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르몬토프 Mikhail (Yuryevich) Lermontov
1814년 10월 15일 태어남 / 1841년 7월 27일 죽음
모스크바 출생. 1828년 모스크바대학 부속 귀족학교 4학년에 입학, 실러 ·셰익스피어 ·푸슈킨의 작품을 탐독하면서 시를 짓기 시작하여 최초의 서사시 《체르케스인(人)들》(1828) 《카프카스의 포로》(1829)를 썼다. 1830년에 정식으로 모스크바대학 정치과에 들어가 독서와 시작(詩作)에 빠졌다. 이 시절에 희곡 《에스파냐 사람》(1830) 《연인》(1831), 서사시 《자유의 마지막 아이》(1831), 서정시 《모놀로그》(1829) 《파리─6월 30일》(1830) 《그 날이 와서…》(1831) 등을 썼다.
1832년에 모스크바대학을 중퇴하고 페테르부르크 근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이 때 미완의 소설 《와짐》(1833∼1834)을 썼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으로 서민의 분노를 긍정하는 내용이었다. 1834년에 학교를 졸업하자 청년사관이 되었으며, 서사시 《악마》(1829∼1841)를 계속 집필하면서 그 사이에 《귀족 오르샤》(1835), 희곡 《가면무도회》 등을 썼다.
다시 미완의 소설 《리고프스카야 공작부인》(1836)에서는 수도의 하급관리의 애절한 생활을 그렸는데, 이것은 고골리가 시작한 자연파의 방향에 대응한 것이었다. 1837년 푸슈킨이 결투로 비명에 죽자, 그의 죽음에 붙여서 쓴 《시인의 죽음에》에 의하여 유명해졌으나,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정부와 상류사회의 음모를 폭로하였기 때문에 카프카스로 좌천당하였다.
이 곳에서 대표적 서사시 《도망자》(1838) 《무티리》(1839) 《악마》(1841)를 집필하였다. 1839∼1840년에 발표한 연작소설 《현대의 영웅》은 이른바 레르몬토프의 사상과 작품계열의 집대성으로 그 주인공 페초린의 악마적 풍모는 1830년대 지성적인 귀족의 환멸과 반항의 형상이며, 러시아 문학사상 전통적인 ‘잉여자(剩餘者)’ 타입의 결정판이었다. 이것은 푸슈킨의 《오네긴》과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되었다.
전제정치를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해 온 그는 세 차례나 카프카스로 유배되었고, 1841년 7월 15일 퍄티고르스크에서 천성인 독설 때문에 일찍이 학우였던 N.S.마르티노프 소령과 결투하여 27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마타 하리 처형/1917. 10. 15
1917년 10월 15일 매혹적인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인 마타 하리가 프랑스군 당국에 의해 총살되었다. 그녀는 1905년 파리에서 레이디 매클라우드란 이름의 직업 무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곧 마타 하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타 하리라는 말은 태양(글자 그대로는 '낮의 눈동자')이라는 뜻의 말레이어이다. 훤칠하고 아주 매력적이며 동인도의 춤을 어느 정도 출 줄 알았고, 대중 앞에서도 기꺼이 나체 출연을 해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평생동안 많은 애인을 두었는데 거의가 장교였다. 그녀가 벌인 첩보활동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애초에는 프랑스군 스파이였던 듯하지만 독일군 장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이중첩자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17년 2월 이중간첩 혐의로 프랑스군 당국에 체포된 뒤 1917년 7월 24~25일 열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했다.
나치 지도자 괴링 자살/1946. 10. 15
1946년 10월 15일 나치당의 지도자였던 괴링이 자살했다. 괴링은 독일을 나치 경찰국가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33년 그는 국회의장으로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으로 하여금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하게 했다. 또한 히틀러에게 독재권력을 주는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괴링은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직을 차지해 주 경찰을 나치화하고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창설하는 한편 반대파를 처리할 목적으로 강제수용소를 만들기도 했다. 1939년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히틀러가 자살한 뒤 스스로 미군에게 항복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그는 히틀러 정권이 저지른 만행은 모두 하인리히 히믈러의 소행이었다고 주장했다. 유죄판결을 받자 교수형 대신 총살형을 바라는 탄원을 올렸으나 거절당하자 사형집행이 하달된 날 밤 감방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 10. 15 프로이센 작센 뢰켄~1900. 8. 25 바이마르.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 d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 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 Morgenr 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 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und B se》(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88서울장애자올림픽 개막
같은 해 10월 2일 끝난 제24회 서울올림픽경기대회에 뒤이어 10월 15일부터 24일까지 9일간 열렸다. 미국과 영국에서 분산 개최된 7회대회 이후 최대규모로서, 61개국 4,319명의 선수단(선수 3,170명)이 참여했다. ‘도전과 극복, 평화와 우정, 참여와 평등’이라는 대회이념 아래 장애의 종류와 그 정도에 따라 경기가 치러졌다. 하계올림픽을 개최하는 국가가 같은 해에 주최하는 관례에 따라, 1988년 하계올림픽 주최국인 한국은 1984년 세계장애인스포츠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에 대회유치를 신청했다.
이어 1985년 네덜란드 안헴에서 열린 ICC 총회에서 제8회 장애인올림픽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되었다. 선수촌은 아파트 10개동 1,316세대 규모로, 서울시가 송파구 가락동에 1987년 4월에 착공해 다음해 9월 완공했는데 이 가운데 3개동 476세대는 휠체어장애자 전용으로 건설하여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또 1회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 외에 은행·우체국·전신전화국·세탁소·쇼핑센터·병원 등 부대편의시설을 완비했다. 경기장은 서울올림픽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 송파구 잠실지역에 있는 서울종합운동장을 주경기장으로 이용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준공
소양강은 오대산 부근에서 발원해 남으로 흐르다가 춘천시 인근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는 총길이 166.2km의 강이다. 한강의 고질적인 홍수를 해결하고 부족한 용수와 전력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강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는데 해결책은 다목적댐을 짓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73년 10월 15일, 6년반 동안의 난공사 끝에 동양최대를 자랑하는 소양강댐이 준공됐다. 높이는 수풍댐보다 높은 123m였고 총저수량은 화천ㆍ춘천ㆍ청평 등 한강수계 5개댐 저수용량의 거의 2배에 가까운 29억t이었다. 한국의 총수력 발전용량 62만KW의 3분의1에 해당하는 20만KW의 발전용량은 준공 후 바로 불어닥친 오일쇼크 때 큰 도움이 됐다. 공사과정에서 37명이나 숨졌고 1만8000명의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원래 설계는 콘크리트 댐이었으나 이를 생산할 능력이 안돼 진흙과 자갈을 사용해 댐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1984년 대홍수 때는 붕괴위험을 걱정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소양강댐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원동력이었고 여전히 한국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문교부, 국기제작법 공고/1949
태극기는 도형의 통일성이 없어서 사괘와 태극양의(太極兩儀)의 위치를 혼동하여 사용해오다가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국기의 도안과 규격이 통일되었다. 국기의 제작·게양·관리 등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에 의거, 시행되고 있다.
중국공산당 대장정 시작
1934년 10월 15일 새벽 중국 남부 강서성 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을 뚫고 8만명의 중국 홍군(공산당 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탈출은, 장개석이 1년 전부터 70만여명의 대군으로 소비에트 주위에 철조망과 시멘트 요새를 설치,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치면서부터 예고됐다. 국민당 군의 압박으로 소비에트 지역이 점점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강서와 복건성 일대의 근거지를 버리고 중국 서북부의 오지인 섬서성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 군과 각 지역의 적대적인 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입은 2만명을 포함한 2만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다.
주은래와 주덕, 임표, 팽덕회 등이 이끄는 홍군이 1935년 10월 연안에 도착해 자리를 잡기까지 행군한 거리는 무려 9600km.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000명 뿐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립 이후 15년 동안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 이룩했던 혁명의 성과를 모두 잃어버리고 첩첩산중에 움츠리게 된 것이다.
장개석이나 다른 관측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마침내 뿌리가 뽑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정은 중국 공산당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그것도 역사를 바꾼 대승리로 기록됐다. 홍군은 장정을 통해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을 도처에 전파했던 것이다.
로마의 가장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BC 19) 출생
버질(Virgil)은 영어 이름이다. 이탈리아 북부 만투바 근교의 농가에 태어나, 크레모나와 밀라노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다시 로마에서 공부를 했다. 철학 ·의학 ·수사학(修辭學) 등을 배웠는데, 처음에는 법률가를 지망하였으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도중에 단념하고,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0세 때 《에클로가에(田園詩) Eclogae》의 작시(作詩)를 시작하여 33세에 완성하였다. 그 시의 태반은 그리스의 테오크리토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지만, 그 중의 2편만은 그리스의 벽지 아르카디아를 무대로 한 작품이며, 번거로운 속세를 떠난 이상향(理想鄕)으로서의 아르카디아의 전통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렵부터 당시의 유명한 문인들과 사귀기 시작하였으며, 문인의 보호자였던 마에게나스를 통하여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후대를 받게 되었다. BC 30년 제2작인 《농경시(農耕詩) Georgica》를 발표하였는데, 완성하는 데 7년이 걸린 이 작품으로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 후 11년에 걸쳐 장편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s》를 썼는데, 이 작품으로 그의 이름은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아이네이스》는 미완성 작품으로 현재 12권이 남아 있다. 그는 키가 크고 안색은 약간 검은 편이었으며, 체격이 단단하여 마치 건강한 농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건강은 그다지 좋지 않아 위(胃)와 인후(咽喉)를 자주 앓았으며, 두통으로 고생하였고 치질에도 시달렸다. 건강 때문에 평소에 소식(小食)을 하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으며, 독신생활을 하면서 근직하게 처신하였다. 그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서양문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애국심과 종교적인 경건함, 풍부한 교양과 시인으로서의 모든 면에서 완벽한 기교, 이러한 점들로 해서 그는 문자 그대로 ‘시성(詩聖)’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단테가 《신곡(神曲)》에서 그를 안내자로 삼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이 미완성의 대작에 자신을 가질 수 없었던지, 죽기 직전 그리스로 여행을 떠날 때 친구에게 만약에 자신에게 어떤 사고가 일어나거든 《아이네이스》의 원고를 불살라 달라고 부탁하였다. 예감한 대로 그는 여행 도중 열병에 걸려 부득이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탈리아의 땅을 밟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그때 이 대작을 불태우지 못하게 하여 이를 소멸에서 구해낸 사람은 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헤르만 블로흐의 소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그 내용이 좀 난삽하지만, 이 무렵의 사정을 다룬 감동적인 작품이다.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1971
1971년 10월 15일 '학원의 난동행위를 단연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무장 군인들이 각 대학에 투입됐다.
위수령은 양택식 서울시장의 요청에 따라 수도경비사령부가 발동했다. 양시장은 날로 극심해지는 학원소요사태를 경찰력만으로는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 군당국에 위수령 발동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3~4월의 교련 교육강화 반대 4~6월의 대통령선거와 총선을 전후한 부정선거획책 규탄과 선거참관 요구, 사토 일본 수상의 방한 반대 9~10월의 교련 완전폐지와 함께 부정부패일소 등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자 정부가 이같은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2차에 걸쳐 대학가에 휴업령을 내리고 데모 주동학생 검거에 나선 정부는 10월 20일 23개 대학, 학생 1백77명을 제적했다.
그밖에
2002년 IBMㆍ히타치ㆍ선 등, 스토리지 기술 ‘블루핀’ 표준 자원 결의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한
2001년 KTF-LGT 품질향상 합의서 체결
2000년 김주진 아남반도체 회장, 한국인으로 첫 미 100대 부호에 선정
1994년 아리스티드 대통령, 망명지 미국에서 아이티로 귀국
1993년 청와대, 일제때의 총독관저건물인 舊본관의 철거 시작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미국 방문,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20일)
1988년 서울장애자올림픽 개막. 65개국 4,361명 참가
1985년 서울시, 서울시내 택시요금체계를 거리· 시간병산제로 전환
1982년 농수산부, 초지개발 10개년 계획 발표
1981년 정부조직축소개편, 531개 직위 감축
1979년 도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 출간
1976년 덴마크, 북한공관원 전원을 마약 등 밀수혐의로 추방
1969년 태백선(정선~나전) 개통
1966년 효봉 스님 입적
1964년 소련 수상 겸 제1서기 흐루시초프 해임. 새 수상에 코시긴, 제1서기 브레즈네프 임명
1962년 케네디, 알제리아 벨라 수상과 회담
1960년 독립운동가 문익상 사망
1950년 대동강 철교 폭파
1949년 육군포병학교 창설
1949년 한일통상협정 조인
1946년 좌익우파, 사회노동당으로 통합
1944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히틀러 암살미수사건과 관련 자살
1940년 인도 간디, 불복종운동 개시
1926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출생
1925년 조선일보의 정간해제와 집단해고 사건
1925년 서울역사 운수영업 개시
1925년 서울운동장 개장
1910년 인천에 상수도 개설
1907년 대한국민체육회 설립
1905년 일진회, 한일보호조약 촉구 성명
1897년 소련 작가 일리야 일프 출생
1582년 그레고리력 사용 시작
1581년 기록상 최초의 발레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