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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불패의 해전기록
호남이 없으면 조선도 없다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다음 날인 11일 새벽에 다시 돌아와 포위해 보았습니다만, 왜적들은 허둥지둥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날 싸움하던 곳을 조사해 보니 죽은 시체들이 열두 곳에 모아서 쌓고 불태웠는데 거의 타다 남은 뼈다귀와 손발들이 흩어져 있고, 포구 안팎에는 흘린 피가 땅에 가득하여 곳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도적들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에 선단을 보내 안골포의 적정을 알아본 즉 “왜군들은 모두 도망가고 없다” 고 했다.
조선 함대가 물러가자 산성 쌓는 일을 하던 일꾼들까지 동원해서 갯벌에 올라앉은 왜선과 방파제 웅덩이에 가라앉은 배들도 끌어내 수리해서 곧바로 도망친 것이다.
왜군들은 갯벌에 널려 있던 시체와 방파제 안쪽 웅덩이에 빠진 시체들을 모두 모아 열두 곳에 나누어 화장을 했다. 안골포에서의 왜군 측 사상자가 얼마였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최근 일본인 연구가 가타노 쓰기오 씨가 쓴 《이순신과 히데요시》를 보면 약 2,50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가타노 씨는 한산도해전 때는 기천 명의 왜군 사상자가 있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의 해전 방식은 속공으로 적선단을 분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고 해전의 시간도 길지 않았다. 발사된 무기들도 살상용인 피령전이나 편전, 산탄 등이 아닌 선체 공격용 철탄과 살탄류가 많았다. 이 살탄류로 2천5백 명의 사상자를 낼 수 있었을까?
제한된 해전 시간, 선체 공격에 바빴던 상황, 조선 함대 측의 화약과 살탄류 보유량의 한계, 왜군 측이 방패 등 은폐 시설을 갖춰놓고 시종일관 그 뒤에 숨어 있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사상자 수는 그보다는 적은 숫자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비록 적과의 대결이었지만 인명 살상에 중점을 둔 해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골포의 왜군들은 전우의 시체를 불태우면서 조선 함대를 상대로 하는 전투는 수비전에도 견딜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 상세한 내용은 구키가 히데요시에게 보고했으며, 이에 히데요시는 “추후로는 조선 수군과 접전치 말라!” 는 해전 금지령을 내리게 된다.
명령을 받은 부산의 왜군들은 안골포 해전이 있은 지 40일이 되던 날, 대포를 쏘며 부산 쪽으로 당당히 다가가는데도 단 한 번도 응전해 오지 못했다. 이것은 조선의 속지화를 내걸고 전쟁을 벌인 침략군 측의 변화된 모습이었는데, 한산도 · 안골포 해전의 결과는 전쟁을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바꿔 놓고 있었다.
이른 아침, 안골포의 상황을 확인한 조선 함대는 제 3의 함대를 찾아 노를 재촉했다. 낙동강 하구까지 와서 그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왜군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대포 소리를 듣고는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한산도에서 와키자카의 선봉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였으므로 안골포에서의 대포 소리를 들은 왜군 함대들은 구원은 고사하고 제풀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말았다.
개전 초 부산성과 동래성의 조선군들이 왜군들의 조총 소리에 놀라 스스로 무너졌고, 다음 양산-울산-상주-탄금대와 그 밖의 전투에서도 조선 육군은 조총 소리에 놀라 도망친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는 왜군들이 조선 수군의 대포 소리에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그날 오후 10시쯤 양산강(낙동강 하구 동쪽으로 흐르는 강)의 김해 포구 및 감동(구포) 포구를 수색했으나, 왜적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덕 바깥에서부터 동래군의 몰운대(낙동강 하구 다대포 끝)에 이르기까지 선단을 늘어 세워 진을 치게 하고, 군대의 위세를 엄하게 보이게 하고는 적선의 많고 적음을 탐방해 보고 오라고 하며, 가덕도의 응봉, 김해의 금단곶 등지로 탐색병을 정해 보냈던 바…
감동 포구(구포포구)는 당시의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물류기지로 조선왕조 때는 경상도 역마 조직을 다스리는 찰방이 있었다. 그 전 수삼일 동안 양국은 연합함대를 동원한 대해전을 치렀다. 그런데 왜군 쪽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반면 조선 쪽은 모두 건재해서 군악을 울리며 초대형 군함 퍼레이드를 벌였다. 가덕도에서 몰운대까지 무려 20km에 이르는 초대형 학익진이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이날 밤 8시경, 금단곶으로 보냈던 탐망군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의 보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연대에서 탐망할 작정으로 산 위로 올라갔을 때, 산봉우리 아래 조그만 암자에 한 늙은 중이 있기에 함께 연대로 올라가서 영산강과 김해강 등 두 강의 으슥한 곳과 그 두 고을을 바라보니, 적선이 들어 서 있는 수는 두 곳을 합해 대략 100여 척쯤 되었습니다.
늙은 중에게 적선의 동정을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근일에는 날마다 50여 척씩 떼를 지어 계속하여 그들 나라로부터 왔다가 어제 안골포 접전 때 대포 쏘는 소리를 듣고서 간밤에 거의 도망쳐 버리고, 다만 이제 100여 척만 남아 있는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왜적들이 두려워서 도망친 꼴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학익진을 벌리고 수색대를 육지로 올려 보냈을 때, 원균 함대 소속의 허수광이 산 속에 기거해 있던 중을 만났다. 그 중은 안골포와 김해강 입구 사이에 있는 뒷산 봉화대 아래의 암자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대마도에서 오는 왜선단이 낙동강 하구로 들어와 김해까지 들어가고 또 도망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남아 있던 100여 척의 왜선들도 낙동강 상류로 긴급히 대피했기 때문에 협선으로 꾸민 중형의 전투선단을 앞세우고 김해 포구와 감동 포구에 다가갔을 때에는 왜적은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다.
그 중의 증언은 당시 히데요시가 일본에 남아 있는 병선을 총동원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이렇게 건너온 왜군들이 조선의 대포 소리만 듣고도 도망쳤다는 당시의 상황을 입증해 주는 증언이기도 하다.
안골포와 김해부는 직선거리가 10km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안골포에서의 포성은 그 주변 일대에서도 들렸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대체로 왜군들의 조총 소리를 듣고 도망간 조선 육군의 패전사는 잘 알고 있으나 이순신이 개전 3개월 만에 대포 소리만으로도 왜군들이 도망가게 만든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그리고 그날(11일) 저녁 저물녘에 천성보(가덕도의 보루)로 돌아와 잠깐 머물면서 적에게 우리들이 오래 머물 계획으로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고, 밤을 이용하여 군사를 돌려 12일 오전 10시 경 한산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 올라갔던 왜적들은 연일 굶어서 걸음도 잘 걷지 못한 채 지쳐서 해변에서 졸고 있기에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이미 머리 셋을 베고, 그 나머지 400여 명이나 되는 왜적들은 탈출하여 도망갈 길이 없는지라 새장 속의 새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함대는 가덕도에서 몰운대에 이르기까지 군함 행진곡을 울리며 초대형 군함 퍼레이드를 끝내고 저녁 무렵 가덕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기 체류하는 것처럼 적을 속이고 밤을 타서 견내량 북쪽 가조도 근방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그리고는 이튿날 아침 견내량을 통과해서 오전 10시경 한산도에 도착했다.
웅천과 안골포 등지의 왜군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조선 함대의 동향을 살폈다. 그런데 저녁때까지 있었던 조선 함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므로 매우 놀랐을 것이다. 그야말로 신출귀몰 현상이었다.
한산도에 도착하자 섬 주위를 순시하고 있던 거제도 토병들과 의병들이 그간의 정황을 보고해 왔다.
한산도 해전에서 도망친 400여 명의 패잔병들은 4일 동안 나무열매, 나무껍질 등으로 연명하고 있었고 해변가에 앉아서 졸다가 화살을 맞고 목을 베인 왜병들은 혹시라도 근방을 지나갈지 모르는 왜군 함대를 기다리다가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 같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신과 우수사는 타도에서 온 객지의 군사로서 군량이 벌써 떨어졌거니와, 또 금산의 적이 세력이 강해져서 이미 전주에 이르렀다는 공문들이 연달아 달려오고 있기에, 그 섬에 상륙한 적들은 거제의 군사와 백성들이 힘을 합하여 목을 베고 그 죽인 수효를 공문으로 통지해 줄 것을 그 도 우수사(원균)에게 약속하고, 13일 본영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산포 쪽으로 원정을 하자면 보급품을 새로 보충해야 했는데, 여수 본영이 아니고는 막대한 양의 군량과 화약무기 등을 조달할 수 있는 고을이 없었다. 그래서 좌 · 우수영 함대는 각기 본영으로 귀항했다.
귀항을 하게 된 이유는 또 있었다. ‘북쪽으로부터 침공해 오고 있는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군이 금산은 물론 전주성까지 위협하고 있다’ 는 급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주성이 무너진다면 전라도의 반이 적에게 넘어가게 될 뿐만 아니라 전라 육군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전라 육군을 지휘했던 광주목사 권율이 이치고개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의병장 고경명과 700의사들의 분전으로 고바야카와군의 기세는 한풀 꺾이고 있었다.
● 호남이 없으면 조선도 없다
고바야카와군이 이치 · 웅치 · 금산 전투에서 패하게 된 원인은 공격로를 바다가 아닌 노령 · 소백 산맥의 험한 고갯길을 선택했던 데에 있었다. 왜군 측에서는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아무튼 1만의 고바야카와군은 2~3천 단위로 세분되어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야 했으며, 왜군들은 고갯마루에서 1·2차의 방어진을 구축하고 매복과 기습으로 응전해 온 전라 육군(관군과 의병)에게 혼쭐이 났다.
왜군들은 2~3열 종대로 좁은 산길 소로로 이동했기 때문에 조총의 3교대 밀집사격과 기마대의 돌격전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조선군은 화약무기와 활, 바위, 통나무 등을 이용한 다단계 방어전으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다. 이 같은 방어 개념은 그후 수원의 독성산성 전투와 행주대첩으로 발전해 간다.
일부의 왜군 부대들은 웅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전주성까지 다가갔지만, 이미 사상자가 많이 난데다가 이치 · 금산 · 한산도 · 안골포에서 왜군들이 모두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와키자카와 구키 함대를 박살낸 바다의 이순신이 전주성으로 화약무기와 1등 사수들을 급파했다!” 는 소리를 듣고는 전주성 공격을 단념하고 밤을 타서 퇴각해 갔다.
이로써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벌어진 전라 수륙군과 왜군 수륙군간의 3차 격돌은 모두 끝이 났다. 그후 이어진 양측 수륙군의 4차 격돌은 부산포 해전과 수원 독성산성 전투이며, 5차로 벌어진 대결이 수군 쪽은 웅천포 해전, 육군 쪽은 행주 대첩이다.
이순신은 이같은 전쟁들을 치르면서 “만약 호남이 없다면 조선도 없다!” 는 결의에 찬 어록을 남겼다.
왜군들은 한반도 침공계획을 세우면서 각 부대들이 8도에 주둔하면서 각자의 영지로 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8월과 9월에 전라도의 금산, 경상도의 경주, 황해도의 연안, 기타 곳곳에서 영지를 지켜내지 못하고 남으로 퇴각해오고 있었다. 퇴각한 왜군들은 갈 곳이 마땅찮았고, 그래서 집결한 곳이 밀양과 김해 지역이다. 집결된 병력은 약 2만, 이들 왜군들이 새로운 영지를 구하고자 진주성을 공략해서 서부 경남을 점령하고 다음 전라도를 합방한다는 전략으로 진주성을 공격했다.
왜군들은 1592년 10.1~4일까지 창원과 함안을 지키고 있던 경상병마사 유숭인의 2천 군을 격파하고, 5일에는 진주성을 포위했다.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김시민(金時敏)은 격물 · 치지적 인물이었다. 8월에 진주목사가 된 후 밤낮으로 화약무기를 준비하고 영호남의 의병까지 동원하여, 그 가운데 3천 명은 성안을 지키고 2천 명은 성밖에서 게릴라전을 펴게 했다.
6일 왜군들은 공성용 사닥다리, 운제, 짚단, 토성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3천 명의 진주성 수비군은 각종 화약무기를 쏘고 던지며 왜군들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화약무기가 다할 무렵 전라도에서 화약무기들을 보충해 주었다.
10일이 되자 왜군들은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조선 육군이 화약무기를 사용해서 거의 완벽하게 승리한 첫 모델이 되었다. 이 같은 모델은 그 후 수원의 독성산성과 행주산성 전투, 그리고 전국의 의병들의 내고장 지키기로 확산되어 갔다.
반면, 조선 육군에서의 이 같은 모델의 확산은 왜군 육군에게는 깊은 좌절을 가져다 주었는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왜군들의 좌절이 그것이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신의 여러 장수들이 벤 적의 수급 90개는 왼쪽 귀를 베어서 소금에 담아 궤 속에 넣어 올려 보내옵니다. 신은 당초에 약속할 때,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공을 바라는 생각으로 적의 머리 자르는 것을 서로 경쟁하다가 도리어 해를 입어 사상당하는 예가 많은데, 이미 적을 죽였다면 비록 목을 자르지 않더라도 힘껏 싸운 자를 으뜸 공로자로 쳐주겠다고 거듭 명령했기 때문에, 목 자른 수가 많지 못하옵니다.
경상도의 공로 세운 여러 장수들은 작은 배를 타고 뒤에 있으면서 바라보다가 적선이 30여 척이나 깨지는 것을 보고는 구름같이 모여들어 머리를 잘랐습니다.
그래서 신의 여러 장수들이 목 자른 것과 경상우수사 원균과 본도 우수사 이억기 등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목 자른 것을 합하면 거의 250이나 되고, 바다에 빠져 죽고 또 머리를 베고도 물에 빠뜨려 잃어버린 것들도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장계에는 이순신이 원균 쪽의 시체 목 베기에 대한 내용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대는 남이 지어 놓은 밭에 들어가서 추수하듯이 목 베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원균은 자신의 이 같은 행각이 훗날 조선 수군과 조선왕국,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얼마나 큰 불행을 가지고 오게 될지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렇게 비정상적이고 경쟁적인 수급 베기 상황은 조선 수군을 분열로 몰아갈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으므로 비변사에서는 즉각 여기에 대한 대책을 수립했어야 했다. 그러나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피난지의 비변사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녹도만호 정운 등이 도로 빼앗은 거제도 조양포(사등면 조양리) 보자기 최필을 문초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포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고 또 말이 서로 달라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하였으나, 다만 전라도 군사가 전일 배를 불태우고 목을 베어 죽였다고 이야기하며 간혹 칼을 뽑아 용기를 뽐내 보였는데, 그 기색이나 하는 짓을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전라도로 갈 계획으로 거제도 견내량에 와서 머물다가 패한 것 같다” 는 것이었습니다.
순천부사 권준이 도로 빼앗은 서울 사는 보인 김덕종을 문초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날짜는 기억 못하나 지난 6월경에 수많은 왜적들이 네 패로 갈라져 소인과 소인의 식구들과 함께 서울서 내려왔다는데, 한 패는 부산 해변에 진을 치고, 한 패는 양산강에 진을 치고, 또 1개 부대는 전라도로 진격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나 왜인들의 말인지라 알아들을 수 없었고, 1개 부대는 지금 서울에 진을 치고 피난하여 숨은 사람들을 방을 내걸어 모두 모아 같이 살게 하면서 종같이 부리고 있는데, 소인을 데리고 온 왜장은 이번 싸움에서 피살되었습니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령장 최도전이 도로 빼앗아온 서울 사는 사노 중남, 사노 용이, 경상도 비안에 사는 사노 영락 등을 문초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왜적들이 내려올 때 용인에 이르러 우리나라 군사들과 서로 만나 접전했는데 우리나라 군사가 물러갔습니다. 곧 김해강에 이르러 왜장이 공문으로 여러 차례 알리는데 마치 우리나라 장수들이 약속하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손을 들고 서쪽을 가리키면서 매번 ‘전라도’ 라 말하면서 혹은 칼을 뽑아 물건을 치는 것이 꼭 목을 베어 죽이는 모습이었습니다.” 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종에게는 성씨(姓氏)가 없었다. 이들 증인들은 용인에서 와키자카군과 조선 근왕군 5만의 전투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왜군들의 명령하달 방식을 전하고 있다.
그 무렵 일본은 한자가 아닌 일본식 이두문자(가나 글자의 초기형)를 사용하고 있었다. ‘서쪽을 가리키면서’ 라는 말에서 이순신은 왜군들의 전라도 침공 의지를 읽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광양현감 어영담이 경상도 인동현에 사는 우근신을 문초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소인과 누이동생은 동시에 난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갔다가 함께 포로가 되어 서울로 갔는데, 소인의 누이는 왜장에게 몸을 더럽혔습니다.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내려올 때, 우리 군사와 서로 만나서 첫날은 왜적이 승리하고, 둘째 날은 승리하지 못하여 퇴군하고, 셋째 날은 우리 군사가 모두 퇴군하였기 때문에 곧장 김해강까지 내려왔습니다. 나고 있던 배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지 못했으나, 다른 곳에서 끌고 와서 어디로 향한다고 말했는데,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손으로 서쪽을 가리켰던 것으로 보아 반드시 전라도로 향한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왜장은 그날 접전 때 우리나라 병마를 쏘고 목을 베었습니다. 접전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항전치 않으면 칼을 휘두르며 날뛰었으나, 우리가 승리하여 활을 당기며 쫓으면 반드시 모두들 슬슬 피하며 물러서는데, 비록 왜장이 엄히 독전하여도 두려워 감히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군들(와키자카군)이 북상할 때 포로가 되었다가 그후 해전에서 구출해 낸 어느 남매의 이야기다. 이 남매의 증언은 충무공이 조정에 보고할 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었고 오늘에 와서도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잘 알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다.
난리를 당하게 되면 부모들은 자식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 남매의 부모도 자신들은 ‘왜군들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면 죽이기야 하겠느냐’ 는 생각으로 집에 남았고, 자식들에게는 누룽지나 미숫가루 봇짐을 지워 주면서 어떻게든 산 속에 숨어 있다가 왜군들이 돌아가고 나면 집으로 내려오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떠나온 오누이는 낙동강을 따라 북상하고 있던 와키자카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는 멀고 먼 한성 길을 울면서 따라가게 되었고, 누이는 어느 왜장의 각시가 되었다.
남매는 도중에 용인 전투의 공방전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김해로 내려왔을 때 일본 등 여러 곳에서 모여든 왜선들도 보았는데, 조선 함대의 섬멸과 서해안 돌파를 위해 각지에서 동원된 왜군 측의 연합함대 결성 장면이다.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 의해 다시 구조된 남매는 그후 광양현감 어영담 관아의 보호를 받았다. 이들은 아마도 이듬해 왜군들이 남하한 후 고향인 인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김해부 내에 살던 내수사의 종 이수도 이번 7월 2일, 고을에 사는 부모를 만나러 왔다가 하는 말이 “김해부 불암창에 와 대어 있는 왜인들은 전라도에 가서 싸울 것이라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각 배에 방패 이외에 느티나무 판자를 여러 장이나 덧붙여 견고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약속하고 3개 부대로 나누었습니다. 김해성 안팎에 머무르고 있던 적들이 어느 날 밤에는 고기잡이 불을 보고는 겁을 내어 혹시 전라도의 군사가 쳐들어오지 않았는가 하면서 크게 놀라고 시끄럽게 떠들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동분서주 하다가, 얼마 후에야 진정되었습니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계는 안골포의 바로 코앞에 위치한 웅천읍에서 아전을 지낸 사람의 증언을 담고 있다. 개전 초 김해 부사나 그 밖의 관리, 그리고 가세나 크거나 이름난 가문의 집안들은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피난을 가봐야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미천한 백성들은 새로 진주해 온 왜군들 치하에서 호구지책을 해결해야 했다. 김해부의 종 이수도 그런 경우였다. 그는 근무 중 틈을 내서 부모를 만나러 왔다가 옛 상관인아전에게 왜군들의 정황을 알렸고, 그 아전이 이순신에게 다시 그 정보를 전해 왔다.
왜군들은 방패뿐 아니라 선체의 방탄을 강화하기 위해 동리 앞 느티나무까지 베어 병선에 덧붙였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 대포의 위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백성들 가운데는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는 경우도 많았다. 왜군들은 밤에 고기잡이를 하던 백성들의 고깃배 불빛을 보고는 조선 수군이 쳐들어온 줄 알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해 보면 옥포, 사천포, 당포, 당항포 등에서 패한 왜군 기동함대들의 소식은 여타의 왜군 부대들에게도 커다란 동요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왜군들은 ‘언젠가는 우리도 그렇게 당하고 말 것’ 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지냈고, 그러한 불안심리가 ‘고깃배 불빛’ 에도 깜짝 놀라는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아무튼 이상의 여러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전장 주변에는 의외로 많은 수의 백성들이 살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때문에 이순신은 해전을 하면서도 늘 이들을 걱정했고, 이들이 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만 왜군들을 쫓아내고자 했고 섬멸하는 데 뜻을 두지는 않았다. 또한 적을 몰아붙일 때에도 전과(戰果)만을 염두에 두는 작전보다는 백성들의 안전을 위한 작전을 병행했다.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뒤에서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충무공은 천민들의 사상자 명단도 보고했고, 그 명단을 소속 관아에까지 보내어 적절한 조처를 받도록 했다. 임진왜란 당시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세심한 관리가 이루어진 곳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 충무공 군영의 한 단면이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왜의 물건은 의복이건 쌀이건 포목이건 관계치 않고 군졸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 마음을 위로하고, 군용 물건으로 가장 긴요한 것을 뽑아내어 뒤에 기록합니다.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전 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 우부장 사도첨사 김완, 좌척후장 녹도만호 정운, 좌별도장 전 만호 윤사공, 가안책, 우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좌돌격귀선장 급제 이기남, 보인 이언량, 우부장 낙안군수 신호, 유군장 발포만호 황정록, 한후장 영군관 전 봉사 김대복, 급제 배응록 등은 접전할 때마다 제 몸을 잊고 앞장서서 승첩을 거두었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왜의 물건은 길이 끊어져서 올려 보내지 못하오며, 접전할 때 군졸 중에 본영 이선 진무 순천 수군 김봉수, 방답일선 별군 광양 김두산, 여도선 격군 흥양수군 강필인 · 임필근 · 장천봉, 사도 일선 갑사 배중지 · 흥양 신선 박응귀 · 강진수군 강막동, 사도 이선 격군 장흥 수군 최응손, 낙안선 사부 사노 필동, 본영 귀선 토병 사노 김말손 · 정춘 · 흥양 격군 사노 상좌 · 사노 귀세 · 사노 말련, 본영 전령선 순천수군 박무년, 발포 일선 장흥 수군 이기동 · 흥양 수군 김헌, 흥양 삼선 사노 맹수 등은 총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신이 타고 있던 배의 격군 토병 김국 · 박범 · 김연근 · 포작 장동 · 고풍손, 방답 일선 격군 토병 강돌매 · 수군 정귀련 · 김수억 · 김사화 · 토병 정덕성 · 손원희, 방답 이선 격군 정병 채흡 · 수군 양세복 · 하정 · 사부 신선 김열, 방답 귀선 격군 수군 김윤방 · 서우동 · 김인산 · 김가 · 응적 · 이수배 · 송쌍걸, 여도선 파진군 김한경 · 토병 수군 조니손 · 선유수 · 수군 이광해 · 임세 · 윤희동 · 맹언호 · 전은석 · 정대춘 · 방포장 서억세 · 박춘문 · 김금근, 본영 일선수군 정원방 · 보자기 이보인 · 토병 박돌동, 사도 일선 수군 최의식 · 김금동 ·사공 박근세 · 최백 · 수군 김홍둔 · 수군 유필정 · 이응홍 · 박언해 · 신철 · 강아금 · 군관 전광례, 사도 이선 격군 정가당 · 정우당 · 오범동, 녹도 이선 군관 성길백 · 신선 김덕수 · 수군 강영남 · 주필상 · 최영안 · 토병 사노 모노손 · 사부 장흥군사 민시주 · 격군 흥양 수군 이언정, 낙안 일선 격군 보자기 업동 · 세천 · 이담 · 손망룡, 낙안 이선 사부 김봉수 · 보자기 화리동 · 장군 박여산 · 사노 난손, 보성선 무상 오흔손 · 격군 종 부피, 흥양 일선 보자기 고읍동 · 남문동 · 진동 · 관노 지남, 흥양 이선 방포장 정병 이란춘 · 사군 사노 오무세 · 격군 사노 풍자동 · 노비 대복 · 노비 김손 · 보인 박천매 · 사노 팔련 · 노비 흔매 · 노비 매손 · 노비 극지 · 보인 박학곤, 광양선 도훈도 김온 · 무상 김담대 · 격군 선동, 본영 귀선 격군 토병 김연호 · 노비 억기 · 홍윤세 · 정걸 · 장수 · 최몽한 · 수군 정희종 · 조언부· 박개춘 · 전선지, 본영 삼선 진무 이자춘 · 조득 · 박선후 · 장매년 · 격군 보자기 이문세 · 토병 김년옥 · 노비 학매 · 노비 영이 · 박외동, 발포 일선 토병 이노랑 · 이구련 · 수군 조도본, 발포 이선 수군 최이 · 김신말 · 최영문, 흥양 삼선 사노 풍세 · 보자기 마구지 · 망이· 흔복 등은 총탄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포탄을 무릅쓰고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 싸우다가 혹은 죽고 혹은 상하였으므로, 죽은 이의 시체는 각기 그 장수를 시켜 따로 작은 배에 실어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게 하고 그들의 처자에게는 구휼하는 법에 따라 시행케 하였으며, 중상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약을 주어 충분히 치료할 것을 각별히 신칙하였습니다.
이 기록의 사상자 명단은 한산도와 안골포 해전 때의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자 유행병, 기아, 풍랑 그리고 이어지는 해전장에서 용맹스러웠던 조선 수군들은 차례차례 호국 영령으로 승화되어 갔다.
※ 진중음(陣中吟) / 충무공 이순신 ※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녘으로 위태로우니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함에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알아주네.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를 수 있다면, 이 한 몸 죽음을 어찌 사양하리오
이순신이 한산도-안골포 해전을 치르고 여수 본영으로 돌아온 것은 1592년 7월 13일, 《견내량파왜병장》을 올린 것은 7월 15일이다. 그리고 《견내량파왜병장》이 의주 행재소에 도착한 것은 7월 20일 경이다. 다음은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올린 장계에 대해 비변사가 언급한 내용이다.
※ 《선조실록》1592년 7월 9일. ※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라우도 수사 이억기가 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과 협동하여 적선 39척을 쳐부수었습니다. 수급을 바친 것은 단지 9급이지만 왜란이후 전투에서 이긴 공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억기를 통해 특별히 논상하소서. 계본을 받들고 온 이홍상은 멀리서 행재소에 도달하였고, 또 군공이 있으니 6품에 상당하는 관직을 제수하고 진무 이근석에게도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소서. 계본 중에 기록되어 있는 군공에 대해서는 해사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억기 등이 노획한 회갑 등 물건을 중국 장수에게 가져다가 보여 주었다.
이억기가 당포 · 당항포 · 율포 해전 장계를 올렸는데 이순신이 올린 《당포파왜병장》의 용천 행재소 도착 때(6월 21일 경)보다 20일 정도 늦게 도착했다.
벤 수급이 9개임을 보면 논공행상의 기준을 목 베기에 두지 않았으며, 이 점이 이순신과 같은 관점이다. 2차 출동에서 전라좌수영이 벤 수급은 88개, 원균 100개이다.
조정은 세 수사가 올린 전리품과 장계를 의주와 봉황성, 구연성 등에 있던 명나라 군에게 보여줌으로써 조선과 일본이 작당을 해서 명나라를 친다는 오해를 풀었다. 아울러 명 나라가 출병하는 데 자신감을 갖도록 정치, 군사, 외교적 설득 자료로 삼았다.
● 임금, 나라를 저버리다
이에 앞서 조선이 내부(內附: 임금이 명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정치 · 외교 · 국방상 독립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겠다는 뜻으로 중국에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이때에 와서 병부가 요동도사에게 자문으로 물었다. 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12일 ※
조선이 대대로 동방에서 왕위를 누려 대국으로 일컬어졌는데 어찌하여 왜가 한 번 쳐들어오자 풍문만 듣고 달아났는가. 몹시 놀랍고 이상스럽다. 만약 조선이 위급하여 참으로 도망해오면 정리가 있어 막기가 어렵다. 당연히 공순했던 점을 생각하여 칙령으로 용납할 것이니 반드시 인원수를 짐작하여 1백 명을 넘지 않도록 하게 하라.
선조는 명나라로 가면 큰 방안이 나올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명나라는 우선 선조의 군영의 부실 때문에 모두가 도망을 가서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음을 책망했다. 그리고는 정 위급하게 되면 거느리고 올 사람의 수는 100명 미만으로 하라고 했는데, 말하자면 선조를 시골 현감 정도로 예우하겠다는 것이었다.
제1차 평양성 전투를 지휘한 명의 조승훈은 전투 후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기를 “소장의 3천5백군이 7월 19일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게 된 것은 조선 쪽에서 평양성의 왜군이 2천 명이라고 속였기 때문이며, 이를 보면 조선과 왜가 작당을 해서 명나라를 도모한다는 그간의 의혹이 사실인 듯 합니다.” 고 했다.
이같은 고발성 보고를 받은 명의 조정 공론은 “이여송군을 조선으로 출병시키지 말고 요동반도를 지켜야 한다.” 는 쪽으로 모아지게 된다. 뒤늦게 조승훈의 고발성 보고 내용을 알게 된 선조는 통곡을 하면서 수습에 나섰는데, 아래는 수습차 달려간 병조참지 심희수가 곤혹을 겪는 장면이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0일 ※
병조참지 심희수를 파견하여 구련성에 가서 양총병에게 정문(呈文)하고 조총병을 거듭 타일러 기성(평양성)에 머물면서 공격하도록 간절히 고하였다. 희수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양총병이 크게 노하여 목소리와 얼굴빛이 모두 사나와져서 ‘옛부터 어찌 대국이 소국을 위하여 많은 병마를 수고스럽게 움직여서 2~3천 리 밖의 위급한 상황을 구제한 일이 있었던가…’ 하였습니다.”
심희수에 이어 이번에는 좌의정 윤두수가 양총병을 설득하고자 찾아갔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1일 ※
총병이 ‘그대 나라가 처음에 왜노는 단지 철환과 장검만 쓰고 다른 기술은 없으며 평양성 왜적의 수효도 1~2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중국 군사 중에 화살을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고 왜적의 수효도 1만 명이 넘는다 하니, 왜 이렇게 속였는가?’ 하였습니다.
당시 평양성에는 왜군 1만 6천과 조선인 징용병 3천 정도가 있었다. 그러나 군사학의 이치에 어두웠던 비변사는 왜군의 계략에 속아 2천 명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상이 이르기를 “평양성에서 화살을 쏜 자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예조판서 윤근수가 아뢰기를 “중국 장수가 ‘적병이 처음에는 목궁(木弓, 일본활은 물소뿔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목궁이라 했고, 조선활은 물소뿔을 사용했기에 각궁이라 했다)으로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의 힘이 세지 않았다. 그런데 흰깃발을 휘두르며 오는 자가 있자 편전, 장전으로 어지럽게 쏘아댔다. 이는 반드시 너희 나라 사람이 적병에게 투속한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고 했다.
상이 이르기를 “평양의 적병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염탐인들은 모두 숫자가 적다고 하는데 중국 군사들은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 왜적이 지친 군사를 내어 약함을 보인 까닭에 염탐하는 자가 망령되이 숫자가 적다고 한 것은 아닌가?”
오늘날도 조선활(각궁)의 과녁은 145m 거리에 있고, 일본활(목궁)의 과녁은 100m 거리에 있다. 평양성의 조선인 징용병들은 조선활로 편전과 장전을 쏘았으므로 이것이 조 · 명 간에 정치 · 외교 · 군사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선조는 염탐을 잘못하지 않았느냐고 했는데, 《선조실록》을 보면 염탐활동도 없이 소문만 듣고 2천 명 정도라고 믿었다. 사실은 평양성의 고니시가 조선측이 이 소문을 정보로 삼는 것을 알고 평양성의 왜군이 2천명 정도라고 믿도록 여러 가지 헛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반면에 남해의 이순신은 항상 넓은 탐색망을 펴고서 철저한 정보관리를 했기 때문에 왜군들의 ‘헛소문 퍼뜨리기 작전’ 은 통하지 않았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1일자에 《당포파왜병장》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는데 같은 날인 6월 21일자에 《견내량파왜병장》도 잇달아 수록되어 있기에 날짜만으로 보면 7월 15일에 올린 《견내량파왜병장》이 6월 21일의 실록에 기록되는 오류가 발생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훗날 《선조실록》을 편찬(1609~)하면서 날짜를 잘못 적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내량파왜병장》의 의주 도착 시점을 ‘7월 20일경’ 으로 이해하고 《선조실록》을 살펴보자.
※ 《선조실록》 1592년 6월 21일 ※
7월 6일에 순신이 이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에서 견내량으로 옮겨 정박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가 협착한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을 쳐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머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세 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해전의 이치를 모르는 문신들이 요약해 둔 것이다.
조정이 명 나라로부터 오해를 사고 있을 무렵 남해에서 올라온 《견내량파왜병장》은 조선에 구원의 빛이 되었고, ‘조선과 왜가 작당해서 명을 치려고 한다’ 는 오해도 말끔히 씻어졌다. 또한 조승훈의 패배는 ‘승패는 병가지상사’ 라는 인식으로 너그럽게 처리됐다.
그 다음 명 나라는 한산도, 안골포 해전으로 왜국의 대륙 침공의 꿈은 깨어졌다고 판단했고, 이여송군 3만 5천과 조선군이 합세하면 우선 평양성을 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출전 준비에 들어갔다.
왜군측은 한산도와 안골포 해전으로 대규모 선단을 통째로 잃었다. 때문에 ‘수군력의 고갈’ 이라 할 만큼 그 손실은 엄청났다.
잃은 병선과 병력의 재건에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수군력이 보강된다고 해도 지금까지와 같은 패전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는 보급에 관한 문제와 더불어 각 군영의 사기 저하로 이어졌다.
수군은 수군대로 궤멸적인 손상을 입었지만, 수륙병진 전략의 일환으로 전라도 공략에 나섰던 육군 측도 이치 · 웅치 · 전주 · 금산 등에서 퇴각함으로써 왜군 측은 전라도의 영지화는 고사하고 다른 도에서 현재의 주둔지조차 지켜낼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개전 이후 3달 만의 일이었다.
연합함대의 패배는 한성 사령부를 비롯한 왜군 상륙부대 전체에 심각한 우려를 갖게 했다. 특히 평양성의 고니시군으로서는 보다 직접적인 위험에 처해지게 되었다.
7월 19일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3천5백의 요동군을 간단하게 물리쳤지만, 조승훈군은 어디까지나 명군 선발대에 불과했다. 앞으로 닥쳐올 사건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한산도와 안골포의 패전 소식이 전해져 왔다.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증원군 10만과 보급물자의 도착은 사실상 물건너간 일이 되어버린 만큼, 고니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기 휘하의 1만 6천군뿐이었다.
최정예 선봉군으로서 서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고니시군이지만 이제 더 이상의 전의(戰意)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들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전쟁, 빼앗고 빼앗아도 끝날 것 같지 않는 이 이상한 전쟁에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바다의 수군들이 접현전 방식만을 생각하고 해전을 벌였다가 고전했었던 것처럼, 육지의 왜군들은 공성전(攻城戰)만이 승리의 관건이라 생각하고는 오직 성 빼앗기에 총력을 기울여 왔었다. 그래서 한성만 무너뜨리고 나면 전쟁이 끝나는 것으로 알았지만 조선의 왕은 자신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멀리 멀리 도망갔고, 멀리서도 아직 건재한 가운데 8도의 전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성을 함락시켜 적장을 죽이거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공격군의 입장이라면, 성 안의 방어군은 성의 사수를 위해 죽기를 다해 싸우는 것이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일본식 전쟁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왜군들이 조선에서 경험하고 있었던 ‘도망 다니기 식의 전쟁’ 은 그야말로 맥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키타 사령부의 분위기도 점점 암담해져만 갔다. 보급과 증원에도 차질이 생겼지만 한성 사령부에도 당장 먹을 양식이 고갈되고 있었다.
조선의 전라 육군 6천이 충청과 경기 수군과 공동으로 강화도와 한강 어귀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 생선과 소금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왜군은 입에 맞지 않는 조선의 된장, 간장, 기무치를 반찬 삼아 간신히 끼니를 해결해 왔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한성의 왜군들은 할 말을 잃었다. 우선 해전(海戰)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토록 참담하게 패하게 되었는지 까닭을 알 수가 없어 할 말을 잃었고, 전라도 공략을 위해 남진해 간 고바야카와 다카가게군이 전라 육군에 패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에도 할 말을 잃었다.
또 한성 자체가 일본식 통치 공간으로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게 되면서 할 말을 잃었다. ‘일본식 통치 공간’ 이 되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행주산성 등지에 오사카성과 같은 튼튼한 왜성을 쌓아야 했다. 그러나 축성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한성의 백성들을 김포 평야로 이주시키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이들을 이주시키지 못하면 언제 봉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성의 왜군 사령부에서는 ‘철군’ 에 대한 의견이 조심스게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북상한 군대들을 불러들여 한성 이남 지역이라도 굳게 지키면서 전라도 영지화를 마무리하자!” 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철군이든 지역 방어든 우키타 히데이에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또 본국으로 철군을 한다고 해도 바다의 이순신이 그냥 보고만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무렵 조선 조정의 구원 요청에 시종 냉담하게 반응해 왔던 명나라는 조선 수군의 활약상에 고무되어 명군의 조선 파병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당시 명은 몽골, 여진, 토번 등 외적의 침입과 잦은 내란으로 파병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엇다. 더구나 조선이 개전 초에 한성을 포함한 8도를 왜군에게 빼앗기고 겨우 청천강 이북 땅만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파병의 시점을 놓쳤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육책으로 생각한 방안 중의 하나가 중재에 나서서 청천강을 경계로 조선과 일본간의 전쟁을 종식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명은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적을 만드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명은 이번 전쟁이 일본이 자신들을 치기 위한 전쟁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이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청천강 이북까지 밀린 것을 몹시 위험스런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옥포파왜병장》《당포파왜병장》《견내량파왜병장》 등을 명나라 사신들에게 보여주며 파병을 설득했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왜군 단위부대들을 궁지에 몰아넣기 시작한 상황도 적극적으로 알렸다.
명나라 조정은 양자강 유역에서 일어난 해양 중시의 나라로서 해전에 밝았고, 개국 이래 왜구들과도 수없이 많은 해전을 치러본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조선 수군의 선전 소식을 통해 대반전의 조짐을 감지했다.
‘이제 많지 않은 병력으로도 조선은 살아날 것’ 이라고 판단한 명나라 조정은 7월 초 부총병 조승훈으로 하여금 원군 3천5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게 했으며, 제독 이여송의 3만5천 군도 12월에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
명의 파병으로 조 · 일 전쟁은 조 · 명 · 일의 삼국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삼국전쟁은 훗날 ‘명의 패망과 청의 등장’, ‘히데요시 정권의 몰락과 도쿠가와에 의한 에도시대 개막’ 을 불러왔다.
연합함대의 참패 소식은 나고야 사령부에도 전해졌다. 구키 요시다카가 히데요시에게 보내온 보고서에는 한산도와 안골에서의 해전 상황이 비교적 소상히 적혀 있었으며, ‘현재의 전력으로는 적을 이길 수 없고, 서해안 돌파 계획은 보다 강력한 함대를 재건한 후에 수륙군 합동으로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는 의견도 첨부되어 있었다.
우키타 히데이에도 공문을 보내왔다.
“7월의 전투에서 수륙군 모두 패했으며, 그래서 남해안 거점들에 대한 축성, 서해안 돌파, 전라도 공격, 보급과 증원 등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고 당장 명의 파병과 조선 수군의 부산포 공격이 예상되므로 추후의 작전을 하명해 달라.” 는 내용이었다.
일생일대의 모험이자 필생의 대업으로 추진한 대륙 원정 프로젝트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2년 아케치 마쓰히데의 반란을 진압하며 일약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특유의 지략으로 세를 모아 상상을 초월하는 전격전으로 전국의 다이묘들을 밀어붙인 끝에 오다 노부나가가 미완에 그친 통일 대업을 완성했다(1592).
그러나 히데요시가 살아온 피의 전국시대는 배신과 음모의 역사였으며, 그가 이룩한 통일 일본도 언제든지 분열될 수 있는 요소들을 안고 있었다.
오다의 죽음에서 교훈을 얻었던 히데요시는 강력한 통치 기반을 다져 나감과 동시에 ‘대륙 진출을 통한 대제국 건설’ 이라는 야망을 키웠고, 이의 실현을 위해 급기야 조선 출병을 선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원정이라는 점에서 이 전쟁은 시작부터 많은 난관이 예상됐었다.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에서는 조선과의 전쟁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으며 전쟁 자체를 원치 않았다. 심지어 히데요시의 충복이자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고니시도 전쟁을 회의적으로 본 인물들 중의 하나였고, 개전 전후에 고니시가 보여준 강화 노력은 이러한 정서를 반영해 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과 중원을 속지화하여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리라!” 는 히데요시의 웅변은 많은 영주들의 심금을 움직였고, 조선 출병은 순식간에 대세가 되었다.
오랜 전란 끝에 찾아온 평화의 시대는 영주들에게 부의 축적과 경제에 눈을 뜨게 해주었으며, 히데요시는 ‘대륙 속지화’ 를 당근으로 내걸고 그들의 의욕을 교묘히 자극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전쟁이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해전에서의 패배로 급전직하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전격전의 명수답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보란 듯이 감행했고,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작전들을 연거푸 성공시키면서 승리를 눈앞에 둔 듯했던 전쟁이었다.
히데요시는 그 승리의 문턱에서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분노와 좌절을 맛봐야 했다. 조선을 거쳐 중원을 차지하고 인도와 아랍까지 진출하겠다던 그의 야망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몽골의 칭키즈칸이 이룩한 것 못지않은 대제국의 꿈을 키워 왔다. 칭기즈칸이 기마대와 화약무기로 세계를 제패했다면 자신에게는 조총과 일본도, 거기에 거함(巨艦)으로 무장한 무적의 군대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군대가 가지 못할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던 확신에 찬 믿음과 자신감으로 정복과 개척의 세계사에 위대한 영웅으로 기록되기를 소망했지만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구키 요시다카의 건의처럼 ‘강력한 함대를 만들어야 한다’ 는 계획은 둘째 치더라도, 기존의 선단을 재건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물자가 필요했다. 더구나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인 부산포가 공격위험에 노출됨으로써 단기간 내에 승부를 결정지으려던 히데요시의 전략은 장기전을 염두에 둔 전략으로 전면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10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에 지나지 않았다.
심기일전의 자세를 가다듬은 히데요시는 다음의 사항들을 한성사령부에 하달하게 된다.
첫째, 이후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조선 수군과 접전치 말라!
둘째, 낙동강 하구의 안골포, 웅천포, 가덕도 연안에 수비에 강한 성을 쌓아라!
셋째, 조선 수군의 부산포 침공에 대비하고 방어시 우군 선단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
히데요시가 이렇게 명령을 내렸던 이유는 낙동강 하구 지역을 조선 수군이 차지하게 되면 부산포가 아침저녁으로 공격당하게 되고 본국으로 통하는 해역까지도 봉쇄당할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이 지역을 확보하고 있어야 낙동강 하구 - 상주 - 문경새재를 넘는 보급로가 확보될 수 있으며, 만약 북상한 왜군들이 후퇴하게 될 경우 이들을 수용 ·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은 내부적으로 전쟁으로 인한 부작용들이 하나 둘 표출되고 있었다. 민심도 소리 없이 동요되고 있었으며, 개전 초반까지만 해도 히데요시의 조선정벌 정책에 큰 기대를 나타내며 이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던 다이묘들 중에도 전쟁에 대해 내심 불만과 환멸을 느끼는 이들이 생겨났다.
일본 역사상 최대의 병력이 동원되었고, 전국의 무장들이 총 출동했으며, 히데요시가 그토록 호언하며 승리를 자신했던 전쟁이었다. 때문에 승리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고, 이같은 분위기는 원정군이 도해하기 전부터 일본열도를 광풍처럼 휩쓸었다.
그러나 한두 달이면 끝날 것이라던 전쟁은 승산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운 형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에 적지 않은 수의 영주들이 승리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 전쟁을 통해 일말의 수혜(受惠)를 기대했었지만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징발과 조달의 의무였으니 이들의 변화된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결코 유쾌할 리 없는 상황에서도 이같은 시류를 오히려 즐기듯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훗날 일본천하를 가뿐하게 집어삼킨 냉철한 야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 정권의 수뇌 다이로이자 이번 전쟁에서 군수참모 역할을 수행하고 있떤 도쿠가와의 처지에서 본다면, 그 역시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 전쟁이 못마땅하게 여겨졌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고사를 직접 체험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에게 닥쳐올 모든 역경들을 피하지 않았다.
한산도와 안골포에서의 패전이 히데요시를 생애 최대의 시련에 직면케 했던 반면, 도쿠가와에게는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자신의 야망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모종의 결심을 하도록 자극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바다를 차지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이순신을 꺾지 못하고, 거기에 명 나라까지 가세한다면…?’
도쿠가와는 자신의 통찰력과 정보망을 통해 사태를 관망하고 분석해 가면서 발 빠르게 민심 이반의 틈새를 파고들었고, 알게 모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 가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준비와 노력은 히데요시 사후 비로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1598년,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도쿠가와는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 히데요시의 가신 그룹을 대표하는 심복장수들이 대거 조선에 건너가 있던 때를 놓치지 않았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인 히데요리를 권좌에 앉히려는 히데요시 세력에 대항해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는 새시대의 주역’ 으로 당당히 등장했다.
‘천하라는 떡을 오다가 반죽하고, 히데요시는 그 떡을 구웠으며, 도쿠가와는 그 떡을 거저먹었다.’
이 말은 일본 전국시대의 세 영웅(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들의 생애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오다는 전국 통일을 목전에 두었지만 아케치의 쿠데타로 침몰했고, 히데요시는 아케치의 반란을 기회로 권좌에 올라 통일을 이뤘지만, 과욕을 다스리지 못하고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자멸했다. 절치부심(切齒腐心) 때를 기다려 온 도쿠가와는 그 기회를 낚아챘고, 최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히데요시에게는 독(毒)이, 도쿠가와에게는 약(藥)이 된 셈인데, 도쿠가와는 이순신으로 인해 반사이익을 얻었고, 이 전쟁에서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가 일본의 주인이 되기까지는 전해지는 말처럼 순전히 거저먹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서두르지 않고, 내색하지도 않았으며, 참을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준비하고 대비했던 것이다.
특히 한산도 해전이 있은 후부터는 특히 삼가고 조심하면서 히데요시를 충심껏(?) 보좌했다. 그 무렵 도쿠가와가 무엇보다도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은 자신은 물론 예비병력으로 편성되어 있던 자신의 군대가 현해탄을 건너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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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함대
임진년 9월이 되자 북상한 왜군들은 함경도와 평안남도까지 진출했다.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군은 의주의 선조와 조정을 위협했고, 함경도 일대를 석권한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군은 회령에서 피난 중이던 임수군과 순화군을 생포하면서 한껏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해에서는 전황이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나고야 사령부에서는 서해 진출을 위해 병선과 병력이 고갈될 만큼 수군에 쏟아 부었지만 끝내 조선 함대의 가덕도-거제도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순신은 김해강과 양산강의 왜선단을 소탕하고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를 압박해 들어갔다.
● 최강 함대
부산포해전이 기록된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조선 3도 수군이 병력은 약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장계에는 전라 좌·우수영의 판옥선과 거북선을 합친 큰 병선의 수가 74척, 중간 병선이 94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균의 경상우수영 쪽은 판옥선과 중간 배, 작은 배를 각각 10척이라고 보면 거북선을 포함해 각 병선에 탑재한 천 · 지 · 현 · 황자 대포의 수는 약 1,600문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 병력 |
○ 대포 |
그 무렵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병력 14,000명(무적함대에 맞선 영국 함대는 9,000명)에 2,500문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기동함대 병력으로 보면 2만의 조선 함대가 수적으로는 우세하다고 할 수 있지만, 조선 함대는 전체 병력 중 비전투원인 격군이 50%를 넘었다. 그러나 전투가 한창일 때는 격군들도 갑판 위아래를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며 장탄을 돕거나 적선을 향해 발화탄을 던졌을 것이므로 격군 모두를 비전투원이라고 볼 수도 없다.
보유한 대포의 수에서 스페인 함대가 화력에서 앞섰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신기전 등 조선 함대가 보유한 다종의 화약무기들을 감안한다면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거기에 판옥선과 거북선이 펼친 ‘환상의 해전법’ 을 놓고 본다면 당시 지구촌 최강의 함대는 단연 조선 함대였다.
또 중세기 때 사용된 대포들은 유럽과 조선 쪽 모두 주물제였다. 포탄과 구경 간에는 5% 정도의 오차가 있었고, 따라서 표적이 50m 이내에 들어왔을 때 사격하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당시는 주물공업의 시대였으므로 대포의 품질과 성능 면에서는 조선 대포가 더 우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이 주물공업 분야에서 앞서 있었다고 하는 점은 세종 때 천자포의 사정거리가 무려 2km(유럽은 1km)에 달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세계 최고의 동활자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도 그렇고, 역사를 소급해 올라가 보면 신라의 에밀레종 같은 작품은 그 무렵 유럽의 수준으로는 상상도 못할 만큼 앞선 기술이었다.
사실 당시 세계 최강의 함대가 어느 나라 함대였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조선 함대와 스페인 함대, 그리고 영국 함대가 건설되기까지의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페인과 영국의 경우에는 국가 차원에서 추진한 해외 원정, 그리고 신대륙에서 약탈해온 황금 등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함대를 건설해 왔다. 또 그 주역은 국왕이었다. 즉, 국력을 총동원해서 이룩한 역사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조선 함대는 변방의 장수들과 백성들이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거의 맨주먹으로 이룩한 피와 땀의 역사였다. 이순신이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수군제독으로 전해지고 있는 데에는 이러한 점도 참작된 것이다.
● 화약 무기
화약이 처음 개발된 것은 중국 송나라 때이다. 송의 화약제조법은 그 후 몽골이 입수해서 아랍과 유럽 침공에 사용했다. 당시 몽골군은 화약의 추진력으로 발사되는 로켓탄을 사용했다. 수백 발의 로켓탄이 굉음을 터뜨리며 적의 진영으로 쏟아지자 아랍의 코끼리 부대도 유럽의 기마대도 대 혼란에 빠져버렸다.
치렁치렁 요란하게 매단 장식물들이 불타기 시작하면서 각 진영에는 자중지란이 일어났고, 순간 몽골의 기마대는 쏜살같이 내달려 적진을 유린했다.
화약무기에 자극받은 아랍과 유럽은 그후 몽골의 화약무기 제조법을 입수했고, 유럽 각국은 대포와 조총을 만들어 아프리카와 신대륙 정복에 나서게 된다.
그 무렵 일본의 한 영주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조총과 화약제조법을 전수받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0년 전이었다. 이렇게 전수받은 조총과 화약제조법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 이르러 일본의 주력 병기가 되었다.
몽골은 원나라를 세운 후 화약 제조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이러한 보안의 역사는 180년이나 지속되었을 만큼 원의 화약 제조기술에 대한 통제는 매우 엄격했다.
고려시대 최무선 때는 원이 망국의 조짐을 보일 무렵이어서 화약 제조기술에 대한 감시가 비교적 허술한 편이었다. 최무선은 이 때를 기회로 삼아 중국인 출신이었던 이원을 초빙해 화약 제조기술을 터득했다. 고려 조정의 《화통도감》 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써 고려도 화약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고, 화약 제조술을 바탕으로 고려식 대포도 만들게 된다. 이렇게 제작된 고려의 대포는 그 후 왜구 퇴치에 긴요히 사용되었다.
1380년 아기발도라는 일본의 한 영주가 노략질을 하기 위해 고려에 침입했는데, 고려군은 화약무기로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에 돌아갈 길을 잃은 왜적들은 전라·충청·경상도를 다니면서 끈질기게 저항했고, 결국 이성계에 의해 진압된다.
이성계는 활도 잘 쏘았지만 화약무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위화도 주둔 때에는 최무선을 늘 곁에 있게 했다. 위화도 회군을 결정하게 된 데에는 믿고 있던 화약무기가 장마로 사용하기 어렵게 된 것도 중요 원인이었다.
최무선은 1389년에 《화약수련법》 과 《화포법》 을 저술해서 조정에 바쳤다. 당시 신흥세력으로 부상한 이성계는 화약무기의 중요성을 간파했기 때문에 최무선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조선왕국이 개국(1392년)되자 최무선은 그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헌대부와 판군기시(병기분야 최고직)에 봉해졌다.
태종도 화약무기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고, 세종 2년에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했다. 세종 시대의 각종 화약무기 개발사는 태종의 화약무기 개발사에 기초한 것이다.
● 낙동강 하구에서의 해전
※ 충무공의 장계(부산포파왜병장) ※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경상도 연해안의 적을 세 번 가서 토벌한 후 가덕에서 서쪽으로는 적의 그림자가 끊어졌거니와 각 도에 가득 찼던 적들이 날로 내려오므로 장차 그 도망갈 때를 타서 바다와 육지에서 합세하여 공격하려고 본도 좌우도 전선 합하여 74척과 협선 92척을 한결 더 엄하게 정비하고, 지난 8월 초 1일 본영 앞바다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협선의 수가 92척으로 늘어난 것은 그 동안의 해전을 통해서 기동성이 뛰어난 협선의 중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또 판옥선 건조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도 줄여야 했다. 그래서 기존의 협선 보수와 병행하여 이미 만들어져 있던 어선, 상선, 화물선들을 협선형으로 개조해 4차 출동에 임했다.
소형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낙동강 하구→다대포→부산으로 향하는 항로를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거센 풍랑을 감당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판단하고 최소한으로 줄인 것 같다.
8월 1일, 이억기가 이순신 함대와의 동반 출동을 위해 여수에 도착하자 이순신은 장게에서와 같은 계획을 이억기와 논의했다.
출동일은 8월 24일로 정해졌고, 출동 전까지 두 함대는 약 20일간의 합동훈련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적의 심장부를 목표로 한 훈련이었던 만큼 일사불란한 단위전술과 시스템적인 함대전술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야 했다.
8월 24일, 두 함대는 여수를 출발하여 사량도에서 원균 함대를 만났다. 그리고 27일 웅천 땅 제포(薺浦) 뒷바다 원포에서 밤을 지냈고, 다음 날 아침 적정(敵情)을 입수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그런데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의 공문에 “위로 쳐올라 갔던 적도들이 낮이면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강과 김해강 등지로 잇대어 내려오는데 짐짝들을 가득히 실은 것이 도망가려는 자취가 현저하다.” 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 달 24일 우수사 이억기 등과 배를 띄우고 수군 조방장 정걸도 함께 데리고서 남해 땅 관음포에서 밤을 지내고 25일에 사량도 바다 약속한 곳에 이르러 동도 우수사 원균을 만나서 적의 소식을 자세히 물은 뒤에 함께 당포에 이르러 밤을 지냈습니다.
이순신과 조선 함대 수뇌진들은 경상감사 김수로부터 ‘북상했던 왜적들이 낮이면 숨고 밤에는 행군하면서 짐짝을 가득 싣고 내려오는데 도망가는 빛이 뚜렷하다’ 는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찌를 듯한 기세로 조선 반도를 주름잡았던 왜군들의 모습과는 아무래도 많이 다른 모습이다. 왜군 측에 이러한 변화가 생긴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각지에서 패전한 왜군들이 갈 곳을 잃고 떠돌이 부대가 되어 그나마 안전한 밀양과 김해 등지로 몰려들고 있었다.
둘째, 그 동안 약탈한 문화재 등을 본국으로 가져가려는 자들이 있었다.
셋째, 눈치 빠른 일부 왜장들이 가망이 없는 전쟁이라고 판단하고는 자신의 군속을 본국으로 퇴각시키고 있었다.
이순신도 이러한 낌새를 알아챘고 이 참에 낙동강 하구에 밀집해 있는 왜군 기지들과 왜군의 한반도 최대 병참기지였던 부산포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기존의 임진왜란 관련 책자들은 낙동강 하구에서의 해전을 부산포해전에 포함시켜서 대충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순신은 왜군들이 김해와 낙동강 하구를 전략 요충지로 삼았던 점을 들어 낙동강 하구에서의 해전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때문에 이순신의 기록을 토대로 이 해전을 부산포 해전과 구분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해야 뒷날 있게 되는 삼도수군통제사 교체 사건과 원균 통제사의 칠천량 패전의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26일은 비바람이 교대로 불어서 배를 출발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녘에야 거제도에 이르렀는데, 밤을 타서 몰래 건너갔고, 27일은 웅천 땅 제포 뒷바다 원포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28일에 경상도 육군 탐색인이 와서 말하기를 “고성 · 진해 · 창원 병영 등에 둔치고 있던 왜적이 이 달 24 · 25일 밤중에 전부 도망했다.” 고 하는데, 그것은 필시 산에 올라 망보던 적들이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 위엄에 놀라 배 대어 있는 곳으로 도망한 것입니다.
조선 함대는 밤을 타서 이동했고, 원포에 선단을 숨기고 탐색조를 보내 고성 진해(진동) 일대의 적정을 살피게 했다. 이 지역을 미리 수색해 놓음으로써 함대가 부산 쪽으로 나갔을 때 생길 수 있는 후환거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함대는 조선 육군의 탐색대를 만났고 왜적들이 도망가고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이 날(8월 28일) 이른 아침 웅천포를 출발해서 곧장 양산 · 김해 두 강(낙동강 하구의 양산과 김해 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지류) 앞바다로 향하는데, 창원 땅 구곡포의 보자기 정말석이라는 사람이 포로가 된 지 사흘이 되는 날 김해에서 도망 왔다면서 말하기를, “김해 강에 정박해 있던 적선들이 수삼일 동안 떼를 지어 몰운대 쪽으로 도망치듯 노를 재촉해 가는지라, 소인은 그 밤을 타서 도망해 돌아왔습니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덕 서쪽에 선단을 감추어 두고 방답첨사 이순신과 광양현감 어영담을 가덕 바깥쪽에 복병케 한 후 양산 쪽으로 가서 적선을 탐망하고 오도록 사람을 정해 보냈더니, 하오 4시경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종일 망을 보아도 다만 왜의 작은 배 4척이 두 강으로부터 나와 몰운대를 지나가더라(부산 쪽으로 가더라)” 고 하므로 그대로 천성(가덕도)으로 돌아와 밤을 지냈습니다.
김해와 양산강의 포구들은 서쪽으로 진출하는 왜군들의 수군기지이자 낙동강 왜군 수송선단의 기지였다. 그래서 왜선들의 출현이 빈번했고 이들 포구에는 정박해 있는 왜선도 많았다.
이순신은 이 기지들에 대한 소탕을 1차 목표로 정했다.
그때 정말석이란 사람이 이 지역의 상황을 알려 왔기 때문에 왜군들의 동정을 자세히 살피고자 일부 선단을 가덕도에 숨겨놓고, 다른 일부는 가덕도 바깥쪽에 매복시켰다. 아울러 여러 척의 탐색선을 띄워 주변을 철저히 정찰토록 지시했다.
만약 이곳에 큰 규모의 왜선단이 숨어 있다면 최종 공격목표인 부산포 공격 때 포위될 우려가 있었다. 또한 공격을 마치고 돌아와 가덕도 등지에서 쉬고 있을 때에도 야습의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왜군 함대가 견내량 해협을 봉쇄하고 나온다면 조선 함대는 귀로를 잃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적정을 보다 철저히 살피게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29일, 닭이 울자 출발하여 밝을 무렵에는 두 강(양산, 김해)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동래 땅 장림포 앞바다에 낙오된 왜군 300여 명이 큰 왜선 4척과 작은 배 2척에 나누어 타고 양산으로부터 나오다가 우리 군사를 바라보고서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므로 경상우수사가 거느린 수군들이 그것을 불태워 깨뜨렸는데, 전라좌수영 좌별도장(좌측 특공부대장) 우후 이몽구도 큰 배 1척을 깨뜨리고 적의 수급 1개를 베었습니다. 그후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두 강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강어귀의 지세가 좁아서 판옥선 같은 큰 배는 싸울 수 없겠으므로 어두워질 무렵에 가덕도 북쪽으로 돌아와 밤을 지냈습니다.
29일 새벽, 가덕도를 출발한 좌수영 함대는 낙동강 하구에 이르러 발견한 6척의 왜선을 불살랐다. 그리고 밤 사이 왜선단이 김해 등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곳까지 들어가려 했지만 강이 좁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는 판옥선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강 폭이 좁았다는 것이 아니라, 판옥선 같이 큰 배가 학익진법을 펴고 전투를 수행하기에는 좁았다는 의미다.
이순신은 거기서 부산을 공격하고 되돌아 나오기에는 시간(이미 정오 무렵이었다)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선수를 돌려 가덕도에서 숙영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원균, 이억기 등과 함께 밤새껏 의논하고 9월 1일 닭이 울자 출발하여 아침 8시 경에 몰운대를 지나자 동풍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세게 일어 간신히 배를 저어 화준구미에 이르러 왜의 큰 배 5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의 큰 배 8척, 서평포(부산시 구평동)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의 큰 배 2척이 모두 기슭에 줄지어 대어 있으므로 3도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들과 조방장 정걸 등이 합력하여 남김없이 두드려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배에 가득 실린 왜의 물건과 전쟁기구도 끌어내지 못하게 하고 모두 불살라 버렸는데, 왜인들은 우리의 기세를 바라보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머리를 베지는 못하였으며, 절영도 안팎을 샅샅이 뒤져 봤으나 적의 종적은 없었습니다.
9월 1일, 첫닭이 울자 출발, 8시경 다대포 앞바다에 왔는데, 부산포를 공격하고 되돌아오는 데에도 시간은 넉넉한 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풍이 불어 파도가 높게 일었다. 때문에 부산포 공격에는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화준구미에서 왜군 대형 수송선 5척, 다대포에서 부산 쪽으로 도망가는 수송선 8척, 서평포에서 대형 수송선 9척을 깨뜨리는 전과를 올렸다.
조선 함대가 왜선들을 추격해서 격파하는 동안 조선 함대 탐색선단은 영도 주위에 왜군의 복병 함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 함대는 보이지 않았다.
“조선 수군과는 절대 접전치 말라!” 는 히데요시의 명령도 있었지만, 이 같은 명령이 없었다고 해도 왜군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와키자카, 구키 등의 왜국 전투선단은 한산도와 안골포 등지에서 섬멸되었기에, 이 무렵에 김해와 부산 등지를 오가고 정박한 선단은 대부분이 수송선단이었다.
왜군 수송선단에게 조선의 전투선단은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었다.
낙동강 하구의 해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틀 동안 불태운 왜선이 30척이었다.
둘째, 김해와 부산 사이에 왜군 수송선들이 줄을 잇고 있었던 것을 보면 왜군들은 낙동강을 주 보급로로 이용하고 있었다.
셋째, 가덕도에서 출발해 부산을 공격하고 다시 가덕도로 돌아오는 데는 하루해가 빠듯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넷째, 부산 진출시 가덕도 외에는 조선 함대가 안심하고 정박할 곳이 없었다.
다섯째, 가덕도와 부산 사이의 바닷길은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이 일어나는’ 위험한 항로였다는 점이다. 이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다. 한 두 척도 아닌 300여 척 규모의 소 · 중 · 대형으로 구성된 대 선단이라면 대단히 위험한 항로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위험한 해역을 격물 · 치지의 정신으로 꼼꼼하게 이치를 따져가면서 조심스럽게 항해하고 다녔다.
● 부산포 해전
영도 일대를 수색하는 동안 부산포 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탐색선으로부터 “약 500여 척의 왜선이 동쪽 산기슭 언덕 아래(오늘날 우암동과 자성대 동쪽)에 정박해 있다.” 는 보고가 들어왔다. 역시 왜군의 한반도 최대 병참기지다운 모습이다.
왜선 500척이 부산과 경상도 일대의 병력을 싣고 나온다면 무려 500척 규모의 대 함대를 상대해야 하는 격이므로 조선함대 사령부에서는 공격 방식과 공격 시점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세 명의 수사들은 결전을 합의하고 각 함대에 공격 준비령을 하달했다. 이에 각 기함과 대장선들에는 “공격에 들어간다!” 는 깃발이 연이어 올려졌다.
곧바로 이순신 함대, 원균 함대, 이억기 함대 순으로 전 함대는 분항하기 시작했다.
전라좌수영 함대가 선봉에 나선 것은 타 함대에 비해 전투경험과 전력 면에서 앞서 있었기 때문이며, 전략상으로도 사실상의 주장을 맡고 있던 이순신 함대가 선봉에 서는 것이 바람직했다.
부산포해전은 왜군 측이나 조선 함대 측이나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이었다. 부산의 왜군들로서는 나고야 사령부와 한성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부산포만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지켜내야 했다. 조선 함대 역시 부산포를 서둘러 공격하라는 선조의 어명을 따라야 했다.
상부의 명령도 지엄했지만 필승에 대한 양측 수뇌진의 입장 또한 확고했다. ‘창과 방패의 대결’ 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양측 모두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회전을 기다렸다.
조선 함대가 부산포 공격을 위해 최상의 전력으로 출전하고 있었던 것처럼 왜군 측도 수륙군이 연합하여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한 수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주역은 구키 요시다카,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도라 등 이미 패전의 쓰라림을 맛보았던 수군장들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면대결의 무모함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간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 마지막 보루를 지켜냄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고자 했다.
모두가 패장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었던 만큼 이전의 패배에 대해서 누가 누구를 욕하고 나무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수군 총사령관 신분이었던 구키 요시다카의 입장에서는 독단적인 행동으로 화를 자초한 와키자카에 대해서만큼은 따가운 질책을 가한 바 있었다.
어쨌거나 이들 모두는 서로가 공동운명체임을 잘 알고 있었다. 부산에서 지난날의 패배를 만회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그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들을 동변상련의 심정으로 소통시켰다. 그것이 부산포해전을 앞둔 이들 수군장들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부산포해전은 나고야의 한성 사령부, 그리고 조선 주둔 전 왜군 부대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유는 부산이 보급과 증원을 위한, 자신들의 밥줄과 관계된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의 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시나리오로 기획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왜군 측으로서는 대규모 육군 병력과 나고야의 히데요시 직할 수군력까지 참여시킨 최초의 수륙 합동작전이었으며 그 성격은 받아치기를 곁들인 완고한 수비전이었다.
이같은 작전은 히데요시의 “조선 수군의 부산포 공격에 대비하고 적의 공격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 는 명령에 따른 것으로, 작전을 구상한 이는 33세의 왜군 총감독관 이시다 미쓰나리였다.
히데요시 정권의 막후 실세, 히데요시의 최측근 심복, 히데요시 가신 그룹의 수장이기도 했던 그는 문무를 겸비한 흔치 않은 전국 영주였으며, 임진왜란을 입안한 대 기획가이기도 했다.
전쟁의 밑그림을 그린 장본인으로서 그림의 완성을 보기 위해 우키타 히데이에와 함께 한성에 입성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그림이 마구 훼손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분을 삭이고 있던 터였다. 이에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부산 방어전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시다로서도 자신이 이처럼 피해갈 수 없는 벼랑 끝 작전을 주도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연합함대의 패전, 그리고 이순신의 등장… 사실상 그의 기획은 휴지조각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로 인해 기획의 백미가 되었을 나고야 주둔 예비대 10만의 평안도 상륙은 끝내 무위로 그쳤고, 이것은 훗날 숙명의 라이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단판 승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히데요시와 그 가문을 위해 한 목숨 바치겠노라 맹세하며 히데요시의 막하로 들어간 이시다에게 도쿠가와는 늘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히데요시에게 신종(臣從)의 예를 올리며(1586년) 대결의 시대를 청산했다고는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 사후 몇 년간 지속된 패권 구도에서 도쿠가와가 보여준 히데요시에 대한 적대행위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위험의 징표였다.
신종의 예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사실일 뿐이었다. 이시다의 눈에 비친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통일사업에 가장 적대적이었으며 창칼을 겨누어 서로를 살상하기도 했던 지우지 못할 전과를 남긴 잠재적 위험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쿠가와를 납작 엎드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주군인 히데요시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시다의 불만이었다. 엎드리게 만드는 것은 둘째 치고 도쿠가와와 어깨를 견줄 만한 실력자는 없었다. 그런 도쿠가와가 60을 코앞에 둔 히데요시 사후에 어떻게 나올지는 대충 짐작할 만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시다가 죽은 히데요시를 대신해서 도쿠가와를 상대로 치른 마지막 대리전이었다.
양측 도합 20만 명이 격돌한, 세계사에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격렬했던 이 전투에서 이시다는 피의 시대를 짊어지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 같은 운명을 예감했을까? 연합함대의 패전보가 전해지던 날 이시다는 이렇게 소리쳤다.
“아! 나의 계획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구나!”
조선의 속지화는 둘째 치고 도쿠가와를 전장으로 끌어내지 못한 것을 이시다는 두고두고 후회했다. 조선 원정에 참여한 다이묘들은 퐁토병과 굶주림, 대륙의 매서운 추위와 기나긴 전투를 치르면서 반 이상의 병력과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지만 도쿠가와는 전력의 100%를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등의 불로 다가온 조선 함대의 부산포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이시다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 미래의 사건일 뿐.
이시다는 구키의 소견이 담긴 해전 보고서를 참고해서 주도면밀한 방어전을 구상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을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의 이름으로 부산 사령부에 하달했다.
⑴ 조선 수군의 부산 진출 예상 항로를 예측하고 곳곳에 망대를 세울 것. 근해에서의 적 발견 전이라도 적 선단의 부산 족 기동이 확인되면 남해안 일대의 전 선단을 부산으로 집결케 할 것.
⑵ 포구 방파제를 더 견고히 높이 쌓을 것.
⑶ 조선 대포를 있는 대로 확보하고 그 사격법을 익혀둘 것.
⑷ 투석기와 석탄을 최대한 많이 제작하고, 언제든 사용 가능하도록 적소에 배치시켜 둘 것.
⑸ 적의 상륙에 대비하여 병력을 적소에 배치할 것.
⑹ 적을 최대한 끌어들여 싸우고, 거북선의 타격에 집중할 것. 적 사령선에 대한 타격이 용이하다면 역시 집중 타격할 것.
⑺ 선상 병력을 정예화 하고, 그 병력은 화공에 대비한 화재 진압조와 저격조로 편성할 것.
⑻ 적을 공격하기 용이한 곳에 엄폐용 참호를 파고 필요하다면 새로이 진지를 구축할 것.
⑼ 적의 부산 쪽 기동이 확인되면 즉시 비상체제에 들어가고 야간에도 상시 전투체제로 운용할 것.
⑽ 전투가 종료되면 그 결과를 하나도 빠짐없이 즉각 보고할 것.
● 창과 방패
조선 함대 수뇌진들에게 부산포 공격은 벼르고 벼른 지상과제였다. 그동안 조정으로부터는 “왜 부산으로 나아가 싸우지 않느냐!” 는 성화에 시달려 왔음은 물론 전략상 적의 본거지를 그냥 방치해 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산에 오기까지는 위험을 무릎쓴 대장정이었다. 여수에서 부산까지의 항로는 멀고도 험했다.
그동안 숱한 난관을 극복했고 크고 작은 해전을 치렀다. 천신만고 끝에 부산에 도착한 조선함대 장병들로서는 감회가 클 수밖에 없었다. 첫 출동일로부터 네 달만의 일이었다.
부산 포구에는 500여 척의 왜선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또 그 주위를 튼튼하게 쌓아올린 방파제가 원형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방파제 앞 수로에는 여러 척의 병선이 수로를 막아선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왜군 측 병력은 선상과 해안가, 그리고 포구 주위 언덕과 왜성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육지에 진을 치고서 조선 함대가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해안에서부터 왜성 외곽에 이르기까지 투석기, 각종 총포류 등을 앞세우고 있었다.
또 그 수를 알 수 없는 많은 수의 기병과 보병들이 대오를 갖추고 곳곳에 늘어서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순신은 ‘이번만큼은 절대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 는 왜군 수뇌부의 전의를 읽었다.
잠시 동안 양측 간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구 앞 수로를 막아섰던 병선들 중 4척이 조선 함대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 거북선 돌격장인 신의 군관 이언량,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등이 앞서 내달아 적의 선봉 4척을 두들겨 부수고 불살랐습니다. 적도들은 헤엄쳐서 육지로 도망갔습니다.
4척의 왜선은 부산포 방어를 담당하는 항만수비대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임무상 어쩔 수 없이 나섰을 뿐 처음부터 여차하면 바다로 뛰어들어 육지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왜군들에게 조선 수군과의 싸움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에게 접근해 오는 상대는 전라좌수영의 중위장 권준, 전부장 이순신, 좌부장 신호, 우부장 정운, 거북선 돌격장 이언량 등이 이끄는 최정예 ‘거북선 + 학익진’ 함대였으므로 실제로 싸운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왜군들은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대포 공격을 받아 깨지고 불타는 배를 뒤로한 채 사력을 다해 헤엄쳐 달아났다.
4척의 병선이 한 순간에 박살나는 것을 목격한 왜군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것은 그토록 떨쳐내려고 몸부림쳤던 악몽의 재현이었으며 아직 조선 함대와의 해전을 경험한 바 없었던 왜군들까지도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 군함 퍼레이드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이때 뒤에 선 여러 전선들은 이 승기를 타고 기를 날리고 북을 치면서(병선마다 북과 기가 있었기에 군악이다) 긴 뱀 모습의 진으로 돌진해 들어갔습니다.
4척의 왜선을 격파한 선봉 함대는 긴 뱀 모습의 일자형(一字形) 장사진을 펴고 곧장 포구를 향해 돌진했다.
방파제 안에서 꼼짝도 않고 있던 왜선단은 안골포에서의 구키 함대처럼 젖은 가마니와 젖은 이불 등으로 선체를 덮고 연신 물을 끼얹으면서 화공에 대비할 뿐 어떠한 응전의 기미도 취하지 않았다.
섣불리 대응했다가는 선단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았을 부산의 조선 백성들에게는 군악을 울리며 펼쳐진 조선 함대의 장사진 군함 퍼레이드는 오랜 세월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감동의 그림이었다.
장사진으로 포구 앞에 다다른 선봉 함대는 군악을 바꿔가며 6개의 학익진 대형으로 각가 분항했다. 그리고 선단별로 왜군들의 포구와 해안 기지들을 막아섰는데 이 모습도 영락없는 군함무(軍艦舞)였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적들은 부산진성의 동쪽에 있는 한 산으로부터 5리쯤 되는 언덕 밑 3곳에 정박해 있었는데 큰 배, 중간 배, 작은 배 모두 470여 척이었습니다.
적들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더니 우리 여러 전선들이 곧장 앞으로 돌진해 들어가자 배 안과 성 안, 산 위의 굴(왜성이거나 포탄 공격을 막기 위해 파놓은 참호인 듯) 속에 있던 적들이 총과 활을 가지고 나와 거의 다 산으로 올라가 여섯 군데로 나누어 진을 치고 내려다보며 빗발치듯 쏘아댔습니다.
편전을 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 같고, 때때로 큰 철환을 쏘는데 크기가 모과만했습니다. 또 수마석(굵은 자갈)을 던지는데(투석기 등의 장비를 이용한 듯) 크기가 주발만한 것이 우리 배에 많이 떨어지므로 여러 장수들이 더욱 분발하여 죽음을 무릎쓰고 돌진하여 천자 · 지자 · 장군전 · 피령전 · 장편전 · 철환 등을 일제히 쏘며 종일토록 접전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습니다.
자성대 동쪽 5리쯤 되는 곳이라면 현재는 매립된 지역이다. 당시에는 갈대밭과 갯벌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선봉 함대가 여러 단위의 학익진으로 포위하자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왜군들이 배 위, 해안가, 언덕 위, 왜성 등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왜군들은 조선의 비밀병기인 편전으로도 공격했다. 이는 조선인 징용병들을 시켜 쏘게 한 것이다. 모과만한 철환은 큰 포탄인데 사정거리나 관통력에서 조선제 대포를 능가하지 못했다. 이유는 화약을 많이 넣어 사격하게 되면 포신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포신이 깨졌던 것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일본의 주물공업 수준이 조선의 주물공업 수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왜군들이 쏜 철환, 편전, 수마석(큰 자갈) 등이 선봉 함대의 갑판에 날아들었다. 이에 선봉 함대에서도 사격에 나섰다. 주목표는 방파제 안의 왜선단이었다. 그러나 방파제가 넓게 둘러쳐져 있었고 표적과의 거리가 멀었던 탓에 효과적인 공격이 되지 못했다.
왜군들의 방어 사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렇게 거센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선봉 함대는 왜선단에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공격선을 점차 포구 쪽으로 좁혀 들어갔다. 공격선이 좁혀지면서 선봉 함대 역시 투석기와 대포를 동원한 왜군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쳤다. 공격선을 더 좁히게 되면 조총의 유효사거리에도 노출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직 거북선만이 적의 반격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선봉에서 공격을 주도하던 거북선단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왜군들은 거북선을 향해 공격을 집중시켰고, 크고 작은 석탄류와 각종 철환들이 “쿵! 쾅! 쿵!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북선의 등과 선체에 쏟아졌다.
왜군들은 조선제 대포로도 사격을 가해 왔다. 무적의 전함, 거북선이 처음 맞닥뜨린 위기의 순간이었다. 거북선이라고 해도 조선 대포의 공격을 장시간 버텨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