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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수 안연석(安鍊石)
[생졸년]1662년(현종 3)~1730년(영조 6) / 향년 68세
[문과] 숙종(肅宗) 31년(1705) 을유(乙酉)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3[探花]위(03/31)
[진사] 숙종(肅宗) 9년(1683) 계해(癸亥) 증광시(增廣試) (進士) 2등(二等) 16위(21/100)
[생원] 숙종(肅宗) 9년(1683) 계해(癸亥) 증광시(增廣試) (生員) 2등(二等) 11위(1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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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랑 안공 묘갈명(佐郞安公墓碣銘)
나는 어려서 어떤 영남(嶺南) 사람이 사계(沙溪) 김 문원공(金文元公,김장생) 선생을 문묘에 종향(從享)하는 청이 있을 때 통문을 지어 선생을 비난하며 향당 가운데 좋은 부로(父老)요 고관 집안의 훌륭한 자제라고 지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진사 안연석(安鍊石)이 한창 영남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었던 터라 세상 사람들은 그 통문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의심하였기 때문에 유벌(儒罰)을 받은 지 십수 년이 되었는데, 을유년(乙酉年,1705, 숙종 31)에야 비로소 유벌(儒罰)에서 풀려 과거에 응시하였다. 나는 사관(史館)에 있었던 터라 재차 벌을 내리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는데, 마침내 그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왕왕 사람들을 통해 그가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한 것을 들어보면, 칭찬은 적고 비방은 많았다. 내가 본래 그를 좋아하지 않는 마음으로 대번에 그 얘기를 믿고서는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그의 자제들과 종유하고 있고 또 그들의 부탁 때문에 공의 묘비문을 짓게 되었다. 아! 천하의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그의 행장을 살펴보건대, 공의 자는 보천(補天)이고 순흥(順興) 사람으로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손이다. 정민공(貞愍公) 당(瑭)은 기묘사화 때 이름난 재상이었는데, 그의 형 총(璁)은 출계하여 남의 후사가 되었다. 신사년(辛巳年,1521, 중종 16) 사화(士禍) 이후 영남에서 객지살이를 하였는데 그 자손들이 그대로 안동(安東)에 세거하였다.
그 뒤로 두 세대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도사를 지냈다. 증조 경엄(景淹)과 조부 헌(櫶)은 모두 벼슬하지 않았고, 부친 중현(重鉉)은 정릉 참봉(貞陵參奉)을 지냈다. 공은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스럽고 선조를 받드는 데 독실하였으며, 친척과는 화목하게 지내는 데 힘쓰고 붕우와는 의기를 중시하였다.
또 문장을 잘 지어 붓을 대기만 하면 수천 자를 써내었다. 젊어서 생원진사에 응시하여 갑과 제2등으로 급제하여 규례대로 직장에 보임되었다. 성균관 전적과 직강, 형조 좌랑, 연일 현감(延日縣監), 결성 현감(結城縣監), 양산 군수(梁山郡守) 등이 공이 역임한 내외직이다.
을사년(乙巳年,1725, 영조 1), 공이 겸춘추(兼春秋)로서 강연에 참석하였는데 글 뜻을 강론하다가 백성의 고통을 아뢰기를 청하니, 성상이 허락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예전 신라 때는 십만의 병사를 도성 안에서 불시로 징발하였는데, 오늘날 국가는 백성의 수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그저 허위로 기재한 장부만 끌어안고 있고 한정(閒丁)은 도처에 숨어 지내고 있으며 심지어 죽은 사람이나 이웃과 친족에게 추징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대로 된 수령이 없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서 폐단을 없애고 백성을 구제하는 계책을 수백 마디로 아뢰니 성상이 가납하고 공의 집이 어디인지를 특별히 하문하였다. 며칠이 지나 다시 소대(召對)하였는데, 연신(筵臣)이조덕린(趙德隣)이 상소를 올린 일에 대해 언급하자, 공이 말하기를,
“영남에 조덕린이 있는 점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어찌 일개 조덕린 때문에 영남 사람 모두가 간흉들과 편당을 지어 대의에 불순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승지가 언관의 지위가 아닌데 이런 말을 했다고 추고하기를 청하였지만 성상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영남 사람으로서 변명하고자 한 것이니 본마음을 알 수 있다.”
하였으니, 특별한 예우였다.
공은 일찍이 십수 년 동안에 집에 있으면서 출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당(堂)의 이름을 보만당(保晩堂)이라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스스로 암송하였다.
“만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천하의 의리를 강론한 게 정통하고 천하의 사변을 경험한 게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만년에 결국 깨달아 성정의 올바름을 얻는 것이 만년에 절의를 보존하는 방법이다.”
아! 공이 평소 지녔던 뜻의 대체가 이것이다.
이 때문에 임인년(壬寅年,1722, 경종 2) 김일경(金一鏡)과 박상검(朴尙儉)의 무리가 동궁을 위협하였을 때 개연한 마음이 일어 동궁을 보호하는 논의를 하려다가 얼마 뒤 박상검이 주살되고 동궁이 안정된 터라 상소를 결국엔 올리지 못했으나 소인들이 그를 매우 싫어하였다.
그 뒤 양산(梁山)에서의 일로 어사 박문수(朴文秀)에게 모함을 당하여 진주(晉州)에 편배(編配)되었다가 곧 예안(禮安)으로 양이(量移)되었는데, 경술년(庚戌年,1730, 영조 6) 11월 29일 귀양살이하던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공의 문장과 재략(才略)이 비록 세상에 쓰이질 못했으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에게 있어서는 여사(餘事,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일 뿐, 만년(晩年)에 수립한 절의가 매우 위대하여 대체로 평범한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가령 공이 실제 선정(先正,이전 시대의 현인 )을 무함한 일을 저질렀어도 주자(朱子)의 이른바 먼저 병들었다가 나중에 고친 경우가 되기에 문제가 없는데 더군다나 실제 이런 일이 없었음에랴. 공의 모친 장씨(張氏)가 일찍이 공에게 경계하기를
“나의 조부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 선생은 일찍이 김 사계(金沙溪,김장생)와 도의(道義)로 교제하셨으니, 너는 절대 부박한 무리들과 더불어 선현을 욕되게 하여 우리 조부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해라.”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예전의 이른바 통문은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나머지 근거 없는 비방은 모두 믿을 게 못 된다. 삼가 생각건대, 공이 수립한 바는 곧 마음에 근본한 천리와 인륜의 문제이고 세도와 관계됨이 큰지라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남김없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禮義)의 나라로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컬어졌다. 팔도 중에서도 영남은 전적과 현인이 으뜸이라 문묘에 종사한 현인이 네 명이니 참으로 성대하였다. 그런데 불행히 부서져 흩어지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어긋났으니, 선배가 이르기를 “영남 사람이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정(先正)을 모함한 이후로 남쪽 지방에 전혀 인재가 나질 않는다.”라고 했으니, 이는 식견 있는 말이다.
이러한 논의가 영남 사람에게는 세업(世業)과 마찬가지라 아버지가 전하고 아들이 전수받은 지 거의 백여 년이 되었으니, 물들고 고정되어 딱딱하게 굳어져 더 이상 깨뜨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상소와 편지로 서로 논변한 것은 이제 남김없이 다하였다.
만약 호걸(豪傑)이 나와서 이것들을 가져다 살펴서 그 시비를 궁구(窮究)한다면, 시대도 여러 번 바뀌고 은혜와 원망도 모두 식어서 한줄기 공정한 마음이 자연스레 유출되어 환하게 마음에서 이해하고 분명하게 그 잘못됨을 깨닫는 자가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경신년(庚申年,1680, 숙종 6) 허견(許堅,1646~1680)과 이남(李柟,?~1680)의 역모, 기사년(己巳年,1689, 숙종 15) 연간 이항(李杭1660~1701)과 장희재(張希載,1651~1701)가 모의하여 국모를 폐위시킨 일, 갑술년(甲戌年,1694, 숙종 20) 이후 이홍발(李弘渤,1675~?)이 몰래 동궁을 저주한 일은 모두 매우 극악한 행위인데, 이런 일들은 모두 그들의 선조들이 미처 알 수 없었던 것들이다.
살아서 이런 일들을 보았다면 그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자숙하기를 도모하지 않았을 것이라 어찌 장담하겠는가. 그렇다면 이처럼 의리의 핵심이 되는 곳에 있어선 그간의 사문(斯文)의 시비를 대대로 지켜왔다는 구실로 스스로 역적의 무리라는 죄과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임인년(壬寅年,1722, 경종 2) 사화, 무신년(戊申年,1728, 영조 4)의 역변과 같은 경우는 실로 경신년, 기사년, 갑술년의 일에서 근원한 것이다. 한쪽에서는 이남, 허견, 장희재, 이홍발의 무리를 반드시 엄하게 토죄하여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다른 한 쪽에서는 반드시 끝까지 죄를 다스릴 필요는 없다고 하여 짐짓 느슨하게 처리하고자 했다. 이것이 조정의 논의가 나뉘어 충(忠)과 역(逆)으로 구분된 이유이다.
율곡(栗谷), 우계(牛溪), 사계(沙溪), 우암(尤庵)은 본래 사류(士類)들이 애초부터 함께 존숭했던 분들인데,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생겨난 이후부터 둘로 나뉘어졌다. 저 영남 사람이 일찍이 선정들을 모함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이 소론과 영합한 것이고, 또한 이남, 허견, 장희재, 이홍발의 토죄를 느슨하게 처리하자는 논의는 반대파에게 덕을 보이고 은혜를 바라는 의도였으니, 형세상 어쩔 수 없이 남인과 영합한 것이다.
이것이 남인과 소론이 함께 임인년의 사화를 벌이고 무신년의 역변을 함께 저지른 이유이다. 기사년, 갑술년 이후로 비밀리에 일을 꾸며 사화를 도모하였으나 계획대로 되질 않자 건저(建儲,예전에, 왕의 자리를 물려받을 왕세자나 황태자를 정하는 일을 이르던 말) 하나의 사건이 마침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건저하는 날에 내린 자성(慈聖,임금의 어머니)의 하교가 빛나고 애달파서 팔방에서 전송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 다른 논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전 조정을 원망하고 선류(善類)를 원수로 여기는 무리들이 종사(宗社)를 돌아보지 않고 사적인 분함을 풀려는 생각이 춘궁(春宮)을 무함하고 위협한목호룡(睦虎龍)의 급서(急書)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아! 영남은 산천이 웅혼(雄渾,웅장하고 막힘이 없다)하고 풍토가 심후(深厚)하니, 사람들의 타고난 성품도 이와 같아 고수하는 바가 있으면 확고하여 바꾸질 않는다. 이러한 습속으로 한결같이 선(善)에 귀의했다면 비옥(比屋)의 아름다움을 거의 이룰 수 있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화살과 갑옷가운데서 기술을 잘못 선택하였다.
아! 백여 년 전 영남 사람 가운데 조정에서 벼슬한 자는 대부분 고관이 되었는데, 지금은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는 대부분 낮은 관직에 부침하다가 한번 파직되어 산관(散官)이 되면 종신토록 복직하지 못하니, 조정의 언의와 사실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길에서 전해 듣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뜻을 이루지 못한 저 흉도들은 대부분 남쪽 지방을 왕래하며 근거 없는 말을 선동하여 인심을 현혹시켜 그 기세를 키우고자 하였으니, 갑자기 듣고서 어찌 미혹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학사(學士) 박춘보(朴春普)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임인년 옥사 때 그가 공의 집을 방문하니 승지 나학천(羅學川)이 자리에 있었다. 공이 종이에다 조지(朝紙)에 나온 옥사를 베껴서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무옥(誣獄)이 분명하다. 그 의도는 단지 노론을 도륙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니, 남인과 소론은 이제부터 모두 역도가 될 것이다.”
하였다.
아! 7, 8년 전에 정확하게 본 것이 비단 등불로 비추고 거북으로 점을 친 정도일 뿐만이 아니니, 기미를 환히 아는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또한 공은 본래 뛰어난 지혜로 세상에 알려졌으니, 일찌감치 고정된 당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웅보(李熊輔)와 정희량(鄭希亮)의 무리가 공의 집을 드나들지 않았을지 어찌 장담하겠는가.
당시에 영남의 인심은 무너지고 쇠락하였으니 공이 대의를 부지하지 않았다면 순리(順理)와 역리(逆理)의 분별에 거의 어두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동(安東) 지역의 사람들은 참으로 공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 이를 만하다. 저들은 그것이 다행이라는 것도 모르고 반대로 비방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공은 평소에 매번 분연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기사년의 일은 그 죄가 명분과 의리에 관계되고 이홍발의 역모는 그 죄악이 천지에 가득하니, 사대부가 어찌 당색을 들어 비호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한번은 기사환국에 관련된 사람 가운데 남쪽으로 쫓겨난 자와 이 일을 논하며 말하기를,
“만약 내가 대간의 벼슬이 되어서한나절 정청(庭請)한 때를 만났다면 비록 공처럼 친한 사이라도 어찌 소매 속의 탄핵하는 상소를 면할 수 있었겠는가.”
하니, 그 사람은 멍한 채 떠났다.
평소 벗들 가운데 이홍발과 친하게 지낸 자들과는 모두 관계를 끊어버렸으니, 포의시절부터 이미 이러하였다. 의리의 근원에 대해 이미 체득한 것이 분명하였으니 끝내 저처럼 수립한 것이 마땅하구나! 내가 수년 동안 칩거하며 조정을 멀리하였기에 공을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듣자니 공은 기운이 얼굴에 성대하게 일어나 눈을 치켜뜨고 손뼉을 치며 격렬하게 언론을 펼쳤다고 하는데,스스로 반성하여 올곧아온 세상 사람들이 비난해도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고 하니 그 역량이 본디 이미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요, 세상에 협소하고 비천한 자들을 보면 곧장 면상에 침을 뱉고자 했다고 하니 구차하게 세상과 영합하기를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공이 양산(梁山)을 다스릴 때의 일은 내가 그 실상을 알고 싶어 조용히 당시 관찰사였던 유척기(兪拓基,1691~1767) 상공에게 물어보았는데, 상공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이 즉시 길을 떠나 양산으로 부임하는 길에 감영(監營)에 들러 말하기를 ‘이 고을의 폐단이 이미 심하여 속히 바로잡지 않으면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공은 법규에 얽매이지 말아 몸을 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네.
양산의 풍속이 사나워서 향임(鄕任,향청의 임원)을 다투는 자가 야밤에 관아에서 공조(功曹,군의 아전)를 죽이고, 또 2년 동안 다섯 번이나 수령이 바뀌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완악하고 사나운 자들을 제거할 수 없기에 마침내 형편에 맞게 알아서 처리하도록 허락하였네.
부임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공문서가 비는 날이 적었고 전병(田兵)과 관련된 정사의 폐단들은 모두 도려내고 척결하였네.
소신대로 처단하여 조금도 꺼리지 않고서 크게는 유배를 보내고 작게는 엄히 신문한 사람이 거의 수십 여 명이었네.
그러나 비방 또한 따라서 귀에 넘쳐나 탐학(貪虐)하다고 떠들어댔네. 가만히 살펴보면, 규정된 것 이외에 불법으로 거두어들인 것을 보지 못했고 다만 입김을 불어주는 정도의 작은 은혜를 베풀지 않아 원망도 감수한 채 공무를 수행하여 강포하고 교활한 자들을 단속함에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공이 심하게 비방을 받은 이유라네.
나는 공이 재능을 굽혀 작은 고을을 맡은 게 안타까워 승진시켜 일이 많고 바쁜 자리에서 재능을 시험하고자 했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네.”
유공(兪公)은 구차하게 남을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니 그 말은 믿을 만하다.
저 소인들이 비방을 따라 부회하여 반드시 공에게 분풀이를 하고자 한 것임이 이제 더욱 분명해졌다. 나는 이미 공을 위해 큰 절의를 드러내었고 또 공의 원통함을 밝혔으니, 세세한 것은 생략해도 괜찮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덧붙인다.
뜻은 더러운 무리와 영합하지 않았고 / 志不合汙
명철함은 기미를 환하게 알았네 / 明能燭微
공처럼 스스로 벗어난 이는 / 如公自拔
예전에도 드물었네 / 在古亦稀
오직 의만 바라보았으니 / 惟義是視
후회와 원망이 없음이 마땅하네 / 宜無悔怨
낙척하여 곤액을 겪었으니 / 落拓困厄
선한 자에게 무엇으로 권하랴 / 爲善何勸
부지하여 수립한 것은 / 蓋其扶樹
군신간의 큰 인륜이라네 / 君臣大倫
함부로 공을 비난하여 / 勿妄詆公
역적의 무리가 되지 말지어다 / 爲賊邊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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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좌랑 안공 묘갈:
저자가 안연석(安鍊石, 1662~1730)을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조덕린(趙德隣)이 …… 일:
조덕린은 1725년(영조 1) 노론과 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 조의 상소를 올렸다. 그중 붕당의 병폐를 지
적하면서 노론을 비판하였고, 임금에 대해 “창졸간에 선왕이 승하하던 날 눈물을 닦고 등극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목호룡(睦虎龍)
과 박상검(朴尙儉)의 옥사에 대해 지나쳤다고 하였다.
이에 성상이 비망기를 내려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지만 이후 삼사(三司)에서 연일 논핵하는 계사를 올려 종성(鍾
城)으로 귀양보냈다.《承政院日記 英祖 1年 10月 20日》《英祖實錄 1年 10月 21日》
[주03] 편배(編配):
귀양 갈 사람의 이름을 도류안(徒流案)에 기입하는 것을 말한다.
[주04] 경신년 …… 역모:
경신환국, 혹은 경신대출척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가리킨다.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에서 남인들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는데,
전횡이 심하여 점차 숙종의 신임을 잃자 서인의 김석주(金錫冑)와 김익훈(金益勳) 등이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인 허견
(許堅)이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 정(楨), 복선군(福善君) 남(柟), 복평군(福平君) 연(㮒) 등과 함께 역모
를 꾀한다고 고변하여, 허적 일가족과 윤휴(尹鑴)가 처형되는 등 남인 일파가 대거 축출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섰다.
[주05] 기사년 …… 일:
장 희빈(張禧嬪)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와 장 희빈과 친밀한 관계였던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모의하여 인현왕후(仁顯王
后)를 폐위시킨 일을 가리킨다.
[주06] 갑술년 …… 일: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고 정권 또한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온 갑술환국 이후에, 남인 이의징(李義徵)의 아들 이홍발(李弘渤)이
서인을 무고하기 위해 경종을 저주한 일을 가리킨다. 그는 장희재(張希載) 아버지의 무덤에 흉물을 묻어놓고 서인의 소행이라고 하
였다.
[주07] 임인년 …… 역변:
임인년 사화는 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일어난 옥사로, 이로 인해 노론이 실각하였다. 무신년 역변은 이인좌(李麟
佐) 등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의 과격 세력이 공모하여 일으킨 반란을 가리킨다.
[주08] 목호룡(睦虎龍)의 급서(急書):
남인 계열인 목호룡이 1722년(경종2) 3월에 급서(急書)를 올려 노론 자제들이 주축이 되어 경종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고 고
변(告變)하였다.
[주09] 비옥(比屋)의 아름다움:
비옥은 비옥가봉(比屋可封)의 준말로, 집집마다 다 봉해도 될 만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이 많다는 말이다.《한서(漢書)》권99〈왕
망전(王莽傳)〉에 “요순 시대는 집집마다 다 봉해도 되었다.[堯舜之世, 比屋可封.]”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10] 화살과 갑옷:
맹자가 이르기를, “화살 만드는 사람이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어질지 못하랴마는, 화살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상하지 못할
까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상할까 걱정하나니, 그러므로 기술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矢人豈不仁於函人
哉! 矢人唯恐不傷人, 函人唯恐傷人, 故術不可不愼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주11] 이웅보(李熊輔)와 정희량(鄭希亮)의 무리:
이웅보는 이인좌의 아우이고, 정희량은 안의(安義)에서 이인좌의 반란에 동조하여 봉기하였다.
[주12] 한나절 정청(庭請):
기사년(1689, 숙종 15) 4월 23일에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의 폐출을 명하자, 이달 25일에 백관이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하는
정청을 하고는 다음 날 바로 중지하고 말았다.
[주13] 스스로 반성하여 올곧아:
《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스스로 반성하여 곧으면 비록 수천 수만 명이라도 나는 가서 대적할 것이다.[自反而縮, 雖千
萬人, 吾往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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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佐郞安公墓碣
余少聞嶺人於沙溪金文元先生從享之請也。有爲通文詆斥先生。目之以鄕黨間好父老搢紳家佳子弟者。時安進士鍊石方主嶺中論議。世疑以出於其手。被儒罰十數年。至乙酉始解而赴擧。余在史館。欲更罰之而不果。遂擢其年文科。其後往往因人聞其居官處事。少譽而多毁。余以素不悅之心。輒信其說。蓋認爲難與言者矣。今辱從其諸子遊。又因其請而作公樹墓之辭。嗚呼。天下事誠有不可知者矣。按其狀。公字補天。順興人。文成公裕之後。貞愍公瑭己卯名相。其兄璁出爲人後。辛巳禍後流落嶺表。子孫仍世居安東。其後兩世皆文科都事。曾祖景淹祖櫶皆不仕。考重鉉貞陵參奉。公孝於事親。篤於奉先。於族黨務婣睦。於朋友重意氣。且善爲文。下筆數千言。少擧生員進士。其及第則甲科第二。例補直長。而成均館典籍,直講,刑曹佐郞。延日,結城縣監。梁山郡守。其內外踐歷也。乙巳公以兼春秋入講筵。因文義請悉陳民隱。上許之。公曰在昔新羅時。十萬之兵不時徵發於都城之內。今日國家。民數非不多。而徒擁虛簿。閒丁隱匿於各處。至有白骨隣族之弊。此由於守令不得其人。因奏袪弊救民之策凡數百言。上嘉納之。特問爾家何在。居數日復召對。筵臣有語及趙德隣疏事者。公曰嶺南之有德隣。固爲不幸。然豈可以一德隣之故。謂皆黨於姦凶。而不純於大義耶。承旨以出位請推考。上不許曰。以嶺人而欲爲分疏。可見本情。蓋異數也。公嘗家食十數年。不求仕進。名其堂曰保晩。仍自誦曰所貴乎晩者。講天下之義理熟。閱天下之事變多。始之不悟。而卒悟於晩。能得其性情之正者。乃所以保晩。噫。公之平生志尙。此其大致也。是以當壬寅一鏡,尙儉輩危逼東宮也。慨然有保護之論。已而儉誅而東宮安。疏果不上。然羣小甚疾之。後以梁山事。爲御史朴文秀所構陷。編配晉州。旋量移禮安。以庚戌十一月二十九日。疾卒于謫舍。享年六十九。公文章才略。雖不見用於世。而世人蓋莫不知之。然在公爲餘事。晩年樹立甚偉。類非常人所可企及。藉令公眞有誣詆先正之事。不害爲朱子所謂先病後瘳者。况其無是也哉。蓋公母夫人張氏嘗戒公曰。吾祖旅軒先生嘗與金沙溪爲道義交。汝愼勿與浮薄輩侵辱先賢。以得罪吾祖也。以此觀之。向所謂通文。可知其非出公手。而其餘浮謗俱不足信也。竊謂公之所樹立。卽天理民彝之根於心。而關係世道大矣。有不可不泝源而極論之者。嗚呼。吾東素以禮義之邦。有小中華之稱。而八路之中。嶺南文獻爲最。文廟從祀之賢。居其四焉。其亦盛矣。不幸論議分潰。士趨乖盭。先輩有云自嶺人誣辱栗,牛兩先正之後。南土絶不産人才。此有識之言也。夫此論之於嶺人。有同世業。父傳子受。殆百有餘年。擩染膠滯。牢不可破。然而章疏書牘之交相論辨者。今無餘蘊。苟有豪傑者作。取以觀之。以究其是非。則年代累嬗。恩怨俱冷。一段公心。自然流出。或有犂然而會於心。怳然而覺其非者矣。况庚申柟,堅之不軌。己巳間希載,杭之謀廢國母。甲戌後弘,渤之陰呪東宮。皆惡逆之大者。而此俱非乃祖先之所及知者。使其生而見此。則又安知不羞與同歸而圖所以自靖乎。然則似此義理大頭腦處。不可以向來斯文是非。諉以世守。而自陷於黨逆之科者明矣。至如壬寅士禍。戊申逆變。實源於庚申己巳甲戌之事。一邊則以爲柟,堅,載,渤之徒。必可嚴討而不可赦。一邊則以爲不必窮治而故欲緩之。此朝論之所由分而忠逆判焉。栗,牛,沙,尤。固士類之始共尊仰者也。而自有老少以來。歧而爲二。彼嶺人之曾所誣辱諸先正者。勢不得不與少而合。且其所以緩於討柟,堅,載,渤之論者。意欲示德徼惠於一番人。則勢不得不與南而合。此南少所以同構壬寅之禍。而同犯戊申之逆者也。蓋自己巳甲戌以後。排布狙伏。謀爲士禍。而旣不得售其計。則建儲一事。遂爲其機栝矣。夫建儲之日。慈聖下敎。光明惻怛。八方傳誦。爲我國臣子者。豈敢有異議於其間。而惟一種懟先朝而仇善類者。不顧宗社。思快私忿。以至虎龍急書。誣逼春宮而極矣。噫。嶺以南山川雄渾。風土深厚。人生性稟。亦與之同。有所執守。確然不回。以此習俗一歸於善則比屋之美。其或庶幾。而惜乎。擇術之失於矢函也。噫。百餘年前嶺之仕於朝者。多爲大官。今則得第後大都浮沉下僚。而一作罷散。終身不復。朝廷言議事實。何由知之。不過得之道路傳聞耳。彼凶徒之失志者。多往來南土。煽動浮言。欲爲熒惑人心。張大其氣勢。則驟而聽之。安得不爲詿誤也哉。余嘗聞朴學士春普之言。當壬寅獄時過公第。則羅承旨學川亦在座。公以一紙抄獄事之出朝紙者示之曰。此分明是誣獄。其意不但在魚肉老論而止。南少自此將盡爲逆矣。嗚呼。能的見於七八年之前。不啻若燭照龜卜。苟非識微之明。何以及此。且公本以多智聞於世。使不早自拔於窠臼。則熊輔希亮之徒。安知不接跡於其門乎。當是時也。嶺中人心。土崩波頹。不有公扶仗大義。則幾昧於逆順之辨矣。然則安東一邦之人。亦可謂與蒙其惠。彼不自知其爲幸。而反詬詆之者何哉。蓋公平時每奮然謂己巳之事。罪關名義。弘,渤之謀。惡盈天地。士大夫豈可以黨目而庇護之乎。嘗與己巳人之落南者論此事曰。使我爲臺諫而當半日庭請之時。則雖親厚如公者。安得免袖中之彈乎。其人憮然而去。平日知舊之與弘渤親者皆絶之。蓋自布衣時已然矣。於義理原頭。旣見得分明。則畢竟樹立之如彼也宜哉。余屛退多年。迹遠朝端。不得與公一見。蓋聞公眉睫間勃勃有氣。盱衡抵掌。言論風生。苟其自反而縮。則擧一世非之而不少沮。其力量固已過人。而視世之齷齪卑下者。直欲唾其面。其不肯苟合於世。可知也。若公梁山時事。余欲得其實。從容問於其時按使兪相公拓基。則以爲公之便道赴梁也。過營言此邑弊蠱旣甚。不亟釐正。無可爲者。願公勿拘以文法。使得以展其肢體也。蓋梁之土俗虣悍。爭鄕任者夜戕功曹於官廨。又二歲五易守。非此人無以剪去頑梗也。遂許之以便宜從事。之官月餘。公牒少虛日。而田兵諸政。無不刷刮而剔抉之。信心擊斷。不少畏憚。大則流配。小亦嚴訊。幾數十餘人。然謗亦從而溢耳。蓋以貪虐爲言。徐而察之則未見有科外橫斂。而但不爲呴沫之小惠。任怨奉公。鋤強束猾。無少饒貸。此其所以受謗之甚者也。余惜其屈於小邑。欲進以試諸劇地而未及也。兪公非苟譽人者。其言可信。彼羣小之因謗附會。必欲甘心於公者。至此而益明矣。余旣爲公表見其大節。又白其寃枉。則細者可略。系之以銘曰。
志不合汙。明能燭微。如公自拔。在古亦稀。惟義是視。宜無悔怨。落拓困厄。爲善何勸。蓋其扶樹。君臣大倫。勿妄詆公。
爲賊邊人。<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