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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영통 보건소에 집사람과 이른 아침 움직였다.
금요일 코로나 검사를 먼저 받았던 직장에 다니는 딸이 코로나에 걸려서 동거인인 가족도 검사를 받으라는 딸 문자를 받고 냅다 달려 갔다.
호기심 약간,
아직까지 자가 키트를 이용한 적은 있었지만 보건소 방문은 처음이었다.
안내 직원이 시키는 대로 웹을 깔고, 내용을 기록하였다.
코로나 검사를 기다리는데 저학년의 정도의 초등생 두 형제가 검사를 받기 싫어 울며불며 떼쓰는 모습이 안스러워 보이기도 하였다. 1군데서 하다가 사나운 남자의 동작과 달리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에게 처음으로 당첨되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고 마무리하였다. 별 증상이 없어서 확진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요일 아침 5시, 배가 너무나 아파 깨어나 화장실에 다녀 오고 시계를 보았다. 아직 활동 시간은 아니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고통으로 인해 잠이 오질 않았다. 거실로 나와 진통제와 소화제를 먹었다. 만약을 몰라서. 하지만 고통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8시 무렵, 삼수생 아들 때문에 아내가 일어나서 확진 소식을 알려 주었다. 핸드폰을 보니 역시나 나에게도 동일한 문자가 와 있었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무런 증상이 없는데, 코로나 확진이라니! 11시까지 고통을 참다가 머릿 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스며 들었다. 혹시 다른 심각한 병이 생겼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전의 복통과는 통증의 차원이 달랐다. 맹장을 잘라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119를 불렀다.
119 소방 대원들이 여기저기 전화를 넣었지만 코로나 확진자가 찾아갈 병원이 거주 지역인 수원에 없었다. 특레시로 승격하였지만 시민의 안정을 지켜 주지는 않는 듯 느껴졌다. 30분이 넘게 시간이 소비되어서야 검사를 하기 위해 안산 한도 병원으로 옮겨 가야 했다. 소방대원들이 자신들은 현재 너무 바쁘기 때문에 업무 관할 지역을 빠져 나가지 못하므로 코로나에 걸린 아내가 운전하고 병원으로 직접 가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떠났다. 아내는 집에서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데......
한도 병원에 도착하여 검사를 먼저 받고 음압실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아내는 밖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역시나 충수돌기에 염증이 생긴 충수염이란다. 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이 병원에는 맹장염을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없단다. 또 수술할 병원을 찾기 위해 한도 병원과 영통구 보건소 직원이 검색에 나섰다. 3시간이 지나서야 평택 박애 병원으로 결정이 되었다. 어제 저녁에 떡 몇 조각 이외에 약 마신다고 먹은 것이 전부인데, 배가 고파왔다. 밥을 먹어도 되나를 알기 위해 한도 병원은 전화를 받지 않고, 박애 병원 업무자는 모른단다. 그런데 맹장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된다는 맹장을 떼어낸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곧바로 수술할 지도 모르니까 먹지 말자고 하여 곧바로 평택으로 움직였다. 비가 억수로 쏟아 부었다. 8월 14일 일요일은 영원히 뇌리에 남을 것 같았다. 코로나 환진자이기에 병원을 구하지 못하고 아침 11시부터 저녁 6시까지 개고생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코로나도 싫고, 지정병원을 해제한 이 정부도 원망하게 되었다.
평택 박애 병원에 도착하여 다시 엑스레이, 씨티를 찍고 병실을 배정 받았다. 이미 안산에서 다 찍었고, 그것을 복사해서 주었는데 또 찍다니, 이것은 이중으로 돈을 써여 하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대단한 돈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실로 올라갔다. 7층 5인실에 1인만이 문 앞의 병상을 지키고 나머지는 비어 있었다. 환자복도 없고, 이불은 개인이 가져와야 한다면서 새 이불 세트를 구매하게 하였다. 수건, 면도기도 챙기지 못하고 아내가 급작스레 챙겨주는 옷가지 몇 개, 화장지, 물티슈, 치약, 치솔, 종이컵이 다였다. 수건도 없었고, 비누도 없었다. 병실에서의 첫날밤은 가벼운 한 손 세수와 함께 주사 바능을 한 손에 부착한 채 지나갔다.
8월 15일, 조국 광복 기념일을 병상에서 맞이하니 마음까지 음울해졌다. 1시에 수술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다행히 계속 뱃속이 비어 있는 상태라 빨리 잡힌 것 같다는 간호사의 말에 안도를 하였다. 부담감은 없었다. 무통 주사도 신청을 하고, 옷도 1회용의 환자용 수술복으로 갈아 입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12시 넘어 들어가서 마취도 하고 그런다더니...... 1시가 넘어 부리나케 직원들이 다가와서 하의를 벗지 않은 나를 끌고 수술실로 내려 갔다. 으스스하니 춥게 느껴지는 병실에서 마취과 과장을 30분 넘게 기다렸다. 행방이 묘연해서 정해진 1시에 수술을 하지 못하고 1시 30분에 연기를 4번 마시자 의식을 잃어 버렸다. 수술실에서 깨어난 시간이 2시 30분, 1시간의 수술 시간이 소모되었다. 별 말도 없고 다시 나를 침상으로 옮기게 하더니 병실로 이동하였다. 참 과묵한 병원 직원들이다.
수술을 받고 돌아와서 거의 6시간을 움직였다. 마취 기운이 풀리지 않아 너무나도 졸렸다. 그래도 코로나 확진자라 복도에도 나가지 못하고 병실 사이를 움직였다. 제자리 걸음, 옆으로 걷기 등 가스를 빨리 빼기 위해 움직였다. 이런 말도 의사는 해주지 않고, 친구들과의 통화를 통해 경험자가 많이 걸으라고 조언을 해 줘서 묵묵히 따랐다. 어차피 금식이니까..... 참 내 인생이 이다지도 안 풀리는 것인지, 한숨이 새어 나왔다. 3개월 전에 뇌졸중 진단을 받고 운영하던 학원을 부랴부랴 정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맹장염, 코로나까지 나를 괴롭힌다 생각하니 도리어 울분이 솟았다. 바뀐 환경에서도 잘 적응해오던 과거의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속에서 울화를 퍼올리는 이상한 '나'로 변해가고 있었다. 묵묵히 걸었지만 가스는 나오지 않았다. 엉덩이 부분이 간질간질하다가 그것으로 끝이었다, 참 허망한 하루였다.
다음 날 9시가 넘어 담당 의사가 회진을 하였다. 수술이 잘 되었단다. 수술한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며 말을 전해준다. 많이 걸어야 빨리 회복된다는 말도 덧붙여주고, 2명의 환자가 침상을 차지하니 4명이 꽉 찼다. 기존 환자는 인공 변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생전 울 아버지도 마지막 전에는 저런 모습으로 생활하셨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새로 자리를 잡은 1사람은 말이 어눌한 노인, 다른 한 사람은 나와 같이 맹장 수술을 한 사람으로 터진 후에 수술을 했다고 한다. 말이 어눌한 사람의 요청을 들어 가족과 통화를 연결하고 움직이는데도 방구는 묵묵부답이었다. 포기하고 침상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너튜브를 보는데 갑자기 방구가 조금 살짝 인사를 하였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밥을 주겠거니 기대했으나 점심 역시도 금식. 간호사에게 가스가 나왔다고 알려주고 저녁에는 뭔가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저녁에는 미음이 조금 나왔다. 다른 동일 크기 용기에는 된장국이 담겨 있는데 염분을 깔아 놓은 것이라 세 숟갈 뜨고 포기하였다. 그런데 1회 용기 두 개를 보면서 환경 문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조그만 병실에서 나오는 것들이 모두 다 소각된다고 생각하니 자원 활용도 못하고, 환경 문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코로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환자들은 그대로 비닐에 싸서 박스에 버렸다. 국이 담겨 있는데 이것을 화장실에 버리지 못하고 박스에 넣었다. 미음 한 그릇의 불만족은 밤을 엎치락뒤치락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8월 16일을 보냈다.
8월 17일 아침 식사로 죽이 나왔다. 남들 밥 먹는 모습이 부럽다. 내 배는 쇠와 같아서 충분히 소화력이 있지만 병원 선생님들에게는 여전히 나에게는 죽이 어울렸나 보다. 회진한 의사 선생님께 3일 되니까 목요일에 퇴원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참 버릇 없는 말인 것 같다고 느꼈지만 강하게 나가야 다소 긍정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생각에 실행에 옮겼다. 그렇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도리어 환자 신분을 잊지 말라는 경고만 받았다. 또 다른 맹장 수술 환자도 강하게 어필하였지만 난공불락이었다. 오후 내내 둘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둘이서 맹장 수술을 하게 된 내력, 각자의 생활 터전, 퇴원을 시켜 주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을 쏟아 놓았다. 저녁에는 야구도 함께 시청하며 조금은 소원감을 버리고 친근하게 되었다.
병원에서의 생활은 아침 8시, 이후 1시간 넘게 서서 움직이기, 낮잠 즐기기, 1시 점심 식사, 또 1시간 넘게 움직이기, 수면과 핸드폰이 뜨거워질 때까지 눈이 아프도록 시간을 유투브로 채웠다. 6시 저녁 후 마찬가지로 1시간 이상 서서 움직이기, 이후 낮과같은 생활. 중간 중간 나를 걱정하는 가족, 친지, 친구, 사회적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과 통화, 문자를 하며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퇴원을 기다렸다.
의정부에서 왔다는 아저씨는 평택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몰랐다. 귀가 안 좋아 알아듣지를 못했다. 보청기도 하지 않으셨다. 설명하다 지쳤다. 오후에 그 아저씨는 어디론가 옮겨 지고, 다시 병실은 3명이 편안하게 즐기는 여유가 넘치게 되었다. 동병상련의 40세 환자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런 저런 잡스런 이야기까지...... 티브를 낮에는 종일 켜 놓아서 영화만 내리 4편을 흘깃거렸다. 보았던 것도 있고, 낯선 작품도 있어서 그런대로 시간은 지루하지 않고 과거로의 이별을 알렸다. 저녁 무렵 1명의 환자가 들어 왔다 다시 4명이 되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인공 변주머니를 단 환자는 변주머니에 문제가 생겨서 가족과 통화, 간호사와 대화를 하며 대안을 찾아가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 것은 1도 없었다. 주의 깊게 살피면서 대강을 파악할 수가 있게 되었다. 가져왔던 변주머니를 다 사용하여 이 병원에 요구하였지만 이 병원에서 제공한 것이 그 환자 상처 부위에 맞지 않아 칼로 자르고 테이프를 붙이면서 고군분투를 하는 것 같았다. 코로나로 인해 토요일에 퇴원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어보니 그 환자의 심정과 답답함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화장실도 이저노가 달리 많이 더러워졌다. 나는 물을 뿌려 뒷처리를 하였지만 지저분하게 만들고도 아무런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는 그 환자를 속으로 욕하였다. 밤에는 간호사에게 받은 수건, 비누를 얻어 처음으로 얼굴, 머리 부분을 손질하였다. 하루 세 번이나 샤워를 하는 깔끔이에게 병원 생활은 그야말로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옆 동료가 코골이를 너무 심하게 해서 잠을 이루지 못해 몸을 씻었더니 정신이 말짱해져서 잠이 찾아오질 않았다. 미군 해병대 잠자는 요령을 적용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뒤척이다 힘들게 새벽에 잠이 들었다.
목요일, 18일이 되었다. 아침에 밥을 준다고 하더니 또 죽이 나왔다. 밥을 전해 주는 분에게 요청하여 다시 확인하고 점심부터 밥을 준다고 하더니 하루 종일 죽이 나왔다. 참 이상한 병원 업무다. 점심은 다른 환자와 바꿔 먹으며 밥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였다.
어제 들어왔던 환자는 부동맥으로 산소 공급기를 끼고 하룻밤을 보내더니 회진하던 의사에게 자신은 이곳에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니 퇴원을 하여 전문 병원을 찾아보겠다고 말하였다. 담당 의사(7층 모두 이 사람에게 보호를 받고 있음)도 오케이하고 그는 점심을 먹지 않고 퇴원을 하였다. 우리 둘에게는 내일(금요일) 퇴원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규정상으로는 토요일에 가능하지만 상태가 워낙 좋고, 퇴원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허락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아서는 요즘 급격하게 늘어나는 코로나 확진 환자 수 때문에 그런 듯 보였다. 지정 병원을 해제한 이후 코로나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이 경기도에 몇 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의가 쇄도한 듯 보였다. 병원 업주는 돈을 벌게 되는 큰 시기가 다시 도래하고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생활의 반복, 저녁 무렵에 들어온 두 환자는 모두 노인네에 가까웠다. 한 사람은 통증을 호소하며 진통제를 요구하였고, 병원의 일처리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표출하였다. 다른 환자는 몸을 제대로 겨누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오른 발은 무릎 아래가 없는 상태였다. 간호사들이 30분 넘어 찾아주니 그 환자는 대책이 없었다. 계속 간병인을 찾았지만 주변에 간병인은 없었다. 아마도 이전 병원에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보다 추측할 수 있었다.
병실이 꽉 차버리니 움직이기도 조심스러웠다. 침대 옆에서 제자리 걸음으로 시간을 흘려 보냈다. 내일이면 퇴원하고, 샤워도 하고, 내 침대에서 뒹굴 수 있다는 조그마한 행복감이 하루 종일 맘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불퉁대던 '나'는 사라지고, 평온한 '나'의 상태에서 하루를 보냈다.
19일이다. 드디어 오늘 집에 간다. 퇴원을 12시로 잡았다. 하루가 빠르게 지나갈 것이었다. 아침을 밥으로 떼우고(병원에서는 처음 제공, 나는 2회째), 아내와 통화하고 혈전제, 면도기, 1회용 마스크를 챙겨 오라고 전달하고, 업무과 직원에게 요청 서류를 알려주고, 환자복을 벗고 퇴원복인 일상복으로 변신하였다. 동료도 마찬가지로 1시나 2시에 퇴원을 잡고, 직장 동료의 이체 후 퇴원하기로 하였다.
10시 정도 되니 앞에 앉은 고통에 호소하던 분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였다. 유도를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사업을 크게 하다가 망하고 10년 넘게 신용불량자로 살다가 뇌졸중으로 반신 불수가 되어 운동으로 이를 어느 정도 해소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눈 하나를 잃고, 신장염까지 걸려 투석으로 일생을 병원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두 자식을 출가시키고 잠시 얻은 3년의 행복이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말하며 여행 많이 다니고, 즐겁게 살라고 전해 주었다. 특히 노인 전문 병원에서 TV 조선만 시청한다는 것에 매우 분개하였다.(이런 말은 내가 뇌졸중이 걸려 학원 운영을 그만 두고 이제는 좀 편하게 살려고 했는데, 코로나에 걸리면서 맹장염까지 얻어 수술하러 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신분 내력을 밝힘)
정치 이야기에 완연히 3인 3색이었다. 동료(맹장이 터져 수술한 환자)는 경상도 부산 출신이라 완전히 국힘맨, 고통에 쩐 환자(우리 나이 59세, 나보다 4년 선배, 그런데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완연히 70대 할아버지의 모습)는 민주당, 이재명 극렬 지지자. 난 중립, 이재명과 윤석열이를 다 부정하는 회색 분자(난 현재 정의당 당원임),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그 내용이 심히 충격스러워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는다. 1시간 넘게 담화를 즐겼다. 고성이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은 없었다.(아니 있을 수도 있었지만 누구도 표현하지 않았다) 곧 두 사람은 점심을 하고 나는 완전히 보호복으로 몸을 가리웠다. 가방에도, 핸드폰에도 예방 처리를 하고 이제나 저제나 퇴원하라는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박애 병원에서는 결재 후에나 세부 내역서를 볼 수가 있다. 내가 카드 결재를 하겠다고 말했지만 심사를 맡은 직원이 아내와 통화하면서 이체를 해야 빨리 퇴원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병원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카드 수수료를 아끼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가? 의심스러웠다. 밖으로 나오니 병원 앞 도로 2차선에 경고등을 켜고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아내에게 주고 업무과에 가서 현금 영수증을 처리하고(원래는 잘 안함. 일부러 탈세를 막기 위해 현금 영수증 처리를 함), 서류를 가지고 왔다. 금액은 117만원 정도, 안산 한도 병원에서 37만원까지 합하면 150만원을 넘게 썼다. 힘들었지만 힘들지 않았던 병원 생활, 앞으로 병원에 찾아오는 일이 없기를 다짐하는 계기가 된 특별한 체험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