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참 좋은 봄날이다. 일요일 포도밭둑에 앉아 쑥을 뜯었다. 아니 해바라기를 한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온몸에 꽂히는 햇살 덕에 꽤 넉넉하고 달뜨고 말 그대로 춘삼월이다. 쑥이며 냉이들이 좀 봐달라고 얼굴을 내밀며 그들의 향으로 소근 거린다. 이들의 냄새가 햇볕만큼 온몸을 감싼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감정도 이들의 노크에 스멀스멀 행복으로 깨어난다. 누군가 봄은 혈관이 풀리는 계절이라고 했다. 등의 따듯함이 손가락 발가락 머리카락에까지 퍼져 지난겨울 이야기를 조잘조잘 풀어놓는다. 포도나무도 전지했던 가지에 물이 올라 더러는 맺혀있고 더러는 가녀린 피 같은 물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다. 드디어 땅속의 뿌리와 땅위의 가지가 겨우내 불통했던 관계를 청산하고 핏줄을 돌리는 것이다. 쑥도 그 피가 돌아 잎을 피워냈다. 삼동의 겨울을 어떻게 버티었는지 나름의 속사정은 있겠지만 지금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헤실헤실 웃고 있다. 참 좋은 햇볕이 아니냐고 묻는 것 같다. 재작년에 심은 무궁화도 물이 올라 싹눈을 통통 불리고 있다. 저희들을 심을 때 따님이 쌍둥이를 임신했다며 아이들이 잘 자라서 나라의 역군이 되길 바라며 심어주었는데, 그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냐고 인사를 건넨다. 무궁화들이 쌩 땅에서 몸살을 앓듯 손녀들도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안에서 두 달을 자랐지만 지금은 정상으로 태어난 아이들과 다름없이 잘 자라고 있다. 무궁화가 작년에 꽃을 피웠듯이. 오늘도 무궁화를 심었다. 3월 초 며느리가 결혼 4년 만에 쌍둥이를 낳았다. 손자와 손녀다. 대를 이을 장손이 태어난 것이다. 그 애들도 나라의 일꾼으로 잘 자라기를 기원하며 재작년에 심은 무궁화의 가지를 전지해 반듯반듯하게 심었다. 한 쪽은 다섯 명의 외손주들, 다른 쪽은 두 명의 친손주들을 위한 무궁화밭둑이다. 갓난이들은 튼튼이와 씩씩이란 태명으로 지냈는데 며칠 전 준우와 소윤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오늘 심은 무궁화 언덕은 준우와 소윤의 꽃밭이 된다. 애기들은 앓고 나면 크고 또 아프고 나면 안하던 새로운 짓을 하면서 큰다. 무궁화도 올 한해 앓으면서 시들시들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뿌리를 내릴 것이다. 새로 심은 무궁화밭둑에 봄의 햇살처럼 생명이 넘치고, 사랑이 있고, 온화함이 있고, 그리고 새뜻하다. 쌍둥이들이 태어난 다음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10분 정도 면회를 할 수 있었다. 한 바구니에 두 아이를 뉘어 놓았는데 우리 집이 대단한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새 생명, 그 자체로 봄이고 기쁨이고 축복이다. 매일 아들이 사진을 찍어 보낸다. 잠자는, 하품하는, 몸을 뒤트는, 배냇짓을 하듯 웃다가 찡그리는 모습 등. 거의 같은 모습인데도 보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어느새 입은 귀에 걸려있다. 애기들 생각에 빠져있는데 15층 할머니가 보내준 씨앗들이 이렇게 해찰만 하다 저희들은 언제 심을 거냐고 채근했다. 며칠 전 약국에 나오셔 고수씨를 받아 놓았는데 포도밭 귀퉁이에 심어볼 거냐고 묻더니 세 가지나 보냈다. 맛있는 품종이라서 사셨는지 봉지도 뜯지 않은 상추씨와 고수씨는 알겠는데 처음 보는 씨앗을 한 줌 따로 보냈다. 씨앗봉투를 들고 지금껏 방치했던 묵정밭으로 갔다. 무성하게 자랐던 풀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손으로 그것들을 긁어 낸 다음 퇴비를 듬뿍 뿌리고 땅을 팠다. 묵혀두어서인지 쉬 파지지 않았다. 한 자리에 두 번 세 번 삽질을 해 손바닥만 한 밭을 만들었다. 농사꾼은 땅을 귀히 여겨 놀리는 땅이 없어야하는데 나는 아직도 먼 것 같다. 흙을 잘게 부숴 평평하게 만들고 할머니가 주신 씨앗들을 심었다. 그들이 한 동안 땅속에서 묵언수행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샤방샤방 연두의 싹이 나오고 햇빛을 받아 잎은 너울너울 자랄 것이다. ‘심은 자랑 하지 말고 키운 자랑 하라.’ 했는데 내가 너무 심은 자랑만 하는 것 같다. 상추는 상추로 고수는 고수로, 모르는 것은 싹이 나오면 네가 아무개였어? 하고 아는 체를 해야겠다. 골을 지어 만든 밭이 제법 그럴싸하다. 그들 앞에 서서 “고구마는 달게/ 땅콩은 고소하게/ 고추는 맵게 ” 서정홍님의 텃밭에서 란 동시를 크게 읽어 주었다. 햇살은 서쪽으로 기울며 남은 볕을 무궁화밭둑과 새로 만든 밭에 쏟아 붓는다. 하루 종일 새 생명들과 같이한 밭의 공기가 달달하다. 포도밭 일이 바빠 오늘 심은 것들과는 눈도 못 맞출지 모르면서도 이렇게 이것저것 심는 것은, 보살펴 줘야 하는 책임감과 가꾸면서 느끼는 생명의 환희 때문이다. 온 밭에 핏줄 도는 소리가 꽉 차 흐른다. 볕이 참 좋은 봄날이다.
(윤복순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