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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쓴 책제목은 좀 의역이 들어가 있다. 영어제목은 Russia's military way to the west : origins and nature of Russian military power 1700-1800이다. 사실 이 논문같은 따분한 제목만 본다면 내가 절대(?) 빌릴만한 책은 아니지만 단 한가지 사실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빌리게 하였다. 다름아닌 이 책을 쓴 저자가 바로 크리스토퍼 더피라는 사실이다. 그러고보니 여태까지 소개했던 책들 중 더피의 책이 제일 많은 것 같다.
이 책은 제목대로 18세기들어 강대국으로 부상한 러시아의 군제와 원인분석 밑 그동안의 전쟁사를 다루는 것이다. 저자가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에 특히 전문가이다보니 칠년전쟁에 대해 다루는 부분이 제일 자세했고 그다음으로 수보로프에 대해 자세하게 다뤘지만 나머지는 그냥 대강대강 넘어가는 편이다. 특히 대북방전쟁은 러시아가 진정한 강대국으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지만 이 역시도 책에 나왔던 전쟁들 중 간략하게 다룬 편이다.
책은 열개의 찹터(chapter)로 나눠지는데 그중 첫번째 찹터인 So many Russias는 저자가 다루는 시대인 18세기 이전의 러시아사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는 장이다. 어차피 노브고로드와 키예프가 건국되고 몽골의 지배를 받고 모스크바가 일어서고 이반4세가 통치하고 하는 내용은 시중에 널려있는 러시아사를 다룬 책들보다 더 자세할 것도 없으니 이건 별도의 언급없이 넘어가고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되는 두번째 찹터 Peter I, 'the Great' 1682-1725부터 내용을 간추려서 적겠다.
1672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아들로 태어난 표트르는 이복누나인 소피아의 위협으로 프레오브라젠스코예라는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지방에서의 생활은 후일 러시아 해군의 창설과 함께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와 세메노프스키 연대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소피아를 축출하고 통치권을 확립한 표트르는 레포르트와 고든 등의 도움으로 새로운 전술과 편제 등을 만들었다. 그는 투르크령이었던 아조프를 1695년에 공격했지만 고든의 충고를 무시한 두번의 공격명령으로 큰 손실만 입었고 다음해 서방에서 온 공성과 포병기술자들의 도움으로 요새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타간로그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한 표트르는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이름으로 서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스웨덴령 리보니아, 프로이센, 홀란드, 영국을 거쳐 직접 배를 만들고 더 공부하길 원하는 사람들을 그나라에 남겨둬 배우게 한 표트르는 스트렐치의 불온한 움직임을 듣고는 서둘러 본국에 도착한 뒤 불온분자들을 숙청하고 스트렐치를 해산시킨 뒤 새롭게 군대를 혁신하였다.
한편 스웨덴에서 어린 카를12세가 왕이 되자 스웨덴에 반감을 품은 나라들이 연합을 맺어 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도 그중 하나였는데 만만하게 봤던 카를12세는 덴마크를 순식간에 굴복시킨 뒤 페르나우에 상륙하여 나르바를 공성 중인 러시아군에게 다가갔다. 표르트는 서둘러 오스트리아가 보내준 드 크루아 공작에게 모든 지휘권을 맡기고 황급히 떠났고 8시간 뒤 러시아군은 훨씬 적은 수의 스웨덴군의 공격으로 무너져 패주하거나 항복했다. 스웨덴은 잡힌 포로들을 무기를 빼았은 뒤 고위장교를 빼고 모두 풀어줬다. 수많은 대포와 장교들을 잃어버린 표트르는 보리스 셰레메테프를 군대에서 두번째 위치인 육군원수로 진급시키고 국경을 지키게 하였다.
크게 깨진 표트르는 교회와 수도원의 종들을 징발하여 금속을 얻고 여러 외국인들의 도움으로 군대를 재조직하고 편제를 개혁한 뒤 셰레메테프의 지휘아래 반격에 들어갔다. 셰레메테프는 에리스트페르와 후멜스호프 전투에서 잇따라 스웨덴군을 무찔렀고 리보니아를 체계적으로 초토화시킨 뒤 마리엔부르크에서는 훗날 표트르의 뒤를 잇게되는 예카테리나 스카프론스카를 데려오게 된다. 그리고 잉그리아를 공격하여 뇌테보리를 함락시킴으로서 스웨덴의 발트제국은 두동강이 나버렸다. 표트르는 뇌테보리를 슐뤼셀부르크로 개명하고 부근에 테페르부르크를 건설하여 미래의 수도로서 준비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핀란드 만 남쪽의 스웨덴의 요새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도르파트와 나르바가 공격당했지만 스웨덴 본군이 공격해오자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로 도망쳐야만 했다. 이것으로 배후가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카를12세는 다시 아우구스트와 상대하러 가고 팔천명의 병력을 남겨둬 러시아와 맞서게 했다. 표트르의 명령으로 독립군단을 지휘하게된 알렉산드르 멘쉬코프는 칼리츠에서 고립된 스웨덴군과 전투를 벌여 상당수의 포로들을 잡았는데 이것은 러시아가 전면전에서 거둔 가장 확실한 승리였다. 그러나 스웨덴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아우구스트가 알트란슈타트 조약을 맺어 전쟁에서 빠지면서 카를12세는 본격적으로 러시아와 상대하기로 했다.
당시 러시아는 내부사정이 좋지 않았고 드네프르 카자크들의 아타만, 마제파는 비밀리에 스웨덴과 협상을 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셰레메테프의 제안에 따라 국내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했고 카를은 본군은 모스크바로 향하는 동안 발트에서 레벤하웁트가 지원군과 물자를 이끌고 합류해오는 작전을 세웠다. 기만작전과 재빠른 기동으로 베레지나를 쉽게 도하한 카를은 홀로프진에서 공격해온 레프닌과 골츠를 물리쳤고 모길료프에서 잠시 쉰뒤 드네프르를 도하했다. 골리친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본군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도브로예의 스웨덴 사단을 공격하여 그들을 후퇴시켰다. 카를은 세베리아를 통해 모스크바로 진군할 계획이었지만 러시아군이 포쳅과 스타로두프에 먼저 도착하자 방향을 바꿔 우크라이나로 가서 마제파와 합류하기로 하였다. 카를이 레벤하웁트의 병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은 표트르는 셰레메테프에게 본군을 맡겨 카를을 쫓아가도록 하고 자신은 별동대를 이끌고 레벤하웁트가 카를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소즈를 도하하던 레벤하웁트의 군대를 레스나야에서 무찔렀다. 이 전투로 인해 겨우 칠천명의 전투병들만이 카를과 합류할 수 있었다.
그해 겨울과 봄은 거점을 확보하려는 스웨덴과 러시아의 전투들로 얼룩졌다. 카를이 폴타바를 공격하자 표트르는 스웨덴군에게 접근하여 전투준비를 했다. 카를은 상황이 더 불리해지기 전에 선공하기로 하고 새벽에 움직였지만 이 움직임은 멘쉬코프에게 발각되어 러시아군은 미리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세한 러시아포병들의 포격에 두들겨맞은 스웨덴군은 러시아군이 공격해오자 무너져버렸고 카를은 투르크 영토로 도망쳤다. 사흘 뒤 멘쉬코프는 페레볼로치나에서 레벤하웁트를 공격하여 스웨덴군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고 전쟁에서 물러나거나 미적지근하던 나라들에 힘을 불어넣게 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표트르는 발트지역의 정복에 나섰고 페테르부르크와 가까운 비보리와 켁스홀름을 손에 넣어 수도의 안전을 확보했다. 리가는 셰레메테프에게 점령되었고 페르나우와 레벨이 잇따라 함락됨으로서 잉그리아까지 이어지는 발트해연안이 러시아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또한 정복된 지역의 독일인들은 러시아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크림 칸과 카를의 부추김으로 투르크가 선전포고를 하자 표트르는 군대를 이끌고 다뉴브 공국들의 기독교인들의 합류를 기대하며 흑해의 서부연안을 따라 진격해갔다. 모든 것은 러시아군이 얼마나 빨리 다뉴브의 도하지점을 장악하느냐에 달려있었지만 셰레메테프가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바람에 투르크군은 강 북쪽으로 몰려가 프루트강에서 러시아군을 포위했다. 러시아군은 몇번에 걸친 투르크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결국 아조프와 타간로그를 내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이것으로 러시아는 흑해연안의 모든 영토를 잃어버렸고 타간로그의 해군기지는 배와 함께 불태워졌다.
발트해에서의 전역은 프루트와는 달리 잘 나가고 있었다. 슈테틴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표트르는 덴마크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로이센에 뇌물로 이 요새를 넘겼다. 프로이센과 하노버가 연합에 참가했지만 연합 내부의 분열과 반목은 여전했고 표트르가 강력히 주장한 스웨덴 본토침공작전을 표트르 자신이 포기하자 연합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발트해 북쪽에서는 러시아군이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는데 헬싱포르스가 함락되고 항괴 해전에서 러시아가 승리함으로서 올란트 군도와 스웨덴 본토로의 바다길이 뚤려 러시아 해군은 스웨덴을 공격했다. 결국 스웨덴은 니슈타트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고 러시아는 핀란드에서 철수하는 대신 핀란드만과 리보니아를 얻게 된다.
표트르가 정한 새로운 목표는 카스피해였다. 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던 페르시아는 내분과 투르크, 아프간의 개입으로 약화되어 있었고 표트르는 이를 기회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수로와 육로를 통해 진군한 러시아군은 데르벤트를 점령했지만 표트르는 건강문제로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에 의해 레슈트와 바쿠가 정복되었고 페르시아와 투르크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이 러시아령임을 인정했다. 러시아의 원정대는 우스탸크 타타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를 탐험하며 곳곳에 수비대를 설치했고 표트르는 베링을 보내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해보게 하였다. 또한 크림한국에 대항하여 파블로프스크와 차리친 사이에 요새방어선을 구축하여 위험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 모든 업적을 세운 표트르는 페테르부르크에서 1725년 1월 28일에 죽었다.
이것으로 두번째 찹터는 끝나고 세번째 찹터인 The Age of Marshal Munnich 1725-41이 시작되는데 표트르의 사후 그의 두번째 아내 예카테리나1세와 손자인 표트르2세가 짧게 통치하고 죽은 뒤 표트르1세의 조카인 안나가 귀족들의 요청과 지원으로 여제로 즉위했다. 그녀의 치하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러시아군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키스, 레이시, 만슈타인 등이 활약했지만 러시아군을 개혁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부르하르트 크리스토프 폰 뮈니히였다. 그의 개혁으로 러시아군은 더욱 강력해지고 효율적인 전쟁수행을 하게 된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는데 이들의 연합으로 프랑스는 세번이나 좌절을 맛보았다. 폴란드는 왕을 선출하는 제도 때문에 자주 각국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1733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지지하는 아우구스트3세를 지원하기 위해 작은 규모의 러시아군이 파병되어 친프랑스파와 싸웠다. 만이천명의 러시아군이 단치히를 공성하자 뮈니히는 레이시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았지만 공성기간은 길고 많은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단치히는 마침내 아우구스트에게 항복했지만 그후 폴란드는 러시아와 먼 지역에서 전쟁이 터질때 거의 항상 러시아군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라인전선에서 프랑스에게 발목이 잡혀있자 안나는 만이천명을 파견하여 레이시와 키스의 지휘아래 라인으로 파병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양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맺어져 있었다. 폴란드 전역이 실패하자 프랑스는 스웨덴을 끌어들였고 안나의 죽음과 많은 러시아군이 투르크와의 전쟁에 묶여있는 것을 이용하려고 한 스웨덴의 계획은 레이시가 팔천명의 군대 밖에 없는 핀란드를 공격하여 빌만스트란트를 함락시키고 약탈한 뒤 귀환하게 됨으로서 역시 실패로 끝났다.
당시 러시아의 골치덩어리는 남부의 타타르와 투르크였는데 이들은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여 러시아인들을 노예로 잡아가고 카스피해의 러시아 거점들을 위협했으므로 뮈니히는 이들의 위협에 대처하고 발칸의 기독교인들을 해방시키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1736년 첫 원정에서 러시아군은 페레콥 지협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크림반도에 진입했지만 타타르의 청야전술로 별 소득없이 본토로 돌아왔다. 하지만 레이시의 아조프 공격은 성공하여 요새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다음해 사만명의 투르크군이 아조프를 탈환하기 위해 왔지만 슈토펠른이 성공적으로 방어해냈고 레이시는 크림반도를 공격해 들어갔지만 이번에도 별 소득은 없었다. 뮈니히는 칠만명의 군대로 오차코프를 함락시켰지만 이번에도 타타르의 청야전술 때문에 우크라이나로 돌아가야만 했다. 다음해 원정에서 뮈니히는 십만팔천명의 군대로 투르크군을 드니에스테르까지 추격해갔지만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서 터진 전염병으로 많은 병력을 손실했고 오차코프까지 포기해야만 했다. 1739년 뮈니히는 오스터만의 제안으로 오스트리아와의 공동전선을 펼치기로 하고 키예프에서부터 출발하여 폴란드로 향했다. 스타부차나흐의 투르크군이 축출되자 호틴은 항복했고 몰다비아의 기독교 귀족들은 안나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뮈니치가 받은 소식은 오스트리아가 벨그레이드에서 투르크와 이미 협정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수많은 인명을 손실하여 러시아가 얻은 것이라고는 별 이득이 없는 스텝으로의 변방을 약간 넓힌 것 뿐이었다.
1740년 10월 28일 안나가 죽자 파벌들간에 다툼이 일어났다. 표트르1세의 딸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도움으로 테페르부르크를 장악하여 여제가 되었고 곧 안나 제위시절의 대신들이었던 뮈니히와 오스터만 등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처형의 순간 엘리자베타의 사면으로 이들은 먼 지방으로 유배되는 것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이제 정치판에서의 생명은 끝난 뒤였다. 하지만 뮈니히의 군개혁은 러시아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고 후일 페트르 슈발로프는 뮈니히의 개혁을 모델삼아 새로운 개혁을 이룰 수 있었다.
네번째 찹터는 바로 엘리자베타의 시대를 다루는 Elizabeth Petrovna 1741-1761/2이다. 엘리자베타는 즉위 초 러시아 내정이 혼란한 것을 염려하여 스웨덴과 교섭을 벌였지만 결렬되자 전쟁을 재개하여 레이시는 핀란드 국경을 넘어 해안가를 따라 진군하여 프레드릭스함을 저항없이 차지한 뒤 오보로 후퇴하는 스웨덴군을 추격해갔다. 레이시는 우회하여 스웨덴군의 퇴로를 막아버렸고 결국 헬싱포르스에 갇힌 그들은 항복해야만 했다. 본토가 위협당하자 스웨덴은 결국 협정을 맺었고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영국과 동맹을 맺은 러시아는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군의 보조병력 삼만칠천명을 파병했다. 프란츠 슈테판 황제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라비아의 크렘지어에서 이들을 마중했지만 전쟁은 거의 끝나고 평화협상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의 질서정연한 모습은 서유럽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러시아의 이미지를 새롭게 인식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비록 전쟁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곧 다시 전쟁이 발발하리라 예상한 러시아는 베스투제프와 슈발로프 가문의 지도아래 군을 개혁하는 등 전쟁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다.
프리드리히2세가 작센을 침공함으로서 칠년전쟁이 시작되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편에 서서 아프락신 휘하의 러시아군을 동프로이센으로 파병했다. 프로이센 본토와 고립된 동프로이센에는 삼만이천명의 군대가 레발트 육군원수의 지휘하에 주둔하고 있었다. 드비나를 건너 코브노에 도착한 러시아군은 다리가 없어 배로 도하해야했고 이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일어났다. 장마 대신 찾아온 무더위와 카자크들의 무법행위로 러시아군의 행군은 마치 야만인들의 이동과도 같았다. 인스테르부르크에서 시빌스키와, 메멜을 치고 남하해온 페르모르와 합류한 아프락신은 쾨니히스베르크로 진격해갔으나 적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프레겔 남쪽의 늪지와 숲지대를 계속 진군해가던 아프락신은 유리 리에벤과 조지 브라운의 제안에 따라 그로스-야거스도르프 주변에 전투를 위한 병력배치를 하기 시작했다.
병력배치 중 많은 혼란이 벌어지고 있을때 갑자기 프로이센군이 서쪽에서 나타나 공격을 해왔다. 당시 레발트가 가진 병력은 러시아군의 반도 되지 않았지만 프리드리히의 명령에 복종하여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쇼를레머의 기병공격에 튜체프는 자신의 포대를 이용하여 페르모르가 그들의 철수를 명할때까지 최대한 러시아군이 병력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북쪽날개에서 쇼를레머가 기병전대들을 모아 시작한 강력한 공격은 러시아의 우세한 포병들과 제1사단의 지원으로 물리칠 수 있었고 남쪽날개에서도 홀슈타인 공작이 우데르발렌에서부터 기병공격을 해왔지만 카자크들의 활약으로 이들을 포병과 보병전열 정면으로 유인하여 패퇴시켰다. 6시가 되자 프로이센 보병들이 전투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아직도 병력배치가 제대로 되지않은 1사단과 2사단을 공격했다. 제2척탄병연대가 숲으로 밀려나자 중앙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지만 나르프스키 연대가 끝까지 버티며 전진하여 프로이센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프로이센군은 사천명의 전사자를 남겨둔 채 후퇴했고 시빌스키가 추격해갔지만 러시아군의 손실이 커 제대로된 추격이 어려웠다. 아프락신은 쾨니히스베르크 가까이 진군해갔으나 충격적이게도 후퇴명령을 내렸고 메멜 너머에서 동영하게 되었다. 그의 결정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만들었고 결국 그는 소환된 뒤 얼마 안되 뇌졸증으로 죽었다. 그와 친했던 베스투제프는 아프락신으로 인해 자신의 영지로 유배보내졌다.
아프락신 대신 사령관이 된 페르모르는 레발트가 동맹에 참여한 스웨덴을 견제하기 위해 서쪽에 가있는 틈을 이용하여 동프로이센을 점령했다. 페르모르는 무질서하고 무법천지였던 지난번 행군과는 달리 질서정연하고 민간인들을 해치지 않는 평화스러운 방법을 사용했다. 러시아가 보급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단치히를 이용하려 했지만 단치히가 제한된 항구사용만을 허락하자 슈발로프는 도시를 포격하고 점령하려다가 다른 동맹국들의 견제로 그만둬야 했다.
봄이 되자 러시아군은 행군을 시작했는데 페르모르는 제대로 정찰도 하지 않았으며 러시아군의 상태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고 프로이센 본토에 다다르자 카자크들은 예전처럼 약탈을 해대기 시작했다. 도나 장군이 지키는 퀴스트린에 도착한 페르모르는 루먄체프를 슈베트로 보내 프로이센군의 도하에 대비케 하고 자신은 퀴스트린을 공성했다.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을 떠나 퀴스트린에 온 뒤 알트-귀스테비제를 도하했고 페르모르는 이들과 상대하기 위해 초른도르프 근처로 이동했다.
작센의 카를 공은 그로스-카민 주변에 병력을 배치할 것을 제안했지만 페르모르는 단지 러시아군의 물자들을 바겐부르크 안에 넣어뒀을 뿐이었다. 그는 루먄체프를 부르지도 않았고 브라운이 구천명의 병력으로 합류하여 프리드리히보다 육천명 더 많은 병력이 되었지만 중기병들의 숫자는 프로이센군이 세배 더 많았다. 러시아 후사르들이 제대로 정찰을 하지 않는통에 프리드리히는 밤중에 동쪽으로 우회하는 기동으로 러시아군의 배후로 다가갔다. 러시아군은 서둘러 전열을 뒤집었지만 배후는 미첼로 막혀있고 서쪽은 치베른-그룬트로 불안하게 보호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자크들은 초른도르프에 불을 질렀고 프로이센 포병들은 대포를 끌고 불타는 마을을 지나가기를 망설였지만 연기와 행군 때문에 생긴 먼지는 러시아군의 얼굴로 불고 있었다.
초른도르프 북쪽의 고지에 배치된 프로이센 포대들이 몰려있는 러시아군 우익에 포격을 가함으로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러시아 포대도 맞대응했지만 얇은 전열을 이루고 있는 프로이센군은 러시아군만큼 피해를 입지 않았다. 두시간의 포격전 후 보병들이 러시아우익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총과 대포의 사격으로 많은 손실을 입은 뒤 측면에서 러시아기병들의 공격을 받고 패주했다. 자이들리츠는 러시아기병들에게 반격하여 패주시킨 뒤 뒤이어 공격해온 러시아보병들도 물러나게 만들었다. 카니츠가 러시아중앙과 싸우는 동안 도나는 관측군단(Observation Corps)을 공격했지만 데미쿠가 그의 측면에 기병공격을 가했다. 자이들리츠의 개입으로 이 공격은 실패했고 관측군단은 호페-브루히까지 밀려나 지휘관들이 포로로 잡히거나 부상당했다. 전투는 점점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각 부대들이 따로 노는 상황이 밤까지 계속 되었다. 치열한 전투 뒤 양측은 너무 지쳐 전투를 재개하기 어려웠다.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기 위해 도나만을 남겨두고 떠났는데 러시아 정부는 페르모르에게 이 상황을 이용하여 작전을 전개하라고 지시했지만 그는 부족한 보급문제로 인해 란츠베르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단치히가 여전히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콜베르크를 점령하여 보급항으로 쓸려고 했지만 해당지역에 대한 제대로된 정보와 지도도 없이 포탄도 부족하여 프로이센군이 포를 쏘면 그것을 주워다 쓸 정도로 심각한 보급사정 때문에 결국 콜베르크 공성은 포기되고 러시아군은 후퇴했다.
러시아군의 사령관은 살티코프로 교체되었고 그는 오스트리아군과 공동작전을 펼쳐 프리드리히가 다른 전역으로 떠나고 없는 프로이센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포젠을 촐발한 러시아군은 췰리하우에서 기다리고 있는 베델의 프로이센군을 우회하여 팔치히를 점령했고 병참선이 절단된 프로이센군은 러시아군을 막으러 쫓아왔다.
아이히뮐렌-플리스를 정면에 둬서 공격로가 제한된 상황에서 살티코프는 효율적으로 병력배치를 하였고 베델은 정면공격을 생각했지만 글로히젠과 하아데뮐을 통해 러시아 우익만을 공격할 수 밖에 없었다. 좌익의 계속되는 지원 덕분에 우익공격에 나선 만토이펠, 휠젠, 카니츠 ,보베르스노브의 공격이 잇달아 실패하고 흉갑기병들의 측면공격도 실패하자 결국 베델은 팔천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했고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사천칠백명이었다. 베델의 패배로 오더강의 동쪽은 완전히 러시아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살티코프는 크로젠을 거쳐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했다.
합류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오스트리아군은 보헤미아를 출발하여 러시아군에게로 향했지만 사령관인 다운은 느리게 행군해갔고 러시아군과의 정보공유는 물론 공동작전에 대한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군이 오더 서쪽으로 도하해가면 보급을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다운은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라우돈이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군과 합류했지만 도중 물자를 모두 프로이센군에게 상실하고 오히려 러시아군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는 동안 프리드리히는 오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더를 도하하여 쿠너스도르프 근처에 방어진지를 차린 러시아군에게 향했다. 그는 적군의 진지를 살펴보고는 북쪽 좌익의 측면이 가장 허술하다는 판단 하에 군대를 이끌고 삼면으로 뮐-베르게를 공격했다.
살티코프는 예비대로 뒀던 오스트리아군의 연대들을 지원했지만 패주가 시작된 아군을 막을 수 없었고 곧 뮐-베르게의 러시아군은 무너져 쿠-그룬트 너머로 패주했다. 프로이센군이 쿠-그룬트를 맹렬히 공격해오자 살티코프는 다시 오스트리아 연대들을 지원해줬고 전투는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프로이센 보병들이 좀처럼 진전이 없자 플라텐은 쿠너스도르프를 넘어 살티코프의 남쪽측면을 위협했다. 하지만 쇼를레머의 기병대들은 그로서-슈피츠베르크에서 쏴대는 포격으로 무너졌고 다시 모이기도 전 라우돈이 이끄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기병들의 공격으로 패주해버렸다. 프로이센 보병들은 하루종일 진전도 없이 싸우느라 지쳤고 결국 오후 6시가 되자 무너져 패주를 시작했다. 라우돈이 적기병들을 추격하는 동안 토틀레벤은 프로이센 본군을 쫓아갔고 프리드리히는 간신히 탈출했지만 군대는 궤멸되어 버렸다. 대승이었지만 연합군은 이 승리를 활용하지 못했다. 엘리자베타는 살티코프에게 되도록이면 회전은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다운은 작센이 아군에 의해 평정될 동안 작전을 연기했던 것이다. 결국 공동작전은 포기되었고 다운은 작센으로 떠나고 러시아군은 오더를 거슬러 올라가 글로가우로 향했지만 결국 비스툴라 너머로 동영을 위해 후퇴하게 된다.
다음해 살티코프는 러시아만의 작전을 계획하여 발트해 연안을 따라 콜베르크 등의 항구들을 점령해나갈 생각이었지만 러시아정부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와의 연계작전을 원했다. 새로운 작전은 크로젠에서 글로가우까지 군대를 나눠 파견하고 그곳에서 아예 동영할 수 있는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토틀레벤은 별동대를 이끌고 포메른으로 파견되었고 라우돈은 슐레지엔의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라우돈은 슐레지엔을 침공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뒀지만 브레슬라우를 공격하기에는 충분치 못했고 체르니셰프가 지원군을 이끌고 떠났지만 그사이 프리드리히에 의해 리그니츠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가 약속했던 물자지원이 오지 않은데다 근거지로 삼기 위해 공격할 글로가우를 공성할 수 있는 공성포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살티코프는 아프기 시작하여 결국 실질적으로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회의 결과 페르모르가 임시로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러시아군 사령부에 있는 프랑스 대표단의 제안으로 베를린 공격이 계획이었는데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에서는 러시아 장군이었던 레이시의 아들이 오스트리아와 작센 부대를 이끌고 출동했고 러시아군에서는 토틀레벤이 선봉, 체르니셰프가 본군을 이끌고 베를린을 향해 출발했다. 곧 삼만칠천명의 연합군이 베를린 주변을 에워쌌고 수비대장인 폰 로호브에게 관대한 조건으로 항복을 종용했다. 결국 성문이 열리고 파닌은 슈판다우로 이동 중인 프로이센군을 전멸시켰다. 정부는 최대한 프로이센의 전쟁수행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파괴하고 되도록 많은 군세를 거두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토틀레벤이 군세를 깎아서 받고 파괴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비판을 받자 그에 따른 압력 때문에 화약저장고를 폭파시키기도 했지만 그외 별다른 적극적인 파괴임무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베를린에서 동영할 계획도 세웠지만 프리드리히가 군대를 모아 다가오자 연합군은 얼른 철수하여 본군에게로 돌아가 결국 베를린 점령은 짧은 습격원정 이외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콜베르크 공성은 프로이센군에 의해 실패하여 바다를 통한 안정적인 병참선은 결국 요원해졌다.
새로운 사령관이 된 부투를린은 라우돈의 오스트리아군과 오더강에서 연계작전을 펴고 토틀레벤을 보내 콜베르크를 공략하도록 했다. 토틀레벤의 공격은 점점 느슨해지다가 결국 그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유배로 감면되었다. 토틀레벤 대신 작전을 지휘한 루먄체프는 플라텐의 기병대에 의해 포젠의 병기고가 파괴되고 배후가 위협받는데다 보급을 해주던 함대마저 기상악화로 돌아가버리자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으로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뛰어난 조직력과 실무능력으로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작전을 펴나간 끝에 마침내 수비대의 대부분이 빠져나간 콜베르크는 항복했고 포메른은 러시아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부투를린과 라우돈은 합동작전을 펼쳤으나 프리드리히보다 두배도 넘는 대군이었던 탓에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서로에게 분견대만 붙여준채 갈라지기로 했다. 부투를린은 비스툴라로 돌아가 버렸고 라우돈의 지휘를 받은 체르니셰프의 분견대만이 주전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러시아군이었다. 라우돈은 적은 수비대만이 있는 슈바이트니츠를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러시아군은 여기에서 크게 활약하며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였다. 콜베르크와 슈바이트니츠의 상실로 양측면이 불안해진 프리드리히는 영국마저 지원을 거절하자 핑켄슈타인으로 하여금 협상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때 엘리자베타가 위중해지기 시작했고 얼마 뒤에 사망하여 표트르3세가 새로운 차르가 되었다. 예전부터 친프로이센 성향을 보이던 표트르는 군대를 프로이센식으로 바꿀 움직임을 보이고 프로이센과의 휴전협상을 하기 시작하며 동프로이센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킬 준비를 하였다. 게다가 그는 루먄체프에게 덴마크를 공격할 군대를 준비토록 했곻 체르니셰프의 군대를 프리드리히에게 배속시키기까지 했다. 오스트리아는 졸지에 전세가 역전된 셈이었고 일부 카자크들은 국경을 넘어 보헤미아를 습격하기도 했다. 표트르의 아내 예카테리나는 여기에 반발하는 세력을 모아 남편을 퇴위시킨 뒤 여제가 되었지만 국내사정악화와 동맹국들의 탈퇴로 잠시 멈췄던 동프로이센 철수를 재개할 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 러시아는 전쟁에서 빠지게 되었다.
예카테리나 치하에서 러시아군은 루먄체프와 포템킨의 개혁으로 더 강력해졌다. 러시아는 키예프에서 리가까지의 수로연결 폴란드영토를 지나쳐야 한다는 것 때문에 그 지역을 원하고 있었고 흑해를 통해 지중해에도 진출하길 원했다. 예카테리나는 일단 꼭두각시왕을 바르샤바에 앉혀놓았지만 폴란드의 일부당파에 투르크에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러시아와 투르크 두나라 사이에 전쟁이 터지게 되었다.
갈리친 휘하의 팔만명의 일군은 비효율적인 전역을 통해 호틴을 손에 넣기는 했지만 갈리친은 곧 소환되고 루먄체프가 일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는 분견군단을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 보내 투르크의 지배를 종식시키려고 했다. 다음해 파닌이 이끄는 군대가 드네스트르강변의 벤데리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동안 루먄체프의 일군은 벤데리 수비대의 배후를 지나 다뉴브로 향했다. 루먄체프는 사각방진으로 적의 정면을 묶어두는 동안 나머지군대가 측면과 배후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투르크와 타타르군을 랴바야 모길라, 라르가, 카굴에서 잇따라 물리치고이즈마일, 킬리아, 브라일라를 점령하여 육군원수의 직위를 받았다. 발트해에서 출항한 러시아함대는 소아시아의 체스메만에서 투르크함대를 궤멸시켰고 다다넬즈 해협을 봉쇄하여 투르크는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와의 연결이 끈어져 버렸다. 다음해 돌고루코프가 이끄는 이군이 크리미아를 공격했고 대부분의 타타르가 다뉴브 전선에서 루먄체프와 싸우고 있던 탓에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계속되는 패배에 투르크는 협상을 시도하였지만 크리미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은 재개되었고 군대가 모자랐던 루먄체프는 다뉴브 너머로 잠시 도하하는 단기원정을 펼쳤지만 다음해 제대로 준비를 하고 다른 러시아군이 오차코프와 킨부른에서 싸우는 동안 체계적으로 여러곳에 분견대를 파견했다. 수보로프의 사단 팔천명이 투르크군 사만명을 코즐루지 전투에서 무찔러 슘라는 위기에 처했고 루먄체프는 실리스트리아로 이동했고 살티코프는 루쉬추크 요새를 포위했다. 수도마저 위협당할 것을 두려워한 투르크는 결국 크리미아 타타르와 노가이 스텝의 "독립"을 인정하고 러시아는 그토록 원했고 흑해 북쪽연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투르크와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폴란드내 반러시아당파의 반란은 수보로프가 크라쿠프을 함락시킴으로서 끝나고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의 영토를 나눠갖는 일차폴란드분할에 합의하여 러시아는 리보니아와 우크라이나를 가로막던 폴란드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스스로를 표트르3세라 칭하는 푸카초프 반란이 일어나 한때 카잔, 사라토프 등의 주요도시에 반란군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지만 카잔에서 반란군이 패하고 투르크와의 전쟁이 끝남에 따라 정부군이 투입되어 반란은 진압되었고 푸카초프는 배신당해 결국 정부에게로 넘겨졌다.
흑해북안을 손에 넣은 러시아의 야욕은 멈추지 않았고 크리미아와 쿠반을 합병한 뒤 그루지야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크리미아의 개발이 시작되고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투르크와의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면서 마침내 투르크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투르크군은 킨부른에 상륙작전을 감행했지만 수보로프에 의해 격퇴되고 러시아는 이에 시간을 벌어 루먄체프와 포템킨 휘하의 두 군대가 조직되어 오차코프를 공격하였다. 오차코프는 포템킨에 의해 함락되었지만 공성과정은 포템킨의 머뭇거림과 비효율로 러시아군의 공성능력에 대한 약점을 드러냈다. 루먄체프가 지휘에서 물러난 뒤 포템킨이 모든 지휘권을 잡았다. 투르크군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합류를 막으려고 했지만 작센-코부르크의 군단과 공동작전을 펴게 된 수보로프의 활약으로 포크샤니와 림닉 전투에서 대패하고 이일로 수보로프는 림닉스키 백작의 칭호를 얻었다.
유럽의 불안정한 정세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이탈한 뒤, 러시아군에게는 보강된 이즈마일 요새를 공격할 임무가 주어졌다.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한때 공성포기가 논의되기도 했지만 새로 사령관이 된 수보로프는 군을 훈련시키며 공격을 준비했고 결국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다음해 이즈마일 근처에 팔만명의 투르크군이 집중되자 쿠투초프는 요새 밖으로 나가 만명의 투르크군을 바바다그에서 몰아냈고 레프닌이 모든 군대를 모아 마친 전투에서 투르크군을 무찔렀다. 오랜 논의 끝에 마침내 야시에서 조약이 맺어져 러시아는 오차코프를 비롯한 흑해의 북안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투르크와의 전쟁 중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3세가 무리한 요구를 해오며 선전포고를 하여 국경을 넘어 프레드릭스함과 니슬로트를 공격하고 작은 해전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전쟁은 국경은 그대로 두자는 것으로 합의하고 휴전이 되었다.
투르크와의 전쟁이 끝난 뒤 남쪽국경이 안정된 예카테리나는 군대를 폴란드로 파견했다. 타데우스 코시치우슈코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두비엔카에서 패배한 뒤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함께 이차폴란드 분할협정을 맺었다. 1794년 또다시 폴란드인들의 봉기가 터졌고 토르마소프가 이끄는 군대가 라쿠아비체에서 패배한 뒤 봉기는 더더욱 확산되어 바르샤바의 러시아와 프로이센 수비대는 피신해야만 했다. 코시치우슈코가 라프카에서 패배하여 크라쿠프를 잃기는 했지만 계속되는 봉기는 프로이센이 물러나게 만들기도 했다. 러시아군은 두 방향에서 접근했는데 하나는 수보로프가 우크라이나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고 요한 페르센은 남쪽에서 다가왔다. 이들의 합류를 막기 위해 코시치우슈코는 칠천명의 병력으로 두배의 병력을 가진 페르젠과 싸웠지만 결국 마치에요비체에서 대패하고 자신은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로 봉기의 근거지는 바르샤바 밖에 남지 않았고 삼만명의 폴란드군이 비스툴라 반대편의 프라가에서 최후까지 저항하기로 했다. 하지만 수보로프는 일반적인 공성 대신 직접적인 공격으로 세시간 만에 프라가를 함락시키고 바르샤바는 저항없이 항복했다. 얼마 후 삼차폴란드분할로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지고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영토를 나눠가졌다. 몇년 후 예카테리나는 1796년 11월 6일에 죽고 아홉번째 찹터인 Paul I 1796-1801이 시작된다.
당시 서유럽에서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일차동맹전쟁이 일어났지만 러시아는 폴란드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가던 중, 몰타의 성 요한 기사단을 추방해 그들이 러시아로 망명해오자 파벨은 영국에 반프랑스동맹을 제안했고 이리하여 일차보다 더큰 이차동맹전쟁이 시작되었다. 넬슨이 나일 해전으로 이집트의 프랑스군을 묶어두자 우샤코프 제독의 흑해함대가 도착하여 이들 연합함대는 이오니아 섬들로 나아가 이탈리아의 동쪽측면을 위협할 계획을 세웠다. 체리고, 찬테, 마르바에 이어 다소 긴 공성 끝에 코르푸가 항복하자 연합함대는 아무 방해없이 아드리아해를 건너 브린디시를 손에 넣고 앙코나를 봉쇄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홀란드 북부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는데 영국군이 헬데르에 상륙했지만 곧 적의 방어태세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러시아 수송선단은 발트해를 출발하여 요한 헤르만의 지휘하에 뒤이어 상륙했고 곧 군대를 넷으로 나눠 셋은 베르헨을 정면공격하고 하나는 알크마르 방향으로 진출하여 틈을 노린다는 작전을 세웠다. 해뜨기 두시간 전에 공격을 시작한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십자포화를 받으며 제대로된 대오도 갖추지 못하고 베르헨을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물러나고 헤르만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영국군도 작전목표를 완수하지 못하고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헤르만의 후임인 에센의 지휘 아래 10월 2일 공격에서 약간의 땅을 빼았았지만 6일에 일어난 혼란스러운 싸움으로 결국 12일 뒤, 프랑스군과의 협상을 통해 연합군은 홀란드에서 물러났다. 영국은 러시아군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처음에는 아일랜드 반란에 투입하고자 했지만 콘월리스의 반대로 결국 저지 섬에 내려놓았다.
러시아의 주공격군은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기로 했는데 이를 지휘할 사령관으로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선정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의도와는 다르게 연합군의 전략은 잘못되기 시작했는데 북이탈리아에 대한 영토야욕을 드러내던 오스트리아는 수보로프가 계속 성공하고 사보이 왕가의 복권을 지지하자 스위스에 있던 카를 대공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을 라인 중류전선으로 배치하고 수보로프의 러시아군을 대신 재배치시키게 하였다. 카를이 떠나는 동안 호체의 군단만이 남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마세나는 군대를 증원하고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한다음 상트 고타르 고개에 르쿠르브를 보낸 뒤 본군은 취리히 근처에서 코르사코프의 러시아군과 대치하다 드디어 9월 25일 공격에 나섰다. 러시아군의 좌익이 모르티에의 사단과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로르주의 사단은 디티콘에서 리마트를 도하하여 취리히 방향을 공격했다. 결국 러시아군은 패주하여 취리히로 후퇴했고 얼마 후 에글리사우로 철수하게 되었다. 술트가 이끄는 분견대가 호체의 군단이 러시아군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견제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전투에 도움을 주지 못했고 결국 연합군은 샤프하우젠으로 후퇴하여 전장으로 오고있던 수보로프는 위험한 상황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스위스 전역이 일어나는 동안 수보로프는 북이탈리아의 연합군사령관으로 왔는데 자신의 방식대로 군을 훈련시키고 준비한 그는 크라이의 오스트리아군 이만명을 만토바 공성전에 투입시킨 뒤 본군을 셰러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있는 아다강을 향해 출발시켰다. 브레시아와 베르가모를 차례로 점령한 수보로프는 바그라티온에게 레코의 프랑스군을 공격하게 한 뒤, 트레초와 카사노를 도하했고 제시간에 병력을 배치할 수 없었던 프랑스군은 패주했다. 셰러의 후임인 모로는 군대를 제노바로 후퇴시키고 각지에 수비대를 두었지만 연합군은 밀라노에 입성했다. 만토바가 최우선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주장에 수보로프는 군대를 그곳에 더 파견하여 군세가 줄었고 이를 이용하여 프랑스는 수보로프를 모로와 맥도널드로 하여금 양쪽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중남부에서 북상하는 맥도널드를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은 크라이였지만 만토바 공성 때문에 오트의 육천명만이 동원될 수 있었다. 이를 들은 수보로프는 벨가르드에게 제노바를 견제하게 하고 35마일을 하루만에 주파하며 오트에게 달려갔다. 오트를 공격하던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의 선봉이 나타나자 물러났다. 다음날 바그라티온이 이끄는 우익이 돔브로프스키를 공격하여 맥도널드는 만오천명을 지원했지만 연합군도 슈바이코브스키와 로젠베르크가 투입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중앙과 좌익의 프뢸리히와 오트는 너무 늦게 행동하는 바람에 전투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날은 승패가 나지 않은채 양측은 트레비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섰다. 다음날 맥도널드는 남쪽날개에 병력을 집중시켜 수보로프의 우익을 압도하려고 했지만 바그라티온에게 막혀버렸고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전열에 틈이 생겨 한때 슈바이코브스키가 빅토르와 루스카의 사단에게 둘러싸이기도 했지만 수보로프가 서둘러 지원병력을 이끌고 와 프랑스군을 밀어냈다. 오스트리아군의 총사령관 멜라스는 중앙의 프뢸리히 사단을 늦게 지원했고 전투결과는 전날과 같이 승부를 가릴 수 없었다. 그날밤 연합군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은 맥도널드는 동쪽으로 후퇴했고 연합군은 피아첸차에서 칠천오백명의 포로들을 잡을 수 있었다.
곧 토리노와 알레산드리아의 수비대가 항복해오고 만토바가 점령됨으로서 크라이의 군대가 수보로프와 합류하게 되었다. 새로운 프랑스군 사령관인 주베르는 노비에 군대를 배치했고 수보로프는 부대가 도착하는대로 공격에 투입시켰다.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한 크라이는 파스투라나와 레메강 사이의 계곡까지 적을 밀어붙였고 주베르는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나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지휘권을 잡은 모로는 우익의 콜리의 여단을 좌익에 지원하여 좌익에만 이만명의 프랑스군이 집중되었다. 가르단의 사단이 있는 중앙의 노비는 8시가 되자 바그라티온과 밀로라도비치의 공격을 받았지만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고 멜라스의 사단이 그들의 우측을 공격하자 마침내 무너져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가비까지 후퇴해야만 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육천육백명이 사상하고 삼천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연합군의 사상자는 8,750명이었는데 대부분은 오스트리아군이었다.
언급했다시피 북이탈리아에 대한 영토야욕을 드러내던 오스트리아는 수보로프를 스위스 전역으로 재배치했는데 수보로프는 타베른에서 오스트리아가 약속했던 물자가 준비되지 않았던 탓에 오일간 출발을 연기해야만 했다. 상트 고타르 고개는 르쿠르브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수보로프는 로젠베르크에게 디젠티스와 오버알프 고개를 통해 우회해서 오도록 하고 본군으로 하여금 상트 고타르를 정면공격하게 했다. 연합군은 호스펜탈까지 프랑스군을 밀어붙였고 그날 로젠베르크가 합류해왔다. 프랑스군은 우르네를로흐 터널을 막았지만 트루브니코프가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밀로라도비치가 터널로 밀고들어오자 무기를 로이스강에 던져버리고 후퇴했다. 터널 반대편에는 악마의 다리가 로이스의 양편을 이어주고 있었는데 트레보긴이 이백명을 데리고 로이스에 직접 뛰어들어 건너자 프랑스 저격병들의 저격이 그쪽으로 집중된 것을 이용하여 러시아 군인들은 악마의 다리를 건너 프랑스군을 루체른 호수까지 추격해갔다. 수보로프는 슈트라우흐에게 상트 고타르를 지키게 하고 아우펜베르크와 암스테그에서 합류한 뒤 알트도르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슈비츠와 취리히로 바로 이어지는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수보로프는 작전회의를 열어 산과 계곡을 건너 우회하여 슈비츠로 가기로 했다. 군대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킨치히 고개를 넘어 무오타탈에 도착했고 그곳에 있던 소수의 프랑스군은 도망치거나 포로로 잡혔다. 르쿠르브는 로이스 하류에서 언제든지 측면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지만 후위대를 이끌던 로젠베르크는 에르스트펠트를 공격했고 프랑스군은 알트도르프를 점령하는 것으로 답했지만 다시 로젠베르크에게 밀려났다. 다음날 그는 킨치히를 넘어 탈출했고 르쿠르브는 그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있기만 했다. 합류하기로 되었던 링켄의 오스트리아군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코르사코프와 호체가 프랑스군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오타탈에서 열린 작전회의에서 동쪽의 린트로 진군하기로 결정이 나고 바그라티온은 선봉은 맡고 프라겔 고개를 넘어 동쪽으로 행군해갔다. 몰리토르가 중간에 길을 막아 이틀간 클뢴탈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바그라티온은 글라루스까지 길을 뚫었다.
모르티에의 사단은 무오타탈에 있는 로젠베르크의 후위대를 향해 서쪽에서부터 진군해오고 있었다. 로젠베르크는 초소를 지원하여 프랑스군을 밀어냈고 푀르스터의 사단이 합류해오자 무오타탈에 방어대열을 짜고 프랑스군을 기다렸다. 프랑스군이 삼열로 공격해오자 얼마간의 전투 뒤 러시아군은 함성을 지르며 적을 밀어붙였고 무오타를 건너는 다리까지 밀려난 프랑스군은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본군이 탈출할 시간을 번 로젠베르크는 수보로프를 따라 프라겔을 넘어 글라루스에 도착함으로서 모든 연합군이 글라루스에 집결했다. 작전회의에서 수보로프와 오스트리아 참모들은 북쪽으로 가서 옐라치츠의 고립된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할 생각을 했지만 러시아 참모들은 남쪽으로 되도록이면 프랑스군과 멀리 떨어질 생각 밖에 없었기에 수보로프도 이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바그라티온이 이번에는 후위를 맡은 군대는 파닉서 고개를 넘어 라인강의 일란츠에 도착했고 여기까지는 프랑스군도 따라오지 못했다. 수보로프는 린다우에서 코르사코프의 패잔병력과 만났고 이들은 바이에른 남부에서 동영을 하기로 했다. 수보로프는 러시아로 소환되었고 병약해진 그는 자신의 영지인 코브린으로 가서 얼마 뒤 죽었다.
파벨의 변덕스러운 성격은 이차동맹이 결성된 주원인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해체의 원인이 되었다. 파벨은 오스트리아의 치사하고 비협조적인 태도에 화를 냈고 영국이 몰타를 기사단에게 돌려주지 않는 것에 분노했다. 그는 영국선박들을 억류시키고 무장한 원정대를 인도방향에 파견했지만 시간과 자원부족으로 전동맹국들이 서로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 뒤 파벨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가 차르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으로 아홉번째 찹터가 끝나고 마지막 찹터인 열번째인 Conclusions가 나오지만 말그대로 "결론"이므로 그닥 흥미롭게 언급할만한 것은 없는 편이다. 애초에 위에 다룬 이야기들은 그동안의 편제나 전술개혁 등은 모두 빼고 러시아가 18세기 동안 겪은 전쟁사만 골라서 요약한 것이다. 아무리 요약해서 이렇게 기니 아무래도 난 편집자되기 틀렸다;;;
이 책은 처음 매쿼리 대학에 다니는 여자애한테 부탁해서 처음 읽었는데 그동안 한번 소개해야지 마음만 먹다가 같은애한테 같은책 또 빌려달라기에는 그렇고 해서 이번에는 시드니 음대에 다니는 여자애한테 부탁해서 거기 도서관에서 빌린 것이다. 따라서 스캔한 이미지들도 모두 거기서 나온 것이다. 이미 읽었지만 더피의 책은 충분히 소장할 가치가 있기에 살까 하고 아마존을 비롯한 인터넷서점들을 찾아보니 죄다 기본적으로 백불은 넘어간다ㅜㅜ
아무튼 더피가 쓴 책답게 재미있고 쉽게 읽히는 책으로 근대전쟁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좋아할만한 책이다. 강력추천한다.
첫댓글 후아 . 기네요. 담에 아껴봐야겠네요. 쿨럭.
오호 좋은 자료네요 카이사르 말씀처럼 길지만 잘 읽었습니다, ^ ^
헥헥... 겨우 다 읽었고 하니.. 덧글도 달아야지 하다가... 아니!!! 어째서 자동로그아웃이냐!!!!
이렇게긴건 눈으로만 읽고 넘긴다능..
잘 읽었습니다. 와~ 너무 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