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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구국(救國)의 간성(干城) 정충신(鄭忠信)의《만운집(晩雲集)》
1. 가계와 생애
1) 가계
정충신(鄭忠信, 1575~1636)의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봉호(封號)는 금남(錦南),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금성정씨세보(錦城鄭氏世譜)》에 의하면 금성 정씨는 하동 정씨(河東鄭氏)에서 분관(分貫)하여 정성(鄭盛)을 시조로 삼는다.
3세조 정지(鄭地)는 공민왕 때 왜구(倭寇)를 평정할 방책을 왕에게 올려 전라도 안무사(全羅道按撫使)가 되고, 뒤에 다시 순천도 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순천ㆍ낙안(樂安)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였다. 4세조 정경(鄭耕)은 문과에 급제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칠도관찰사(七道觀察使)를 지냈으며, 5세조 정종(鄭種)은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ㆍ충청도 관찰사와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6세조 정서(鄭鋤)는 문과에 급제하여 함평 현감을 지냈으며, 7세조 정확(鄭穫)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과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냈다.
정충신의 고조 정원종(鄭元宗)은 통훈대부이며, 증조 정천(鄭荐)은 음직으로 임피 현령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정석주(鄭錫柱)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정륜(鄭倫)은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추증되고 금천군(錦川君)에 봉작되었다.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李氏)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이인조(李仁祚)의 딸로, 정경부인(贈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2) 생애
정충신은 1575년 12월 29일에 광주(光州)의 옛 향교동(鄕校洞 지금의 지산동)에서 태어나 1636년 5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북방에서 후금(後金)이 발호(跋扈)하여 급박하게 전개되는 정세 속에서 서북방을 방어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지략과 덕망을 겸비한 정충신은 인조반정 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정묘호란을 전후하여 명분과 대의로 일관하는 조정 관료에 맞서 현실적인 대응을 펼치는 등 국가와 백성들의 안위만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조부로부터 모두 사졸(士卒)로서 병영에 예속되었으며, 그 또한 광주에서 급사(給事)로 복무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에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이 왜적을 토벌한 상황을 의주의 행재소에 보고하려 할 때 정충신이 그 일을 자청하여 의주 행재소에 전하였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막하(幕下)에 두어 《좌전(左傳)》ㆍ《국어(國語)》ㆍ《사기(史記)》 등을 가르쳤는데, 마침 의주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무과 병과(武科丙科)에 올랐다. 1618년 1월에 이항복이 유배되자 북청(北靑)의 적소(謫所)로 따라가 《북천일기(北遷日記)》를 지었고, 5월에 그가 졸하자 받들고 포천(抱川)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는 심상 삼년(心喪三年)을 입었다. .
1602년 겨울에 주청부사(奏請副使) 장만(張晩)을 수행하여 연경(燕京)을 다녀왔으며, 1607년 가을에는 함경 감사 장만을 따라 함경감영으로 가서 부성(府城)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1608년에 조산 만호(造山萬戶)가 되어 북로(北虜)에 잡혀갔던 사람들을 쇄환(刷還)해 왔다.
1614년(광해군6)에 조정의 혼란을 보고 은둔할 생각으로 광양(光陽)의 섬진강 서편에 집을 지었으나, 이듬해에 포이 만호(包伊萬戶)에 제수되었다. 1617년에 통신사 오윤겸(吳允謙)의 군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621년 2월에 만포 첨사(滿浦僉使)가 되었다. 삼남(三南)에서 뽑혀온 군사들이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질병에 걸린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는데, 콩죽을 쑤어 나눠 먹여 사망자가 한 사람도 없게 하였다. 1622년 3월에 평안도 병마좌우후(平安道兵馬左虞侯)가 되었다.
1623년(인조1) 3월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여 공에게 의주부윤(義州府尹) 정준(鄭遵)을 이참(莅斬)하도록 명하고 권영본부사(權領本府事)로 삼았으며, 강변의 여러 고을을 거쳐 안주목사 겸 방어사(安州牧使兼防禦使)로 이배(移拜)되었다.
1624년 1월 22일에 평안도 영변에서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으로 진격하자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휘하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서 2월 11일에 이괄을 경성(京城)의 안현(鞍峴)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3월에 조정에서 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의 공신 호를 내리고 금남군(錦南君)으로 봉하였다. 8월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영변 대도호부사가 되었다.
1627년 1월 13일 새벽에 청나라가 의주(義州)를 침범하자 비국(備局)의 주청으로 부원수가 되어 관서(關西)에 나가 지휘하였다.
1629년 4월에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 되고, 5월에 오관산 기우제관(五冠山祈雨祭官)이 되어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왔다. 12월에 세 차례에 걸쳐 정사(呈辭)하여 체차되었다가 다시 도총관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월에 자청하여 수군부원수(水軍副元帥)가 되어 8월에 파병(罷兵)하라는 유지(有旨)를 받고 서울로 돌아와 복명하였다.
1631년 3월에 상이 서쪽 교외에서 영칙(迎勅)할 때 별운검(別雲劍)으로 배종(陪從)하고, 4월에 도총관이 되었다. 8월에 청천강을 건너가 강 서쪽 각읍 산성의 형세를 순심하고 숙천으로 돌아왔으며, 철산(鐵山)의 운암산성(雲巖山城)을 수축할 것을 청하였다. 11월에 가도(椵島) 군병들이 난을 일으켰으므로 철산의 사포(蛇浦)에 진주(進住)했다가 윤11월 초에 안주로 돌아왔다.
1632년 1월에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선천 방어사(宣川防禦使) 임경업(林慶業)이 암암리에 선비들을 부추겨 정충신을 배척하는 소(疎)를 올리게 하였는데,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득실을 밝혀 임경업이 심문을 당하게 되었다.
1633년 2월 2일에 체찰사 김시양(金時讓)이 안주에 이르고 그날 밤 비변사의 관문(關文)이 도착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요구한 증폐(增幣)를 불허하고 사신을 보내 절교(絶交)를 알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조정의 계책이 잘못되었음을 체찰사와 논한 정충신은 7일에 김대건(金大乾)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안주에 이르자 그의 행렬을 안주에 우선 억류하고 김시양과 함께 절교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임의로 사행(使行)을 억류한 죄를 청하여 당진(唐津)으로 유배되었다가 5월에 사면되었다.
1634년 1월에 서용(敍用)하라는 특명이 내려 3월에 도총관이 되고, 6월에 포도대장이 되었으며, 7월에 내섬시 제조(內贍寺提調)가 되었다. 10월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듬해 3월에 백사 이항복의 문집을 간행하여 세상에 반포하였다. 이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네 처의 편지를 보니, 굶고 앉아 날을 보낸다고 하더구나. 차목(差木) 3필을 보내니, 선아(善兒)가 배고파 보채는 데에 구완하도록 해라. 영중(營中)이 텅 비었고 백사 상공의 문집을 간행하느라 물력(物力)을 탕진하여 아비 된 도리를 할 수 없어 안타깝다.”라고 하였다. 고관의 집안인데도 가족들이 굶주리는 형편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청렴한 관리였는지 알 수 있다.
1636년 3월에 조정에서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和親)을 단절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국가의 존망이 올해에 결판날 것이다.’ 하며 크게 탄식하였다. 이로부터 병세가 더욱 심하여 5월 4일 반송방(盤松坊) 집에서 졸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인조께서 “고굉(股肱)을 잃은 것처럼 심히 서글프다.” 하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예장(禮葬)의 물건을 하나같이 횡간(橫看)에 따라 즉시 제급(題給)하도록 하였다. 또한 왕의 동옷[襦衣]과 도포(道袍) 각 한 벌을 내려 염습하게 하였다.
정충신은 백사 이항복을 사사(師事)하였으며, 백사 문하의 명사들과 두루 사귀어 장유(張維)ㆍ이연양(李延陽)ㆍ최명길(崔鳴吉)ㆍ정홍명(鄭弘溟)과 더욱 막역하였다. 《금판(金版)》ㆍ《육도(六弢)》와 제병가(諸兵家)의 부류를 본디 전문하였으나, 감석(甘石)ㆍ감여(堪輿)ㆍ복서(卜筮)ㆍ성명(星命)ㆍ예술(藝術)에 관한 서적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였다. 백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검(劍)을 버리고 책을 가까이한다면 일세(一世)의 고사(高士)들보다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은 그를 애도하는 글에 “청명한 기상은 태허(太虛)와 합하고, 단묘(端妙)한 자태는 화도(畵圖)에 머물러 있도다. 청빈한 지조로 옷은 몸을 가리지 못하고, 좌마(左馬)의 글로 홀로 옛사람을 좇았도다.”라고 하였다.
2. 문집의 편찬 및 간행
저자의 행적과 시문은 1684년(숙종10)경에 이선(李選)과 김만기(金萬基) 등에 의해서 수습, 정리되었다. 그리고 1732년(영조8)에 저자의 현손(玄孫)인 정도언(鄭道彥)이 원경하(元景夏)에게 서문을 받았다. 이 유고가 1759년(영조35)에 곡성 현감 정문흥에 의해서 활자로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초간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초간본의 대본으로 보이는 사본(寫本)이 규장각에 《금남유집(錦南遺集)》(奎6900)ㆍ《금남사적(錦南事蹟)》(奎7682) 등의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는데, 《금남사적》에는 원경하의 서문이 들어 있다.
그 후 1894년(고종31)에 저자의 7대 방손(傍孫)인 정봉현(鄭鳳鉉)이 초간본을 증보(增補)하여 기우만(奇宇萬)의 도움으로 재편(再編)하고 기우만에게 서문을 받아 6권 2책의 활자본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이 중간본은 규장각(奎7169),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856),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769)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94년에 활자로 간행된 중간본으로 규장각 소장본이다.
3.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3권, 附錄 3권 合 2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894년(고종31)에 기우만이 쓴 서문과 1732년(영조8)에 원경하가 쓴 구서(舊序)가 실려 있다. 이어서 원집목록(原集目錄)이 있다.
원집 권1에는 30제(題) 32수의 시(詩)가 수록되어 있다. 오언절구 1수, 칠언절구 20수, 칠언율시 3수, 오언율시 8수이며, 시체(詩體)와 연도의 구분이 없이 배열되어 있다. 〈적당진유감(謫唐津有感)〉은 1633년 3월에 당진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시로 59세 노신(老臣)의 충성심이 담겨 있으며, 〈선유(船遊)〉·〈독노자유감(讀老子有感)〉·〈독남화경유감(讀南華經有感)〉은 격변하는 세상에 대한 혐오와 비판 및 은거하려는 심정을 피력하였다. 〈우운(雨雲)〉에서는 백성들의 안락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권2에는 소(疏) 11편과 차(箚) 3편이 수록되어 있다. 〈봉사노정청주문천조이자모진소(奉使虜庭請奏聞天朝移咨毛鎭疏)〉는 1621년 만포 첨사(滿浦僉事)로 있을 때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올린 것으로, 자신의 사행(使行)을 명나라 본국과 조선 국경 근처에 진을 치고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미리 알려서 양국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게 해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사평안병사소(辭平安兵使疏)〉는 1624년 8월 평안도 병사에 제수되었을 때 중병을 이유로 사양하는 글이다. 〈위장옥성변방소(爲張玉城辨謗疏)〉는 1626년 남이흥(南以興)과 연명으로 올린 상소로, 창녕 현감(昌寧縣監) 조직(趙稷)이 이괄의 난 당시 도원수(都元帥)였던 장만(張晩)의 처신을 비난하고 논공이 불공평하다는 상소를 올리자 이 상소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글이다. 〈사부원수소(辭副元帥疏)〉는 1628년 5월에 병이 심해져 부원수의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사양하는 글이다. 〈사원수급비국당상소(辭元帥及備局堂上疏)〉는 1628년 11월에 기온이 내려가면서 병이 재발하여 직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다시 부원수와 비국 당상의 직책에서 물러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글이다. 〈여체찰연명소(與體察聯名疏)〉는 1633년 체찰사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올린 것으로, 청나라에 절화(絶和)를 고하러 가는 사신 김대건(金大乾)을 의주에 억류(抑留)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전쟁보다는 화의 쪽으로 이끌어 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 〈논군무차(論軍務箚)〉는 1630년 8월 광량(廣梁)에 있을 때 올린 것으로, 정묘호란 이후 북쪽 국경 지역의 군사적 상황을 서술하면서 국경 수비의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글이다. 〈우논군무차(又論軍務箚)〉는 1631년 6월에 올린 것으로, 국경 지역의 수비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글이다. 〈우논군무차(又論軍務箚)〉는 1631년 8월에 올린 것으로, 정묘호란 때 용만성(龍灣城)이 쉽게 적에게 함락되었던 경험에 근거해서 용만성이 수비거점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점을 주장하는 글이다.
권3에는 서(書) 44편, 제문(祭文) 1편, 축문(祝文)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여임유격서(與任遊擊書)〉는 1628년 1월 명나라 유격(遊擊) 임세과(任世科)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황독부서(上黃督府書)〉는 1631년 11월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황룡(黃龍)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장유격서(與張遊擊書)〉는 1631년 윤11월 명나라 유격 장괴(張魁)에게 보낸 편지이다. 근래에 명나라와 조선 병사들 사이에 헛소문이 많이 나돌아 진위를 가리기 어려웠던 차에 도독 황룡이 편지로 우호 관계를 재확인하고 더불어 가도의 상황을 자신에게 상세히 알려 주어 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하면서 장괴의 도움에 감사하고 가도의 변란이 잘 마무리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는 내용이다. 〈여심부총서(與沈副摠書)〉는 1631년 반란자들에 의해 구금된 황룡을 구해 낸 심세괴의 충정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가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육지로 내보낸 백여 명의 명나라 사람들을 빨리 가도로 다시 불러들일 것을 요청하는 글이다. 〈여강홍립서(與姜弘立書)〉는 1627년 금나라와 화의를 맺은 직후 강홍립(姜弘立)에게 보낸 편지이다. 하급 부대에서 약속을 어기고 노략질을 하므로 우리가 이에 대해 보복할 수도 있지만, 맞대응하지 않겠다 하고, 강홍립에게 주선을 바라는 내용이다. 〈답최완성서(答崔完城書)〉는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에게 금나라와의 긴장이 소강상태임을 알리고 군량이 부족한 아군의 현황을 설명하면서 안주성을 중심으로 성문을 닫고 지키는 전술을 시행할 것임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답평안감사김서(答平安監司金書)〉는 평안도 관찰사 김시양(金時讓)에게, 가도(柯島)에서 난을 일으킨, 유흥치를 치는 작전 수행에 있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는 글이다. 〈여정기옹서(與鄭畸翁書)〉는 정홍명(鄭弘溟)에게 병 때문에 직접 안부를 올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병이 조금 나으면 찾아가 만나겠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아울러 아들 정빙(鄭砯)에게 보내는 편지가 8통인데 1635년에 보낸 편지는 아들이 휴가를 받아 올 줄 알았는데 못 오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섭섭하다는 것과 며느리가 양식이 떨어졌는데도 도와주지 못하여 안타깝다는 내용이다. 〈제옥성부원군장공문(祭玉城府院君張公文)〉은 1629년 장만(張晩)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서산장사개기시축(瑞山庄舍開基時祝)〉은 1633년 서산(瑞山)에 별장 터를 닦을 때의 축문이다. 〈고아마힐국사신문(告阿摩詰國祀神文)〉은 1633년 별장을 지을 때 아마힐봉 국사신께 올리는 제문이다.
부록에는 앞에 목록이 있고, 권1에 교서(敎書) 3편, 어제문(御製文) 1편, 제문 3편, 만시(挽詩) 13수, 권2에 세계(世系), 연보(年譜), 권3에 시장(諡狀), 척록(摭錄)이 수록되어 있다. 교서는 정충신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책봉하는 교서, 1657년 정충신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봉하는 교서, 본인과 부모ㆍ처자 등의 작위를 3등급 올려주고 노비와 토지ㆍ물품 등을 하사하는 내용의 교서 등이다. 시장(諡狀)은 1684년(숙종10)에 김만기(金萬基)가 지은 것으로, 이 시장에 의하여 충무(忠武)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척록(摭錄)은 다른 사람의 저술에 나오는 저자에 관한 자료를 인용하여 수록한 것이다.
권미(卷尾)에는 5대손 정문흥(鄭文興)이 쓴 초간본(初刊本) 발문(跋文)과 1894년에 7대 방손(傍孫) 정봉현(鄭鳳鉉)이 쓴 중간본(重刊本)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4. 문집의 사료적 가치
정충신이 활약한 17세기 초에는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하여 명나라와 다투는 혼란한 시기였다. 1621년 3월에 심양과 요양이 누르하치에 의해 함락되자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은 패잔병을 이끌고 압록강 주변의 진강을 점령하고, 그 후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명군과 난민 1만 명이 머물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에 군량을 강요하여 식량을 징발하였는데, 때로는 황해도와 평안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
정충신은 적정(敵情)을 탐지하여 현명하게 견제하였으며, 명나라 장수의 무리한 요구도 잘 설득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본 문집의 〈연보〉, 소차(疏箚), 서(書) 등에 잘 드러나 있다.〈연보〉에서 인용한 저자의 일기나 장계의 내용은 군무를 수행하던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특히 후금과의 관계는 전쟁보다는 화의 쪽으로 이끌어 갈 것을 주장하였다. 명나라 유격(遊擊), 도독(都督), 부총(副摠) 등에 보낸 편지에서는 조선과 후금의 관계를 이해시키며 후금을 자극하지 말라고 요청하거나 명군과 우리 군졸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외교적인 활동이 잘 드러나 있다.
이같이 본 문집은 17세기 초의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조선의 관계와 국난 기의 조선 조정의 대처 등을 이해하는 데 사료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