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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東)쪽의 편안한 땅 안동(安東)과 영호 루(暎 湖 樓)
○ 한반도(韓半島)와 그 부속도서 및 북쪽 대륙(大陸)일부 땅과 한반도(韓半島) 삼면(三面)을 둘러 싼 바다는, 『일만(一萬)년 “조선(朝鮮)”의 강토(疆土)였다.』고 자랑스럽게 가르치고, 배워온 역사(歷史)다.
지금도 각급의 학교【공교육(公敎育)현장(現場)】에서, 또는 세미나, 각종 미디어, 각 방송국 매체(媒體)등 수많은 사회(社會) 곳곳에서, 위에서 말한 그대로를 자랑스럽게, 전파(傳播) 또는 설파(說破)하면서, 평화(平和)를 사랑하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이요, 단일민족(單一民族)이며, 배달민족이란 말은 빼놓지 않고, 목에 힘주어 외친다.
○ 이것이 한반도(韓半島)의 남(南)쪽이나, 북(北)쪽의 현실(現實)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 또는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왜 북(北)쪽을 서(西)쪽이라 하지 않는지 그게 이상하다. 옛 적에 모두 “평양(平壤)”을 서도(西都), 서경(西京) 곧 ‘서쪽의 서울’이라 하지 않았는가? 당연히 북한(北韓)은 서한(西韓)이 되어야 하나, 북한(北韓)이라 호칭(呼稱)한다. 필요(必要)에 따라, 방향(方向)까지 자기네들 마음대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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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선 제69권. 기(記) / 금 방 기(金 牓 記) 백 문 보(白 文 寶) :
《 신축 년(공민왕 10년) 11월에 임금이 난리(亂離)를 피하여 복주(福 州)에 이르렀다. 처음 충 광(忠 廣)에서 고개를 넘었는데, 관리(官吏)와 백성(百姓)들이 난리를 당해 갈팡질팡하여 놀란 노루와 엎드린 토끼처럼 어찌할 줄을 몰라 명령하여도 정돈되지 않으니, 임금이 마음속으로 걱정하였다. 고개 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푸르고 아득하여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지른 것 같은 것이 경상도(慶尙道) 일대이며, 고개에서 북쪽으로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이 높이 솟고, 그 남쪽으로 둘러있는 것이 10 여 주(州)가 있는데, 복주(福州)가 큰 진영(鎭營)이었다. 산은 높고 물은 맑으며 풍속은 옛날과 같고 백성은 순수하여 깃발이 앞을 가리고 관복 행렬이 잇따라 나오니, 관청을 깨끗이 하고 어가(御駕)를 모시어 편안히 하니, 왕이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이에 수레를 멈추고 장수에게 명하여 도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수도(首都)를 수복(修復)한 뒤에 드디어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다. 하루는 고을의 영 호 루(映 湖 樓)에 나가서 마음을 풀며 구경하였는데,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멀리서 회상하기를 마지않았다. 틈을 내어 왕이 손수 붓과 벼루를 가져다 다락 현판의 큰 세 글자를 써서 하사하여 그 다락에 걸게 하였다. 》
《다락이 호수(湖水)와 가까이 있어, 둥글고 모난 기둥의 그림자가 호수 위에 거꾸로 흔들리는데 무협(巫 峽)이 그 왼쪽에 벌여 있고 성산(城山)이 그 오른쪽에 당겨 있으며 큰 강이 둘러 있고 모여서 호수가 되었다. 모든 물의 줄기가 동북쪽이 머리가 되고 서남쪽이 꼬리가 된 것은 하늘의 은하수가 이런 것이다. 때문에 복주의 문사(文士)와 걸인(傑人)이 이따금 이 기운을 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는 일월이 운행하는 데에 은하수가 빛이 되는 것은 하늘의 문채로, 이 다락에 은하수를 놓은 것은 하늘의 광채에서 본을 딴 것이니, 다락의 장식을 찬란하게 하여 내세에 크게 빛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옛날 우리 충렬왕께서는 태평 시대였지만 동(東)쪽 지역에 일이 있어 이곳까지 순시하셔서 고을의 영 은정(迎 恩 亭)에 행차하시고, 또 보배로운 글씨를 걸게 하였으니, 정자의 다행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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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高麗) 왕조(王朝)시절 『홍건(紅巾)적의 침입(侵入)으로 황도(皇都)를 점령(占領)당 한, 공민왕(恭愍王)이 11월에 난리(亂離)를 피해 “복주(福州)”로 피란(避亂)을 갔다.』고 한다.
지금이나 예나, 외적(外賊)의 침입(侵入)으로, 수도(首都)를 비우고, 피난(避難)하는 것은 같은 이치(理致)이니, 뭐 이유(理由)가 있을 수 있겠는가!
㉠ <충 광(忠廣)에서 고개를 넘었는데> 라는 구절(句節)을 어떻게 이해(理解)해야 할까 망설여지는 대목이다.
㉡ <고개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경상도(慶尙道)일대요, 북쪽으로 보니,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이 높이 솟아 있고, 그 남(南)쪽으로 둘러있는 것이 10 여 주(州)인데, 그 중에서 “복주(福州)”가 가장 큰 진영(鎭營)이었다.>는 설명(說明)이다.
복주(福州)는 곧 안동(安東)이며, 후에 안동(安東)대도호부(大都護府)가 된 곳이다. “안동(安東)”에서 북(北)쪽을 보면, 먼저 “소백산(小白山)”이 있고, 약간 동북(東北)방향으로 “태백산(太白山)”이 있다. 그 아래에 펼쳐져 있는 고을이 10 여주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 안동(安東)이 왜 “복주(福州)”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가? 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 <옛날 우리 충렬왕께서는 태평 시대였지만 동(東)쪽 지역에 일이 있어 이곳까지 순시하셔서 고을의 영 은정(迎 恩 亭)에 행차하시고> 하셨는데, 개경(開京) 땅에서 안동(安東)지방이 어떻게 “동쪽”지역이 되는가? 하는 문제에도 답은 없다. 개경(開京)의 황성(皇城)에서 “동(東)”쪽 지방은 강원도(江原道) 땅일 뿐이다.
㉤ 또 이곳 “안동(安東)지방”엔 『큰 호수(湖水)가 있어 옛 적부터 명승지(名勝地)였다.』는 것과 같은데, 이곳 어디에 “큰 호수(湖水)”가 있어 뭇 시인(詩人)들에게 회자(膾炙)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곳은 호수(湖水)가 아니라 큰 강이 돌고 돌아(匯) 흘러가기 때문에, 물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하는 소리다.
㉥ 영호 루(暎 湖 樓) / 조선(朝鮮) 숙종~영조 연간의 문인 <옥소> ‘권섭’【여행으로 방방곡곡을 누비며 평생을 풍류의 세월로 보낸 작자가 호면(湖面)에 그림자를 드리운 “영 호 루”의 경관을 읊은 시조이다. <권섭>은 복주(福州) 즉 “안동(安東)”이 고향(故鄕)이라 한다. 문제는 안동지방 어디에 호수가 있어 잔잔한 호수의 물속에 <영 호 루>의 그림자가 비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이 지은 시조에 <영 호 루>가 나오는데, 그의 자필 필사본인 《옥소고(玉 所 稿)》에 실려 전하는 1수이다.
○ 오늘 우리들이 여러 가지의 옛 글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방향(方向)이란 누가 보던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더더구나 역사서(歷史書)에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안동(安東)은 경상도(慶尙道)에 있으며, 그곳은 개경(開京)이나 한양(漢陽)에서 “남쪽지방”이지, “동쪽지방”은 될 수 없는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다. 군주(君主)의 행차(幸次)에 방향(方向)도 모른 채 “동쪽이다, 남쪽이다”라고 기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옛날 우리 충렬왕께서는 태평 시대였지만 동(東)쪽 지역에 일이 있어 이곳까지 순시(巡視)하셔서 고을의 영 은정(迎 恩 亭)에 행차하시고> 라는 설명을 보면, 안동(安東)은 황도(皇都)의 동(東)쪽 지방에 있어야 맞는 설명(說明)이다. 이는 곧 위에서 설명(說明)한대로, “안동(安東)”이란 “편안한 동쪽”이란 뜻이다. 참 기막힌 일이다.
안동(安東)이란 고을이 고려(高麗)때부터 “대도호부(大都護府)”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고을 중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면, 그 증거(證據)나 유적(遺跡), 유물(遺物)이 존재해 있어야 정상이다. 모조리, 대부분이 불타 없어졌다는 말은 사기(詐欺)다.
큰 강으로 둘러싸인 곳이 “안동(安東)”이란 설명인데, 도대체 이곳 어디에 큰 강이 “안동(安東)”을 둘러 싸 흐르고 있는 것일까? 낙동강(洛東江)!!!!!!
호수(湖水)라는 말은 천연적으로 생긴 “호수(湖水)”가 아니라, 큰 강이 돌고 돌아 흐르는 곳에 물이 모여 있으니, 호수(湖水)와 같다는 설명(說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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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전하는 당시의 상황(狀況)이다.
(1) 동사강목(東史綱目) / 신축 년 공민왕 10년(원 순제 지정 21, 1361)
12월 왕이 복주(福 州)에 이르렀다. 거가가 처음 경성을 출발할 적에는 너무나 창졸간이어서 위의(威儀)를 갖추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연 서 역(延 曙 驛) 지금의 양 주부(楊 州 府) 서쪽 60 리에 있다. 에 이르러서는, 충청도 안렴사. 안종원(安 宗 源)과 충주 목사 박희(朴 曦) 등이 와서 알현하였다. 얼마 뒤에 청주ㆍ상주(尙州) 등지의 군대와 말이 잇달아 이르러서는 비로소 위의를 갖추게 되었다. 이천(利 川)에 어가가 머물렀을 적에는 어의(御衣)가 젖고 얼어, 불을 피워 스스로 따스하게 하였다. 이때 이르는 곳마다 인민들이 무너지고 흩어져 공궤(供饋)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에 안종원 등을 순 군 옥에 가두었다. 12월 15일(임진)에 비로소 복주에 도착하였다. 종 원은 안축(安 軸)의 아들이다.
(2) 왕이 영 호 루(映 湖 樓)에 행행하였다. 18일(을미)에 왕이 영호 루【지금의 안 동부(安 東 府) 남쪽 5 리에 있다. 】에 행행하여 한참 동안 경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누(樓)에서 내려와 배를 타고 유람하므로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섰고,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탄식하는 자도 있었다. 이전부터 참서(讖書)의 말이 있었는데, “소[牛]가 크게 울부짖으니 용(龍)이 바다를 떠나 얕은 물에서 맑은 물결을 희롱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갑자기 한 남쪽 도적이 깊숙이 와 우 봉(臥 牛 峰)에 들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적에 그 말을 들었더니, 이제 징험(徵驗)을 보게 되었다.” 하였다.
(3) 왕이 복주(福 州)를 출발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렀다. 25일(신축)에 복주(福州)를 출발하여, 27일(계 묘)에 어가(御駕)가 상주(尙州)에 이르렀다. 목사 최 재(崔 宰)가 공진(供進)하는 것은 모자람이 없었으나, 선사하는 물건이 없었기에 좌우의 신하들로부터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받아 드디어 파면되었다. ○ 복주를 승격시켜 안동(安東)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였다. 왕이 복주(福州)에 머물러 있을 적에, 복주(福州)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여 공궤를 올렸고, 마침내는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경도(京都)를 수복하였기 때문에 승격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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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安東)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건치연혁】 안동(安東)은 본래 신라의 고타야군(古 陁 耶 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창군(古 昌 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임금 견훤(甄萱)과 이 고을의 땅에서 싸워서 견훤을 패배시켰다. 그때 이 고을 사람 김 선평(金 宣 平)ㆍ김 행(金 幸)ㆍ장길(張 吉)이 태조를 도와서 전공(戰功)이 있었으므로, 김 선평은 대광(大 匡)으로 임명하고, 김 행과 장 길은 각각 대상(大相)을 삼고 이 까닭으로 인하여, 군(郡)을 승격시켜 부(府)로 삼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가, 뒤에 영가군(永 嘉 郡)으로 고쳤다. 성종(成宗)은 길주 자사(吉 州 刺史)로 일컬었고, 현종(顯宗)은 안무사(安 撫 使)로 고쳤으며 또 지 길 주사(知 吉 州 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안동 부(安東 府)로 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남적(南賊) 김 삼(金 三)ㆍ효심(孝心) 등이 주(州)ㆍ군(郡)을 위협하고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쳐서 평정하였는데, 그때 안동부가 공이 있었다고 하여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신종(神宗) 때에 동경(東京 경주)의 야별초(夜 別 抄) 패 좌(孛 佐) 등이 무리를 모아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안동도호부가 적(賊)을 항거하여 막은 공로가 있으므로 승격시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복주 목(福州 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을 피해 남쪽으로 순행(巡幸)하여 고을에 머무를 때에, 고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공하였으므로 다시 승격시켜 안동대도호부로 하였다. 본조에 들어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부사(府使)에게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부사(副使)는 폐지하였다.
【군명】 고타야(古 陁 耶)ㆍ고창(古 昌)ㆍ영가(永 嘉)ㆍ길주(吉 州)ㆍ복주(福州)ㆍ능라(綾羅)ㆍ지평(地平)ㆍ석 릉(石 陵)ㆍ일계(一 界)ㆍ화산(花 山)ㆍ고장(古 藏), 창녕(昌 寧) 지리지(地理志)에는 옛날의 창녕 국(昌 寧 國)이라고도 하였다. 고령(古 寧).
【풍속】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힘쓴다. 지리지(地理志). 무본 절용(務 本 節用) ‘권시(權 偲)’의 향사당기(鄕射 堂 記)에, “풍속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농사를 힘쓰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당(唐)ㆍ위(魏)의 유풍(遺風)이 있다.” 하였다. 근검충의(勤儉忠義) ‘권제(權 踶)’의 덕 민 루기(德 民 樓 記)에, “근검(勤儉)한 풍속과 충의(忠義)의 열렬함은 남쪽 지방의 으뜸이 된다.” 하였다.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누에를 치며, 굽은 수레[曲車]를 사용하고, 광주리를 짊어지고 다닌다. 옛 사람의 기록이다.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 기(金 榜記). 풍기(風氣)가 혼륜(渾淪)하다 권반(權 攀)의 모 은루기(慕 恩 樓 記). 『신증』 석전(石戰) 매년 정월 16일에 부내에 사는 사람들이 부(府)의 중앙에 있는 내를 경계선으로 하여, 좌우편으로 패를 나누어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워 승부를 결정한다. 경오 년 왜적(倭賊)을 토벌할 때에 석전(石戰) 잘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았더니,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형승】 안동은 도(道)의 웅 번(雄 藩)이다 이석형(李石亨)의 사청 기(射 廳 記). 큰 강이 띠처럼 둘러 있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 기(金 榜 記)에, “무협(巫 峽)이 왼쪽에 펼쳐져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으며, 큰 강은 띠처럼 둘러 있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고 있다.” 하였다. 물은 황지(黃池)로 흐르고, 산은 태백이 뛰어나다 무명씨(無名氏)의 백련사(白蓮 寺) 침 벽루기(枕 碧 樓 記)에, “물은 황지로 빠져서 일만 구렁을 흡수하고, 산은 태백산(太白山)이 가장 뛰어나 뭇 봉우리를 통솔한다.” 하였다.
【누정】 관풍 루(觀 風 樓) 부의 성안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기(記)에, “조령(鳥 嶺)의 남쪽에 웅대한 번진(藩鎭)과 큰 고을이 안개처럼 벌여 있고, 솥발처럼 병립하고 있으나 대도호부(大都護府)라는 칭호는 오직 영가 부(永 嘉 府)만이 일컬어지고, 다른 고을은 참여하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전조(前朝) 때에 공민왕(恭愍王)이 적의 침구(侵寇)를 피하여 남쪽으로 거둥하다가, 이 고을에 머무르면서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서, 싸워 이겨 경성(京城)을 수복하고 임금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갔다. 그 큰 계책이 여기에서 큰 명[大命]을 정(定)하여, 능히 다시 우리 동쪽 나라를 안전하게 하였으므로, 고을 이름을 안동(安東)이라고 내렸으며,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켜 영남(嶺南)의 모든 고을 중에서 우두머리가 되게 한 것이다. 이때부터 부의 이름난 성씨와 거대한 가문들이 중외(中外)에 빛났으며, 장수나 재상의 지위에 이르는 자가 어느 시대에나 끊이지 않았다. 그 인물과 토산물의 왕성함은 또 다른 고을이 비교할 수 없다. 객사(客舍)의 동쪽에 옛날 다섯 칸의 누(樓)가 있었는데, 이름을 덕 민 루(德 民 樓)라고 하였다. 신묘 년에 횃불 맡은 사람이 실화(失火)하여 하루 저녁에 타서 재만 남게 되었다. 이듬해인 계사년에, 계천 군(鷄 川 君) 손소(孫昭)공은 목사(牧使)로서, 일선(一 善) 김 성경(金 成 慶)군은 통판(通判)으로서, 함께 부(府)의 일을 맡게 되었다. 손공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폐단은 없어지고 이로운 것은 일어나며 백성들은 화합하고 시절은 풍년이 들었다. 부(府)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말하기를, ‘아래 읍(邑)이나 작은 현(縣)에서도 오히려 누대(樓臺)가 있어서 왕명을 받들고 온 사람들을 오르게 하는데, 너희 부는 큰 고을로서 홀로 누하나 없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고을에서 나이 많고 준걸(俊傑)한 이들이 목사의 말을 듣고 번갈아 찾아뵙고는 누 세우기를 계속 청하였다. 손공이 말하기를, ‘나를 번거롭게 하지 마시오. 수령들이 법령을 까다롭게 하고 부세(賦稅) 징수를 빈번하게 함으로 인하여, 평민이 산중으로 도피하여 중의 옷을 입고 있는 자가 많게 되었으니, 이 고을 안에도 반드시 중으로서 기와를 잘 굽는 자, 나무를 잘 다루는 자, 먹줄을 잡아 길고 짧음을 잘 잴 줄 아는 자들이 있을 것이오. 그 자들의 이름을 적어 오시오.’ 하였다. 이튿날, 기와 굽는 사람, 나무 다루는 사람, 길고 짧음을 재는 자 수십 명의 명단을 올렸다. 손공이 그들의 기능의 순서에 따라 그 일을 나누어 맡기니, 여러 공장(工匠)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제각기 경쟁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무를 벌채하여도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재목을 운반하여도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다. 흙을 두드려 차지게 빚고, 가마를 축조하여 기와를 구워도 백성들은 모두 알지 못하였다. 이에 객사의 대문 밖에 터를 정하고 누 5칸을 기공하였더니, 두어 달이 채 못 되어서 날아갈 듯이 아름답고 훌륭한 누각이 우뚝 솟아 서게 되었다. 그 일을 준공하였을 때에 손공이 여러 공장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낙성식을 올렸다. 그때 마침 감사(監司) 김 영유(金 永 濡) 공이 부에 들어왔다가 이 누에 올라서 두루 살피면서 서성거리니, 온 부중(府 中)의 좋은 광경이 좌우로 펼쳐졌다. 감사가 손공에게 말하기를, ‘누는 이루어졌소. 이름은 또 불타버리고 남은[回祿 불 맡은 귀신] 옛 이름을 습용(襲用)하려 하시오?’ 하니, 손공은 말하기를, ‘부에 누가 없어서 부내의 사람들이 민망하게 여기었는데, 이제 누가 이루어지고 큰 손님이 내림(來臨)하셨으니, 청하건대 관 풍루(觀 風 樓)라 고쳐서 오늘의 상공(相公)의 아름다운 정치를 드러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김 공이 말하기를, ‘나 때문에 관 풍루라고 이름을 짓는 것은 자기의 칭찬을 하는 것 같은 혐의로 운 데가 있소. 그러나 실상 세상에 널리 통용되는 이름이니 무슨 해로움이 있겠소.’ 하고, 드디어 그 현액(懸 額)을 ‘관풍(觀風)’이라고 썼다. 무릇 누대(樓臺)ㆍ정사(亭榭)라는 것은 본래 정치하는 도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누대를 폐지하고 일으키고 하는 일에 있어서는, 폐지해야 하고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 있으며, 일으켜야 하고 폐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리하여 관리의 정치를 잘하고 못한 것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안동 부는 평지에 자리 잡아 수읍(首邑)을 정하고 또 자성(子城)을 둘러쌓았기 때문에, 관청의 청사와 객사(客舍)의 집이 모두 위치가 낮고 막혔으므로 답답하다. 더운 때를 당하면 비록 목사나 통판(通判)일지라도 또한 시원함을 취할 길이 없었다. 혹 천지가 화로 속 같고 불 같은 해가 공중에서 타고 있을 때에, 봉명사신(奉命使臣)이 거마(車馬)를 쉬지 않고 달리느라 면, 길은 멀기만 하고, 물과 산의 험난한 곳을 드나들지만, 역사(驛 舍)는 황폐하고 길에는 쉴 곳도 없어 땀은 비오듯하고, 티끌은 옷에 가득하여, 몸은 더욱 피로하고 호흡 또한 곤난할 것이다. 이러한 때에 말을 버리고 높은 누(樓)에 올라 옷깃을 헤치고 헌함에 서면, 맑은 바람이 가볍고 시원하게 불어와서 마치 날개가 돋혀서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 같을 것이니, 번열(煩熱)과 숨 막힘을 씻을 수 있고, 정신을 시원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뜨거운 것을 잡고도 가서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것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누대(樓臺)와 정사(亭榭)가 정치하는 도리에는 무관한 것으로서 주군(州郡)에는 없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제 손공은 놀고 있는 자들을 사역하여 백성들은 부역(夫 役)을 알지 못하였으며, 불탄 것을 다시 지었을 뿐이고 새로이 창건한 것이 아님에랴. 수령(守 令)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서민들은 편안하여 예악(禮樂)이 있을 뿐, 꼭 하는 바가 없어도 교화(敎化)에 잠기는 것을 누릴 수 있게 되고, 감사(監司)로써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관하(管下)에 있는 관원들의 벼슬을 올려 주는 일, 내쫓는 일들이 공정하여 수령들의 횡포하고 지나치는 폐단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심과 한탄이 없는 아름다운 상태는 옛날 한(漢) 나라의 문제(文帝)와 그의 아들 경제(景帝)의 시대에 겨우 보였을 뿐이며, 형옥(刑獄)과 송사(訟事)는 없어지고 칭송하는 소리만 일어나는 상태는, 다시 옛날 서주(西周)의 성대(盛 代) 같은 것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홀로 수령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감사 또한 훌륭한 인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감사 김 공은 안동 김씨(安東金 氏)로서 당대의 이름난 관원이 되어, 이 도에 감사로 부임하여 탐오(貪汚)한 자를 엄중하게 다스리니 아전들은 법을 두려워하여 부정부패한 자가 없고, 부세(賦稅)와 정사를 너그럽게 하니 백성들은 생업에 안정할 수 있어서 떠돌아다니며 이사해야 하는 괴로움이 없다. 죄형(罪刑)의 판결이 현명하여 감옥에는 미결로 오래 지체하는 죄수가 드물며, 감사 자신에 대한 추종(騶從)을 간이(簡易)하게 하고, 역전(驛傳)에는 살찐 말이 있다. 모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정사와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을 구별하는 방법은 마련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영남의 70여 고을이 다 편안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기는 가운데에 있다. 다른 날 공이 조정에 돌아가서 공경(公卿)이 되었을 때에, 이 누(樓)가 큰 부(府)에 우뚝 솟아남아 있으면, 마땅히, 옛날 주(周) 나라의 소공(召公)이 사랑[愛]을 남긴 남국(南國) 땅에 남은 감당(甘棠) 나무와 같이 백성들의 그 덕을 사모하는 대상이 될 것이다. 나의 4대조 판 삼사(判 三司) 손 홍량(孫 洪 亮) 공이 정일품(正一品) 벼슬에서 물러나와 이 고을에 사니, 공민왕이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총애하였다. 그러니 나도 또한 이 고을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즐겁게 공의 어짊을 말하고, 인하여 뒤의 풍속을 관찰하는 자가 김 공에게 짝할 만한 아름다운 정사를 하기 바라며, 그리고 또한 이 누에 이름을 걸게 되는 것을 다행하게 여긴다.” 하였다.
영호 루(映 湖 樓) 부(府)의 남쪽 5 리에 있다. ○ 공민왕이 남쪽으로 거둥하여 복주(福州)에 이르렀을 때에, 영호 루에 나아가서 배를 타고 유람하여, 호수 가에서 활을 쏘았는데, 안렴사(按 廉 使)가 임금에게 음식을 대접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섰다. 어떤 이는 옷소매를 돌리어 눈물을 닦으며 탄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참서(讖書)를 외우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홀연히 남쪽의 한 도적이 깊이 와우 봉(臥 牛 峯)에 들어온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전에 소[牛]가 크게 우니 용(龍)이 바다를 떠나 얕은 물에서 맑은 물결을 희롱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그 징험을 보는구나.”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금방 기(金 榜 記)에, “신축 년 겨울 11월에 임금이 난(亂)을 피하여 가다가 복주에 이르렀다. 처음에 충주(忠州)ㆍ광주(廣州)로부터 조령(鳥 嶺)을 넘으니, 관리들과 백성들이 난리에 당황하여 놀란 노루와 숨은 토끼처럼 되어서, 손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비록 명령할지라도 걷잡을 수 없어서 임금이 마음으로 근심하였는데, 조령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넓고 멀고 아득하여서 마치 천지가 가로놓인 것 같은 것이 경상도의 영역이었다. 영(嶺)으로부터 북쪽은 태백산(太白山)ㆍ소백산(小白山)이 웅장하게 솟아 있고, 그 남쪽에 구불구불 서린 것은 열이 넘는 주군(州郡)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복주는 거 진(巨鎭)이다. 산은 높고 물은 맑으며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다. 장군과 원수(元帥)의 기(旗)는 엇갈려 덮여 있고, 관면(冠冕)과 패옥(佩玉)의 차림은 서로 바라다보였다. 행궁(行宮)을 말끔히 정돈하여 임금의 행차를 인도하면서 태연하고 침착하여 여유가 있었다. 임금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여기에 거가(車駕)를 멈추고, 장수에게 명하여 적(賊)을 치게 하였다. 이윽고 싸움에 이겨 경도(京都)를 수복하게 되자, 드디어 이 고을을 승격시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고 조세(租稅)를 감면하였다. 하루는 고을의 영호 루에 거둥하여 기쁜 마음을 시원스럽게 폈는데, 경도에 돌아간 뒤에도 멀리 생각함을 그치지 못하였다. 한가한 날에 친히 필연(筆硯)을 잡고 누(樓)의 현판(懸板)으로 할 큰 글씨 석 자를 써서 하사하여 그 누에 달게 하였다. 영호 루는 호수를 굽어보고 있어서 기둥과 서까래, 대마루와 들보가 물속에 거꾸로 비쳐 그림자가 능란(凌亂)하다. 무협(巫 峽)이 그 왼쪽에 펼쳐져 있고 성산(城山)이 그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큰 강은 띠처럼 둘러 있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고 있다. 무릇 물의 근원과 지류가 머리를 간방(艮方)에 두고 꼬리를 곤방(坤 方)에 둔 것으로서 하늘에 있는 것을 은하수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복주의 글 잘하는 선비와 걸출한 인재가 가끔 이 정기를 타고 그 사이에 탄생한다. 대체로 해와 달이 형상을 드리우고 은하수가 문채를 이루는 것은 하늘의 아름다운 현상이다. 이 누가 은하수처럼 근원을 간방에 두고 꼬리를 곤방에 둔 강물을 누르고 섰으니, 하늘의 문채와도 같은 임금의 제자(題字)를 얻어 금벽(金碧)의 단청으로 새겨서 후세에 밝게 빛나게 함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임금의 덕의 밝은 빛이 이곳에 강림(降臨)하여, 몇 천 년을 두고 우러러보며 흠모하게 되었으니, 나라 일의 기틀에 불행함이 있었던 것이 도리어 누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 되었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옛날에 우리 충렬왕(忠烈王)은 비록 태평한 세상을 만났었으나, 오히려 동쪽 변두리에 일이 있어서 이 지방을 순행(巡幸)하다가 이 고을의 영은 정(迎 恩 亭)에 행차하여 또한 귀한 제액(題額)을 하사하였으니 또한 정자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었다. 앞의 것과 뒤의 것이 빛나서 모범이 되고 해와 별처럼 밝아서 함께 한 고을의 영광과 광채가 된다. 아 거룩하도다. 이 누를 지은 것이 이미 오래이다. 금빛으로 새긴 현액의 자획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같은데, 누의 크기는 그 현액과 걸맞지 않았다. 지정(至 正) 무신년에 고을의 수령 신 자 전(申 子 展)군이 옛 규모를 고치니,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자세와 꿩이 높이 나는 듯한, 아름다운 채색으로, 바로 호수의 수면에 걸터앉게 되었다. 때로 누에 오르면 아침 해가 올라올 때나 저녁달이 빛날 때에는, 황금 빛 현액과 광채를 다투는 것이, 곧 불빛 구름을 피워 올리며 용(龍)이 싸우는 듯한, 광경이 갑자기 호심(湖心)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뛰고 혼백이 떨게 만들어서, 이 누에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워지는 것만 같다. 진실로 바라보면 의젓하고 위엄이 있어서 두려워 침범할 수 없을 것 같다. 임금의 수택(手澤)만으로도 오히려 그러하니, 하물며 친히 몸소 임금의 덕화에 감화를 받은 사람임에랴. 봉 익 판 전교(奉 翊 判 典 校) 권 사복(權 思 復)군은 이 고을 사람으로 이미 그 누를 중신(重 新)하여 그 현액을 걸고, 그 단서(端緖)의 기(記)를 나에게 청하였다. 내 비록 글을 잘하지 못하나 영원히 전하여질 훌륭한 일을 찬미하는데 이름을 싣는 것을 적이 기뻐하여 대충 누의 오랜 세월의 연혁을 서술하고, 뒷날에 있을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 王 閣 序) 같은 훌륭한 글을 기다리기로 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다른 날 강산의 유람을 나가서 다시 한번 이 누에 이르러 훌륭한 필적을 얻어 볼 수 있게 되면, 다시 절하고 시(詩)를 지어서 또한 나의 심정을 다하여 나의 평소의 뜻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찬(讚)과 그 서문(序文)에, “지정(至 正) 신축 년 겨울에 국가가 남으로 복주에 옮기고, 군사를 출동시켜 북벌하여 이듬해에 드디어 적(賊)을 경성(京城)에서 섬멸시켰다. 복주를 승격시켜 안동(安東)도 대호부로 하였으니, 대체로 그 옛 칭호를 회복한 것이고 또 기쁨을 표시한 것이다. 병오 년 겨울에 임금이 서연(書筵)에서 영호 루(映 湖 樓)라는 석 자를 큰 글씨로 써서, 정순대부(正 順 大夫) 상호군(上 護 軍) 신(臣) 흥 경(興 慶)에게 명하여 왕지(王旨)를 전달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교시사(判 典 校 寺 事) 신 사 복(思 復)을 불러들여 면전에서 글씨를 주었다. 그때 안동도호부의 판관(判官) 조봉랑(朝 奉 郞) 신 자전(子 展)이 아전들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누의 규모가 누차 하여 임금이 하사할 현액(懸 額)을 빛나게 할 수 없을까 걱정이다.’ 하고, 이에 기일을 정하여 더 넓히고 더욱 물에 가깝게 하니, 그 규모가 더욱 크고 시원하였다. 신 사 복(思 復)이 그 까닭을 신에게 자세히 말하고 또 기(記)를 청하였다. 신이 말하기를, ‘누(樓)의 기(記)를 쓰는 일은 비록 능(能)하지 못하나, 신은 홀로 느낀 바 있다. 임금이 전날 복주에 머무를 때에 일찍이 이 누에 거둥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신이 시신(侍臣)으로서 실제 수종(隨從)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경계하던 마음은 게을러지고 또 잊은 지 오래 되었다. 아, 임금께서 안동을 사랑하여 돌보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고루한 것을 잊고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찬(讚)을 짓는 바이다.’ 찬에 이르기를, ‘높고 밝은 저 운한(雲漢)을 성인(聖人)이 법칙으로 삼아서, 마음과 자획(字 畫)이 한결같이, 바르고 곧다. 붓이 손에서 움직이니 광채가 하늘로부터 이루어졌다. 신기하게 변하고 불가사의하게 화하여,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를 알지 못한다. 굴절생시(屈 折 生 柴)하는 저 곤(困)하게 배우는 자들은, 엎드려 감탄하며 놀라서 비지땀을 흘린다. 이 안동(安東) 고을은 우리가 다시 일어난 곳이라 하여, 영호 루(映湖 樓)라는 큰 글씨 석자를 써 주셔서 거(莒)를 잊지 아니하는 뜻을 보였네. 햇빛은 그 가운데에 있고 용(龍)은 와서 둘렀도다. 위에도 하늘이요 아래에도 하늘이니 물이 비쳐 주었다네. 이 현액 때문에 풍경은 모습을 고치고, 산천은 수려함을 더한다. 부로(父老)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의 만 세 수(萬歲 壽)를 축원한다. 편안한 때에나 위태한 때에나 근심을 생각하면 반드시 창성하리라. 복주의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전하는 떳떳함이라네. 세상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충성을 권(勸)함이라네. 신(臣)은 절하고 찬(讚)을 지어 신하들에게 고(告)하노라.’ 하였다.” 했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詩)에, “나는 용[飛龍]이 하늘에서 밝은 구슬을 희롱하니, 그 구슬 멀리 영가(永 嘉) 고을 호수 위의 누(樓)에 떨어졌다. 밤에 구경할 때에도 촛불을 잡고 볼 까닭이 없나니, 신기한 광채가 1만 길이나 물가를 쏘아 비치네.” 하였다.
○ 고려 채홍철(蔡洪哲)의 시에, “요사이 바다로 산으로 많이 다녔으나, 티끌세상 밖에 있는 것 같은 정신은 여기에 오니 더하여진다. 처음에는 꿈에 운우(雲雨)의 무협(巫峽)에 노니는 것 같더니, 점차로 몸이 그림 속의 집으로 들어가는 듯하구나. 남쪽 강의 가을밤에는 1천 봉우리에 달빛 비치고, 북쪽 마을의 봄바람에는 1만 나무에 꽃이 피네. 비록 이 담담(淡淡)한 심정의 한가한 길 가는 자로도, 이 누에 오르니 마른 삭정이 같을 수는 없구나.” 하였다.
○ 고려 우탁(禹倬)의 시에, “영남에 만판 놀며 여러 해를 보냈건만, 이곳의 물과 산에 경치 더욱 좋은 것을 가장 사랑하네. 꽃다운 풀 우거진 나룻 터에는 손[客]의 길이 나누어졌고, 푸른 버들 늘어진 둑 가에는 농부의 집이 있다. 바람이 고요하니 거울 같은 수면(水面)에는 연기가 그린 눈썹처럼 가로질러 비치고, 세월이 오래니 담 머리에는 이끼가 자랐구나. 비가 그친 사방들에 격양가(擊 壤 歌) 들리는데, 앉아서 숲가에 차운 삭정이가 밀려온 것을 보노라.” 하였다.
○ 고려 조간(趙 簡)의 시에, “이 누의 풍경은 사람을 애타게 함이 많아, 쌍계 팔 영(雙 溪 八 詠)도 감히 더할 수 없으리. 깃발과 일산의 그림자는 초부(樵夫)와 목동(牧童)의 길에 엇갈리고, 피리와 거문고 소리는 아전과 백성들의 집에 떨어지네. 공중에 걸터앉은 처마가 훤하니 트여서 몸에 소름이 돋고, 물에 비치는 헌함이 높아서 눈에 아찔하게 현기증 인다. 옥도끼로 하늘 위의 광한전(廣寒殿)을 다듬어 이룬 것 같아서, 훨훨 나는 듯이 신선의 뗏목에 오른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였다.
○ 정포(鄭誧)의 시에, “말을 타고 총총히 두어 고을을 지나와서, 석양에 친구의 손을 잡고 다시 누에 오른다. 귀양은 왔을망정 물과 산이 좋은 것 싫지는 않고, 옛일은 가고 없는데 공연히 세월이 급박한 데 놀라네. 한쪽 벽만 비치는 희미한 등잔불 외로운 여관의 밤이요, 처마 곁의 성긴 나무에는 옛 동산이 가을에 잠겼어라. 이별한 뒤의 서로 생각하는 뜻을 알고자 하거든, 하늘가에 긴 강물이 곤곤히 흐르는 것을 보라.” 하였다.
○ 정 자후(鄭 子 厚)의 시에, “이 누(樓)를 일으킨 시적(詩的)인 안목이 공력(功力)을 소모함이 많아, 달 도끼와 구름 날[月 斧 雲 斤]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리라. 스스로 횡 취 각(橫 翠 閣)에 등림(登臨)하였는가 의심하노니, 누가 나로 하여금 태청 가(太淸 家)에 날아오르게 하였는가. 봄 강물의 푸르름은 포도주가 넘치는 듯 석양의 붉은 빛은 철쭉꽃이 만발한 듯. 지나가기를 기다리니 헌 개(軒 蓋)가 가까워 오는 것을 알겠구나. 나무 위에 때마침 까치가 우는 것을 보니.” 하였다.
○ 신천(辛 蕆)의 시에, “이 누의 좋은 경치는 말을 많이 할 까닭이 없다. 좋은 것을 찾고 기이한 것을 더듬는 일은 나보다 더한 이는 없을 것이니, 백 리나 이어진 뽕나무의 그늘은 술집을 감춰 버리고, 사산(四山)에 가득한 소나무의 푸르름은 관가(官家)를 지키네. 비 내려 어두운 강가에는 풀이 하늘과 맞닿고, 안개 짙은 항구에는 꽃이 집 밖에 피어 있네. 다만 오르기만 하고 만약 묵묵(黙黙)할 뿐이라면, 시인(詩人)으로서 광채 없음이 삭정이와 같으리.” 하였다.
○ 전 록 생(田祿生)의 시에, “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니 첩첩히 봉우리들도 많아라. 누(樓)가 높으니 손[客]의 한(恨)이 더욱 더하여진다. 왕 중선(王 仲 宣)은 부(賦)를 지어 우리 땅이 아니라 했고, 강령(江 令)은 돌아가기를 생각하였으나 집에 이르지 못하였네. 버들은 저 혼자 시름 속의 실을 흔들고, 개나리는 난리 뒤에 처음으로 꽃을 피웠네. 만약 강물을 봄 술[春酒]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가슴속의 찌꺼기와 삭정이를 시원히 씻으련만.”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동ㆍ남 지방의 많은 군현(郡縣)들을 고루 거쳐 왔더니, 영가(永 嘉)의 지세와 경치의 뛰어남이 더욱 더한 것을 알겠구나. 읍의 위치는 가장 산천의 형세 좋은 곳을 자리 잡았고, 인물은 장군이니 재상이니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집이 수두룩하구나. 논밭에 풍년이 드니 곡식들은 풍요하고, 누대의 봄꿈은 꾀꼬리와 꽃으로 둘러졌다. 모름지기 흐뭇이 취하여 오늘 저녁을 보내야겠다. 만 리(萬里) 길을 처음으로 바다의 뗏목을 타고 돌았으니.”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손[客]의 몸으로 높은 데 올라 굽어보니 느낌과 탄식이 많고, 게을리 노느라 귀밑머리에는 흰머리 늘어가네. 바닷가로 흘러 떠돌면서 공연히 고국을 그리워하고, 고향이라고 돌아 왔으나 내 집은 없다. 백 척(百尺)이나 높은 위태로운 난간은 푸른 공중에 떠 있고,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내리신 임금의 글씨는 황금빛 꽃처럼 찬란하네. 긴 내[川]는 멀리 은하수와 이어졌으니, 곧 멀리멀리 한 개의 뗏목을 띄우고 싶구나.” 하였다.
○ 고려 권 사복(權 思 復)의 시에, “누대 있는 곳이라면 어디를 가나 좋은 경치를 많이 볼 수 있지만, 이 누에 오르면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더하여진다. 갈대 언덕 저편에는 서쪽ㆍ남쪽으로 길이 뚫렸고, 뽕나무 우거진 마을에는 서너 채씩 농가가 있다. 영호 루(映 湖 樓) 세 글자의 어필(御筆)은 금빛으로 물에 비치고, 한 지방의 좋은 경치는 비단 위의 꽃처럼 광채를 더한다. 어릴 때에 강가의 버들을 잡아 꺾었더니, 노쇠하여 돌아와도 그 버들은 아직 삭정이가 되지는 않았네.”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에, “금년에 또 다시 영남 유람 길을 떠나, 남쪽 고을들을 두루 지나서 복주에 이르렀네. 땅이 후미지니 사람들이 검소를 숭상함이 자랑할 만하고, 정자(亭子)가 한가하여 손의 눈동자가 경치에 굳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산천이 어찌 흥망을 따라 고쳐지랴. 바람과 달은 응당 왼쪽에서나 오른쪽에서나 자유롭게 거둘 수 있으리라. 반나절을 누에 올라 굽어보니 가슴이 시원하여, 돌아가려다 가지 않고 거듭 머물러 있다네.” 하였다.
○ 조 효문(曹 孝 門)의 시에, “영남의 아름답고 고운 경치는 이미 많지 않은데, 지형과 경치 좋기는 화산(花 山)이 백배나 더하다. 꽃다운 풀과 맑은 냇물에 나그네 길 나누어지고, 푸른 버들 긴 대는 인가를 가린다. 호심(湖心)에 날이 따뜻하니 물고기가 물결을 불고, 담 모서리에 바람이 잔잔하니 제비가 꽃을 찬다. 남으로 뛰어가서 북으로 달리는 일을 어느 때에 마칠 것인가. 영주(瀛 洲)에서 장건(張騫)의 뗏목을 묻고 싶구나.” 하였다.
○ 최 수(崔 脩)의 시에, “강가의 누(樓)에 봄이 가득하여 경치가 많으니, 시인의 심정과 흥취는 전보다 더하구나. 온 성중의 복숭아와 오얏 꽃은 반안(潘 安) 고을과 같고, 양쪽 언덕의 동산과 못은 습 씨(習 氏)의 집과 같다. 목은(牧隱)의 새 글은 구슬이 달에 우는 것 같고,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고운 글귀는 붓에서 꽃이 피는 것 같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란하던 지나간 일을 구태여 물어서 무엇하랴. 늙은 나무에 조수(潮水)가 침노하니 누은 채 뗏목이 되었구나.”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영호 루(映 湖 樓)는 영가(永 嘉)의 이름난 누이다. 그 강과 산의 뛰어나고 큰 모양은 비록 진주(晉州)의 촉석루(矗 石 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 南 樓)에는 양보해야 할지도 모르나, 같이 낙동강(洛東江)의 언덕에 버티고 선 것으로 상산(商 山)에 있는 관수 루(觀 水 樓), 일선(一 善)에 있는 월 파정(月 波 亭)은 이 누와 더불어 갑을(甲 乙)을 다툴 수 없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 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이 고을에서 거가(車駕)를 멈추고 이 누에서 노닐며 즐기다가, 환도(還都)한 뒤에 서연(書筵)에 납시어 손수 누의 현액(懸 額)으로 큰 글씨 석 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이 고을 사람인 통판(通判) 신 자전(申 子 展)이 누의 제도를 더 크게 하여 현액을 걸었는데, 지금까지 지붕과 마룻대 사이에 빛나고 있다. 이것은 촉석루나 영남루에는 없는 것이다. 자전의 일한 것이 이제 백 년이 넘는다. 그 사이의 수령들이 어찌 그 기둥과 서까래와 마룻장과 난간의 썩고 흔들리는 것과, 지붕의 기와와 계단의 벽돌 떨어진 것, 뚫어진 것을 수리함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같지 않다. 인사(人事)를 곡진(曲盡)하게 닦는 체하는 자는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치며 문안을 드리기에 급하고, 한갓 규모만 지키는 자는 장부와 문서, 회계 때문에 겨를이 없다. 그러니 누가 황폐하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여, 나의 저축한 재용(財用)을 소비하기를 누가 달갑게 여기겠는가. 누가 날로 무너지고 헐어지는 것은 이상할 것 없다. 나의 동년(同年)인 제안(齊 安) 김질(金 耋)이 어사중승(御使中丞)으로 있다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오더니, 두어 해가 다 못 되어서 정치는 통 창(通暢)하고 사람들은 화합하며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또 토지와 노비에 대한 소송은 온 도내의 사람들이 감사(監司)에게 진정서(陣 情 書)를 내어 김 후(金 侯)에게 가서 판결 받기를 원하였다. 후가 매양 양편을 판결할 때에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신중히 재량(裁量)하여 결정하니, 승소한 자도 패소한 자도 다 만족해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판결 료로 받은 돈과 베가 창고에 차고 넘쳤다. 후가 이에 아전과 백성들에게 의논하여, 이 누를 고쳐 짓기로 하였다. 드디어 무신년 3월 어느 날을 기(期)하여 일 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방(吏 房)과 호장(戶 長)을 윤번(輪番)으로 일보게 하였다. 터는 옛것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면적의 척수(尺數)는 자못 더하고 덜한 것이 있다. 그 높이와 넓이는 종래의 것보다 3분의 1일 더하였으며, 그 붉고 희게 장식하는 것과 금빛을 올린 현액은 또한 빛나고 밝아서 모양을 바꾸었다. 겨우 두어 달을 지나서 그 공사가 이미 끝나니, 고을 백성들은 늙은이나 어린이나 모두 쳐다보며 감탄하여 다 신(神)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김 후(金 侯)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기술(記述)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스스로 헤아리지 아니하고 속으로 담 암(淡 菴)ㆍ목은(牧隱) 두 노선생과 더불어 그 사이에 이름을 나란히 쓰게 된 것을 기뻐하여, 드디어 붓을 잡고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김후의 정사함이 청렴하고 공평하며 까다롭지 아니하고, 움직이는데 법도로써 한다. 그 인사(人事)를 곡진하게 하는 체하는 자가 개돼지처럼 비열하게 할 뿐 아니며, 그 한갓 규모만을 지키는 자가 종이나 하인처럼 굴 뿐 아닌 데에 비교한다면, 김후는 아전과 백성들이 사랑하고 공경하여 공수(龔 遂)와 황패(黃霸)를 천백 년 뒤에서 다시 보는 것 같으니, 그가 누(樓) 하나를 위하여 공(功)을 일으키는 것이야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고래로부터 순후한 풍속을 일컬음이 이 고을만한 데가 없으니 그 백성은 부리기가 쉬울 것이다. 하물며 이 누는 편안히 놀기 위한 것이 아니며, 후세(後世)의 이름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옛 법을 떨어뜨리지 않는 데에 그친 것이겠는가. 문득 내가 더욱 느끼는 바가 있다. 옛날 성화(成化) 초년에 나는 몸이 군(軍) 관계의 직무에 소속되어, 울산(蔚山)의 융 막(戎 幕)에 종사한 것이 모두 2주년이었는데, 일찍이 일이 있어 이 고을을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기만 하면 반드시 이 누에 올라서 어슬렁거려 노니며 조망(眺望)하였는데 그 동쪽 30리는 바로 청부(靑 鳧 청송(靑松)) 땅이다. 사록(沙 麓)의 상서로운 구름이 왕성하게 하늘에 이어져 있으니, 곧 주실(周 室)의 유태(有 邰)의 경사(慶事)와 더불어 그 장구(長久)함을 같이 하리라. 그 북쪽 10 리는 곧 병산(甁 山)이다. 역적 견훤의 1천 군사가 험 조(險阻)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으나, 드디어 무너져 달아나게 되고 거짓 장수는 머리를 바쳤다. 왕씨(王氏)의 의기(義氣)가 동남(東南)에 크게 떨치게 된 것은 이 싸움이 조짐이 된 것이다. 서쪽으로 풍악(豐 岳)을 바라보며, 원봉(元 逢)이 먼저는 귀순(歸順)하고 뒤에는 배반하여 여섯 태사(太師)와 더불어 공명(功名)을 누리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남쪽으로 갈 나산(葛 那 山)을 바라보니 푸른 봉우리가 하늘을 떠받쳤는데, 그 연기와 구름과 초목이 완연히 김생(金生)이 글씨 배울 때에 붓을 휘두르고 먹을 뿌리던 남은 기세를 띠고 있는 것 같다. 왔다, 갔다하는 것에 게을러지면 반드시 배를 띄우고 노[棹]에 맡겨서, 만(灣) 안으로 굽어 나온 육지와 굴곡진 물가를 거슬러 올라가서 흘러 내려가곤 하다가, 혹은 밤중에 이르러서야 흥(興)이 다하여 돌아오고 하였다. 모든 누의 좋은 경치는 왼쪽에서나 오른쪽에서나 만날 수 있어서 얻은 바가 많았었다. 이제 이미 20여 년이 지나갔으나 오히려 잊을 수 없는 생각이 가슴속을 오락가락한다. 혹이나 김 후의 임기가 차기 전에 나로 하여금 남쪽으로 돌아올 계획을 성취하게 한다면, 곧 마땅히 하인 한 사람, 말 한 필의 간편한 차림으로 다시 이 호수 위에 노닐어, 후(侯)와 더불어 누에 올라 옛일을 이야기하며, 또 시(詩)를 지어 고을 백성들의 좋아하는 칭송에 이을[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모은 루(慕 恩 樓) 부의 서쪽 5 리에 있다. 세조(世祖) 때에 부사(府使) 한 치의(韓 致 義)가 세우고, 권반(權 攀)이 명명하고 기(記)를 지었다. 향 사당(鄕 射 堂) 부의 성(城) 서쪽에 있다. 사청(射 廳) 부의 성내에 있다.
○ 이석형(李石亨)의 기(記)에, “지금 임금의 즉위 13년에, 나는 팔도체찰사(八道 體察使)로서 경기ㆍ충청ㆍ전라의 각 도를 순력(巡歷)하고, 다음으로 본도(本道)에 이르렀다. 본도의 지형과 좋은 경치는 다른 도에 비하여 가장 뛰어나다. 그리고 이 부(府)는 도의 웅 번(雄 藩)으로서, 또한 1ㆍ2위의 아래에 있지 않다. 객관에 내린 이튿날 부사(府使)와 통판(通判)이 청하기를, ‘본부는 주진(主鎭)이 되어 있으니 열무(閱武)와 습사(習射)에 사용할 장소가 없을 수 없으므로, 남문(南門) 안에 참 루(塹 壘)를 쌓아서 터를 만들고 한 채의 집을 세웠는데, 한가운데에 2칸을 세우고 좌우쪽에 각기 날개를 붙였으니, 땅은 시원하고 처마는 비어서 활 쏘는 일에 편의(便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청(射 廳)이라고 하고, 전월(前月)부터 시작하여 이달 초에 일을 마쳤습니다. 청(廳)이 처음 낙성되고 그대가 또 마침 왔으니 다행히 경개(梗槪)를 기술(記述)하는 일을 사양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내가 생각하여보니, 풍경을 구경하고 즐기기 위하여 누대 짓기를 좋아하는 이가 많다. 어찌하여 그대는 그러하지 아니하고 홀로 활 쏘는 일에 유의하였을까. 활 쏜다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그런 까닭에 활 쏘는 것으로써 그 사람의 덕행(德行)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확 상포(矍 相 圃)에서 활을 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섰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군자는 다투는 일이 없으나 반드시 활 쏘는 일에서는 다투느니, 서로 읍(揖)하고 사양하여 오르고 내려와서 마시나니, 그 다투는 것은 군자의 다툼이다.’ 하였다. 활 쏜다는 것이 일에 있어서 진실로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이니, 그대가 취하는 바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짝에게 읍(揖)하고 서로 사양하여 그 의식을 절도 있게 하니, 예(禮)가 여기에서 서게 되고, 벌주(罰酒)의 잔을 들어서서 마시어 그 벌(罰)을 밝히니, 의(義)가 여기에서 시행된다. 예(禮)가 이미 바로 서고 의(義)가 이미 시행된다면, 비록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일지라도 또한 이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한 고을임에랴. 생각하건대 영재(鈴 齋) 관아(官衙)에 날이 길고 소송하는 뜰에는 사람이 드물 때에, 책상을 치우고 헌함에서 내려와 술을 준비하고 과녁을 마련하여 편안하고 한가롭게 활쏘기를 즐기다면, 또한 한때의 기상을 보기에 넉넉할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긴장(緊張)하기만 하고 늦추지 아니함은 문왕ㆍ무왕도 능히 하지 못하고, 늦추기만 하고 긴장하지 아니함은 문왕ㆍ무왕도 하지 않는다. 한 번 긴장하고 한 번 늦추는 것은 문왕ㆍ무왕의 도(道)이다.’ 하였으니 나도 그대에게 또한 이것을 기대한다. 만약 정사는 게을리 버려두고 한갓 활 쏘는 것만을 일삼으면서 말하기를, ‘활쏘기는 남자가 할 일이다.’ 한다면 이것은 나나 그대가 취할 바 아닌 것이다. 부사 한 치의(韓 致 義)군은 양 절 공(襄 節 公)의 둘째 아들이다. 백성을 안무(安 撫)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민첩하여, 선군(先君)의 풍모가 있다. 그런 까닭에 내 그를 위하여 즐겨 기(記)를 쓰고, 이어서 시(詩)를 짓는다. ‘처음으로 새 집[新 閣]에 오르니 하늘에 노니는 것 같아, 이것이 남쪽 지방의 첫째 고을임을 알겠다. 멀고 가까운 강과 산은 지맥이 웅장하고, 아침저녁의 구름과 비는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활 쏘는 데는 다투어 버들잎을 뚫으며 대적할 자 없음을 자랑하고, 취해서 금잔을 기울이며 무르익도록 거두지 아니한다. 이름난 지역을 간 것이 지금까지 매우 많았지만, 풍경에 빠져 이곳에 오래도록 머무르네.’ 하였다.
영 춘 정(迎 春 亭) 부의 동쪽 5 리에 있다. 옛 이름은 천재 정(千載 亭)이다. 영락(永樂) 18(1420)년에 부사(府使) 최관(崔 關)이 천태종(天台宗)의 중 의호(義 湖)로 하여금 시주(施主)를 모아서 짓게 하였다. 매년 입춘(立春) 날에는 제수를 차리고 여기에서 아침 해를 맞이한다.
영은 정(迎 恩 亭) 부의 북쪽 5 리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일찍이 여기에 올랐다가 현액(懸 額)을 제명(題名)하였다. 『신증』 망호 루(望 湖 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부사 박 호 겸(朴 好 謙)이 세운 것이다.
삼 귀 정(三 龜 亭) 풍산 현(豐 山 縣)의 서쪽 6 리에 있다.
○ 성현(成俔)의 기(記)에, “상사(上舍) 김 세경(金 世 卿) 씨가 자기 고향인 풍 산 현 삼귀정의 상황으로써 나에게 기(記)를 요구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풍산은 안동 부(安東 府)의 속현이다. 서쪽 5 리 남짓한 곳에 마을이 있는데 금산 촌(金山 村)이라고 하고, 그 동쪽 20보(步) 쯤에 봉우리가 있는데 동 오(東 吳)라고 한다. 그 높이가 겨우 60길[丈]인데 정자는 그 봉우리의 머리에 걸터앉았다. 동쪽ㆍ서쪽ㆍ남쪽은 모두 큰 들인데 그 지세가 시원하게 틔여서, 조망(眺望)이 끝이 없다. 정자의 남쪽에는 곡 강(曲 江)이라고 하는 큰 내가 있는데, 곧 낙동강(洛東江)이다. 그리고 마라(馬 螺)라는 못[澤]이 있는데, 못 위에 절벽이 힘차게 솟아 높이가 만길[萬丈]은 될 것이다. 강 위에는 긴 수풀이 잇따라 10 리에 뻗쳤다. 정자의 북쪽에도 또 산이 있는데, 학 가산(鶴 駕 山)이라고 한다. 쌍계(雙 溪)가 이 산 사이에서 나와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며, 그 물이 합수(合水)하는 곳이 병 담(屛 潭)이다. 혹은 화천(花 川)이라고도 한다. 그 산의 봉우리에 또 석벽이 있는데 천 길이 넘으며, 병벽(屛 壁)이라고도 한다. 쌍계의 북쪽에는 기묘한 바위가 있는데 붕 암(鵬 巖)이라고 한다. 시내 양쪽 가에는 밤나무 천여 그루가 있어서 층층의 푸르름이 어지럽게 펴지고 있으며, 정자 아래에는 벼논과 보리밭이 있어서 봄이면 푸른 싹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누런 구름 같은 벼가 물결친다. 진실로 뛰어나게 경치 좋은 곳이다. 화산(花 山)은 김씨(金 氏)의 관향(貫鄕)이다. 김 씨는 우리나라의 큰 벌족(閥族)으로서, 그의 외조(外祖) 권 상국(權 相國) 제 평 공(齊 平 公)은 조정에 높은 명망이 있었다. 권씨(權 氏)는 곧 그의 따님인데, 나이가 88세이다. 그의 아들 영전(永 銓)ㆍ영추(永 錘)ㆍ영철(永 鐵) 등이 다 근읍(近邑)의 수령이 되어서 봉양을 지극히 하며, 또 이 정자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놀고 쉬는 곳으로 하였다. 정자에 돌 세 개가 있는데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다. 그래서 삼 귀정(三 龜 亭)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매양 좋은 때와 길(吉)한 날을 만나면 어머니의 가마를 붙들고 정자에 올라가서, 노래자(老萊子) 같은 채색 옷들이 앞뒤에 빛나게 비친다. 뜰에 가득한 자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모시니, 어머니는 엿[飴]을 머금고 즐거워한다. 그 즐거움을 어찌 이루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세상 사람은 집이 있으나 좋은 경치를 얻지 못하며, 좋은 경치는 있으나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지금 김 씨 집안은 땅은 좋은 곳을 얻고, 사람은 어짊을 얻었으며, 어버이는 또 그 장수(長壽)함을 얻었으니,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고루 갖추어졌다. 어찌 선(善)을 쌓고 경사(慶事)를 기른 소치(所致)가 아니겠는가. 생물의 수명은 거북만큼 긴 것이 없고, 물건의 견고함은 돌만한 것이 없다. 자식은 누구나 어버이의 장수가 거북처럼 길고 돌처럼 견고하기를 원한다. 이제로부터 이후로 증손(曾孫)ㆍ현손(玄孫)에 이르고, 증손ㆍ현손으로부터 잉손(仍孫 7대 손자)ㆍ운손(雲孫 8대 손자)의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어버이 섬기기를 지금 하는 것처럼 하게 하여 대대로 바꾸지 않는다면, 곧 고을은 장수하는 고을이 되고 사람은 장수하는 백성이 되어서, 마땅히 청사(靑史)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나 같은 자는 비록 조그마한 고향이 있기는 하지만 명리(名利)의 고삐에 얽매어져서 퇴로(退老)할 방법이 없으며, 또 영근(靈 根)이 이미 멀어져서 부모 모두 상사가 많았으니, 비록 오정(五鼎)의 영화가 있어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쌀을 져 온 자로(子路)와 같은 일을 하고자 하여도 마침내 할 수 없으니, 더욱 김씨의 여러 어진 형제가 능히 그의 어버이를 봉양하여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을 부러워한다.” 하였다.
환 수 정(環 水 亭) 내성 현(奈 城 縣)의 서쪽에 있다.
귀래 정(歸 來 亭) 부의 동쪽 3 리에 있다. 유수(留 守) 이 굉(李 硡)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서 와부 탄(瓦釜 灘) 위에 정자를 지었다.
○ 이우(李 堣)의 시에, “인끈[印 紱]을 풀어놓고 일찍 돌아와서, 두 물이 나누이는 곳에 정자를 지었네. 내와 산은 주인이 있는 것을 알겠고, 갈매기와 백로는 무리를 짓는구나. 차조가 익으니 먼저 술 빚는 데에 쓰고, 마음이 한가로우니 구름으로 화(化)하려 하네. 은거하며 이곳에서 늙으려 할 뿐 임금의 부름을 받으려는 것은 아니라네.” 하였다. ○ 더듬어 천년의 비경(祕 境)을 깨뜨리고, 맑고 새롭게 위에 의거하여 노닌다. 동쪽에는 두 갈래의 물이 와서 합하고, 서쪽으로는 긴 한 줄기 숲을 안았다네. 안개에 가렸을 땐 절인가 하였는데, 환하게 개이자 호수 위의 누(樓)라네. 오두(遨 頭)가 가을에 농사를 살피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오래 머무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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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눈 감고, 입 닫고, 그저 돌아가는 대로, 그것에 순응(順應)하여, 둥글둥글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환희(歡喜)에 만족하면서.......!
2012년 03월 31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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