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한의원을 찾아서①]한의원+카페+학교 결합 시도한 '티테라피'
이상재 한의사, '미병 관리·치유하는 한방 티 테라피 시스템 개발이 목표입니다'
화려하고 세련된 곳으로 알려진 서울 압구정의 한 골목 길모퉁이에 아담하고 소박한 카페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티테라피(Tea Therapy)’. 간판 밑 전면 창에 적힌 ‘친환경카페(cafe)+한의원(clinic)+건강문화교실(School)’이라는 설명이 이 곳의 정체를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눈을 편안하게 하는 천연나무의 색감을 활용한 벽과 가구, 파스텔톤 쿠션들이 아늑한 분위기를 물씬 낸다. 출입문 왼쪽에 장식된 한방차들은 예쁜 ‘잼(jam)’이나 견과류를 포장해놓은 것처럼 색이 곱고 정갈하다. ‘한약재가 이렇게 예뻤던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
<출입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보이는 한방차 상품 진열 공간>
창가 쪽에 앉은 몇몇 손님무리들은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있고, 잠시 후에 들어온 금발의 외국인은 선반에 진열된 한방차들을 유심히 살펴보다 몇 개를 골라 포장해 간다. 블로거들 사이에서 ‘티테라피는 내국인보다 관광객 사이에서 더 유명하다’는 평가가 떠올랐다.
일본손님들과 진료 상담 중인 이상재 원장을 기다리며 맑은 담갈색을 내는 ‘원기(元氣)차’를 마셨다. 한방 특유의 맛과 향은 살리면서도 흔히 접하는 쌍화차류의 한방차와는 달리 가볍고 깔끔한 맛을 냈다. 달큰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좋았다.
“한약재가 참 예쁘죠? 맛은 더 좋습니다. 한약 하면 ‘비싸고 써서 먹기 힘들다’는 선입견이 강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의원을 하면서 이백 몇 십 가지의 한약재를 전부 맛보았는데, 쓴맛을 내는 약재는 20%도 안 됩니다. 의외로 매력적이고 독특한 맛과 향을 가진 재료들이 많죠. 처방에 들어간 10가지 약재 중 하나만 쓴맛을 내도, 모두 섞어서 달여 내니 둔탁해져서 그런 겁니다. 저는 맛에 초점을 맞춰서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차를 연구했습니다.”
이상재 원장은 ‘예방한의학’을 전공으로 경희대학교 한의학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당시 몸과 마음, 생활습관 등을 통한 ‘양생(養生)’의 방법을 배우고 연구하면서 그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현대인들의 문화에 스며들 수 있는 손쉬운 양생법, 그중에서도 ‘차’였다.
관심과 아이디어가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 졸업 후 서울 마포구에 개인한의원을 내면서부터. 30년 된 중국음식점 자리를 인수해 한의원을 하면서 환자들이 원하는 것을 보다 가까이에서 듣고, 직접 만든 차를 나눠주며 반응을 살폈다.
처음엔 단순히 한약재를 부셔서 티백에 넣는 수준이었지만, 커피를 배우며 차를 만드는 방법도 좀 더 전문적으로 키워나갔다. 커피콩 하나를 두고 전 세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맛과 향을 좋게 볶고, 분쇄하고, 추출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이 원장도 한약재 하나 하나를 커피콩이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한약재 역시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졌고, 그가 개발한 한방차의 가짓수도 늘어갔다.
환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먹기 편하다는 칭찬이 많았고, 효과도 좋았다. 그가 만든 한방차 덕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한의원도 점점 번성해 2년 만에 근방에서 소위 ‘잘나가는’ 한의원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2년째 되는 날 한의원을 다른 한의사에게 인계했다. 한방차를 개발하고 사람들의 좋은 반응을 확인하면서 ‘집단을 대상으로 한 건강관리시스템 개발’에 대한 열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러기 위해선 지금 같은 형태의 한의원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의원이 지금보다 더 잘되면 그만두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빠른 결심을 부추겼다.
그 후 다시 2년, 그는 여기저기를 다니며 공부하고 준비했다. 일본에 두 달 정도 머무르며 보건의료분야의 다양한 서비스를 체험했고, 보건소 한방건강증진사업과 관련해 일주일에 한 번씩 연구원으로 참여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보건사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실무적인 내용들을 체험했다.
“한의원을 그만둘 때만 해도 한방차에 대한 주변의 칭찬에 고무돼 바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 준비를 시작해보니 제가 많이 부족한 걸 깨닫게 됐죠. 사업계획서를 써보니 구체적인 사업 모델도 없었고. 그래서 거의 2년을 여기저기 다니며 공부했고, 제가 생각한 공간을 모델링 하는 데만 서너 달을 소요했습니다.”
2008년 여름, 그렇게 탄생한 공간이 티테라피다. 그는 공간의 핵심개념을 ‘카페가 있는 한의원’이 아니라 ‘한방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는 카페’로 잡았기 때문에, 차 마시는 공간이 한의원 대기실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했고, ‘한방차=전통찻집’의 공식을 깨려고 시도했다.
<카페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아담한 주방. 차와 간단한 음식을 만드는 곳을 전면에 개방해놓았다>
<상담을 통해 '나만의 한방차'를 만들 수 있는 공간(좌)과 한쪽에 마련된 족욕공간(우)>
당시 미디어에서 이색카페를 조명하는 기획을 많이 했기 때문에 언론사와 관심 있는 한의사들, 호기심을 갖고 찾아오는 손님들로 티테라피는 문전성시였다.
하지만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고, 곧 시련이 닥쳤다.
“사람들이 호기심 삼아 한 번은 오는데 두 세 번은 안 오더라고요. 이유를 분석해보니 한방차를 마시러 오려면 건강해지려는 의지가 필요한데, 커피는 몸에 안 좋다는 알지만 먹고 싶은 욕구만 있으면 마시더라고요. 결국 사람들은 먹으면 좋은 것과 먹고 싶은 것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합니다. 개업 후 1년 동안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을 걱정해야 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때 티테라피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외국인 관광객들. 일본에 ‘대장금’이 반영되며 한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일본잡지나 TV에서 한국특집을 다루며 한의사가 하는 카페로 티테라피가 자주 소개됐다. 일본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왔고, 덩달아 한국 손님들도 늘어나며 1년 전부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티테라피 한방차의 인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져 현재 후쿠오카(福岡)에 일본가맹점 1호를 열었고, 나고야(名古屋)에 2호점을 준비 중이다. 도쿄(東京)와 교토(京都)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엔 미국에도 수출했고, 터키 이스탄불에서도 이메일로 문의를 해올 정도로 해외에서 연락이 잦아지고 있다.
“서양의 허브, 페퍼민트나 캐모마일, 라벤더 등도 과거에는 그 사람들의 약이었습니다. 지금은 세계인들이 애용하고 있죠. 차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화에 성공한 것이죠. 우리 한약도 언제까지 시커멓게 달여서 파우치에 담아 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약을 치료도구로서 발전시켜나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와는 다른 문화적 차원에서 세계화시키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티테라피를 적당히 포장해서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한방을 알리고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 “한의학은 위대한 학문…한방을 통한 미병관리시스템 개발이 궁극의 목표”
이 원장은 티테라피가 자리 잡은 이후에는 교육과 연구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티테라피에 병을 고치러 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차로 병을 고친다고 해서 찾아오시는 거죠. 그래서 고민해봤습니다. 무엇을 위한 ‘테라피(therapy:치료, 치유)’인지 개념이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차를 통해 ‘미병(未病)’을 관리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미병은 특별한 병은 없지만 건강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스스로는 여기저기 아프고 불편한데 병원에 가보면 ‘스트레스성’ 혹은 ‘신경성’ 외에는 딱히 원인을 찾을 수 없고 진단하기 힘든 경우가 미병에 해당된다. 최근에야 관심을 받기 시작했지만, 황재내경(黃帝內徑)에 ‘미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진짜 명의’라고 되어 있을 정도로, 전통의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개념이다.
예방한의학을 전공한 전문의답게 이 원장도 미병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최근에는 미병 치료와 관리를 보다 체계화시키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미병은 내 몸이 나한테 보내는 신호이자 경고, 하소연입니다. 단순히 ‘어디 아프면, 이 차 한 번 마셔봐’ 수준으로 미병과 차를 연계시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 미병 평가기준이 확실한 ‘미병평가도구’가 필요하고 그에 맞는 미병 관리시스템으로서 ‘티테라피’가 이어져야죠. 빠르면 5년, 길면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죠. 시스템이 잘 만들어지면 산업보건분야에서도 아주 획기적으로 활용될 겁니다. 현재 산업보건은 건강검진을 제공하는 수준인데, 미병관리시스템을 통해 근로자가 평상시 좋은 컨디션으로 일하며 조퇴·결근 덜 하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성공하면 한의사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프로젝트입니다.”
현재 이 원장이 티테라피에서 진행하고 있는 강연 등도 주로 몸과 미병에 대한 것들이 주제다. 그는 “서양의학적 관점에서의 몸은 의사의 힘을 빌어야 관리가 가능한 경우가 많지만 한의학적 관점의 몸은 스스로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동북아시아 살았던 옛날 사람들은 수 천 년 동안 끊임없는 몸 관찰을 통해서 몸을 이해하는 방법인 다양한 몸 이야기와 몸을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인 양생법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수천년을 이어온 몸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 축적된 한의학은 ‘몸에 대한 사실에 기반한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에서 위대한 학문”이라며 “이런 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몸을 이해하는 방법과 몸을 위로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현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보급해주고 싶다”고 강조했다.