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진택의 시문집이다.
이진택은 운배(雲培)의 아들이며 1780년(정조 4) 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성균전적, 재릉령(齋陵令), 예조정랑,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장령을 역임하였으나 관운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집은 1902년 후손 규일(圭一)이 간행했다. 소(疏)의「사대직겸진사노혁파소(辭臺職兼陳寺奴革罷疏)」는 18세기 중엽에 장례원의 노비입안이 지방관의 노비입안으로 바뀌어 추쇄관을 혁파하자 그 폐해가 더욱 커졌으므로 그는 강력히 이 개혁의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그는 대관(臺官)으로 있으면서 삼정승에게 항장(抗章)하는가 하면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에 대한 상소를 올려 정조가 그 소를 대신에게 명하여 각 도신(道臣)에게 등사(謄寫)해 보내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 소(疏)로 사노혁파(寺奴革罷)에 결정적 계기를 만든 것이다.
이로부터 7년 후인 1801년(순조 1)에는 이러한 개혁론의 여파로 공노비해방(公奴婢解放)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공노비해방에 관한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되리라 본다.
「의리소(義理疏)」는 1793년, 1795년 양차(兩次)에 걸쳐 올린 상소로 영조가 1764년(영조 40) 성균관 명륜당에 들러 유생들을 앞에 놓고 사도세자 사건에 유생들이 아무 말도 안한 데 대하여
"오월지변 시하등극변이이등기시유일인출일성자호 조가지양이등욕용지어국가유사지시야이등하용위호(五月之變 是何等極變而爾等其時有一人出一聲者乎 朝家之養爾等欲用之於國家有事之時也爾等何用爲乎)"라고 질책하자 답변치 못하였으나 정조 때에 그는 사도세자 사건관련자들이나 정조(正祖) 위해 사건관련자들을 엄벌할 것을 주장한 내용이다.
「응지진농무책자오조(應旨進農務冊子五條)」는 1799년에 권농책(勸農策)을 묻는 윤음(綸音)에 답한 응지소(應旨疏)로 오조(五條)는 "일왈 재성보상(一曰 財成輔相), 이왈 불위농시(二曰 不違農時), 삼왈 박세염(三曰 薄稅斂), 사왈 전야벽(四曰 田野闢), 오왈 중농민(五曰 重農民)" 등이다.
서(書)와 잡저에 보이는 바와 같이 그는 신대현(申大顯), 이정덕(李鼎德), 홍양호(洪良浩), 이인행(李仁行), 김한동(金翰東), 최헌중(崔獻重), 정약용(丁若鏞), 이병모(李秉模), 채홍원(蔡弘遠), 채제공(蔡濟恭) 등 당대의 유명한 인사들과 교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유록(金剛山遊錄)」은 1774년 그가 과거(科擧)의 일로 서울에 왔다가 그 해 7월에 금강산을 유람한 기행문이요,
일록(日錄)은 1764년부터 1800년까지의 관직생활에서 겪은 일들을 단편적으로 적어 놓은 일기류이다.
부록의 기록들은 그의 생애와 업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책 끝에는 1792년 5月에 만든「소회록(疏會錄)」이 첨부되어 있다.
이 소회록」은 그가 의리소를 올렸을 때 유규(柳奎), 이세윤(李世胤), 이헌유(李憲儒), 권방(權訪), 이기정(李基禎), 박한동(朴翰東) 등과 연명으로 삼계원(三溪院)에 통문을 발하여 42명의 찬동자를 얻었으므로 일록 중에 기록되어 있는 이들의 명단을 책 끝에 실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본집은 18세기 후반기에 대관(臺官)으로서 맹렬히 활동한 친정조파(親正祖派)의 문집으로서 이 시대를 연구하는데 한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특히「사대직겸진사노혁파소」는 공노비해방(公奴婢解放)을 이해하는데 주목되는 자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