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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축구선수 이영표 선수는 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 이동국선수가 부상을 입자, 기자 중 한 사람이 이영표선수에게 '당신은 어떻게 부상을 이겨냈는가?'고 물었습니다. 이영표선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기도로서 이겨냈습니다.' 김이 빠진 기자가 그러면 이동국 선수가 부상을 입었는데 어떻게 충고해주겠습니까?
그러자 이선수가 하는 말 '예수를 믿으라고 권할 생각입니다. 성경책도 선물하고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중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걸인을 만났습니다. 그가 애처로운 눈길로 뭔가 좀 얻기를 바라고 쳐다보았을때 그들은 내게 있는 것, 즉 그들안에 있던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주었습니다.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딤전2:4절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당신의 소원임을 알려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노라.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위대한 사명이 바로 전도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전도의 사명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전도는 작은 자를 존귀히 여기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10절말씀을 읽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씀은 사람을 외모로 업신여기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는 뜻입니다.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하나는 작은 자도 존귀한 자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모범이었습니다. 밤배를 타고 건너간 거라사인 지방에서 만난 사람은 귀신들려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족도, 친척도 동네 사람들도 다 포기한 사람을 주님은 찾아가 제정신을 차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는 38년이나 된 병자를 찾아가 고쳐주심으로서 그 연못에서 가장 비참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끼고 있는 안경이 있습니다. 사람을 볼때 그가 가진 재산의 정도, 지식의 정도, 사회적인 위치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습성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안경을 벗어야 우리가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깨우쳐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두가지 큰 계명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안경을 쓰고 있는 한 불가능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웠듯이 댓가를 바라지 않는 선한 마음이 참된 이웃이 될 수 있는 태도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에게 중보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뵌다고 하는 말은 그 작은 자들에게는 중보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대변하는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힘이 없고, 권리가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한마디도 못할 때 그들의 억울함을 대신 하나님앞에 전하는 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사람을 차별하고 힘없는 사람이라고 냉대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일러바친다는 말입니다. 아벨의 피흘림 이래로 하나님은 억울한 자들의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복받고 살아가는 비결이 신14:29절에 있습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우리가 힘이 있다고, 돈이 있다고 지위가 높다고 억울한 일을 만든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말3:5절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기억하십시오.
팀앤팀 사역을 이끌어가는 이용주 선교사는 멈출수 없는 사람들이란 책에서 자신이 아프리카에 헌신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을 하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1999년 여름, 비행기 한 대가 아프리카 기니를 떠나 벨기에 브뤼셀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의 랜딩기어 속에 얼어 붙은 시신 두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샌들 차림의 야킨 코이타(14살)와 포드 투르카나(15살)가 꼭 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시신을 발견한 정비사들은 손에 꼭 쥐고 있던 편지를 발견하고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쓴 글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유럽의 지도자 여러분, 여러분의 아름다운 대륙에 사랑을 호소하며 저희 둘의 험난한 여행의 목적을 말씀드립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은 너무나 힘든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전쟁과 가난, 전염병에 내몰려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학교 건물은 있어도 선생님과 교재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을 저희에게 조그만 베풀어 주십시오.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대신해 호소합니다. 우리 아프리카 대륙을 부디 되살려 주십시오. 혹시 저희들이 시체로 발견되거든, 우리가 겪고 있는 참상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려는 절박한 마음을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999년 7월 29일 기니의 두 소년 씀. 두 소년은, 자신들의 죽음으로 온 세상에 무언가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아들들이고 형제들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작은 자라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존귀하게 여기시며,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를 들으십니다. 우리 눈과 마음의 안경을 벗고 주님의 눈으로 작은 자들을 돌보는 성도가 되십시다.
두 번째로 전도는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씀은 저울을 연상하게 합니다. 추가 있는 저울 아시죠? 양쪽에 올려놓는 물건의 무게가 같아야 수평을 이루는 저울말입니다. 주님은 한쪽에는 99마리의 양을 한쪽에는 한 마리의 양을 올려놓고 물으십니다. 이 둘이 무게가 같다고 생각하느냐?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도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가치관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나쯤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하나를 나는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춘천 소년원 사역을 할때 받았던 도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그렇게 힘들었던 적이 없을만큼 듣는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화요일 저녁 이런 열정과 노력을 다른 곳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쏟는다면 더 가치있지 않겠는가? 그 아이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에 마음이 더 닫혔던 것 같아요. 저 쓰레기 같은 놈들을 위해서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그때 주님이 생각하게 하신 것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였습니다. 양 한 마리를 찾아 온 산과 들을 헤매는 목자, 그렇게 주님이 나를 찾으셨음을 깨닫고 회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더없이 크신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책임소재를 가리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살아갑니다. 재판이라는게 전부 누가 더 책임이 있느냐?를 따지는 일 아닙니까? 보험이라는 제도가 생기고나서 우리 사회에 생긴 비극이 인간적인 도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사고가 나서 누군가 다치면 어떻게 합니까? 보험회사에서 다 처리하는 거죠, 가해자가 전혀 찾아오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도 연회체육대회를 하다가 중상을 당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라고 사모님이 무척 화를 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적어도 자기 잘못으로 상대방이 다쳐서 고통을 받는다면 미안하다고, 빨리 회복하시라고 찾아와 문병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그런 모습 보기 어렵습니다. 보험이 다 해결하니까요?
길을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은 책임소재를 따지는 일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왜 양이 길을 잃었겠습니까? 양이란 놈의 속성상 눈은 어두워도 귀는 무척 발달해있습니다. 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그런데 길 잃은 양은 듣지 않은 것입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간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플라나오란 단언데요, wanders away 방황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즉 가출했단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걔는 목자와 관계없이 지 멋대로 가버렸단 말입니다. 목자의 부주의나 게으름이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목자를 떠난 것입니다. 책임을 따지자면 그 양을 찾아나서지 않아도 목자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책임 이상의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데 낳아놓은 책임만 있어요? 그 이상의 희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도란 책임 이상의 사랑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잃은 양이 어디에 있어요? 여러분 주위를 살펴보세요. 가장 가까운 가족, 친척, 오랜 이웃, 친구. 모두가 잃은 양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아무도 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책임 이상의 사랑을 쏟아야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주일 오전 100명의 예배공동체는 사랑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한 절대로 열매맺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 분의 자녀임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세 번째로 전도는 보물찾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길을 잃은 양이 목자의 보호아래서 함께 있는 것, 즉 그가 있어야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란 한 인간이 본래의 자리에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양이 길을 잃은 것은 양의 잘못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양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있어요. 울
타리의 가치입니다. 특별히 학생들! 가정이란 울타리, 학교라는 울타리, 교회라는 울타리 그 소중함을 모르고 가정을 뛰쳐나가고, 학교를 뛰쳐나가고 교회를 뛰쳐나가는 어리석은 학생들을 볼때 참 가슴이 아파요. 간섭이 축복이요, 잔소리가 찬송임을 모르는 거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줄 모르고 사니까 삶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곤고한 거에요.
양을 찾지 않겠느냐?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목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에요. 생각해보세요. 그 광야에서 양 한 마리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찾아요?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 한가지 있어요. 잃어버리는 것은 쉬운데 찾는 건 어렵다는 거죠. 가출한 애들 찾는 부모 얼마나 힘들고 고된줄 몰라요.
어렸을때 교회에서 소풍 가면 늘 기대하는 게 한가지 있어요. 보물찾기! 감춘 것을 찾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그런데 아세요? 보물찾기가 기대되었던 이유를? 상을 주잖아요. 찾기는 어렵지만 찾으면 상이 있다니까요. 전도는 보물찾기에요. 길 잃어버린 그 말도 안듣는 양, 그 놈이 보물이라니까요.
우리나라 최고의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불우환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늘 당당하고 밝게 살아가는 인순이라는 분입니다. 어떤 인터뷰에서 사회자가 그녀의 당당함에 대해서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제가 혼혈아라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극복하고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의 삶 배후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이지요."
사회자는 이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에게서 인생 최고의 절정의 순간은 미국 카네기홀 공연이었습니까?' 그 질문에 그녀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뉴옥 카네기 공연후 바로 이어서 가진 워싱턴 국방부 공연이 제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그 공연전에 그녀는 특별히 그 자리에 6.25전쟁 참전 용사들을 많이 참여시켜달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련된 자리에서 장내에 가득한 참전 용사들 앞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당신들 모두가 내 아버지이고 나는 당신들의 딸입니다. 나와 같은 딸을 둔 것 때문에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난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절대 불행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난 이 말을 하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나의 아버지들이여!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생각해보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자라면서 혼혈아이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차별과 냉대 그리고 손가락질 그 모두를 그녀는 사랑으로 덮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생각에 버려진 한 가련한 혼혈아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나누어주고, 아픔과 고통을 준 사람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으로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보물을 찾으면 저울의 추가 한 마리쪽으로 기울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양을 잡아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이 세상에 살때는 주님의 품안에 살아야 하고, 죽어서는 천국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보물찾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이 방황을 끝내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서 살수 있도록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고 죽어 영생을 누리도록 힘써 찾아 나서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