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참으로 기뻤던 일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리고 그 기쁨이 얼마나 지속이 되었습니까? 어떤 분이 직장이 서울로 발령이 되는 바람에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은 창원에 있고 남편은 대구에 교사로 있는데 서울로 가게 되면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 산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휴직을 하였는데 어떻게 다시 부산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창원에서 출퇴근 하면 되니 기뻐서 전화가 왔습니다. 며칠 지나서 물어보니 그 기쁨은 한 시간 정도였답니다. 또다시 여러 가지 근심걱정이 밀려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기쁜 일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쁜 일이 참으로 기쁜 일입니까? 영원한 기쁨입니까? 이 땅이나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영원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 나를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면서 오늘도 열심히 자기가 기뻐할 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 2:1-10절을 봅니다. “봉독” 솔로몬이 지혜와 부와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기 마음의 소원대로 다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즐겁고 기뻐하게 되는지 온갖 일을 다 해 보았으나 그 결국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으로 헛되지 아니하고 참으로 기뻐할 일은 무엇입니까? 12:13-14절입니다. “봉독”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것이 인생의 근본입니다. 인생의 근본을 모르고서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평생을 살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고 하여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심판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기에 근원적인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기쁨이 없다든가 낙이 없다는 분이 계시면 지금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사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산다면 결단코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생 앞에 참된 기쁨과 영원한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면 무엇으로 참된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 17-18절을 봅니다. 70명의 제자들이 예수님 앞서서 동네마다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명령만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항복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기뻐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라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뻐하면서 돌아오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였더니 열매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도 전도하여 열매가 나타나면 그 얼마나 기쁩니까? 그런데 그런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 보다 더 근원적인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책이 생명책입니다. 모세가 말하였고 시편에서 말하고 바울사도와 사도요한도 말한 생명책인 것입니다. 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에 나온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에 쓰임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서 4:3절에서 이렇게 증언 합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복음의 동역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받고서 그 복음에 참여되고 복음에 동역하고 있다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이 괴롭다느니 재미가 없다느니 불평과 원망이 나온다면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기 때문에 오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고, 세상이 줄 수도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장악을 하고 있기에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이 세상의 신이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4:4).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이 기쁨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동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사단이 항복하여야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단을 이기실 수 있는 분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결코 그들의 능력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이미 보았습니다. 18-19절입니다. “봉독”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은 보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니 사단도 항복하게 된 것은 이미 예수님의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단을 완전히 이기신 것은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어떻게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신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고 계시는 중이십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죽으실 것을 결심하신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져 패주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하만이 모르드개와 그 민족을 죽이려고 하다가 오히려 모르드개를 높이는 일에 자신이 도구로 쓰이고부터 하만은 죽는 길로 가게 되고 죽을 줄 알았던 모르드개는 승리의 길로 가는 것처럼 이미 사단의 권세는 예수님께 굴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1:20-22절입니다.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4)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5)재물을 나누느니라”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의 왕 바알세붑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손의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를 결박하여야 그 강한자의 손에 있는 것을 빼앗아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3:15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뱀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며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가 되고 있는 현장입니다. 사단이 왜 벌써 굴복하기 시작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도 아직 자신이 완전히 굴복하게 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세상의 세력을 다 동원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단이 승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0:18절을 제목으로 한 책이 나왔습니다.「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은 본다」 르네 지라르 라는 이 사람은 신학자가 아니라 문학평론가 이자 사회인류학자인데 수많은 신화와 민담과 역사를 통하여 폭력과 희생양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될 때에 어떤 희생양을 정하여 희생시킴으로 사회의 안전을 도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한 결 같이 그 희생양은 죄인으로 몰려서 처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기록이 승자의 기록이기에 희생양의 무죄를 변호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희생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무죄를 증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간접적인 신학이라고 하면서도 희생양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독교로의 개종은 언제나 그리스도 자신이 던지고 있는 ‘너는 왜 날 박해하느냐?’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을 이용하는 희생양의 모방과정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십자가의 공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부활을 통해서,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모든 기독교 신도들은 성스러운 폭력 안에 감추고 있는 모든 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희생양이 아니라, 하나님이 항상 인간의 희생양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희생당하신 이야기가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앞에서 우리는 항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죄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범죄 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방욕망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소속한 집단의 안전을 위하여 한 사람을 희생시키자고 하는 일에 얼마나 빠르게 동조를 하는지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할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고 찬송하든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어떻게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처리하는지를 잠시 봅니다. 요한복음 11:47-53절입니다. “봉독” 즉 한명 희생시켜 우리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한 말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런 체제하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유대인이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이런 모습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흘린 죄를 이 세대가 담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요한의 해석이 다음 구절입니다. “51-53절 봉독”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속을 자신의 죽으심으로 이루실 줄을 대제사장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배후의 사단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가서 죽여 버리면 승리하는 줄 알았습니다.
누가복음 10:2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되심을 보시고,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항복하는 것을 들으시고, 이것은 이미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예수님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생명책에 기록이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실 때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뻐하십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기뻐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런 일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합니다.
슬기 있고 지혜 있는 자들이 예수님 당시에 누구였습니까?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결을 잘 안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빌라도와 함께 유대를 다스리는 관리들이 지혜롭고 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공동의 관심사가 현재 그들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 사람의 희생양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그들이 영광의 주를 알았다면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6-16절입니다. “봉독” 이 세상의 그 어떤 관원의 지혜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배후인 사단도 알지 못하였기에 지금까지 의례히 해 온 것처럼 희생양을 만들면 안정이 될 줄 알고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죽음이 죽음의 세력을 이겨버리신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비밀을 지금도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22-24절입니다. “봉독” 오직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알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 사단의 권세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기신다는 것을 보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들이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한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보게 되고 믿게 됩니다. 그렇게 계시를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이 된 자들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기뻐할 일입니다. 이런 자들이 참으로 복 있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