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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高靈)은 대가야의 옛 터전이다. 매년 열리는 ‘고령 대가야 축제’는 가야의 역사를 공부하고 딸기의 달콤함을 기대하는 부모와 아이들이 손을 잡고 찾고 있는 가족 축제이다. 박물관 뒤 능선을 따라 조성된 지산동 고분군은 세계문화유산이자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한 공간이기도 하다. 가야 고분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은 관람객을 1,500여년 전의 古代로 데려가는 타임머신이다. 이렇듯 고령은 우리나라 고대(古代)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 고령은 조선의 유교 문화가 피어난 곳이기도 하다. 한국 성리학의 맥(脈)을 이었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의 종가가 있고, 퇴계 제자로 임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죽유 오운(竹牖 吳澐)의 종가도 있다. 대대로 문장으로 이름난 선비를 배출했던 우곡면의 고령박씨 세거지(世居地)도 빠뜨릴 수 없다. 유교 문화의 현대적 계승을 고민하는 우리 회원들에게 고령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500년을 이어온 벽송정 유계
3월 24일, 시내 현대백화점 앞으로 가니, 먼저 나온 회원들이 많았다. 최인돈 지회장님과 류경선 부회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회원들과도 반갑게 안부를 나누었다. 그리고 15인승 버스와 승용차에 나눠 타고 출발하였다. 도중에 논공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가 벽송정(碧松亭)으로 달렸다. 벽송정은 26번 국도변의 경사진 비탈의 좁은 터에 있었는데, 앞에는 안림천(安林川)이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흘러가고 있다. 원래 벽송정은 수목(樹木)이 울창하고 시냇물이 휘감아 흘러가는 안림천 상류에 있었으나, 1920년 대홍수 때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벽송정(碧松亭)
정자는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담 밖에서 살펴보았다. 시판(詩板) 셋과 기문(記文)이 보였는데, 시는 고운 최치원과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이 쓴 것이라 하였다. 벽송정은 기원전 57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믿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운 최치원이 이곳에 들려서 시를 지었다고 하니, 역사가 매우 오래된 정자임은 분명하다. 선현(先賢)의 자취를 기억할 수 있는 벽송정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많이 찾았다. 고령을 대표하는 사족(士族)들은 16세기 전반에 벽송정유계(碧松亭儒契)를 조직하여 정자를 가꾸고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로 삼았다. 유계안(儒契案)은 1546년(명종 1년)에 작성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고, 벽송정유계에 참여한 가문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지금도 매년 봄에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전통을 가벼이 여기는 세상이지만, 선조의 유업(遺業)을 계승하려는 후손의 노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령신씨 시조묘(高靈申氏 始祖廟)에서 조상을 생각하다.
우리 일행은 벽송정에서 고령신씨 시조묘로 갔다. 시조세덕비(始祖世德碑)가 서 있는 주차장에서 가파른 길을 걸어서 올랐다. 오랜만에 경사진 길을 오르니 다리에 기분좋은 자극이 느껴진다. 고령신씨는 고려 때에 대대로 호장(戶長)을 지내던 토호(土豪) 가문이었는데, 고려 고종 때 신성용(申成用)이란 분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나라에서 알아주는 문벌(門閥)로 성장한다. 이후 대를 이어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세조(世祖)를 왕으로 추대하고 재상을 지냈던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가 있다.
재실을 지나 우측으로 올라가니, 경사가 급한 기슭 맨 위에 시조묘가 보이고, 밑에는 아랫대의 가묘(假墓)가 조성되어 있었다. 시조묘에는 조금 무서운 인상의 문인석(文人石)이 양쪽에 서 있고, 무덤 앞에는 사방으로 트인 장명등이 있다. 그런데 묘의 평면이 둥글다. 이것은 고려가 아니라 조선시대 묘(墓)의 모습이다. 아마도 후손들에 의해 변형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규월암중수기(奎月菴重修記)
묘소 아래에는 재실(齋室)인 추모재(追慕齋)가 있었는데, 규월암중수기(奎月菴重修記)가 눈에 띄었다. 주련(柱聯)에도 ‘至今奎月照山菴[지금 규월이 산속 암자에 비치니]’이란 구절이 있었다. ‘규월(奎月)’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전거(典據)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규(奎)’는 문장(文章)을 뜻하는 글자이니, 규성(奎星)과 의미가 통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따라서 ‘규월(奎月)’은 대대로 뛰어난 문장가를 배출한 고령신씨 가문의 자부심이 담긴 표현이 아닐까?
‘百和堂’이란 현판이 있던 죽유종택(竹牖宗宅)
죽유종택은 당시 영남을 대표하던 학자인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에게 글을 배웠던 죽유 오운(竹牖 吳澐)의 종가이다. 죽유는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낸 고위 관리였지만,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의 휘하에서 스스로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임진왜란 극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낮춰 망우당의 의병 활동을 뒷받침한 죽유의 모습에서 우리는 글을 배운 선비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본다.
종가의 동쪽에 있는 불천위(不遷位) 사당을 바라보다가 종가에 들어갔다. 한참을 서성거렸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마당에서 고개를 바라보니, 종택 처마 밑에 ‘百和堂(백화당)’이란 현판이 보인다. 종가의 노종부(老宗婦)께서 직접 쓰신 것이라 하였다. 백화당에 담긴 의미는 경주 양동 마을의 서백당(書百堂)과 같을 것이다. 『소학(小學)』에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제(北齊)부터 당(唐)까지 살았던 장공예(張公藝)는 99세까지 장수한 인물인데, 900여 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면서도 화목하였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듣고 당(唐)의 고종이 장공예의 집을 방문하여 그 비결을 물었다. 장공예는 고종에게 종이에 ‘忍(참을 인)’이란 글자를 100번 써서 보여주는 것으로써 대답을 하였다. ‘백화당’은 이 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100번을 참는 집안에는 큰 화평이 있다[百忍堂中有泰和]’는 말에서 유래한다. 종가의 현판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百和堂(백화당)’
종가 서쪽에는 새로 짓고 있는 한옥이 보인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지붕에 올릴 기와와 건축에 사용할 옛 목재들도 가득 쌓여 있었다. 떠나려고 일행이 모두 차에 올랐는데, 이장희 원장님이 종손인 오박사와 같이 왔다. 밭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온 모습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분도 많았으나,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사이였기에 가볍게 인사만 하였다. 금방 떠나기는 아쉬웠으나 정해진 일정 때문에 우리는 죽유 종택을 떠나 점필재 종택으로 향했다.
점필재 종택(佔畢齋 宗宅)
고령군 쌍림면에 위치한 개실 마을에는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유명한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종가가 있다. 점필재는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등을 길러낸 유학자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계승한 분이다. 이러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시대에도 많은 논란이 되었다.
종가에 도착하니, 현재 종택에 살고 계시는 종손(宗孫)의 동생께서 나와 인사를 하신다. 서울에 계신 종손을 대신하여 종택에 살면서 마을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 건물이다. 우리 답사 일행은 안내에 따라 종택 대청에 올랐다. 사랑채 처마 밑에는 ‘文忠世家(문충세가)’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어서, 점필재 문충공의 종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북쪽 창호 위에는 ‘孝爲百行之源[효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 된다]’이라 쓰인 액자가 걸려 있다. 모두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는 종가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점필재 종택(佔畢齋 宗宅)
설명과 인터넷 자료를 통해 살펴보니, 점필재 선생이 화를 당한 후 옮겨 다니며 살다가, 선생의 6세손에 이르러서 고령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1800년경에 종택과 사당을 짓고 선생의 불천위 신주를 모셨다. 우리 일행은 풍수의 관점에서 본 종택의 입지와 종택의 건축적 특징에 대해 설명을 듣고, 궁금한 점을 질문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안내에 따라 종택 좌측에 있는 서림각(捿林閣)으로 갔다.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교지(敎旨) 등 점필재 종가에서 소중히 보관해 온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돌아가신 종손의 장례식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어서 옛 장례 풍습을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 일행은 ‘서림(捿林)’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숲에 깃들다’라는 의미이지만, 전거(典據)를 모르니 의미가 와 닿지 않는다. 답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환송을 받으며 도진(桃津) 마을로 향했다.
아름다운 도진(桃津) 마을
고령군 우곡면에 위치한 도진(桃津) 마을은 1350년대에 박경(朴景)이란 분이 터를 잡은 후, 고령박씨들이 오랜 세월을 세거해 오고 있다. 문중 어른의 설명과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니, ‘도진(桃津)’이란 명칭은 마을 앞 회천(會川) 둑을 따라 복숭아나무가 우거지고, 회천을 건너는 나루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도진마을에서는 네 분의 문과 급제자와 여덟 분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했으며, 임진왜란과 3·1 운동 등 역사의 고비마다 활동한 분들이 많아 ‘충효(忠孝)마을’이라 불린다는 설명도 있었다.
현재 도진(桃津) 마을은 면사무소와 우체국, 보건지소 등 각종 기관이 있는 우곡면의 중심 이며, 아직도 고령박씨(高靈朴氏)들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집성촌이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니, 고령박씨 집안의 어른께서 마중을 나와 안내하셨다. 마을 앞 ‘만세 광장’에는 거대한 고령박씨세거비(高靈朴氏世居碑)가 있어 문중의 경제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비희(贔屭)라고 불리는 거북이의 머리 모습은 좀 특이했다. 귀(耳)는 꽃잎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눈(目 )같기도 하고 콧구멍 같기도 한 것이 조각되어 있는데, 몇 번을 보아도 알 수가 없다.
마을 회관에서 우리 회장님의 친구분이 부산에서 갖고 온 달디단 감주(甘酒)를 마셨다. 그리고 만세 광장을 둘러보았는데, 늘어진 능수도화(綾垂桃花)가 기억에 남는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불린 마을의 역사를 생각하며, 문중(門中)에서 묘목을 사서 심었다고 한다. 꽃이 피기 전이라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흰색과 붉은색 꽃이 같이 피었을 때의 모습은 상상이 되었다.
세거비(世居碑) 앞에는 도진마을의 지명 유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었다. 읽어보니,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節義에 따라 고령박씨의 선조들이 낙향(落鄕)할 때 지은 시가 소개되어 있었다. ‘복숭아 꽃잎이 물 위에 떠 흐르고, 쏘가리 떼가 뛰어노니, 어찌 무릉도원과 다를 바 있나[桃花挾流 鱖魚潑潑 無異於武陵桃源]’. 지금은 도로와 제방이 회천(會川)을 가리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러진 않았을 테니 얼마나 아름다웠으랴! 복숭아꽃이 만발한 하천에서 물고기 잡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떠오른다.
남와구거(南窩舊居)
우리 일행은 문중 어른의 안내를 따라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의 규모는 꽤 컸고 오래된 고가(古家)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고령박씨의 오랜 세거지(世居地)임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방문한 손님이 머무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는 남와구거(南窩舊居)인데, 손님 접대를 중시하던 우리의 옛 풍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진마을을 나온 우리는 대가야읍에 있는 식당 ‘옛촌갈치’로 향했다. 갈치 정식을 먹었는데, 푸짐하고 맛이 있었다. 식사 후 이정운 회장님의 주재로 간단한 회의를 하였고, 새로 참석하신 분들의 인사도 있었다. 사장님이 맛있는 후식(後食)을 연거푸 내어 주시니, 그 인정이 고마웠다.
망우당(忘憂堂) 묘소와 이로정(二老亭)
가랑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한다. 이런 날은 우산을 가진 사람들이 불편할 듯하다. 우리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쳤던 망우당 곽재우 선생의 묘소로 향했다. 묘역(墓域) 입구에는 안내판이 있어 망우당의 묘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묘소는 봉분도 낮았고, 비석에는 지붕돌도 없었다. 비석의 글자를 보니, ‘贈兵曹判書行咸鏡道觀察使忘憂堂先生郭忠翼公墓 貞夫人商山金氏祔(증병조판서행함경도관찰사망우당선생곽충익공묘 정부인상산김씨부)’라고 쓰여 있다.
집에 와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봉분이 낮은 것은 선생의 유언에 의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왕릉이 훼손되었다. 장군은 이것이 신하인 자신의 죄라고 하면서, 자신의 무덤은 봉분도 만들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은 혹여 선생의 묘를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비두(碑頭)도 없는 묘비(墓碑)를 세웠다. 그러나 선생의 유언이 있기에 봉분을 높이지는 못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원래 관직의 정식명칭은 계(階 : 품계의 명칭), 사(司 : 소속된 관청), 직(職 : 맡은 직분) 순서로 쓴다. 그런데 비석을 보니 품계는 쓰여있지 않고, ‘병조판서(兵曹判書)’와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쓰여있다. 그리고 두 직책의 사이에는 ‘행(行)’이 쓰여 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망우당 선생 묘비의 글에 오류(誤謬)가 있을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비문의 형식과는 다르기에 의문이 남는다.
망우당(忘憂堂) 묘비(墓碑)
이로정(二老亭)은 달성군 구지면의 낙동강이 흘러가는 언덕 위에 있었다. 이로(二老)는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 선생이니, 이로정은 두 분이 자취가 서린 곳이다. 두 분은 모두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고, 학문이 높아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도 배향된 분들이다. 조선시대에 선비가 학문과 덕망으로 세상을 교화(敎化)한 공이 크면, 서원에 배향되기도 하고 국가로부터 ‘문(文)’자가 들어간 시호(諡號)를 받기도 한다. 이것은 제자나 후손들로서는 대단한 영광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무리 크다 한들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에 비교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인물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 18분인데, 일두와 한훤당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로정으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 있었다. 사람이 왕래하지 않는 곳이니, 관리를 위해 불가피한 것임은 알지만 많이 아쉽다. 처마 밑에는 ‘二老亭(이로정)’, ‘第一江山(제일강산)’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은 ‘제일인(第一人)이 있는 곳이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 하였다. 선현(先賢)을 높이는 마음이 가득 담긴 표현이다.
이로정에서 보니, 낙동강에는 봄기운이 완연하였다. 특히 늘어진 수양버들의 긴 가지에서 돋아나는 초록빛이 아름다웠다. 일두 선생은 함양에서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왕래하며 한훤당과 교유하였다고 전하는데, 당시 두 분의 모습은 아마도 신선이 아니었을까?
제일강산 이로정(二老亭)
우리 일행들 사이에서 ‘일두(一蠹)’라는 호가 가지는 의미와, 한훤당이 일두보다 2살이 적은데, 앞자리를 차지한 이유가 무엇인지 대화가 오고 간다. 우리 답사를 이끌면서 설명해주시는 이한방 교수님은 정암 조광조가 한훤당의 제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을 한다.
한훤당 종택에서 마신 커피 한잔
이로정 근처에는 전망이 아름답다고 알려진 찻집 ‘커피명가’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훤당 종택에 가서 차를 마시기로 하였다. 오랜 고택(古宅)의 분위기를 느끼자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찻집으로 변한 종택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옛날에는 창고로 쓰던 곳까지 개조하여 손님을 받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사랑채로 안내받았다. 사랑채 대청의 대들보는 꿈틀거리는 용의 몸통을 닮았다. 사랑채 마당 오른편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하는 작은 연못이, 왼편에는 오랜 세월을 종택과 함께 한 노송(老松)이 있어 고가(故家)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찻집에 손님이 많아 1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기에, 우리 회원들은 한가(閑暇)로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청에는 ‘小學世家(소학세가)’라 쓰인 현판이 있어서, 이곳이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의 종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훤당은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유명한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면서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유명한 정암 조광조의 스승이었으니, 이러한 평가는 당연하다.
그런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인정받아 문묘(文廟)에도 배향되었지만, 한훤당이 남긴 저술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관련 논문을 찾아보니, 그가 지은 글이라곤 시가 16수, 부(賦)가 1편, 제문(祭文) 2편, 편지글 4통, 상소문 1통이 전부라 한다. 이를 통해서는 한훤당의 학문적 성취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따라서 한훤당의 위상은 남긴 글이 아니라, 훈구파를 밀어내고 집권한 사림파인 동료와 후학(後學)의 평가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퇴계와 남명이 모두 한훤당을 가리켜, 도학(道學)을 일으킨 유종(儒宗)이라 평가하면서 그의 위상은 반석(盤石)처럼 굳건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훤당은 수준 높은 성리학의 철학을 연구하여 이론적으로 정립하고자 노력한 분은 아니었다.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한훤당에게 정사(政事)에 대해 질문을 하면, ‘소학동자(小學童子)가 어찌 대의를 알겠는가’라고 대답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한훤당이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나, 사실은 32세 무렵부터 이미 김종직과는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고 알려져 있다. 스승과 제자의 갈등에서 퇴계를 비롯한 후대의 사림파들은 제자인 한훤당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스승을 저버리는 것을 큰 허물로 아는 조선시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퇴계께서 말한 ‘吾家’의 의미는?
한훤당 종택을 나오면서 인근에 있다는 대암 박성(大庵 朴惺) 종가를 갈 것이냐를 두고 잠시 대화가 오고 갔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에 가 보기로 하였다. 종손이 사는 집은 현대식 양옥이었고, 대문 동쪽에 불천위 사당이 있었다. 주인이 없었기에 담 밖에서 바라보다가 대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15인승 버스 안에서 자연스럽게 답사를 주제로 이야기가 오고 간다. 이한방 교수가 말하기를, 이번에 학봉문인록(鶴峯門人錄)이 새로 편찬되었는데 대암 박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버스 안에서는 퇴계와 율곡, 한강과 여헌 등의 사승(師承) 관계가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 오늘 답사하였던 대표적인 종택이 점필재와 한훤당의 종가였고 두 분이 스승과 제자였으니,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이었다.
영남에서는 율곡이 스스로 ‘문인(門人)’이라 했음을 들어 퇴계의 제자라고 한다. 호서(湖西)에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강(寒岡) 쪽에서는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 한강의 제자라 하고, 여헌 쪽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안동지방에서도 퇴계가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의 제자인가를 두고 오랜 논란이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스승을 부모처럼 섬겼다. 도통(道統)의 전수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은 혈통(血統)보다는 학통(學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스승을 저버리는 행위는 ‘배사(背師)’라 하여 매우 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인정된다면, 스승은 甲이 되고 제자는 乙이 된다. 그런데 이것은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의 관계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후손과 제자들의 우열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사승(師承) 관계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었다.
이제 유가(儒家)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졌고, 내려오던 전통도 끊어지고 있다. 스승과 제자 여부(與否)만을 따지는 소모적 논쟁을 일반인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런 논쟁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간혹 있겠지만, 아마도 박물관에 전시된 옛 유물을 구경하는 정도의 관심일 것이다.
지금 노쇠(老衰)한 유림사회는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옛것에만 집착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자기 조상의 유산(遺産)을 답습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우리의 앞날은 절망적이다. 퇴계 선생이 말한 ‘오가(吾家)’는 ‘우리 집안’이 아니라 ‘우리 유가(儒家)’가 아니었을까? 이제 가문의 테두리를 벗어나 국가와 사회에 보탬이 되는 곳에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되도록 우리 박약회가 앞장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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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가 많으십니다.ㅎ
뵌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왕성히 활동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배종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