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구의 어머니 한산이씨는 또한 집안 살림에 보태려고 누에를 친 일도 있었는데, 그에 대해서도 서유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머니는 누에도 치셨는데, 뽕나무 때문에 이웃 여자가 집에 찾아와 시끄럽게 한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부자 (父子) 가 모두 월급을 후하게 받고 있는데 어찌해서 이렇게 자잘한 일을 해서 소란스럽게 하냐고 하면서 그만두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따로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공의휴 (公儀休) 가 아욱을 뽑고 문백 (文伯) 의 어머니가 옷감을 짰다고 하는데, 이런 일들은 부인의 행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너의 아버지가 싫어하시는 일을 구태여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시면서, 이후에는 평생 누에를 (더 이상) 치지 않으셨다."
김미란 교수는 위에 나오는 이웃 여자의 신분이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추정컨데 분명히 행세 좀 하는 양반집 여자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선 감히 부자가 관료로 대궐에 들락날락하는 행세하는 대갓집 며느리아씨께 와서 시비걸며 시끄럽다느니, 조용하라느니, 아님 집어 치우라느니 등의 막말을 당시시대상황을 봐서 도무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점잖고 체통을 지키는 대구서씨 선비집안이여도, 평민여인네가 함부로 대들 상대는 결코 아니였다. 물론 대구서씨 서호수 가문이 몰락하여 일반인들에게 만만하게 보이게 되는때가 생기는데 그것은 누에치기 때보단 좀 더 뒤의 일이다. 여튼 한산이씨와 이웃여자는 누에를 치면서 뽕나무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었던 것으로 서유구는 기록하였다. 또한 위의 기사를 통해 우리는 한산이씨가 나름 생활고 (?) 를 덜고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고자 자발적으로 가정경제 살리기운동에 팔을 걷고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가계부가 그리 넉넉하진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나, 남편인 서호수가 중지시키니 그후부턴 한산이씨가 평생 누에치기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서호수 살아생전엔 그런데로 적당한 선에서 품위유지가 가능했던 가계부이기도 하였다.
근데 사실 서유구 집안은 후대로 오면서 살림이 더욱 어려워진다. 서유구의 형되는 서유본 (徐有本, 1762-1822) 역시 이름난 실학자로 한 몫을 했는데, 그의 부인 이빙허각 (李憑虛閣,1759-1824) 은 조선시대의 유일한 여성실학자로 평가받은 학문에 뛰어났던 부인이였다. 빙허각 이씨가 가정 백과사전으로 유명한 <규합총서 (閨閤叢書)> 의 저자이다. 이빙허각은 유복한 환경 덕에 어려서부터 독서를 통해 키운 총명함으로, 나중 대구서씨 시댁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혼인 후 이빙허각은 조선의 일반 여인들과는 달리 시집살이를 하는 대신 당대 최고의 실학자인 시할아버지 서명응과 시아버지 서호수에게 직접 학문을 배우고 익히며 독서를 계속했다. 남편 서유본 또한 공부하는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이빙허각 시댁 대구서씨집안은 가문 대대로 수집한 수많은 서적을 보존하고 있었다. 독서를 좋아했던 이빙허각에게 시댁의 서고야말로 보물창고였다. 집안에 이런 사설도서관을 두고 이빙허각과 남편 서유본은 학생 부부로 행복한 책 읽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조 시대 규장각을 창설하는 데 공을 세운 시할아버지 서명응이나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했던 시아버지 서호수가 보기에 어린 부부가 나란히 책을 읽는 모습은 대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달성 서씨 가문이 지닌 최고의 보물인 장서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며느리를 들였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시아버지 서호수가 세상을 떠나고 가정생활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서유본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43세의 늦은 나이로 말단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관직에 나간 지 채 1년도 되기 전, 숙부인 서형수 (徐瀅修, 1749-1824) 가 ‘김달순 (金達淳) 의 옥사 사건’ 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면서 그의 관직생활은 끝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건으로 대구서씨 가문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벼슬을 사직한 서유본은 서둘러 서울 외곽인 지금의 용산 부근으로 이사했다. 그 와중에도 이빙허각 부부는 집안의 보물인 책들을 빠짐없이 챙겼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명문가에서 몰락한 양반 신세로 전락한 이빙허각 부부는 갑자기 닥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동안 허드렛일조차 하지 않고 독서에만 전념하던 이빙허각 부부가 생활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스스로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실학자다운 발상이고 행동이었다. 이빙허각은 본디 총명했던 여성답게 독서를 통해 얻은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살림을 꾸리는 한편 직접 차밭을 일구고 길쌈을 하며 당당하게 가난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주경야독을 해가며 어찌보면 부부의 공동합작품이라 할 수 있는 눈물겨운 인고의 세월을 거친 매스터피스가 탄생하였으니 바로 <규합총서> 였던 것이다.
서유본보다 두 살 아래인 서유구는 형과 형수의 힘든 생활을 잘 알고 있었는데, 형 집안의 경제사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형 집에 가서 형수를 뵐 때면 늘 형수 베치마 주머니에 끈으로 묶은 권계 (券契, 어음증서) 들이 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전당포에 저당 잡힌 후 찾지 못한 물건의 증서들이었다.”
당시 양반가 여성들이라도 살림살이가 여의치 않아서 자금을 빌려 써야 할 경우 지금에처럼 전당포에 가서 값나가는 물건을 담보로 맡기고 자금을 융통해 차용하여 썼음을 알 수 있는 기사이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당시 사회의 화폐경제가 발달하였음에 부과적으로 생겨난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당포 이용은 형수인 이빙허각에게만 그친게 아니라 바로 서유구 부인인 여산송씨 (1760-1799, 송익상의 딸) 도 마찬가지였다...
***알림: 김미란 교수 (수원대) 저 <조선시대의 양반가 여성의 생애와 풍속> 책자등에서 자료를 발췌하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