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전인적 재난입니다
<悳泉> 나 병 훈
나 홀로 초부랭이 농부라고 쭈빗대고만 마는 전원의 조그마한 내 텃밭 아이들 밤새도록 촉촉한 봄 비, 밤새 땅속 깊이까지 들어 앉았기에 안심입니다. 한 때는 포스팅에 빠져 혼자만의 조잡한 시평 텃밭을 일구어 본 적 있습니다. 늙어감에 새벽 꿈조차 잃어버리기 일쑤인지만 생생한것은 드문일입니다. 기억에 남는 시 부여잡고 낭독하는 자화상이 투영이듯 반투영이듯 꿈 잔결이니 이내 날아가기전에 용기내어 공유 해 봅니다. 좋은 시를 만나면 버릇처럼 시평을 하고자 대들고 맙니다. 참 잘못배운 버릇이요 허기이자 망녕입니다. 역설(paradox)을 시작 도구로 사용하는 용기도 그렇지만 스킬(skill)이 뛰어난 보기 드믄 시같습니다. 모순된 인간세상, 어쩌면 우리는 한 사람의 전인적 재난일지도 모를일입니다. 명심자(冥心者)님의 『밀도』를 정중하게 모셔봅니다. 시평의 효울적인 방법론상 당초 연구분 없는 시를 편의상 4개의 기승전결 연으로 구분하여 음미해봅니다. 이 시는 행과 연을 구분해야 그 이미지가 더 살아나고 전달이 잘 될 것 같습니다. 무례한 짓 용서하세요. ^^-^^
밀도
명심자
당신이라는 矛盾을 견뎌온 나날에 대하여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에는 잡히지 않는 당신
오늘도 앵글의 사각지대를 점검해보지만
오직 기억의 체성분을 후추처럼 쳐야
비로소 느끼는 당신
얼마나 사무친 이름이기에
목을 뚫고 나온 진동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성대의 진동수를 세어보다
당신에 대한 나의 밀도는 과연
몇 퍼 제곱미터쯤 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대의 진동수를 흐느낌이라 한다지요
단위 부피당 공기의 질량을 공기밀도라 한다지요
지난 날을 흐느끼며,
단위 기억 당 당신의 질량은 뭐라 이름 붙일까요
당신은 한 사람의 전인적 재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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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는 어떤 시일까?
무엇보다도 적절한 “드러냄”과 “숨김”을 통해 암시와 이미지로 배합하여 독자에게 긴장감과 재미를 선사 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시적 암시와 이미지는 그 형상화가 구체적이고 명징 할수록 좋다. 명심자 시인이 추구하는 창작의 기(氣)와 풍(風)이 아닐까 싶다. 그는 결코 숨기려고 집착하거나 드러내지도 않기에 발표하는 시마다 평론가들로 하여금 “좋은 시”의 반열에 올려지곤 한다. 이는 시인이 실제로 “있을 법한 사실성”을 행간에 자유자재로 “드러내고 숨길 수 있는” 천상의 시인이 지닌 DNA적 시혼(詩魂)을 이어받고 있음도 부인 할 수 없다. 물론 그의 여느 시에처럼 인간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숙명론적 체념이 시 구상의 저변에 흐르고 있음은 물론이다.
행간을 살핀다.
제1연에서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세월을 살아왔을 우리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話者(1)가 이 풍진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은 애절하기까지 하다. 이 시가 전개기법 상 첫 연에서 성공을 거둔 이유이기도 하다. 앵글을 통해 감지한 세상이라는 뼈의 속성은 사각지대에 갇혀버린 불합리한 모순(矛盾) 덩어리로만 보일 뿐이다.(2∼4) 하여 우리가 꿈꾸는 진실한 세상은 극단까지 가는 고정 관념화된 기억의 틀을 깨트리고 나서야 비로소 목도(目睹)할 수 있다는 선험적인 인식의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5∼6)
제2연은 여류시인의 체념과 한이 어우러지는 감성적인 휴머니티가 녹아 흐른다. 소위 서정적 감정 텃치가 주는 좋은 시의 매력이요 묘미다. 배반과 대립이 공존하는 모순된 삶속에서 사무치게 갈구해 온 울부짖음은 극에 달하지만 당신은 보이지 않는다고 체념할 뿐이다.(7∼8) 사각지대는 해소되지 못한 채 오로지 고독의 체념으로 줄달음 칠 뿐이다.(9)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나의 희망과 바램과 노력은 과연 얼마나 진정성을 지니고 있으며 충실한 밀도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10∼11)
제3연은 전환부다. 따라서 시제인 “밀도(密度)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의 다중성은 그 형상화가 매우 구체적이고 명징하다. 성대의 흐느낌은 감정의 극한적 한계치란다.(12∼13) 화자는 그 한계치를 단위 부피당 공기질량인 밀도와 환유(換喩)시킨다(14) 이로써 전연에서 보여 준 정의로운 세상을 희구하는 기억에 대한 이 세상의 질량이라 할 수 있는 밀도(密度)가 과연 얼마나 충실한가에 대해 우리의 인식론적인 자문을 호소하듯 던지고 있다. 이처럼 자신만의 시적 태도와 개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모름지기 시 창작 이론상 구체적인 형상안에 시적 의미를 암시적으로 도입시킬 수 있는 재능 이외로는 설명이 불가 할 것이다. (15∼16)
제4연은 귀결연으로서 주제연이자 이 시를 좋은 시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절창이요 백미를 담보해주는 시작 기법의 성공을 거두었다. 생각건대 우리 자신일 수 있는 화자가 그토록 갈구하는 모순 없는 세상과 조우할 수 있는 기억의 체성분에 뿌릴 수 있는 후추는 없는 것일까? 진정 앵글의 사각지대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바로 우리가 꿈꾸는 사람살기 좋은 세상은 ”전인적 재난“이라는 역설(paradox)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명심자 시인이 진중하게 독자에게 던지는 이 굴곡지고 변질된 세상에 대한 고해성사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는 연시형태를 빌려 배반과 대립이 공존하는 상호관계라 할수 있는 세상을 통해 우리들의 자화상을 투영하려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삶을 참신하게도 "전인적 재난"이란 건조한 역설(paradox),로 투영시킴으로써 독자들을 극적 오르가즘으로 이끌어 주고 있다. 대담한 시적 도발이다. 그것은 결국 칸트의 초월론적 인식을 시상의 도구로 변용을 시도한점도 신선하거니와 구체적인 형상들을 드러내며 시적 이미지를 행간에 암시적으로 숨겨 놓고 있기에 독자들은 서두에서 제시한바처럼 시적 긴장을 내려 놓을 수 없고 따라서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 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