습니다. 한 교회 대표가 링컨에서 다가와 말했습니다. "각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북군의 편이 되셔서 북군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날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서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주위에 보면 “하나님, 우리와 동행해주세요. 우리를 떠나지 말아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주님을 떠나면 떠났지 주님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떠났다면 우리가 돌이키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다시 가까이 가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산책할 때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할 때, 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 어>라는 영화에 보면 어린 곰이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숲을 헤매다가 사자를 만납니다. 그 사자가 자신을 공격하려 하자, 어린 곰이 앞발을 들고 큰 소리로 울부짖습니다. 그러자 기세등등하던 사자가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칩니다. 어린 곰은 자신이 사자를 물리쳤다고 의기양양하지만, 사실 사자가 도망친 것은 그 뒤에 있던 어미 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붙어있으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에녹, 요셉,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승리하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이 들면 주님께 다시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강남교회의 김성광 목사님의 글에서 읽은 것인데, 어느 보험회사에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면 남편의 사고율이 감소하고 직장에서도 일을 잘해 승진도 빨리 하고 집도 다른 가정보다 빨리 장만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명도 5년 이상 길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는 것보다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것이 훨씬 부부관계나 가정생활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환자가 의사를 기쁘게 하면 의사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환자가 나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합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기쁘게 하면 선생님은 최선을 다해 가르쳐서 그 학생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고, 직장에서 자신의 상사를 기쁘게 하면 다른 사람보다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 기쁘게 하고, 직장 상사를 기쁘게 하고, 학생은 선생님을 기쁘게 하고, 자녀들이 부모를 기쁘게 하면, 오히려 기쁘게 하는 자신에게 유익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도 유익이 돌아오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가만히 계시지 않으십니다. 시편 37편 4절을 보면 “또 야훼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의 승패는 물질이나 영주권이나 직장이나 사업장에 있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느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예배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동행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고린도후서 5장 9절에서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최선을 다하여 예배함으로, 항상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 자는 자여 깨어라
엡 5:10-14 / 박덕기 목사
물질세계에서 가장 극적으로 대조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빛과 어두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빛과 어두움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룹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고, 그리고 마귀를 가리켜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빛이 상징하는 바는 ‘하나님’ 외에도,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 ‘생명’ ‘신자’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어두움은 마귀 외에도 ‘죄’ ‘사망’ ‘저주’ ‘무지’ ‘혼란’ ‘절망’ ‘지옥’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의 생활을 어두움 가운데서 사는 것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빛 가운데서 사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엡 5:8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과연 빛이고, 빛 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곧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데, 빛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첫 번째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착함’은 ‘모든 악함’과 정반대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착하지 못함이 무엇입니까? 악독한 것, 노하고, 분내는 것, 훼방하는 것, 궤휼과, 외식, 시기, 비방하는 것 등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착한 그리스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착함은 무엇입니까? 착함은 곧 하나님의 성품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선함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착한 그리스도인은 관용한 사람입니다. 모나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빛의 열매 두 번째는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이란 법적인 개념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판단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코 자기의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눈치나 경험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정당한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에 의해서 판단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누군가가 말한 시류, 소위 시대 조류를 따라서 살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적인 불의한 수단 방법을 모릅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처세술에 능하다면, 그는 의로움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미련할 만큼, 우직스러울 만큼 곧은 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 세 번째는 진실함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 안에 속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춰진 것이나, 숨긴 것이나, 정직하지 못한 것이나,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이며, 투명하고 명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진실함 때문에 그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사로잡기 때문에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고, 성공할 필요가 없고, 부자가 될 필요가 없고, 장수해야 할 필요가 없고, 건강해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몰라도, 반드시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롬 12:2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은 금, 은, 동, 철 같은 금속의 순수성을 시험할 때 사용되는 말로서 ‘주의 깊은 사려 분별’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잘 분별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12절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두움의 일이란 3, 4절에 언급된 대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 탐욕,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 우상 숭배 등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러한 어두움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러한 어두음의 일들은 모두 사탄에 의해 지배받는 사악한 것들인데, 사도 바울은 어두운 일의 특징이, 열매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빛이 없는 세상에서 식물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인간도 어두움 속에 살면, 결코 선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까?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죄악들, 그래서 사도 바울은 3절에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곧 이러한 일들에 참여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너무나 추악하고 더럽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우리의 타락을 재촉할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악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받을 징벌에도 참여할 것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태도가 소극적인데서 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좀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책망하라’는 말은 단순하게 꾸짖고 정죄하고 비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책망하라’는 말은 ‘증거를 통해서 납득 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곧 그들의 죄를 책망하되, 그 반대되는 선한 행실을 많이 보여 줌으로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하는 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책망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처하고 있는 전체 상황에 복음의 빛을 던져 준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어두움이요,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과 가진 모든 관계가 전혀 잘못되었으며, 만일 죽기까지 그러한 식의 삶을 계속한다면, 멸망할 것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와 거룩함의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이거나 믿지 않는 자이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합니다. 빛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거나, 어두움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빛의 아버지께 충성을 맹세한 자는, 헛되고 열매가 없는, 전적으로 멸망당할 어두움의 일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등하불명이란 말이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인데, 먼데 일보다 제 앞의 일에 오히려 어둡다는 뜻입니다. 썬다싱 전에 있는 말인데, 인도의 한 왕자가 말하기를 “내가 기독교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을 방문하지 않았을 때는, 지금보다 훌륭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쪽 나라들에 갔을 때 자극을 받았으며,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을 보았다. 내가 그곳에 간 참 동기는 옛 모교회에 가서 순수한 젖을 마시며 튼튼히 될 양식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젖을 얻는 대신 술이 주어졌으며, 빵 대신에 돌이 주어져 전보다도 악화되어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본고장인 구라파의 타락된 신앙 상태를 잘 지적한 말입니다. 저들이 동양에 복음을 선교하면서도 자기네 나라에서는 빛 된 생활을 못하는 것을 보고 ‘등하불명’이라고 꼬집었던 것입니다.
마 5:15-16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고, 요한 1서 1:5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산중에 은퇴하거나, 자기만의 안위를 얻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죄악을 비춰서 그들로 하여금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오도록 인도하지 못한다면,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빛을 빼앗아 버릴 것이요, 허울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결국 세상의 조롱꺼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인도의 왕자는 구라파의 신앙을 ‘등하불명’ 이라고 개탄하였는데, 우리 한국 교회가 이제 세계 각처에 선교하면서도 저들에게 ‘등하불명’ 이란 조소를 받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스페인의 ‘코르테즈’가 멕시코를 정복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사들은 엄청난 멕시코의 군사들을 보고는,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자신들의 하는 일이 매우 무모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자 ‘코르테즈’는 두 세 명의 군사를 뽑아 그들과 함께 바닷가로 내려가서, 자신들이 타고 온 배들을 전부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없다. 싸워서 정복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 된 우리들에게도, 순간순간 위대한 결심과 용기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롬 12:11에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벌써 깰 때가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자다가 벌써 깰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까? ‘밤이 깊고’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때와 시기를 분별할 줄 알아야, 바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가 어떠한 시기입니까?
1)죄악의 밤이 깊은 시기입니다.
롬 12:12-14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어두움에 속한 몇 가지 죄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방탕인데, 이것은 곧 육체의 정욕이 원하는 대로 아무 제재 없이 내 맡긴, 방향감각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둘째는 술 취함입니다. 방탕과 짝을 이루는 죄가 술 취함입니다. 셋째는 음란인데, 이는 육체적 욕망과 향락을 위한 부도덕하고 무절제한 성행위를 가리키고, 넷째는 호색인데, 공공연하게 드러난 색을 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곧 더럽고 불결한 말, 음란한 표정, 음란한 책, 춤, 영화 등을 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란과 호색 같은 죄는, 특히 도시가 발달하고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회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참으로 이 시대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시대인데, 성도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순결해야 합니다. 다섯째는 쟁투인데, 이것은 자기의 이기심이나 교만 때문에 벌어지는 논쟁과 싸움을 말하고, 여섯째는 시기인데,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심리로서, 이 역시 어두움에 속한 죄악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러한 죄악들로 깊이 어두워진 밤과 같은 시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2)밤이 깊어 감은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허허벌판에서 밤을 새워 보면, 초저녁에는 달빛이 없이 별빛만 가지고도 지척을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어두움이 짙어 가는데, 새벽 3시쯤 되면 칠흑과 같은 캄캄함이 완전히 천지를 뒤덮어 버립니다. 이 캄캄함은 바로 새벽 직전임을 경험한 사람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훤하게 새벽이 밝아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밤이 아주 깊었다는 것은 새벽이 곧 올 것임을 예상할 수 있듯이, 어두움을 보고 빛을 생각하는 것이 신앙인의 세계관입니다. 죄악의 밤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서, 이제 곧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어둠과 죄와 슬픔의 현 세대는 종말에 이르고, 빛과 거룩함과 기쁨의 영원한 세대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소망을 한층 더 강하게 해줍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습니다. 또한 낮과 같이 단정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빛이 온 뒤에 단정히 하려고 하면 그 때는 벌써 늦습니다. 어두운 중이지만 빛과 같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현재는 캄캄하지만 우리의 눈은 미래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단정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다같이 진실한 중에 진실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짓 속에서 진실하고, 불의한 가운데서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워 온 것을 아는 성도들은 또한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잠이란 영적. 신앙적. 사명적인 잠으로서, 현세와 육신의 일에 도취되어, 신령한 일을 등한히 하고 잊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무감각하고 무반응한 상태를 말합니다. 죄와 무지에 빠질수록 영적인 일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의무에 무감각하게 됩니다. 이 같은 잠, 곧 안일한 잠에서, 게으름과 태만의 잠에서, 영적 사망의 잠에서 깨어 날 때가 벌써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깨어서 믿는 일과, 봉사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한 것은, 불신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한 말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사명을 망각하고 배 밑층에 내려가 깊은 잠이 들었던 요나는 ‘자는 자여 어찜이뇨?’ 하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기에 이런 때에 잠만 자는가? 호되게 책망을 당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자는 자여 어찜이뇨?’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기가 도대체 어떠한 시기인데, 더 좋은 집을 마련하고 자녀들 교육시키는데 만, 전력투구하며 산단 말입니까? 언제까지 세상사에 취생몽사하여 산단 말입니까? “자는 자여 어찜이뇨?” 우리는 영적인 파숫군입니다. 죄악의 밤, 역사의 밤을 깨워야 할 시대의 파숫군입니다. 남편을 깨우고, 아내를 깨우고, 자식을 깨우고, 부모를 깨우고, 친지와 이웃을 깨워야 할 파수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이러한 사명을 망각하고, 잠자는 성도는 없습니까? 자는 자여 어찜인가? 그대는 어찌하여 잠만 자는가? 남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서 성심성의를 다하여 헌금을 하고, 새벽 기도를 하고, 릴레이 기도를 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잠만 자는가? 여러분의 가정에 엄청난 풍랑이 일어나기 전, 여러분의 인생 항해가 순조로울 때, 깨어 기도하며 살고, 믿음으로 살고, 세상의 빛으로,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