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영란전쟁시의 포틀랜드해전(1653)
1. 전쟁의 배경
1640년 청교도 혁명이 발발하여 영국에서 내란이 진행되는 동안 머리를 짧게 깎은 Roundheads(단발파)와 가발을 쓴 왕당파(Royalist)로 나뉘어졌다. 찰스 1세의 명령으로 Robert Rupert(1619-1682)가 1648년 왕당파의 함선 7척을 이끌고 영국 최남단의 Scilly 섬과 아일랜드에 근거지를 마련하려 하였다. 이에 Cromwell은 1649년에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왕당파의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Robert Blake(1599-1657) 제독에게 루퍼트를 제거하도록 했다.
로버트 블레이크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뒤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내란이 발생한 1640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된 뒤 의회파 군인으로 복무하여 1649년에 의회파의 함대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이때까지 배를 타본 적이 없었지만, 의회파 해군을 지도하면서 루퍼트를 추격하여 명성을 얻었고, 4차례에 걸친 영국-네덜란드 해전을 무난하게 치름으로써 영국이 네덜란드에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크롬웰은 1651년 항해법을 반포하고 영국으로 수출입되는 상품은 영국 배나 식민지 소속선으로 운송하도록 강제하였다. 이는 당시 영국을 최대 고객으로 하고 있던 네덜란드 해운업자에게는 커다란 타격이었고, 크롬웰도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로써 영국과 네덜란드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인도에서의 무역거점의 확보, 아프리카와 서인도에서의 노예무역, 북아메리카에서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뉴 네덜란드와 영국 식민지인 버지니아 및 뉴 잉글랜드의 대립, 아시아의 몰루카 제도에 대한 지배권, 동인도 제도의 암보이나에서 영국인과 네덜란드인 간의 대립, 네덜란드인의 일본인 학살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나, 영국과 네덜란드간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군함에 대한 예의 문제였다. 1649년 정권을 잡은 크롬웰은 영국의 근해는 영국의 영해이다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영국 근해에서 영국 함선을 만나는 외국 선박은 국기를 내리고 예의를 표하도록 명령하였다.” 1652년 5월 제노바에서 네덜란드로 귀환 중이던 상선 3척을 호위하던 네덜란드 함선에게 영국의 President 호가 와이트 섬 근처에서 예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함선들이 이를 거절하자 영국 함선이 함포 사격을 가하였고, 결국 네덜란드 함선들은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5월 18일 네덜란드의 Tromp(1597-1653) 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호위를 받아 네덜란드 상선 42척이 영불해협으로 항해하었다. 5월 19일 Blake 제독이 트롬프에게 예를 표할 것을 강요하며 함포사격을 가함으로써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였다.
2. 포틀랜드해전(1653)
2-1. 2월 18일 첫날 해전
제1차 영국-네덜란드전쟁(1652-54) 동안에는 10 차례에 걸쳐 해전이 벌어졌다.
1652년 5월 19일 Dover 해전을 시작으로 Elba 해전, Plymouth 해전, North Foreland 해전, Dungerness 해전, Portland 해전(3일 해전), Gabbard 해전, Scheveningen 해전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Portland 해전과 Scheveningen 해전이 가장 중요했다.
Blake가 던져니스 해전에서 패배하자 트롬프에게 대항하기 위해 함선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은퇴하였던 Sir Home Popham과 Richard Deane을 복귀시켜 블레이크 제독의 부사령관으로 배속시켰다.
1653년 2월 중순이 되자 Tromp 제독은 네덜란드로 향하는 상선 250척을 호송하기 위해 영국 남단의 Land's End 근해에 있었다. 당시 트롬프 제독은 함선 75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3개 전대로 나누어, 자신이 중앙을, 에버첸(Jan Everstsen) 제독에게 우익을, De Ruyter 제독에게 좌익 전대를 각각 지휘하도록 하고 상선단은 중앙 전대 후방에서 뒤따라오도록 했다.
이같은 정보를 입수한 블레이크 제독은 함선 80여척을 3개로 나누어 Monck 제독과 Penn 제독과 함께 지휘하였다. 2월 18일 블레이크는 트롬프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고 트롬프를 생포하기 위해 해협에 가로로 함대를 배치하고 포틀랜드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 트롬프 함대가 나타나게 되자 블레이크 함대는 둘로 분리되었다. 이에 블레이크 제독은 즉시 함선의 절반을 집결시켰지만, 10여척의 함선이 기함 근처에 위치할 뿐 나머지는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몽크 제독이 지휘하는 백색전대는 4-5마일 떨어진 풍하 쪽에 위치해 있어서 블레이크 제독을 도우러 갈 수 없었다. 트롬프 제독은 상선단을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물러나게 한 뒤 블레이크의 기함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해전은 근접전으로 전개되었다. 트롬프의 의도를 알아차린 드 루이터 제독은 블레이크의 지원 부대를 차단하려고 하였고, 에버첸은 남쪽에서 블레이크와 펜 사이로 끼어들어 영국의 두 전대를 분리시키다가 다시 몽크가 블레이크를 지원하는 것을 차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펜 제독은 에베첸의 방해를 물리치고 블레이크 함대의 옆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전투는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지속되었다. 그 뒤 트롬프 제독은 네덜란드 상선대에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하여 오후 4시 경에 후퇴하였다.
첫날 해전에서 블레이크는 복부에 중상을 입었고, 많은 함장들이 사망하였다. 이에 비해 네덜란드 함대도 트롬프의 기함 승무원의 2/3를 잃었고, 드 루이터 제독의 기함도 돛대가 부러졌다. 결과적으로 첫날 해전에서는 영국이 승리하였다.
2-2. 2월 19일 이틀째 해전
이튿날인 2월 19일 트롬프 제독은 바람이 불기 전에 해협의 동쪽 편으로 해협을 통과하려고 서둘러 출항하였다. 그러나 이미 영국 함대가 해협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 함대는 와이트 섬 근해에서 마주쳤다. 이에 트롬프 제독은 영국 함대와 자국의 상선단 사이에서 영국 함대를 길게 둘러싼 초승달 진형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네덜란드 상선단은 풍하 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날은 바람이 불지 않아 해전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속개된 해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틀째 해전에서 루이터 제독의 기함이 예인되었고 네덜란드 상선 수 척이 나포되었다.
2-3. 2월 20일 사흘째 해전
셋째 날에는 바람이 몹시 불었다. 해협을 통과하려는 네덜란드 상선들은 화물을 만재했기 때문에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영국 함대는 트롬프를 추격한 지 얼마 안되어 곧 따라 잡은 뒤 근접전을 펼쳤다. 블레이크는 부상을 당하여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네덜란드 함선의 귀로를 차단하기 위해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Penn 제독은 네덜란드 함대를 돌파하여 상선단을 공격하였다. 당시 트롬프는 포탄과 화약이 떨어진 함선을 먼저 귀국하도록 했기 때문에 35척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트롬프는 Penn의 공격을 막아내고 깔레 항으로 일시 후퇴하였다가 야간에 해협을 통과하여 귀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3. 포틀랜드 해전과 1차 영란전쟁의 결과
포틀랜드 해전에서 네덜란드는 함선 30여척과 상선 70-80여척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대규모 상선단을 호송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이 함대는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블레이크가 심한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사령관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블레이크는 네덜란드 상선단을 차단하는 작전에서 실패하였다고 할 수 있다.
포틀랜드 해전은 트롬프, 드 루이터, 블레이크, 몽크 등 당대의 제독들이 지혜를 겨루고 사력을 다해 싸운 해전이었다. 해전이 끝난 뒤 양국은 해전을 분석하여 자신들의 전술을 반성하였으며, 전투시 진형을 갖추고 이를 유지하지 못하면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을 교훈으로 도출하였다. 특히 영국 해군은 진형 유지를 특히 중시하여 전투지침서를 수정하였다. 이에 대해 네덜란드 함대는 전투 도중 각 전대사령관의 독자적인 판단력과 작전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전대사령관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도록 권장하였다.
포틀랜드 해전 이후 1653년 3월 4일 지중해의 Leghorn에서 양 함대가 다시 맞붙었고, 6월 2일에는 Gabbard 해전, 7월 말에 셔브닝겐 해전 등에서 격전을 치루었으나, 트롬프가 셰브닝겐 해전에서 사망하면서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영국측의 승리도 끝이 났다.
셰브닝겐 해전에서 패배한 네덜란드는 영국과 평화교섭에 나섰다. 전쟁 도중 영국 함대에 나포된 네덜란드 상선이 1700여척에 이르렀다. 한편 크롬웰도 국내의 카톨릭교도에 압력을 가하는 방편으로 신교도국인 네덜란드의 공화파와 제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양국은 1654년 4월 15일 1차 웨스트민스터 화약으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1) 영국의 항해법을 인정하고, 2) 영국 함선에 예의를 표하며, 3) 동양의 식민지, 특히 암보이나 사건에 대해 영국에게 배상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