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세계에서 벗어나는 고통
화가였으나 점점 시력을 잃어가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걸인처럼 거리에서 살아가는 미쉘과 곡예사 알렉스가 파리 세느강의 9번째 다리인 퐁네프다리에서 만난다. 마음 속의 상처와 가난으로 더러운 모습을 한 이들은 하루하루 치열한 삶을 살아간다. 다리와 거리에서 함께 지내던 알렉스는 미쉘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미쉘은 화가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실명 직전에 사랑했던 줄리앙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알렉스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럴 수록 알렉스는 더욱더 미쉘에게 집착을 하고 불을 지른 알렉스는 감옥에 들어간다. 거리에서 걸인처럼 생활하던 미쉘은 결국 눈 수술을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3년후 크리스마스, 둘은 퐁네프 다리 위에서 재회한다.
소위 "누벨 이마주"의 선두주자로 불리며 80년대 프랑스 영화를 이끌던 레오스 카락스의 세 번째 작품 <퐁네프의 연인들>의 남녀 주연으로는 남자 거지인 알렉스 역에 데니 라방이 여자 거지인 미셀르 역에는 줄리에트 비노세가 맡아 열연하였다.
주요 무대 및 배경은 지난 1989년에서 1991년 사이의 퐁네프와 세느 강 및 주변 여러 곳이다. 수용소를 탈출해 퐁네프에서 노숙하던 알렉스는 어느 날 다리 한 가운데서 잠든 미셀을 만나게 된다. 미셀은 사랑을 잃고 시력까지 서서히 잃어가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거리를 헤매게 된다. 불을 뿜는 묘기의 스턴트맨 출신인 떠돌이 청년 알렉스와 실연과 실명 위기의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포기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온 젊은 여자 화가인 미셀이 퐁네프와 그 아래에 흐르는 세느강을 무대로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이별하는 등의 이야기를 전한다.
아무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그 두사람은 이 다리 위에서 지독한 사랑에 빠져든다. 그러나 미셀은 화가로서 치명적인 실명 직전에 첫사랑인 줄리앙에 대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거리로 나와 자신의 존재감을 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에 알렉스가 기대하는 만큼의 사랑의 감정을 느끼진 못한다. 더욱더 알렉스는 미셀을 소유하려하고 기어코 방화로 인하여 알렉스는 감옥으로 가고 미셀은 눈 수술을 위하여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3년후 크리스마스에 둘은 퐁네프에서 재회한다.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퐁네프는 역설적이게도 세느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다리 이름과 역사가 지닌 역설은 사랑의 의미에 대한 역설이기도 했다. 진로와 퇴로를 미리 모색해두는 허다한 사람들 사이에서, "잊는 법을 배우지 못해"라고 말하며 권총으로 손가락을 날리는 알렉스의 낡은 사랑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랑이라는 테두리를 보여준다. 오늘 날의 표현으로 "엽기적이야"라고 수근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지을 땐 새로운 다리였지만, 어느새 가장 오래된 다리가 되고만 퐁네프의 운명처럼 새로움을 기약한 그 많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쉽게 군내 풍기는 사랑이 되고 마는가. 갈증을 호소하는 미셀과 불면증에 괴로워하는 알렉스. 누가 더 슬픈 항해자였을까? 해를 희망이고 잠을 안식이라 할 때, 휴식없이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둘의 비참함은 다리 위에서도 마침내 사랑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랑이란 뭘까? 이별과 재회, 과거와 미래, 혹은 삶과 죽음 사이를 끝없이 오가면서도 종내 강 저쪽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자의 고단함. 아무리 행복한 미소를 지어도 미셀과 알렉스의 그림자를 담고 있는 한 퐁네프의 모든 연인들은 슬프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 황홀한 영상들이다. 폭죽을 그림물감처럼 써서 파리의 밤 하늘에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 그 그림 아래에서 춤을 추고 센 강에서 훔친 모터보트로 수상스키를 타는 것, 지하도의 벽을 덮은 포스터에 불을 붙여 불타는 통로로 만들어버리는 것 등등이 "새로운 영상(nouvelle image)"을 추구하는 감독으로 불리는 레오스 카락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꿈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런 인상적인 장면들보다는 우리 돈으로 약 250억 원이나 들었다는 엄청난 액수의 제작비다. 87년 레오 카락스는 자신의 새로운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을 꼭 퐁네프 다리 위의 실제적인 모습을 배경 삼아 찍겠다고 선언했다. 잠정 제작비는 3600만 프랑이었다. 그러나 파리의 중심가를 횡단하는 퐁네프 다리에서 촬영을 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파리시 당국에서는 퐁네프 다리위에서의 촬영은 절대 허가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프랑스 예술인들은 카락스로 하여금 퐁네프 다리위에서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연대 서명을 하여 당국에 올렸고, 이 문제는 프랑스인들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결국 프랑스의 인기 시장인 쟈크 시락은 88년 여름 3주 동안 카락스에게 퐁네프 다리에서 촬영을 할 수 있다는 허가를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퐁네프 다리 위에서의 촬영은 시작되었고, 한쪽에서는 밤장면의 촬영을 위해 몽페리에 근처에 인공 세트(Decor)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락스는 어렵게 주어진 3주라는 시간 동안 단지 5분 분량 정도만을 촬영하는데 그쳤다. 제작자는 세트를 설치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고, 카락스는 이 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실제 퐁네프 다리의 크기 및 다리에 사용된 돌의 원료와 똑같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다리 주변에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아주 까다로운 원칙으로부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퐁네프 다리의 세트는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8년 12월 처음으로 촬영은 중단되었다. 45분을 찍는데 무려 6000만 프랑이 초과되었던 것이다. 제작자는 파산했고, 더이상 제작비를 댈 수가 없었다. 1989년 7월 스위스의 부호 Van Buren의 제정 지원으로 촬영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1800만 프랑을 추가 투자하고 6주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무수한 구설수와 루머들이 떠돌았지만 카락스는 이 부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소문은 더욱 불어났고, 한편에서는 퐁네프의 다리가 완성되지 못한 채 프랑스 영화 역사 속에 그냥 묻혀버리지 않을까 걱정의 소리들이 차츰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일년이 흘렀고, 문화성 장관 쟉끄 랑(Jacques Lang)은 세계의 부호들을 불러모아 지금까지 러쉬 필름을 보여주며 제작자를 물색하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드디어 마지막 총제작자 <까미유 끌로델>의 제작자인기도 한 크리스티앙 푸쉬네가 7000만여 프랑을 재투자하여 1990년 8월 재개된 촬영은 7개월 동안 모든 촬영을 끝마칠 수 있었다.
1991년 3월, 제작기간 5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마침내 모든 작업이 끝났다. 총제작비 1억 9000만 프랑(한화로 25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된 끝에 이 <퐁네프의 연이들>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30여 만평 규모의 퐁네프의 다리를 재현한 세트는, 길이 100여 미터, 폭 15여 미터의 실제 퐁네프 다리를 그대로 재현하였는데, 원료는 모두 대리석이 사용되었으며, 수심의 깊이는 실제 세느강의 깊이와 똑같이 15~20여미터 깊이로 땅을 파 강으로부터 물을 끌어올려 맨땅을 물로 채워 넣었다. 이 세트를 짓기 위해 20,000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 크리스티앙 마지 외에 설계사, 조각가, 연극무대 디자이너 등이 함께 참여하여 1년 7개월의 제작 기간과, 1억 9천여만 프랑을 투자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놀라는 것이 단순히 제작비의 액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많은 돈을 들였음에도 그런 스펙터클 영화들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줄거리가 서사적인 아니며, 주요 등장인물도 세 명에 불과한데, 그나마 한 명은 중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보면 <퐁네프의 연인들>은 스펙터클이 아니라 소품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놀라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곧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 많은 돈을 들였단 말인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가 스펙터클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뜻할 뿐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그러므로 할리우드 식의 스펙터클이라는 고정관념과 상관없이 감독 자신이 원하는 영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는 점이 놀라는 것이다. 자본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예술 분야가 바로 영화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퐁네프의 연인들>은 볼만한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세느 강의 퐁네프에서 잠을 자는 부랑아 알렉스와 애인으로부터 버림받고 거리의 화가로 떠돌다가 퐁네프로 오게 된 미셀의 사랑 이야기인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기만성과 끔찍한 소유욕이다. 부르주아 출신인 미셀이 거리에서 떠돌게 된 것은 사랑의 상실, 곧 첼리스트인 줄이앙을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셀의 일기를 훔쳐보고 그녀가 줄리앙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알렉스가 미셀과 줄리앙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도 그녀를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미셀에 대한 알렉스의 소유욕은 너무나도 지독해서 미셀로 하여금 돈을 강에 빠뜨리게 하고 시치미를 떼거나, 미셀을 찾는 포스터에 불을 지르고, 급기야는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이 불에 타 죽게까지 한다. 줄리앙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변해 그를 죽이려고 총까지 갖고 다니는 미셀이나,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미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알렉스나 광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광적인 사람은 또한 기만적인데, 그것은 미셀과 알렉스가 소매치기를 한 돈으로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자는 알렉스에게 미셀은 사랑을 나누면 수면제가 없어도 잠을 잘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바닷가에서 둘이 몸을 섞은 뒤에, 알렉스는 미셀 몰래 수면제를 꺼낸다. 사랑이 불면증의 치료제가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려니와, 미셀에게 뿌리 깊게 박인 "사랑은 만병 통치약"이라는 기이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또다른 고정관념 때문에 알렉은 미셀을 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미셀 또한 알렉스를 기만하는데, 자기를 찾는 방송을 듣고 알렉스에게서 떠날 때 그녀는 알렉스에게 주는 술에 수면제를 탄다.
그러나 미셀의 기만은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어서 알렉스의 기만과는 다르다. 미셀은 화가에게는 생명 그 자체인 눈의 치료와 부르주아 생활로의 복귀를 위해 알렉스를 속인다. 알렉스가 미셀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을 때, 그 또한 사랑의 상실로 인해 거리의 생활을 하고 있는 늙은 한스가 알렉스와 미셀은 속한 세계가 다르므로 둘의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반응이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사랑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알렉스에 대한 미셀의 감정이 거짓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미셀이 다리의 벽에 알렉스를 사랑한 것은 거짓이었다고 써놓고 떠난 것은 또하나의 기만으로 알렉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알렉스의 상실감은 미셀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미셀에 대한 알렉스의 광적인 집착은 여기에 기인한다.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그의 소유욕은 그만큼 강하다. 그러나 미셀의 집착은 알렉스보다는 덜해서 줄리앙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 죽이지는 못한다. 미셀에게 사랑이 열병이었다면 알렉스에게는 생명이었다. 알렉스는 총을 쏘아 자신의 손가락을 자름으로써 마음의 아픔을 몸의 아픔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끝났어야만 했다. 알렉스가 살인범으로 체포되고, 눈을 고친 미셀이 알렉스를 면회하고, 알렉스가 출옥한 뒤에 수리가 끝난 퐁네프에서 다시 만나 강에 빠졌다가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어 함께 떠난다는 해피엔딩은 불필요한 덧붙임이며, 관객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꿈을 꾸었고, 레오스 카락스는 그 꿈을 통해 사랑이라는 광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했지만, 우리가 본 것은 씁쓸한 환상일 뿐이었다. 심하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우리가 본 환상이 결국 우리의 초상이기에 더욱 씁쓸한 생각이 뇌리에 남을 뿐이다.
<섹스 깨어진 영상 그리고 진정성 - 박인홍 저서에서 발췌>
1. 1992년 European Film Awards Best Actress (Juliette Binoche), Best Cinematographer (Jean-Yves Escoffier), Best Editor (Nelly Quettier)를 수상하였다.
2. 국내 상영시 상영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5분여 삭제되었다. 사회 저변계급의 생활을 솔직하게 살리려한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삭제되었는데 알렉스가 경찰보호소로 이송된 전반부이다.
3. 첫장면에 시작된 흑백화면을 기억하는 분은 얼마 없을 것이다. 사실 5분 가량되는 그 장면은 극장상영시는 잠시 동안만 제시되었고, 행려들의 실상을 담은 처절한 모습은 삭제되었다. 그 일부 장면들이 비디오판에 들어있다. 과도한 해석일지는 모르지만 레오스 카락스가 굳이 그 장면을 영화 시작 에 넣은 것은 뒤에 컬러로 된 장면이 시작되면서 대비적인 것을 통해 무언가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비디오를 볼 수밖에 없다. 흑백의 현실 세계와 컬러의 신화적 세계. 이것은(퐁네프의 연인들)의 원래 의도와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한 해답을 제공해 줄지도 모르겠다.
무반주 첼로소나타 8번 - Kodaly
첫댓글 오랫동안 기억되던 영화였습니다. 이후로도 레오 까락스의 영화는 빼먹지 않고 착실하게... "나쁜피"도 참 아름다운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진실찾기가 황홀할 정도로 화려한 색채로 가득 채워진그런 영화. 때로 파삭한 현실을 버텨내기에 영화는 좋은 꿈꾸기 같다는 생각... 에그 이런, 주절주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