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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 강원도 관찰사 고신 왕지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143호(전북) 명 칭 : 안성강원도관찰사고신왕지(장수오성리 영락12년왕지) 지정일 : 1993년 8월 31일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성재마을 544
고신 왕지 원본 고신왕지 우리말 풀이 : 수송하는 일(監倉安集轉輸)과, 농업을 권장하고(勸農), 교육과 학교를 다스리며(管學事) 형벌을 다스리고(提調刑獄) 병마(兵馬)를 거느리는 공무를 행하는 자(兵馬公事者)로 임명함. -영락 12년(태종14년 서기1414년) 4월 22일)- 영락(永樂) : 명나라 3대황제 성조(成祖)의 연호 조금 쉽게 풀어보자면 강원도는 당시 8도중의 하나이고 원주(原州)에 집무실이 있고 도관찰출척사는 직명이나 도내의 각고을 수령(守令)을 지도 감독하고 능력의 고하를 평가하는 일과 도내를 자주 순행하여 살피는 임기 1년의 지방장관임 이 고신을 보면 하는 일을 자세히 명시한 것이 특이하며 司法.軍事까지 장악하는 강력한 권한이 주어젔음을 알 수 있다 담당관원이 쓴 것이고 태종의 친필 글은 15자로 따로 판각하여 보존하고있고 이 고신의 발행년원일에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국쇄가 찍혀 있다. 국새(國璽=나라 도장)가 후에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아닌 초기에 사용한 것이어서 특별히 문화재로 지정 된 것 이다.
안성(安省)을 가정대부(從二品階) 강원도 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史) 겸 창고의 물자를 안전하게
특히 이 고신은 당시 태종임금이 직접 친필(御筆)로 써서 주었다고 하나 왕이 직접 쓴 글씨는 아니고
아울러 이 고문서는 고신의 형식이 경국대전 서식 이전이라 소임(所任)내용이 자세히 명시 되었다는 것과
장수군 산서면에는 예로부터 양반고을이라 일컷는 젊잖은 지역이다
그래서 그럴까 문화재가 많은 동네다 장수군 문화재의 40%가량이 산서면에 있다
장수읍을 출발하여 남원방향으로 4㎞정도 가다보면 왼쪽으로 수남초등학교가 보이고
조금 더가면 좌쪽으로 장수사과 연구소와 시험포가 있는 장수군농업기술쎈타가 있다
직진하다보면 삼거리 이정표가 보인다 직진 남원방향, 우측 - 임실,오수,산서 방향이다
우측 임실,오수,산서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장수에서 오수까지 연결된 719번 지방도로이다.
가는길 왼쪽에는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장군이 지명했다는 용의화신 용계마을이 나온다
또한 장수의 명산 팔공산이 눈앞에 웅장히 우뚝 서있다 팔공산 정기를 받아서일까 심신이
편안하구나 자가용으로 10여분 달리다 보면 700고지 대성고원 대성리에 도달한다
좌측으로 구멍가게 두집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팔공산 등반로가 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확연히 다르구나 시원하고 창량감이 있구나 대성리는 장수 거먹돼지로 유명하며
요즘은 전국제1의 맛을 자랑하는 장수사과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산등성 도로가에 피어있는
들꽃향기 코를찌르고 서리를 맞아야만 수확한다는 장수의 명품 늦사과 후지는 빨갛게 익어
탐스러운 자태를 품으며 소비자를 기다린듯 윤기가 잘잘 흐른다.
따사로은 햇빛에 눈이 부시는구나 동쪽에 떠오르는 태양이 남쪽으로 이동한듯하다
구름위에 떠있는듯 쳐다만봐도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 귀가 멍멍하다 꽤나 고지대인가보다
이곳은 장수읍 대성리에서 산서면 오성리를 잇는 매치봉이다 이곳의 높이는 해발 762M이다
매치봉은 비행기재 또는 말재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포장도로가 되있다 비행기재 도로높이가
해발 530M 표지판이 눈에 확 띈다 꽤 높은곳이다 꼬불꼬불 내리막길 약간의 현기증도 난다
비행기재라는 이름은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고갯길의 커브 곡선이 좌우로 심하고 고개가 높고
꼬불꼬불하여 마치 비행기를 탄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고개들에 비해 거리는
짧으면서도 경사는 급하다 그정도로 산간오지 숨어있는 비경이다 험한길 이지만 아름다운 길이다 또한 이곳 비행기재는 장수관내의 명소답게 인근 천천면 장판리 산 122-11 "명품말길" 과 함께
한국관광공사 문화체육관광부 각지방자치제 공동작업으로 2011년부터 시행해온 우리나라 사진
찍기 좋은명소 100곳에 선정된 곳 이기도하다 산서면 오성리 산 22-6(비행기재) 천하의 절경에
이마음 깊이 빠지고 싶어라 흐르는 세월 잡을수는 없지만 이순간을 제대로 느끼고 싶구나
저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산서면이 한폭의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오는구나 온화하며 포근하다.
비 행 기 재
비행기재 에서 바라본 산서면 전경
산서면은 태백정간(소백산맥)의 일맥이 무룡궁재를 디딤돌로 하여 장안령봉을 병풍처럼 펼쳐
놓았고 다시 서쪽으로 뻗어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수분치를 이룬뒤에 줄곧 서쪽으로 달려
팔공명산(성적산)을 솟구쳐 놓았는데 여기서 잠시 서남쪽을 굽어보며 팔공산(노령산맥)에서
남북으로 뻗은 양줄기가 마치 암닭이 양날개로 알을 품은듯 오목한 넓은 분지가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는 곳이다 이렇듯 지세가 평탄해서 전답이 비옥하고 많은 야산을 개간할 수 있어서
군내에서는 곡창 지대로 손꼽힌다 선서의 오대쌀과 메뚜기쌀은 장수군의 대표 브랜드다
산서면의 지형을 살펴보면 동북은 팔공산 넘어로 장수읍과 접해있고 동남은 남노령과 천왕봉이
경계가 되어 번암면과 남원시 보절면과 접해있고 서쪽은 신창리들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이 경계가 되어 임실군 지사면과 접해있고 북쪽은 영대산 넘어로 진안군 백운면과 인접해 있다 또한 산서면은 팔공산 서쪽으로 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분지가 되어 수원이 별로 좋지않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부터 저수지 시설이 잘 발달 되어있다.
비행기재를 서행하여 아슬아슬 내려오면 오른쪽에 아주작은 저수지가 보인다 장수 표현은
방죽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원흥저수지다 저수지 지나서 조금 내려가면 원흥삼거리가 보인다
원흥삼거리 직진하면 산서소재지 가는길이고 좌측으로 성재마을 어필각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삼거리 깃점 여기서 어서각까지의 거리가 1.5킬로미터 라한다 나는 좌회전하여
이차선 아스팔트길로 접어들어 양옆으로 펼쳐진 농촌풍경에 푹파져 본다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는 강치마을, 방화마을. 성재동마을 3개의 소마을이 합쳐져서 오성리
라 칭한다 어필각은 성재마을에 있다 마을입구에 다달으니 왼쪽으로 돌로세긴 성재동마을
이라는 돌판과 한눈에 봐도 오래된듯한 나무 2그루가 우뚝 서 있다 장수군 보호수로 2005년
1월4일 지정된 느티나무다 수명이 500년 이상 된다고 한다 마을 부녀자들이 질병이나 근심이
있으면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려 소원성취 했다는 마을의 당산나무다 이나무는 매년 1월3일에
제를 지낸다고 한다 성재마을은 광주안씨 집성촌으로 20여가구 정도로 성적골을 병풍삼아
건지산을 바라보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마을로 조금만 들어가면 성재마을회관이 나온다
어필각을 보려면 회관앞에 주차를 해야한다 어팔각 자체 주차할곳이 없다 성재마을회관
바로 뒤편이 고신왕지와 태종대왕의 친필을 서각하여 보관한 어필각이다.
산서면 오성리 성재동마을 입구 표지판과 500살 느티나무
어필각은 문화재청 또는 장수군청 설명문에 보면 안성이 죽은지 300여년이 지난
조선 영조27년(1751) 고신왕지를 소중히 보관하고 안성의 훌륭한 얼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지은 것으로 표현 하였는데 오성리 어필각 세울 당시의 창건문(안씨문중자료)및
동네 어르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丙辰年(1916년) 창건한 것 으로 보인다 오성리 어필각도
건립목적과 건조 100년 가까이 된 고유 건축물로서 왕지와 더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
특히 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조 고문서(안성강원도관찰사고신왕지)와 태종대왕 친필서한을
한판에 서각(書刻)하여 판각현판(板刻懸板)으로 이곳에 보관하고 있어 그 건립시기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한다 이 어필각은 현재 광주안씨 서령공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어필각-임금의 글씨를 보관하던 전각
어 필 각 전 경
입구에는 철제 홍살문과 삼문으로 된 솟을대문이 있으며 이 솟을 대문 뒤에 정면과 측면모두 1칸씩인 팔작지붕으로 된 어필각(御筆閣)이다.
어필 교지는 다음과 같다 "왕지 안성 위 가정대부 강원도 도관찰출척사겸 감영안집전수
권농 관학사 제조형옥 병마공사자 영락 12년 4월 22일"로 되어 있다
이 교지는 당시 사법행정의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으며 특히 출척사라는 어사와 다름없는
특권을 부여하는 최대의 은전(恩典)을 내렸던 것이다 원문을 보면
"왕지안성위가정대부강원도도관찰출척사겸감창안집전륜권농관학사제
조형옥병마공사자영락십이년사월이십이일 50자로 되어있다
<王旨安省爲嘉靖大夫江原道都觀察黜陟史兼監倉安集轉輪勸農管學事提
調刑獄兵馬公事者永樂十二年四月二十二日>
이 왕지는 가로 41.5㎝ 세로 43㎝ 아담한 크기이지만 조선태종 왕의 교지로서 문화적
가치가 높아서 1993년 8월 31일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43호 지정 되었다.
안성(安省)1344(충혜왕 5)∼1421(세종 3).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소목(少目)
자는 일삼(日三) 호는 설천(雪泉) 천곡(泉谷) 고려 우왕초 진사에 합격하고 1380년(우왕 6)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어 청렴한 이름을 떨쳤다
조선개국 후 1393년(태조 2) 청백리에 뽑혀 송경유후(松京留後)에 임명되었을때 자신이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 하고 궁전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니 태조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 하고 죽이려는 좌우를 제지하고 그를 급히
붙들어 내보냈다 한다 1396년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를 야박하게 지었다고 태조가 노엽게 여겨
축산(丑山)-(지금의 영덕) 에 유배되고 1400년(정종 2) 중승(中丞)을 거쳐 지보주사(知甫州事)가 되었다.
1411년(태종 11)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강원도 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참찬에 이르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뒤에 장수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나는 장수읍 출신으로 현재 장수에 살고 있으며 누구보다 장수의 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열정 많은 젊은이다 역사란 사실에 의거하여 기록되어야 한다 가정이나 추측으로 기록된
역사란 훗날 진실은 밝혀 질 것 이다 그래서 좀더 구체적인 사실하나를 논 해보고자 한다
여러문헌을 통해 알아보니 안성이 강원도관찰사로 임명한지 10개월후에 왕지가 발행 되었다
참으로 궁금했다 난 전문 지식이 없다 다만 내가할 수 있는것은 자료에 의존 할뿐이다
서툴러서 그런지 몇날며칠을 파고 들어가다보니 나름 결론을 얻게 되었다 왕지내용을 보자면
永樂十二年四月二十二日 (영락십이년사월이십이일) 즉 태종14년(1414년 4월22일)쓰여있다.
국사편찬위나 국가기록유산 홈페이지 각종문헌을 통해서 조선왕조의 왕대별로 역사기록인
태종실록을 볼 수 있었다 원전1집 672면 인사란을 실려 있는것을 찿았다 내용을 풀이하자면
태종13년 계사(1413년 영락11) 6월5일자로 안성을 강원도 도관찰사로 삼았다 강원도 도관찰사
우홍강을 충청도 도관찰사로 삼았다 이렇게 되어있다 당시대(태종13년)에는 서경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운 임명장이 발행된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의 중론에 의하면 당시대 인사법에 의하여 안성은 태종의 친필을 받아들고 명 받들어 강원도 관찰사로 1413년 6월부터 근무 했으며 이후에
1413년 10월22일 관교법이 시행됨에 따라서 뒤늦게 절차에 의하여 1414년 4월22일 고신왕지가 발행된 것 으로 추정한다.
역사란 참으로 딱딱하고 어렵다 읽다보면 지루하다 그래서 사실을 근거로 하여 쉽게 정리
하고자 한다 필자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읖조려 보려고 한다
"주인공 안성(安省)은 광주안씨로서 고려말 우왕때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정치에 입문한다
워낙 품성이 착하고 정직하며 대쪽같아 조선초에는 청백리로 뽑히기도 한다 두루두루 요직의
관직을 거치다가 강원도관찰사로 발령이 난다 임기를 마치고 태종13년(1413) 3월에 한성으로
돌아왔는데 그해 6월에 태종대왕이 주인공을 다시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보내면서 당부하는
15자 친필 편지를 써준다 "나는 안에서 다스릴 것이니 경은(안성) 바깥에서 다스리면 이로써
만백성이 좋아하고 편안 할 것 이다 그때 안성은 강원도관찰사 고신(임명장)이 없이 태종임금의
친필 편지를 받고 1413년 6월에 다시 강원도로 부임하였다 고신(告身.강원도관찰사임명장)은
후에 태종14년(1414) 4월에 뒤늦게 발행하였는데 이 고신을 안성의 둘째아들 철산에게 보낸다
안성은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둘째아들이 생원에 합격하여 나라의 공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대신해서 둘째 아들이 고신을 받아 잘 보관해 두었다.
그후 안성은 1414년 8월에 임기를 마치고(관찰사 임기 1년) 한성으로 돌아와서 의정부
좌참찬으로 의금부 제조를 겸직하는 관직으로 한성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안성은 세아들 중
둘째 아들인 철산이 생원시험에도 합격하여 공직에 종사하고 있는바 믿을만 하다고 판단되어
고신왕지와 태종임금의 친필 편지도 같이 보관하게 하였다 아마도 가보로 물려 줬을 것 이다
즉 왕지와 태종임금의 친필편지 모두 안성의 둘째아들 철산이 보관하게된다.
이후 안성은 1419년에 관직을 퇴임하고 경상도 안동 하회에서 거주하다 1421년 7월에
별세하였다 둘째아들 칠산에게 보관되었던 고신왕지와 태종임금의 친필서한은 손자에게
손자는 증손자에게 증손자는 고손자에게 가보로 물려 준것이다 광주안씨 후손들은 안성
유품을 가보로 보관 해오다가 이를 보관하고있는 직계 후손중 한명이 지금의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가 처가집 이었다 이분 일가가 처가집 동네 산서면 사계리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
이후 안성 후손들은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성재동으로 옮겨 집성촌 터전을 잡고 지금까지
500여년 이상을 살아 왔다 이를 계기가 되어 장수에 어필각이 생기게 된 것 으로 이해하면
맞을 것 이다.
주인공 안성의 유품인 태종대왕 어필(御筆宸翰)과 관찰사 고신(觀察使 告身)을
광주안씨 문중이 보존하게 된 것이다 오래토록 보관하다보니 훼손이 심해져서 할수없이
어필편지와 고신을 서각(書刻)하여 옻칠판각(塗漆板刻)으로 만들어 보관하게 된다.
광주안씨 서령공파 전체 족보(族譜)를 조선조 영조15년(1739)에 처음으로 간행하게 되었다
광주안씨 족보를 문중에서는 기미보(己未譜)라 칭한다 족보 창간에 참여했던 오성리 안씨
문중은 안성의 두 가지 유품을 보소(譜所)에 보여주니 고신을 족보 책 첫머리에 모각 하였다
광주안씨 족보 책머리에 실리게 된 동기다.
산서면 오성리에 살고있는 안성(安省) 후손들은 이후 1750년경 어필편지가 오래된
한지(韓紙)라 부스러질 형편이 되어 太宗大王御筆 이라고 세로글자 정자(正字)로 쓰고
옆으로는 초서(草書)로 쓴 태종대왕 직접쓰신 어필15字 [寡人治內 卿治外 使此萬民 皆得其所]
와 관찰사 고신 50字를 하나의 나무판에 서각(書刻)하여 옻칠(漆)하고 판각(板刻)으로 만들져서
오늘날 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국가의 귀중품이요 문중의 자랑 장수의 자랑 거리이다
이때 산서면 오성리에 살고있는 안씨 문중은 열다섯집 뿐이라 이들의 힘으로는 고신을
보관할 어필각(御筆閣)을 지을 힘이 모자라 옻칠하여 만든 판각을 가정집의 궤 또는 중요한곳에
보관하여 왔다고 전한다.
어필(태종임금의 친필서한)-옻칠 판각용
[寡人治內 卿治外 使此萬民 皆得其所- 나는(임금) 안에서 다스릴 것이니 경은(안성) 바깥에서 다스리면
이로써 만백성이 그 얻는 바가 될 것이다 즉, 경이 강원도 도관찰출척사로 나가서 백성을 위하여 힘쓰면
백성들이 다 편안할 것이다" 라는 뜻이다.
안성강원도관찰사고신왕지-(옻칠 판각용)
어필각 창건문
創建文
惟吾先祖 思簡公卽我國 太宗朝淸白臣也 行七道伯 再位(艸+位)江伯時
受其 御筆傳之 子孫十餘世櫃而 閣至于今春建閣而奉藏 孰不盡力
當時監役掌財之誠永示來世重修曰 責任者也 然建成易 守成難也 幸望諸孫
修而葺之 庶斯閣之永守.
十五世孫 監役 孝先 十六世孫 象遠 十七世孫 掌財 鍾和 鍾國
歲在 丙辰春 後孫 鵬遠 拜書
번역: 창건문(준공문)
생각컨대 우리 선조 사간공은 우리나라 태종조에 청백한 신하이다
일곱 도 관찰사를 하고 다시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될 때 받은 어필을 자손이 10여세 동안
안성 선친의 유품을 궤속에 보전해 왔으니 그 다락집을 올 봄에 세우고 받들어 갈무리하니
누구의 큰 힘이 아니겠는가 이는 이때의 감역과 장재의 정성이다 이를 영구히 알리고
다음세대에 중수할 때 책임을 진 사람들이다 그러니 새롭게 건축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지키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바라노니 여러 후손들은 집웅을 잘 덮고 고쳐 이 다락집을
오래도록 지키기 바라노라.
감역: 효선. 상원. 장재: 종화. 종국 병진년 (1916년) 봄 후손 붕원 절하고 쓴다.
창건문에서 분명히 기록하기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될 때 받은 어필" (江伯時 受其 御筆)"
이라 하였다 고신(왕지.임명장)을 말함이 아니라 15자 어필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위에서 정리한대로 “영조27년(1751)”에 어필각을 지은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있다
고신왕지와 어필을 낡아서 보수 했던것을 어필각을 세웠던 것으로 와전되었다고 추정한다
그후 1910년 무렵에 문중 인구가 40여집이 되니 모두 힘을 모아 어필각을 오성리 성재동
마을에 준비하고 지금 있는 전각(殿閣)을 1916년에 창건(創建. 竣工)하고 판각(板刻)한
고신(告身)과 어필을 전각안의 감실(龕室)에 보관하게 되었다 여러 정황상 현재의 어필각은
1916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는게 맞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있는 어필각 자체도
100년의 세월이 지난 고택으로 문화재로 손색없다고 필자는 사료한다.
종이로 된 원본은 1414년부터 1750년이면 약340년이나 되니 종이가 부스러질 정도로
낡아서 보관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1750년경에 아주 貴한 家寶 안성의 유품이라 천년만년
후손들께 물려줄 기발한 방법을 착안하여 보관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하여 후손들이 판각해서
옻칠을 입혀 만든 것으로 추측한다
만약 태종임금의 친필(어필. 御筆)이 아닌 가짜라고 한다면 당시가 왕조시대(王朝時代)인데
백성(百姓)의 처지로 엄중(嚴重)한 처벌(處罰)을 받아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아 진품(眞品)이기 때문에 판각하여 당당히 모시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하나의 판자에 고신(告身. 王旨)과 어필(御筆)을 같이 판각한 이유는 고신은 두꺼운
종이(壯紙)로 된 것이나 후를위해 이왕 하는김에 같은 판자에 판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남의 일에는 별관심이 없다 남의 가족사라 치부하면 안될것이다 모든것을
남의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바라보는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작은 관심이 큰 변화를
불러온다 진정 바라건데 장수인이여 또한 대한의 국민이여 오다가 가다가 일생에 한번쯤은
이곳에 찿아와서 견학함도 좋지 않을련지 주문을 하며 발길을 돌려본다.
찿아오시는길 :
교 통 편 : 장수읍출발-대성리- 비행기재- 오성리 성재동
오수방면-지사면-산서면사무소- 이룡리-쌍계리-오성리 성재동
~~ 장수군문화재 답사기 호롱불(최용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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