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인들마저 '생애 한 번밖에 없을 행운'이라며 동경해 마지않는 그곳 식탁에는 대체 어떤 음식들이 차려질까. 좌충우돌 끝에 그 욕망의 식탁을 마주하게 된 '엘불리 탐방기'다.
- ▲ 세계 최고 레스토랑의 유일한 한국인 셰프는 당당했다. 장명순은 엘불리 앞에 텐트를 치고 무작정 기다렸을 정도로 당찬 청년이다. 결 국 그는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았다.
엘불리 입성(入城)은 예약부터 찾아가기까지 녹록지 않았다. '전 시즌 예약이 마감돼 예약 불가'하다는 답변에 국적불문 지인을 총동원해 극적으로 취소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가는 길은 또 어떤가. 바르셀로나에서 북부 로사스(Roses)까지 자동차로 두 시간 반, 거기서부터 다시 아슬아슬한 산길을 7km 이상 달리고서야 엘불리가 자리한 칼라 몬트호이(Cala Montjoi)에 다다를 수 있었다.
로사스에서 물어물어 엘불리 방향으로 가면서 몇 번을 망설였다. 절벽 아래로 망망대해를 두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비탈길은 그야말로 심심산골로 통하는 듯했다. 이렇다 할 표지판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길 끝에?…'라고 몇번 의심한 끝에 'El Bulli'라 쓰인 소박한 간판을 만났다. 미식가들이 수년을 기다려가며 이 외진 땅까지 미각의 끝을 맛보려 찾아드는 모양이었다. 그 열의와 경외심이 순례자들과 무엇이 다를까.
- ▲ 엘불리의 모든 요리는 모양새도 재료 간의 조합도 독특하고 새롭다. 제대로 즐기려면 메뉴의 콘셉트와 먹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작은 정원을 지나 흰 벽의 단층 건물로 이어지는 레스토랑의 내부는 카탈루냐 지방의 가정집을 연상시켰다. 돌과 나무를 이용한 마감과 손때 묻은 가구들, 유럽풍의 패브릭과 은은한 조명은 명성에 비해 오히려 수수하게 느껴졌다.
저녁 8시가 넘어 예약객들이 실내를 메우자 검은 정장 차림의 직원들이 음식을 서빙했다. '실험적 시도'로 명성이 높은 엘불리의 메뉴를 제대로 즐기려면 메뉴의 콘셉트와 먹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집중해 들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식전주로 나오는 칵테일 모히토의 경우 잔에 담겨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탕수수에 흠뻑 적셔 나오기 때문에 사탕수수를 꼭꼭 씹어 그 즙을 먹고 찌꺼기는 버려야 한다.
얇은 두께의 구(球) 형태로 나오는 고르곤졸라 치즈는 손으로 조금씩 깨먹고 눈처럼 녹아버리는 코코넛 스펀지는 녹기 전에 두세 입에 나눠 먹어야 한다. 모양새도, 재료 간의 조합도 하나같이 새롭고 신선하다.
선인장, 장미꽃잎부터 산토끼의 뇌까지 생각지 못했던 식재료들이 등장한다. 파마산 치즈로 빚은 라비올리나 고기도 야채도 아닌 잣 페이스트를 담가 먹는 샤부샤부, 짠맛 나는 아이스크림은 창의적이면서도 유머가 넘친다.
'엘불리에서의 식사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행운을 거머쥔 사람이라면 음식에 관한 고정관념을 모조리 집에 두고 와야 한다'던 어느 저널리스트의 격한 평론이 새삼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엘불리에서의 식사 후 가장 많이 듣게 된 '정말 그렇게 맛있더냐?'는 질문에 대답하기란 그리 간단치 않다. 미식의 경험을 혀에서 느끼는 맛의 종합이냐, 아니면 오감을 통한 체험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 ▲ 엘불리 내부. 명성에 비해 수수해 보인다.
엘불리의 수장이며 뉴욕타임스, 르몽드, 엘 파이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요리사, 누에바 누벨 퀴진(Nueva Nouvelle Cuisine)의 창시자라 불리는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a)의 스토리는 한편의 완벽한 드라마다.
접시닦이로, 변변한 정규 교육 한번 받지 않고 세계를 평정한 이 월드스타는 1년에 6개월은 가게 문을 닫고 연구에 몰두하는 거장다운 열정을 발휘하는 동시에 나머지 6개월은 결코 주방을 떠나지 않는 워커홀릭이다.
엘불리를 방문하기 전 또 한 명의 궁금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한국인 셰프 장명순이었다. 그 주방에 발을 들여 놓기 위해 줄 서 있는 요리사들이 한둘이 아니라는데 그런 경쟁자를 제친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싶었다.
이 27세의 의욕적인 청년이 처음 엘불리를 찾은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요리를 시작한 그는 군 제대를 앞두고 리스트를 만들었다. 꼭 가봐야 할 레스토랑과 꼭 만나야 할 요리사를 추리니 12개국이었다.
제대 후 그 리스트를 쥐고 배낭을 둘러메고 곧 여행을 떠났다. 호주와 동남아를 거쳐 유럽으로 넘어간 그는 스페인까지 왔으나 페란을 만날 방법이 없었다. 궁리 끝에 엘불리 앞에 텐트를 치고 시위 아닌 시위를 했다.
결국 페란과 십 분간 독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는 일을 하게 해달라며 다시 텐트를 쳤다. 막무가내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풋풋한 열정이 통했던지 그는 시즌이 끝나는 때까지 두 달간 일하라는 허락을 얻었다.
그리고 올해 6월 새로 시즌이 시작되었을 때 다시 합류하여 6개월째 세계 최고의 주방에서 목하 실력을 발휘 중이다. 세계 주요 매체에서 장명순의 이름을 발견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그새 세계 4위,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스페인 무가리츠(Mugaritz)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내년부터는 정식 요리사가 된다. 장차 오너 셰프가 되는 게 꿈이라는 그의 꿈을 실현될 날이 멀지 않을 것 같다.
◆엘불리에서 간장게장 맛보기
식사를 하며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메뉴 중 3분의 1가량은 아시아적 요소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간장소스와 말차, 동남아풍의 과일 등 재료와 양념, 담아내는 방식까지 중국이나 일본풍이 물씬 했다.
지난달까지 김치 양념을 활용한 메뉴도 있었다고 했다! 엘불리의 메뉴는 2주에 한가지씩 바뀌어 시즌이 시작될 때와 끝날 때는 완전히 다른 메뉴들로 코스가 구성된다. 페란 아드리아가 김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덕택이라 했다.
새로운 것을 자기식으로 소화하고 개발해 내기를 즐긴다는 이 천재 셰프는 강된장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 요즈음은 간장게장을 숙성시켜 소스를 개발하는 중이다. 엘불리의 유일 한국인 셰프 장명순의 공이 클 터다.
재능과 열정을 가진 우리 젊은 셰프들이 세계 곳곳의 최고 레스토랑에서 명성을 날리고 그 레스토랑의 메뉴마다 한식의 요소요소가 녹아드는 것, 이게 바로 한식세계화의 자연스럽고도 바람직한 모델이 아닐까.
세계 최고의 식탁을 비우고 돌아서는 마음이 괜히 부풀어 올랐다. 조만간 엘불리에서 간장게장이나 강된장을 맛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기대에 벌써부터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